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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4장 흘러 넘치는 은혜

LNCK 2025. 5. 1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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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 넘치는 은혜 | 요나 4:9-11  금특새 | 25.1.17 - YouTube

34:50~

◈흘러 넘치는 은혜         욘4:9~11             2025.01.17.  

자 요나의 삶을 추격하시는 하나님을 3주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계속 요나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요나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치죠

그런데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어, 박넝쿨 잎사귀가 시들어 버렸습니다. 
요나는 다시 화를 내고 죽고자 합니다. 
자 이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요나서의 끝 구절입니다. 

욘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에서 아주 중요한,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요나에게 마지막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오늘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될 구절이에요. 

▲'은혜'를 못 깨달았던 요나
'요나야, 어떻게 박넝쿨을 네가 그렇게 아끼느냐? 
그 박넝쿨은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재배하지도 않고, 
그리고 또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인데, 그렇게 너는 그게 아까우냐? 애지중지 하느냐?' 

여기서 '아낀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가 아끼는 것과,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은, 요나가 아끼고 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물며' 라는 단어를 쓴 거예요. 
'하물며 너는 그거 박넝쿨을 그렇게 아끼냐?' 

그럼 하나님이 뭘 아끼신다는 거죠?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여명과 가축들입니다. 
'이 성중에 있는 백성이 내게 너무 중요하다' 이 얘기예요. 

요나는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왜요? 
'악독이 가득했다'고 했던 니느웨가 아닙니까? 
뭘 그렇게 아낀다는 겁니까? 심판하셔야죠. 뭘 아끼세요? 

여기가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논쟁 지점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은혜를 알아야죠. 그죠.
요나는 '니느웨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망할 사람들이라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은혜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을 가진 자에게만 베풀어 주는게, 은혜가 아니에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근데 이게 요나(나)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괜찮은 사람들에게만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죄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왜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시는가?' 설명이 안 됩니다. 
'왜 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 설명이 안 됩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세요. 다 흠결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십시오. '왜 거기에 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지요?'
내 속에서 이런 고함소리가 들립니다. '그 사람 이름은 지우세요! 족보에서 빼세요!'

여러분, 은혜는 정해진 공식이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가?' 정해진 게 없어요. 측정 불가! 

근데 문제는 '나에게 이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은 땡큐예요. 감사하죠. 쉽게 받아들여요.'
근데 내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질 때는... 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아니, 저 사람도, 저 인간도 은혜를 받았다고?' 
내가 용서를 받은 것에서는 OK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건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저 인간은 전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데, 은혜라니...'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재단합니까? 
얼마나 많이 (은혜에) 선을 긋습니까? 얼마나 내가 '의인 의식'을 가지고 삽니까?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용서해주시니까...
그러니까 율법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를 용서해 주신다고?' 
그거는 미치는 얘기에요. 

잡아 죽여야 마땅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니... 이게 제정신 이신가요?
(*성경에는 자세히 안 나와도, 니느웨와 북이스라엘 간에 국지전이 여러 번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북이스라엘이 니느웨에 당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거예요.
'전쟁 범죄' 수준이었던 거죠. 니느웨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집단이었고요.
그러니 요나가 펄펄 날뛰는게... 요나가 미성숙해서가 아니라... 이해가 되는 거죠)

여러분, 이 시대에 정의감에 불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크리스천은, 정의감과 은혜의 균형을 이루어야 될 줄 믿습니다.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지금 하나님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네가 그 박넝쿨을 재배 했어? 박넝쿨을 자라게 했어?' 
요나 자기가 수고한게 아니에요. 박넝쿨은 그냥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요나는 지금 은혜 (박넝쿨) 아래에 있는 거예요. 근데 은혜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박 넝쿨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 것이었어요.
자기가 수고한게 하나도 없어요. 

은혜가 뭡니까? 내가 수고한게 하나도 없이 받는 거잖아요. 
내가 구원받을 만한 것을 눈곱만큼도 한 적이 없어요. 근데 은혜로 구원해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은혜 받을 만해서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난 너와 달라...' 이게 얼마나 배타적일까요? 

여러분! 그 사람이나 내가 다른 게 별로 없어요. 
감옥 속에 있는 사람이나 나나... 
막 손가락질 받는 그 인간이나 나나 다른 게 별로 없다고요. 

근데 왜 나를, 주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하셨는데, 
다른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것은, 그렇게 못 받아들이는지요?

▲내가 아끼는 것이 우상입니다.
'네가 그렇게 박넝쿨을 아낀다면, 한 번 생각해 봐라. 
내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는게 무엇이 문제냐? 
내가 내 것을 아끼는데, 네가 왜 그렇게 화를 내냐? 아낄 거를 아껴라!' 

'너는 지금 무엇을 아끼느냐? 뭐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느냐?' 
여러분,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그게 뭔지 자세히 들여다 보세요. 그게 내 우상이에요. 
우상이 아니면,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없어요. 그냥 어처구니 없다고 한 번 웃고 말지요.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열을 받고 화를 낸다면... 그거는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그거를 없애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가 아끼는게 뭔지를 아세요. 
그 아끼는 걸 흔들어 버리시는 거죠. 

여러분은 뭘 아끼세요? 
어떤 사람은 시간을 너무 아껴요. 
그냥 시간을 관리하고 시간을 아주 아끼는데... 어디 쓰려고요? 
진짜 써야 할 때는 안 쓰고, 엉뚱한 데 쓰는 것을 봅니다.

벌레가 먹어서, 박넝쿨은 하루밤 사이에 시들어 버립니다. 무엇을 의미하죠?
내가 아끼는 그것도... 금방 사라질 거라는 거예요. 거기에 왜 집착하느냐는 거죠.

△여러분,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의 귀향에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아요. 돈을 팍팍 써요. 
그래서 팀 켈러는 '탕부 아버지' 라고 했어요. 너무 낭비했다는 거죠. 흥청망청 하는 아버지! 

큰아들이 보기에는 아버지는 그야말로 낭비하는 사람이에요.
'이 돈이 아깝지도 않나? 저 살찐 송아지를... 그건 말도 안 돼!'

'쟤는 그냥 뭐 먹다 남은 거나 주든지 해야지,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준다고?'
그러나 아버지는 아깝지가 않아요. 그 아들이 돌아온 것에 돈을 쓰는게 아깝지 않아요.
쓸데 쓰는 거예요. 

여러분, 마리아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가룟유다는 그게 낭비라고 화를냅니다. 보세요. 여러분, 화를 내요. *요나처럼 
가룟유다의 우상은 돈이었던 거죠. 화내는 거 보면 알아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더라면...' 그건 마음에도 없는 소리예요. 
무엇이 귀중한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 또는 그렇게 사는 것처럼... 낭비는 없죠. 

여러분, 선교지에 1년에 한 명의 회심자를 찾아내기 어려운 곳에 가서,
10년, 20년의 자기 생애를 바친게 낭비예요? 

여러분 전도할 때, 돈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때 돈을 써야지 언제 쓰겠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돈을 써야지, 언제 쓰겠습니까?
명품 살 때는 돈을 하나도 안 아까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님의 시각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거죠.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 네게는, 박넝쿨보다 못 하냐?
고작 박넝쿨 하나에 그렇게 난리를 피우냐?'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통해서, 또한 작은 벌레를 통해서 요나에게 말씀하세요. 
박넝쿨을 씹어 먹는 작은 벌레를 통해, 요나가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을 긍휼히 바라보시는 하나님
니느웨 백성들이 몇 명입니까?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여명! 
여기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은, 어린 아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른 숫자는, 최소한 50~ 60만이 된다고 추정하는 거예요. 

얼마나 엄청난 영혼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아끼시고 구원하는 것에 화를 낼 수 있느냐는 거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나에게 왜 화를 내느냐?' 
그러나 요나는 고작 박넝쿨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 (과 어른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할 때
'아끼다' 라는 말은, 원문으로는 깊은 의미가 있어요.  4:11

이 말 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 긍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 의미를 담고 있어요. 
요나의 눈과 대조를 이루죠. 

요나의 눈은 냉혹해요. 서슬이 퍼래요. 니느웨는 지상에서 살아져야 된다고 보는 거죠.
독기가 가득해요. 분노에 차 있어요. 

여러분 눈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쌓여 있는게 눈으로 나오는 거잖아요. 
근데 하나님의 눈은 달라요. 
니느웨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에는, 긍휼이, 눈물이 그득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하나님의 눈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우십니까? 
멸망 길을 향해 가고 있는 영혼을 바라보면서 긍휼히 여기시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끼다' 라는이 표현 속에서   *히 '후스'
하나님의 마음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눈이 아니었다면,
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12만여 명의 아이들과 + 어른들, 

그래서 요나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니느웨 사람에게만 베푸신 은혜가 아닙니다. 
요나 자신도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이죠. 그동안 셀 수 없는 은혜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당연시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요나에게 딱 어울리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롬2: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요나는 자신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한계예요. 
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요. 자신에 대해서 무지해요. 

여러분 (지금 연초 특새인데) 기도하세요. 
'하나님, 금년에는 제가 나의 무지로부터 좀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눈이 발달되어 있는 거예요. 

근데 내가 판단하는 사람과 (도토리 키재기 식의)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여러분, 십자가 앞에 한번 서 보십시오. 우리에게 전해오는 메시지가 뭡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불쾌하단 말이에요. 왜요? 
'내 죄가 그렇게 커?' 합니다. 

근데 어느 날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내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며,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순간,
우리는 무너지잖아요. 

그러면서 피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내 죄가 크게 느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더 찬란하게 드러나는 거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고,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의 딜레마는 무엇입니까? 
자기 의 self-righteousness 때문에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요. 

여러분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오기가 쉬워요. 아예 그냥 타락한 사람은 돌아오기가 쉬워요. 
아예 밑바닥을 친 사람은 돌아오기가 쉽다고요. 

근데 '자기 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 
교회 안에 있는데,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아버지가 베푸시는 은혜가 불공평해 보이는 거예요. 
'아버지의 재산을 말아먹은 저 아들을 그냥 받아준다?' 안 된다는 거예요. 
형은 심판을 요구하는 거예요.

'어떻게 나보다 더 악한 저 인간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느냐?' 
아들의 귀향을 기뻐하거나, 그를 축하하는 잔치에, 그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 저런 인간에게 저런 호의를?' 그건 너무 공평하지 않다는 거예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요나예요! 

자,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무지예요.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에게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에요. 
요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나서에서 늘 흐르는 주제가 있어요. '심판이냐 은혜냐?' 
근데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하나님은 인애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욘4:2참조

지금도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하고 계십니다. 
이 거친 요나를, 하나님은 계속 잰틀하게, 아주 섬세하게 이끌어 주시죠.

요나는 순종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반항합니다. 교만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로 그를 덮어 주십니다. 죽을 고비에서 건져 주십니다. 

▲자 이 요나서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   4:11

이 질문에 요나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나버려요)
요나는 침묵합니다. 왜 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긍정적 유추를 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설득의 말문이 막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답을 못한 거죠.

마침내 요나는 하나님에게 감동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우리가 상상을 하는 거죠.

마치 베드로처럼,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할 말이 없어요.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은 자신감이 없어요. 

그는 한참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평소는 그렇게 목소리가 크더니... 개미 같은 목소리로 '주님이 아십니다' 

여러분, 이 요나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나서의 저자는, 아마도 우리가 답을 하도록, (공란으로) 남겨두지 않았을까요? 

요나서를 대하는 우리가, 답을 할 차례입니다.
그 답은 분명합니다. 

마지막 두 구절에서 (4:10~11)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시청각 교재를 (박넝쿨) 확실히 사용하여, 선명하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신 거예요. 
그 박넝쿨이 아니라, 그 12만여명의 아이들, 
그러니 모두 50만이나 더 되는 니느웨의 백성들의 영혼들... 

'그 한낱 식물보다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더 귀하냐?' 
'잠깐 시들어 버리는 그것과, 영원한 구원을 얻어야 될 영혼이 어떻게 비교가 될 수 있느냐?' 
요나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요구하는 거죠. 

마16: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여러분 큰 것을 붙잡아야 돼요. 우리는 모든 걸 다 붙잡고 살 수는 없어요. 
잔 가지를 치고 또 치고... 나머지 남는게 뭐가 되어야 하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 이유, 
가장 귀한 것, 내가 가져야 될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마음, 은혜, 긍휼, 하나님의 눈물, 
그것은 영혼 구원이에요. 

여러분, 성경 속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지상 명령, The Great Commission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관심, 
구원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내는 그 미션! 

여러분, 우리의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미션에 눈을 뜨지 않으면, 사람이 좀팽이가 돼요. *작고 좀스러운 사람 
자꾸 사소한 일상사에 매여, 신경질을 내면서 살아가는 거죠.

별 거 아닌 것에, 요나는 죽는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요나의 일상을 한번 보세요. 벌레와 지금 싸우고 있는 선지자! 
그 뙤약볕에서 그늘을 얻겠다고 싸우고 있는 선지자! 
그늘이 좀 줄어든다고 신경질내는 선지자... 얼마나 좀팽이에요? 
선지자가 얼마나 조잡해졌습니까? 

여러분, 삶의 선명한 목적과 이유를 놓쳐 버리면, 성질이 안 좋아지게 돼 있어요. 
사람이 자잘해져요. 뭐 입는 것 가지고 투정하고, 먹는 것 가지고 투정하고...
이게 없다고 투정하고, 막 그것 때문에 불편하다고 투정하고... 요나의 모습이죠.

여러분 삶의 본질을 놓치면, 사람이 유치해져요. 유치 찬란해져요. 
요나는 너무 한심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지금 죽든 말든, 자기 얼굴이 햇빛에 그을릴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 

니느웨의 12만여 명의 아이들과 50만의 어른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 하나님의 눈물에는 관심이 없어요. 박넝쿨에만 집착을 해요.
하늘로부터 말씀을 받은 선지자가 맞느냐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너무도 쓰잘데 없는 일로 분주하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왜 매일 시험에 드는지요?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도토리 키재기 하고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들에 열을 내는 거예요.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거는 거예요.

여러분, 대의를 놓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잔잔한 것에 신경을 쓰는 거예요. 
말초적인 삶을 추구하는 거예요. 

여러분, 일상 속에 작은 행복, 소확생 다 좋아요. 
식물도 키우고, 취미생활도 하고, 건강을 돌보고... 다 좋아요. 
근데 그게 내 삶에 전부가 되어서는 안 돼요. 


취미생활은 좋아요. 근데 그게 우리의 삶의 본질은 아니라고요! 
내가 목숨 걸 일, 그건 하나밖에 없어요.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서 바치는 거예요. 
내 목숨보다 작은 걸 위해서 내 삶을 바칠 수는 없어요. 
내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있는 일, 거기에 내 삶을 드리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물어봐야 돼요. '이게 내 목숨을 걸 일인가?' 
아니면 그냥 패스하는 거예요. 그냥 관두고 넘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내 목숨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우리의 생명은 너무 귀중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목숨을 뭘 위해 바치느냐는 거죠.

그렇게 생명을 바칠 만한 것을, 하나님은 말씀으로 주셨는데,
이 요나가 지금 엉뚱한 곳에서, 지금 방 넝쿨 가지고, 벌레하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요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이 얼마나 선명하게 말씀합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 

여기서 '먼저'는, 원래는 first 라는 뜻이지만, only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분명해지면,
그외 다른 것에는 화낼 일이 별로 없어요. 그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상관없어요. 

저절로 우리 마음이 넓어져요. 뭐 마음을 넓히려고 해서, 우리 마음이 안 넓혀져요. 
여러분 내 삶의 본질적인 목표, 삶의 이유가 분명할 때... 그 때는 마음이 확 넓어져요. 
그외 다른 건, 내 눈에 잘 안 들어와요. 그 외에는 신경 쓸 게 별로 없어요
그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거니까요. 

요나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느냐는 거예요. 
니느웨에서 해야 할 일을 거부하고, 그 성읍에서 나와 버렸기 때문에!

내가 왜 사느냐에 궁극적 목적을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입에서 나오는 말이 뭔지 아세요?
'죽고 싶다' 예요. 
요나가 지금 계속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혹시 여러분 중에 '내가 죽고 싶다'는 분이 계세요? 그 이유가 뭐예요? 
내 삶을 살아야 될 이유, 내 영혼을 흔드는, 내 존재를 흔드는 
그 이유와 목적을 모르니까 '내가 왜 살지? 차라리 죽는게 낫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울해지는 거예요. 자기 연민에 계속 빠지는 거예요. '난 불쌍해...' 

여러분, 바울은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아요. 
내가 힘들어도 내가 약하더라도 '그 약함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하신다.' 

상황이 안 좋을수록 '나는 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 임무입니다.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나 내가 받은 구원으로 만족하면 안 돼요.
구원이 나 만의 감사로 끝나서는 안 돼요. 

여러분, 나만의 은혜, 나만의 감사로 끝나면... 요나 컴플렉스에 빠지는 거예요. 
은근히 영적 우월증에 도취될 가능성이 높아요. 

요나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뭐예요? 왠지 차가워요. 거만함이 있어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요. 자기 세계에 빠져 있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안 느껴져요. 

▲요나서를 닫으면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답을 해야 돼요.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용하고 싶은 거죠. 
요나서를 들여다보세죠. 하나님은 요나를 쓰고 싶으신 거죠. 

그 신통치 않은 그 요나 한 사람을 통해서라도, 그 억지의 순종을 통해서라도, 
니느웨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꺼이, 즐거이 우리의 삶을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한 영혼을 통하여, 무슨 역사를 이루실지... 아무도 몰라요.
이걸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요나는 계속 억지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오만 것을 동원하셔야 했어요.
큰 바람, 큰 물고기, 박넝쿨, 나중에 벌레까지... 

요나의 종교적 의무감, 비자발적 헌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시고,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못하세요. 

요나는, 요나 스스로 자기를 포기할 수 없어요. 왜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 은혜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게 은혜예요. 

그래서 시편 23: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따른다는 거예요. 이 말이 추격이에요. 추격하시는 하나님! 
무엇으로? 선하심과 인자하신 그 하나님, 
그래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도록, 멋진 마지막 해피엔딩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추격하시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따라다니신다는 거예요. 

누구에게? 이 말 안 듣는 요나에게! 
여호와의 낯을 한사코 피하는 그 도망자 요나! 

뻣대는 선지자, 간섭을 싫어하고 자기 길을 가고자, 자기의 세계를 꿈꾸며 가는 그 요나를 
끝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당신의 종으로 이끌어 세우시는 하나님!

여러분, 추격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끝내 불러들이십니다. 
주저앉으면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도망가면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으시고...

여러분, 그 추격하시는 은혜가, 오늘 우리로 여기 있게 하신 거예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가요? 
그 포기하지 않고 추격하시는 하나님, 그 집요한 하나님의 사랑, 

'나는 여기까지 인가보다'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목적지까지 가게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은혜의 속성은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확실한 결론을 맺지 않는 것이 독특합니다. 
독자들에게 여지를 남겨 놓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요나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추격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도망칠 수 없어요. 
도망을 가면 나만 힘들어지는 거죠. 

도망을 가보세요. 먼저 거기 와 계세요. 
나는 잔머리를 굴리고, 내가 막 피해 가지고 하나님을 따돌렸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먼저 와 계셔서, 나를 기다리시며 환영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는게 복인 줄로 믿습니다. 
겉만 순종이 아니라, 진짜 순종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를 원하는 거예요. 
요나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습니까? 
요나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너무 작은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크십니다)

여러분, 이 요나서는 진짜 복음적인 책이에요. 복음이 선명해요.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보십시오. 
그 손을 펴고 있는, 그 팔을 펴고 있는 모습은, 
온 인류, 모든 백성,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인종, 모든 죄인들을 다 품어내시는 모습이에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그 사랑의 품에 풍겨지지 않을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품 안에 그 사랑은, 측량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나가, 이 사랑을, 이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은혜와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2025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은혜의 푹 젖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게 중요해요. 여러분 교회를 다니는데, 은혜가 식어지면... 요나가 돼 버려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섬기며 사는 것이 너무너무 신나는 거예요. 

내가 충만해야 돼요. 이 은혜가 식으면 큰일나요.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는 밖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어요.
배타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수없는 차별... 은혜는, 복음은 그 경계선을 다 뛰어넘어 버려요. 

 

지금 교회안에 '좌우 이념, 색깔론'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복음이 약해지니까, 이념이 교회 안에 더 강하게 일어난다'고 봐요. 
교회 안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도, 복음 위에 이념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념은 복음으로 해석되어야 돼요. 

복음은 모든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에요. 그것은 복음밖에 없어요. 
이념은 서로 갈라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니느웨의 요나의 선포가, 그 니느웨 백성 모두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회복되고, 복음으로 우리가 변화되면, 
세상도 환경도 모든 것도 회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복음을 더 외쳐야 합니다. 

가정에도 복음이 살면 가정이 삽니다. 뭐 다른 방법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정치학적, 사회학적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소망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어야죠. 그리고 제대로 믿어야죠. 그리고 예수는 그 삶의 모든 걸 바꿔 놓아요. 
그 바꾸어진, 변화된 사람이 세상에 들어가야, 그 세상이 바뀌어지지요. 
구조를 바꾼다고 세상이 달라집니까? 인물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질까요? No!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받은 사랑을 편견 없이 세상에 흘러보내야 합니다...

▲자 이제 마무리를 합니다. 
혹시 나는 요나가 아닌가요? 요나라면 나는 어디쯤 있는가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고 있는가요? 물고기 뱃속에 있는 가요?
니느웨 성에서 외치고 있습니까? 성밖에서 성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박넝쿨이 말랐다고,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일어나 복음을 힘 있게 외치며 사역하는 그 요나, 
그 요나의 모습으로 우리가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 입니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야 해요. 우리의 협소한 마음을 열어야 돼요.

이 민족을 품고, 열방을 품어야 돼요. 그러려면 우리의 가슴이 넓어야 돼요. 
우리 각자의 니느웨를 향해 나아가야 돼요. 

다시스로 가기를 꿈꾸는 그 헛된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 가야 돼요. 

오늘도 니느웨에서 일어난 일들은, 즉 회개와 부흥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해서 가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는 그 곳, 
하나님의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도 똑같이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좌우를 분명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스펙트럼을 넓혀야 합니다. 

개인의 야망과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모두가 순종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일어나라. 가서 외치라'고 했던 그 말씀이   욘1:2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인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명자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보았고, 이제 바깥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에, 함께 동참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6월에 우리 교회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5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뭘 할까?' 

저도 기도하는 가운데, '큰 스타디움을 빌려서, 1부, 2부, 3부, 4부, 청년부...
이렇게 나누어서 예배를 드렸던 우리가
다 한 자리에 모여서 다함께 멋진 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잠시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아니다, 흩어져야 된다!'

우리 장로님들하고도 의논을 했습니다. 우리 교육자들하고도 얘기를 나눴습니다. 
'우리가 그날 (창립 50주년 기념일) 우리 교회에서 예배 드리지 말고 흩어지자!' 

그 주일은 아무도 여기로 오지 말고, 전국으로 다 흩어지는 거예요. 
농어촌교회, 도시 미자립교회에, 섬마을 교회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아주 외진 교회들을 찾아가서, 전국으로 흩어지는 거예요. 할렐루야! 

 

물론 그 다음 주일은 돌아오셔야 돼요. 
저도 그 주일 날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교회, 가장 외진 곳, 섬마을이든지 어디든지... 
저도 이제 거기 가서 예배드리고, 완전히 여기는 문 닫습니다. 

열방으로 흩어지는 공동체, 그래서 많은 계획들을 해서 
우리가 아름답게 그 '흩어지는' 정신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런 우리의 노력과 선포가 필요한 줄 믿습니다. 

요나는 돌아와야 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온전한 순종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또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계속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힘있게 찬양하고, 뜨겁게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부흥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니느웨에 일어났던 그 부흥, 우리 교회에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 안에 먼저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주의 성령이 불처럼, 바람처럼 임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쓰임 받는 우리 수영로교회 되게 하시고 
50년을 지나 100년을 향하여 달려가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원색적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예배와, 집회와, 금요철야 가운데 부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1년 내내 우리의 모든 예배와 집회와 금요 철학 가운데 부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을 살려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다음 세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세 번 외치고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