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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4장 하나님 앞에서

LNCK 2025. 4. 15. 10: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두려움>

2022 03 06 주일 2부 말씀 / 사도행전 강해 (19) /  하나님 앞에서 - YouTube

 

◈하나님 앞에서            행4:13~22             2022.03.06.      

◑도입

오늘 본문은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도들이 처음으로 핍박을 받는 장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이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자치기구 법정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서다'
이게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행4장의 타이틀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들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느냐? 
앞에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의술로 고쳐준 게 아니었죠. 인공관절 수술을 했거나, 로봇 다리를 시술해서 
고쳐준 게 아닙니다. 병원에서 고쳤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겠죠.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어요.

4:7절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물어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구약의 시118편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그러니 누구든지 그분 위에 세워지지 아니하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결론을 하나 내렸었죠. 

그 결론이 12절 말씀이었는데,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이 문제가 되었던 거죠. 그래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공회원들의 반응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반응이 13절에 나오는데요. 

◑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이상히 여기며'

공회원들이 '이상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보면 '놀라다, 경탄하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굉장히 놀라고 경탄을 했던 거죠. 

왜냐하면 이들은 베드로를 '학문 없는 베드로가 범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학문 없는' 이란, 영어로는 uneducated, '교육받지 못한' 이라는 뜻입니다. 

또 '범인'이란, 범죄자란 뜻이 아니고, ordinary men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이들이 여태까지 베드로를 어떻게 이해한 거죠? 
교육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그 당시 랍비 교육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신학 대학원 같은 공식적인 신학 교육을 말합니다. 

사도들은 랍비 학교에서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들의 직업은 한낱 어부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시골 갈릴리 사람이었고요. 그러니 랍비 교육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겠죠. 

더군다나 이 당시는 구약 성경만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 성경을 집집마다 가지고 있었던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이야 인쇄술이 발달돼서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인쇄술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구약 성경을 집집마다 가질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닙니다. 
누구나 지금처럼 원하는 대로 구약을 읽을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구약 성경을 접할 수 있었느냐? 
안식일날에 회당을 가서야만, 필사된 구약 성경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회당에 가서도, 구약 성경을 직접 펴서 읽어보는 게 아니라 
랍비 교육을 받은 서기관들이 대표로 읽어주었습니다. 그러니 귀로만 들었던 거죠.

그러니까 구약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은, 랍비들만 가능했던 시대입니다. 
그 중에서도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들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구약 성경을 탁월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 118편에 나오는 '모퉁이 돌'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구약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의 해석은, 그 당시에 아무나 할 수 있는 해석이 아닙니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해석이 아닙니다. 
굉장히 탁월한 해석이죠.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이런 해석은 처음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는 거죠.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b
이상이 여겼는데 생각해 보니 이들은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들입니다. 
'아, 얘네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구나. 예수님한테 성경 해석을 배웠었구나. 
그래서 이들이 성경 주해를 탁월하게 하는구나' 아마 이렇게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병 나은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공회원들도 이 병나은 사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성전 앞을 지나다니면서 이 앉은뱅이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고침을 받고, 멀쩡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기적 자체를 부인할 수가 없었겠죠. 

베드로와 요한이 사기를 친 건 아닌 거죠. 
자기들이 생각해도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사도들을 비난할 말이 딱히 없는 겁니다. 
사도들의 말씀에 권위가 있죠. 그리고 기적의 증인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을 붙잡긴 했는데, 더 이상 추궁할 말이 없는 겁니다. 
사도들을 잡아서 (얼마 전의 예수처럼) 죽이고는 싶은데, 죽일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들은 일단 사도들을 공회 밖으로 내보냅니다. :15
그리고 나서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는데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회의를 하는 거죠. 

근데 아무리 고민해도 죽일만한 명분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논리로는 상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워낙 성경 해석을 잘 하니까, 성경을 가지고는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사도들이 고친 앉은뱅이, 눈에 보이는 기적을 부인할 수가 없는 거죠. 
더군다나 이 기적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을 지금 열렬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4:4절에 보면, 이들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만 약 5천명이 넘었습니다. 
그것도 남자만 5천명이 넘었습니다. 여자까지 포함하면 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20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 놀라운 표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을 쉽게 죽이지 못하는 거죠. 

만약 사도들을 죽이면, 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역풍이 불었겠죠. 
몰래 잡아서 죽이지 않는 한, 당장 이들을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공의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위협해서 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사도들에게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합니다.'  
원래 유대인의 율법에는, 불법을 행했을 때, 죄인에게 경고를 주고 풀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또다시 저지르면, 두 번째부터는 채찍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위협은 일종의 협박이었던 거죠. 
'또다시 예수의 이름을 전하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는 
협박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이들의 협박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말하는데요. 19절을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러분, 이 사도들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이들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위협에도 전혀 겁먹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를 죽였고, 또한 자신들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권세자들의 위협 앞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20절에서 이렇게 쇄기를 박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여러분, 이 말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심기가 어땠을까요? 
아마 당장이라도 이 사도들을 감옥에 쳐넣고,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지금으로서는 죽일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들을 위협하고, 결국에는 이들을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21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바로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오늘 처음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공회 앞에 직접 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베드로는, 거기까지 좇아와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요18:12~13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여러분 예수님을 재판했던 대제사장이 누구이죠?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미 베드로도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15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요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자리에 누구도 있죠? 지금 베드로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첫 번째 부인하는 장면이 그 바로 밑에 17절인데요. 
'문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7

두 번째 부인하는 장면이 25절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5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인하는 장면이 27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27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부인을 했을까요? 
그것도 세 번이나. 
예수님과 같이 잡혀서 죽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자신의 목숨을 잃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싶어했던, 예수님을 좇아다니면서, 자신이 얻고 싶어했던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권력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그 자리가 그 구체적인 자리가 어디였죠? 
불과 50일 전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앞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재판을 받고 있는 자리가 어디죠? 
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여러분, 베드로가 지금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주1) '강추'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자리에, 본문의 베드로가 지금 다시 서 있는 것입니다.

약 50일 전과 똑같은 대제사장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두려워했던 세상의 권력자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베드로는, 예전처럼 목숨과 권력과 명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베드로는, 예수님을 전처럼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죠? 

'우리는 보고 들은 예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왜 입니까? 그 이유가 19절에 나오는데요.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기 보면 중요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지금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앞에 서 있습니다. *in the presence of God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다고 말하죠?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다고 말하죠?
'하나님 앞에서' 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두려워한 대상은, 더 이상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었던 거죠. 
그들이 지금 두려워하는 대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거죠. 

세상의 권력자를 두려워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에게는 진짜 두려워할 참된 대상이 새롭게 생겼습니다. 

바로 살아계셔서, 지금도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셨지요.
비록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더 선명하게,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니 눈에 보이는 사람들 배후에서, 지금도 당신의 뜻대로 
모든 만물을 섭리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베드로에게는 새로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어떠한 위협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짜 두려워할 참된 두려움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이제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행2장에 성령충만을 받고나서부터

그리고 그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다시 살리신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님과 같이, 예수를 믿는 자기 또한, 죽음에서 살리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라는 그 믿음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두려움이, 다른 거짓 두려움들을 압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떨며 즐거워하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신자들을 두려움에서 해방하는 동시에 
두려움을 주는 기이한 역설 임을 우리가 기뻐하기를 바란다. 

복음은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며, 
대신에 한 가지, 가장 기쁘고 행복하며 놀라운 두려움, 
즉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두려움을 준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먼저 복음은, 전에 우리가 두려워했던 대상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건강을 잃을까봐... 또 직장을 잃을까봐... 내 뜻대로 되지 않을까봐... 
사업에 문제가 생길까봐... 자식이 어긋날까봐...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을까봐...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을 더욱 간절히 원할수록 
그리고 그것을 가질수록 평안을 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상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돈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려워 한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것을 잃을까봐...

권력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권력을 얻고 가진 후에는 이제 평안해야 되는데,
한편으로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잃을까봐...

건강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하고 두려워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 생명을 잃을까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두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신자들을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에게 한 가지 두려움, 즉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두려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두려움은, 우리를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두려움이, 다른 모든 두려움을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두려움을 가라앉혀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 섰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죠.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이 위협하는 두려움에 더 이상 굴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이클 리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모든 두려움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 
여러분 기가 막힌 통찰력 아닙니까? 

여러분 실제로, 반대로 우리가 언제 두려움에 빠지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사라질 때, 세상의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뭔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우리가 품은 두려움의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면, 
그곳에서 분명히 언제나 자신의 불신앙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8:26
믿음이 작을수록 우리는 더 큰 두려움을 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은, 이처럼 불신앙을 통해 자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신앙은, 그 두려움을 통해 강화가 되는 거죠.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결국 그 뿌리에는, 두려움의 합당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우리의 두려움은, 믿음과 대면할 때 시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통해 풍성한 양분을 얻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이 무엇이냐? 마이클 리브스가 말한 것처럼 
복음은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며, 
대신에 한 가지 가장 기쁘고, 행복하며, 놀라운 두려움 
즉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질 때, 세상이 주는 모든 두려움을 해독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둘 중에 하나인 거죠.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냐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보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에게 더 크게 들리는 데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면 혹시나 망할까 봐, 뭘 잃을까봐, 
세상이 주는 위협 앞에서, 여러분 우리가 굴복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의 위협 앞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달라진 것은,  삶의 여건이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실패했던 그 자리에, 주님은 베드로를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여, 삶의 여건이나 환경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화답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해서 도망간 자리로 
주님은 다시, 베드로 처럼, 여러분들을 그 자리에 세우십니다. 
그 자리는 지나 한 주간 여러분이 부딪히고 살아왔던 삶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 자리로 다시 주님은 여러분을 보내십니다. 

그곳에서 다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물론 이번 한 주간도, 세상은 여러분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에게 찾아온 것은, 세상의 환대가 아닌, 위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요. 바로 '위협'이라는 단어입니다. 
17절에 '그들을 위협하여' 
18절에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21절에 '다시 위협하여' 
세상은 끊임없이 믿는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협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위협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타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베드로와 같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 :20
이 고백으로 신앙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19

이 믿음의 고백으로, 여러분을 위협하는 세상의 소리를 말씀의 소리로 잠재우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를 위협하되,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그러기 위해서 본문 19절의 표현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라는 표현입니다. in the presence of God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두려움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뒤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는, 그 뒤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기쁠 때나, 우리가 힘들 때나, 건강할 때나, 때로는 건강을 잃을 때나,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죠? 
눈에 보이는 대상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in the presence of God 섰던 마르틴 루터

독일의 유서 깊은 고도 보름스(Worms)에 가보면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재판하고자 열렸던 소위 '보름스 국회'가 지금도 있고, 
루터가 서서 하늘을 향하여 "주여, 내가 여기 섰습니다(Here I stand)."하고 
기도했다고 하는 그 자리에 땅에다가 표시를 해놓았는데 
그 집은 500년 전이니까 지금은 무너져 없고, 옆에 다른 성당을 지어놓았습니다. 

루터가 섰던 그곳에 내가 서서, 루터의 음성이 들리는 듯 귀를 기울여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루터가 거기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대답했던 말은 아주 유명합니다. 

교황의 명령에 따라서 독일의 선제후가 루터를 끌어다가 보름스 의회에 소환합니다. 
루터의 측근들은, 모두 말립니다. 거기에 가면 바로 붙잡혀서 죽는다고요...
그렇지만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출석합니다.

선제후와 가톨릭 추기경은 협박하기를 "네가 그 동안 쓴 책을 다 소각하여 없애고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법을 따르겠느냐?" 합니다. 

그 때에 루터가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오류가 지적되지 않는 한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나의 양심은 이미 성경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양심의 지시하는 바를 역행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내 양심에 따라서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성경이 말씀하는 데야 나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를 도우소서!"

만약 마르틴 루터가 거기에 굴복했다면, 종교개혁의 불은 꺼졌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없는 거죠.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독일 선제후(영주들의 대표, 왕)와 가톨릭 교회에 맞섰고,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된 용기는 그 신앙과 양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길을 가셨습니다. 바울도 이 길을 갔습니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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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행4: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위 구절에 나오는 이들은 다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대제사장 그룹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서열 넘버 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에는 왕이 없었고, 로마인 총독만 있었습니다. 
당시는 유대에 왕직을 누가 대신했느냐? 바로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 넘버원 권력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 곳이 산헤드린 공회였죠. 
자치 정부 역할을 했던 곳이 산헤드린 공회였습니다.

이 공회의 의장직을 누가 맡았느냐?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의 권력이 어마어마 했겠죠. 

자 그런데 대제사장은, 정치적인 권력만 가진게 아니었습니다. 
종교적 권리도 같이 갖고 있었습니다. 제정일치 사회였죠.
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바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대제사장들도 사두개인 출신들이었습니다. 거기만 자격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두개인들은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자 그런데 위 구절에 '대제사장 그룹'이 재판을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한 대제사장들의 명단이 6절에 나오는데요. 
먼저 안나스가 나오고, 그 다음에 가야바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요한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다 한 집안 식구입니다.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 : 이 사람의 사위가 가야바입니다.
뒤에 나오는 요한은 안나스의 아들입니다. 그는 가야바 다음으로 대제사장 직에 올랐죠.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알렉산더는, 누구인지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안나스 → 가야바 → 요한(또는 요나단) 으로 대제사장 직이 승계되었는데,
안나스 → 그의 사위 가야바 → 안나스의 아들 요한 ... 이렇게 승계된 것입니다.
실제로 다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안인 거죠. 이들이 돌아가면서 대제사장 직을 맡았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님을 심문한 자들이죠. 요한은 AD 36년부터 대제사장)

먼저는 안나스가 대제사장을 맡았는데요. 
원래 구약의 대제사장직은 종신형입니다. 한번 대제사장은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이었죠.

그런데 로마가 어떤 이유로, 중간에 대제사장 안나스를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 안나스라는 사람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전방위 로비를 펼쳤습니다. 
모든 인맥과 자원을 동원해서, 여러 방면으로 동시에 로비를 펼쳤습니다. 

그 결과 다음 대제사장이 누가 되었느냐? 자신의 사위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가야바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이 장인에게서 사위에게 대물림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막상 실세는, 가야바가 아니라 안나스였습니다. 
안나스가 뒤에서 사위였던 가야바를 조종했던 거죠. 

그리고 가야바를 이어서, 안나스의 아들 요한이 대제사장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안나스의 아들이 4명이 더 있었는데요. 
그 4명이 연달아 대제사장직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안나스가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거죠. 한 집안이 다 대제사장 그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안나스와 가야바는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이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십니다. 
그때 잡히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전직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심문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다음에 빌라도에게 넘겨 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안나스와 가야바가 누구예요?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을 주동했던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재판을 열고, 죄를 뒤집어 씌웠던 자들입니다. 
자 그런데 그들이 이제는 동일하게, 사도들을 죽이려고 재판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행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