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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9장 성막과 예수 그리스도 P1

LNCK 2025. 5. 8. 14:2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성소>         ▣ 복음 관련

https://www.youtube.com/watch?v=rsc5Ew_3nHs
처음부터~35:55까지 녹취


◈성막과 예수 그리스도 P1           히9:1~9        2025.04.27.        히브리서31강

◑성막의 개요                             

본문 히9장은 성막(터버너클, 장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첫 장막의 구조와 그 안에 있는 기물들을 묘사하는데,
이는 모두 하늘에 있는 진짜 장막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합니다.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출25: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구약의 장막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고 그림자라면, 
과연 하늘에 있는 것들의 '원형'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은 구약의 성막이 나타내고 있는, 하늘에 있는 그 원형,
구약의 장막이 상징하고 있는 그 원형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구약의 장막은 지금 존재하지 않고요. 또 존재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그 원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원형을 알고, 이 장막이 의미하는 것에 영적인 의미들을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부터 두세 번에 걸쳐서 '장막'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장막(성막)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막 또는 장막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에요. 
구약시대에 장막에 의미는, '아 거기 하나님이 계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신데, 백성과 함께 계신 것이에요.

성막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성막에서는 무엇이 행해졌죠? 속죄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성막의 주요 기능은 '제사 지내는' 거죠. 거기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막, 장막은 둘 다 영어로 터버너클 tabernacle,

히브리어로 성막, 장막은 '미쉬칸'인데 dwelling place 라는 뜻.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곳이 성막인데,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죄이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소는, 속죄 제사가 주된 기능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땅의 성소'가 예표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둘째는 그 백성들과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집이고, 
-셋째는 죄사함의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의미의 중심에는 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죠.
그래서 '성막은 예수님에 대한 계시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고, 
동시에 예수 안에 누가 있습니까? 주의 백성들이 있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잖아요. 

그래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면서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한 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동시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성막 Tabernacle 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 봅시다. 

▲1. 성막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신다는 의미죠.


먼저 성막 전체에 대한 그림인데요. 
성막은 크기가 100규빗 X 500규빗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1규빗은 약 50Cm. 

그러니까 성막의 전체 크기는 50M X 25M 입니다.
그게 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담장은 2.5M 높이로 세마포 천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막 전체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이 임재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정점에 달아죠.

자 그런 의미에서 성막은 1차적으로 '이 땅에 거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1차적으로 예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하시다'의 헬라어는 스캐노오 인데 '장막을 치다' 이런 뜻입니다. 
구약시대 때 장막을 친다 라는 것은 뭐냐면, 거기 거주한다 dwell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주말에 캠핑가서 며칠 치는 천막도 아니고,
그 당시에 광야에서 여러분 주된 거주지가 천막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거하시다 - 스캐노오' 라고 하면 '집을 지었구나'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오늘날로 풀어 설명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집을 지으셨으니' 
하여간 이런 뜻이지에, 잠깐 방문하려고 호텔 잡은게 아니라는 거예요. 

'거하시다' (요1:14) 라는 것은, '우리 가운데 거주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세요. 
우리의 가운데 집을 짓고 사시는 분이세요. 그런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처소를 두시고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거니시고, 함께 먹으시고, 함께 우시고, 또 함께 고민을 들어주시고, 
함께 웃으시고, 또 함께 갈등을 해결해 주시고, 함께 안아 주시고 ... 하는 그런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가서 있든지, 하나님은 그곳에 장막을 치고 거하시는 분이세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한 순간도 혼자가 아닙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곳, 나 혼자 있는 곳 같은 그곳에도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은 당신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장막을 치고 거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삶을, 안고 서는 모든 것을 함께 하시는 분이세요. 
비록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지만, 이게 팩트고 이게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는 그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거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막이 계시하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디 있든지간에 그곳에 거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2. 성막의 뜰 (마당) ... 내 죄를 사함    Court of the Tabernacle
성막이 이렇게 작은 축구장처럼 생겼으면, 그 동쪽 문으로 들어오면 뜰이 있습니다. 
뜰 안에는 두 가지 기구가 있습니다.      *축구장의 약 1/4
-번제단 
-물두멍

성막 전체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예표한다면, 
성막의 뜰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번제단 altar

번제단은 말 그대로 희생 제물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태워서 드리는 장소입니다.
성막 이전에는 돌을 쌓아서 만들었죠.
모세의 성막 때부터는 놋쇠로 만들었습니다. 불에 달궈는 져도, 타 없어지지는 않죠.

조각목(싯딤 나무)으로 틀을 만들어 놓고 놋으로 쌌습니다. 
번제단은 십자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번제단의 넓이와 길이는 각각 5규빗, 높이는 3규빗입니다

번제단은, 제물을 올려놓고 불로 태우는 곳이죠.
우리 죄와 저주를 짐승(제물)에게 전가한 것이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를 흘려야만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짐승에게 죄를 전가하고, 짐승의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사합니다. 

그 짐승은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래서 이 번재단이 예표하는 것은,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려서 죄를 사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라는 거죠. 즉 번제단이 예표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구약의 제물과는 같은 듯 다르신데, 
같은 건 뭐냐면, 죄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는 거고 
다른 건 뭐냐면, 더 좋은 제물이 되셨다는 거예요. 

구약의 제물과는 다른 '더 좋은 제물'이 되셨는데 
그 더 좋은 제물의 내용이 뭐였냐면, 
구약의 제물은 자주 반복해서 매번 드려야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리심으로 영원히 죄를 사하셨어요. 히10:14

히7:27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10:11 '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여기서 중요히 것은 '영원히' 라는 단어입니다. 히10:14
영원히 죄를 다 사하셔서, 현재의 죄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죄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모든 죄까지도 다 처리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죄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과거에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두 
우리 삶에 어떤 고통스러운 결과들을 남깁니다

과거의 죄가 있죠. 과거의 죄의 문제는 뭐냐면, 그 죄가 다 지나갔어요.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죄책감이 남는 거죠. 
죄책감이 남아서 마음을 평안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짐을 지웁니다. 

이게 이제 과거의 죄가, 우리 삶 가운데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죠. 
뭐 저도 그렇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 예요. 
너무 오래 돼서 20년~ 30년 전이니까... 

그게 뭐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면,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뭐 어떻게 바로잡고 하겠지만, 
한 20년 30년 지나간 걸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뭐냐면 죄책감은 남아 있어요. 
'그때 그렇게 하는게 아니었는데... 아 그때 말을 좀 더 곱게 하는 거였는데...' 
뭐 이런 죄책감이 남아있죠. 

개척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청년 한 명에게 제가 험하게 얘기했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를 안 나오더라고요. 

그때 제가 30대였으니까, 막 혈기도 있고 이러니까 
'야 너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똑바로 해' 이렇게 야단쳤는데, 그렇게까지 세게는 안 했어요. 
근데 저는 나름대로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 좀 셌던 모양이죠. 

그런데 나중에 그 청년이 교회에 안 나오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조금만 한 템포만 쉬어갈 걸...' 막 이런 죄책감이 남는 거죠. 

다른 교회라도 가면 모르겠지만, 만약 얘가 하나님을 떠나면, 그게 얼마나 또 부담이 돼요?
자 그런 거죠. 
그래서 죄는 여러분, 죄책감이 남아있는 이게, 과거의 죄의 문제입니다. 

또한 현재의 죄는, 우리 삶에 실질적인 고통을 가져옵니다. 대부분은 관계적인 고통입니다. 
근데 왜 그러냐면, 죄의 본질이 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것으로부터 오는게 죄지요. 
그래서 죄는 대부분 관계적인 고통을 남깁니다. 

그래서 현재의 죄란, 진행되고 있는 죄를 얘기하는게 아니고,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죄, 그것이 현재의 죄입니다. 

예를 들어서 뭔가 잘못해 가지고 누군가랑 관계가 깨졌어요. 
그래서 10년째 안 보고 있어요. 뭐 그렇지 않으면, 보기는 보는데 볼 때마다 껄끄럽고... 
이거는 아직 정리가 안 된 문제지요. 이게 현재의 죄 이지요. 
여러분, 죄는 이와 같이 항상 고통을 낳고, 그 고통은 대부분이 관계적인 고통입니다. 

또한 미래의 죄가 있습니다. 뭐냐면 내가 어차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따라오는 불안함, 절망감... 이런게 있는 거죠. 

자 그래서 이 죄는, 여러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고통스러운 영향을 미칩니다. 

자 그런데 '더 좋은 제물'이신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뭐냐면, 
영원히 죄를 다 처리하셨다는 거예요. 영원히 다 처리하셨다는 거예요. 
이 번제단에서의 죄사함의 은혜와 능력들을 충만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물두멍  Basin
번제단과 함께 존재하는게 물두멍이에요. 출38:8
물두멍 곧 놋대야는 손과 발을 씻는 것을 목적으로 물을 담아 놓는 성막의 기구입니다.

솔로문 성전에서는, 성전 마당 북쪽과 남쪽에 각각 5개, 총 10개의 물두멍이 있었는데,
제물을 씻는데 사용되었죠.  왕상7:30, 38 

그래서 이 번제단과 물두멍은, 죄사함을 위한 어떤 상징물들인데 
두 개는 하나의 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라, 두 개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   *번제단 + 물두멍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그렇게 돼 있어요

번제단이 있는데, 이 번제단에서 죄를 다 처리합니다. 
짐승을 잡고 태우고 피 흘리고 다 처리해요. 

그런데 제사장이 이제 성소에 들어가 전에 뭘 하냐면, 반드시 물두멍에 가서 씻습니다. 
손발을 씻어요. 이거를 안 씻으면 어떻게 되냐면... 죽어요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고, 또 지성소에 들어갈 때 죽습니다. 

여러분,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분명히 번제단에서 죄를 처리했는데 
왜 아직도 처리가 안 된 거죠? 분명히 번제단에서 완전히 처리를 했잖아요. 
그런데 손을 씻지 않고, 번제단에 가면 죽는단 말이에요. 죄가 해결이 안 됐다는 거죠. 
죄가 처리가 안 됐다는 거죠. 

무슨 얘기냐면, 번제단과 물두멍은 하나의 패키지예요. 
하나의 패키지라서 이 두 개가 함께 작동을 하는 것이지, 
하나만 가지고 처리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번제단에서, 번제를 안 드리고 손만 씻고 들어간다고 해서, 죄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번제단은... 십자가를 상징해요. 
물두멍은 ... 회개를 상징해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회개는, 하나의 패키지라는 거예요. 
구원의 역사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다 같은 방식인데,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파트와, 우리가 행하는 파트가 있습니다.
이 두 개가 함께 됐을 때, 온전하게 작동을 해요.

그러니까 한쪽만 있는 건 없어요.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항상 두 쪽이 다 있어요. 
그래서 구원을 놓고 보면, 구원은 100%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런데 동시에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100%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하나님 편의 100%와, 우리 편의 100%가 만나서 온전해지는 이게 참 신비입니다.
100과 100이 합쳐져서 100이 되는 겁니다. 200이 되는게 아니예요. 이게 신비죠.
하나님 편에서의 100%, 우리 편에서의 100%가 합쳐져서 온전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50% 와 50%가 합쳐져서 100%가 되어 온전해 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구원의 절반이 아닙니다. 
절반이라는 말은, 부족함이 있다는 건데... 아니요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한 구원이에요. 

그런데 동시에 우리의 회개(물두멍)가 필요합니다. 
'아 그렇구나, 나에게 십자가가 필요하구나.. 내가 죄인이구나.. 그래서 십자가 필요한 거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이, 즉 우리 믿음이 함께 있어야, 그래야 구원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예요. 그래서 성막에는, 나중에 성전도 마찬가지고
죄사함의 번제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두멍도 항상 같이 있어요. 

번제단은 짐승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십자가라면, 
물두멍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회개를 얘기합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예를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어떤 죄수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어요. 나올 수 없습니다. 

근데 이 사람이 갇혀 있는 사이에, 이 사람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렸어요. 
무죄가 선고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이 사람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죠.
나올 수 있는 권리를 100%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거를 안 믿어요. '내가 무죄일 리가 없어, 나는 안 믿어'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안 나오고 거기 있을 거 아니에요? 

십자가가 이거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100% 우리의 무죄가 선포됐어요. 
그런데 그것을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겠어요? 할 수 없는 거죠.

100% 사죄가 선포됐지만, 그것을 내가 믿고 받아들여야 
'아 감옥에서 나가도 되는구나' 그러고 나오는 거지, 
100% 선포됐다고 한들, 내가 안 받아들이면... 그럼 그냥 그 안에 계속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구원이라고 하는게 이런 거예요. 번제단과 물두멍이 이런 거예요. 
번제단에서 무죄가 선포됐어요. 그러나 물두멍에서 그것을 내가 믿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십자가가 필요.하구나, 십자가에서 내 무죄가 선포됐구나'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자유함이 임하는 거지... 그게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역사에는, 우리의 의지적인 반응이 요구됩니다. 항상 요구돼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지요. 

(*예를 들면, 코로나 19때부터인가 우리나라에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고요,
그 외에도 지자체 별로 지원금이 있고, 여행 지원금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신청하거나, 수령해야 그 혜택이 자기 것이 되지,
나라에서 지원금을 지원해도, 자기가 수령하지 않으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선악과를 주신 거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다 하나님 독단적으로 다 하실 거면, 처음부터 뭐하러 선악과를 주셨겠어요? 
그것 때문에 죄가 생기고, 이 복잡한 일들이 생겼는데... 

그런데, 이 원리 (하나님 편 + 인간의 편) 를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이게 아주 모순돼 보이는 신학들이 공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예정론과 자유의지라든지... 이건 지난 2000년 동안 해결 안 되는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장로교는 예정론, 하나님의 주권론을 신봉하고, 
감리교는 자유의지론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신학이 2000년을 공존하면서, 결국 요즘은 둘 다 맞다고 하면서, 둘 다 인정합니다.
이게 대세입니다. 이것도 이제 신학적인 신비입니다. 
100%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인데, 
또 100% 인간의 자유의지(믿음의 반응)가 있어야 되죠.
이 두 개가 항상 같이 있어야 돼요.   *지금 번제단과 물두멍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다 똑같은 원리로 움직여요.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이게 이상한 신학이 됩니다. 
항상 두 개가 같이 있다고 하는 걸 기억하시고, 
100%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100% 우리 인간의 의지, 믿음의 반응이 항상 요구된다는 거예요. 

번제단이 있지만 항상 물두멍이 같이 있다는 거예요. 
번제단만 가지고 다 된다면, 물두멍에서 씻지 않고 번제만 드리면, 그는 죽었다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께서 십자가(번제단)에서 다 행하셨어도,
그걸 내가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요. 십자가가 아무 효과가 없어요. 이해가 되십니까?

예 저와 여러분의 죄는 처리됐습니다. 믿으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합니다. 
더 이상 어떠한 죄의 징벌로 인한 고통도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사진 출처 : Tabernacle and Ark | The Oneness Of God In Christ

 


▲성소 Holy Place 
자, 이제 뜰을 지나면, 텐트를 쳐 놓은 성막이 있습니다. 
이게 약간 야전군대 지휘 막사 비슷하게 생겼어요.

거기 중간을 휘장으로 나누어서, 첫째 장막(성소), 둘째 장막(지성소)이라고 부릅니다. 
들어가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장소가 성소입니다.
-첫째 장막 히9:2
-둘째 장막 히9:7~12

성소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는데, 등대, 떡상, 분향단이죠.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동시에, 예수 안에 거하는 우리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성소까지는, 이 땅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것을 
주로 예표하고 있다면, 
지성소는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신성에 대한 것을 주로 예표하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까지는이 땅에서 분투하는 (전투적) 교회에 대한 예표라면, 
지성소는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의 영광적인 모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기물들을 살펴보죠. 


등(잔)대, lampstand, 메노라
성지순례 가시는 분은 100% 다 사 오는데, 한 개의 등잔대에 7개의 작은 들잔이 있는,
U자 모양이 3개 겹쳐진.. 감람유로 등불을 켜는 곳이죠.

이 촛대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이라고 여기고 있고요. 
성경에서는이 촛대를 빛대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또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빛'이라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 등대입니다. 요8:12
예수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시고, 
절망의 어둠을 밝히는 소망의 빛이시고, 
죽음의 어둠을 밝히는 생명의 빛이시고, 
증오의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빛, 분열의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빛,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밝히시는 새롭고 산 빛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우리의 매일의 삶을 밝히시는 '발등에 등'이라고 얘기합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러분, 예수를 바라볼 때 길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곳에 길이 보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언제? 예수를 바라볼 때! 

그러므로 여러분, 어둠 속에서는 길을 찾기 전에, 예수를 먼저 찾아야 돼요. 
예수를 먼저 바라봐야 됩니다. 그러면 길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거예요. 

왜 예수가 빛이십니까?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그 전에 뭐부터 해야 되냐면, 등을 찾아서 먼저 켜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길이 보이는 거죠. 

이게 영적인 비밀입니다. 많은 경우 여러분, 
사람이 어둠 속으로, 영적인 위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당황해서 길을 먼저 찾습니다. 
방법을 찾고, 그 다음에 꾀를 내고, 내 힘을 의지하고... 뭐 그래요. 

아니에요, 여러분 순서가 바뀌었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어둠이 내 주위를 덮기 시작하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빛(예수)을 먼저 찾아야 돼요. 
등을 먼저 찾아야 돼요. 

그래서 예수께 집중하고, 예수께 눈을 딱 돌리는 순간...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영적인 원리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둠 속에 있으면요, 모든 것이 불안하고 헷갈립니다. 
'이리로 가는게 맞나, 아니야 저리로 가는게 맞는 거 같은데...' 
그러면 불안해요. '이걸 선택하는게 맞나, 아니야 저걸 선택해야 되나?'

이런 경험들 여러분이 하시잖아요. 이게 이제 어둠 속에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사실 여러분 예수께 딱 눈을 맞추는 순간에, 많은 것이 명확해지는 것 아십니까? 
많은 것이 명확해져요.

예수께 눈을 딱 맞추면, '이것은 아니네' 하면서 아닌 게 명확해져요. 
많은 것들이 여러분, 딱 순서가 잡힙니다. 딱 우선순위가 생기고요. 딱 순서가 잡혀요. 
긴 가, 아닌 가 하는 것도 분별되고, 
먼저 해야 될 거, 나중에 해야 될 것도 딱 순서가 잡히는데,
이 예수께 눈을 맞추지 않으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게 됩니다. 
*지금 성소의 등(잔)대가 예표하는 '빛 되신 예수'를 살피는 중입니다. 

이거 먼저 해야 되는지, 저거 먼저 해야 되는지?
이 길로 가야 되는지, 저 길로 가야 되는지 헷갈려요. 왠 줄 아세요? 
빛이 없으니까 그런 겁니다. 깜깜하니까 어디로 가야 길이 있는지 안 보이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예수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모든 종류의 어둠, 무지 거짓, 낙심, 불안, 절망, 혼돈, 증오, 전쟁에 이렇게까지 
모든 종류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바로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길을 찾기 전에 뭐예요? 등을 먼저 찾으셔야 돼요. 즉 빛을 먼저 찾으셔야 해요.

교회 역시 세상에 빛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메노라(등잔대)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그러셨거든요. 

성도인 우리가 세상의 빛은 빛인데, 반사하는 빛입니다.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예요. 
예수의 빛을 반사하는게 우리입니다. 

그래서 반사체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 깨끗해야 돼요. 
뭐가 덕지덕지 묻어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반사율이 형편없기 떨어지죠. 
그래서 반사체가 빛을 발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깨끗해야 돼요. 정결해야 돼요. 
그래서 깨끗하고 정결할 때, 세상은 예수의 빛을 우리를 통해서 보는 거예요. 
그것이 교회인 줄 믿습니다. 

떡상 Table of shewbread  과 진설병
성소 북쪽에 있는데요. (남쪽에는 등잔대)

떡상 그 위에는 매 안식일마다 뜨거운 것으로 교체해 놓는 열두 덩어리의 떡이 있습니다. 
이걸 진설병이라고 부릅니다.  bread of the Presence, 또는 shewbread

예수께서는 이 떡을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생명의 떡이신데, 또 이 떡에 대해서 신명기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신8:3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세요. 그러니까 결국 이 떡은 말씀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말씀이 '생명의 떡'(진설병)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으로 영혼의 양식을 삼는 거예요. 
떡을 먹지 않으면 죽듯이, 우리 영혼 역시 그렇습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우리의 영은, 육하고 비슷합니다. 혹시 오늘 아침에 드시고 오셨어요? 
육신도 끼니를 먹지 않으면 허기지지요. 그래서 두 끼 새끼 하루 이틀 3일 계속 안 먹으면 
여러분, 우리 몸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축 쳐져서 아무것도 못 하듯이, 영도 똑같다는 거죠.

영은 보이지 않아서 우리가 자꾸 무시하는데, 
우리의 영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영은 침체되게 돼 있어요.

근데 이게 문제가 뭐냐면, 육신의 힘이 빠지는 건, 우리가 잘 느껴요. 
그런데 영의 힘이 빠지는 건, 우리가 잘 못 느껴요. 

육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영에 대해서 둔감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육신만 배부르게 먹잖아요. 그러면 영이 굶었다고 하는 걸 잘 못 느낍니다. 

그래서 가끔 금식을 하는 거예요. '육신아, 너도 한번 굶어 봐라' 
그래서 욕심이 굶으면, 영의 그 상태가 예민하게 느껴집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육신이 너무 편안하고, 너무 배부르면, 영의 상태가 잘 감지가 안 돼요. 
그런데 영도 육신하고 똑같아요. 안 먹으면 처지는 거예요. 안 먹으면 약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영이 계속 약해지면 뭘로 살겠어요? 육(육신)으로 살겠죠. 
영이 강해져야 영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되든지 안 되든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돼요. 
한꺼번에 과식하는 걸로 안 돼요. 꾸준히 먹어야 돼요. 

여러분, 음식을 한 열흘 굶고, 한 끼를 부패 가가지고 왕창 먹으면 어떻게 돼요?
건강해지는게 아니고 탈이 나죠. 영도 비슷합니다. 
우리 영도 여러 날을 굶다가 한꺼번에 확 먹었다고 해서, 영이 충만해지지 않더라고요. 

영이 건강해지는 건 뭐냐면, 느껴지던 느껴지지 않던, 보이던 보이지 않던,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내 삶 가운데 먹이는 거예요. 꾸준히!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꾸준히...
이게 여러분 얼마나 파워풀한지는, 사람들이 잘 몰라요.
이 꾸준함이 있으셔야 돼요. 말씀에 대한 꾸준함!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르지 않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꾸준히 먹을 때, 우리의 영이 강건해지는 거예요. 

또한 진설병 떡은 12 덩어리지요. 그래서 열두 지파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항상 성막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인 동시에, 교회에 대한 예표이죠. 
그래서 떡이 열 두 개인 것은, 구약에서 12지파, 신약에서 하나님 백성이지요. 

그래서 이 떡은 하나님의 백성의 예표이기도 하는데,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뜨거운 떡을 교체해 놓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식은 떡이십니까, 뜨거운 떡이십니까?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새로운 뜨거움, 새로운 성령의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된다는 거예요. 식어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충만, 새로운 하나님께 대한 감사, 새로운 하나님께 대한 은혜,
이 새로운 뜨거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됩니다. 
식어버린 떡, 찬 떡은... 성소에서 교체되어 버리죠. 거기 계속 머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이 뜨거운 진설병이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 차가운 떡이십니까, 뜨거운 떡이십니까? 
그러니까 '차가운 떡'은 뭐냐면, 오래 전에 먹은 하나님의 양식을 가지고 
지금까지 내가 뜨거울 순 없어요. 지금 막 구워낸 떡을 먹어야지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식은 밥과 더운 밥'

그래서 이 말씀은 여러분, 진짜 육신의 양식이랑 똑같습니다. 
옛날에 먹어서 내가 크게 은혜 받은 게 있어요. 
1년 전에 여러분이 잔치 음식 먹은 거 가지고 지금까지 배부르세요? 아니잖아요. 

1년 전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았어요. 그건 1년 전 얘기고... 
지금 그건 이미 다 식어가지고서 아무짝에도... 힘을 못 써요.

진설병을 안식일마다 새롭게 바꿨다는 얘기는 뭐냐면 
적어도 일주일 안에는 먹었어야 된다는 뜻 아니겠어요? 

이렇게 교체된 식은 떡은, 제사장들이 먹었죠.
적어도 매 일주일마다 먹어 없앴다는 겁니다. 
왜냐면 새로운 떡이 다시 진설되니까!

우리는 차가운 떡이 아니라, 뜨거운 떡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된다 하는 것이 
성소의 떡상의 진설병이 예표하고 있는 교훈 중 한 가지입니다. 

계속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뜨거운 떡으로, 우리는 네 사실은 매주일도 너무 길어요. 
매일매일 새로운 떡으로, 뜨거운 떡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된다는 것이 
진설병이 예표하는 것입니다. 

분향단 

P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