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길, 희망의 여정 룻1:6~ 22 2025.04.27.
룻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주 골치 아픈 때입니다. 외적의 침입, 내부의 분열...
가장 두려운 게 내전입니다. 동족끼리 서로 죽고 싸우는...
그래서 베냐면 지파는 완전히 멸절될 뻔 했잖아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올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흉년이 다가왔습니다. 설상가상이죠.
그러면 사회가 그래도 웬만큼 안정되어 있으면, 흉년이 들어도 이겨낼 수 있는데,
정치가 불안하고, 백성들은 제멋대로인데, 심각한 경제난까지 닥쳤습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싶은 때입니다.
그런데 룻기의 마지막 절은 이렇습니다.
4:21~22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영어나 히브리어로 보면, 룻기서의 맨 마지막 단어가 '다윗'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여러분 시작은 정말 골치 아픈, 뒷목 잡게 하는 패역한 시대,
절망적인 시대인데, 마칠 때는 '다윗'이라는 희망의 이름으로 마칩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아이콘이에요.
한국 국민들, 국가대표 축구팀이 헤매면 꼭 하는 말이 있죠. '히딩크'
지금 2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히딩크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가 흔들리면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 얘기하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윗은, 히딩크 플러스 이순신 플러스 세종대왕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큰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기>는, 하나님께서
'절망의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 가시는가?' 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민족의 앞날을 말하면서, 희망을 말하고,
마찬가지로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하면서, 희망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즐거움, 유쾌함'
남편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이름만 놓고 보면, 완벽한 가정이네요. 완벽한 부부예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고, 유쾌함 즐거움이 있는 가정!
더군다나 이들이 사는 동네는 '베들레헴' 떡집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살기가 힘들어졌어요.
그러던 중 잘 살고 싶어서, 나름대로 희망을 찾아서 모압으로 갑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모색하고 해서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 합니다.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가거나, 사업을 시작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직장을 구하거나...
그런데 그 선택들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는 예가 많죠.
잘 살겠다고 한 선택이, 더 나빠지는 결과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1: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이게 무슨 말이죠?
분명히 흉년이어서, 살기 힘들어서, 모압에는 양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압으로 이민까지 갔다고 그랬는데, '내가 나갈 때 풍족했다니' 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까?
여러분, 사실일 거예요. 진짜 풍족했으면 외국으로 이민 안 갔겠죠.
먹고 살기 힘드니까, '이렇게 있어봐야 희망이 안 보인다' 싶으니까 이스라엘을 떠났겠죠.
근데 지금 쫄딱 망하고 나니까, '그래도 그때가 괜찮았다' 싶은 거예요.
그때는 가난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남편이 있었잖아요. 장성한 두 아들 있었잖아요.
여러분 그러면 괜찮지 않습니까? 나도 아직 젊어요. 먹고 살 수 있어요.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 그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여러분 가난,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합니까?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해요. '빚 없으면 부자야!'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어떤 분은 '빚이 좀 있어도, 가족들이 다 건강하면, 그게 부자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몸이 건강하면, 뭐라도 일해서 벌 수 있잖아요. 회복할 수 있잖아요.
▲오늘은 '장애인 주일'로 지키는데, 집에 환자가 있어도, 장애가 있는 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냥 별일 없이 살아가는 가정들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여러분, '나는 못 살겠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 그래도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풍족한 가정일 수 있는 거예요.
인생에는 정해진 '바닥'이라는 게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왔다 생각했는데, 그 밑에는 싱크홀도 있고요,
오늘도 많은 가정들이 그 '밑바닥'과, 더 아래 '싱크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서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거기서 남편이 죽습니다.
얼마 후에 아들 둘을 차례로 장가 보냅니다.
'그 결혼식 날이 어땠을까?' 저는 생각해 봅니다.
저도 장례식이나 결혼식을 주례하고 나면,
때로는 참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식들이 있습니다.
어떤 결혼식에서는, 신랑이 앞에 서 가지고 우는데요.
그 좋은 날에 장례식보다 더 슬프게 울어요.
몇 년 전만 해도 단란한 가정의 참 자상한 아빠 이었는데,
신앙생활도 잘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자기 결혼식을 불과 며칠 앞두고
갑자기 건강하던 아빠가 하늘나라 가셨어요.
그 신랑의 아빠는 50대였어요.
그 경사스런 자기 결혼식 날에, 이 아들이 결혼식을 하면서 우는 겁니다.
저는 속으로 '자기를 키워 준 아빠를 생각하는구나...'
온 하객들, 그 집안 사정을 아는 분들은 다 울었습니다.
지금 나오미의 처지가 이와 비슷하다는 거죠.
말론 기룐 두 아들을 결혼시키는 날, 나오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기쁜 날인데, 혼주가 없잖아요.
'내가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와서... 이게 뭔가?'
그러면서 또 희망을 가지는데, 결혼식 다음에는 뭘 기다립니다.
여러분 10년 가까운 생활, 10년 동안 모압에서 살았고, 그 사이에 두 아들 결혼시켰고,
여러분, 어른들이 장성한 자녀들 결혼시키면 뭘 기다리죠?
'뭐 좋은 소식 없냐?' 하면서 손주를 기다리잖아요.
지금도 결혼 후에 2년, 3년만 지나도, 어른들이 걱정합니다.
'보약 한 재 지어줄까?'
그러는 동안에 첫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도 죽습니다.
여러분, 한 가정에 남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이때 기준으로 대를 이을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나락으로 그 가정이 떨어진 거예요. 그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룻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돌보신다'는 히브리어로 '파카드'인데,
'찾아오신다. 돌보신다' 라는 뜻이죠.
pay attention to, observe, attend to, visit
요셉이 유언했죠.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창50:25
그 말은, 모세를 통한 출애굽, 그리고 이게 멀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예언한 말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일상적인 소원, 기도 제목에도 이 말을 씁니다.
'사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돌보셔서 아기를 주셨다' 창21:1
이때도 '파카드'가 쓰였죠. 본문1:6절에도 '파카드'가 쓰였습니다.
이 말을 그냥 액면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제적인 어떤 회복을 주실 때에,
안되던 사업을 펴주실 때에 '지금까지 안 돌보고 계시다가, 이제부터 슬슬 돌봐줄까?'
여러분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여기서 성경 자체의 목소리로, 성경의 증인으로
하나님이 돌보시기 시작하셨다 라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소문을 들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기대를 섞어서 생각하고, 말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의 생각 안에서, 자신의 수준, 자신의 경험,
그 문화적 배경, 혹은 편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나름대로의 신학이 있는 거예요.
신학교 안 다녀도, 하나님에 대한 나름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는
나름의 신학이 있는 거예요. 나오미의 신학, 그의 하나님 관은 어떤 분인가요?
:13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또 :21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대요.
내가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이 나를 치시고 공격하시고 괴롭게 하셨다고 말했죠.
여러분, 하나님 이런 분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겠어요?
피하고 싶겠죠. (그래서 이민을 혹시 간 것을까요?)
여러분 성경에 보면 '환난 날에 여호와께 피하라' 그랬어요.
여호와께 피하면 사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여호를 피하고 싶어요. 믿음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겁니다.
엘리멜렉의 뜻이 뭡니까?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었다가, 아니었다가,
우리를 다스리셨다가, 안 들으셨다가... 그게 아니고요.
언제나 우리의 왕이신 줄 믿습니다. 쉬지 않고 돌보시는 거예요. *1:6, 파카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에는 그래요. '하나님 우리를 찾아오셨다. 돌보셨다.' 1:6
'계속해서 취직시험에 떨어졌다가, 이제 합격했다.
계속 사업이 힘들었다가, 이제 좀 허리 펴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제야 돌보시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고,
즉 '지금까지 우리를 계속해서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셨다'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는 줄 믿습니다.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도, 임신을 아직 못하고 기다리는 가운데도,
그래서 여러분, 여기 지금 '돌보신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왜 우리는 임신 못하지?' 라는 그 기막힌 탄식이,
그 이야기 속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렇죠. '왜 우리 집에는 아기를 안 주시지?'
'왜 우리는 돌보아 주시지 않는 건가?' 하는 이스라엘의 질문이 있는 거예요.
룻기는 바로 이런 질문을 다룹니다. 그리고 새로운 답을 얻게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은혜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언제나 잊지 않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면, 바뀌는 거예요. 사람이 바뀌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룻기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그런 설교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떠나지 말아야 했는데, 그 믿음의 자리를 떠나서 벌받았다.'
이런 식의 해석이 틀렸다고 딱 말하기에는 좀 부담이 되지만,
성경의 강조점이 그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세요. '룻의 가정이 왜 떠났나? 그러니까 망하지!' 그런 말이 아니예요.
여러분, 그게 잘했다는 말이 아니고, 성경의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생기고, 어려운 일도 만납니다.
뭐 사업이 잘 될 때도 있지만, 망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 모든 일에, 사사건건 '이거는 잘못했고, 그래서는 안 되고,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그때 결정을 잘못했고...'
여러분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때 이사를 가지 말았어야 돼'
'그때 여기에 집을 사지 말고, 저기 다른 데 투자했어야 돼'
'그때 아이들이 다른 전공 시켰어야 돼'
'그때 좀 힘들어도 유학 보냈어야 돼'
'내가 그때 이 사람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돼' ... 이런 거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후회가 깊어지면, 죄책감으로 번집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책감은 그냥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죄책이라고 하는 게, 너무 무겁거든요.
그것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남을 비난하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그랬잖아, 아빠 때문에 그랬잖아'
후회가 깊고 죄책감이 무거울수록, 서로 비난하게 됩니다.
▲여러분 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줄 믿습니다.
<룻기>는 '너가 이렇게 잘못했지? 벌 받아야 해!' 이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호세아 6: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여러분, 위기의 때에 우리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여호와를 힘써 아는 일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바뀌어요.
그래서 이런 바른 신학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
룻기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지?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러시지?' 그게 아니고요.
우리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어려운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 니다.
'백성을 돌보시사' 1:6
그것을 놓치면, 내 시야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거예요.
▲여러분, 이 쓰라린 마음을 안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짐을 챙겨 길을 나서는 장면입니다.
1:6~7절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출발은 같이 했어요.
모압에서부터 헤어진 게 아니라, 두 며느리와 일단 같이 길을 갔어요.
도중에서 길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하면서 학생들 데리고, 이스라엘 요르단 성지순례 간 적이 있는데요.
마치는 날에 '여러분들이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놀랍게도 가장 많은 학생들이, 본문의 이 대목,
'룻과 나오미가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왔으면, 아마도 이쯤에 고개를 넘어설 것이다'
하고 추정하는 그 황량한 광야길이 가장 인상적이었대요.
그 광야길에 아름다운 건물도 없고요. 유적도 없고요. 팻말도 없고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거기서 성지순례팀이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현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룻과 나오미가 어디쯤, 어떤 분위기에서 헤어졌을까?'
과거 서울역이나, 김포공항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서로 헤어질 때,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그랬잖아요.
나오미는, 아마 그 언덕 위에서, 이제 저 너머에 이스라엘 땅이 보입니다.
(모세도 모압의 비스가 산 언덕에서,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본 적이 있었지요)
나오미는 룻에게 '너는 이제 집에 돌아가라.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
'여기까지도 동행해 준건만 해도 고맙다'는 거죠.
요즘도 할머니, 할아버지 등 연로한 어른들을 혼자 보내기가 힘든데,
옛날에 이때는... 더 힘들었겠죠. 서로 울고 불고 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유쾌하게 돌아갈 수도 없어요.
모압에 올 때, 아마 베들레헴의 집도 처분했겠죠.
처분할 필요도 없이, 빚이 쌓이고 쌓여가지고, 집이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나오미의 나이, 건강상태 추정을 해보면
2장, 3장에 보면, 룻이 혼자 가서 이삭줍기 하잖아요.
그런데 나오미의 성정으로 보았을 때, 조금만 건강했어도
'나도 가겠다. 나도 힘을 보태겠다' 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룻만 보내고, 자기는 안 가고 집에 앉아 있잖아요.
그만큼 노쇠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할머니 혼자 베들레헴까지 가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짐승을 만날지, 강도를 만날지 모르고요.
아니 그냥 뙤약볕에 기진해서 쓰러질지도 모르는...
설령 베들레헴까지 무사히 간다고 해도, 편안히 산다는 보장도 없는...
그래서 여러분, 며느리에게 '돌아가라' 이거는, 요즘하고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며느리들이 울면서 '못 돌아간다' 그러죠.
나오미가 재차 간곡하게 '너희 나라 모압으로 가라' 그러니까 오르바는 떠납니다.
그러니까 이 시어머니는 '나는 나 혼자 가면 고생길에 열렸고, 죽을 가능성이 더 많은데,
그래도 나 살자고 며느리들 앞길을 막아서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죠.
그러나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 나섰습니다.
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미래형 문장입니다.
Your God will be my God 이거는요. 신앙 고백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하나님을 믿고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 결단의 선포예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 장면이 자신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순간이고요.
여러분 아시죠? 한 사람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때에
하늘에서 천군 천사가 기뻐하며 잔치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장면인 거예요. 이전에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분 나오미가 오랫동안 며느리 전도하려고
이방여인인 며느리들을 위해 기도해 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그 열매가 맺힌 거예요. 할렐루야!
그리고 룻은, 며느리들을 (과거에는 '자부'라고 불렀죠) 모압으로 돌려보내려 했던 것은,
'내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었던 거예요.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겁니다.
믿음의 세계로! 그의 인생 2막, 아니 3막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거죠.
룻의 그 신앙 고백 앞에서, 나오미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룻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나오미를 통해서죠.
나오미가 강요는 안 했을지언정, 나오미의 신실한 삶과 믿음,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룻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게 되었고, 이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나오미는, 믿음이 완전히 바닥입니다. 완전히 메말라 있습니다.
'하나님께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 이렇게 절망적인 소리나 하고요.
그런데 이 나오미, 이 부족하고 시원찮은 믿음의 나오미를 통해서
믿게 된 룻이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 그런 분들이 계실 거예요.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으려고,
믿음을 가르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시원찮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이에요. 이 자녀가 나보다 예수를 더 잘 믿어요.
나는 막 헤매고 흔들리고 그러는데, 어느 순간에 자녀가, 며느리가
'아버님, 너무 염려 마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시잖아요!'
여러분, 이런 은혜가 여러분 가정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나에게 달려있는 게 아니에요. 나를 통해서 믿음이 흘러가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줄 믿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예수 안 믿는 남편과 결혼했는데, 남편이 결혼하려고 교회에
같이 나온 거예요. 남편이 서울대 박사하고 MIT 포스닥 갔는데,
남편이 교회 다니긴 하는데 시원찮아요. 마음에 안 들어요.
교회 가면 맨날 졸고... 그래서 '우리 남편이 어떻게 좀 예수 잘 믿을까?' 하다가
미국 코스타 집회에 남편을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이 남편을 깊이 만나 주셨어요.
그 남편이 선교사를 하겠다고 헌신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잘 믿던 그 부인이, 급당황 했습니다.
'뭔 소리야? 한국에 돌아가서 교수해야지!
한국 가서 교수하고, 그냥 착하게 예수 잘 믿으라 그랬지,
내가 예수 좀 열심히 믿으라 그랬지, 선교사 되라고 그랬나?'
여러분,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고, 소명도 하나님 주시는 줄 믿습니다.
결국에는 이 가정이 중국에 가서, 얼마나 아름답게 부부가 다같이 감사하며
사역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전도는 내가 하지만,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건 내가 하는 것 같지만,
나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줄 믿습니다.
'나처럼 못난 사람을 통해서 전도받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예쁜 믿음을 가졌나?'
그러면서 전도한 우리가, 하나님을 예전보다 더 깊이 알게 되는 거예요.
나오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룻의 믿음이
희망의 통로가 됩니다.
누구나 흔들리고 때로 절망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삶에 동행하는 이를 보내주셔서,
희망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흔들리면 네가 잡아주고, 네가 넘어지면 내가 일으켜주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믿음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넘어지는 사람, 흔들리는 사람을 데리고 같이 가려면 힘들잖아요. 그가 짐이잖아요.
그런데 언젠가 그 사람이 나를 일으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믿음의 삶을 살아본 분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가 자기 삶에 '짐인 줄 알았는데, 힘이었습니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아이들 돌보느라 정말 정말 힘들게 살았어요.
'어떻게 사셨어요? 저 아이들 다 데리고...'
이분이 하는 말이 '이 아이들이 없었으면, 나는 못 살았을 것입니다.'
짐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공급하시는 거예요.
그게 믿음의 신비이고, 돌봄의 능력입니다.
▲지난 목요일날 이 자리에서 컨퍼런스를 했습니다.
CTS에서 방송국에서 주최해서, 강사님들 모시고 참 귀한 말씀을 들었는데
여러분 꼭 한번 유튜브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자살 예방' 운동하는 목사님 모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떤 청소년이 집 옥상에 올라갔어요. 왜 올라갔겠어요?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뛰어내리기 직전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내가 강아지 밥을 안 주고 왔구나. 내가 죽고 나면 이 강아지는 어떡하나?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강아지가 굶어 죽으면 어떡하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옥상에서 내려가 가지고, 강아지 밥을 주고 나니까, 마음이 좀 진정이 됐어요.
그래서 안 죽고 살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돌봄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잘 살아야지...' 그거는 언제든지 꺾일(중지될) 수 있습니다.
내가 힘을 내서 폼나게 살아야 하는 건, 언제든지 그 의욕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사랑이라는 걸 한다면, 돌봄의 뭔가를 한다면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공급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관계가 서로 서로 그런 거였습니다.
정말 짐 같은 사람을, 돌보아 주었는데,
그게 곧 자신을 돌보게 되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장애인주일에, 특별히 우리 장애인 교우들, 부모님들 위해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짐을 능히 감당할 힘 또한 우리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줄 믿습니다.
'희망이 없다' 그럴 때 동행자를 붙여주셔서, 하나님은 나에게 희망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장애인 가족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서 동행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희망을, 함께 찾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