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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4장 박 넝쿨에 갇힌 요나

LNCK 2025. 4. 14. 11:4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요나서

박넝쿨에 갇힌 요나 | 요나 4:5-8 |25.1.16 - YouTube

 

박 넝쿨에 갇힌 요나            욘4:5~8                    2025.01.16.          

요나서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히 하나님이 요나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우리가 잘 볼 수 있죠. 

하나님이 한 개인에게 어떻게 개입 하시고, 또 어떻게 관여하시고, 
어떻게 그를 이끌어 가시는지, 
또 이방 민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또 특히 요나를 통하여, '나'라는 존재를 더 들여다 보게 되죠.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요나를 신앙의 모델로 보기보다는, 요나의 부족한 부분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고, 또 배우게 합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과 요나는 매우 밀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추격 하시는데, 근접 추격하시죠. 

그리고 요나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순종 합니다. 그런데 순종하면서 절망합니다. 그 절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 있는 이 괴리, 
아마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내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괴리가 있는 거죠. 그 간극.

요나는 순종합니다. 그러나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그러면서 요나의 인생은 계속 흔들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요나의 인생에 방향타를 딱 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한 눈을 파실 수 없을 만큼, 요나는 하찮은 순간에 옆길로 새고,
또 자기 고집도 세우고, 토라 지기도 잘 하고, 수만 틀리면 '나 죽는다' 그러고... 
웬만하면 그냥 내버려 둘 만도 한데,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 하나님은 분노하는 요나와 분노로 맞대응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화를 내면, 부모가 혼을 내거나 '화를 내면 안 돼' 하고 따끔하게 말하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세요. '네가 화를 내는 게 옳으니?' 이렇게 묻는 거죠. 4:4 
요나 자신이 그 문제에 직접 직면하게 하십니다. 

요나서에서 '성내다. 노하다' 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옵니다. 
무엇을 의미하죠?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분노하는 거죠.
요나는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안 되니까, 분노를 표출합니다. 

하나님은 왜 요나가 화를 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계속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가 화를 내어도 하나님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분노만 하는 게 아닙니다. 죽고 싶다고 호소합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4:3

자세히 보면 요나는 하나님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고, 나 죽겠다고 그러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가버립니다.

또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질문 하는데, 요나는 대답을 잘 안 합니다. 4:4
이 요나는 참 다루기가 만만치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하나님'이야말로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빨리 잊습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는 온데 간데 없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내가 왜 여기 왔느냐?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두 번째 주어진 기회에, 그가 보인 행동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어찌 요나 뿐이겠습니까? 
이 요나를 보면서, 회개하고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이전에,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었습니다. 

요나는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끊임없는 밀당을 합니다. 
그리고 순종과 불순종을 오고 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박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도망을 가지만, 멀리 가지 못합니다. 
자, 본문 5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요나가 니느웨 성을 나갔어요. 마치 화가 나가지고, 집을 뛰쳐 나가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이 요나의 행동이 상상이 좀 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4:4절에서 '네가 성을 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은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요나는, 니느웨 성 바깥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사역이 끝이 났습니다. 너무 짧은 헌신입니다. 

요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하고 싶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마음이 떠나 버렸어요. 
당분간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때가 혹시 없었습니까? 
기도도 좀 쉬고 싶고, 봉사도 당분간 쉬고 싶고, 예배는 빠질 수는 없으니까 오긴 했는데, 
저 뒤쪽 기둥 뒤에 앉아 있고...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그냥 예배당에서 멍 때리고 있는 거예요. 

찬양을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아요. '다 싫어.. 다 귀찮아'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리 썩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요. 

사역을 하다가 도중 하차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때는 임원도 하고, 회장도 하고, 부회장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떠났어요. 영적으로 바닥을 쳤습니다. 
믿음을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근데 좌우지간 지금은 아닙니다. 

요나는 지금 사역지를 벗어나 있습니다. 성읍을 나갔다는 거죠. 
근데 사실 요나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돌아온 이후부터, 요나는 그 성에 가장 필요한 존재입니다. 
진짜 사역이 시작될 때입니다. 근데 그가 그 성읍에서 나와 버렸어요. 

▲여러분, 사역을 하다 보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근데 그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힘들어도 소명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그 부르심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지, 도망을 가면 안 돼요. 끝까지 가야 합니다. 

 

소명은 직업과 다릅니다. 직업은 은퇴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은 은퇴가 없습니다. 
소명은 성공과 실패라는 게 없습니다. 
부르신 자리에 계속 있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부르신 분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부르신 분이 있으니까, 소명이 있는 겁니다. 
그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나를 부르셨다... 그 부름은 어떤 직장이나 직업으로의 부름이 아니고, 
내 존재를 불러내신 겁니다. 하나님이, 

내 존재 전체를 불러 내신 겁니다. 
그래서 내 존재가 끝날 때까지 그 소명은 따라다니는 겁니다. 
소명을 거부하면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소명은 하나님이 정리 하십니다. 자진 사태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야 돼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있어야 돼요. 

나는 포기 해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그 일을 위해서 불렀다'는 거죠. 

자, 요나가 니느웨 성을 나가버리는 이 장면은 
요나가 다시스로 가던 때와 오버랩 돼요.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그 길을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던 그 때가 연상되는 겁니다. 
다시 재연 되는 것 같아요.

요나의 본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요. 
그는 언제나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내 권리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아실현, 그걸 하나님이 도와 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요나는 자기 주관이 뚜렷합니다. 근데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늘 확인하는 것은, 
이게 인간의 모습이에요. 요나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늘 자기의 갈 길을 가려고 합니다. 죄인의 특성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정확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다시스로 가는 배는 언제나 대기하고 있습니다. 
욥바 항구는, 다시스 행 호객 행위로 가득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서도 탈주극을 또 벌입니다. 니느웨 성을 벗어나버린 것이죠.
본래 출발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니느웨에 와서도, 니느웨로부터 탈출하고 있습니다. 

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자, 그는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랬어요. 
거기서 요나는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 

여기에 눈에 거슬리는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자기를 위하여' 
선지자에게 왠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모습, 
육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습, 더 이상 니느웨를 위한 사역은 없다는 거죠. 
이제는 자기 삶을 위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어.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를 위하여 살거야!' 

'내가 나를 위하여' 선물을 해서, 여행도 가고, 가방도 사 주고, 
'내가 나를 위하여' 나를 칭찬 해!

여러분, 이 초막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주님에게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뜬금 없는 얘기를 합니다. 

지금 초막을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근데 베드로는 이 구름 위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손을 붙잡고, 산을 내려 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초막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초막을 지은 요나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나를 죽여달라고' 때를 썼던 사람입니다. 

근데 지금은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있습니다. 햇볕 가리개용 입니다.
이건 마치 어떤 사람이 자살 소동을 벌이다가, 갑자기 외출을 하더니, 
어디 가나 보니까 공인중개사를 찾아가서, 새 집을 계약하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하하

요나가 죽겠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4:3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을 향한 선동적인 시위에 불과했습니다. 

자, 천막을 세운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보려고' 그랬습니다. :5

요나는 니느웨 성을 빠져 나왔지만,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니느웨에 대한 그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 니느웨가 망하는 것! 

그는 확고합니다. 요나는 뿔이 나 있습니다. 
'왜 그 성을 하나님은 그대로 두셨는지...' 

요나는 지금 다른 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 하나에 꽂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관망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거죠. 
아직도 어떤 기대감이 남아 있습니다. 니느웨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 
니느웨에 회개가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거죠. 

회개가 있었어도, 하나님은 처벌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혹시 누가 아느냐?' 요나는 막연한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혹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니느웨를 심판 하실지 모른다...' 

요나는 그동안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신 분이라면, 저 악독으로 가득한 니느웨는 살려두시면 안 되지...'

그러나 지금 요나는 니느웨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모든 게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도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서 빠져나온 것도 아닙니다. 
엉거주춤 그 성을 관망하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는 안 나오는데, 교회 소식은 다 꿰뚫고 있습니다. 
유튜브로 설교도 돕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교인들 동정란도 다 확인합니다. 

가끔 교회 주변에 와서 슬쩍 건물을 보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몰래 훔쳐 보는 것입니다. 관심은 있어요. 그러나 흥미까지는 아니에요. 
멀리서 쳐다보고만 지냅니다. 

관중석에서도, 경기장(필드)으로 부터 가급적 먼 쪽에 앉아 있습니다. 
직접 경기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관중석에 앉아서 관전 평에 재미를 들입니다. 
사역의 일선에 들어가기 싫어하고, 그냥 교회만 다니는 정도로 만족하고,
깊이 관여하는 건 노 땡큐 합니다. 
'참여는 상황에 따라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합니다. 
여러분, 관중석이 재미있긴 하지만, 진짜는 경기장 안입니다. 

요나는 지금 멀리서 관망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자 초막을 만든 요나의 심리 상태는 무엇입니까? 

지금 요나는 매우 불안합니다. 자기만의 피난처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을 원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 자기 방에 문을 걸어 잠금니다. 
나의 사적 공간을 침해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죠. 

이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할수록, 더 불안해 집니다. 
요나는 초막에서 성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이미 니느웨에 일어난 대대적인 회개운동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결론이 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는 아직 미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미련의 뿌리는 너무도 깊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종교적 독선을 만들어 내는 거죠. 여러분 독선이 참 무서운 겁니다. 
독선은 정말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그 독선에 종교의 힘까지 결합이 되면, 철벽이 됩니다. 
이 니느웨를 향한 뿌리 깊은 증오심, 이 증오심의 감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다. 
여러분, 우리는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감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이성 위에 군림합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경도가 되면, 그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뇌가 무서운 거예요. 이단들도 그렇습니다. 극단적인 쪽으로 치우쳐 버렸어요. 
세뇌 교육을 받으면 뇌 구조가 바뀝니다. 관점이 굳어져 버립니다. 

다른 사고를 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아무리 다른 면으로 보려고 해도, 그게 안 돼요. 
결론은 똑같아요. 이 정도 되면, 하나님도 바꾸기 힘든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꿀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그 인격을, 어떻게 하나님이 다루시는가요? 

억지로 하면 깨어지는 거죠. 하나님이 요나를 달래십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예요. 

요나서의 결론은 성경에 안 나와요. 
요나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도 않아요.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 한 사람을 위하여 온갖 것을 다 동원 하시죠.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을 드리십니다. 

참, 사람이 그냥 자라지 않는다는 것, 
그냥 제대로 성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들도 보면, 얼마나 달래고 혼을 내고, 달래고 혼을 내고... 하기를 반복합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인거죠.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서 중에서 제일 재밌는 대목이 이제 나왔어요.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셨다는 거예요. 

이게 정확하게는 뭔지 모르지만, 박넝쿨 이에요. 박 종류, 그러니까 줄기식물 이죠. 
아주 입사귀가 아주 넓고, 빨리 자라는..
이 식물이 뭐 하룻밤 사이에 막 자라나 그늘을 만들어 준 거죠. 

중동 지방은 뜨거울 때는, 낮에 50도 정도 올라갑니다. 
건조해서 그렇게 덥지는 않는데, 그래도 기온이 50도면 완전 땡볕이죠.
빨래도 한 두 시간이면, 금방 말라버립니다.

그런 곳에 그늘이 있으면, 어마어마한 보호를 받는 거죠. 
자 여러분!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박넝쿨을 예비하사'
'예비하다'는 단어도 요나서에서 눈에 띄는, 자주 나오는 단어예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거죠.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서, 박넝쿨을 직접 심으시고 자라게 빨리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소환해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물고기든, 하늘의 새든...
하나님은 사람도, 뭐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바람을 풀게도 하시고, 바람의 세기 조정도 하시고, 바람의 방향도 바꿀 수 있고, 
식물의 성장 속도도 통제 하시고... 모든 게 가능하신 분이죠. 

요나는 자기가 직접 초막을 지었어요. 자기가 짓지 않아도 하나님은 더 좋은 초막을 
지을 수 있는데, 그가 지은 초막은 어설프죠. 금방 무너지고, 그를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이 박넝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마 요나는 그게 어디로부터 온 것인 줄 몰랐겠죠.
좋은 걸 누리지만, 그게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하나님의 박넝쿨이,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잠시 그늘에 피하게 하고, 여유를 가지게 하는 은혜! 
이 '박넝쿨의 은혜'가 있습니다. 

자, 이걸로 인하여, 오래간만에 요나의 얼굴이 확 퍼졌습니다. 
요나서에서 이렇게 밝은 얼굴은 처음입니다. 
요나에게서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잠시입니다. 

◑4: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하나님은 재밌는 분이시죠. 이튿날 새벽에, 그 방넝쿨을 벌레가 갈아먹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시 준비하신 건 뭐죠? 벌레 예요. 
그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어버린 거예요. 시들어 버린 거예요. 

'벌레' 라는 말은, 좀 기분이 좋지 않은 등장이죠. 
박넝쿨은 좀 괜찮은데, 벌레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어요. 

분명한 것은 그 벌레가, 박넝쿨을 갈아 먹으니까, 요나는 금방 기쁨이 사라져 버린 거예요. 
하루 만의 기쁨! 

상황에 따라 지금 요나의 감정이 오락가락 하는 겁니다. 
요나의 감정이 얼마나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늘이 좀 생기니까 좋아했다가
또 그게 사라지니까 요나는 화가 났어요. 

동풍이 막 불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
벌레 때문에 우울해져요. 참 불안정한 사람이에요. 

요나는 지금 작은 식물의 변화에 촉각이 곤두 서 있습니다. 
식물이 만들어 내는 그 작은 그늘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벌레로 인해서, 그 잎사귀가 자꾸 마르니까, 그늘이 줄어들잖아요... 
조금 몸을 피하다가, 또 더 갉아먹으니까...
이 벌레로 인해 그늘이 줄어드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 하나 추스리고 힘들어 하는 상황, 
지금 요나에게는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구원... 이런 것은 너무 큰 담론이에요. 

요나는 전적으로 자신의 몸을 가려주는 식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좁아질 때로 좁아져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일상에서 주어지는 기쁨이나 위로는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 힘들어져요. 

여러분의 인생에, 기쁨이 오기도 하고, 슬픈 일도 오고, 
좋은 일도 있고, 안 좋은 일도 오고... 
뭐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그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 내 기분은 업앤 다운을 계속하는 거예요. 
우리 초점은 상황을 다스리는 하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면... 기쁜 날도 기쁜 거고, 실패가 와도 
그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면, 매 순간 혼란 속에 있는 거죠. 

요나는 지금 '그늘 그늘... 왜 그늘이 이렇게 줄어드는 거야? 이 벌레는 어디서 생긴 거야?' 
햇볕을 가려 주던 박넝쿨 그늘이 사라져 버렸어요.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고,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주실 때는 언제고, 다시 빼앗아 가시는지...
야속하게 느껴지는 거죠. 

하나님도 요나처럼 속이 그렇게 좁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죠. 
벌레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박넝쿨보다 벌레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벌레를 보내십니다. 벌레를 통하여 우리가 깨닫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벌레를 통하여 요나의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셔서, 요나에게 메시지를 주시죠. 

하나님은 태양, 바람, 물고기, 식물, 벌레... 
때로는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통해서, 
때로는 아주 작은 벌레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언제 시청각 교재를 많이 씁니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일수록, 시청각 교재가 많습니다. 

유치부까지는 시청각 교재가 많아요. 클수록 시청각 교재는 점점 없어집니다. 
책을 보면, 그림이 별로 없어지고, 점점점 글이 많아지죠. 

시청각 교재가 많은 것은... 유치원 수준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1:1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그 말씀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말씀으로 충분해요. 

그런데 그 말씀을 못 알아들으면, 하나님은 많은 걸 동원 하셔야 돼요.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별별 것을 이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강아지가 멍멍 하는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뭘 알려주시는 게 있어요. 
어떤 때는 아이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세요. 
키우는 식물을 통해서도 말씀하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아들을 때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좀 못 알아들으면, 좀 크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못 알아들으면, 확성기를 사용 하십니다. 그 확성기가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파멸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길이 보입니다. 
다시 요나의 반응이 나옵니다.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또 다시 '예비'가 나오죠. 하나님이 다른 교재인 '뜨거운 동풍'이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초막을 가려줄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자, 햇볕을 가려 주지 못하죠. 
요나의 머리가 뜨거운 태양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이 중동의 태양은, 자칫하면 화상을 당합니다. 
그러나 박넝쿨의 그늘은 일시적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무엇을 가르켜 주고자 합니까?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거죠. 
다른 것들은 다 일시적인 거예요. 

이 세상에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들이 많아요. 근데 다 일시적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어떤 상황이나 조건과 상관없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가 이 '작은 기쁨', 요즘 말로 소확행 이라고 그러죠. *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걸 누렸어요. 근데 그게 잠이 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 

요나는 혼비해졌습니다. 그는 죽기를 구합니다. 뭐 때문입니까? 
박넝쿨이 시들고 그늘이 사라지자, 왕짜증을 내는 겁니다. 

여러분, 선지자의 입에서 '죽는다'는 말이 이렇게 자주 나올 수가 있습니까? 
성을 냈다가... 웃다가... 다시 죽여 달라고 그러고...  4:3, 8

'죽는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입술에 달려 있습니다. 이건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살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만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다른 사람을 살려내야 할 사람이, 죽고 싶다는 거예요. 
그는 생명을 포기할 준비를 늘 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삶은 길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박넝쿨과 벌레를 통해서 요나를 레슨 하십니다. 요나가 깨닫기 원하십니다. 

요나가 명색이 선지자 입니다. 그렇다면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 하시려고 하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질문해 봐야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이 왜 박넝쿨을 통하여 그늘을 허락 하셨는지? 
그리고 그 박넝쿨에 벌레를 왜 보내셨는지?'

그냥 일어난 상황에 즉각적인 반응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우연 이겠지...' 이게 아니고, 
힘들면 화만 내는 게 아니고... 

요나는 지금 그 남은 작은 그늘 아래서 
그냥 몸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막 화만 내고 있는 거죠. 
얼마나 안쓰러운 모습입니까! 

그거를 통하여 하나님이 뭘 말씀하시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화만 내고 있습니다. 
'이게 뭐지?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내게 말씀 하시려고 하시는지?' 
분명히 주님은 지금 이 박넝쿨을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순종은 누가하는 겁니까?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경청에서 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듣기, 듣는 기도>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광풍이 불어 닥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일어난 풍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불신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잠을 쿨쿨 자고 있었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려고 하는 거죠. 
우리가 해독 능력만 있다면, 더 많은 걸 보여 주시길 원하십니다.

근데 악한 시대는 표적(기적)만을 구한다는 거예요. 
더 악하고 패역한 시대는, 표적을 보여줘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라도 요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요나를 좀 깨닫게 하려고 하십니다. 

근데 요나는 여전히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자아가 너무 강해요. 
너무 고집이 세요.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 시켜 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요나에게는 시청각 교재도 큰 도움이 안 돼요. 
광풍이 이는 배에서도, 그는 깊은 잠에 빠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았어요.
제비 뽑기에 걸리고, 바다 속에 던져지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지금 박넝쿨과 벌레도...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더디 깨닫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기도 하세요. 
'하나님! 잘 깨닫는 은혜를 주십시오. 가급적 빨리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후회는 다 그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후회는 '왜 내가 그때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해요. 

내가 그때 제대로 깨달았더라면, 오늘의 후회가 없는 거예요. 
오늘의 나의 후회는 과거 그때 못 깨달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은 미련해서, 뒤디 깨닫는 겁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못 깨달아요.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나 열심을 강조해요. 
아니에요. 여러분, 열심을 잠깐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듣는 것에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언제 우리가 위험한 순간에 빠집니까? 열심 부족? ... 아닙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이 없어서 문제 된 게 없어요. 반대로 열심이 너무 많아가지고 교회가 깨져요. 

열심이 너무 많아서 시험에 들어요. 열심이 너무 오바 해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잘못된 열심... 그 원인이 뭐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음성을 듣지 않는 거죠.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 가운데 매 교회마다 하나님이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 하시는 방식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 모릅니다. 
그 분이 얼마나 크신지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을 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내 개인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내 마음에 안 들어요. 
하나님의 일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요나는 좌충우돌 입니다. 하나님과 의사 소통이 안 돼요.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하나님과 의사 소통이 안 돼요. 
여러분, 성을 팍팍 내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수가 틀리면 '나 죽겠다'고 그러는 사람하고도 대화가 안 됩니다. 

'너 왜 그렇게 성을 내냐? 성을 내는 게 옳으냐?' 물으면 
대답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여러분 요나서를 읽어 보세요. 요나의 대답이 없습니다. 
문을 팍 차고 나갑니다. 약간 사춘기 같아요. 

안타까운 것은, 요나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 웨이로 가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기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니,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요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요나를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요나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 라는 한 사람을 양육하고 돌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가 선지자로서,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는 하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의 목회하시는 양은 요나였습니다.
하나님은 까다로운 한 영혼인 요나를 다루시며, 그를 데리고 가시며 
인내 하시고 포기하지 않고, 그를 끝까지 근접 추격 하시고, 
그의 인생의 방향타를 쥐시고, 흔들리는 요나를 끝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요나를 통하여 배울 것이 참 많습니다. 
요나를 통하여 우리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조금 더 배우게 됩니다. 

이 요나서를 통하여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초에 여러분들이 그런 열망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하소서!'

왜 요나가,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가되, 순순히, 기꺼이 즐겁게 따라가는 하나님의 양떼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5년 초에, 우리 안에 요나의 그 모습을 
우리가 발견하고, 요나의 그 연약함을 극복해 내는 노력이,
금년 한 해 동안 우리 안에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신년 특새 3주간의 여정, 이제 내일 결론을 내립니다.
이제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연초에 특새를 하는 것은 
우리의 한해 방향을 잡는 거거든요. 우리 신앙 전체를 돌아봐야 돼요. 

요나서 통하여 내 신앙 전반을 한 번 살펴보고 
내 안에 있는 '나에게 발견되어지는 요나의 모습'
그걸 가지고 좀 씨름을 하면서 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지금 막 말씀을 받은 분들이 있을 거고,  1:1
어떤 분은 지금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배 밑창에서 자려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물고기 배 속에 지금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토해 내어져 나온 사람도 있고, 
나와가지고 지금 막 사역을 다시 시작하는 분도 있고... 
사역을 마치고 지금 막 화가 나 있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들이 다 있을 수 있어요. 

요나의 생애 전반에 있는 그 모습 가운데서, 어느 지정을 내가 있는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얼렁뚱땅 대충 신앙 생활을 하면, 우리는 표류하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 들은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