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부르심, 소명> ▣복음 관련
https://www.youtube.com/watch?v=7wqtqrf5VOg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창12:1-2 2025.04.04.
우리가 성경을 대하다 보면 무엇을 느낍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봐야 될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에요.
영어로 치면 I will, '하나님의 의지' 입니다. 그 의지는 무슨 의지냐면,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목적, 구 목적을 이루시고자 하는 의지예요.
성경은 전부 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가지시고,
당신의 계획을 가지시고, 모든 사건과 스토리를 이어가시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있는 거죠.
하나님은 그 의지를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고,
그러니까 모든 역사는, 그분의 목적을 따라, 그분의 계획에 의해서 돌아가는 거에요.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세상이 그냥 돌고 도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에, 사람들 사이에,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역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모든 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 중에 하나가 로마서 8:28절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눈을 떠야 되는 부분이에요.
우리 행위와 우리의 노력이 먼저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먼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도 그렇고, 어떤 인물을 보면서도,
그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무엇인지를 눈치를 채야 돼요.
이제 성경을 보면서, 자꾸 우리 눈이 그 방향으로 열려져야 되는 겁니다.
◑부르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 창세기 12장이 그런 면에서 아주 뚜렷하죠.
아주 유명한 구절을 가지고 오늘 제가 설교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 보면 창12: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여기 엄청난 얘기가 나와요.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부르시죠.
한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언제나 성경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씨'는 무엇을 가리키느냐?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열방을 복을 주시는데, 그 아브라함의 씨는 누구를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12:1절에 지금 한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 한 사람 Abram 안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딱 들어가 있죠.
이 아브라함을 통해, 열방을 모든 민족을 복주시겠다...
그게 누구를 통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 짧은 한 절 안에 들어있는 거죠.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드라마가 ,이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통해 시작돼요.
아브라함은 지금 그걸 모르겠죠?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겠죠.
그러니까 이 12장은 강으로 치면 출발지에요. 출발, 상류 발원지.
처음엔 작게 시작된 이 구원의 강이, 나중에 거대한 강을 이루는 거죠.
그래서 흘러 흘러 강이 더 넓어지고 더 풍성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강이 어디로 흐르는 거죠?
그래서 구약 전체를 흐르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미미해 보이는데, 갈수록 강력하게 형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스토리는, 처음에는 매우 미미해 보이고, 그리고 작아 보이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데, 그게 점점 커진다는 거예요.
▲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는데, 시작점이에요.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상태는, 미신, 무지, 우상숭배 속에서 살던 그를 부르신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의 상태는 크게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무지예요. 두 번째는 우상숭배예요.
그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부르신 분의 의도가 분명합니다.
그 의도와 목적이 분명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 매우 중요한 게 달려있어요.
부르심이 없으면, 아직 우리는 시작이 안 된 거예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이제 모든 역사가 출발되는 거예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거예요. 믿음의 조상으로서 시작점이 선명한 거죠.
12:1절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
그래서 여러분, 모세를 부르신 장면이 있죠. 분명한 부르심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은, 한 사람을 지목하십니다.
다윗을 부르시죠.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울을 부르십니다. 내가 나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예요.
▲자 이렇게 하나님이 부르실 때, 특징이 뭐냐 하면... 개인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1대1이에요. 1대1,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여러분의 신앙이 여기서 매우 결정적입니다. 1대1이에요.
1대1 이란 말은 뭐냐면, 인격적인 만남이에요. 인격적인 부르심이에요.
여러분, 우상을 숭배할 때의 특징이 뭐예요? 비인격적이에요.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이 특징이 뭐예요? 비인격적이에요.
여러분, 돌하고 나와의 관계는 아무리 오래 있어도 깊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인격 대 인격의 관계,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핵심 중의 핵심이에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저는 오늘 밤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1대1로 만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부흥회나 집회 중에 부르심을 받았다... 할 때, 개인적으로 부르세요.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말씀하세요.
물론 공동체인 교회에 주시는 말씀들이 있어요.
그러나 부르심은 반드시 개인적이에요.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아야 된다고요.
1대1의 만남, 인격적인 만남, 하나님은 단체 카톡방을 사용하지 않으세요.
개인 전화로 불러주세요. 1대1로 콜하세요.
개인적이라는 것은 매우 내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겁니다.
이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로 잘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1대1의 관계 속에서, 그 부르심의 경험은 독특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부르심이 다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각각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대1 이 관계는 모호하지 않습니다. 집적적이고 확실합니다.
부정할 수가 없어요. 거부할 수 없는 개인적인 만남이라는 거예요.
둘만이 아는 비밀이 쌓이고요. 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친밀해지는 겁니다. 더 깊어지는 겁니다. 점점 쌓여가는 거잖아요.
여러분, 부부가 오랫동안 살면서 깊은 인격적 관계 속에서 부부 생활을 하니까
부부가 서로 깊이 아는 거죠. 그리고 친밀해지는 거에요.
그 깊어진 만큼 풍성해지는 거에요. 그게 인격적인 만남이에요.
둘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있는 거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런 거래요.
여러분, 이 개인적인 부르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여기에서 시작해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헷갈리면 계속 헷갈려요.
어떤 분은, 신학교에 왔는데도 이게 (부르심이) 헷갈리는 분이 있어요.
부모님이 그냥 자기와 상관없이, 서원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떠밀려 온 거예요.
자기가 원해서 온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내 그 기숙사에서 담배 피우고 하다가
나중에 결국은 목사 안수를 안 받더라고요. 다른 데로 빠지더라고요.
본인은 쌩뚱맞은 거예요. 본인은 한 번도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고,
주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고,
주님과 영적인 교제와 교통과 경험이 없어요. 비밀이 없어요. 억지로 교회에 다닌 거죠.
그 교회라고 하는 문화에 그냥 재미있어서 왔다 갔다 하고,
뭐 학생회 회장도 하고, 부회장도 하고 하는데... 주님과 일대일의 만남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는, 또는 주의 종은 개인적인 체험이 있어야 돼요.
사람들마다 다른 거예요. 이건 인격적 만남의 체험인 거죠. 영적인 체험!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경험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내 존재를 그분께 맡길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주님께 내 인생을 맡길 수 있어요? 없어요!
1대1의 그 만남을 통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는데,
내가 그분께 어떻게 내 인생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겠어요?
불가능한 거죠.
다른 게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다는 게 분명해야 돼요.
그게 모호하면, 막연하면... 안 되는 거예요.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야 된다'는 거죠. 12:1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그 목적지를 모르는 거예요.
목적지를 데려가실 그분을 신뢰해야 되잖아요.
◑말씀을 통해서 나를 부르십니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1) 직접 부르시기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신 거예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2) 가장 보편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경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런 설교 시간에,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목사를 통해서 말씀을 듣지만,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목사의 입술을 통하여, 나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러니까 레마로 들린다는 거 아니겠어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말씀을 통하여!
3) 구약시대 때, 때로는 꿈을 통하여, 환상을 통하여 부르시기도 하셨어요.
(오늘날 회교권 선교지에서, 가끔 이런 일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아니면 워낙 개종이 힘드니까, 하나님은 꿈과 환상을 통해, 그에게 찾아가기도 하시죠)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씀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큐티를 할 때도 마찬가지고,
보통 때는 큐티를 해도 그냥 지나갔는데,
어느 날 아침에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는데,
성령이 강하게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떨릴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 말씀이 그냥 성경책 속에서 밖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이 말씀이 그냥 살아있는 말씀으로,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나에게 다가오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들이, 성령의 음성으로 들려집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어느 (특별한, 개인적인, 레마의)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요.
성경에 많은 구절이 있는데, 어떤 구절이 그냥 나를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는 거죠.
그 구절 말씀을 날마다 붙드는 거죠. 그게 10년, 20년 이상 갑니다.
그 구절만 보면, 하나님이 처음에 생생하게 들려주셨던 그 음성을,
내가 마치 어제 받은 말씀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도록 만들어 졌어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화가 됐단 말이에요.
소통이 가능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어버리고, 하나님의 소통이 끊겨버리고,
그렇지만 하나님은 대화를 원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하나님은 우리 신약성도들과 늘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익혀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신약 성도들)이라면,
이제 하나님은 그냥 그들에게 '네가 알아서 살아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자녀된 성도들을 계속 인도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야 돼요.
그걸 훈련해야 돼요.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분이세요. 우리가 '듣는 법'을 배워야 돼요.
어떤 때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세요.
어떤 때는 그냥 폭풍우처럼 말씀하시기도 하고, 욥38:1, 40:6
너무 말을 잘 안 들으려하면, 어떤 때는 독특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구원의 부르심 ☞ <부르심, 소명>
여러분, 구원의 삶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의 시작이에요.
이전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상관 없이 살았습니다.
근데 이제는,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을 통하여 부르시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음성을 듣는 삶이, 이제 시작된 거예요.
여러분들의 귀가 열린 게 된 거죠.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주로 무엇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느냐?
복음을 통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부르심에는, '구원의 부르심'과 '사명(사역)의 부르심' 또 '직업적 소명의 부르심이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콜링이 들어 있어요. *구원의 부르심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랑하시기에 십자가까지 죽으시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죄 아래 무가치하게 살았던 나를 위하여,
그 하나님의 아들, 죄 없으신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이제 그를 믿음으로써 나의 모든 죄는 용서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와르르 과거의 내가 무너지는 거죠.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십자가의 복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콜링을 들었습니다. 복음에 콜링이 들어있어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이게 개인적으로 오는 사건이 되면서, 즉 십자가 사건이 나의 개인적인 사건이 되면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그때 고백하게 되고, 그 압도하는 그 은혜를 내가 경험하는 순간,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는 거예요. 그게 부르심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입니다.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없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지 않으니까, 하나님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
그게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
그래서 그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복음 안에 부르심이 있어요. *'구원의 부르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건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
그 놀라운 사랑,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 앞에 무너지는 거잖아요.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초특급 태풍 같은 게 휘몰아치면서
내 존재를 흔들어 놓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그게 부르심이란 말이에요.
▲보통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쓰시니.. 특별해 집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특별해서 부르신 게 아니에요.
여러분,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요.
특별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아요.
여러분, 아브라함이 특별한 게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무슨 특별한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 누가 쓰임을 받으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와 다르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은 쓰십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그 누구도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그러셨어요.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세요. 특별하다면 뭐가 특별하죠?
하나님이 사용하시니까 특별해진 거지,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가 특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니까 특별한 게 된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특별한 사람은 없어요.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근데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특별해지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순간, 내 인생이 특별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니까,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된 거예요.
그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이 특별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가 특별해지고 싶어 합니다. 위대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모두가 주연이 되고 싶어 합니다.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한 기도 제목이 다 닮은 꼴이 있어요.
'우리 아이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그러니까 꼬리는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머리예요.
그러니까 박 터지도록 서로 싸우고, 다 머리가 되려고 하고, 심지어 피흘리기까지 해요.
설거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모두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세요.
여러분 '영적 거인' 그런 말은 없어요.
무슨 거인이 있어요? 하나님의 손에 잡혀지는 게 중요해요.
(*폴 워셔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영적 거인은 없다'고요.
즉 사람들은 자기를 보고 '영적 거인이다'라고 평하는데, 자기는 보통 사람이라는 거죠.
그래서 설교를 하고 나서도, 너무 부담되어서 괴로워 할 때가 종종 있다고 했습니다.
다들 '영적 거인'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어서, 너무 불편하다는 거죠.)
그렇지만 보통 사람, 보통 사건도, 하나님의 손이 개입하시면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정권은 하나님에게 있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여러분, 내가 얼마나 잘 갖춰졌느냐, 내가 능력이 있느냐, 재능이 있느냐,
공부를 많이 했느냐... 이게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져야 돼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부들입니다. 갈릴리 촌부들, 평범한 사람들...
그 시대에 어떻게 보면, 제도권에서 보면,
완전 변두리, 촌사람들이에요.
근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뒤에, 그들은 역사적인 존재들이 되잖아요.
여러분, 베드로의 이름이 얼마나 유명해졌어요?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하신, 본문 창12:2절의 말씀이 성취된 거예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2
아브라함만 그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영어권 나라에 가면, 남자들 이름이 전부 다 피터, 폴, 존, 제임스...
그 이름들이 전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이름들이 된 거예요.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된 거죠.
평범한 사람을 불러 특별하게 하시는 거예요.
특별하기 때문에 쓰임 받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특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세상에 약한 자를 들어 쓰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왜요?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떠나야 돼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창12:1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는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그때 믿음으로 떠난 거예요.
여기에서 모든 게 결정이 돼요. 우리의 반응이 중요해요.
이 떠남은 물리적 떠남일 수도 있지만, 정서적 떠남일 수도 있고요.
분명한 것은 떠남이에요. 떠나는 게 믿음이에요.
확실하게 떠나라는 거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
내가 살던 곳, 익숙한 곳, 안정된 곳...
여러분 사람은 안정감 security 을 찾는 게 기본적인 욕구잖아요.
일평생 사람들이 추구하는 게 뭐예요? 나는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거죠.
이게 일평생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근데 여러분 믿음의 삶은 반대예요. 안정된 삶을 포기하라는 거예요.
'아, 오늘 철야기도회에 잘못 왔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우리는 안정된 직장을 원하잖아요. 안정된 직업, 안정된 동네, 안정된 교우관계...
근데 여러분, 그게 전부 다 믿음의 길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하나님은 그걸 싹 지워버리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형제는 물론, 다양한 연, 즉 혈연, 학연, 지연... 별별 인연을 다 가지죠.
이게 다 우리가 의지하고 싶은 것들이죠.
그리고 그런 연결된 것들을 우리는 자랑하잖아요.
'난 누구하고 친해... 나는 그분하고 인맥이 닿아있어... 내가 지금 전화 걸 수도 있어...'
막 자랑해요. 또 막 사진 찍어 놓고, 막 한 번씩 꺼내보여주고... 그 연을 자랑하죠.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이전의 연결고리를 다 끊어 버리게 하시는 거죠.
끊어야 할 걸 끊어야,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거예요.
세상의 줄들과 연결될수록,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줄은 가늘어져요.
내가 의지하고 붙들고 있는 줄들이 다 있잖아요. 사람들마다 무수한 줄들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 때로는 우정을 끊어야 돼요. 어떤 때는 우정도 끊으라는 거죠.
오랫동안 사귀어 왔지만, 그 우정과 단절해야 될 때도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끊어야 된다는 거예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 재정적으로 의지하는 줄을 끊으라는 거예요. 가능하시겠어요?
여러분, 아버지 고향 친척 집을 떠나면, 그 부족 사회에서는
재정적인 거를 포함해서 모든 게 끊어지는 거에요.
여러분, 부모의 유산에 늘 주목하고 있는 분 있습니까?
부모님을 너무 잘 만나 가지고... 늘 유산 물려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신앙에 도움이 되지가 않아요.
주식 투자에 과도하게 몰입되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무엇을 하든지 자꾸 거기에서 미끄러지는 거예요. 거기서 앞으로 안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자꾸 의지하는 마음이 드는 게 있어요?
여러분 지금 오늘 이 밤에 그거를 하나님이 청산하기로 원하세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거죠.
하나님 아닌 것을 내가 붙잡고 있는 걸, 내려놓으세요. 그걸 내려 놓아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금 내 인생이 계속 꼬이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평소에 늘 의지하는 것, 내 마음에 뭔가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그래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다 끊으라는 거예요.
어떤 분은 목사님인데, 완전히 커피의 대가이세요.
만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커피 얘기만 하세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들을 때, '목사님, 예수님 얘기를 해야지요.
회개하세요. 목사님' 하고 웃으면서 말씀드렸어요.
뭐 너무 대단해요. 커피에 대해 너무너무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요.
여러분, 브라질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축구와 커피를 끊는대요.
브라질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축구하고 커피는, 없으면 못 살아요.
그 커피도 굉장히 진하게 마시거든요. 브라질 사람들은 고기를 많이 먹고 하니까요.
브라질 커피도 좋죠. 또한 축구의 광팬들이에요.
그러니까 축구 없는 세상, 커피가 없는 세상은... 브라질 인들에게 생각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게 광적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순간, 그것과 싸우는 거예요.
너무 과도하게 몰입되니까, 너무 거기에 빠지니까!
여러분 어떤 것이든, 예수 외에 빠지는 것은,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 어떻게 보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다 잘라내야 돼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죠.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아버지와 친척과 고향을 떠났다' 그러니까
'떠났나보다...' 하고 쉽게 생각하는데,
지금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갔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때는 부족 사회인데, 부족을 떠나는 순간 죽는 겁니다. 부족 간의 싸움도 있고요.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금방 아내를 뺏길 뻔 했잖아요. 그런 일들이 다반사로 생기는 거죠.
그런데 내가 의지하고 붙들고 있던, 의존했던 그것을 끊어내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계속 우리가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두려움과 싸우는 거예요.
'내가 이걸 그만두면, 이걸 포기하면, 이걸 내려놓으면, 죽는 거 아니냐?
망하는 거 아니냐? 실패하는 거 아니냐?' 이런 두려움이 오는 거예요.
그 두려움과 싸우는 거예요.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거예요.
믿음이 생기면 두려움을 이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밀고 나가는데, 믿음이 약하면, 두려움은 나를 사로잡아요.
그러면 믿음의 길을 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고향 친적 아버지 집을 못 떠나는 겁니다...
그건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예요. 믿음과 두려움은 함께 할 수 없어요.
두려움을 이기려면 믿음이 필요해요.
믿음을 가지면, 두려움을 물리치는 거죠. 믿음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는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전에 나와 연결되어 있던 것들을 그대로 두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게 뭘까요?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를 버리라는 거예요.
이전에 따르던 세상 신들을 버리라는 거죠.
하나님과의 새로운 연결이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이, 이 줄 저 줄 다 내가 붙잡고 있어도, 그 줄은 다 허접한 줄들이에요.
사람을 의지하는 줄 있잖아요? 그거 한 방에 끊어져요.
여러분들이 권력의 힘을 붙잡고 있습니까? 그거 한 방에 줄이 끊어져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내려주신 그 줄을 내가 붙잡아야 돼요.
내가 잡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1대 99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을 선택하면 무슨 일이 나느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줄로, 나를 꽁꽁 붙들어매어 버려요. 그게 언약 covenant 이에요.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이 말씀을 따라 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 그 약속,
이 언약,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은,
짐승을 쪼개서 그 사이로 지나가는 그 언약 예식을 행함을 통해 보여주셨듯이,
이제는 깨어질 수 없는 언약 관계,
그 말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당신의 줄로 우리를 꽁꽁 싸매어 주셔서
그 줄은 안 풀려요. 아무도 끊을 수도 없어요.
그 말은 뭐에요? 내가 너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거예요.
이 은혜가 여러분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이 내게 제대로 적용되려면, 다른 세상 줄을 다 끊어야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된다는 거죠.
여러분, 그러면 한 줄만 있으면 됩니다.
백 가지, 천 가지 줄이 있어도... 그건 다 허접한 것들이에요. 언제 끊어질지 몰라요.
불에 타면요, 그 모든 세상 줄은 다 타버려요. 동아줄인데도 그냥 한 방에 날아가요.
그렇게 믿었던 줄이 다 사라지는 거잖아요.
근데 여러분,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줄, 나를 꽁꽁 싸매어 준 그 줄은, 끊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그 줄이 연결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 언약에 자동 포함되고요.
이 언약을 믿는 신앙, 그 언약의 줄은 무적이에요.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떡해요?
내가 그동안 붙들고 있던, 그 모든 의존하던 줄들을... 다 내려놓아야 돼요.
포기하라는 것, 떠나라는 것,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확실하게 내 인생에 보장하시고,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1
▲'나보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에서 그동안 누렸던 많은 것을
내가 포기하다니... 그건 너무 큰 마이너스야
내가 예수 믿어서, 내 인생은 마이너스가 됐어!'
이렇게 포기한 것만 생각하는 분이 있어요.
그 포기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주를 위해 살다 보니 잃은 게 많다?' 그건 아직도 뭘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뭔가를 잃어버린 게 많습니까? 포기한 게 많습니까?
마이너스가 됐습니까? 손해 봤습니까? 그게 억울합니까?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될 것은 그게 아니에요. 얻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2:1절을 자세히 보면 '내가 네게 보여줄 땅' 여러분 이게 뭐예요?
가나안이죠. 아브라함은 아직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에요. 엄청난 약속이에요.
믿음으로만 보여지는 이 미래의 약속된 땅은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향, 갈대아 우르에 살았던 그 좁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언약의 땅이에요.
여러분, 성경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포로된 자의 삶,
그리고 광야의 삶,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이 세 파트로 나누어져요.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애굽에 속해 있는 삶, 여전히 죄의 노예, 마귀의 노예와 속박 아래에 사는 세상 사람들.
-출애굽 했으나, 광야를 지나는 교인들,
몸은 애굽을 떠났으나, 아직도 애굽을 동경하고, 거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노예된 삶, 억압을 받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소망이 없는 삶...
교회는 다녀요. 근데 아직도 광야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어떤 사람은 광야를 벗어났어요. 가나안에 들어와 있어요.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풍성한 삶을 누리고, 구원의 즐거움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죠.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어요?
▲여러분이 믿음을 따라 살고자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그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많은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 포기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많은 것들을 기꺼이 포기합니다.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자, 대조가 분명하죠? 바울은 배설물로 다 여기고, 다 버렸어요. 엄청난 것들이에요.
근데 뭘 얻었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어요. 잃어버린 게 아니죠.
여러분, 잃어버린 거는 배설물들 이예요.
그리스도를 얻으니까, 그 옛날에 그 엄청난 것들이 배설물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요. '그리스도를 얻고...' 여러분 최상을 얻은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포기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약속하신다는 거예요.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최고를 주십니다. 눅15장
너무 감동적이지 않아요? 여러분, 살찐 송아지는, 그 당시에 최고 귀한 가축이예요.
요즘 말로 하면 AAA (트리플 A) 등급이에요. 오랫동안 준비해 둔 송아지였어요.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개념으로 보면,
살찐 송아지는 웬만한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고기예요. 우리도 요즘 가끔만 먹잖아요.
그 당시에 살찐 송아지라는 건, 이건 어마어마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돌아오면 주려고, 또는 귀한 잔치를 위해서
준비를 오랫동안 한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여러분, 더 이상 이전에 누더기 옷을 입고 있을 이유가 없는 거죠.
남의 눈치를 보고 살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을 누리는 거예요.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을 때, 그 부요함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히12:1~2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가나안이 보여야 부르심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해지면, 가나안이 바로 눈 앞에 보여요.
그러나 믿음이 약해지면, 가나안은 아득하게 멀리 보이고, 그러면 광야의 길에서 지칩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유혹에 시달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놓쳐버리는 거죠. 무엇이 필요합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 영적인 시각을 잃어버리면, 결국은 많은 걸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육안이 어두워지는 것과 비교가 안 돼요.
여러분 시각장애인들의 삶이 얼마나 불편해요. 아차 하는 순간에 위험하잖아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고, 자칫하면 위험한 순간에 빠질 때가 굉장히 많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근데 여러분,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육안이 어두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요.
영원의 세계를 보지 못해요.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아요. 그럼 어떡해요?
미련한 길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망하는 길을 그냥 스스로 선택하는 거예요.
영의 눈이 어두우면, 육안이 어두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어요. 영적 미아가 돼 버려요. 길을 잃어버려요.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많아요.
갈수록 삶이 더 풍성해집니다.
말씀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가나안의 삶을 누리고 있어요.
이건 물질적인 면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 즉 하나님 나라 안에서 누리는 그 풍성함은
물질로 통하여 누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물질은 좀 더 우리를 편리하게 만들지만,
우리를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부요한 삶을 누리게 해주지는 못하잖아요.
여러분 가나안의 삶은 뭘까요? 지금 이대로 좋은 거예요.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배하는 자의 그 누리는 축복과 기쁨과 만족이 있고,
주님과 관계가 갈수록 풍성해지고,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내 삶에 모든 묶여있는 것들이 풀려지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삶이 펼쳐지는 것,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삶과 비교할 수 없는 삶이, 우리에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더라' 이게 창세기 11장의 마무리에요. 창11:32
자 그러면 성경이 왜 창11장 끝에, 데라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까요?
여러분, 당시 부족 사회에서, 가족을 이끄는 가장의 죽음은 작은 사건이 아니에요.
그동안 아브라함의 가정을 이끌었던 아버지 데라, 그가 죽어요.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버지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인도할 수 있었던 곳은, 하란까지예요.
하란 이상은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란에서 죽은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창12:1절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그 직전에, 창11장 마지막 절에, 데라가 죽어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데라는, 아브라함 가정의 정신적 지주였어요.
우리가 살다 보면, 정신적 지주이고, 우리가 의지하고 따르고 싶은 인물들도 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도와주고는 의지할 수 없는 순간이 와요.
창세기 11장 끝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는 사건은 의미심장해요.
성경은 그냥 아무렇게나 기록하지 않습니다.
데라의 죽음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어요.
데라의 죽음은 아브라함이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아버지를 의지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뭔가 의지해야 될 것들과 결별하고,
하나님의 인도의 걸림돌을 제거하게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래서 12:1절에 그 아버지와 친척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려가 죽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를 받게 되죠...
길어서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