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특강(5) - 새로운 피조물(고후 5장) - YouTube
◈새로운 피조물 P1 2025.04.02. 고린도후서 5강
오늘은 고린도후서 5강 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복습, 정리
고린도후서에서 지난 시간(1~4장)까지, 핵심적인 단어들이 몇 가지 나오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새 언약의 일꾼"이었습니다.
'새 언약'이 있으면, '옛 언약'이 있는 건데,
옛 언약이란, 율법이며, 율법을 중심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봐서 알지만,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율법으로 아무리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고, 수고하고, 노력해봐도,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 속에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율법으로는 안 되는 거로구나...'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지적 동의는 아님
각 사람의 심령에 주어지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새언약의 핵심 키워드는 '성령'이고,
'새언약의 일꾼'은 성령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일꾼입니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하고,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눅20:22
새언약의 일꾼들이 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새언약의 일꾼인 저와 여러분들은,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성령과 함께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성령으로 일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용어에 의하면 '보배를 품고 있는 질그릇' 입니다.
우린 질그릇인데, 내 속에 보배되신 예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질그릇은, 나는 질그릇으로서 살아갈 뿐,
나를 통해서 빛나는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이지,
사람들이 날 보고 칭찬하고, 날 보고 잘한다고 격려한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새언약의 일꾼된 자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오직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계속 자기를 죽여야 됩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항상 내 몸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때 그 '죽음'이라는 것은, 단 한 번 일회적인 죽음이 아니고 네크로시스,
즉 계속해서 죽어가는 겁니다.
즉 매일매일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새언약의 일꾼된 삶' 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까지 잘 기억하고 있으면, 공부를 잘 따라오신 겁니다.
오늘은 이 개념을 가지고, 이 느낌을 가지고,
새 언약의 일꾼됨과 아울러, 그 다음 측면인 "새로운 피조물"로 나아갑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의미하는 것이 뭘까요? 우리 육체죠.
2절을 보면 반대 개념이 나오죠.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즉 '땅에 있는 장막집'의 반대 개념인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
4:16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항상 질그럭 같은 육체 속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품어 안고 사는
존재인데, 질그릇은 갈수록 장막집처럼 낡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한 80~100년 살다 보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었던 장막집은 무너지게 되죠.
쓰러집니다. 다 사라지고, 누더기가 되고, 병들고...
그래서 우리는 이 장막집을 벗어나게 됩니다.
벗어나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2절에 나오잖아요.
◑5: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다' 그랬습니다.
즉 이건 고린도전서 15장의 용어로 보면 '신령한 육체'입니다. 신령한 몸!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영향을,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받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다. 이 육체는 악한 것이다...'
그래서 '더럽고, 악하고, 추악한 육체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거할 수 있느냐?'
그래서 육체를 굉장히 많이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영혼만 올라가는 게 아니고, 신령한 몸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이게 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언제 어떤 상태로 부활할 것인가요?
내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근육도 빵빵했던 20대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가?
또 몸이 조금 불편하신 분들, 몸에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나는 어릴 때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는데,
그럼 나는 천국에서도 불편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신령한 육체'라고 했기 때문에!
'신령하다'는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가 천국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신령하다'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이 땅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한 자를,
천국에서도 그 모습으로, 그 고생한 모습으로, 내가 그렇게 몸이 힘들고 아팠던 모습으로
부활하게 하신다면, 그걸 '신령한 몸'이라고 표현하셨겠는가?
그런 질문을 거꾸로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땅에 있는 장막집'은 내 육체이고,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는 신령한 육체를 의미합니다. :2
▲이런 '장막' 사상은, 바울뿐만 아니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벧후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여기서 '장막'도 육체죠.
그리고 이건 신약에서만 나오는 사고가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런 사고가 있습니다.
'장막'은 특징이, 옮겨 다니는 것입니다. 텐트니까요.
여기 폈다가 저기 폈다가, 접었다가 폈다가... 이사 다니기에 굉장히 용이합니다.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이죠.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야곱이 바로 얘기하려되 내 나그네 길에 세월이...' 창47:9
야곱은 자기 정체성을 '나그네' 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에게 꼭 필요한 게 장막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텐트'라는 생각을,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었고,
내 육체도 쓰다가 그냥 버리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고는, 이 육체는 천국에서 신령한 육체인 부활체를 덧입는다...
이 사고를, 그들은 항상 부활사상으로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좀 적용해 봐야 되는 게, 우리 육체만 과연 장막이냐?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장막이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라는 건물도 장막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마치 이 육체가 영원할 것처럼, 육체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하고,
너무 많이 찍어바르고, 너무 많이 고치고... 그렇게 살 이유가 과연 있을까요?
철마다 옷 사 입고, 바꿔 입고,
자기 돈으로 하는 거를 뭐라 할 순 없으나...
우리 집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사는 집도, 사실 그냥 불편함 없이 살면 되는데,
그 장막에 그렇게 많이 투자를 하고, 그것 때문에 죽을똥 살똥 수고하고 땀 흘리고
눈물 흘리고 애쓰고 힘써야 되겠는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건물,
과거에 성막 시절이 있었고, 성전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시절의 시작은, 솔로몬 성전이잖아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정말 거대하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그가 하나님께 봉헌 예배를 드립니다.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때 하나님이 '야 네가 성전을 정말 잘 지었구나, 멋지게 잘 지었다'
이런 말씀 하신 적이 없어요.
그 중에 핵심을 한번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왕상9:6~7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그것도 봉헌 예배 때, 초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멋지게 지어가지고, 요즘으로 말하면 헌당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떼같이 모여 왔습니다.
이 화려하고 멋진 성전을 지어서 봉헌하는 대표인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이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뭡니까? 이 건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걸 그렇게 백향목으로 짓고, 상아로 짓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
중요한 건 이 성전의 쓰임새다.' 본질이 중요한 거죠.
그럼, 성막 시절은 어떻게 됐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성막의 설계를 따라서 성막을 지었죠.
이 성막의 핵심이 뭡니까? 성막에 들어오면 뜰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잖아요. '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 있습니다'하는
마음으로 다 태웠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죠.
이 성소의 기능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고, 죄사함 받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예배 이외에 다른 기능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표로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께 중보의 사역으로 죄사함 받고 나가는 거예요. 그게 성막의 기능입니다.
성막 시절이나, 성전 시절이나, 지금 교회 시절이나 똑같습니다.
이 공간의 기능은 예배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 공간을 뭘 그렇게 화려하게 지어야 되겠는가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이 기도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그러면 그냥 끝나는 거지, 더 이상은 화려할 이유도 없고, 화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너질) 장막이니까! 그냥 그대로 장막이거든요. 있다가 없어지는 장막!
우리 육체도 그렇고, 내가 사는 집도 그렇고,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공간인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의 타락은 '공간의 절대화'로부터 일어납니다.
이방종교를 보세요. 공간을 절대화합니다.
이방종교의 신전을 한번 보십시오. 그곳에 가야만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습니까? 이방의 신전들이 엄청나게 화려하잖아요.
지금 수천 년이 지나서, 지진과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서, 잿더미가 되어 있는데도,
그래도 그 기초와 그 기둥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어마어마하게 화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간(건물)을 절대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여호와 종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신앙'은, 그냥 텐트예요.
성막 자체가 옮겨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종교의 타락은, 솔로몬 성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걸 '장막'이라고 표현하는 건,
'너희는 육체에 너무 많은 목숨 걸지 마!' 라는 뜻이죠.
그런데 '너희 몸은 중요하다'는 얘기가 뒤에 또 나와요. 우리 몸이 또 성전이니까요.
아무튼 이 몸이 우상이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도 타락하게 되고,
공간이 우상화되면, 절대 안됩니다. '장막'이라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5: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땅에 사는 성도의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3절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자들'이란, 이 땅에서 육체의 장막을 떠났어요.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신령한 육체로 덧입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벗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죠.
이 땅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들,
'이렇게 입으면'
우리 성도들은 '입었다'는 얘기예요.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신령한 육체로 덧입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자들은 '두 번째 죽음'을 가집니다.
첫 번째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요.
두 번째 죽음은 계시록에서 말하는 '둘째 사망'인데, 곧 영혼의 죽음입니다.
이때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거죠.
◑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우리가' 라는 뜻이죠. 아직까지 우리가 이 장막 속에 살고 있잖아요.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왜 탄식합니까? 왜 짐진 것 같이 탄식합니까?
육체를 가지고 사는 우리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죠. 돌아서면 배고프고, 남들 먹는 거 보면 더 먹고 싶고,
더 잘 먹고 싶고, 더 좋은 것 입고 싶고...
내 속에 있는 탐욕이 계속해서 육체의 장막을 입고 있는 동안 나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 탄식하는 거예요.
또 우리는 늙고 병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아픈 데가 많은 거예요.
지금 바울이 살던 시절에는 '내 육체를 붙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그들 앞에서 간혹 두려운 겁니다.
사실 내가 이 한 순간만 잘 견디면, 순교하고 천국 가는 게 확실한데,
그거 견디기가 힘든 거예요... 그래서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겁니다. 이게 육체의 한계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냥 그만 살고 싶다. 죽어버리자' 이게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목적이 뭡니까?
'오히려 덧립고자 함이니'
어떻게 해야 신령한 육체를 덧입을 수 있습니까? 새언약의 일꾼이 되어야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고, 내 속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모셔야죠.
그래야 우리가 덧입는 것 아닙니까!
'죽을 것이 생명의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모시고 있는 내 이 질그릇 같은 육체 속에 보배로 좌정하고 계신 예수가,
죽음을 삼켜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8:22~23절을 한번 보세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8:22~23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씀이 중요한데,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
▲고대 그리스 사람들,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이데아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면 이 땅에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 모양이... 작은 거, 큰 거, 맛있는 거, 맛없는 거, 뭐 삐뚤어진 거, 동그랗게 생긴 거,
각양 사과가 모양이 다르잖아요.
'근데 저 천상 이데아의 세계에 가면 완벽한 사과가 있을 것이다' 그게 이데아론이에요.
사랑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 사제 간의 사랑.. 다 있잖아요.
근데 그 사랑의 본 이미지가 천상의 이데아에 가면 있을 거다... 그게 '이데아론'이에요.
이거는 철저한 이원론이거든요.
그러므로 플라톤 사상에 의하면, 우리 육체는 더럽고 추악한 겁니다.
육체를 '감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천상에서 자유롭게 거닐던 영혼이,
죄를 지어서 천상의 지도자에게 버림받아서 육체로 유배를 왔다.
이 땅에 그래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뭡니까? 해방이에요.」
그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 게 뭐냐? 전쟁입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라. 그러면 너희는 해방되어서
천상에 다시 영혼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그 당시의 헬라 사상을 다 지배하고 있었는데,
'천상으로 돌아가는 그 영혼'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에요. 육체는 그냥 버리고 가는 거예요.
육체는 더럽고 추악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육체가 감옥이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더럽고 추악한 육체로 오셨다고?'
이게 그들에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복음을 안 믿는 겁니다.
'이 육체는 더러운 건데, 이 더럽고 추악한 육체에 신이 오셨다고? 나는 안 믿어!'
그 사람들을 우리는 또 '영지주의자' 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얘기한 게 있습니다.
'그럼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셨다면,
그건 우리의 눈을 속이는 거다...' 하면서 '가현설'을 얘기하잖아요.
'가짜로 나타나셨다. 거짓으로 나타나셨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초대교회 이단이 아주 심각했던 것이, 영지주의 이단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싸웠는데
요한1서 4:1~2절을 보면, 이 이단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 당시 이단을 분별하는 것, 영지주의자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걸 인정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했다' 그랬어요.
요한2서 1:7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
분명하죠. 예수께서 육체로 오시는 것을 부인하는 자,
즉 '예수는 그냥 영이다' 이런 자는 다 적그리스도요. 다 영지주의 이단들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이게 굉장히 심각한 이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부인
요즘 우리 나라에 성행하는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신천지, 통일교... 이건 비교도 안 되게
초대교회에 아주 심각한, 성행한 이단 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빈무덤이었잖아요.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영의 부활입니까? No 육체도 함께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히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어요. '만져보라, 넣어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를 버리고, 영만 부활하신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질그릇인데,
질그릇(육체)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돼요.
그래서 바울이 얘기하잖아요.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래서 주인께서 쓰시기에 가장 좋은 그릇은 뭐냐?
자기를 위해서 깨끗하게 하는 그릇입니다.
'금그릇, 은그릇이 되라'가 위 구절의 포인트가 아닙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라'가 포인트죠.
그래서 우리는 질그릇인데, 은그릇 금그릇 되려고, 거기다가 금칠, 은칠 할 필요 없습니다.
금그릇이 아닌데, 그런 척하고 살 이유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해야 될 것 딱 한 가지가 있다면, 육체의 성결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보배로 거하시기에,
우리 주께서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주님을 충분히 모실 수 있는
내 육체의 성결, 그게 중요한 거지... 딴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잖아요. '유한이 무한을 포함할 수 있느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한다' 그랬잖아요. *포도나무
그러니 우리 같은 유한한 육체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거하시려면
우리는 깨끗하게 자기를 비우는 그릇이 되어야 됩니다. 그 얘기예요.
그런데 이 그릇은 '언젠가는 사라질 장막'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깨끗하게 하면 되지, 거기에 사치를 하고,
영원히 여기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또 우리가 사는 공간을 장막이 아닌 영원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마라!
장막은 쓰러지고 없어지고 사라질 곳이다. 그 본질을 중요하게 여겨라...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성도들을 돕고 인도해 가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성령입니다.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이것'은 구원이죠.
우리가 신령한 육체를 덧입는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보증은 아라본... 선불금이라 그랬죠. 주1) '아라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영이 되십니다.
그 다음,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본문 고후5:6~9절을 보면, 이제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되죠.
우리가 이 땅을 떠나면서, 이 육체를 깨끗하게 성결하게 하고,
이 육체가 깨끗하게 성결하게 되어야, 내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그 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우리가 몸으로 있을 때'
우리가 아직 육체의 장막에 있을 때잖아요. 이때는 아직까지 죽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가지 않았으니까,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전이에요.
그럼 그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담대해야 됩니다. '담대하여'
죄에 대해서.. 죄가 나를 유혹할 때 담대해야 되고,
유혹에 대해서도 담대해야 되고,
핍박에 대해서도 담대해야 됩니다. 그걸 이렇게 표현했죠. ↙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이 땅에 살면서 우리 눈이 항상 보는 것이 유혹이 되고, 그래서 두려움이 되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걸 보는 것처럼, 믿음으로 행하고 살아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렇죠.
우리 소망은,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신령한 육체를 덧입고
천국 가는 게 우리 소망입니다.
그런 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즉 이 땅에 있든지 장막을 벗고 천국에 가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여러분,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게 뭡니까?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은 '주님이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일(봉사, 사역)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게 있습니다.
요즘 새벽에 아가서 말씀을 나누는데, 신부의 자격 중에 최고의 자격이 뭡니까?
술람미 여인이 '게달의 장막같이 검다(검으나 아름답도다)' 그랬잖아요. 아1:5
근데 왕이 그 신부를 좋아해요. 미친 듯이 좋아합니다.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신부의 자격은 순결입니다. 신부의 자격은, '내가 시집 밑천 많이 마련했습니다.
저 돈 많이 있습니다. 저 시집 갈 때 이것도 가져갈 수 있고요. 저것도 가져갈 수 있고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 신랑 되신 분은 예수님이잖아요. 교회는 그리스의 신부고,
우리는 그리스의 신부된 자들입니다. 이 세상 만물 모든 걸 다 통치하시고, 창조하시고,
지금도 보존하시고... 다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신부된 우리에게, 수고나 아니면 물질이나 ... 이런 것들 기본적으로 원치 않습니다.
진짜 원하는 건 우리의 순결입니다. 영적 순결!
즉 신부된 자로서 죄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
그러므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힘써야 될 것은
우리의 영적 순결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나를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발을 씻고 죄를 털어내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힘써야 됩니다.
거룩한 영적 순결이 담보되지 않고, 그게 바탕이 되지 않으면,
거기에 많은 수고와, 봉사로 애쓰는 것과,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세상에 많고 많은데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그릇, 순결한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새언약의 일꾼으로서, 성령을 받아서, 그런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자 그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P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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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보증 헬. 아라본
고후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보증은 헬라어로 '아라본' 이죠. 이게 상업 용어거든요.
오늘날의 '보증금'과 거의 비슷하죠.
거래 대금의 일부를 미리 주는 선금입니다.
어떤 큰 거래를 하면 먼저 선금을 받잖아요. 10%를 받든지 5%를 받든지
큰 공사 계약을 하면 선금(보증)을 받습니다.
그 선금을 준다는 의미는 뭡니까?
'반드시 이 계약은 내가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본질을 꼭 붙들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직무를 맡겨 주신다.. 했습니다. 1:21
기름을 부어 주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도장 찍어 주시고,
'그리고 나는 너를 끝까지 사용하겠다. 네가 본질을 붙들고 살면
네 생명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를 지키겠다' 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같은 선금(보증)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성령(의 인치심)' 입니다.
이게 그 당시에 상업 용어로, 바울이 사용한 '아라본'(보증) 이라는 단어인데,
굉장히 탁월한 성령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성령을 받게 됩니까?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본질적 사명을 붙들고 사는 자가 성령 충만한 거예요.
본질적 사명을 붙들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
그럼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무를,
내 삶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