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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50편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LNCK 2025. 5. 9. 21:5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배,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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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시150:1~6       1998년 설교 스크랩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말, 힘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어머니... 모두 아름답고 힘 있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장엄한 말이 무엇이냐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드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그 말이 나오는데 
직접적으로 2번, 간접적으로 11번이 나옵니다.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본문에 간접적으로 "할렐루야"라는 말이 11번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를 찬양할지어다" 이런 표현이 11번 나오는데, 
"할렐루야"라는 말의 뜻이 "하나님을 찬양하라"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는 만국 공통어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이 말은 자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의 외국의 식당에 가서 물을 청하는데, 
물을 그 나라 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몰라서 
"에치 투 오(H20) 플리즈" 했더니, 
보이가 알아듣고 웃으며 물을 갖다주더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할렐루야는 그것보다 더 넓게 통하는 말입니다.
외국에 나가서 기독교인 만나면 "할렐루야!" 한 마디면, 
그 이상의 인사가 필요 없습니다.

▲시146편 ~ 150편 까지는 모두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기 때문에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르는데, 
그 끝인 150편에서는 할렐루야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대 할렐루야 찬송" 또는 "대 할렐루야 시편"(The Great Halleluiah)라고 부릅니다.

신문 기사를 쓰는데는 육하 원칙(六荷原則)이라는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는 것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50편도 이 육하 원칙을 잘 지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절은 "어디서?"에 대한 답입니다.  Where?

150:1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성소'라는 말인데, 이것은 직접적으로 땅위의 성소를 가리키나 
혹은 하늘에 있는 성소를(11:4 참조)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성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모든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도 무난하겠습니다.

"궁창"이라는 말은 일상 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습니다. 
"창공"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소,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으니 
예배당에서 찬양하고,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했으니.. 비행기 타고 올라가서 찬양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 어디나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 아닌 곳이 없고, 
권능의 궁창이 아닌 곳 없습니다.

성소를 예배당으로만, 궁창을 물리적인 의미의 창공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피해야할 문자적인 해석 태도입니다.

▲'문자적 해석'의 고리타분한 예입니다. 
외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서 
기숙사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학생들에게 반드시 넥타이를 매야 한다는 규정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 규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한 남학생이, 맨 몸에 넥타이를 매고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런닝 셔츠도 입지 않고, 와이셔츠도 입지 않은 채, 목에 넥타이만 매고
식당에 나타났으니, 사감 선생님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사감 선생님이 막 야단을 치니까, 이 학생은 태연하게 
"아, 넥타이 매야 식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대로 했는데, 무슨 잘못입니까? 
나는 규정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곳, 즉 성소이고, 
권능의 궁창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온 세상 모든 곳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성도는, 온 세상 모든 곳에서, '할렐루야 -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는 것입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죠.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신학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만 거룩한 곳이고, 가정이나 직장은 그렇지 않은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신앙 생활을 이중적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흔히 '이원론적 사고'라고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 주부들에게는 부엌이, 교사와 학생들에게는 교실이,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병원이, 직장인들에게는 사무실이 성소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절의 의미죠!

▲저희 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김찬국(金燦國) 상지대 총장님이 
다음 주일에 오래 간만에 오셔서 설교해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2009 별세

김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나는 상지 대학교를 목회 현장으로 여기고 일하고 있다" 

그 대학은 기독교 대학이 아니고, 문제가 많았던 곳으로 널리 알려진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김찬국 목사님이 그 학교 책임자로 가셔서, 학교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작년에 김 목사님 고희를 기념해서 고희 (70) 기념 문집 「나의 삶 나의 이야기」라는 책이 
발간되었는데, 그 책에 상지대 교수 몇 분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그 학교가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김 목사님이 총장으로 가셔서 그 학교를 얼마나 변화 시켜 놓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총장 임기 4년이 끝나서, 
김 목사님은 진정으로 총장직에서 물러나서 쉬기를 원하고, 그럴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반 강제적으로 연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김 목사님의 교회 밖에서의 목회가 대성공을 거두고 있구나!' 
제가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학교 이야기가 나왔는데, 처음에 기독교인들, 선교사들에 의해서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설립된 기독교 학교들, 미션 스쿨들이 
요즘은 그 정신이 많이 퇴락하고 
그저 평신도 기독교인들이 세운 일반 학교가 오히려 신앙적인 면에서
더 열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년 여선교회 주최 신앙 간증 성회에, 숙명 여대의 이경숙 총장님이 오셔서
신앙으로 숙명 여대 이끌어가는 이야기, 
특히 숙명 여대 교문에 성구 새겨 넣기 위해서 힘쓴 결과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그 다음에 일부러 그 학교에 가 보았더니 
과연 여러 교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빠짐 없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 삶의 현장을 성소로 여기고 살아가는 귀한 분들입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출발한 기관들이, 기독교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 신앙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것은 
성소가 비성소(非聖所)가 되고 
비성소가 성소가 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성소는 더욱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하겠고,
비성소도 성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50:1 
우리 사는 곳 전체에서 "할렐루야!" 찬양이 터져 나와야합니다.

오늘 성가대 임명 예배를 드리는데, 
성가원들은, 성가대석에서만 성가대원이 아니고 
교회 밖의 모든 생활에서도 성가대원으로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야만 교회에서 좋은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Why?

 

2절이 그 답이 됩니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2

「표준 새번역」은 2절을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시니 주님을 찬양하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이 하신 위대한 일이 무엇인가 찿으려고 애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행하신 모든 일이, 지금 하고 계신 모든 일이 ... 모두 위대한 일입니다.

주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일만 위대한 것 아닙니다. 
홍해를 가른 것만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까지 내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오늘 아침에 나를 깨워 주시고, 
교회에 나오게 하신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목양 교회를 세우시고 37년 간 인도하시고, 새로운 비젼을 주신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모두 위대한 날들이고
위대한 시간들입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위대한 일들을, 
본문의 시편 기자처럼 찬양하고 있습니까?

성가대원들, 왜 성가대원이 되셨습니까? 왜 찬양을 합니까?
내가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이 재능을 그대로 두기가 아까워서입니까?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발표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한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정서적인 충동이 동기의 중요한 몫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서 성가대원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시니, 찬양을 합니다.

♣(펀 글) 어느 선교사 사모님이 밝은 빛(환상) 가운데
자기 앞에 항아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항아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진 그가 주님께 질문하자,
주님이 이런 답을 주셨다고 한다.

“그 항아리 안에는 네가 평생 동안 나를 위해 불렀던 찬양이 담겨 있단다!”
이 사모님은 성악을 전공하신 분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며 수많은 특송과 찬양대 찬양을 해 왔다.
독창한 적도 매우 많았다.
그렇기에 그 항아리에 찬양이 가득 담겨 있으리라 은근히 자신했다.

그런데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니,
겨우 바닥을 채울 정도의 적은 물이 들어있었다.
그 사모는 놀라 주님께 다시 물었다.

“어머, 이것이 정말 제가 부른 찬양 전부가 맞나요? 혹시 잘못된 것 아닌가요?
그 동안 제가 부른 찬양이 얼만데...”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항아리에는 네가 오직 나만을 위해 부른 것만 담았단다!”
하나님은 섞인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사42:8

때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에, 나도 영광받기를 바랄 때가 있다.
내 것과 주님 것이 섞여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받으실 수 없다.
지극히 거룩한 분께 합당한 영광과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은 뒤섞일 수 없다.
사역을 통해 주어지는 성취감이나 칭찬은 달콤하지만,
우리가 여기에 중독되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게 된다.

자칫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버리거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3~6절까지는 "어떻게?"에 대한 답입니다.   How

어떻게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까?
본문은 여러 가지 악기 이름을 제시하며 
이 악기들을 동원하여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 제시된 악기들을 구해서 찬양해야 합니까?  No

사실 여기 나오는 히브리 악기들은 
지금 우리가 구하기도 어렵고, 또 이 가운데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악기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문자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가야금이 우리의 고유한 악기인데, 남한의 가야금과 북한의 가야금이 
벌써 줄의 숫자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악기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안됩니다. 
미국에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라는 교파가 있는데 
이 교파는 악기를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유악기파(有樂派)와 무악파(無樂派)로 갈라졌습니다. 

서울의 등촌동에 신학대학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악파입니다. 

저는 '유악파, 무악파' 하는 말을 듣고서 
처음에는 '이 파에는 악이 있고(有惡), 저 파에는 악이 없나(無惡)보구나!, 
동양 사상으로 말하면 한쪽은 성선설을 주장하고, 한쪽은 성악설을 주장하나 보구나!'
라고 생각했지, 그것이 악기를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정말입니다).

여기 악기 이름이 많이 나오는 것은, 드릴 수 있는 정성을 다해서, 
음악적 재능을 다해서, 우리가 낼 수 있는 모든 목소리를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확대 적용하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엇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신 재능이 무엇입니까?

그림 잘 그리는 재능입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글 잘 쓰는 재능입니까?  그것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크심을 널리 전할 수 있습니다.
밥 잘 짓는 재능입니까?  그 봉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할렐루야!"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설 연휴가 시작되는데, 설이 어떤 절기냐면, 
조상의 음덕을 찬양하는 절기라고 합니다. *陰德 : 숨은 덕행
그것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절기’라는 대답으로 바꾸어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국에서 추수 감사절은 어찌되었던 간에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린다는 기본 정신 위에서 지켜지지 않습니까?

부활절이 되면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휴가를 갖습니다.
홍콩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부활절 휴가가 있었는데 
작년에 중국으로 귀속되어  *1997년 귀속
올해 부활절 휴가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합니다. *1998년 설교

50년 동안은 홍콩의 현 체제를 보장한다고 했으니, 
지켜지기야하겠지만 그 분위기가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설이 되면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제사 음식을 아주 정성스럽게 차립니다.
우리는 그 이상의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Who?

6절이 그 답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 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여러분이 호흡이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내쉬는 숨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원만 하나님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사님, 아까 육하 원칙을 말씀하셨는데 
언제(When)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무엇을 (What)찬양해야 하는지, 두가지가 빠졌네요"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구태어 말할 필요가 없는 일, 반복되는 말이기 때문에 빼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When?

늘 찬양해야 합니다.
특별히 어려울 때 찬양해야합니다.

요즈음 성도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 입시 문제, 특별히 경제 문제로 인한 고통이 큽니다.  *1998 IMF

심방 전도사님들이 기록하는 심방 일지를 목양 일지(牧羊日誌)라고 제목을 바꾸고 
심방 내용을 좀 자세하게 쓰라고, 이른바 에세이 스타일로 쓰도록 바꾸었는데 
그것을 보면 성도들이 겪는 애환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은 경제 문제로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할렐루야!", 찬양하세요.
바울과 실라가 차꼬에 채워져 빌립보 옥중에 갇혀서 한 밤 중에 부른 찬양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렸습니다.

어려울 때 드리는 기도와 찬양은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을 열어주며 
우리를 묶고 있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어 자유롭게 합니다. 

찬양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찬양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어려울 때 바치는 십일조를 하나님은 특별히 축복하십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때 교회가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면, 하나님은 이 나라를 더욱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사랑하시고, 이 나라를 들어 크게 사용하시고 
21세기에 더 크게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흥왕할 때는 이런 소리가 자주 나오다가
요즘은 교회 성장도 둔화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니까 

이런 소리들(어려울수록, 더 헌신하라) 이 좀 줄어드는 현상 가운데서도, 

한국 교회의 천박한 센세이서널리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변함 없는 사실입니다.

군대에서는 훈련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와서 아주 강한 훈련을 시킵니다.
해병대는 진해 훈련소 부근에 천자봉이라는 고지가 있는데 
훈련 마지막 단계에 천자봉 고지 구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대전에 30여 년 전에 대전에 있는 기술 교육단이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교관들이 "너희들, 훈련 마지막에 유성 구보가 있는데 그것이 아주 힘들다.
유성 구보하다가 죽은 훈련병도 있다" 늘 겁을 주었습니다.

겪어 보니까 유성 학하리라는 곳까지 조금 빠르게 가서 
뭐 산 하나 점령하고 돌아오는 그런 훈련인데,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괜찮았어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IMF 한파는 21세기 진입을 잘 하기 위해서 받는 마지막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는 비결은, 어려울수록 더 힘껏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고비를 넘는 길입니다.

◑무엇을 찬양해야 합니까?     What?

이 문제의 답은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에, 
그러니까 2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찬양해야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명령입니다.

우리가 서로, 또는 하나님을 향해 이 말을 할 때는 인사이고 고백이지만, 
원래 본문에 나오는 '할렐루야'는... 명령입니다.

제가 아까 할렐루야라는 말은 장엄한 말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장엄한 명령입니다.     

군대의 많은 명령 가운데 가장 신이 나고 중요하고 엄숙한 것은 "돌격 앞으로!"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 "와~"하며 앞으로 돌격해야합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돌격 앞으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성가대원들은 이 명령을 앞장 서서 수행하고 있는 선봉 대원들입니다.

선봉 대원들이 우물쭈물하면 그 전투의 결과는 뻔하지요. 
성가대원 여러분, 선봉대원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거듭 거듭 명하십니다.
-모든 곳에서 주님은 찬양하라,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찬양하라,
-온갖 정성으로 주님을 찬양하라,
-모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주님을 찬양하라

PC 통신을 통해 이 설교 읽는 성도 모두가  *1990년대 초 천리안과 하이텔 서비스로 시작.
이 명령에 따라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홀로 한 분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한센인도 감사와 찬양!

여수 애양원 교회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양재평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15살 때 한센병에 걸립니다.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서 법을 공부해서 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청소년이

한센병자가 되어 18세 때 한센병 수용소인 애양원에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30세에 결혼을 하지만, 1년 뒤에 시력도 잃고 손의 감각도 잃어버립니다.

 

한센병도 억울한데... 자신의 삶을 저주하고 또 저주였지만..

그런다고 나아질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정신 차리고 다시 일어섭니다.

 

아직도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고.. 청각이 남아 있고, 기억력이 남아 있다고...”

양장로님은 1954년에 애양원의 한센병자들로 구성된 성경암송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한센병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눈도 멀고 손가락도 없소. 손가락이 있다하여도 지문이 없어서

점자도 못 읽습니다.

이중 삼중의 장애를 입었지만, 청각도 있고 기억력도 남았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듣기만하지 말고 암송합시다.

다섯 달란트를 갖지 못했지만 한 달란트는 남았습니다.

 

남아있는 달란트를 가지고 해봅시다.” 가능해보이지 않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듣고 암송해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반복 또 반복을 거듭했습니다.

 

성경이 한 장 한 장 외워지고 드디어 한권씩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몇 사람은 신약성경 모두를 통째로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 들어온 성경 구절들은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두려움과 분노와 절망을 내모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밭에 숨겨진 보화를 산 것이야.

우리는 전부를 잃고 천국을 산 것이었어.

천형이라는 병을 얻어서 예수를 믿었고, 눈을 잃고 손의 감각을 잃은 대신

신약성서를 얻었어. 가시라고 생각한 그것들 때문에 얻은 것이야.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그러니 세상에 찬송하지 못할 게 뭐야?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고 우리 안에 있다고

외우기만 했는데, 언젠가부터 이해하게 되었어.

 

나사로가 간 나라는 죽어서 간 나라이지만

살아서 삶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도 있다는 말이야.

바람이 불고 암초가 있어 좌초할 듯한 바다 같은 세상에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펼쳐진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은 존재한다는 거야.

 

빛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모두 좋은 것이 될 수 있어.

사람들은 원하지 않지만, 나쁘다고 여기고, 괴롭다고 불평하지만,

그래서 없었으면 하지만, 그것까지도 충분히 좋은 것이지.

그게 의심되면 애양원의 우리들을 봐!

 

감사하고 찬양하며 기뻐하는 우리들을 보라고!

우리는 믿어. 우리가 받은 그 저주 같은 병조차 사랑이고, 복이고,

천국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이지.

 

칠십이면 끝나는 인생이 영원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어떤 대가인들 마다하겠나?

모든 게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지.

 

출애굽하는 광야에서도 온갖 환난이 있었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 모두 바람과 홍수를 맞게 마련이잖아.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반석 위에 지었느냐, 모래 위에 지었느냐 그게 중요할 뿐이지.

그래서, 우리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부자 되라고 하지 않고

증인되라고 하셨잖아.”

 

천벌이라고 여겼던 한센병, 무척이나 두려웠고 절망적이었던 병,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조차 복이고, 사랑이고, 은혜라고...

그 병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예수 믿었겠냐고 합니다.

두려움, 절망, 한계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