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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3장 십자가와 치유의 길

LNCK 2025. 4. 29. 10:5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주간>    ▣신유  

https://www.youtube.com/live/0Jg1szKq_K8

십자가와 치유의 길              사53:4-6         2025.04.16.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다 환자예요. 모두 질병에 걸려있는 병자와 같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보면, '거대한 병동'이라고 이렇게 해도 되겠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만 아픈 게 아니고, 몸이 아픈 분들이 가득합니다.. 
사실은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병동과 같습니다. 환자들이죠. 정상인이 없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가와 같죠. 수많은 병자들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병들을 신음하고 있는데요.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 영적인 질병이 
다 포함되겠죠. 그런데 이 질병의 한가운데는 뭐가 있습니까? 고통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신음하는 게 고통 때문이거든요. 종합병원에도 입원해 계신 분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나를 데려가 달라, 다 때려치우고 죽고 싶다. 
이 고통을 견디고 싶지 않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 

질병에 걸리면 고통받게 되죠. 이 병의 원인은 거슬러 올라가면 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범죄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질병과 고통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질병도... 내 잘못도 있을 수 있고, 환경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죄의 결과로 찾아온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병들어 고통하는 세상을 보면, 죄가 가져온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게 되죠. 
또 병에 걸리면 그 병이 나를 지배합니다. 금방 낫는 병은 큰 문제가 아니죠. 
그러나 암과 같은 병은,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이 질병과 죽음은 붙어 있는 거죠. 

마음의 상처도 병입니다. 마음의 병에 있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죠.  
인간관계, 우리의 삶의 모든 관계의 아픔들은 
사실은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상처들의 어떤 후유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관계를 맺는 게 어렵잖아요. 여러분 관계를 맺는 게 어렵고, 사랑하는 게 힘들어요. 
가족관계 안에서도 늘 갈등하고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도 사랑하기 힘든 
우리의 내면의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 맺는 것도 참 어렵고, 또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또 관계가 잘 깨어지기도 하고... 이게 다 우리가 고통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질병의 현상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또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질병에 걸리면 무력해집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존재가 되고,
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되고... 
그리고 이런 고통은, 결국은 죽음의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살아있지만, 사실은 그 삶이 부실한... 
진짜 생명이 꽉 찬 그런 삶이 아니고, 
죽음의 힘이 작동되고 있는 부실한 생명,
늘 이렇게 죽음과 삶의 생사의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요즘 여러분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분들이 참 늘어난다는 거, 우리가 실감하잖아요. 
의학적인 병명도 계속 늘어나는 것 같아요. 
치료제도 계속 개발되지만, 새로 생기는 병의 속도가 더 빠르고... 

이런 정신적 질병, 결함...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고통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관계가 깨어진 게 아니고, 사실은 우리 안에 먼저 문제를 갖고 있는 거죠. 
이혼같은 그런 아픈 현실이... 원치 않지만 찾아오는 거잖아요. 
그게 뭐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이렇게 오늘날 보편적으로 찾아오는 
그런 질병의 아픔들이죠. 

그리고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있는 분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싶어서 빠졌겠습니까? 괴로우니까 또 마시고, 마시고 하다보니까 
이제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이런 불행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연결되고, 
그것이 또 다른 고통을 가져오게 되고, 고통이 고통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이제 타락한 세상에서 불가피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인이에요. 그렇죠? 
죄인인 우리 안에는 끊임없는 욕심이 있는 거고, 
그 욕심의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까, 그 욕심이 결국 사고를 치는 거죠. 
우리는 병든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은, 죄인은 그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을 안고 사는 겁니다. 
죄의 결과를 고스란히 겪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병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양한 병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주님은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크게 세 가지예요. 
하나는 설교, 프리칭, 
하나는 가르침, 티칭, 
하나는 치유, 힐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가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이 비정상적인 고통하는 세상,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었고, 
그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시작된 이 치유와 회복, 이것을 우리가 오늘도 경험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말씀을 듣는 일들 속에 
계속해서 우리 안에 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병에 걸려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내가 병에 걸려있습니다. 나는 정상인이 아닙니다.' 이거를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모 저모로 아픕니다. 나를 고쳐주십시오.' 
몸이 아픈 분도 병원에 가야 되잖아요. 
병원에 가서 나의 연약한 부분을 내보여야 되잖아요. 
진찰도 해봐야 되고, 검사도 해봐야 되고... 싫지만 해야 되잖아요. 

나는 지금 죽기 직전인데, 말기암 환자인데, 
'난 괜찮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돼요? 안 되는 거죠. 

그런데 환자들의 대부분은, 자기가 아픈 걸 부정하는 거죠. '나는 괜찮습니다.' 
병원에 가보자 그러면, 완강하게 거부하고 
'당신 좀 아픈 것 같다' 그러면, '네가 더 아프다' 그러고, 인정을 안 하는 거죠.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문제가 많습니다. 나는 중증을 앓고 있습니다. 
나는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거를 인정을 하고, 고쳐달라고 호소를 해야 되는데, 
그걸 안 한다는 거예요. 

인류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다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정을 안 하죠. '내가 무슨 죄인이냐?' 

당장 죽을 사람인데, 자기의 증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게 늘 보는 우리의 상황입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말기예요.
다 말기 환자와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멀쩡하다. 나는 치유가 필요 없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하고 부인하는 거죠. 
그 부인하는 이유가 뭘까요? 죄성으로 가득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끝내 자신의 죄를 통열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경험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있어요. 이 십자가가 자기 가슴에 안 와닿는 거예요. 

'뭘 나를 위해서 저렇게 죽으셔야 해?'하며, 십자가가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거북하고, 십자가가 거리껴지는 거예요. 그게 죄인입니다. 
심각한 죄인인데, 자기가 그 죄인인인 줄 모르는 거잖아요. 

예를 들면 말기암 환자 같으면, 완전히 몸에 모든 암세포가 다 퍼져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여러분? 
뭐 이게 정상이 아니죠. 증상이 다 나와요. 
열이 심하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은 떨어지고...
그러면 모든 게 정상 혈류가 안 흐르고, 심장 박동이 제대로 안 되고... 
그럼 이게 증상이 딱 보면 중환자잖아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다 그런 상태에 있는데 
자기가 인정을 안 하는 거예요. 죄가 온몸에 전이 되어서, 
모든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자기는 부정하는 거예요. 난 괜찮다는 거예요. 
나를 지적질하는 네가 문제라고 그러는 거예요. 

◑치료자 예수님

 

여러분 주님이 의사로 세상에 오셨죠. 
막2: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니까 주님은 먼저 딱 보면 그가 오래된 병자인데,
그냥 고쳐주시면 되는데 그렇지 않아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세요. 

그냥 치유하지 않고, 꼭 물으십니다. 네가 치유를 원하느냐는 거죠. 
그 말은 치유하게 하는 약을 받아들일 건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 치유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되죠. 
나음을 받으려면, 약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약을 받아들이고 먹어야 치료가 일어나요.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가 그 피로를 느끼는 사람, '난 환자야, 나는 죄인이에요, 난 죽을 죄인이에요'
이걸 인정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죠. 오늘 본문 사53:5절은 특별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이게 이사야의 예언이죠. '종의 노래' 
그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난받는 종, 그가 찔리셨다.는 거죠. 그가 상하셨고, 그가 채찍에 맞았다. 
이게 하나 하나 다 공통점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창에 찔리셨어요. 가시면류관에 찔리셨어요. 
매를 맞으셨어요. 채찍에 맞으셨어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통'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뭘까요? 그리스도가 왜 고통을 당하셨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가 겪는 고통과 연관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깊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의 삶의 속으로 들어가면, 
이 고통에서 피할 길이 없어요. 그 고통에 짓눌려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고통에 짓이겨 살고 있습니다. 뭐 볼 것도 없습니다. 

복음안에 들어와서, 우리도 끊임없이 치유를 받지 않으면, 고통 속에서 사는 겁니다. 
그 고통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에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나의 고통에 깊이 다가온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고통을 홀로 겪는 거예요. 입원을 경험해 보신 분은 아시죠.
병문안도 왔다 갔다 하고, 가족들도 있는데 
그 고통 안으로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은 그분(환자)만의 고통입니다. 

고통이 깊으면 더 외로워집니다. 아무도 우리의 고통에 다가올 수도 없고, 
다가와도 해결할 길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병상에서도 외로이 돌아가시는 거예요. 
부모님들도, 어른들도.. 외롭게 돌아가십니다.

자식들도 다 울고 그러는데 
돌아서면 또 짜장면 먹고... 잠깐 볼 때만 그렇게 마음이 슬프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계속 기억하고 계속 울면... 그 사람도 못 살아요. 

누가 우리의 고통에 깊이 다가올 수 있는가요?
누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각자도생 이에요. 

자,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통은 셀 수 없이 많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십자가 묵상'을 해보면, 
이게 어마어마한 프리즘의 색 빛깔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분이 당하신 학대, 그분이 당하셨던 멸시, 그분이 당하셨던 조롱, 
그분이 당하셨던 육체적 아픔... 여러분, 우리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 
그 모든 고통의 극한 지점까지, 그리스도는 가 보셨어요. 이런 분은 없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통을 보면, 
그 안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 보여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아도다'  사53:5
여기 '우리가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할 때, 우리는 누구예요? 

아직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는, 
죄 밖에 지을 줄 모르는 인간, 그들이 장차 받을 나음(치료)을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롬5:8절에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으로 주어진 은혜가, 우리를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질고(질병)를 대신 지시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의 방식은 독특합니다. 그냥 낫게 하신다는 게 아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치실 때 채찍에 맞으셨어요.
그러니까 주님은 그냥 우리를 낫게 하신 게 아니고, 
당신이, 우리 고통의 한가운데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치유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은 낯선 개념입니다. 
절대적 신이 고통을 당한다? 이건 낯선 개념이에요. 없는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고통당하시는 예수는, 이 복음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이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 

하나님은 고통 바깥에서,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 고통 안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신, 상처와 고통을 모르는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상처투성이로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축 처져서 이제 죽은 예수, 그 상처에 부대껴 죽은 예수, 우리는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가 뭘 느끼는 것입니까?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이 얼마나 처절하셨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는가? ... 를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무심하게 받으면 안 됩니다. 
주님의 살이... 요즘은 전병으로 하니까 맛이 안 나요. 
조금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떡을 받아야 되는데, 
사람이 많으니까 편리함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약간 마음이 그래요. 

사실은 큰 빵덩이를 찢으면서, 리얼한 느낌이 들어야 돼요. 
주님의 살이 갈가지 찢어진 거를, 빵을 뜯으면서 그걸 느끼는 거예요. 
살점이 채찍에 맞아서 뚝뚝 떨어져 나가는 그 경험, 그 느낌, 물과 피를 쏟아내는 것... 

여러분 누군가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 현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피가 막 펑펑 쏟아져 나오는 것... 충격적입니다. 

주님은 그냥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 게 아닙니다. 
생명을 쏟아 부어주셨어요. 

2000년 전 갈보리의 언덕에서는, 피비린내에 섞인 바람이 불은 거예요. 
그리고 그곳은 비탄과 슬픔이 가득한 곳이었고... 

그래서 죄로 인해 우리가 당해야 될 고통을, 당신이 대신 당해 주셨습니다. 
'그가 찔리면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사53:5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상처입은 치유자'라고 얘기합니다. Wounded healer 
그러니까 인간을 치유하시려는 치유자 자신이, 상처투성이에요. 

주님은 당신이 친히 상처로 가득해서, 자신이 온몸이 찢겨지심으로 
우리 인간의 치유의 길을 여셨다는 거예요. 

고통을 아시는 분이,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거예요. 
외로움을 아시는 분이, 우리의 외로움을 해결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갈보리 언덕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는, 상처투성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극치를 맛보셨습니다. 
목마름을 겪으셨어요. 

여러분 '목마르다' 라는 표현을, 가상 칠언 중에 하셨는데 
이 목마름은 그냥 목마름이 아닙니다. 
죽기 직전에 피를 많이 흘리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타는 목마름! 

우리 몸에 한 5리터 정도의 피가 있다고 그러잖아요. 
5리터 중에서 1리터만 빠져도 쇼크 상태가 옵니다. 그 직전에 타는 목마름이 생기죠.

여러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이 (오히려) '목마르다' 하고 절규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죄로 인해서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늘 경험하는 목마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고 황폐한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 
그 주님이 그 목마름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마른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생수가 되십니다.

그래서 상처로 가득한 주님은, 우리 모든 상처의 치유자가 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온전히 경험해 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고통을 좀 참아내라. 힘들지만 너가 행복하기를 원해!' 
이런 식으로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는,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 고통 안으로 들어오시고,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건 놀라운 선포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 성취될 것을, 이사야가 미리 바라보고 말씀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인류에게 드리워져 있는 모든 고통과 절망과 
죄로 인한 형벌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가운데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질병으로 고통하는 한 여인을 고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눅7: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여기서 '구원하다'는 이 말에는 '치유하다. 온전하게 하다' 라는 뜻이 들어있어요. 
그리스도는 치유하시는데, 그 치유야말로 '온전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본래 인간은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죄로 인하여 온전함이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그 깨어지고 병든, 불완전해진 우리의 존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빛이 우리의 삶에 찾아올 때, 우리에게 치유가 일어나요. 
그런데 이 치유를 일으키는 그 십자가의 빛 안에는 무엇이 있어요? 
사랑의 빛이 있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는, 초강도 사랑의 레이저라고 할 수가 있어요. 
병든 우리의 영혼에 비추어지는 거죠. 

여러분, 십자가는 사랑의 농축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오랜 시간을 한번 보내보십시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십자가와 정면으로 마주치면, 하나님의 그 물밀듯 밀려오는 사랑은.. 함량 초과예요. 

여러분,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다 함량이 부족한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목이 마른 거예요. 늘 목이 마릅니다. 

부모의 사랑도 함량 부족, 그래서 우리의 삶에 가장 중차대한 병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게' 병이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 방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늘 기웃기웃거리는 거죠. 
늘 방황하는 겁니다. 뭘 찾는 거죠? 돈을 찾고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찾고 있는 거예요.

사랑은 사방에 늘려있는데, 진짜 사랑이 없는 거예요. 다 오염되어 있는 사랑, 
그 성분을 조사해보면, 다 함량 부족이에요. 독성도 들어있고... 

여러분,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습니까?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틀림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 자기 자존감에 문제가 있어요. 왜요? 
우리의 자존감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우리 자녀들도 그렇잖아요. 여러분, 요즘 부모들이 다 바빠요. 
유능한 부모일수록 더 바빠요. 아이들을 챙겨줄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번 돈으로 아이에게 좋은 거는 다 사주지만, 진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에요. 

여러분, 아이들도 어느 시기가 되면, 자기들도 바빠요. 
부모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랑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게 병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는 그 시기를 놓치면 아무 소용없어요. 아무리 채워주려고 해도 안 돼요. 
채워져야 될 때 채워져야 돼요. 타이밍이 중요해요.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할 때, 우리 내면이 치료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랑을 받을 때 무엇을 경험합니까? 진짜 사랑을 받으면 경험하는 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라는 걸 느끼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복음송이 참 많이 불려졌잖아요. 
요즘 이거는 올드 버전이 돼가지고, 요즘은 '너는 꽃이야'가 뉴 버전이 됐어요. 
요즘 아이들 많이 불러요. 

▲세상에서는, '나는 별로 소중한 존재가 아니야' 라는 걸 느끼는 거죠. 
무가치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울증과 자살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극적인 일들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삶이 어둡고 칙칙하고 스스로 굴을 파고 돌아가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스스로 소외되어 가고, 자존감이 낮아요. 
자신감도 없어요. 스스로 상처를 받아요. 

여러분 상처받는 사람은, 그냥 가만히 있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데 
혼자 상처를 받아요. '왜 나를 쳐다보니? 기분 나빠!' 안 봤거든요. 
'늘 나를 무시해' 누가 자기를 무시해요? 안 무시하는데, 자기를 무시한대요. 

여러분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 앞에 딱 가면
하나님이 '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아느냐?' 

십자가 진짜 한번 만나면요. 끝나버립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셨는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보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하나님 안에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라고 하는 가치에 눈을 뜨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하실 만큼, 소중한 가치를 가진 나! 
그러니까 그 십자가 사건을 1대1로 만나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만난다는 건 엄청난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병든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입니다. 
여러분 그건 틀림없어요. 늘 비관적이고, 비판적이고, 늘 어둡고 침울하고 밝지 않아요.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긍정적으로 바꿔놓습니다

십자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잖아요. 
나의 약점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끌어안아 주시는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의 모든 약함이 처리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아웃사이더로 살아고, 루저로 살고 변방에 살았다 할지라도 상관없어요. 
갈보리 언덕에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면 달라져요. 
그러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나를 사랑할 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듯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단계로 가야 돼요. 
그냥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그냥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위험해요. 왜요? 
그 안에 자신의 욕망이 끼어드는 거죠. 
이러면 자신의 욕구에 휘둘리는 사랑은, '병적 자기애'로 간다는 거죠. 

그런 잘못된 갈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예요. 자기 사랑에 자기가 병드는 겁니다. 
요즘 많이 목격하는 거예요. 이 사랑이, 병적 애착과 집착으로 가는 거예요. 

결국 파국적인 결과를 맞이합니다. 사랑을 하는데, 상처가 더 많아요. 
그래서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아예 '사랑'이라는 말 자체에 마음이 다쳐버린 사람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우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통제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뭔가 저의를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쏟아 부으시는 사랑입니다. 

찬송가 중에 부담스럽게 하는 찬송가가 하나 있습니다. 
311장인데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부담이 딱 되는 찬송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막 피를 철철 흘리시면서
'너 나에게 뭐 줄래?' 이러는 것 같아요.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피 흘렸다. 너는 어떡할래?' 뭐 이러는 거예요. 

이건 작사자가, 자기의 마음에 고백을 한 거겠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진 않으셨어요. 기억하세요. 주님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어느 찬송가의 작사자가, 자기가 받은 은혜로 고백한 거겠죠. 

그런데 주님이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나에게 뭐 줄래?'
이런 주님이 아니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채무자로 만들어서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너도 이제 죽어라. 따라와라'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를 채무자로 만들어서 
우리를 마지못해 따라오도록 만드시는 분이 아니에요. 

이건 복음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에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자라면 평생 갚을 수 있겠습니까? 못 갚습니다. 
어떻게, 무슨 재주로 갚아요? 

여러분, 우리가 그 봉사나 헌신이 '빚을 갚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게는 못하죠.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애를 쓰지 마세요.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빠져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십자가예요. 
그렇다면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충분히 알고, 받고, 누리는 것보다 더 귀한 건 없어요. 
그거 제껴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그것보다 더 귀한 게 없는데... 
그걸 우리가 기뻐하고 인조이 해야지요. 

여러분, 십자가를 희미하게 경험한 사람은, 무엇을 하려고 해도 동기부여가 안 됩니다. 
그런 분에게 자꾸 뭘 시키니까, 다 도망가버리지요. 교회를 옮겨버리지요.
늘 신앙이 빙빙 도는 겁니다. 

아직 내 문제가 해결이 안 됐어요.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 열심의 뿌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열심이 오래 갈 수가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담금질을 하면, 생명을 천 개도 내가 바치겠다고 나온다니까요. 

하나님이 언제 가장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인해, 우리가 기뻐하고 만족해 할 때!
 
십자가 라고 하는 엄청난 선물을 주셨는데, 그거는 외면해버리고 
딴 거를 열심히 쳐다보고, 거기에 열심을 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황당하신 거죠. 

주님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들, 가상 7언도 보세요. 
주님은 아낌없이 조건 없이, 당신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셨어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와 거래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십자가는 값없이 거저 주신 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에 우리가 너무 성급해요. 아무리 급해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시동이 안 걸렸는데, 액셀레이터를 밟아봐야 차가 나가나요? 안 나가지요. 
사랑에 사로잡히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거잖아요. 

저는 목회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뭐 하라, 하지 말라' 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냥 말씀을 전하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그대로 전하니까, 
그냥 복음을 깨달은 대로 성도들이 움직이니까 교회가 돌아가는 거지...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교회를 움직이려고 하고, 목회를 하려고 하면... 망하는 거예요. 

 

힘줄 것도 없고, 소리칠 것도 없고, 강요할 것도 없고, 혼낼 필요도 없고, 
책망할 필요도 없고... 그냥 말씀이 말씀으로 전달되고, 복음이 복음으로 전달되고, 
하나님의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면... 성도들이 그냥 미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미쳐서 헌신하는 걸 지켜보는 건, 아름다운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갈수록 더 크게 느끼고 있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주님은 사랑을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을 뿜뿜 뿜어내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의 강도를 한번 느껴본 적 있습니까? 1만 볼트? 비교도 안 돼요. 
그냥 나의 온 몸이 반응하는 거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갈수록 그 사랑이 더 깊어지고,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걸 깨닫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렇게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그 사랑에 대해서 내 마음 문을 활짝 여는 거예요. 
마음을 여는 만큼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랑에 눈을 뜬 만큼,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거죠. 

우리에게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 누리지 못하는 거죠. 
어디선가 멈추버린 거예요. 

그 사랑에 깊이 들어가는 경험이 없이, 아니면 아주 초기에 그냥 스탑되어 버린 거죠. 
여러분, 사랑의 경험이 멈추는 것은 위험한 거예요. 
십자가의 사랑에서 비껴난 사람이,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우리를 이끄는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히면, 그 사랑의 나를 이끌어갑니다. 

여러분 부부가 더 깊은 사랑으로 빠져들기 전에, 아이가 생기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서로에 대한 사랑이 무르익어 갈 기회도 잃어버리고, 

그러면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만 늘어나고... 
여러분 사랑이 빠진 의무감은 오래 못 가요. 어느 날 폭파되어버려요. 

그러니까 그릇된 사랑으로라도 만족을 얻으려고 외도를 하는 거고,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음행의 죄는 무엇입니까? 
간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상승배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음행했다... 
이렇게 얘기도 해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 거예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입니다. 결국은 사랑이에요.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십자가야말로 진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거든요. 
이 사랑을 맛보면 치유가 일어나고, 이 사랑을 맛보면 
내 모든 인생의 상처가 싸메어지고, 이 십자가는 사랑의 묘약입니다. 

세상은 거짓된 사랑으로 가득하고, 오염된 사랑으로 가득하고, 
함량이 부족한 사랑으로 가득하고... 여러분 사랑과 욕망은 다른 겁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세상의 사랑은 다 욕망이에요. 참 사랑이 아니에요. 
자기중심적이에요. 파괴적이에요. 결국은 폭력적이에요.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는데, 목이 마르잖아요. 
사랑한다고 하고 결혼했는데, 금방 목이 말라버려요. 그래서 미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전체가) 미친 거예요.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는 거예요. 
사랑은 넘쳐나는데, 사랑하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세상이잖아요. 

여러분, 진짜 사랑은 하나밖에 없어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의 사랑! 
요일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묘합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사람이 관대해져요. 
사람이 부드러워져요. 부드러워지고, 관대해진다는 건 뭘까요? 사람을 품어요. 

여러분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온전한 사랑을 하고 싶어져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도 한번 재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죠. 
자발적 헌신이 일어나요. 희생을 희생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상처 입은 자에게 다가가요. 주님처럼!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자기애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직 나만 사랑하려고 했던, 병적 자기애에서 해방돼요. 
이게 일어나야 진정한 치유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다른 사람에게 온전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거죠. 
왜요? 내가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았기 때문에 
그 온전한 사랑은 나를 치유하게 되고, 치유받는 사람은 
이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내가 이전에 그 사랑 없을 때 힘들게 살았던 내 삶을 생각해보니까, 
과거의 나처럼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거죠. 이게 온전한 치유예요.  

온전한 치유는, 내가 사랑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을 흘려보내지 않고 있다면, 아직 그 사랑은 온전하지 않아요. 
왜요? 자기 안에 아직도 결핍이 있는 거예요. 
내 안에 풍성해야 흘러갈 수 있는 거잖아요.
나도 내가 힘드는데 누구를 사랑해요? 그러니까 자기애에 빠지는 거잖아요. 

여러분, 모든 건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병든 이유는 뭘까요? 왜 이렇게 폭력적이고 사나워졌습니까? 
왜 그렇게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아직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이 세상은 시스템이나 제도의 문제일까요? 경제나 복지의 문제일까요? 
탁월한 인물 부재의 문제일까요? No.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답을 찾아야 돼요. 
십자가 외에 답이 없어요. 
사랑,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십자가의 사랑!

자기 자신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데, 누구를 섬기고 사랑하고 회복시킬 수가 있겠어요?
사고만 치는 거지. 

사랑이 빠지면, 그 무엇으로도 채워도 안 돼요. 
그래서 여러분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러분, 이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누군가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은 거예요. 

우리는 서로 '너가 죽일 인간'이라고 삿대질을 해요. 억울하다고 그래요. 
여러분, 누가 억울한 사람입니까? 억울하다면 예수님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으로서 말이 없었어요. 
침묵하는 그리스도!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시는 겁니까? 아니에요. 
모든 죄짐을 대신 지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침묵하신 거예요.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 적어요. 진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억울함도 없습니다. 
내가 손해보았다는 느낌도 없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억울하다고 소리를 쳐야 될 그 주님은, 도살장으로 잠잠히 끌려가십니다. 
그래서 사53: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다른 사람의 짐까지 지려고 합니다. 

상대를 향해 채찍을 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맞을 채찍을 내가 대신 맞아줍니다. 
내가 나음을 입은 게 끝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가?'가 끝이 아니에요. 
받은 사랑을 드러내는 겁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나보다 약한 사랑을 향해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뜬 사람들은,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누가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 누가 이런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이걸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십자으로 가면 그게 가능해져요. 

여러분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계속 자기만을 사랑해달라고 조른다면 
아직 치료가 덜 된 상태예요. 유아적 사랑이에요.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은 풍성합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마음이 넓어져요. 
시야가 넓어져요. 이기적인 사랑의 몸짓에 멈춰 서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다른 사람의 죄와 문제를 지적하고, 죽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그들의 죄를 끌어안고 울어주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 그래요? 아직 십자가까지 가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회복과 치유를 일으킵니다. 
우리의 상처입은 본성이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상태가 되는 건 아니에요. 
지상에 사는 동안에 여전히 우리는 죄의 증상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때로는 오락가락,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십자가가 저 멀리 있는 거죠. 

그 십자가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허접한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십자가 앞으로 가서, 그 사랑에 이끌려 회복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우리가 십자가로 끊임없이 치유되는 경험을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 그 사랑의 힘이 저와 여러분을 붙들고 있고, 
그 사랑의 힘이 교회를 견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제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라고,
그 상처를 실천해 내는 일은 힘들어요. 그러나 내가 하려고 하면 실패해요. 어떻게 해요?

십자가의 사랑에 내가 깊이 담금질되는 것, 그 사랑에 푹 빠져드는 것,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마음을 입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찬송을 하나 부르고 싶어가지고, 설교를 막 좀 빨리빨리 했는데, 
시간이 많이 갔지만, 그래도 하나 부릅시다. 

"주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이 곡을 저는 너무 좋아해요. 가사가 잘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