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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길을 가리라 렘41:16~42:5 2008년
본문 렘41~43장은 엄숙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이후에는, 이런 저런 핑계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거절한 유다백성들이 당한 비극적인 결말의 스토리입니다.
◑서론
예레미야 41장 후반부터 43장까지는 한 가지 스토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부수적인 축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인도 guidance”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삶을 인도하십니다.
롬8: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그랬습니다.
또 시편 32:8절에도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우리 각자에게는 가야만 되는 인생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가야될 길이 있고, 저 사람이 가야될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다 다른데, 하나님은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주목하여 잘 가도록 훈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말씀은 예레미야 42:3절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요하난과 남은 유다백성은 예레미야에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 하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 생각대로 길을 가다 잘못 가면, 길을 잃어버리고 멸망 길로 갈수 있는데,
하나님은 무궁한 지혜의 하나님이시며, 또 전지하신 지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안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1~43장까지의 문제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용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속으로는 내 길을 내가 내 뜻대로 가겠다고 고집한다면
그 결과는 대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엄숙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이후에는, 이런 저런 핑계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거절한 유다백성들이 당한 비극적인 결말의 스토리입니다.
렘41~43장까지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집니다.
-41장, (이스마엘의 그다랴 총독의 암살 후에)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 유다백성,
-42장, 하나님의 인도를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 받은 유다백성,
-43장,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한 유다백성 ...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 유다백성 41:16-42:6
주전 587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그다랴는 사반의 손자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테러리스트인 이스마엘이 그를 살해했습니다.
이스마엘은 그다랴 뿐만이 아니라 그다랴를 지키고 있던 바벨론 군사들도 살해하고,
남은 유다백성들을 사로잡아갔습니다. 41:1~15
요하난은 바벨론과 대항하던 남유다 장군으로, 이스마엘의 악행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을 쫓아가, 이스마엘이 끌고간 유다백성들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스마엘은 가까스로 생명을 보존하여, 잔당 8명과 함께 암몬으로 도망쳤습니다. 41:15
이제 요하난과 남은 유다백성들은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도 망해 버렸고, 바벨론이 세운 총독도 죽어버렸으며,
게다가 이스마엘이 바벨론 군사를 죽여서 41:3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보복이 있을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보복을 피해 도망갈 곳은 강대국 애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하난과 유다백성들은 ‘애굽의 국경만 넘어가면
느브갓네살 왕이 우리를 쫓아오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갈 길이라고는
애굽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애굽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
42:1절에 보니,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예외 없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42:3절에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하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소서.”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간구입니까?
그들의 결심도 확고합니다. 42:5~6절에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요하난 장군과 유다백성의 결심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너무 좋은 것에는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할 때에도 상대방이 너무나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그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영어에 “It is too good to be true(그것은 너무나 좋아서 진실일 리 없다)”라는 말이 있죠.
그러므로 너무 좋은 것에는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하난과 유다백성들의 결심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만
나중에 보니 그 결심이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분명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너무 멀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Lord your God)”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해 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4절 중반에 보니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할 것이라”고 정정해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질 수 있습니다.
약4: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형이 아우에게 “네 아버지에게 가서, 내 얘기 좀 잘 해 달라.”고 한다면
그 형은 좋은 소리를 듣겠습니까?
자기 아버지를 보고 동생한테 ‘네 아버지’라 말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하난과 유다백성은, 이처럼 하나님을 너무 멀리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멀어진 분은 다시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애굽으로 가려고 이미 결정해 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습니다.
41:17절에 “애굽으로 가려고 떠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려하여 벌써 떠나버렸습니다. (지금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에게 와서는 우리의 갈 길을 보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들의 실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끔 처녀, 총각이 저한테 와서
“목사님, 저희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나님께 물어봐 주십시오”
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미 자기들끼리 결정을 내리고 왔습니다.
심지어는 혼전임신을 한 후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냥 하나님께 묻지 말고 당신이 책임지고 결혼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미 길을 다 가 놓고서 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잘못된 구함입니다.
요하난과 유다백성들이 그와 같습니다.
이미 애굽으로 가고 있으면서 어디로 갈까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41:18절에 “그들이 갈대아인을 두려워함이었더라”
왜냐하면 테러분자 이스마엘이 갈대아 군사, 바벨론 군사를 죽이고 암몬으로 도망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와서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 떨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잘못이 없지만, 유다 전체가 잘못한 죄의 대가를 치를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서워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잠14: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경외하고 존경하면서 살아가면
사망의 그물이 있어도 하나님이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망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요하난과 유다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그들은 자신의 길을 고집하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줄 알면서도, 현실에 닥치는 바벨론의 두려움을 무시하긴 어렵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성은 간교하고 미묘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17: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도 부패했기 때문에 간교하고 미묘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고집을 내세워서 그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인도를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 받은 유다백성 42:7-22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받은 예레미야는, 열흘간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42:7
기도하고 기다리며 여호와를 앙망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그냥 잠깐 생각하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열흘간 기도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얼마나 더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 먼저 적극적인 면으로는 42:10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설교한 내용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바벨론에 복종하여 가나안 땅에 거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유다백성들이 “느브갓네살 왕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느브갓네살 왕의 마음도 책임지고 그 진노도 다 누그러뜨려 주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여호와니
너희는 나를 신뢰하고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어라.”는 메시지입니다.
소극적인 뜻으로 “애굽으로는 가지 말라. 애굽으로 가면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는
경고입니다. 애굽 국경만 넘으면 느브갓네살이 못 쫓아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적으로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되었던 곳으로
마귀의 상징인 바로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은 신앙생활의 길에 아무리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결코 구원 이전의 불신앙 시절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애굽은 유혹의 근원이요 우상숭배의 본거지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애굽은 멀리서 보면 나일강이 흐르고 부유해 보이고 평안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어려워도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고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어렵고 낙심된다고 세상으로 돌아가면 좋은 일이 있습니까?
교회에서 사람들하고 부딪친다고 술집에 가면 좋은 일이 있습니까?
천국길이 어렵다고 지옥 길로 가면 더 행복한 일이 생기겠느냐는 말입니다.
애굽으로 가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를 42장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42:17절에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42:22절에도 “너희가 가서 우거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줄 분명히 알찌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분명히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사람이 무섭다고, 칼과 기근과 염병이 기다리고 있는 애굽으로 건너갔습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한 유다백성 43:1-13
43장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한 유다백성의 스토리입니다.
41~43장까지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한 요하난과 유다백성의 스토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즉각적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이 인준해 주시기를 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가 갈 테니, 하나님은 인정이나 해주시고, 축복이나 해주십시오.
나는 내 길을 가겠나이다(I will go my way).”
지금 요하난과 유다백성들이 이런 대단히 믿음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도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입니다.
42:14절을 보니 '애굽땅은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땅'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 가면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는다 해도
요하난과 유다백성은 아니라는 자기 생각을 굳게 확신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한 논리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43장 2절이고, 또 하나는 43장 3절입니다.
43: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43:3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바룩은 예레미야의 젊은 비서로 친바벨론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제 예레미야는 나이 들고 늙어서, 젊은 비서에게 꼬임을 받고
우리에게 비서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3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했습니다.
열흘 전에만 해도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겠다는 훌륭한 결심을 말하더니
열흘 만에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뜻대로 행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말을 잘 뒤집는 사람은 좋은 못한 사람입니다.
43:7절에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다바네스에 가서 “이제는 느브갓네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먹을 것도 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느브갓네살의 손아귀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유다백성은 애굽으로 뛰어갈 수는 있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43:10~11절에, 결국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서 애굽으로 불러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예레미야에게 다바네스에 있는 애굽왕 바로의 궁전에 큰 돌을 가져다 묻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진짜로 그렇게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돌을 묻으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그 위에다가 큰 천막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아, 애굽을 쳐서 멸망시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거스르고 도망할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다 끝에 서도 땅 끝에 서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고도 거절하는 것은 언제나 재앙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까? 예배드려야 합니까?
그것은 기도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그렇습니다(Yes).”입니다.
그리고 살인해야 합니까? 간음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No).”입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도하면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아는 대로 순종하여 따라가야 됩니다.
저의 인생가운데도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 몇 번째 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마다 제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따라왔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살만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오면,
복된 인생이 됨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도 거절하는 결과는 “대재앙”입니다.
그 최악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인도하시는 가장 큰 메시지는
인간은 죄인이라 죄를 그대로 가지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성경에 기록된 명백한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 나는 죽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
나는 내 길을 가리라.”하는 사람에게 칼과 기근과 염병은 그림자에 불과한 구더기를
불로 소금치듯 하는 무서운 지옥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거짓말이라 하시겠습니까?
2천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이 성경을 공격해 왔어도 결국은 주의 말씀은 진리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성경을 증거하고 있는 목사님들이 속아서 거짓말을 한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는 성경이 뭐라고 말해도 내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시겠습니까?
애굽이 좋다고 그리로 가겠다고 고집하겠느냐 말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가수 중에 한 사람이 1960년대 70년대 유행했던 노래를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로 1969년에 “My Way”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My Way가 20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한마디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And now the end is near.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그런데 이 노래는 매 절을 끝날 때마다 이렇게 끝납니다.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My Way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가사입니다.
그의 노래에 영향을 많이 많아서인지,
20세기,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나는 내 뜻대로 가리라’고 말합니다.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사상은 옳지 못한 현대인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고집대로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잠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의 보기에 바르다고 해서 그길로 가면, 나중에는 죽음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3:5~6절로 결론을 맺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저의 철학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길을 따라 생명길로 행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41장 절별 해석
41:1 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41:2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이스마엘의 그다랴 (총독) 암살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칠 월에' 연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해는 예루살렘이 함락 되던 연도(BC586년)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함락은 사월로 명시되어 있다(39:2).
그리고 히브리 종교력의 칠월은 현대력으로는 양력 10월경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이전에 40:7-16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랴에 대한 암살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년이나 7년 후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유다인들은 그다랴에 대한 암살을 큰 사건으로 여겼으며,
그 후 칠월을 이에 대한 기념의 달로 예식을 거행하였다(슥7:5, 8:19).
'이스마엘이...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는 사건의 배경은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인 것으로 묘사된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주인은 손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 손님은 주인에게 신뢰를 가지고, 그에 맞는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다랴는 이스마엘을 손님으로 정중히 대접했을 것이고,
이스마엘을 믿고 무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클라크는, 보다 더 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본절에서와 같이 함께 떡을 먹는 것이, 단순한 식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지리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다랴를 살해한 행위는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한 갈대아 인들에 대한 공격이고 도전이었다.
41:3 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첫 번째 살인에 이어 또 다른 살인이 이어졌다.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몇몇 유다인들이 곧이어 살해 되었다.
이들은 미스바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의 대표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던 갈대아 군사들 중 몇몇도 살해되었다.
아마 이들도 식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곳에 참석해 있던 갈대아인 주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하지 않고는
그 음모를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고, 기습을 당해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바벨론 군대의 보복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니콜슨은 이 사건에서 살해된 갈대아인들이 총독 관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었으며,
일시적으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41:4 그가 그다랴를 죽인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본절은 그다랴 살해 사건이 사전의 각본에 따라 주도 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41:5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팔십 명이 그 수염을 깎고...몸을 상하고'
북이스라엘의 옛 종교 중심지였던 세겜과 실로, 그리고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미스바에 도착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다.
이 사실은 소제물이나 유향이란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때가 칠월이었으니 이들은 가을의 큰절기인 초막절에 참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7월은 신년도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순례자들이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실은
북이스라엘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에 적어도 얼마 정도는 B.C. 622년의 요시야의 개혁을
받아들이고, 그때까지 계속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어쩌면 이들은 중앙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는 신명기의 규례들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신12:5, 6).
또한 순례자들은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는 등 슬픔과 회개의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
(16:6, 48:37 참조), 이는 틀림없이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애곡의 표시였을 것이다.
전체 포로기에 걸쳐서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시74, 79편, 사63:7-64:12, 애가서 등).
많은 주석가들은 성전 파괴이후에도 성전의 존엄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성전 지대에서의 종교 행사도 계속되었으리라 본다.
41:6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 울면서 가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더라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이스마엘은 극악 무도한 위선 행위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역시 이들 순례자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사람들에게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다랴에게로 가자'
이를 '그다랴의 이름으로 환영한다'라고 의역해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이스마엘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초대였다.
한편 이스마엘이 이들조차 살해한 원인이 본문상에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들이 유다 총독 그다랴를 방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발각되지 않게 하려는 동기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러나 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들에게서 양식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41:7 그들이 성읍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 가운데에 던지니라
'이스마엘이...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
순례자들의 시체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구덩이'는 시체들을 감쪽같이 처분해 버리기에
적절한 장소였다(38:6).
한편 이 '구덩이'는 물이 귀한 팔레스틴의 곳곳에서 볼수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 시체를 던져 넣는 것은 매우 몰지각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시체에 오염된 물은 부정하여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41:8 그 중의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니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아니하였더라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본절에는 이스마엘이 숨겨 놓은 양식을 얻기 위해
이들 순례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암시가 엿보이긴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어쩌면 이스마엘은 이들 순례자들을 볼모로 잡아서
그들 가족들에게서 양식을 갈취하려고 했었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엘이 이 열명의 순례자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양식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마 이것도 원래 약속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인명이 살해된 이런 사건의 전말은 조만간에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들 열 명의 순례자들도 나중에는 피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이스마엘은 분명히 유다 땅에 남아 있을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절에는 그가 암몬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 언급되는 바,
그는 이 여행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고자했을 법하다.
41:9 이스마엘이 그다랴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던진 구덩이는 아사 왕이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을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가 쳐죽인 사람들의 시체를 거기에 채우고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약 300년 전에 유다 왕 '아사'가 미스바를 요새화하려는 일환으로
이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왕상15:22에 따르면 아사는 북쪽 이스라엘 '바아사'왕의 영토에 있던 라마의 성벽을 허물고
거기서 얻은 재목을 가지고 미스바에 요새를 건축하였다.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 en-Nasbeh)를 발굴한 결과 이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는 원래 그 지역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저장소였으나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전쟁을 치르는 시기에 요새화의 일환으로 활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41:10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이스마엘이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떠나니라
'왕의 딸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바벨론 군대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비중 있는 이들을 붙잡아가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윗 왕족이나 방백들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딸들이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재빨리 도피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예레미야에 대한 언급이 여태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는데,
어쩌면 예레미야는 이스마엘이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포로들이 요하난의 도움으로 베들레헴 근처로 돌아올 수 있었을 때
예레미야가 이들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42:2 이하).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따름이다.
41:11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행한 모든 악을 듣고
41:12 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 가에서 그를 만나매
여기서는 요하난과 다른 군대 장관들이 이스마엘의 악행 소식을 듣고서
이스마엘을 추격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기브온 큰 물가에서 이스마엘 일당과 마주치게 되는데,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큰 물가'라고 하는 곳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의 거대한 웅덩이 정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 기브온은 미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4.8km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로 추정되고 있는 텔 엔-나스베에서부터 기브온까지의 방향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암몬 방향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틸 엔-나스베가 미스바의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추적을 따돌리려는 이유에서 우회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니콜슨은 삼하2:12-17에 기록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이 큰 물가였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 떨어진 오늘날의 엘-집(el-Jib),
곧 고대 기브온 지역에서 깊이 약 25km 정도되는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했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저장하거나 모아두기 위한 구덩이였던,
그 내부로 내려가는 계단이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
41:13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을 보고 기뻐한지라
41:14 이에 미스바에서 이스마엘이 사로잡은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이스마엘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던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잔인성과
장차 암몬에서의 노예살이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징벌하러 온 가레아의 아들 요나단과 그 군대 장관들을 대했을 때
매우 기뻐하며 달아날 수 있었다.
41:15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덟 사람과 함께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가니라
'여덟 사람과 함께' 이스마엘을 끝까지 따라갔던 자들은
아마도 그다랴 살해 사건에 처음부터 연루되었던 골수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성공적으로 치렀기 때문에
그를 사주하였던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로 곧장 되돌아갔다.
41:16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를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41:17 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41:18 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왕이 그 땅을 위임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었더라
여기에는 요하난이 인솔하는 무리가 그다랴 살해 사건으로 인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애굽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약 6마일 가량 떨어진 베들레헴 근방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행로를 멈추고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42:1, 2).
한편 게롯김함이란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김함이란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함은 바실래의 아들이었는데, 이 바실래란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하던 중
다윗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중에 다윗을 호위하여 요단 강을 건넜다.
다윗은 바실래를 귀족의 일원으로 초대했지만, 바실래는 연로한 이유를 내세워
그의 아들에게 그 영예를 허락하도록 요구하였다(삼하 19:31-40).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왕가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이곳은 ‘게롯김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게롯김함'이란 말의 뜻은 '김함의 소유'이다.
◑42장 절별해석
42:1 이에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
'여사냐'는 40:8의 '여사냐'가 아니라 43:2에 나오는 아사랴와 동일인이다.
따라서 칠십인역(LXX)은 43:2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샤라'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지는 예는 드물지 않았다.
웃시야도 왕하15:1에서는 '아사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2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3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요하난의 무리들은 애굽으로 가려는 뜻을 이미 굳히고 있었다(41:17).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나아온 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 결심에 동의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요청에 내심 응하기로 마음을 정하고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했던 발람의 망령된 태도와 다름없었다(민 22:21 이하).
4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본절을 전후하여서 여호와를 가리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또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란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차이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것이 어떤 반어법적 상황에서 비꼬는 의도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70인역(LXX)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당신의 하나님'이란 말을 생략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아주 조심스럽게 응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여호와의 뜻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들이 여호와의 말이라면
그 어떤 것이나 쉽사리 거부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또한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짐작하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애굽으로 가겠다고 결정을 내린 이상,
여호와의 예언도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5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이들이 순종하겠다고 맹세하는 엄숙한 선언이 강조된 것은
그 뒤에 일어날 불순종의 의미를 강조하고 고조하는 역할을 해준다.
'우리 중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유다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제멋대로 파기하고
또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망령된 행실로 말미암아(출 20:7)징계를 받았는데,
본장에서도 그와 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어쨌든 이제부터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으로 입석하셨기 때문이다.
6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선언한 것이 세 번씩이나 반복된다.
여기에는 또한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란 관용구가 쓰이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을 청종할 것이란 의미이다.
본절 끝에는 '키'라는 히브리어 접속사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강조적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예, 정말 그러하나이다'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7 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십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렇게 응답 기일이 지체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점차 불안해져 갔을 것이며,
더군다나 바벨론 군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기도와 중재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입을 열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자기의 심중에서 생겨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참된 예언적 영감은, 인간적인 통찰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23:18).
이런 과정을 거칠 경우 10일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10년이라고 하더라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뿐
이들의 요구가 있은 그 즉시로 예언할 수는 없었다.
이는 마치 제자들이 원한다고 해서 주님이 즉석에서 이적을 행하시지 않은 것과도 같다.
예언과 이적의 능력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8 그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부르고
9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보내어 너희의 간구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이렇게 이르니라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요하난을 위시한 군대 장관들과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또 그들이 간구와 맹세 사실을 다시금 주지시킨 후 여호와의 메시지를 들려주고자 한다.
특히 이들을 낱낱이 불러 모은 것은 그들의 불순종에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었으며, 따라서 아무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0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예레미야는 전에 그가 선지자적 소명을 받을 때 사용했던 두드러진 동사들을 사용해서(1:10),
아주 강하게 여호와의 응답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백성들이 심기고 뽑히지 아니하며, 또 세우고 헐리지 않으려면,
그들은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절의 조건부 약속은 본토에 남는 자들도 바벨론에 잡혀가 있는 자들과 동일한
갱신과 회복의 약속을(14,29장) 받고 있다.
이 무리들이 여호와께 스스로를 맡기고 순종한다면, 이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뜻을 돌이킴이니라'에 해당하는 '니하메티'는 '뉘우치다', '후회하다'(repent, KJV, RSV)는
의미로도 번역되나, '슬퍼하다'(grievend, NIV), '측은히 여기다'(LXX)는 뜻으로 이해할수 있다.
결국 이는 백성들이 여호와께 계속해서 반역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으나
이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이상,
그 처벌을 멈추실 것이라고 하는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돕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바벨론 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자비를 보이실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요하난의 무리들로서는, 바벨론 왕이 그다랴 살해 만행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
또 누가 무죄한지를 식별하지 못하고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너희 본향으로 돌려 보내게 하리라'
혹자는 본절을 포로 귀환에 관한 약속으로 확대 해석하고자
본서 원문이 포로 기간 중에 편집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미 어떤 사람들은 고국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고
또 이곳의 무리가 애굽으로 도망하려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여호와께서 현재 베들레헴에 있는 이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평화롭게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스마엘 한 사람으로 인한 죄로 자신들이 처벌받게 되리라고 염려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권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건지실 것이다.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총독 암살사건으로 인해 보복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는 B.C.582년에 포로를 더 잡아갔을 뿐이다(52:30).
그것이 총독 살해 사건의 보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면, 그것은 시기적으로 너무나 늦은
보복이었다. 아마 그것은 다른 소요 사태로 기인될 것일 가능성이 높다.
13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살지 아니하리라 하며
'너희가...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이 구절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백성들이 애굽행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고 거역하는 일이나 다름 없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애굽에 의존하거나 그곳을 동경하는 것은 율법서와 선지서 등 곳곳에서
비신앙적 심성의 발로로 지적되고 있다(신17:16, 사30:2, 31:1).
14 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애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전쟁의 나팔 소리나 식량 부족 등이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여겨졌다.
요하난과 유다 백성들은 그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예언을 말하는 중에도
그들의 이러한 반응이나 응답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15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로 고집하면
16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
본 단락의 서론격인 4-6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따르겠다는 순종의 맹세가
강조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순종하지 않게 될 때에
그들에게 임할 파멸의 정도가 어떠하리라는 점을 간접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들이 이 땅에 거하게 됨으로써 맞게 될 불행한 일이나 재앙이
오히려 애굽에서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신다.
'급히 따라 가서'(이드바크 아하레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근과 칼이
'그들의 발꿈치에 있을'것이란 뜻으로
그들이 두려워하여 피해갔던 전쟁의 기근과 칼이 그들을 파멸시키고 말 것임을 나타낸다.
17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본절에는 '칼', '기근', '염병'이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가 파국을 선언할 때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이제 이렇듯 엄청난 재앙이 여호와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고
애굽으로 건너가려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다.
1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여움과 분을 예루살렘 주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를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 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
19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두고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불과 얼마 전에 절실하게 체험된 바 있던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예로 들어
예언의 확실성을 강조, 확증하는 내용이다.
이 백성은 거듭되는 역사의 산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얄팍한 인간적 계산을 더 중시하는 완악한 자들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했던 결과 여호와의분노가 예루살렘에 쏟아졌던 것과 같이,
그들이 불순종하면 여호와의 분노가 애굽에서도 임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있을 파멸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로 묘사되고 있다(44:12 등).
저주라고 번역된 '알라'는 '서원', '맹세'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맹세하는 자가 그 맹세를 어길 경우 당하게 될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20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이 백성은 참으로 천하고 표리부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마음 속에는 배은망덕, 위선, 반역, 잔인함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만큼 심판을 받고 그만큼 여호와의 말씀이 전달되었건만,
그들은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져서 여호와의 말씀을 또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우상 숭배에 길들여져 있어서 인격적이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
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 너희에게 전하였어도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이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요구하였고 또 그 계시에 순종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레미야를 하나님앞에 보내어 구하게 하였던 그것을 하나도 행치 않음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심히 모욕하였던 것이다.
22 너희가 가서 머물려고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
이 마지막 구절들에서는 애굽으로가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이상에서보는 바와 같이 대단히 강렬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애굽으로 가려는 계획이 여호와께 용납되고 승인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이런 잘못된 판단 속에서 예레미야를 찾아왔었고
또 그를 여호와께 보냈던 것이다. 또한 확실한 순종을 약속한 것도
그들의 계획이 여호와께 용인될 것이라는 판단하에서였음이 드러났다.
◑43장 절별 해석
1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예레미야가...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42:19-22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백성들에게 거부되었음을 간접적으로만 보여주고 있고,
본장(1-3절)에서는 공식적인 거부가 나타난다.
이렇듯 유사한 내용에 대한 반복된 서술은 불필요하게 장황한 듯이 여겨질 수도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레미야의 어록에서 부가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이해하곤 하였다. 그러나 반복을 통한 강조는 히브리 어법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2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3 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아사랴와 그의 동료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을 얼버무리고
관심을 다른 데로 전환시키기 위해 오히려 예레미야를 거짓말장이로 매도하며
바룩의 궤계에 말려든 것이라고 공박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여호와가 그들의 애굽행 계획을 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적인 편견과 뿌리 깊은 영적 우매성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옳은 것으로 착각하고서는
진실에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으며
그래서 진리에 입각한 참다운 해결책에 눈을 감아버리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들의 행위가 바로 대표적인 본보기일 것이다.
한편 바룩이 여기서 주 공격 목표로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바룩이 예레미야의 서기일 뿐만 아니라, 뭔가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사상을 가졌고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바룩의 관계를 깊이 연구해보면,
우리는 이런 백성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왕 앞에서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전했던 예레미야가
바룩에 의해 조종당했을 리는 없다.
4 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5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
6 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도피한 자들의 수효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여기서 분명히 암시되고 있지 않다.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다랴와 함께 미스바에 집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의 '남은 자'란 표현은 베들레헴으로 도피했었던 특정한 무리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트랜스요르단 지역에 피난해 있다가
최근에 유다로 돌아온 자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40:11, 12).
또한 미스바 (패망 후 남유다 수도) 일원에 거주하던 모든 유다인들이
이 애굽행 대열에 동참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즈음에는, 유다 지역에 상당수의 유다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한편 본문에서 나타나는 이 무리는 중요한 인물군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을 보면 군대 지도자들, 왕의 딸들이나
예레미야 또는 바룩과 같은. 영향력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이들 난민들 무리에 포함된 경위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보았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고 볼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2:6-15,40:1-6, 42:13-18 참조).
혹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끝까지 같이 하였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7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이곳은 아랍과 아시아 쪽으로부터의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때 그리스 용병들을 주둔시킨
지역이기도 하다(Herodotus). 제롬(Jerome)이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충실하고 온 생애를 다바쳐서 자기 민족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요청했던 예레미야가
이들 난폭한 반역도들의 돌에 맞아 숨진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예레미야는 이들의 행복을 보기 원했고 또 그렇게 기도했었지만,
도리어 그들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8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예레미야는 애굽 땅 '다바네스'에서 42:15이하의 말씀을 최소한 한 번 이상 반복해서 말했을 것이다.
즉 애굽으로의 피난이 칼과 기근과 염병에서 그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다시 선언했을 것이다.
본절에서부터는 보다 더 상세하고 특별한 내용이 제시된다. 그리고 이들을 심판할 대행자는
이들이 무서워하여 피해왔던 바로 그 바벨론 군대가 될 것이다(42:11, 12).
9 너는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 네 손으로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
'큰 돌들을 가져다가...벽돌 깔린 곳에 진흙으로 감추고'
본절의 '바로의 집'이란 바로의 왕궁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국경 도시인 이곳 다바네스에 왕궁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곳은 바로가 이 도시를 방문할 때 숙소로 사용했던 별궁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겠다.
엘레파틴 파피루스에는 애굽 남쪽 국경에 있던 왕궁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부분의 설교, 또는 상징적 행위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 약 1년 정도 지난 때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리들은 갈대아인들을 두려워해서 유다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으로 건너왔지만,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이 그의 정복지를 애굽에까지 확장할 것이며,
이 '큰 돌'이 놓이는 곳에 느부갓네살의 군막이 설치될 것임을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44장 끝부분에 가면 이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밝혀 줄 것이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곳에 와서도 유다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그런 상징적 행위로써 호소하였다.
그것은 예언의 메시지와 동일한 능력이 있었으며 성취되고야 말 것이다.
비록 본문의 텍스트 판독에 어려움이 있긴 하나,
이 상징적 행위가 보여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이 '큰 돌'은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했다는
증표로써 세우게 될 그의 보좌의 주춧돌을 상징하는 것이다.
10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큰 장막'은, 대형 천막, 곧 느부갓네살이 거하게 될 둥근 지붕의 천막을 뜻한다.
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본절 이하에는 10절의 예언을 확증하는 예언이 나온다.
애굽은 사방이 요새화되어 있었고 나일 강과 홍해 및 호수들로 둘러싸여
천혜의 방벽을 보유하였으므로, 갈대아 원정군들에 의해 점령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의 흥망 성쇠를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때는
그러한 방벽들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12 내가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지르리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내가 애굽 신들의 집에 불을 놓을 것인즉'
애굽 신들의 일부는 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불에 탈 수 있었다.
그리고 금속으로 된 신들은 탈취당할 것이다.
더욱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은 약탈자들의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부와 영광이 모두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느부갓네살은 애굽을 정복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애굽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는 데도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
13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애굽 땅 벧세머스의 주상들을 깨뜨리고'
느부갓네살의 활동은 애굽 신전과 그 신들을 모욕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렇게 피정복지의 신들을 모욕하는 것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잘 알려져 있던 관행이었다.
엘레판틴 파피루스는 페르시아의 통치자 캄비세스가 애굽을 정복했을 때
애굽의 신전들을 황폐화시켰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본절의 '벧세메스'란 곳은 '태양의 집'이란 뜻을 가진 신전이었는데,
신성한 기둥들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의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약 8km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느부갓네살은 B.C. 572년과 568년 두 차례에 걸쳐 애굽을 원정하였다.
(겔29:19, 40:1-48:35). 단편 조각으로 발견된 비문들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항구적으로 정복하여 통치하려는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주며
단지 아시아 지역에서의 애굽의 간섭이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였음을 시사한다.
그 당시 애굽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했으며,
그 이후에는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예언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여호와의 진정한 선지자였음을 증거로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