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22) / 사도행전 4:36~5:11 / 아나니나와 삽비라의 죽음 - YouTube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행4:36~5:11 2022.04.24.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시작이 되자 찾아온 건 세상에 핍박이었습니다.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핍박이 찾아왔죠.
그러나 바깥으로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뭔가 핍박이 불어 닥치는데
여러분 교회 안은 어떠했습니까? 교회 안은 전혀 와해 되지 않았습니다.
핍박이 있을수록, 오히려 교회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하나됨은,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심지어 무엇까지 나누었죠?
자신들의 밭과 집까지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4:34~35
누구도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말하지 않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 나누었습니다.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는데, 아름다운 물질의 풍성한 나눔이 있었습니다.
사실 들으면서도 쉽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성경에 있으니까 믿기는 하는데,
사실 우리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우리에게 아예 샘플을 소개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팩트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요.
오늘 누가는 '물질의 나눔'을 했던 두 사람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긍정적인 사례로 소개됩니다.
-또 하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인데요. 부정적인 사례로 소개됩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의 대조
먼저 바나바인데요. 바나바는 본명이 아닙니다.
원래 본명은 요셉이고, 바나바는 별명입니다.
바나바에게는 밭이 있었습니다.
'밭'은 헬라어로 '아그로스' 인데요. 상당히 넓은 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field, farm
(나중에 아나니아의 작은 밭과 대조됩니다)
그런데 그 넓은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4:37
그러니 이 판 값이, 여러분 상당한 액수겠죠?
이 돈을 가지고 이 사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 그러니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겠죠.
그래서 그의 별명이 바나바가 되었습니다.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36
바나바가 드린 이 물질의 섬김을 통해, 사람들이 많은 위로를 누렸던 것이죠.
바나바는, 우리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9장부터는 바나바가 본격적으로 무대 전면에 등장을 하는데요.
특별히 바울의 동역자로 나옵니다.
(그때 바나바에 대해서 정식적으로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설교의 초점은 바나바가 아닙니다.
오늘 설교 초점은, 또 하나의 사례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5:1~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사실 이 부부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데,
그 부부도 바나바처럼 똑같이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밭은, 바나바가 팔았던 밭과는 좀 규모가 다른데요.
헬라어로 보면 '코리온'인데, 작은 규모의 땅을 가리킵니다. *5:3 '땅' a piece of ground
바나바는 큰 땅을 팔았었죠. 반면에 이 부부는 작은 규모의 땅을 팔았습니다.
그래도 파는 것은, 여러분 너무나 귀한 일이죠.
그런데 팔기는 팔았는데, 판 값을 그대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팔고 나서 보니까, 아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판 값의 일부를 몰래 숨기고, 나머지 일부만 헌금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 누구를 죽인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아넘긴 배신자 가룟 유다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넘겼던 빌라도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했던 그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 가야바 와 안나스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창으로 찔렀던 로마 병정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구 하나 하나님이 죽이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처음 누군가를 죽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이유가 뭐예요? 헌금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이 본문을 피상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헌금 좀 속였다고, 이렇게 하나님이 죽이시나...
하나님이 무슨 물질을 그렇게 밝히시나... 무슨 헌금 때문에 사람을 죽이시나...'
여러분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죄 지은 게 맞습니다.
그런데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죽이시기보다는, 징계만 해도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건강을 잃게 하시든지,
아니면 그 부부가 그렇게 집착하던 물질만 딱 거두어 가시든지...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부부를 죽이십니다.
시간차를 두고 3시간 간격으로 죽이시는데요. 이게 우리의 의문인 거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의 문제가 아닐 수 있겠구나...
하나님이 사망의 심판을 하신 정도라면, 단순히 헌금의 문제가 아니겠구나...
헌금 이면에 감춰진 심각한 문제가 숨겨져 있겠구나...'
그래서 오늘은,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그 죽음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이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바나바와 비교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흐름이, 바나바와 이 부부를 지금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바나바와 똑같이 밭을 팔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밭을 팔았습니다. 억지로 요구된게 아니라
자진해서 스스로 밭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팔아서 받은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바깥으로 드러난 모습은 똑같은 거죠.
자 그런데 여러분 뭐가 다르죠?
▲1. 교회와 성령을 속임
바나바는 전액을 다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했죠?
땅값의 일부를 감춘 채, 나머지 일부만 (전부라고 말하며)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땅값의 일부만 드린게 문제가 아닙니다.
일부를 드리면서도, 마치 전부를 다 드린 것처럼 속였습니다.
여러분 본문 4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 땅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소유의 땅입니다.
그러니 그 땅의 처분권이, 이들 부부에게 있습니다.
그 땅을 안 팔아도 문제될게 하나도 없습니다.
땅을 팔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지금 뭐라고 하시는 분위기가 절대 아닙니다.
판다고 해도, 판값을 전부 다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수익금 전체를 펑크 내야 할 의무가 전혀 없는 거죠.
결정권은 이 부부에게 있습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죠?
일부를 드리면서도, 마치 다 드린 것처럼, 속인 것에 있습니다. 누구를 속였어요?
교회를 속인 것이죠. 그런데 단순히 교회만 속인게 아닙니다.
성령님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3
그러니까 이 부부는 단순히 헌금의 일부를 드려서, 심판을 받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액수를 가지고 뭐라고 한게 아닙니다.
문제는 액수가 아니라, 속임에 있습니다.
일부를 드리면서도, 마치 다 드린 것처럼 속였던 것입니다. 누구를요? 교회와 성령 하나님을!
자 그러니까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경건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을 속이면서까지, 이들이 헌금한 동기가 무엇인가요?
여기에 오늘 두 번째 바나바와 차이가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헌금의 동기가 달랐습니다.
바나바가 헌금한 동기는,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가난한 지체들,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나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던 것이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저 사람처럼 예수를 믿어야지' 하게 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만큼 바나바가 교회에서 인정과 박수를 받은 거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 인정과 명성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헌금한 동기는 무엇이죠?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명분으로, 자신들이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질로,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와 영광을 사려고 했습니다.
바깥으로는 성도를 사랑해서 물질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던 거죠.
모두가 다른 이들을 섬기는 가운데,
이들은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한 마음을 깨고, 자신이라는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바깥 모양은 똑같아 보이는데, 중심이 완전히 달랐던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는 건 언제나 우리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동기를 보십니다. 이 부부는 동기가 악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돈이 아까운 거죠.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생색을 내기 위해서는, 헌금은 해야겠고,
다 드리자니 아까운 마음이 가시지를 않고...
자 그러니, 하나님마저도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건이 '사탄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부의 속임의 배후에 누가 있었느냐? 바로 사탄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5:3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여러분, 이 부분이 오늘 바나바와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결정적인 차이점인데요.
초대교회가 서로의 물질을 나눈 출발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바나바가 헌신을 했던 출발이 어디죠?
바나바에게는,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은 은혜의 열매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행4:33절인데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여러분, 초대교회가 그리고 바나바가 물질을 나누었던 그 출발이 어디에 있습니까?
큰 은혜를 받아!
바나바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열매가, 물질의 나눔으로 나타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이 부부도, 밖으로는 똑같이 밭을 팔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헌금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 배후, 그 출발이 어디에 있었느냐? 성령의 은혜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가 배후에 있었습니다.
본문 5:3절이 이것을 밝히고 있는데요.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나니아의 마음이 누구로 가득 차 있어요? 사탄으로!
성령이 아니라 사탄으로!
그러니까 지금 누가는 대조를 하고 있는 거죠.
성령으로 충만했던 교회와 바나바 vs 사탄으로 충만한 아나니아
△그래서 학자들은, 이 부분을 가룟 유다와도 연결시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던 제자입니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다도 돈에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도 헌금을 몰래 숨겼습니다.
두 사람 다 그 안에 탐욕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가룟 유다의 배후에 누가 있었느냐?
그 배후의 실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밝힙니다.
요13: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여러분, 가룟 유다의 배후에 누가 있어요?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본문의 아나니아를, 가룟 유다와 동급으로 취급합니다.
아나니아를 가룟 유다와 같이 거듭나지 못한 자라고 말합니다.
무늬만 성도였다는 거죠.
클린턴 아놀드라는 저명한 신약 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사도행전 주석>을 썼는데요.
이분은 아나니아에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기보다는, 복음에 그저 공감만 하는 정도의 사람이다.'
한마디로 거듭나지 못한, 회심하지 못했던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놀드의 의견에 조심스럽게 공감합니다.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는 사탄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헌신을 한 배경에는, 그 안에 은혜의 각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바나바는 은혜의 열매로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 안에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각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안에는 들어와 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교회에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려면, 여러분 무엇이 필요하죠? 교회가 하는 일을 따라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외적인 형태는 다 행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안에는 은혜의 각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각성'은 20강의 4:33절을 보십시오. https://rfcdrfcd.tistory.com/15982333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막상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죠.
성령의 은혜를 따라야지 경건의 능력이 나오는데
성령의 은혜가 없으니까,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거죠.
자 그러니 아나니아가 섬기는 그 배후에 당연히 누가 있겠습니까?
사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신의 욕망과 부딪히는 문제에서는, 성령을 속이는 거죠.
그리고 땅값을 속였던 것입니다.
자 그 영적인 흐름을, 정확히 베드로가 본문 3절에서 짚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또한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 부부로 인하여, 교회의 거룩과 순결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11절에 나오는 단어인데요.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여러분 위 구절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은, 신약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총 19번이나 나오는데요.
이 '교회'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행5장)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러분, 그 전에는 누가가 어떠한 표현을 썼었죠?
바로 앞에 있는 행4:32절에서는 '믿는 무리',
그 앞에 2:41절에는 '신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5:11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나옵니다.
'교회'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인데요.
이 단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에크 (밖으로) + 칼레오 (불러내다) 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밖으로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안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구별히 거룩한 공동체,
그곳이 바로 교회의 정의입니다.
자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요. 너무나 중요한 속성이 있습니다.
절대로 교회가 타협해서는 안 되는, 아니 이것이 없어서는 교회가 성립 안 되는
가장 우선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가장 우선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무엇이죠?
바로 '교회의 거룩함, 구별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고백하죠?
'거룩한 공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거룩한 교회와'
언제나 교회에 가장 우선적인 가치는 '거룩함 (구별된, 따로 떼어진)'이라는 것이죠.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밖으로 구별해서 불러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거룩함을 깨뜨리는 자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였던 거죠.
그 근거가 오늘 본문에 있는데요.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여기 보면, '감추매'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가 헬라어로 노스피조 인데요. *ἐνοσφίσατο
이 단어가 구약에서 딱 한 번만 쓰인 적이 있습니다. ↓
여호수아 7: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LXX, ἐνοσφίσαντο
여기 '가졌음이라'는 표현이 있죠.
이 표현이, 본문의 '감추매' 와 같은 헬라어로, '노스피조'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누가는, 의도적으로 구약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도이죠? 독자들로 하여금 구약 성경에 아간의 죄를 떠올리게 하는 의도입니다.
이 부부의 죄가, 구약의 아간의 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간의 죄를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아간의 죄로 인해 구약 교회 공동체의 승리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로 인하여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 구약 아간의 죄가, 오늘 아나니아 삽비라의 죄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속이는 죄가, 공동체를 깨뜨리는 죄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깨뜨리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교회가, 시작이 된게 백년, 천년 된게 아닙니다. 지금 막 태어난 교회이죠.
그런데 새롭게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성령을 속이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배후에 지금 누가 있어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거룩을 지켜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마치 이것은, 또 창세기 3장의 사건과도 같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가정인 동시에, 최초의 교회였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첫 교회를, 사탄이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와를 유혹해서, 교회를 죄로 오염시키고자 했습니다.
그게 선악과 사건이었죠.
그 사탄의 역사가, 신약에 지금 막 시작되는 교회에 나타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
죄를 가지고 교회를 더럽히는 사탄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서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심판하셨던 이유입니다.
이 부부를 치심으로써, 교회의 거룩을 지켜내셨던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공동체 안에 퍼지지 못하도록,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사건의 결과가 무엇이죠? 본문 5절과 11절을 보십시오.
이 부부가 3시간 간격으로 죽는데요. 이 부부가 한 사람씩 죽을 때마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똑같은 반응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한 일입니다.
5:5절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11절 '이 일에 듣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더라'
거룩이 지켜질 때, 동시에 교회 안에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은 무엇입니까?
경건한 두려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회의 거룩을 무엇보다 지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에클레시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지 않으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는 않으십니다.
누구를 죽이시므로 당신의 거룩을 지키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떻게 거룩을 지키시죠?
바로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를 통해, 거룩을 지키십니다.
여러분 우리도, 겉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헌금을 속인 적은 없습니까?
어렸을 때 부모님이 헌금하라고 준 돈으로, 뭐 사 먹은 적 없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거짓말한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다른 점이 무엇이죠?
바로 우리에게는 은혜의 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은혜는, 말씀에 대한 은혜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달려가게 만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용서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버리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사랑이, 죄를 미워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이키게 만듭니다.
자 그것을 한마디로 '은혜의 각성, 회개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가 있다면, 내 죄에서 돌이키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다른 게 아닙니다.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가 은혜입니까? 죄로부터 날마다 돌이키는 회개를 통해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바로 죽인게 아닙니다. 이들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예로 본문 8절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물어봅니다.
'땅을 판 값이 이것 뿐이냐?'고 묻습니다. 왜 물어보죠?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이죠.
앞서 3절에, 아나니아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싸인을 통해 늘 기회를 주십니다.
돌이킬 기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거죠.
그러나 삽비라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의 심령 안에는 은혜의 각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으니 회개를 못하는 거죠. 회개는, 은혜받은 자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회개의 은혜를 통해, 우리를 또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지금도 돌아보게 하십니다.
이번 한 주간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했던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따라, 이번 한 주도 살지는 않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돌아보게 하십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서, 말씀할 거스르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탐욕을 따라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시고요.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기를 섬기는 자아라는 우상에 빠져 살지는 않았는지
우리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내가 추구하고 구했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과 영광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인정과 성공은 아니었는지
이 시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를 결정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것도 자아라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잃고 살지는 않았는지
우리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룩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오늘도 세상에 증거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5절과 11절의 고백입니다.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더라' 이 고백을 듣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 에클레시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런 은혜가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바나바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겉모양은 똑같았습니다.
똑같이 누가 봐도 경건의 모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나바에게는 은혜의 각성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의 은혜가 있었고요.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의 열매가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습니다. 은혜를 몰랐던 거죠.
교회 안에 있지만, 그에게는 은혜의 각성이 없었습니다.
자 그러니 성령을 거스르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여러분은 이런 은혜가 있습니까? 매 주일마다 말씀의 은혜가 있습니까?
그리고 매 주일마다 죄로부터 돌이키는 이 은혜의 각성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시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은혜, 거룩한 돌이킴,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나타내 보이는 신앙의 모든 행위가,
은혜의 열매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헌신을 헛되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가지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모든 신앙에 동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돌이키는 은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성화의 은혜,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우리의 삶과 교회로 날마다 진정한 신자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