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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40장 악한 현실을 대하는 세가지 태도

LNCK 2025. 5. 2. 17:3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https://blog.naver.com/karamos/80141961566

 

악한 현실을 대하는 세가지 태도      렘40:7~12         2008년

 

제가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하며 “하나님께 섭섭한 분 계시다면 손들어 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청중의 3분의 2 정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갈 사람을 천국가게 바꿔줬음에도 불구하고, 섭섭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현실속에 살면서 누군가를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도, 대통령도, 이웃사람도... 원망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다 우리 마음대로 안됩니다.

오늘은 현실이 내 마음에 안 들고 내 뜻대로 안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주전 587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멸망 당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832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두눈을 뽑고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832명이 포로숫자 전체는 아닙니다. 왜냐면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한 것은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차로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의 바로왕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할 때에, 한 번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에 다니엘과 세 친구를 잡아갔습니다.

 

2차로 주전 598년에 여호야김 왕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반역을 했을 때도

침공해서 여호야김을 폐위시키고,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때 군인과 귀족을 포함해서 1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여호야긴은 3달만 통치하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시드기야가 대신 세워졌죠.

이때 에스겔 선지자도 잡혀갔습니다.

 

3차침공인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832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의 숫자는 1만 명이 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차 침공 결과 유다땅에는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과

그들을 지도할 약간의 방백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사반의 손자인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워 남은 빈민들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다랴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40:9절에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세 번이나 침공해서 괴롭히고 멸망시켜

유다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이방 나라의 왕으로, 유다민족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섬겨야 잘되고, 섬기지 아니하면 재앙이 온다고 하니

이 현실이 유다민족에게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겠습니까?

 

예를 들어 북한의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켜 쳐들어와서 수많은 백성을 죽였는데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항복하고 “대한민국 국민이여 김정일을 섬기면 유익하리라”고

공포를 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상도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의 현실이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명하신 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순순히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종교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스러워 마음껏 기도하고

마음껏 예배하며 마음껏 전도하고 선교합니다만, 전세계 현실은 그렇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관용과 격려를 보내는 정부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생각과는 다른 현실, 제 뜻대로 안되는 악한현실 속에 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레미야 40장과 41장을 통해 세 가지 종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현실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  : 예레미야 형

 

아무리 악한 현실이라도,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현실속에 살면서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영어로 “Patient Realism (인내심있는 현실주의)”

혹은 “Realistic Patience (현실적인 인내심)”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렘39:12절에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그의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에게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대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40장을 보면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포로들 가운데 있던 예레미야를 찾았다고

되어 있는데, 라마의 포로집결소에 있던 예레미야를 찾아낸 것 같습니다. 40:1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석방시키고 “네가 바벨론에 가고 싶으면 가라.

바벨론에 가면 너를 선대하고 너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 주겠다.

그러나 네가 바벨론에 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총독 그다랴에게 돌아가서

유다백성들과 함께 거해도 좋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너를 후대하겠다.”라며

예레미야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40:4~5

 

그런데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장받는 것을 거절하고

남아있는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참된 애국자적인 길을 선택했습니다. :6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도 40년 동안 예언했지만,

그의 예언활동은 그 후에도 10여년 더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려는 매국노라고 비난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그는 바벨론과 싸우지도 아니했고, 동족들로부터 도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증거하고,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민족에게 닥친 비극과 멸망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유다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40:3절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섬긴다 하면서도 똑바로 안 섬기니까

너희가 섬기는 신이 너희를 징계해서 이렇게 심판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느냐?”라고

불신자가 신자를 꾸짖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이 모든 비극과 고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 현실 속에서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심판이 임해서 나라가 멸망하는 대재앙이 왔지만, 지나고 나면 또 평안한 시절도 오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아주 망하는 것 같아도, 또 얼마 지나면 사람들은 언제 전쟁이 일어났냐 하며

다 잘 먹고 잘사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괴로운가 해도

또한 그로부터 한 1년 지나면 웃을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더 이상 바벨론이 유다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바벨론은 대국입니다. 쳐들어가서 점령할 때는 강하게 점령하지만

일단 점령하고 난 뒤에는 괴롭히지 않아, 이제는 자유스럽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자기 마음에 안드는 악한 현실이라고 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해 지하에 들어가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거나

영화에 나오는 터미네이터처럼 원수만 골라 죽이는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려운 현실이 죄악 때문에 왔음을 인정하고

어려운 현실도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가운데 있는 것을 믿고 인내하면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며 살아간 것입니다.

 

시편 37편은 다윗이 기록한 시이지만, 예레미야의 삶의 태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37:7~9절에 “여호와 앞에 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현실이 아무리 내 마음에 안들고 악하며 괴롭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 가운데는 죄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현실도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법(률)적으로 의롭다함을 (인정) 받은 것이지

실질적으로 다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 삶에는 죄와 의가 섞여있다 보니, 죄로 말미암아 괴로운 일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이를지라도,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불평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인내심 있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지금 현실이 마음에 안든다 할지라도, 인내하고 하나님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근거없이 낙관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 : 그다랴 형

 

“모든 것이 다 좋게 될 거야 (Everything is fine),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Everything will be OK)”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잘 될 것이라고 하는 근거가 없습니다.

누가 보장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모든 것이 다 좋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경박한 태도를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다랴” 같은 사람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운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사반의 손자로 그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위대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왕의 신뢰를 받았을뿐만 아니라 유다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이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운 것은 이상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출발도 산뜻하게 잘했습니다. 산에 있던 게릴라들을 설득해서

모두 경제건설에 참여시켰습니다. 산에 있는 게릴라들을 다 모아다가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실과와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축하고 너희의 얻은 성읍들에 거하라”

고 했습니다. :12참조

 

이렇게 유다 게릴라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설득해서 성읍에 거하게 하여

경제건설의 역군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바벨론왕에게 저항하지 말고 섬기라 그길이 유익하고 살아갈 길이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에서 피난해 모압과 암몬과 에돔 주변국가에 흩어져 갔던 사람들이

“그다랴”에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희망찬 국가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

 

40:11~12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 사람도

바벨론의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을 위하여 세웠다 함을 듣고

그 모든 유다 사람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

 

이처럼 그다랴의 통치 원년은 최고의 시작이었고, 그는 3-4달 동안은 아주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야하는 길은, 떨어지면 박살나는 골짜기 위의 외줄타기와 같은 길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백성들과 밀착되면 바벨론 왕이 “나에게 반역하려고 하느냐?” 그럴 것이고,

조금이라도 바벨론 왕과 밀착되면 백성들이 “매국노가 될 것이냐?”라고 할 것이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줄타기를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다랴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그 길을 잘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순진했습니다(naive).

착하고 순진한 것은 좋지만, 어떤 때는 이것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그는 너무 사람들을 쉽게 믿고, 현실적인 판단력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40:13~16절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군대장관들이 미스바 그다랴에게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취하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다랴에게 비밀히 말하여 가로되

청하노니 나로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로 네 생명을 취케 하여 네게 모인 모든 유다인으로 흩어지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케 하랴?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르되

네가 이 일을 행치 말 것이니라 너의 이스마엘에 대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 하니라”

 

요하난은 들에서 전쟁을 한 게릴라 장수로서,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총독 그다랴에게 심각한 경고를 합니다.

 

성직자 집안에 태어나 착하고 순진하게만 자란 그다랴에게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암몬왕이 이스마엘을 보내 널 죽이려한다.

그러므로 내가 몰래가서 이스마엘을 죽여, 국가의 혼란을 없게 할것이니

너는 나에게 그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믿어야할 요하난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마엘을 너무나 좋게 생각했습니다.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착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순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요하난의 말대로 이스마엘은 열 사람을 데리고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와 밥을 먹다가 그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41:1~3

그리고 그다랴와 함께한 모든 유다인도 죽이고, 거기 남아있는 바벨론 군사도 죽였습니다.

그다랴의 순진함은 결국 나라의 혼란과 멸망을 초래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살되 너무 순진해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가끔 전혀 현실성이 없는 비전을 가진 청년들을 봅니다.

 

그다랴는 꿈꾸는 자였습니다.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성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 것인 줄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는 소망이 컸습니다. 국가재건을 하고 사람을 모아 경제건설을 이루자는 소망이 컸지만,

그의 소망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유다땅에 남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를 회복시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 70년 뒤에 유다땅으로 돌아와

그들로 인하여 유다왕국이 회복되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살며 괴로운 일이 있을 때에 “모든 것이 잘 될거야.”하는 식의

순진한 생각은, 하나님이 보장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괴로움 가운데서

어찌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 썩어질 세상” 이러면서 마치 영지주의자들처럼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안이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경박하게 살아가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서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합니다. 속이고 사기치고 상처를 주려합니다.

그러므로 근거없는 낙관주의나 현실감없는 순진함은

악한 현실을 대하는 바른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다랴는 모든 것이 좋았지만 너무 순진해서

결국 그는 죽고 나라도 어려운 처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3. 악한 현실을 파괴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 : 이스마엘 형

 

41:1절에 “칠월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왕의 장관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그다랴를 죽인 이스마엘은 왕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소개하는 말에 ‘왕’이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이처럼 그는 유다 왕족인데 느부갓네살이 왕족도 아닌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웠다 해서

“어떻게 왕족인 내가 총독이 안 되고 그다랴가 되었느냐?”며

마음속에 시기심이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쓴 뿌리가 가득해 마귀의 종이되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서양종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동양입니다.

동양에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밥먹을 때 때리고 욕하는 것은 동양의 기본적인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열 사람을 동반하여 함께 식사하던 그다랴를 칼로 쳐 죽였습니다.

총독 그다랴가 죽었는데, 총독의 비서도 호위병도 하나 없었는지

죽은지 이틀이 되어도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41:4

그다랴는 자기 방어를 안 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죽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의 멸망을 슬퍼해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그 몸을 상하며 여호와의 집으로 나아가려는 80명의 애국자들도

마치 킬링필드 영화처럼 살해해 구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80명 가운데 열 명은 “우리가 밭에다가 밀과 보리와 꿀과 기름을 잔뜩 숨겨놨으니

우리를 죽이면 그것을 못 찾는다.”고 해서 살아남았습니다.

 

▲41:5~7절에 “때에 사람 팔십명이 그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에서부터 와서

여호와의 집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울며 행하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여

그들이 성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로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이 울면서 와 80명을 맞이해 가지고 그만 울다가 눈물을 닦고

돌이켜서 구덩이에 던졌으니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스마엘은 결국 거짓과 미움과 살의와 시기심이 가득한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테러리스트였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총독을 죽이고 백성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타협하여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거역하고 파괴하며 적대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실들은

결국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역사한다 해도 마귀도 하나님이 쓰시는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로

하나님 허락 없이는 하나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이 내 마음에 안들고 이해가 안갈지라도

도피를 하거나 저항을 하면 안됩니다. 또 영적인 무기를 쓰지 아니하고

테러리스트처럼 육적인 무기를 쓰는 것도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결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순간순간 의사결정 하기가 쉬운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내 마음에 안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파괴적인 도전을 하면 안됩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낙관론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처럼 우리 삶속에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악한 현실 속에서도 인내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고 사는 것이 바른 길 인줄로 믿습니다.

인내하는 현실주의가 바른 태도로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유다 땅에는 온통 악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제사장도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모두 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항하지도 않으시고, 그들로부터 도피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고 전도하시며 그들에게 천국길을 보여주고 사신 것입니다.

 

천상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우리가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천상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곳은 죽으면 갈 곳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얼마 남지 아니했습니다.

길어야 30-40년 남은 분도 계시고 40-50년 남은 분도 계시며, 며칠 안남은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아직 육체의 호흡이 붙어 있을 때는, 땅의 현실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아무리 괴롭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고

세상을 비관하지 마시며, 세상에 거역하고 도전하며 저항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예레미야처럼 인내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뤄지기를,

그분의 섭리와 승리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절별 해석

 

40:1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본절부터 6절까지는 그다랴에 대한 이야기의 서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다랴는 유다의 총독으로 소개되고 있다(5절).

 

이곳의 무대인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오늘날의 엘-람(er-Ram)이다.

포로들은 여기에 집결, 수용되었다가 바벨론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예레미야도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사슬에 묶여 이곳에 등장한다.

이는 분명히 포로들에 대한 취급상의 어떤 잘못이 있었음을 말한다.

 

즉,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 대해서 상당한 대우를 해주라고 명령했었으며

그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이미 석방 되어 있었다(39:11-14).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을 잡아들이는 책무를맡았던 병사들의 착오에 의해

예레미야는 다시 포로로 잡혔던 것이며, 다른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위해

사슬에 묶여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를 발견했으며, 그 즉시 예레미야를 석방했다.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 파괴 이후 한 달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서 그 성에 대한 파멸을

더욱 철저히 시행하였고, 또 포로들을 끌어가는 대열을 조직하였다(왕하 25:8-12).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 어구는 흔히 어떤 신탁을 선포할때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다음에 신탁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불분명하다.

 

다음 절에서부터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예레미야 설교의 개요가 등장한다.

아마도 느부사라단의 입에서 나온 내용들과 이어지는 사건들이

본절에 언급된 신탁 서론(말씀이 임하니라)에 대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말씀'이란 꼭 예언의 말씀 그 자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계시된 메시지라는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겠다.

 

40:2 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선포하시더니'

본 구절 말씀을 여호와께 대한 느부사라단의 신앙의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본 구절의 화자(話者)가 느부사라단임을 굳이 부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앗수르인들은 심리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전쟁 상대국의 종교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바 있다(왕하 18:22, 33-35).

 

어쨌든 바벨론 당국은 유다의 종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수집하였을 터이며,

특히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예레미야에 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구절에서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요점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는 바를 인용조로 언급하고 있다 하겠다.

 

40:3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임한 것이니라'

여기서도 우리는 갈대아 군대의 장군인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선포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느부사라단은 여기서 예레미야가 전환 메시지

의 대략적인 내용을 지적하면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 이미 예언된 대로 발생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40: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기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이제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든지, 아니면 유다 땅에 남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예레미야에 대한 안전 배려는 이미 느부갓네살이 명령했던 것이기도 하다(39:12).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예레미야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이미 보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바벨론의 '친구'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보다 궁극적인 관심사는 바벨론에 항복하여 안전을 누리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회복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대하리라'의 히브리어 '아심 에트 에니'는

문자적으로 '내 눈으로 (너를) 주시하리라'라는 뜻으로 좋은 대접을 해주겠다는 의미이다.

 

40:5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의 왕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거나 네가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사령관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이 어구에 대해서 니콜슨은 '예레미야가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을 때

느부사라단이 계속 말하였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가능한 해석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남는 것이 네 뜻이라면 너는 그다랴에게로 가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

그다랴의 조부인 사반은 요시야의 대신이었으며,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왕에게로 가져갔던 사람이다.(왕하 22:3-13).

 

사반의 아들이자 그다랴의 부친이기도 한 아히감은 요시야가 파견한 특사의 일원으로서

여선지자 훌다를 방문한 바 있다(왕하 22:12-14).

예레미야가 성전 설교를 하고 또 그가 위험한 상태에 있었을 때

아히감은 예레미야를 보호하기도 하였다(26:24).

 

이제 유다의 새로운 총독이 된 자는 바로 이 아히감의 아들 그댜라인 것이다.

그는 아마 시드기야의 내각에서 상당한 행정적인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B.C. 6세기 초로 연대가 추정되는 라기스의 인장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그댜라에게 속한 것, 그 집 전체에 대해서'라는 어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표현은 왕의 총리 대신에게나 사용될 수 있던 어구였다.

 

40:6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 그와 함께 사니라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그다랴의 행정부는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다.

아마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애 2:13, 4:1).

 

미스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3km 가량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텔 엔-나스베(Tel en Nasbeh)란 곳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도시는 수세기에 걸쳐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삿20:1-3, 삼상 7:5-14, 10:17).

 

한편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의 위치를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오늘날의 네비 사무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의 견해가 보다 우세하고,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갔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41:17에서는 그가 미스바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옮겨 갔음을 암시하는 내용도 보인다.

 

40:7 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이 바벨론의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그 땅을 맡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바벨론 군대의 소탕 작전을 피해 달아났던 유다군 패잔병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바벨론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본절의 '빈민'이란 아마 대부분 시드기야 이전 왕조의 특권 계층에서 소외되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40:8 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그들의 사람들'

얼핏보면 그다랴는 그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는 숨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폐허를 복구시키는 작업에 협조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유다 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 군대를 피해서 달아났던

군대 장관이나 방백들이 있었다.

 

유다 지역은 지리상 많은 언덕과 구릉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안전하게 숨겨줄만한 그런 은밀한 장소가 많이 있었다.

한편 이들 지도자들의 이름들이 여기서 거명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을 주도할 자들이 이들 중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들 중에는 왕가의 일원이기도 하며 또한 그다랴를 암살하게 될

'이스마엘'이란 자가 포함되어 있다.

 

40:9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다랴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지휘관들을 무마시키고

그들에게 안전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그다랴는 그들에게 맹세하면서 말했다.

즉, 그들이 지금이라도 반바벨론 입장을 확실하게 철회하면

바벨론 사람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왕하 25:24).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안전은 이 땅에 거주하고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었다.

 

'유익하리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야타브'는 '더 잘되다', '은총을 입다', '즐겁다'

등의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암시 한다.

 

40:10 보라 나는 미스바에 살면서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장하고 너희가 얻은 성읍들에 살라 하니라

 

'나는 미스바에 거하여...갈대아인을 섬기리니'

'갈대아인을 섬긴다'고 하는 말의 문자적 번역은 '갈대아인들 앞에 선다'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한 법적 처리 절차를 위해

그다랴가 유다 백성들과 갈대아 관리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본 구절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건대, 여기서는 특히 이스마엘 일행과 같은 패잔병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나서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40:11 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 사람도 바벨론의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을 위하여 세웠다 함을 듣고

40:12 그 모든 유다 사람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

 

모압이나 암몬, 그리고 에돔과 그밖의 지역으로 피난갔던 유다 난민들은

그다랴가 유다 총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남은 자들과 합세하여

황폐해진 땅을 경작하고 좋은 실과들을 거두게 되었다.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

 

황폐해진 이 땅은 다시 평정을 찾으며 일이 예전처럼 잘 진행되고 있었다.

생업이 재개되었고 정상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갑자기 그다랴를 암살하려는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40:13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모든 군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40:14 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그다랴에게 합세했던 군대 장관들 중 하나였다.

그는 이들 군대 장관들의 대표로서, 이 새 총독에게 나아가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경고해주었다.

 

즉 암몬 왕 바알리스가 왕가의 일원인 이스마엘을 부추겨서

그다랴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겔21:18-32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B.C. 587년 서방 원정을 계획했을 때

그는 유다 뿐만 아니라 암몬도 공격하고 했는데,

아마 이들 두 나라 모두가 느부갓네살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시드기야는 애굽보다는 암몬으로 달아나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39:4, 5 참조).

 

또한 여기에는 이스마엘이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는 것으로 암시되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음모에 연루되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수가 없다.

 

그가 왕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41:1) 어쩌면 그는 유다에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계획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행을 저지르고 난 직후, 그가 정권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암몬으로 달아났던 것으로

보아서 이는 그다지 설득력을 지닌 것같지 않다.

이보다는 그가 어떤 정치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바벨론을 자극하고 괴롭히려는

동기에서 그러한 짓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낫겠다.

 

40:1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다랴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되 청하노니 내가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가 네 생명을 빼앗게 하여 네게 모인 모든 유다 사람을 흩어지게 하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하게 하랴 하니라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남은 자로 멸망을 당케 하랴'

요하난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임명된 유다 총독이 살해될 경우

얼마나 큰 위험이 닥칠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그다랴 주변으로 모여든 유다인은 다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또 남은 자마저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스마엘이 꾀하고 있는 이런 야만적 행위는

이 땅의 남은 자들을 근거로 해서 수립될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을 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살려 놓아서 국가의 장래를 그르치게 하기보다는

비밀리에 그를 살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40:16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르되 네가 이 일을 행하지 말 것이니라 네가 이스마엘에 대하여 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 하니라

 

'네가 이 일을 행치 말 것이니라'

그다랴는 요하난이 잘못 알고 있었거나 또한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화해와 단결을 솔선 수범하여

국토 재건에 매진하고자 하는 생각에 깊이 사로 잡혀 있었으리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