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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소원 막10:46~52 2003.11.23.
※바디매오의 소원과 솔로몬의 소원의 연결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나의 소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삼중 장애자였던 헬렌 켈러라고 하는 분을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역사적인 인물이고 대표적인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삼중 장애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단 3일이라도, 단 3일이라도 내가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첫날은 매우 분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동안 목소리로만 듣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밤이 낮으로 변해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셋째 날은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리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응시할 것입니다.’
그는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맹인이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여 많은 것을 보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귀담아 들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가치는, 그의 소유나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믿음과 소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소원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사는 겁니까?
그리고 내 간절한 내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 자신의 모습이요, 내 앞에 있는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살인범이 있었고 그는 사형선고 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형 되는 사람은 나라의 공훈이 있는 아주 훌륭한 정치가였습니다.
자기 동생이 이렇게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체면불구하고 대통령을 찾아 들어가서 “내 동생을 내게 맡겨줄 수 없겠습니까?”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대통령은 그의 인품과, 그 형님의 인격과 나라를 위한 공훈을 생각하고, 사면을 허락했습니다.
동생의 사면장을 받아가지고 동생이 갇혀 있는 곳에 찾아갔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대통령이 너를 사면해준다면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그랬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말합니다. “나는 이 감옥을 나가는 순간
나에게 사형언도를 한 판사를 찾아가서 그를 죽일 것입니다.
사형언도를 하도록 결의를 한 배심원들을 차례차례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형은 아무 말 없이 감옥 문을 나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면장을 찢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소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바로 이 처지에 와서도
아직도 그 소원이 잘못됐어요. 그런고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올바른 소원을 품었던 바디매오
여러분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하나의 시각장애자요 그리고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맹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어쩌면 이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생을 끝낼 것입니다. 무얼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습니다.
그 소원과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짧고 간단한 본문 속에 이 엄청난 해답을 주는 귀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소원과 믿음만 있으면 산다 이거예요.
바른 소원, 바른 믿음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 하는 것입니다. *주제
여러분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말은, 예수님을 바로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하는 말 속에, 그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시는 대로 “적선해 주십시오”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얼마를 주고 가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그 이상의 소원은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이렇게 묻지 않습니까?
여기서 만일 그가 “돈 한 푼이요”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바디매오가 다른 사람에게는 “돈 한 푼이요, 적선이요”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아니에요. “제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건 엄청난 소원이예요.
일반적인 것이 아네요. 아주 색다르고 아주 특별한 것이에요. 믿음의 소원입니다.
이 바디매오에게는, 비록 길거리에 구걸하러 앉아 있지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한 그 고백에 결코
못지 않은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었어요.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었어요. 조용히 들었어요.
메시야가 오신 것을 알았어요.
‘이 어느 때 내가 그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마음속에 신앙고백이 있었고, 그리고 확실한 영적 소원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기회를 포착해서 예수님이 자기 앞에 지나가시게 된 것입니다.
자 여리고로 지나가고 계십니다. 이건 일생에 딱 한번 지나가는 기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그는 그 동안 귀로 들은 바를 종합해서, 자기 소원을 바로 정하고
예수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들은, 그런 소중한 시간이요 소중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도 모르고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방해자가 많았어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 방해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과, 이 바디매오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
그건 엄청난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끝까지 방해를 무릅쓰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다음에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하니 막10:49
“됐다, 기회는 왔다” 그 순간 오늘 성경에 보면 어이가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오거늘...” 막10:50
여러분 소경이 뛰었다는 말 들어 봤어요? 도대체 어떻게 뛴다는 얘깁니까?
소경이 뛰었다는 말이에요.
게다가 “겉옷을 벗어던지고” 이 말이 또한 매력이 있어요.
이 겉옷이란 게 뭐냐? 이 소경의 유니폼이예요. 이것이 있어야 얻어먹을 수 있어요.
저는 인천에서 목회할 때 그런 걸 보았어요.
그때 늘 걸어서 심방을 할 때인데, 교회를 나서면 홍의문이라는 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 옆에 길가에 뭘 이렇게 펴놓고 딱 눈감고 앉아 있는 시각장애자가 있어요.
그래서 지나갈 때마다 뭐 조금씩 도와주고 그랬는데, 늘 거기에 앉아있어요.
언젠가 한번 심방하다보니까 그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더라고요.
그런데 길에서 만났거든요. 저도 나를 보더니 어이가 없는가 봐요.
그래서 제가 악수했어요. “아유 이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떡 앉아서
그게 무슨 짓이냐?”고 했더니,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건 유니폼이예요” 그러잖아요.
“그걸 입어야 앉아 있을 수 있지, 이렇게 넥타이 매고야 그게 됩니까?” 그러잖아요.
어이가 없어요. 그 다음에도 또 앉아 있더라고요.
내가 지나 갈 때마다 한 번씩 윙크하더라고요. 그 양반이...
내가 생각해봤어요. 오늘 성경을 보면서 ‘겉옷을 내던지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시 이 옷이 필요가 없어요.
남루한 이 유니폼이 이제 필요 없어요.
내던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소경이 뛰어, 뛰어 예수님께 옵니다.
꺼꾸러지던 뭘 하던 좌우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 예수님께로 나왔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예요.
예수님이 묻습니다.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예 보기를 원합니다”
그 아무에게도 할 필요가 없고, 또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예수님에게만은 아주 특별한 소원을 말하고 있어요.
“보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여러분 제가 여러분의 기도를 다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구하는 것, 일반적으로 구하는 것,
그것을 지금 내가 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구하던 것들을
이제 예수님에게 와서도, 교회에 와서도 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구하는 기도제목은, 이 소원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야만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구하는 것이니까요...
오직 주님 앞에서만 구하는 소원은, 보통 소원으로는 안 됩니다.
아주 고상하고, 특별한 소원이어야만 됩니다.
그런 간절하고, 그런 원대한 소원이라야 한단 말씀이에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때 바디매오가 ‘돈 한 푼 주십시오!’ 했다가는,
큰 일 날뻔 하지 않았겠습니까?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지요.
▲여러분, 솔로몬 왕이 21살에 왕이 되고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일천번제를 드리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할 때에 솔로몬은 이렇게 구합니다.
왕상3:7~10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부귀와 영화도 아니고, 원수의 목숨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할 때 하나님께 크게 기뻐하십니다.
왕상3:11~12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그 장면을 자세히 읽어 보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어린애처럼 기뻐해요. “어떻게 그것을 구하느냐?
아니 원수의 생명도 있고, 장수도 있고, 명예도 있고, 건강도 있고,
뭐 소원이 많을 것 같은데... 왜 그건 아니고, 오직 지혜로운(듣는) 마음이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 이래요.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은 지라” 왕상3:10
솔로몬의 소원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 딱 맞았어요.
요즘 말로 코드가 맞았다 이거예요. 코드가 딱 맞는 순간
하나님께서 ‘전무후무하게 주셨다’고 그랬어요.
그래 서지혜의 왕 솔로몬이 된 것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 앞에 명상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비슷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I want nothing but Christ 주여, 나는 주님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주세요”
이렇게 구했습니다.
바디매오는 무엇을 구했습니까?
솔로몬은 무엇을 구했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베트남 공산 치하에서 신앙을 지켰던 구엔 반 투안 추기경 (펀 글)
구엔 반 투안 베트남 추기경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성령께서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잘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을 포함하여 많은 수인囚人들은
오로지 교도소에서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늘 언젠가 다가올 그 날만 무작정 기다렸던 것입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구금당하셨던 존 월시는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르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된 뒤에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삶의 반평생을 기다리는 데 소비했다.”
그러나 위 말을 깊이 묵상한 후 구엔 반 투안 추기경은,
마음을 바꿔먹고 이렇게 다짐하셨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감옥에서 어떻게?
고뇌하던 그 순간 성령께서는 구엔 반 투안 추기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란다.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혔을 때 했던 것처럼 하여라.
다른 공동체들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
그는 감금상태에서 매일 작은 쪽지에 혼신의 힘을 다한
간단한 묵상 글을 적기 시작했고,
한 소년이 그 쪽지를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그의 글을 필사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또 다시 필사하여 다른 이웃들에게 돌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희망의 길」이란 책이 발간되었고,
이 책은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내 삶에 있어 성령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솔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 순간을 내 생애 마지막으로 여기고 소중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수적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오로지 핵심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말 한 마디, 손짓 한번, 전화 한 통화, 쓰는 글 한 줄이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것,
즉 내게 주어진 하루 현재를.. 낭비하지 않고 후회함이 없이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기도(소원)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했어요. 막10:52
화재당한 현장이 있었습니다. 낮잠을 자던 어린애가 불이 났다고 소리 지르니까
정신없이 3층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3층 옥상에 섰습니다.
불길은 밑에 있고 연기는 자욱한데
소방관들이 와서 커다란 보자기의 네 귀를 붙들고 그 애보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받아 줄 테니까 안심하고 뛰어내리라”.
옥상에 서 있는 애는 그냥 소리를 지르고 울기만 합니다.
“우리가 받아 줄 테니까 뛰어내리라. 우리가 받아 줄 테니 내려와, 내려 와”
하여도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장보러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와 가지고 큰소리로
“얘야, 엄마 여기 있다” 엄마가 여기 있다 하니까
이 애가 “어머니”하고 탁 뛰어내리더란 거예요.
3층에서 뛰어내리는 용기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올 때, 그와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단 말예요.
그 믿음이 있을 때,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이 같은 큰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단 말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세상이 고달프고, 또 모든 것이 부조리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원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오늘날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는 현실의 변화를 이루기 전에, 먼저 내 믿음을 정비해야 되겠습니다.
내 소원이 진정 무엇인가? 내 마지막 소원이 과연 무엇인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바른 소원, 그것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은 말씀하실 겁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아름다운 소원!
주님만 믿는 아름다운 믿음!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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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이 미국 유학을 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그리고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심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동안에 제 설교를 들으면서 참 은혜는 받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라'는 그 메시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교수 채용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반드시 교수로 채용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데
'주님께 다 맡기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는 제 메시지가
너무 막연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저를 이번에 교수 채용 되게 해 주셔야 됩니다.'
이미 최종심사 단계까지 갔으니 거의 된 거나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마음엔 두려움이 있었던 그는,
이제껏 큰 고생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너무 마음이 힘들고
그리고 유학생활이 쉽지는 않았는데, 빨리 좀 공부 과정 끝나서
자기가 교수로서 미국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는 소원이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주님께만 전적으로 맡기라 주님만 바라보라'는 메시지는
자기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는 교수 임용에서 탈락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목사님의 설교가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무슨 일을 당하든지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니까
우리를 낮추시고 죽게 하실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면 그러면 충분한 거잖아!'
그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거 자체가 행복한 일이잖아요.
그러면서 오직 예수님 그 분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제가 교수 임용에는 내가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신 분들 십자가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십자가 예수님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실패자로 끝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데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까지 흘려 주셨는데
우리가 우울하고 낙심하고 실패 무너지고 그렇게 처절하게
우리 삶이 그렇게 끝나게 하나님이 계획 하셨겠습니까?
우리를 어떻게 구원 해 주셨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절대로 실패로 끝날 인생이,
그 믿음에서부터 우리 마음속에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을 중에 내 마음 속에서부터 감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반드시 나를 회복시키실 것이 믿어지니까
주님이 나를 구원하실 게 너무 분명하니까
하나님의 나를 포기하실 리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