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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제물 빌4:14~20 1998.07.05.
찰스 하비 Charles Harvey 라는 청년은, 텍사스에 사는 아주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매우 조바심 나게 빠르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면접을 하게 되었는데,
시간을 재보니까 아무래도 약속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어질 것 같아서
조바심을 내며 빠르게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서 있는 차가 하나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한 중년 부인이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이거 어찌할 바를 몰라서 길 가에 서 있는 겁니다.
청년은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바쁜 걸음이지만, 이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기 차를 멈추고, 친절하게 타이어를 교환해 주었습니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약속했던 시간이니까 면접하는 장소에 나가서 '뒤늦게라도 사과를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그 직장에 들어서 보았습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쉽게 취직이 될 뿐더러, 아주 좋은 부서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펑크를 내고 서 있던 그 중년부인이, 그 회사의 인사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선행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보상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선한 일을 하면 그저 바로 상을 받고, 좋은 일 하면 바로 칭찬을 받고 ...
그야말로 성경말씀대로 30배, 60배, 100배 이렇게 즉각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선한 일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쉬울까 생각됩니다마는,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고요, 또 보상이 아주 멀리 있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비롭게 그 어딘가로부터
반드시 보상과 갚아주시는 축복이 내게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만
그게 내 눈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의식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인간 됨은 여기 에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인류학자가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동물의 세계와 인간을 비교해 본 결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베풀 줄 모르는 것이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먹고,
자기 앞길만 찾는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베푸는 데 (차이가) 있다."
이건 인류학자가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서로 물어뜯고 빼앗고 하면 '저게 사람인가?'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되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유명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전설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좀 일찍 떠나게 됐는데, 아들이 너무 어려요.
유산을 줘야겠지마는 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믿음 직한 랍비에게 재산을 맡기고,
유서 한 장을 남겼습니다. 유서 내용이 뭐냐하면 '이 아들이 거지가 되거든 그 때 주십시오.'
이 어린 아들이 점점 커서 어른이 되었 습니다마는 '거지가 돼야만 아버지 유산을 받는다'
도대체 이걸 이해할 수 없어요. '정말로 거지가 돼야 되나?
그럼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없어서, 거지가 된 다음에 받으란 얘긴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위해서 봉사하다 보니까, 뭐 주고 또 주고, 또 주고.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기 아이가 과자를 먹는 걸 보고, 그 앞에 따라다니면서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아들아, 나 과자 한 입만 줘" 하는데, 아들이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아~' 하고 따라다니다 보니까
'아차 이게 거지다. 바로 이거다' 생각을 하고서는, 랍비에게 달려가서
"내가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랍비가, 그 유산을 그에게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이 받는 마음, 받고자 하는 마음, 베풀고 받는 그 마음속에,
인간 됨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 예화의 주제
▲옛날에는 우리가 자랄 때, 귀가 닳도록 들은 얘기는 '착한 사람이 되라' 그랬어요.
그 외에 들은 얘기는 없는 것 같아요. '착한 사람이 되라, 선한 사람이 되라' 그랬는데,
요즘은 '공부해라' 그 말밖에 몰라요.
아니면 그저 좀 정중하게 말한다고 해야 '필요한 사람이 되라, 유능한 사람이 되라'
너무 너무 멀어졌습니다.
"가난해도 좋고, 그저 그렇게 출세 못 해도 좋은데 좀 착한 사람이 되라, 선한 사람이 되라"
거기에 인간미가 있고,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고, 인간됨의 현 주소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지금 이 세대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 졌기 때문이에요. 아주 메말랐기 때문이에요.
이것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부부간에도 니꺼내꺼, 형제간에도 니꺼내꺼. 엄격합니다.
더구나 외국 사람들의 예를 들면, 부부간에 따로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남편의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보아도 안 된답니다.
부부가 이렇게 '따로 지갑'을 차고 사니, 그것이 어떻게 사람 사는 것입니까?
(요즘 우리나라도, 이렇게 부부가 따로 통장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어쩌다가 이래서 인간은 점점 고독해지고,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어간다는 말씀이올시다.
인간의 인간됨이란 베푸는데 있고, 그 인격은 덕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격의 수준도 바로 이 덕성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 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내용은
딱 한 절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딱 한 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씀이 바로 행20:35절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20:35
*복 : 마카리오스 '행복'으로도 번역됨
여러분, 여기서 복이 무엇입니까? 받는 게 복입니까, 주는 게 복입니까?
행복으로 말하자면, 받는 것이 행복합니까, 주는 것이 행복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주는 행복, 베푸는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이제 그는 행복할 길이 없습니다.
▲줄 줄도 알아야 되고, 받을 줄도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르면
한 평생 아무리 부하게 살아도, 그는 한번도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갈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끝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차피 인간이라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Give and Take 주고받게 돼 있어요.
다 주고받는 일이 교차되고 반복됩니다.
예컨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받기만 하면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여러분, 부잣집 아들들을 보면, 키울 때 자꾸 주었거든요. 얘는 받기만 했어요.
결혼한 다음에 보세요. 자기 부인한테도 못 살게 굴어요.
뭐든지 받을 줄만 알았지, 줄 줄은 몰라요. 끝도 없이 받을 줄밖에 몰라요.
한 평생 이기주의자로 살다가 그냥 끝나는 거예요. 참으로 불쌍한 겁니다.
요즘 외동아들, 외동딸 낳아서 키울 때, 대단히 조심해야 됩니다.
늘 받기만 하면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반대로 또, 주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은 교만해 집니다.
자기는 항상 주는 위치에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면 독재자의 성격이 많아집니다.
'나는 주는 사람이다!' 이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그래서 온전한 것은 '주고 받는' 것이에요.
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야예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베드로가 너무 미안하게 됐거든요.
"어떻게 예수님이, 주님이 내 발을 씻기십니까?"하고 사양하게 되지 않습니까?
"영원히 내 발을 씻기지 못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 말씀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되돌려 생각하면 '네가 나로부터 발씻김 받았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너는 남을 발을 씻길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봉사 받았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남을 봉사할 수 없는 것이에요.
받은 마음이 먼저예요.
모든 면에서... 부모로부터, 형제로부터, 교회로부터, 모든 친구로부터,
'나는 받은 것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이 받았어요' ... 이렇게 받았다는 마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주는 마음으로 바뀌는...
이렇게 주고 받는 일이 능숙한 사람이
관계 속에서 인간됨의 위치를 지켜가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섬긴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봉사한다는 것을 한 번 분석해 봅시다.
가장 잘못 되기 쉬운 것이, 봉사가 수단화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된 겁니다.
봉사하는 것을, 장사 속으로 하는 것이에요. 난 너무나도 많을 경우을 보았습니다.
좀 선한 일 하자고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면, 할듯 하다가 결국은 안 해요.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은, 되돌아오는 이득을 따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어떨 때는 마음이 아파요. 이' 사람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막 어쩔 때는 가슴이 섬찟 해요. '저런 마음으로 살다가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 되는데...'
아 이거는 아주 선행을 장사로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를 투자하고 얼마를 법니다.'
노골적으로 그래요. 기가 막혀요. 정말 돈이 말썽이에요.
그 돈 때문에 그 사람이 비참해 졌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황폐해 졌어요. 인간도 아니에요.
어떤 사람 은 성경까지 인용합니다.
"잠언 19:17절에 보면 '구제하는 것을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 받아내야지요."
그래요. 참 엄청난 수전노 이올시다.
여러분, 여러분의 선행이 수단이 된다면, 이건 참으로 피곤하고 이것은 인간 타락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어차피 우리는 주고받아야 돼요. 주고받으며 사는데
줄 때마다 꼭 빼앗기는 마음으로 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참 유감된 거예요.
한 평생 강도 만나는 거예요.
미안한 얘기 한마디 드릴게요. 부부간에도 한 평생 당하는 마음으로, 손해보는 마음으로 산대요.
그냥 깨끗이 주지, 뭘 그렇게 합니까?
뭐든지 간에 여러분 마음을 담아서 주세요. 줄 때는 기쁘게 주세요.
줄 적에, 빼앗기는 마음으로 주지 마세요.
가령 보세요. 여러분이 한 평생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그러지만
용돈 줄 때는 제발 잔소리하지 마세요. 주려거든 이렇게 말 하며 주세요.
"더 주고 싶다마는 미안하다. 어떡하냐 이것밖에 없는 걸"
이러고 주세요. 그러면 아이들이 이걸 반갑게 여깁니다마는
"야! IMF시대에 정신차려! 지금 너한테 들어가는 용돈이……" *1998년도 설교
이딴 소리하게 되면
"알았다고요."
용돈을 받아도, 고맙지 않아요. 부모하고 원수됩니다.
왜 이렇게 빼앗기는 마음으로 삽니까? 기왕이면 베푸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줄 때는 '시원하게' 줘 버리세요. 나중에 자녀들이 그때를 다 기억하고, 감사해 할 것입니다.
'그때 부모님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나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고..'
▲그런가 하면 또 하나가 형식주의 입니다.
이 형식, 바리새주의입니다. 예수님이 크게 책망한 것이 이것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구제를 할 때에, 아주 길거리에서 소문내면서, 나팔 불면서 했거든요.
남들 다 보는, 길거리에서 했다고요. 그래서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에 불한당 맞은 사람이 누워있었지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이 보고 지나가고, 레위사람이 보고 지나갔는데,
만일에 예루살렘 한 가운데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제사장이 그냥 지날 갈 리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건 내가 할 일이다. 물러 서라. 내가 하는 거다."
이러고 봉사 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럴 것 같아요. 꼭 사람 보는 데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거는 얼마의 선행을 하면서, 명예를 사는 거예요. 물질로 사는 겁니다.
내가 북한 사람들하고 얘기 할 때에 고관들하고 얘기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 했더니요,
그분들이 제일 괴로워하는 것이 '몇 푼 주지 않고 그저 신문에 떠드는 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참 기독교인들은 이상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거를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
아 성경에 있는데. 자기들이 성경을 읽고 앉았어요.
그런데 이게 도대체 요즘 한국 기독교인들이 왜 말이 많으냐 이거예요.
꼭 사람에게 보이려고 인터뷰 하고, 신문기사화 하고, 이렇게 하고야
(대북 지원을, 구제를) 하겠다는 거예요. 왜 이러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요. 그건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인데요.
더구나 하나님 앞에 죄 되는 것이데, 왜 이 수준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까?
제발 구제할 때 사진 찍지 마세요. 기사화하지 마세요.
(노회나 교단 차원에서 하는 일은, 보도 자료를 내는 일이 흔하지요)
제가 그래서 교회 회보를 만들지 않아요. 회보라는 거 만들다가 보면
교회마다 '고아원 방문, 양로원 방문, 뭐 어디 봉사, 어디 선교' 이런 거 써 놓거든요.
자기 자랑 열심히 하는 거.. 내가 그거 보기 싫어서, 교회 회보를 안 만든다니까요.
했다하면 그거 나오니까요. 사진은 남겨서 뭘 해요? 기록은 했다가 뭘 하겠다는 거예요?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이 다 잊어버려요!
줬으면 그걸로 끝났지... 뭘 기록하겠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그래도 우리 교회 역사에 기록해야지요'
역사 좋아하네... 어차피 한 세기 가면 없어질 거, 무슨 쓸데없는 짓이요?
이게 바로 교회가 잘못 가고 있는 거예요. 형식주의!
뭐 좀 하는 것 같으나 완전히 형식주의요, 위선적이예요.
이거는 안돼는 거예요. 보다 더 진실하게 도와야 됩니다.
(*기업 임원하시던 분들이 교회 중직을 맡으면, 교회를 기업하는 식으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홍보하고, 책자 만들고 하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주는 마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루어져야 돼요.
비록 우리가 사람에게 주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 같으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을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저 사람은 받고나서도 인사도 없네...'
"아 북한을 도와주었는데, 북한이 잠수함 보내고 하는데, 저 사람들하고…"
그러니 어쩌란 말이에요?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는 마음 뿐이예요.
그가 어떻게 하느냐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에요.
그 마음이 아니고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니까요.
하나님 위해서 한 일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언제나 받았다고 하는 자세가 먼저입니다.
나는 너무 많이 받았어요. 주님으로부터, 형제로부터, 사회로부터, 부모로부터 많이 받았어요.
'이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꼬? 받은 것은 많고, 주는 것은 적도다'
바로 이 마음이예요. '어찌 보답할꼬?' 하는 그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빌4:14~20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얼마간의 헌금을 모아서 에바브로 디도 목사님 편에 로마로 보내왔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또 그 선물을 받고 너무 감사해서, 이 편지(빌립보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헌금에 대하여
이렇게 신학적으로 풀이합니다.
빌1:7절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너희는 나의 은혜에 참예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것을 '은혜' 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이 은혜에 너희가 헌금을 보냄으로 동참했다...
또 본문 4:14절에 보면 "괴로움에 참예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4:14
'내가 당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너희가 동참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나는 비록 여기 있지만, 복음 전파자의 고난에 동참했단 말입니다.
또한 "주고 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밖에 없었느니라."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4:15
이 말씀은, 제가 교역자로서 이 말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에 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그 많은 고생을 했지마는
하나님을 위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했고, 교인들은 그에게 헌금을 했는데
'Give and take' 그들은 바울에게 물질을 주었고,
그리고 바울은 영적인 것으로 주고, 물질적인 것으로 받았는데
'Give and take' 주고 받는 일에 가담한 교회는 너희밖에 없다... 참 귀한 얘기예요. 4:15
서글픈 얘깁니다. 바울이 그 많은 수고를 했지만
정말 받은 것은 없이, 주기만 하는 생을 주로 살았던가 봐요.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너무 고마운 것이 에요.
여러분, 이 돈이라는 것이 참 귀하게 쓰여질 때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탈무드에 있는 돈에 대한 경우를 몇 가지 읽어봅니다.
'돈은 하나님에게 선물할 수 있는 기회다.'
돈은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돈은 선한 일의 기회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돈을 빌려준 이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다.'
'돈은 악도 저주도 아니다. 돈은 축복이다.'
'육체를 관장하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의지하는 것은 돈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민이요, 하나는 불화요, 또 하나는 돈지갑이다.'
'돈은 공짜로 얻기보다는 빌리는 것이 낫다.'
공짜로 얻게 되면 굽신거려야 되니까, 빌리게 되면 대등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공짜 좋아하지 마세요. 문제는 이 돈이 라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요.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 '나는 풍족하다.' 그럽니다.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감옥에 있으면서 풍족하면 얼마나 풍족하겠습니까마는
빌립보 교회의 그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풍성하다.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향기로운 제사다.
너희가 나에 게 보낸 선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4:18b
아무 보상도 바람이 없이 베풀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행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
참 기쁨과 영광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 교회가 지금 설립된 지 21년 이지만, 한 20년 전에 저희 교회가 저쪽 상가에 있을 때,
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가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들을 위해서
이것저것 보내드리고 봉사한 일이 있습니다. 언제가 한번 거기에서 저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옷을 잘 입을 필요도 없으니까, 있는 옷가지고도 충분합니다.
식량도 넉넉합니다. 그러나 사탕이 좀 먹고 싶습니다.
눈도 없고 손도 없고 이런데, 그래도 먹는 재미가 있거든요."
'먹는 재미… 아 이거 당뇨 걸릴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사탕…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구나.'
그래서 제가 그날 저녁에 교인들을 모아놓고서
"사탕을 대접합시다."
했더니 그 당시에 300만원이 나왔습니다. 그걸 몽땅 사탕을 샀어요.
그래서 트럭으로 보냈어요. 그 때의 대학생들 몇 사람이 따라 가겠다고 한 20명 따라 갔어요.
갈 때 제가 그랬어요.
"그 가운데는 눈 없는 사람도 있고, 손 없는 사람도 있다.
코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한센병 음성이라서 전염은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사탕을 그대로 까서 입에다 넣어 드리기도 하고, 또 얼굴을 씻어 드리기도 하고,
그리고 그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너희들 노래 잘하지 않냐, 율동을 하면서
힘껏 노래를 좀 부르고 돌아와라."
청년들이 갔다 왔어요. 도착하면서 교회에 들어서더니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 마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더니 '엉 엉'우는 거예요.
전체가 다 소리를 내서 울어요.
그래서 "너희들 왜 우냐?" 하고 물었더니
"너무 행복해서 웁니다. 이 행복을 일생동안 가지고 있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는 거예요.
베푸는 자에게만 진정한 인간다운 행복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행복이 없는 것이 인색하기 때문이고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에요.
어느 사이에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그래요.
어차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기주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루하루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베푸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