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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승리의 신비 고전15:50~58 2007.04.08.
※하이라이트는 후반부에 있습니다.
본문 고전15:51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비밀을 말하노니, '비밀'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신비'라고 하는 말입니다.
무스테리온 이라고 하는 단어로 영어로 번역할 때는 미스터리 mystery 라고 번역합니다.
여러분, '신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이 세상은 온통 신비로운 곳입니다.
신비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르겠다는 말이죠.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은 신비에 대한 부정적 견해입니다.
그러면 긍정적 견해는 어떨까요? 같은 신비로운 일을 놓고서도
'모르는 것뿐이지 사실은 사실이다. 그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내 경험에 없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내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일수록 더 온전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더 확실하다.'
이것이 교부 터툴리안의 말입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더 확실하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신비에 대해 말하자면, 뭐니 뭐니 해도 생명의 신비처럼 놀라운 신비는 없습니다.
요즘 뭐 생명의 신비, 이것을 파헤쳤다, 이해했다, 뭐 그런 얘기 합니다만 *DNA 지도
그건 이미 있는 것을 우리가 조금 아는 것뿐이지, 무슨 새로운 것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지요.
몰랐던 것을 조금 더 알았다는 것 뿐이에요.
아직도 무궁무진한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생명이 태어난다 할 때, 남녀관계에 있어서 정자가 5억이 출동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많은 정자 중에서 하나가 당선이 되서 생명이 된다니...
‘아, 그건 낭비가 너무 많다. 아니 5억 중에 하나라니...’
그 희한한 선택이지만 너무 너무 낭비가 많다는 생각을, 과거에 한 때 제가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리더스다이제스트를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5억이 다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불임이 많아요.
그런데 여성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남성원인 불임이 많다는 겁니다. 왜요?
이거 정자가 2억 이하로 떨어지면 불임이에요. 그러니까 3억 이상이 돼야 된대요.
이 5억이라는 정자가 나가서 난자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에, 그 모든 어려운 여건을
헤치고, 헤치고, 헤쳐 나가면, 난자 앞에 딱 섰을 때는 60개의 정자가 거기 올라간대요.
그것도 운동을 하고서 다 죽고, 마지막 하나가 딱 들어가서 난자와 만나서
여러분이 태어난 겁니다. 세상에 희한하지 않습니까? 5억이 다 필요하다는 거예요.
마치 예를 들면, 우리가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간다고 한다면,
마지막에 올라가서 깃발하나 세우고 산을 정복했다고 그렇게 외치지만
사실은 거기까지 가는 데는 수많은 사람, 수백 명의 사람이 그를 위해서 수고했어요.
첫 베이스캠프까지 갈 때는, 당나귀까지 동원돼요.
수 십 명이 수고, 수고를 다해서 올라가서, 한 명이 대표로 깃발을 꽂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5억이라는 생명이 다 희생되면서 하나를 살립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러고서야 여러분과 내가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 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생명의 신비... 그것을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어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제 손자 아이가 걸어가는 걸 봅니다.
딱 보니까 고거 날 빼닮았더라고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저게 날 닮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는 짓 보면 내가 꼭 거울을 보는 것 같아요. 이거 놀라운 신비죠, 그렇죠?
그런가 하면 성장에도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성장하게 자라나는데 한 일이 뭐 있습니까?
그저 우유 먹인 거밖에 없거든요. 젖 먹인 거밖에 없는데
그렇게, 그렇게 자라는 걸 보면... 이 또한 성장의 신비를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는 죽음도 신비입니다.
죽음 역시 우리가 참으로 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죠.
이건 형체가 사라진다는 것이지만, 중단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과 몸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또는 영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는 것입니다. 육체의 감옥에서 떠나는 것,
또 다른 말로 말하면 Next Stage, 다른 단계의 생명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변화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또 넘어서 ‘부활의 신비’.
알거나 모르거나 이건 생명 신비 차원에서 순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 사건을 특수한 기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나는 데서부터, 성장하는 데서부터, 죽음에서부터, 부활에까지
생명의 연장선에서 전부가 신비요, 이 신비 속에서 이걸 수긍해야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변화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changed’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부활, 변화 두 가지 단어를 쓰는데,
변화 쪽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부활은 변화올시다.
다시 말하면 죽음에로의 변화 - 이건 썩어지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생명에로의 변화 - 그리스도적 생명의 단계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1절에는 ‘We shall be changed,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로의 변화를 이해 못 하고 있듯이,
다음 단계인 부활에로의 변화는 더더욱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사건은 있고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리 이해는 너무 거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부활 사건이 아니라, 부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내가 알 수 있으면 (부활이) 있는 거고, 알 수 없으면 (부활이) 없다’는
그런 망언을 부리지 마세요. 엄연한 사실이에요,
내가 아는 것은, 몇 억 만 분의 일도 못 돼요.
그걸 가지고 아느니 모르느니... 믿을 수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마세요.
생명은 엄연한 것이에요. 이 부활사건은 엄연한 사실이에요.
다만 내가 얼마나 이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 과 “부활 신앙”을 구별합니다.
“부활 신앙” 다음에 “부활 이해”로 바꾸어집니다.
부활의 현실화, 부활의 윤리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메시지는 딱 세 가지예요.
첫째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고 있다.
둘째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입니다.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은사라는 것. 십자가의 이해,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그 안에서 신비로운 생명력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셋째는 부활입니다. 미안합니다만 제가 언제 한번 장례식을 했는데요,
산에 가서 하관식까지 할 때가 있었어요. 산에 가서 땅에다가 묻어놓고 마지막으로 기도하죠.
그리고 설교하는데, 그 때의 설교는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주로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에 있는 이야기, 오늘 본문이죠.
쭉 성경으로 많이 읽고 설교는 5분 정도 합니다. 그 5분 설교는 간단하죠.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헤어집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다 같이 그리스도 앞에 가서
부활한 다음에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반갑게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부끄러움 없이 서로 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랑스러운 아들, 자랑스러운 아내, 자랑스럽게 만나게 되기를 위해서 우리 힘씁시다.'
하고 하관식 설교가 끝났거든요.
그리고 내려오는데 거기에 대학 교수인 안 믿는 사람 하나 있었어요.
철저하게 안 믿는 사람이에요. 그와 같이 산에서 내려오는데,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가까이 오더니 "목사님, 제가 하나 물읍시다. 목사님, 제가 오늘 설교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진짜로 믿는구만요."
"아, 그럼 진짜로 믿지 가짜로 믿어요?"
"난, 그저 그렇거니 했지만,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믿는 줄 몰랐습니다. 아 진짜로 믿어요?"
"아, 그럼요. 진짜죠!"
그랬더니 표정이 좀 심상치 않더라고요.
그 다음 주일날 보니까 교회에 나왔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부활은 추상적 얘기가 아니에요.
내 지식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진짜로 믿는 거죠. 부활을 진짜 믿는 거예요.
자, 이 관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 사건에서 이해가 돼야 하고,
또 십자가는 부활 신앙 아래서 이해되어야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망 권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모든 가치, 도덕관, 세계관이 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종종 이런 위트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고전15:19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고전15:13~19절까지 길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설명해 나가다가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으리라." 15:13
거기에 못을 박았어요.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렇게 말해요.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예수의 부활이 있으니까, 부활은 정말 있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하는 어느 선교사가 어떻게 용케, 용케 해서
어느 부족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씨족 사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씨족제도가 강한 데서는, 추장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든지 추장 하나만 믿게 하면, 그 마을은 다 믿는 거예요.
그 외에 사람을 뭐 아무리 붙들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추장을 만나고, 도와주고, 봉사하고...
이렇게 하면서 설득을 해서 예수 믿을 단계까지 왔어요.
그래서 성경 공부를 같이 해요. 성경 공부를 하다가 보니까 쭉 읽어 나가는데
‘부활’이 나왔어요. 그래서 추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하는 말이
"선교사님, 다시 물어보는데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얘기 아닙니까?"
"아, 그렇지요."
"안돼요, 그건 안 됩니다." 그러더래요.
왜 안 되냐고 그러니까 "내가 억울하게 죽인 사람이 많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 살아나면 큰일 나죠. 부활하면 안 됩니다." 그러더래요.
여러분, 안되고 되고가 문제입니까? 부활한다니까요.
그런 줄 알고 사세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1)
▲중국의 선교사의 딸로서 「기도에 관한 편지」라고 하는 책을 쓴
아그네스 샌포드(Agnes Sanford)라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간까지도 자기감정과 욕망,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들,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느냐?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라."
그래서 '메멘토 모리' - 중세기 교부들이 많이 쓰던 말입니다.
메멘토 모리. 인사할 때도 굿모닝이 아니고 ‘메멘토 모리!’ 그랬어요.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죽는다고 생각 하십시다’ 이게 인사였어요.
왜요? 메멘토 모리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하게 되고
둘째, 나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가?
내 앞에 있는 영생을 주목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만이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은 변화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적인 변화요, 그리스도적인 변화입니다.
생명에로의 변화입니다. 생명의 다음 단계로서의 변화입니다.
소위 그리스도 스피어(sphere) - 그리스도적 단계로서의 변화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빌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요일3:2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또 하나 희한한 말씀이 있어요. "순식간에" 라고 했어요.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순식간' 이라는 말은 뭡니까? 진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연적 변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창조적 능력 가운데에 있는 ‘순식간에’
예수님의 부활이 ‘순식간에’ 되는 것처럼, 우리 앞에 있는 부활도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이걸 확실하게 알아야 되겠어요.
그리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2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의 썩을 육체가, 썩지 않는 부활체를 입는다는 뜻이죠.
빌립보 3:21절에서 강조합니다. "그가 우리를 변화케 하리라."
역시 부활체를 입는다는 뜻이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 몸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신비로운 말씀은 "입으리라" 하는 말입니다.
고전15: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put on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put on (옷 같은 것을 입다)
'덧입는다' 혹은 '삼킨바 되리라'
자 여기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에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처녀들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 약혼을 하는데요.
약혼을 하고 그 다음에 보니까 정신없어요. 약혼자 집에 왔다 갔다 하느라고 정신없어요.
결혼 준비하느라고... 그 뿐입니까?
결혼 딱 하고 나면, 수십 년 동안 살던 친정집, 그 집을 훌쩍 떠나 버립니다.
돌아오지도 않아요. 그쪽이 좋으니까.
신랑과 함께 사는 그 신혼 생활이 너무 행복할 때,
수십 년 동안 자기가 머물렀던 친정은 생각나지도 않아요.
이게 뭡니까? 행복에 과거가 흡수된 거예요.
우리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때, 썩어짐의 역사라는 것은, 그 안에 흡수되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삼킨바 되리라’ 아주 오묘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후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어느 의사가 쓴 수필에서 중요한 비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의사이면서 신앙이 돈독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생각하는 부활관은 이렇습니다.
의사이기 때문에 늘 애가 태어날 때 탯줄을 끊어요.
어머니의 탯줄을 끊는 순간,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입니다.
어머니의 탯줄과 나와 연결된 그걸 끊는 순간은,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입니다만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로 나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분은 모태가 아니라, 세태를 말합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탯줄에 매여 있다가 세상 탯줄이 끊어지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독립하고
자유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부활을 믿습니다."
그거 옳은 얘기예요. 참 귀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멈춤 The power pause」 이라는 존 하리차란 (John Harricharan)이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합니다.
"인간의 적은 가난도 질병도 전쟁도 아니다. 문제는 두려움이다. 오직 두려움이 적이다."
여러분, 이 두려움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맙시다. 두려움, 진짜 실존적인 이 무서운 종말론적인 두려움에
해결 열쇠는 부활뿐입니다. 오직 부활, 그것만이 문제의 해결입니다.
고난도 선도 의도 그리고 순교도 큰 기적도 이제 해결의 열쇠는 오직 하나, 예수 부활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을 알기에 스데반은 순교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직 부활, 이것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래서 오늘 5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오늘이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죽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모든 생활과 삶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주1)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한국교회가 구소련 지역에 가서
복음 선교를 비로소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한 한인 선교사가 부활절이 이르러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나와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옆에서 통역을 하던, 한 고려인 통역자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선교사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아까는 죽었땜에?"
구소련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도, 믿음도 아직 없었던 거죠.
그런데 선교사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설교를 하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다' 까지는 통역하는데 별로 무리가 없었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니까, 통역이 그 순간에 막혀버린 것입니다.
자기는 처음 듣는 얘기이고,
또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선교사란 양반이 말을 잘못 실수해서 말한 줄 알고,
선교사에게 되물은 것입니다. "아니, 아까는 죽었땜에?"
▲장자옥 교수님이 쓰신 「마지막 남은 생명」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그 책의 사건 하나하나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방에서 총기를 난사하다가 민간인들을 몇 사람 죽였습니다.
그 죄로 사형에 처하게 됐고,
또 한 사람은 월남전 참전 때 일시적으로 흥분을 참지 못해서 자기 동료를
죽였기 때문에 역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형 집행날짜가 가까올 때 마지막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소원은 한번 고기를 실컷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자기가 먹고 싶던 것 한번 실컷 먹고 싶다고...
그러나 누구도 그의 사정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마지막 먹고 싶던 것을 먹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사식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고...
마침내 그는 자기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선금으로 1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먹고 싶었던 고기를 먹었습니다.
실컷 먹어보려고 했는데 3만원어치 밖에는 못 먹었습니다.
그를 마주 보던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야, 그 참 맛있겠구나."
그가 대답했습니다. "맛은 무슨 맛? 내 몸뚱아리를 팔아서 먹는 건데..."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렸고, 그 후에 그는 형장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욕심을 채우겠다며 사는 것이
이 사형수가 고기 먹고 싶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을 모르고는 사실 입맛도 없는 겁니다.
아직도 입맛이 있는 것처럼...
뭐 소위 말하면 엔조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실 철없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생이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산다는 게
이 사형수가 먹고 싶은 고기 먹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상징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생 없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하찮은 일입니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얼마나 맹랑한 얘깁니까?
그런데 다른 한 사형수는 자기 친구가 이렇게 하는걸 보면서
'아이구 그거 먹으면 뭘 하나? 한 끼 먹으면 뭘 하고 안 먹으면 뭘 하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를 다 뒤져봅니다. 15,000원이 있었어요.
어느 날 교회성가대원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복도에서 찬송을 부르는걸 보았어요.
이 사형수가 나가서 15,000원을 내놓으면서
"나는 이제 죽습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인데 당신들 좋은 일에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마침 형무소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식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그 15,000원을 가지고 강대상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헌당식 날 설교하는 목사님이
‘이 강대상은 지금 여러분 가운데 앉아있는 한 사형수가
죽기 전에 마지막 가졌던 것을 다 내놓아서, 그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발표하게 될 때
모든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어요.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것이 법무부에 그렇게 전해져서
그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바꾸어 졌답니다. 감형 받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