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웰에이징 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SR3tVOM0_4s
◈죽음이 드러내는 7가지 신앙의 태도들 롬5:14, 히2:14~15 2025.05.09
롬5: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위 말씀에 보면, '사망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자들에게도 왕 노릇했다' 했는데,
무슨 얘기냐 하면, 이 죽음과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어떤 잘잘못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는 '익숙함'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죽음을) 여러 번 대면을 해도, 여전히 힘들고, 대면할 때마다 고통스럽고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더욱 그렇죠.
△구O성 집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주1)
◑복음은 <삶>에 대한 것 이전에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위 동영상 5:45~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결국 죽음의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여러분 결국 죽음의 문제예요.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이전에
죽음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게 신앙의 진짜 본질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계속 기억하고 사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것은 웬만하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들은 미뤄놔요.
그런데 사실은,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죽음이라는 걸 생각하면,
사람이 사는 것이 힘드니까, 그것을 이렇게 잊어버리고 지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
신앙 생활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자꾸 포커스를 맞추게 됩니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내가 더 의미 있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에 계속 포커스를 맞추게 됩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현세적인 신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1차적인 본질은, 삶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거예요.
삶에 대한 것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거예요. 이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내세적인 신앙을 놓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왕느릇 하고 있는 게 뭐예요? 죽음이라고 그랬거든요.
왕느릇 하고 있는 것이 사망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왕(죽음)을 어떻게 대면하고, 대적할 건가? ...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복음의 본질은 뭐예요? 이 세상의 왕느릇 하고 있는 자와
어떻게 대적하고 대면하여 살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임팩트를 미치는 게 죽음이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사실은 '죽음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에 의해서 결국은 결정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제외하고, 즉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 제외하고,
이 삶의 문제, 즉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문제만 가지고
우리가 고민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풀어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죽음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것에서 해결이 되고, 그것이 결국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지,
이 부분을 제외하고, 삶에 대한 것들에만 계속 포커스 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결국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은 결국 삶에 대한 것 이전에, 죽음에 대한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죽음이 없다면, 복음도 필요 없죠. 죽지 않는데 무슨 복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신앙도 필요 없을 것이에요. 복음은 삶에 대한 것 이전에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왕노릇 하는 자, 잔혹한 왕, 이 왕(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생을 살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크고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국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뭐죠?
바로 죽음을 이기신 거잖아요.
그래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망의 권세를 꺾으시기 위함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꺾으심으로, 새로운 삶을 주신다는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2:14~15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게 예수께서 하신 일이라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리고 또 나아가서는 나의 죽음도 우리가 맞닥뜨려야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각 사람도 죽음은... 피할 수가 없죠.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믿음이고, 신앙이고, 영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 믿음과 신앙에 대한 많은 것들을 드러내고,
또 도전합니다.
'나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 나는 잘 믿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던 것들이,
죽음 앞에 딱 서게 되면 '어, 실제로 내가 믿고 있지 않았네?' 하는 것을 보게 되고요.
또 어떤 것들은, 죽음 앞에 서야 비로소 '내가 진짜 믿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죽음'이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단계를 통과해서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 '내가 그냥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 허상들,
신기루들을 아마 '나'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갔을 텐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지 않으시고, 물론 고통스럽고,
또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죄의 결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과해서 하나님께로 오도록
그렇게 허락하신 이유는...
아마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보게 하시고,
그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들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축복이다.' 이런 얘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거 그냥 바이패스 by pass 하게 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걸 피해서, 그걸 거치지 않고 우회해서, 하나님께 오도록 하실 수도 있죠.
그런 예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에녹 같은 경우에는 죽음을 바이패스해서 갔잖아요.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거거든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통과해서 하나님께로 오도록!
그렇게 정하신 것은, 그게 하나님의 의도가 있으시겠죠.
◑죽음이 드러내는 신앙의 7가지 태도
그래서 오늘은 죽음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는
또는 죽음이 드러내고 도전하는 일곱 가지 태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 안에 '복음에 대한 우리 믿음'이 다시 한번 재점검이 되며,
하나님께서 일을 허락하신 것들이 더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삶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 안에 일어났던 첫 번째 도전은, 삶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인생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요?
평상시에는 당연히 꺼리낌 없이 ;주권은 하나님께 있죠' 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죽음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게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던 욥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생각할 뿐,
사실은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 앞에 딱 서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나의 죽음이든지 간에, 죽음 앞에 딱 서게 되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시험에 들고, 죽음 앞에서 낙심하고,
죽음 앞에서 영적으로 실족하는 이유가, 이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뭔가를 도전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통과할 때는, 그것이 나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하여간 죽음을 통과할 때는... 이전과는 같을 수 없게 돼요. 이전과는 같을 수 없게 돼요.
그래서 죽음 앞에서, 우리는 갈림길로 갈라지게 됩니다.
1) 첫 번째 갈림길은 뭐냐 하면, 낙심하고 실족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있지? 어떻게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실 수가 있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수 있지?'
하면서 낙심하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인데,
이렇게 낙심하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실패하는 거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실패하게 되면, 결국 영적으로 침체되게 됩니다.
그 길로 가든지
2) 아니면 죽음 앞에서 다시 한번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거예요.
과연 내 인생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면 경외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올라가게 돼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든지...
그 갈림길 앞에서 우리는 둘 중 하나예요.
이전과 똑같이 유지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어떤 죽음이든지,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우리에겐 선택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택이에요.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인정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죽음의 극복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또 우리 교회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거나,
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면... 교회도 그래요.
교회도 침체될 것인지, 부흥할 것인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부흥'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더 깨어나게 될 것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지,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키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여러분, 아마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구절이 있다면
토기장이의 비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롬9:20~21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게 아마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불편한 구절일 거예요.
나하고 상관없을 때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이 말씀이 바로 내 삶 가운데 딱 실체가 돼서... 내가 받아드리기 어려운 일 앞에 섰을 때,
그때 여러분 이것만큼 불편한 구절이 있을까요?
귀히 쓰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고, 천히 쓰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귀히 쓰임을 받는다면 감사하겠지만,
내가 천히 쓰임을 받을 때도 과연 감사할 수 있는가요?
내 인생을 왜 그렇게 하나님 디자인 하셨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질그릇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인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만들지, 주인이 어떤 토기를 만들지는... 주인 마음이라는 거죠.
'네가 무엇인데 반문하냐?'는 거예요. 롬9:20 여러분 가장 불편한 구절 아닙니까?
하나님이 공평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게 느껴지고,
또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게 느껴집니다.
또 하나님이 긍휼하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게 느껴져요.
'왜 우리 기도를 안 들어주셨지? 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허락하셨지?'
우리가 불편하죠.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외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경외는 뭐냐 하면,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왜요? 그 분이 창조주시니까!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신 분이시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차이는, 개미와 인간의 차이보다도 더 커요.
그럼 여러분, 개미가, 인간이 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개미가 무슨 노력을 한다고 한들, 인간이 하는 일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인간이 설명을 해준다고 한들, 개미가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개미와 인간의 차이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넌센스지요.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그러냐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그게 애당초 가당키나 한 일이냐? 롬9:20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던 욥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 있었느냐'
내가 땅을 창조할 때 네가 거기 있었느냐는 거죠.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가 봤느냐? 네가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네가 무엇을 안다고 나에게 질문을 하느냐?' 이게 하나님의 반응이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될 첫 번째 태도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겁니다.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에요. 신뢰의 대상이지...
하나님을 이해하겠다고 하는 것은, 모든 영적인 실족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실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물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이만큼 있겠죠. (그건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야, 우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죠.
중략 주2)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던 다윗의 군대가 왜 위기에 처했는지, 주2)
그리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했던 스데반이 왜 죽음을 당했는지,
그리고 예수께서 그렇게 공들여 키우셨던 3대 제자가 있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3명이 12제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3명이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인 야고보는, 왜 사역을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바로 죽임을 당했는지... 행12장
그럴 거면 예수님께서 뭐 때문에 3년이란 그 긴 시간을 투자를 하셔서 양육하셨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어요.
성경은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에요.
우리 인생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을 구할 수 있어요.
이것이 경외라는 거예요.
왜요?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이 경외야말로 모든 영성과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일전에 어떤 목사님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한테 뭐라고 그랬냐면
'목사님의 설교를 이렇게 들어보면, 목사님의 데스티니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인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듣고 보니까 '내가 그런가?'
그런데 이분이 제 설교에 은혜 받았던 것들을 이렇게 나누면서,
굉장히 오랫동안 제 설교를 쭉쭉 다 들었는데,
한두 편 들은 것이 아니고, 제 설교를 거의 다 들었는데
'목사님의 설교에 보면 항상 가장 기초에 깔려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남이 보면, 더 잘 보일 때도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선교사님, 또 사랑하는 우리 OOO 집사님을 떠나보내면서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장 충성되고, 가장 사역도 열심히 했고,
그런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골라서 데려가시는 것 같은...
그런 상황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데스티니이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고 저는 믿습니다.
▲2. 죽음이 두 번째로 보여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의심의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신다면 과연 선하신가?'
이 의심의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죽음의 고통을 대면하게 되면,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죠.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그렇다면 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지?'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만약 살아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선하신가? 과연 선하실까?'
하는 의심스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맞아요. 여러분, 죽음은 우리의 믿음을 향해 도전장을 내밉니다.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 하나님이 선하시고, 그래서 행하시는 일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또 다른 종류의 것인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입술에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어요.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그것을 참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과연 가장 좋은 일이고 선하시다고 했으니까
선하신 일이고 복된 일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믿을 수 있을까?'
그거는 또 다른 차원의 얘기죠.
사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한다고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의심하게 되죠.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도전합니다.
'너는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을 믿냐?
존재하시는지는 믿는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선하시냐?'
죽음에는 이 마귀의 비아냥거림이 항상 따라와요.
그래서 사랑하는 이와 사별도 참 중요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인데,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마귀의 비아냥거림이 더해집니다.
그렇지만 그곳이 바로 우리가 서야 되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이게 여러분,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굳이 믿음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여러분 불신자들도 감사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리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야 되는 믿음의 자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거예요.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여러분, 다윗의 주변에는 늘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사랑하는 동료를 잃고, 또 사랑하는 자녀도 잃고, 또 아내도 먼저 떠나보내고...
했던 이 다윗이 선 곳, 다윗이 걸었던 곳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어요.
그러나 그곳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여호와는 선하심과 인자하신 분이시라는 거예요.
여호와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거예요.
이것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외치는 다윗의 고백이고,
사망 앞에서 드리는 다윗의 예배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예배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원수를 향한 우리의 선포고요.
이것이 비아냥거리는 마귀를 향한 우리의 도전입니다. 아멘!
▲3. 죽음이 드러내는 세 번째 진실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평강>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평강이에요. 이게 불신자하고 다른 점이에요.
불신자들은 여러분 죽음 앞에서 한쪽 감정만 느낍니다.
두려움, 절망, 낙심, 분노... 그거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장례식장에 가면, 절망과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그거는 그냥 제 영이 느껴요. 그냥 분노와 원망과 한숨과 탄식... 그런 게 그냥 가득해요.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장례식장에 가면 달라요. 정말 다릅니다.
물론 그 안에도 여전히 슬픔이 있고, 그 안에도 고통이 있어요.
그게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공존하는 게 있어요.
그와 동시에 공존하는 게 뭐냐면,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함께 공존해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 누가 거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아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구나.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셔서,
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위로하시고
낙심할 수밖에 없어 보이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반전을 이루셔서, 우리로 두려움과 동시에 평강을 누리게 하시는구나...'
그래서 절망과 동시에 소망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죽음 앞에서 우리가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 안에 누가 거하시는지를 새롭게 보게 돼요.
'아! 성령께서 거하신다고 하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평강을 주시고,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기쁨을 주시고,
또한 감사를 주시는 구나'
이 놀라운 반전, 그것이 죽음 앞에서 드러나게 되는 성령의 실체예요.
▲4. 네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죽음은 고통스러워요.
그리고 그 고통은 고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드러내는 네 번째 팩트는 뭐냐면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요.
그래서 여러분, 죽음을 대할 때,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사랑하면 사랑한 것만큼, 그 고통과 슬픔이 커지죠.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그 고인을 얼마나 깊게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참 어리석어서, 정말 소중한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요.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그 빈자리를 깨닫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고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게 하고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 먼저 가신 선생님의 빈자리가 더욱 고통스럽고, 또 마음 아픈 것은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더 사랑하면 더 사랑한 만큼, 죽음은 그의 비례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식합니다.
참 어리석죠. 그러면, 여러분 사랑의 후회를 남기지 마십시오.
사랑의 후회를 남기지 마십시오. 시간이 무한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땅에서의 시간은 그렇지 않아요.
기회가 무한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땅에서의 기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현재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시고요.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죽음 앞에 서야 깨닫지 말고,
그 전에 보게 되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람들, 부모님, 배우자, 또 셀의 형제들, 자매들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죽음 앞에 서야 깨닫지 말고,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현재 기회가 주어졌을 때, 후회를 남기지 마세요.
형제 사랑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여러분 되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함에 있어서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여러분 되셨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 서게 되면, 결국 사랑하는 것에 후회가 남습니다.
조금 더 사랑할 걸, 그때 조금 더 표현할 걸, 그때 조금 더 할 걸... 사랑에 후회가 남아요.
사랑에 후회를 남기지 마시고,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기회에, 모든 걸 쏟아 부으세요.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세요.
그것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지혜입니다.
▲5. 다섯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한다'라고 로마서에서 얘기합니다. 롬5:5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것은,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맞아요.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드러내요.
죽음은 우리의 소망을 드러내요.
우리에게 '너는 천국을 진짜로 믿는지?'를 묻고 도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사실 이게 진짜 복음의 핵심 아닙니까?
천국, 이 천국에 대한 것도, 여러분 평상시에는 우리가 거의 잊고 지내지 않습니까?
일상이 바쁘다 보니까,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신앙생활도, 이 땅에서의 일이 중심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
이 땅에서 어떻게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지... 뭐 이런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 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가장 핵심은 뭐예요?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천국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천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많은 시간을, 그걸 그냥 잊어버리고요.
복음을 그냥 이 땅에서의 것으로 만들고 살아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고 안락한 삶을 살까?'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하면 더 멋진 삶을 살까?'
이렇게 이 땅에서의 현세적인 것들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의 본질은 뭐지? 나는 어디에 속한 자이지?
나는 이 땅에 속한 자인가, 아니면 천국에 속한 자인가?'
그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벽 앞에 딱 섰을 때만,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또 이것이 분명히 슬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냥 바이패스하지 않게 하시고,
그것(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게게 하시는 거예요.
천국에 대한 소망, 이 땅에서의 시간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잠시만 기다리면 됩니다. 정말이에요.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이 땅에서의 시간은 잠시에요.
잠시만 기다리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여기서 못다한 시간을 영원히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이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으니, 50년 후에 천국에서 고인을 만난다고 하면,
그 50년은 천년에 비하면, 약 5분 정도 될 것입니다)
죽음은 잔인하게 우리의 마음을 도륙하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반전의 소망이 있어요.
그것은 영원한 시간,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천국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더 간절하게 합니다. 더 간절하게 해요.
그래서 마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양, 이 땅의 것을 모으고, 이 땅의 편리함을 추구하고,
이 땅에서의 성공에 울고 웃고 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네가 추구하는 그것들 어느 순간... 한순간에 날아가버려... 신기루야...
너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해!'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약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벌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죽음은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를 다시 확인시켜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낙심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속한 존재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늘에 속한 존재예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섰을 때, 물론 죽음은 고통스럽고, 죄의 결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하게 사용하시는 은혜는,
죽음 앞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지...
이 땅의 것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것이고,
이 땅의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안개 같은 것이지...'
성경이 얘기했듯이 '오늘 장사하고 어느 도시에 가서 1년을 뭘 하고' 이렇게 계획을 세우지만,
죽음 앞에 딱 섰을 때, 한순간에서 사라져버리는 안개 같은 것들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 그 소망을 죽음은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여섯 번째는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고
그 몸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더 이상 늙지도 않고,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죽음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죽음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충성>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
올해 초에 하나님께서 '킵고잉 Keep going' 이라는 말씀을 주실 때,
저도 사실은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왜 이런 말씀을 주시는지... 정확히 알고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주신 감동이고, 그런데 저는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아마 미리 그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반응도 조금 다르지 않았겠어요?
하나님께서 작년부터 올해 초에 계속 하셨던 말씀이
'Keep going 하라.. 평강 가운데 Keep going 하라..
Keep going 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죽음 앞에 섰을 때 드러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
'지금 여기서 (충격 받고) 멈출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갈 것인가?'
죽음 앞에서 이 질문을 맞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 서거나
아니면 나의 생명을 위협받는 위기 앞에 설 때, 우리는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계속 갈 것인가, 그럼에도 끝까지 갈 것인가?'
어쩌면 이것이 죽음이 던지는 비아냥거리는 질문인 동시에
하나님이 던지는 사랑의 초청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끝까지 갈래!' 라는 목소리는, 이 두 개의 보이스가 겹쳐 있어요.
그 안에 보면 죽음이 원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비아냥이 있어요.
'이래도 끝까지 갈 거야? 가 봐야 뭐가 있다고? 이래도 끝까지 갈 거야?'
'과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 하는 원수의 비아냥과 동시에,
똑같은 질문인데 그곳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 있어요.
이것을 분별해낼 수 있는 것이 축복인 줄 믿습니다.
원수의 목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원수의 목소리를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럼에도 끝까지 갈래?'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성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윤숙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도, 동훈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도,
그리고 오늘 교성 형제를 통해서도... 똑같이 물으세요. '그래도 계속 갈 거야?'
그리고 우리의 대답 역시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Yes, I will keep going!'
윤숙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도 '아멘, 하나님 우리는 계속하겠습니다'
동원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도 '예, 하나님 우리는 계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성형제 앞에서도 우리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계속하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그 소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비록 더딜지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충성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외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완전하십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것은
사랑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예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함에 후회를 남기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후회를 남기지 맙시다.
이 땅에서의 시간 한 번뿐이고요. 그 시간도 길지 않아요. 이 땅에서의 시간 한 번뿐이고요.
그 시간도 길지 않아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 후회를 남기지 맙시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함에 있어서 후회를 남기지 맙시다.
그게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초청이고 우리의 대답인 줄 믿습니다.
우리 다같이 일어나서 기도합시다.
...........................................
주1) 구O성집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오늘부터 이제 구집사님의 장례가 시작됐는데,
사랑하는 구집사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마 여러분들도 마음이 쉽지 않으셨을 것이고, 저 역시도 마음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집사는 저희 교회 처음 시작할 때부터,
거의 초창기 때부터 함께 했던 멤버였고,
대학생 때 저희 교회에 왔고, 그리고 또 선교사로, 사역자로 사실 헌신을 했었는데
우리가 다음 세대에 대한 비전을 함께 공유하면서
'대안학교에서 헌신해서 섬길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선교사로 가려던 진로를, 사실은 교사로 바꿔서...
그게 어떻게 보면 구집사의 제일 큰 장점이었던 것 같은데요.
필요가 있는 곳에 항상 자신을 드렸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또 자기가 원하는 것 이전에,
교회에 필요가 있으면, 또 하나님 나라에 필요가 있으면, 또 주변 사람들의 필요가 있으면,
항상 그것에 먼저 반응했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아카데미> 교사로 헌신해서, 지난 십몇 년 동안을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저도 마음이 쉽지 않았고,
그래서 미국에 있다가 잡혀 있던 일정들을 급하게 취소하고 귀국을 했습니다.
귀국하면서도 마음이 이렇게 좀 힘들었죠. 힘든데 물론 정답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그렇게 가야 된다'
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최고의 예배를 드려야 되는 때'라고 설교도 했어요.
그리고 또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이미 몇 번 하나님께서 겪게 했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로 아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죠.
이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아는 것하고, 우리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들하고는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의 연약함인데, 특별히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실체들, 현주소가 드러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 같이 착각하지만,
막상 죽음이라고 하는... 이 세상의 왕이라고 그랬는데, 왕노릇 하는 왕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죠.
'내가 진짜 믿고 있는 것은 뭐고, 믿지 않고 있는 것은 뭔지'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고백보다는 의문이 앞서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마음과 동시에, 우리 마음가운데 당황스러움도 있고...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줄 믿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우리 신앙의 실체를 드러내요.
'내가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또는 믿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왕 같은 존재'라고 했어요. 왕 노릇한다 그랬죠.
실제 왕은 아니에요. 실제 왕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창조자 하나님이시지만,
이게 '왕 노릇을 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왕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왕은 아닌데, 왕 같은... 강력하고 피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이런 왕 같은 존재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대면하게 됩니다.
내 안에 실체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당연히 하나님 잘 믿고 있는 것 같고,
당연히 우리가 이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죽음 앞에 딱 서게 되면, 그것들의 정체가 실제로 드러나게 됩니다.
주2) 시 60편의 배경에 대해서는
표제에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1만2천 명을 죽인 때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주변국과 정복 전쟁을 벌였습니다.
삼하 8장을 보면, 서쪽의 블레셋, 동쪽의 모압을 쳤고,
북쪽의 소바와 싸울 때는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와 연합해서 다윗을 대적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정복했고, 결국 남쪽의 에돔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북쪽 소바 와의 전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남쪽의 에돔이 유다를 침공했던 것 같아서,
북쪽에서는 다윗이 아람과 싸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요압을 보내서 에돔을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나중에 요압이 승리하고, 다윗에게 합류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8장은 다윗의 정복 전쟁을 요약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삼하8:5~6 ‘다마스커스의 시리아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려고 군대를 보내자,
다윗은 시리아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쳐죽이고,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주둔군을 두니,
시리아도 다윗의 종이 되어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울 때 쓴 시편이 시편 60편입니다.
초기에는, 남과 북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되니, 대단한 위기였던 거죠.
그래서 시편 60편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60:1~5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3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5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여기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 '왜?' 라고 따져 묻지 않아요.
시편을 읽어보면 분명히, 지금 땅이 흔들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흩으셨다'고 고백하는데
거기에 대한 원망이나 한탄이나, 아니면 '왜 그러십니까?'하고 이유를 묻는 게 일절 없습니다.
대신에 다윗이 뭐라고 그러냐면, 그 대신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이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다윗은 이것을 '경외하는 자의 태도'라고 얘기해요.
이것을 경외하는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해서, 고통이 피해가거나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똑같이 고통스럽고, 똑같이 슬픕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고통과 슬픔 속에서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니까요.
이게 경외하는 자의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