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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장 부활을 믿는다면

LNCK 2025. 4. 22. 12:0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부활

https://www.youtube.com/watch?v=KW7OcUMENa0

부활을 믿는다면           골3:1~5           2025.04.20.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가 사실은 부활을 기뻐하는 날이에요.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겁니다. 

주일은 뭐냐?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거예요. 부활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은, 부활절에만 축하하는 게 아니에요. 
매 주일 예배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신약 복음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데,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하면서 
우리가 다시 한번 힘을 얻는 날이, 부활를 기념하는 주일이며 
매주일 우리는 부활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죽음이 우리와 멀리 있지 않는 것처럼 
부활 역시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도입 / 죽음의 횡포,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죽음이 항상 이겼습니다. 죽음을 이길 자가 없었어요. 
사망의 권세의 횡포를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죽음의 힘은 가장 셉니다. 누구도 죽음에서 풀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 저항할 생각을 못해요. 결국 인류는 죽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아무리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고분고분합니다. 

나는 죽음 앞에서 큰소리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세 등등하게 사셨던 분도, 일평생 기가 죽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하면 ,하는 대로 다 되었던 그야말로 기세가 등등하던 분도 
죽음 앞에서 완강하게 버티더라고요. '나 괜찮아, 아직 살아 있어!' 

근데요. 바로 죽음 목전에 가니까, 확 꺾이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꼼짝 못 해요. 기가 팍 죽었어요. 며칠 전 그분이 아니였어요. 죽음은 셉니다. 

여러분, 죽음보다. 더 잔인한 게 있을까요? 죽으면 모든 걸 다 빼앗아 갑니다. 
어떤 재산을 잃은 게 아니에요. 뭘 잃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갑니다. 

죽음보다 더 큰 실패가 있을까요? 취업? 입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냅니다. 죽음보다 더 폭력적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원수 중에 원수는 죽음입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도, 갑자기 죽음의 통보를 받습니다. 
죽음은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에 찾아옵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왔어요. 할아버지가 오고, 아버지가 오고, 아들이 오고...
근데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막 뒤엉켜버립니다. 

여러분 죽음은 모든 걸 한순간에 멈추게 하죠. 
야심차게 세웠던 계획은 의미가 없습니다. 한순간에 끝이 나버리죠. 

한참 자라고 있는 자녀들 때문에, 애들이 조금이라도 더 클 때까지 봐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상관없이 밀어 닥칩니다. 
그 죽음은, 우리 삶을 한순간 어그러지게 만들어 버리죠. 그래서 죽음은 원수입니다. 

다른 것들은 조정 가능해요. 협상도 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내가 줄 테니까 
협상하자는 거죠. 근데 죽음은 협상이 안 됩니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끝냅니다. 

여러분 죽음은 추상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죽음보다 엄연한 실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무심코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고,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제쳐놓고 살더라도... 죽음은 때가 되면 다가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예고 없이 죽음은 불쑥 찾아옵니다. 왜 나에게? 
당황하죠. 

그런데 왜 나에게 죽음이 오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나요? 그때까지 착각하고 산 거죠. 
본래 죽음은 그렇게 무례하고 황당하게 찾아옵니다. 

▲여러분, 세상은 무엇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굉장한 글로벌 기업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까? 
세상의 황제들이 세상을 지배합니까? 아녜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문화들을 보십시오. 
죽음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거죠. 그게 문화 속에 숨어 있습니다. 

죽음을 희화화하는 이유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해골 목걸이를 한다든가,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도, 
다 죽음을 희화화하는데... 사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막 이렇게 하는데, 사실은 죽음에 대한 저항이죠. 

왜 사람들이 쾌락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자기 생명이 끝나기 전에, 내가 실컷 누리고 싶은 
그 내면에서 죽음으로 오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에요. 

자 그런데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에요.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인생은 생각보다 간단한 겁니다. 

내세가 없고, 부활이 없다면... 그냥 대충 살다가 죽으면 됩니다. 뭐 복잡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 천상의 세계, 영원의 세계가 펼쳐진다면... 이건 얘기가 달라지는 거잖아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고... 그런데 여러분 죽으면,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내 몸마저도 내 것이 아닌 순간이 오죠. 

죽음이 찾아온 순간 현실은 멈춥니다. 
비현실처럼 생각했던 영원의 세계가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땅을 딛고 있는 지금이 현실인지, 
영원의 세계가 진짜 현실인지 구분을 해야 되지요. 

여러분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 사건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유일무이한 사건, 인류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중심축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면 복음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사라져버립니다. 
그게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움직여온 힘이에요. 이 부활의 복음이! 

그런 의미에서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모든 삶의 에너지는 
부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를 이 부활의 새로운 차원으로 인생을 이끌어 갑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계... 그래서 부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끝은 끝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 얼마나 어미심장한 것입니까? 

그래서 누가 그런 얘기했죠. '죽음이 끝이 아닐까 봐 두렵다'는 거죠. 

여러분, 부활 이전에는 죽음이 모든 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모든 걸 재해석했거든요.
 
그런데 부활 이후에는, 부활이 죽음을 해석하는 겁니다. 
이제는 그러니까 부활을 놓치면, 우리의 삶도, 우리의 인생도, 의미가 없는 거죠. 

여러분, 부활은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새 창조' 라고 얘기합니다. 뉴 크리에이션! 

그러니까 부활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거죠. 
새로운 탄생! 

그래서 부활절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새로운 생일을 맞이하는 것 같아요. 
이 부활은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2000년 전 예수의 부활과, 오늘 우리의 삶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우리의 삶의 중심부로 들어왔습니다. 

이 부활은 과거의 시점에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그 예수의 부활의 생명 안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살아내는 (부활의) 재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관념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저주를 뚫고 다시 살아나셨어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모든 것이 부활의 예수의 손안에 쥐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부활의 주가 하시는 일을, 막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인 인가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 
예수의 부활 안에 십자가도 포함돼요.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요약입니다. 

죽음과 부활은 떼어서 각각 다룰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십자가로 살면, 자연히 결과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죠.
이 상관관계!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러니까 여러분 부활을 믿는가 / 믿지 않는가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거예요. 

부활은 작은 사건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죠. 
부활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과, 영원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의 삶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1절에 '위의 것을 찾으라'는 거에요. 
2절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라' 

당연하죠. 여러분, 부활이 있다면, 오늘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거죠.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면, 그 부활의 신앙은 
이제 우리의 생각이 하늘을 향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땅만 쳐다보고 살면 됩니다. 뭘 하늘을 쳐다봐요?

영적인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냥 철저히 이 땅, 육체적 만족, 현실의 모든 계획과 활동,
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자는 것, Today, Now, 지금 현재... 거기에 다 맞춰져 있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성경적 관점으로 종말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타이타닉 호와 같은 거죠. 이미 침몰하고 있는 배입니다.
말세를 향하여, 인류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를 얘기한 거죠. 

어거스틴이 살던 시대는, 로마가 번성할 때였어요. 그때 로마의 쇠태를 본 것이죠. 
인류 역사를 통하여 제국은 흥망성쇠를 거듭했거든요. '영원한 제국은 없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의 관점과 같은 겁니다. 
바울이 빌3:27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두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두 시민권을 동일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요? 

하나는 언젠가 사라지고 마는, 제한적인 시민권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시민권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곳을 살고 있지만, 이곳이 전부인 줄 알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도성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을 영원한 집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모든 걸 다 쏟아붓는 거죠. 영원한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관심, 새로운 소망이 생기게 만듭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게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주는 거죠.

그래서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라' 여러분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로마서 8:5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여러분 생각이 가는 곳에, 내 행동이 가는 겁니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생각은 곧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생각하는 게 바로 나예요. 내 생각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 속에 무엇이 있느냐는 거예요. 

내 생각 속에 야망이 있으면, 그 야망이 나를 끌고 가는 거예요. 
내 생각 속에 주님이 계시면, 주님이 나를 이끌고 갈 것이고,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거죠. 골3:1~2 

위인가, 아래인가? 하늘 위인가, 땅인가? 
왜 위를 바라보라고 하죠? 
거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그분은 온 땅을 통치하고 계시고, 만물은 그 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라는 거예요. 

위를 바라보라고 해서, 이 땅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야죠. 근데 세상에 지배를 받지 말라는 거예요. 

자칫하면 땅의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내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위(하늘)에 초점을 맞추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분산될 때,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생각이 분산되는 거예요. 왜 생각이 분산될까요? 
절대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의 세계에 아직 눈을 뜨지 못하니까, 
이 땅의 것들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가르쳐서 우리는 '세속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인데, 근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적인 초점이 아직 맞춰지지 않은 사람, 
위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땅을 바라보는 게 훨씬 더 많은 사람, 
아니 땅만 쳐다보지, 하늘을 잘 쳐다보지 않는 사람.... 

하늘을 가끔 쳐다보기는 하는데, 생수병 들이킬 때만! 
궁극적인 관심은 하늘보다 땅이에요. 

늘 만나면, 대화의 소재가 정해져 있어요. 그야말로 땅이에요. 땅의 것! 
어떤 분은 진짜 땅(부동산) 얘기만 합니다. 늘 얘기가 그거예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 먹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을까? 떡에 대한 관심! 

여러분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통합된 세계 종교는 '떡의 종교'예요. '경제 종교'입니다. 
그들의 비전은 더 많은 떡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물질적 번영을 약속하는 사람이 메시아가 됩니다. 

여러분, 세계 어느 대통령도 경제 문제 해결하지 않으면, 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경제 문제, 떡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거죠. 

주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때, 사람들이 주님을 환호합니다. 임금 삼으려고 해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여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분은 
'경제적 메시아'가 확실하죠. 그것보다.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도 내 배를 채워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얼마든지 따를 용의가 있어요. 
이 시대의 신은 우리의 배입니다.  빌3:19

오늘 사람들이 섬기는 종교는 각기 달라요.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모든 게 만나요. 떡의 종교예요. 물질, 풍요의 신! 
떡이 없으면 죽는 거죠. 그래서 떡을 두고 전쟁을 치릅니다. 

지금 세계는 치열한 무역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 많은 떡을 확보하고자 하는 전쟁은, 갈수록 더 치열해질 것입니다. 
늘 일상에서 펼쳐지는 모습입니다. 

떡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문제는 떡만을 추구하는 거죠. 
거기에는 내일이 없어요. 떡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미래는 겨우 노후 정도입니다. 

여러분, 노후가 우리의 인생의 끝입니까? 아니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노후만 걱정하고, 영원의 세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오늘, 지금, 여기, 당장 내 배를 채워줄 떡을 추구하는 세상은 치열합니다. 
경쟁적입니다. 서로 더 많은 것을 확보하려고 하는 싸움이 치열해집니다. 

여러분, 경쟁 세상은 서로가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뭐 아닌 것 같은데, 적이 되어요. 경쟁하면 관계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이웃이 점점 없어져요. 친구도 점점 없어져요. 
떡의 문제, 돈의 문제가 끼어들면 
형제도, 친구도,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지금 나에게 주는, 내 배를 채우는 경제 논리, 떡의 논리에 사로잡히면 
거기에는 윤리성은 없어지는 겁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떡만을 추구하는 세상은, 정의가 없습니다. 불법을 얼마든지 정당화합니다. 

나라와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이기면 정의가 됩니다. 
모두가 기를 쓰고 힘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건 뭘까요? 부활의 신앙은,
땅에서 하늘로 관심을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땅의 삶은 잠깐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추구해도 잠깐입니다. 
전도서 2:11절에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세상의 영광이 얼마나 바람처럼, 그리고 얼마나 안개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는지... 전도서 기자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천국과 비교가 안 됩니다. 
세상에서 최고 중 최고일지라도, 천국의 맛보기 수준도 안 됩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가 죽으라고 수고해도 
그것은 끝이 나는 순간이 옵니다. 

부활은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연결 시킵니다. 
하늘로 연결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새로운 눈을 열어주시고, 하늘의 관점에서 땅을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이런 얘기를 해요.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현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내세를 늘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무능해지는 이유는 내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 현세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영원이 있기에, 지금 삶이 귀중한 거죠. 
내세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방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32절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내세가 없고 영원의 가치를 모르면, 현실밖에 없고, 
그래서 쾌락주의가 오는 것이고, 그 쾌락주의의 끝은 허무주의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래만 바라보며 고개를 빼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날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두 세계 속에 삽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이 사이에서 우리는 저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천국은 추상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다가오는 실체입니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엉뚱한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질 것에만 몰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옵니다. 
가끔 시한부 통보를 받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의사를 통하여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미국 사람들은 보통 사망 6개월 전까지, 암에 걸리신 분들이 항암치료를 
죽기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해요. 그러나 6개월 남으면 거기서 멈추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거예요.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데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서울대병원의 통계에 따르면 
오늘 우리 한국은 사망 한 달 전까지 항암치료를 계속 한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가족들도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조금만 더 살게 해주십시오' 
이미 항암이 안 통하는데도, 계속 치료하는 거예요. 더 살려내고 싶다는 거죠. 
그래서 갈 때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 달 남으면 포기를 하는 거예요. 이제 안 되니까. 
(한국사람은 평생 쓰는 의료비의 절반을, 죽기 전 1년 동안 쓴다고 하죠. 그럴 필요 없는데...)


암도, 어느 임계점에 가면 죽음의 힘이 가속도를 붙여요. 
그때는 이제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요. 항암 치료도 안 통해요. 

근데 한 달은 삶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60년, 70년, 80년, 90년 살았던 생애를, 한 달 동안 정리한다는 건 어렵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 한 달 남은 한 달이, 매우 질 낮은 수명의 연장일 뿐이에요. 
고통 속에서 의식이 들락날락 하는, 죽음의 임박한 상황 속에서는 
가족들과 대화도 온전하게 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그 고통과 사투를 벌이다가, 의식이 오락가락하면서 
마지막 생명의 끝을 제대로 마무리도 못하고 그냥 끝내버립니다.

여러분, 우리의 남은 삶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어떻게 보면 육체적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면, 인간은 모두가 시한부 인생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인생은 아주 too short 너무 짧아요. 10년이 금방입니다. 
20년이 금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해야 되죠. 여러분? 이건 실존적 문제예요.  중략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답하게 합니다. 
부활신앙은 그냥 이 땅에서 길게, 그리고 죽고 난 다음에 영원히 길게, 
그냥 쭉 늘어진 삶을 오래 오래만 계속 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마6: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얘기해요. 
여러분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러니까 해야 될 일을 하는 거예요. 

늘 땅만 보고, 땅만 파고 살면 안 된다는 거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 그 범주에 갇혀 있으면 안 됩니다. 
영원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거죠. 
우리에게 왜 달란트들을 주셨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 동안에, 남기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가 이 땅 가운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그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상 속의 기쁨을 왜 빼앗깁니까? 
너무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냥 코앞에 닥쳐있는 일만 처리하느라 허겁지겁하니까! 

여러분 주식 단기 투자한 분들 보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합니다.
트럼프 시대가 되니까 더 지금 오르고 내리고 뛰잖아요. 

여러분 항해를 하는 항해사들은, 먼 바다를 바로보라고는 그래요. 
눈 앞의 파도를 보지 말라는 거예요. 
바로 눈앞에 파도만 보면 멀미를 하는 거예요. 
먼 항해를 하려면, 멀리 보라는 거예요. 태풍과 폭풍이 어디서 부는지 보는 거죠.

여러분, 부활신앙은 멀리 보라는 거예요. 영원한 것을 보게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멀리 보게 하는 겁니다. 

믿음이 좋다는 건 뭘까요? 멀리 보는 겁니다. 
멀리 보는 사람은 어디까지 보는 것입니까? 천국까지 보는 거예요. 
천국이 눈앞에 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주일날 예배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냥 전쟁터같이 정신없이 코앞에 닥친 것 가지고 아웅다웅 싸우고 
절망하고 다 끝난 것 같다가...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며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마지막 찬양하면서 
벌떡 일어나고, 내 영혼의 소망을 가지고, 그 부활이 위로가 되고, 다시 살 맛이 나고...

여러분, 우리는 위를 보는 사람들이에요. 세상 사람들과 바라보는 게 다릅니다. 
그러니까 직장에 가면, 직장 사람들이 
'너희들은 다른데 자꾸 쳐다보는데, 어디 쳐다보느냐고?' 우리에게 물어야 돼요.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거를 같이 쳐다보면, 누가 묻겠습니까? 
'네가 구하는 거나, 내가 구하는 거나 똑같구나' 그럼 누가 우리에게 묻겠습니까? 

◑골3:3~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여러분 인간의 모든 도모가 끝이 나는 날이 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날에는 선명하게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날이 오게 될 줄 믿습니다.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라'

우리의 삶은 부활의 생명 안에 품어져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약속합니다. 

4절에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될 거라는 거죠. 
그래서 '주님과 함께 승리를 누리라,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약속은 해피 엔딩이라는 거죠. 
신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신앙 믿는 사람은 
우리는 살아보고 난 다음에 결과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승리라는 결과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 승리를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1서 5: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믿음이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승리를 인조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자의 태도는 달라요. 기품이 있어요. 여유가 있어요. 짓눌리지 않아요. 
기죽지 않아요. 의기소침하지 않아요. 우울해하지 않아요. 

그 부활을 가지고 있다면, 죽음 앞에서도 초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헛되지 않음을, 죽음 앞에서도 부활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 
죽음의 실체 앞에서도 부활의 신앙이 진면목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다양한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현실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 같이 보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유혹하는 것들을 5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놓쳐버리면, 이런 것들이 우리를 그냥 이 땅에 
그냥 그들과 함께 묻혀서, 그냥 사로잡혀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 이게 뭐예요? 
현재 자신의 삶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이 땅을 추구하는 자들의 일상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라는 거죠. 

골3:7~10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여기 보면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거짓... 이런 얘기들을 하잖아요. 
여러분, 부활이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에요. 
옛날에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제 부활을 믿으면, 뭐 그냥 분낼 것도 별로 없어요. 
노여워 할 것도 별로 없고요. 비방할 것도 별로 없어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날에 주님을 맞이할 준비, 새 옷을 입으라는 거예요. 

여러분, 부활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그 부활을 붙잡고 살아갈 때, 잠시 후면 끝나버릴 이 세상에 
연연하지 않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1:24~25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새새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여러분 인생의 짧음을 곳곳에서 얘기해요. 
'이 생이 전부라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부활의 복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000년 동안 외쳐온 이 복음, 이 부활의 복음 위에 교회가 서 있고 
부활의 예수는 죽음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우리가 외울 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날마다 부활을 믿음으로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철학이나 종교가 아무리 심오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해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철학과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는 이 부활을 받아들일 건가/ 말건가.. 선택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빌3: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의 날에 영광스러운 회복, 새 육체를 주실 거라는 거에요. 
여러분, 오늘 '장애인의 주간'을 보내는데, 지상에서는 장애를 가지고 살았다 할지라도 
부활의 날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성형하려고 하는 거 
조금 기다리세요. 완벽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의 누추한 옷(육신)을 다 벗고 
영광의 옷을 입는 그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게, 부활의 복음이에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복음! 
이게 없으면 인생은 덧없는 거예요. 진짜 죽도록 고생하다가 끝나는 거예요. 

여러분, 부활은 죽음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꾼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가 시설 어디에 두고 살 거냐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 영원의 세계에서 지상의 삶을 바라보며 사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이 땅의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여유를 가지세요. 
곧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이 땅의 삶은 잠깐이에요. 

최근에 서울대병원의 종양내과 의사인 김범석 그분이 지은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그 분이 많은 죽음들을 지켜보면서 글을 썼어요. 
어떤 분이 폐암 4기로 죽음 직전이었어요. 
가족들이 딱히 없고, 그냥 혼자 병상에 있는데, 
병원 관계자들이 막 수소문 해보니까, 남자 동생이 한 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연락을 해서 '이제 형님이 지금 사선에, 죽음 직전에 있으니까 한번 와 봐라' 
'이제 좀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라'고 했더니, 그 동생분이 찾아왔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이 두 형제가 오랫동안 의절한 상태예요. 근데 왜 의절이 됐느냐? 
동생이 형의 돈을 한 2억 몇 천만 원을 빌려 갔는데, 안 갚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형이 이 동생을 안 본 거죠. 

이제 죽음이 임박하니까, 이제 그 동생이 찾아왔어요. 
의사는 '마지막 임종의 시간을 앞두고 형님과 잘 화해하고, 
시신도 거두고 장례도 잘 지내시라고'

근데 그 형이 동생을 부르더니, 그 힘도 없는 분이, 
동생을 죽을 힘을 다해 부르고는, 그의 귀에다 이 말을 하는 거예요. 
'너 2억 내놔라' 기가 막힌 거예요. 진짜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며칠 후에 죽었어요. 

동생도 기분이 확 나빠진 거죠. 이 인간... 형같이 보이지도 않는 거예요. 
그러나 마지막 시신은 그 동생이 거두었대요. 
죽기 직전까지도, 생명이 지금 끝이 나고 모든 게 사라지는 그 직전까지도 
자기의 그 이익에 대한 애착... 그 삶이 정리가 안 된 거예요. 

여러분 이게 세상의 삶의 한 단면이에요. 영원의 세계를 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에요.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아, 부활을 설명하지 말고, 교리화 시키지 말고, 
사변화 시키지 말고, 부활을 일상으로 살아내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