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믿음”(삼상 17:34-36) 2025.05.11 - YouTube
◈도전하는 믿음 삼상17:34~36 2025.05.11.
◑도입
믿음에는 두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기다리는 믿음' 과 '도전하는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믿음"은 소극적인 측면이라고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섭리라고 믿고 '기다리는 믿음'
이것을 우리가 오전에 살펴봤죠.
그런데 반대편 측면의 믿음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특별히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믿음의 도전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어도,
우리가 그것에 순종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가 해야 되는 파트,
이 두 가지가 같이 어우러져 있는 콜라보레이션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왕이 되는 거죠.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다윗의 데스티니는 왕이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서의 그의 데스티니가 무엇인지를, 기름부어서 확증시키셨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누워있는데,
저절로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 왕이 되기 위한 여정들을 계속 도전해 나가야 했어요.
계속 순종함으로 도전해 나갔을 때,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항상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 두 가지가 같이 만나야 돼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파트가 있고, 우리가 해야 되는 파트가 있다는 거예요.
다윗이 왕으로서 그의 데스티니를 이루어가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뭐였을까요?
골리앗이죠.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말미암아 국민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고요.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되고, 결국 왕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루기 위해서는
쓰러뜨려야될 골리앗이 있다는 거예요.
골리앗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골리앗이 상징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두려움이에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하심 destiny 이 있는데,
그 계획하심을 이루어가는 중간에는, 반드시 누가 서 있냐 하면 골리앗이 서 있어요.
그런데 골리앗이 방해하기 위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골리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골리앗이 굉장한 위협이었고 두려움이었지만,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은 왕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들에 대해서, 좀 다른 각도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그것을 단순히 우리 삶에 걸리적거리는 것들, 방해물, 고난... 이렇게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각도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그 골리앗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고,
골리앗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었죠.
그래서 우리 인생길에 가로막고 서 있는 골리앗들에 대해서
좀 다른 각도로 좀 바라보세요.
'아 어쩌면 이것이 단순히 우리 인생의 걸림돌이고,
그냥 불필요하지만 하여간 통과해야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인생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되는...
이것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했을 때,
그 골리앗들이 다르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인생 가운데 골리앗들이 있다면
단순히 두려움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향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데스티니라고 부르는데,
이 데스티니는 반드시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도전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도전하는 믿음 (설교제목)
제 간증을 잠깐 할게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30살이 넘어갈 때까지
제가 교수 이외에 다른 걸 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운동을 잘할 수 있는 체형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무슨 연예계에 나갈 만한 그런 외모도 아니고,
또 노래를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 게 '하나님께서 하나씩은 잘하는 걸 주세요.'
사람마다. 하나씩은 잘하는 걸 주세요.
그래서 운동을 잘하든, 노래를 잘하든, 미술을 잘하던,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걸' 잘하던,
하여간 뭔가 하나씩은 잘하는 걸 주시지요.
저한테 하나님이 주셨던 잘하는 건 수학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수학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너무 재밌었고, 그거 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제가 꼭 수학은 아니더라도, 과학자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었고,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할 거라고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 어렸을 때 어른들이 '너 뭐 될래?' 그러면
다른 아이들은 '대통령이요. 장군이요.' 이런 얘기를 했는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초지일관 똑같았어요. 저는 과학자예요.
그런데 저희 때는 일본 만화영화 중에 '마징가 제트' 라고 있었어요.
하여간 그게 당시에 굉장히 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붙잡고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저걸 (마징가제트) 만들어야 겠는데
저걸 만들려면 전공을 뭘 해야 되냐?'고 이렇게 물어봤더니,
아버지가 '그건 한 전공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고, 여러 전공이 협업을 해야만 된다'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제가 뭐를 전공을 해야 그걸 만드는지...
그러다가 조금 나이 들어서 보니까, 결국 로봇의 핵심은 '인공지능' 이잖아요.
그리고 그 기초가 되는 게 수학이고,
그래서 '수학을 해야 되겠다' 결심했습니다.
수학이 제 적성에도 맞았고, 또 제 아버님이 서울대 수학과 교수님이셨어요.
그래서 그것도 하여간 큰 영향이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한 번도 제가 대학교수 이외에, 다른 걸 할 거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서울대 수학과에 들어갔고, 거기서 졸업을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UC버클리라는 아주 좋은 대학을 갔습니다.
아마 수학과로는 갈 수 있는 제일 좋은 대학 중에 하나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평생의 멘토가 되시는 영적 아버지를 만나게 됐는데
그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던 선교사님이셔서
그분의 영향으로, 제가 이제 선교사로 현신을 하게 됐습니다. *이재환 선교사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아 나도 선교사가 되어야 되겠다' 하고 진로를 약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학박사 학위를 마치고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대학 교수로는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헌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국비장학생으로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 정부를 위해서 3년 동안 일을 해야 되는 의무 조항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든지, 연구소에서 일을 하든지,
그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그렇게 인적 자원이 많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빚을 갚으러 3년 동안 일을 하러, 한국에 돌아오게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제가 서원했던 게 뭐냐면
'하여간 정상적인 교수 자리에는 어플라이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서원을 하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3년을 일해야 되니까, 계약직 교수 자리라는 게 있으니까,
계약직으로 3년만 일하고 선교지로 가겠다고 그러고 들어왔습니다. *1~2년마다 재계약
그런데 한국에 들어왔더니 아버님이 굉장히 일단 좋아하시는 거죠.
왜냐하면 일단 가업을 이을 아들이 들어왔다고 좋아하셨어요.
물론 제가 선교사로 나갈 거라고 아버지한테 아직 말씀을 못 드렸어요.
당연히 그런 얘기는 안 하고, 그냥 학위 마쳤으니까 들어왔다고 하니까,
제 아버님께서 수학교수 자리 난 곳을, 이렇게 쫙 리스트를 만들어가지고 제게 주셨어요.
'여기에 지금 교수 자리가 난 것 같으니까 지원해 보라고' 그러면서 주셨어요.
근데 그중에서도 아주 좋은 대학이 하나 있었는데, 서울에서도 아주 좋은 대학이었습니다.
제가 전공한 게 좀 독특한 것을 전공을 했어요.
수학 중에서도 '위상수학'이라고 토폴로지 Topology 라고 하는 것을 전공했는데,
이게 전공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수학 중에서도 전공하는 사람이 아주 소수인 그런 분야인데,
그러다 보니까 거기 교수 자리가 나는 일이 그렇게 흔치가 않습니다.
근데 마침 딱 같은 전공에, 이제 빈자리가 하나 난 거예요.
그래서 그분 한 분이 은퇴를 하시니까, 그 자리가 나니까 지원을 해보라고...
자리가 나는 게 어렵지, 빈 자리가 나면 또 유리합니다. 왜
냐하면 전공한 사람이 몇 명 없어요.
그러니까 거기 뭐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명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저하고, 저희 1년 선배하고 두 명이 딱 지원을 하겠더라고요.
근데 뭐 아버님 생각에는 '네가 지원하면 무조건 될 거니까 서류 보내라고'
그런데 제가 서원한 게 있잖아요.
근데 그 말씀은 차마 못 드리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상관하지 마시라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좀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는 이제 지원을 당연히 안 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근데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이거 지원 안 해도 되는 건가?'
이게 지원 안 하면, 또 기회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금 희귀한 걸 전공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잘 안 나요.
그래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지원서를 넣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고,
그 때 제가 34살이었는데 '지난 34년 동안 이거 하겠다고 줄기차게 달려왔는데,
어렸을 때부터 달려온 목표가 바로 코 앞에 있는데, 이걸 왜 안 하려고 그러지?
내가 제정신인가? 내가 미쳤나?' 인간적으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원서라도 좀 써놔야 되겠다.'
그래서 그 대학에 가서 임용 원서를 받아왔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지원합니다)
제가 교수로 지원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래서 이제 떼어야 되는 서류들이 있습니다.
뭐 졸업증명서, 학위증명서, 성적증명서... 잔뜩 떼야 되죠. 그래서 다 떼었어요.
지원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그래서 이제 완벽하게 전부 다 서류를 갖춰놓고,
싸인도 다 했습니다.
이제 접수 마감 전날 밤이 됐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알았어요.
'이게 헌신하는 것과, 실제로 순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구나...'
한국에서도 선교 집회 같은 것을 하면, '선교한국'이라든지 그런 데서 집회를 하면,
헌신자들이 나오죠.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하는 헌신자들이 나오는데,
대략 그 중에 여러분 몇 퍼센트가 진짜 선교사로 가는 줄 아세요?
통계를 제가 본 게 있는데 7%인가 그래요. 10%가 안 돼요. 한 자리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100명이 헌신을 하면, 7명이 진짜로 움직이고요.
나머지 93명은 중간에 포기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헌신할 때의 감정과, 실제로 움직일 때의 현실은 전혀 다른 겁니다.
전혀 다른 거예요.
접수 마감하는 전날 밤, 제가 선택의 순간, 결단의 순간 앞에 서 있는데,
진짜 이 골리앗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더라고요.
골리앗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고,
여기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혹시나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고...
꾸려나갈 가정이 있고, 자녀까지 있는데 말이죠. 쉬운 결정은 당연히 아니었죠.
'야 이러다가 이게 이도 저도 아니어서, 나이가 50쯤 돼가지고 후회하면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밤에는 결국 한숨도 못 잤습니다.
한숨도 못 자고, 잠이 안 오니까, 일어나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뭐라고 기도가 나오냐면
'하나님 내가 지금 미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했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미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거 지원 안 하는 게 맞는지...'
'나중에 선교사 하다가 50 세쯤 돼서 후회하면 어떡하지?' 뭐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렇게 벼락처럼 들렸는데, 제 귀에 들린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 영혼에 이제 "쾅" 울리는 울림이었는데,
뭐라 그러시냐면 하나님께서 "미친 거 맞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시냐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미쳤다' 소리를 들었지,
정상적으로 하나님 믿은 사람이 어딨냐고?
바울도 미쳤다 소리를 들었고, 베드로도 미쳤다 소리를 들었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당연히 '미쳤다' 소리를 듣는 거라고..."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혹시 '미쳤다' 소리를 들으셨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 '저 인간 미쳤어!' 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들었다면
회개하셔야 됩니다.
아니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한 번도 '미쳤어!' 소리를 안 들을 수가 있습니까?
맞아요. 예수 믿는 것은, 세상 기준으로 보면 미친 게 맞죠.
그래서 성령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데,
제 안에 '아 이거는 관두어야 되는 거구나' 하는 확신이 왔어요.
그래서 그 밤에 그 임용원서들을 이렇게 쫙쫙 찢었습니다.
그걸 찢어서 쓰레기통에 다 버리고, 그리고 이제 제 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아마 그 밤이 없었다면, 저는 오늘 다른 데서,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요.
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겠지만,
저는 그 계획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우리 삶에는 넘어야 될 두려움이 있어요. 넘어야만 하는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의 본질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잖아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저 골리앗이 무섭고 강대한 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저 골리앗을 넘어뜨리실 거야' 라고 하는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나가듯이
우리 삶에 골리앗들이 있어요.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이 골리앗을 넘어서야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기억하세요.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맞아요. 골리앗은 두려움이고, 위기이고, 큰 어려움이지만,
그것이 다윗을 왕으로 만드는 길이었다 하는 것을 기억하세요.
골리앗이 없다면, 다윗 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제가 인생 2막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34세 때였는데, 인생의 정말 제2막이었고,
예전에 전혀 생각도 안 해본 인생을 시작하게 된거지요.
적어도 34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 제 인생의 진로를 한 번 더 바꾸셔서,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는 걸, 목회자로 바꾸어 주시고,
그래서 오늘까지 오게 하셨는데....
근데 제가 딱 나이 50이 되던 해였어요.
제가 이제 교회에서 아침에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교회에서 본당에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갑자기 이렇게 부르시는 거예요.
'네 나이가 몇이지?' 그래서 '50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시냐면 '너 그때 했던 기도 기억나냐?' 그걸 떠오르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생생하게 기억나는 거예요.
그때, 16년 전에 34세 때, 임용원서 넣기 전에 갈등하면서
'선교사로 지원했다가, 내가 50세쯤 돼서 후회하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죠.
그래서 제가 '네 기억납니다. 내가 그때 50세쯤 돼서 후회하면 어떡하죠?' 이렇게 기도했었죠.
그랬더니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시냐면
'그래서 지금 (네가 50세가 되었는데) 후회하느냐?' 물으시더라고요.
'아이고, 후회는 무슨 후회입니까? 저는 이거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가 없고,
열 번 태어나도 이거 할 거고, 백 번 태어나도 이거 할 거고...'
맞아요.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후회라는 게 없어요.
가장 좋은 걸 계획하고 계세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후회라는 게 없어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 세상이 주는 환상이에요.
이 세상에서 '그 길을 안 가면 큰일 날 것 같고...
모든 사람이 그리로 달려가는 것 같은데, 내가 그리로 안 가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 같고...' 이게 다 세상이 주는 신기루고 환상이거든요.
우리를 향한 가장 완벽하고 좋은 계획은, 당연히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따라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다고요?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믿음으로 골리앗을 넘어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자 그래서 오늘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이야기를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쓰러트릴 수 있었을까? 하는 것들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믿음인데요. 이 믿음의 내용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1. 다윗에게 있었던 믿음의 첫 번째 단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도전하는 믿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냐면 <열정>에서부터 시작해요.
<열정>이 없으면, 도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어린 소년 다윗이, 형들이 참여하고 있는 전쟁터에 음식 배달을 하러 가죠.
그런데 그곳에서 참지 못할 광경을 목격합니다.
골리앗 이라는 거인이 나타나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을 모독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다윗 안에 참을 수 없는 뭔가가 우욱하고 올라옵니다.
'이 할례받지 않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 분노가 올라오죠. 분기탱천 했다고 그러죠. 그리고 열정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저마다 반응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에 참을 수 없는 그 열정으로 반응했듯이,
저와 여러분 안에도, 하여간 뭔가에 대해서 반응하게 하는 열정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돈 버는 얘기만 나오면, 피가 거꾸로 도는 사람이 있고요.
또 어떤 기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왔다는 얘기만 들으면
하여간 찾아가서, 애플샵에 가서 봐야 되는 사람이 있고요.
음악에 반응하는 사람, 예술에 반응하는 사람... 하여간 그런 게 있죠.
종류는 다양해도, 사람에게는 누구나 반응하는 뭔가가 있어요.
이것을 열정 passion 이라고 합니다. *passion : 열정 또는 수난
그래서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 반응하지 않는 것이 조금 일반적이 아닌 거라서 그렇지,
하여간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어요.
그냥 아무도 만나기 싫어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같은 경우에도,
혼자 있고 싶은 열정은 또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열정처럼 안 보여서 '나를 그냥 혼자 놔둬' 하지,
그렇게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열정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뭔가 열정이 있다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무엇에 반응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 길로 가게 돼 있어요. 그 길로 가게 돼 있어요.
그리고 다윗 안에 있었던 열정은 뭐냐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거였어요.
이것이 가장 소중한 열정인 줄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무엇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 분은,
'내가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보세요. 이거를 거꾸로 해서 보면 보이거든요.
분노하는 것도 열정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제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재미있는 얘기인데 제가 오래전 얘기긴 해요.
아주 오래전에 중국에 처음으로 갔을 때였어요.
젊었을 때였는데 중국의 집회를 초청받아서 중국에 가게 됐습니다.
근데 이제 북경으로 가게 됐는데, 제가 북경에 가면서 꼭 해야겠다는 게 하나 있었어요.
'북경 오리를 먹어야 되겠다'
특히 제가 '베이징 덕'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오리 구이
그래서 그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갔어요.
갔는데 초청하신 분들이,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해서, 첫 끼로 설렁탕을 사 주시는 거예요.
'중국까지 갔는데 웬 설렁탕?'
그런데 사주시니까 그냥 먹어야죠. 강사가 '이거 말고 다른 거 주세요' 이럴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끼니가 많으니까 앞으로를 기약하며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됐는데, 그 다음 날 낮에는 갈비탕을 사 주시는 거예요.
저는 그 날 저녁을 기대했죠. '오늘 저녁에는 중국 식사를 사 주시겠지...'
그런데 저녁에는 순댓국을 또 사주시는 거예요.
'그래도 하루 더 남았으니까...'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날에 갔더니, 또 낮에 한식을 사주셨어요. 무슨 전이랑 나오는 한정식.
그러고 이제 저녁 한 끼 딱 남은 거예요. 그때부터 이렇게 조바심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저녁엔 반드시 메이징 덕을 먹어야 되는데...'
그리고 이제 저녁때 식당에 갔는데, 저녁 때도 또 한식집을 간 거예요.
(그분들이 평소에 한식당에 자주 안 가시나 봐요)
그 오래 전의 일이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는 건 뭐예요? 트라우마 라는 거죠.
이게 제 안에 분노가 올라오는 거예요. 분노가!
그러면서 제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절규가 들립니다. '베이징 덕!'
그러면서 제가 그때 알았어요.
'아, 내가 음식에 대한 열정이 있구나, 먹는 거에 대한 열정이 있구나!'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 중에 '나는 뭐에 열정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분들은 뭐가 막혔을 때, 분노가 올라오나 보세요.
뭔가 여러분이 막혔을 때, 분노가 올라오는 게 있거든요.
그 분노가 여러분 안에 있는 열정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어디서 분노가 올라왔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막힐 때,
하나님의 나라가 막히는 것에 대해서 분노가 올라옵니다.
그 분노가 뭐냐면 사실은 열정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열정,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
그래서 예수님도 보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 분노하셨죠.
그것을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이라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요2:17
여러분은 무엇을 향한 열정이 있으십니까? 무엇에 분노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모욕하는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 모든 믿음의 시작은 뭐냐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이 시작점입니다.
▲제가 증언을 하나 할게요.
'그렇다면 이 열정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제가 처음에 예수를 믿고 나서, 제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아주 기도를 많이 하는 친구들이었어요.
제가 어릴 적에 영락교회에서 쭉 컸는데
영락교회에 그 당시 약간 좀 특별한 성령의 바람이 불면서, 기도들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이제 너무 좋으니까, 그 친구들을 이제 좇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근데 보니까 금요일만 되면, 어디를 가더라고요.
그래서 '어디 가냐?' 그랬더니 기도원에 간다는 거예요.
'나도 따라갈 수 없겠느냐?' 그래서 따라갔습니다.
따라갔더니 영락기도원이 저쪽 수유리 쪽에 있는데, 하여간 거기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더니 한 밤 10시쯤 됐는데, 권사님 한 분이랑 대학생들 몇 명이 모여 앉아서
막 이렇게 찬양하고 박수치고 이러더라고요.
한 시간쯤 그러더니 방석을 하나씩 들고는 산으로 올라가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처음이니까 따라간 거죠.
그래서 저도 이제 방석을 하나 들고 이렇게 따라갔습니다.
따라갔더니 각자 지정석들이 있더구만요. *늘 자리 잡는 곳
이렇게 나무 아래 좀 평평하게 닦아놓은 데가 하나씩 있어요.
그래서 가더니 딱 방석을 깔더니 거기에 앉습니다.
그래서 제게도 이제 빈자리 하나 찾아주면서,
소나무 밑에 자리에 방석을 깔고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기도를 시작하는 거예요.
'주여!' 그러고 기도를 시작하는데, 이 친구들은 다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없죠. 방언 받은 적도 없고 그래서,
그래도 이제 산에까지 따라왔으니까 기도를 해야죠.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시계를 보니까, 딱 10분 지나갔더라고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들이 있으시죠? 열심히 기도했는데 10분이에요.
그래서 '이게 10분밖에 안 갔냐?' 그래서 다시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았던 것 같아요.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란을 위해서 기도하고,
약간 생각나는 기도는 다 했습니다. 그러고 시계를 봤는데 딱 30분 지났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기도를 끝낼 줄을 모르는 거예요.
한 시간 지나고, 두 시간 지나고, 한 3~4시간이 지나서,
새벽 4시쯤 되니까 끝나는 거예요. 저는 이제 지쳐가지고 쓰러졌죠.
그러고는 이제 그다음부터 그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 나도 저거 달라고, 저렇게 기도하고 싶은데 나도 저거 달라고'
그래서 그다음부터 방언 달라고 하여간 좇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방언 달라고!
그래서 6개월을 좇아다녔어요. 제가 6개월을 좇아다니다가
정말 신령하다는 집회는 다 좇아다녔는데,
거기서는 방언 안 주시다가, 우리교회(영락교회)에서 하는 집회를 갔다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됐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그 다음 날이 됐는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무슨 증상이 나타나냐면, '예수'라는 소리만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 그러면.. 그냥 눈물이 나오고,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맞아 난 그 나라에서 살 거고, 그 나라에서 죽을 거야'
'근데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생각하지?'
'분명히 내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왜 하루 사이에 완전히 다른 생각이 들지?'
내가 이제 수학 전공이잖아요. 그러니까 뭐든지 논리적 설명이 돼야 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돼요.
왜 갑자기 하루 만에, 내게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이 안 되는데,
제 안에 올라오는 게 있어요.
제가 그거를, 20년 지나고 나서, 그게 뭔지 알았어요.
그러니까 성령의 본질이 뭐냐 하면, 성령의 본성이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열정을 주시는 분이세요. 주1)
그러니까 영의 본질은 뭐냐면 갈망이에요. 갈망!
▲그러니까 영은 소원을 주고, 갈망을 주는 게 영인 거예요.
그래서 설명은 안 되는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갈망을 일으키는 것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맘몬의 영이 임하잖아요.
그러면 돈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요. 열정이 일어납니다.
권력의 영이 임하잖아요. 그러면 권력을 향한 제어할 수 없는 열정이 나옵니다.
그렇죠. 지금 정치계에 돌아가는 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열정적입니까?
그게 다 영에서부터 시작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다윗의 열정,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다윗의 열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성령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마 이 가운데 분명히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지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시작점이 '영 spirit' 이라고 하는데,
내 안에는 그런 열정이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느끼시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왜 없는지 아십니까? 결국 성령 받아야 되는 거예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을 받으면, 우리 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이 일어나게 돼요.
그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의 시작, 믿음의 여정의 시작은 뭐냐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서 시작되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서 시작되는 거예요. 아멘!
그리고 성령께서는 언제 임하시냐면, 당연히 예배 가운데 임하십니다.
당연히 예배 가운데 임하세요.
그래서 이 믿음의 여정의 시작은 뭐냐면,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예요.
그 예배에서, 성령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시기 시작할 때,
거기서부터 우리 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그게 믿음의 여정의 시작입니다.
이 과정 없이 그냥 지식과 훈련과 생각만으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한계가 있어요.
그거는 절대 계속 가지 가지 못해요. 조금 하다가 중단합니다.
제가 40년 믿음의 여정을 걸어보니까, 그렇게 해서는 끝까지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하는 여정은,
중간에 좀 힘들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가보면 항상 끝까지 가요.
성령으로 시작하는 여정은, 항상 끝까지 가요.
그래서 여러분, 성령으로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뭐예요? 성령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아멘!
◑2. 두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열정 못지않게 중요한 비결은 뭐냐면 <훈련>입니다.
사실 열정은, 여러분 <훈련 discipline>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야생마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잘 훈련받아서 길들여지지 않으면 써먹을 수 없듯이,
우리의 열정도 비슷해요. 이것이 잘 훈련되어야만,
<열정>과 <훈련>이 만났을 때, 골리앗을 쓰러트리게 되는 거지,
열정만 가지고 쓰러트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여러분,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보면, 열정만 가지고 나갔던 게 아니에요.
본문에 보면 뭐라고 그럽니까?
삼상17:34~36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은 열정만 가지고 나간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뭐냐면
내가 사자와도 싸워봤고 곰하고도 싸워봤다는 거예요.
사자도 때려잡아본 적이 있고, 곰도 때려잡아본 적이 있다는 거예요.
이 훈련된 준비됨이 있었다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 다윗에게 이 훈련된 준비됨이 없었다면,
열정만 가지고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에게 열정이 있어요. '이 할례받지 못한 자가 감히 하나님을 모욕하느냐?'
그리고 이제 물멧돌을 들고 나갑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하고 물맷돌을 휙 던졌는데, 안 맞았어요.
훈련한 적이 없는데 맞겠습니까? 막 휙휙 돌려서 던지면 엉뚱한 데로 날아가겠죠.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당연히 골리앗한테 맞아 죽었죠.
열정만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은, 여러분 미안하지만 그 운명이
골리앗한테 맞아 죽는 거로 끝난다는 거예요.
'열정만 가지고 물멧돌을 돌린다고 해서 맞느냐?' 안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강함은 무엇이었냐면,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비결은 뭐냐면
이 열정이 훈련을 만나서 준비되는 거예요. 열정이 훈련을 만나서 준비되는 거예요.
▲저희 교회도 개척 때부터 청년 사역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지금은 이제 청년들이 늙어가지고 아저씨들이 많이 됐는데,
그래서 제가 이제 평생 청년 사역을 해왔기 때문에, 청년들하고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청년들의 특징이 뭐냐면, 열정은 있는데 훈련은 잘 안 되는 것이
보통 청년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열정은 있어가지고서, 도전들은 많이 하고, 무모한 시도들은 많이 하는데,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게 아니고, 맨날 얻어맞고 오는 거죠.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게 아니고, 맨날 골리앗한테 쳐맞고 옵니다.
왜요? 열정은 있어요. 예배 때 뜨거움이 있고요.
예배 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러니까 다 될 것 같아요.
다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도전하는데... 물멧돌이 안 맞는 거예요.
물멧돌을 던졌는데 계속 안 맞고 빗나가는 겁니다. 빗나가면 어떻게 돼요?
골리앗한테 맞는 거죠. 빗나가면 반격을 받아서 쳐맞는 겁니다. 계속 처맞고 돌아오는 거예요.
열정이 부족합니까? 아니요. 열정이 부족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부족한 거죠? 훈련이 부족한 거예요. 훈련이 부족한 거예요.
열정은 반드시 뭐하고 같이 따라가야 돼요? 훈련과 함께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아멘!
그랬을 때 골리앗을 쓰러트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열정을 훈련해야 되는가요?
훈련에도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1. 첫 번째, 훈련은 일상에서 평소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집중적으로 훈련 받는 훈련들을 생각합니다.
뭐 대표적인 게 YWAM에서 하는 DTS라든지,
아니면 조금 더 열정이 있는 사람은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든지...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뭐 그런 훈련이 나름대로 의미는 있겠지만,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뭐냐면, 이런 단기 집중 훈련들이, 즉 intensive course가
여러분 우리의 영성을 만들어주는 훈련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영성이 만들어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어디냐면, 매일 매일의 삶 속이에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경건의 훈련'입니다.
매일의 삶, 이거를 '훈련장'으로 삼지 않고,
거기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세상의 흐름 따라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즉 육신적으로 살다가,
막상 인텐시브하게 시간을 떼어가지고 '3개월, 6개월 훈련하겠다'
그래서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영적인 실력은, 여러분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만들어져야 됩니다.
매일 스스로 경건의 훈련을 해야되는 거예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러니까 다윗이 언제 사자와 곰하고 싸웠는가요? 보세요, 일상의 삶이잖아요.
양을 치는 것이 뭐예요? 다윗의 직업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다윗의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그곳에서 자기 영적인 실력들을 형성하고 훈련했지,
어디 가서 '골리아 때려잡기 3개월 특훈' 이런 거 들어간 적이 없단 말이에요.
그런 코스에 가서 훈련한 게 아니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훈련에 대해서 그런 오해들을 해요.
제가 이제 선교사들 훈련시키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선교사들을 선발하고, 훈련하고 하는 걸,
교회에서도 하고, 선교단체에서도 일하면서도
선교단체에서 선교 헌신자들을 훈련하는 것들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선교 헌신자들이나, 선교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오해하는 게 뭐냐면,
'선교 훈련을 받으면 내 영성이 만들어질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요.
아이쿠, 그런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교사 훈련 받는 것이, 보통 짧은 데는 6개월, 긴 데는 한 2~3년 정도 하는데,
이 선교사 훈련은, 영성을 만드는, 또는 기르는 곳이 아니에요.
거기서 훈련하는 건 뭐냐면, 선교를 위한 노하우와 스킬들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문화를 복음에 어떻게 적용할 건지, 거기 가서 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일,
이런 전략과 기술들을 가르쳐주는 거지, 영성을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신학교에 가면 영성이 생길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신학교는 있던 영성을 안 까먹고 나오면 할렐루야입니다.
저는 성경을 더 알고 싶어서 신학교에 갔는데요.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성경'을 배운 기억은 별로 없어요.
신학교는 '신학'을 가르쳐주지, 성경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성경은 내가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내가 씨름하면서 연구해야 되는 것이지,
어디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영성이 만들어지는 곳은 어디냐면,
일상의 삶이고, 그 일상의 삶 속에 중심이 되는 것은 교회죠.
그러니까 결국 영성(믿음)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거냐면, 교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조금 더 디테일하게는
'우리가 교회에서 받는 가이드라인과 지침을 가지고
내 매일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일상의 삶들을 그냥 헛되이 보내지 마세요.
매일매일 여러분들이 일하는 곳, 또는 공부하는 것, 또는 주부면 가정에서,
가정을 섬기고 살리는 것... 이것을 하나님이 나를 두신 훈련의 장으로 생각하셔야 돼요.
그래서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떻게 내 앞에 있는 위기들을 믿음으로 넘어가는가?' 그것을 계속 살아낼 때,
또는 직장 일하면서,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또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매일 곰과 사자와 싸움'을 싸워나갈 때,
거기서 여러분들의 열정이 훈련되기 시작합니다.
아 근데 노파심에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열정이 없는 사람은 훈련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훈련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훈련할 만한 재료가 없거든요. 재료가 없는데 그거 가지고 무슨 요리를 하겠어요?
아니 재료가 있어야 뭐 요리를 하는 거지요, 재료도 없는데 무슨 요리를 합니까?
그 재료가 뭐예요? 성령 받는 것, 성령을 받아야
그 다음에 훈련이라고 하는 게 의미를 갖기 시작하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자기 안에 열정(불)도 없는데,
훈련해봐야 한번 써먹을 데도 없고, 훈련이 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시작점을 스킵하고, 바이패스하고,
훈련이라는 단계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넌센스입니다.
훈련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거는 일단 훈련이 안 돼요. 된 듯하면 무너지고, 된 듯하면 무너비니다.
그러니까 이 훈련은, 우리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성령의, 불의) 열정이 있어야 돼요.
이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있을 때, 이 열정을 어떻게 다룰 건가 하는 것을 훈련하는 건데,
그래서 먼저 성령을 받으셔야 돼요.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이, 그냥 막 끓어올라야 돼요.
거기서 이제 훈련 discipline 이라고 하는 게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거예요.
보니까 여러분의 얼굴들이 심각해지는데,
그래서 하여간 훈련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2. 두 번째로, 훈련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훈련의 아주 필수적인 요소죠.
뭐냐면 반복이에요. 반복!
다윗이 처음부터 사자를 잡고, 곰을 잡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처음부터 사자랑 싸우겠어요?
다윗이 이때 보니까 아직 장성한 어른은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십대 후반의 소년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사자가 나타났을 땐, 처음엔 금방 도망갔을 겁니다.
'그냥 양 한 마리 주고 말지' ... 어떻게 사자랑 싸우겠습니까?
아마 분명히 시작은 여우나 늑대, 뭐 이런 작은 짐승이었을 거예요.
여우는 어떻게 해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늑대도,
자기가 키우는 개가 있고 하면, 늑대도 1~2마리 쯤은 상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훈련은 사자로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여우로 시작하는 거예요.
할 만한 거, 내가 순종할 만한 거,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큰 거 가지고 시작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돌멩이 집아서 던지는 것부터 하지 않았겠어요?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보면, 다윗이 굉장히 익숙하거든요. 이거를 굉장히 많이 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급소를 맞출 수는 없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힘껏 던졌는데 빗나가기도 하고,
아니면 머리를 맞춰야 되는데, 다리 같은데를 맞추기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마 들짐승들에게 조금 할퀴기도 하고, 물리기도 하고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물리더라도 그 다음날 또 연습합니다.
여우가 나타나면 또 던지고, 여우가 나타나면 또 던지고,
여우를 맞히기 위해서, 여우가 없을 때도 나무에다 여우 그림 그려놓고 맞히고,
이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맞기 시작하는 거죠.
이게 참 묘미가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 되는 순간이 있어요.
영적인 훈련도, 훈련할 땐 계속 안 되다가, 어느 순간에 딱 되기 시작하는 때가 있어요.
'어, 이게 되네?' 이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자 그래서 여우를 때려잡다가, 그 다음에는 이제 늑대가 나타나겠죠.
그 전까지는 여우만 상대했지, 늑대가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갔다가...
'이제 한번 해볼까?' 방법은 똑같잖아요. 방법은 돌팔매에 돌맹이를 던지면 되는 거죠.
차이가 있다면 뭐예요? 리스크가 다른 거죠.
믿음은, 항상 원리가 똑같아요. 물리적으로 힘든 일은 아니에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지는 않으세요.
물리적으로는 쉬운 일이에요. 물리적으로는 그냥 하면 돼요.
그런데 두려운 거죠. 리스크가 있는 거죠.
'그러다가 안 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있는 거죠.
전도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전도가 어려울 거 없어요.
그냥 가서 말하면 돼요. 벙어리가 아니잖아요. 말하는 거는 너무 쉬운 일인데,
문제는 그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할 건지가 두려운 거죠.
그러니까 항상 두려움이 문제이지,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여우를 잡나, 늑대를 잡나, 곰을 잡나, 사자를 잡나... 잡는 방법은 다 똑같아요.
그냥 물맷돌을 돌려서 맞추면 돼요.
그리고 여우를 맞출 수 있다면, 늑대도 맞출 수 있고,
늑대를 맞출 수 있다면, 곰도 맞출 수 있고,
곰을 맞출 수 있으면, 사자도 맞출 수 있어요.
그런데 돌이 빗나갔을 때는 리스크가 다른 거지요.
여우는 좀 물리고 말면 되는데, 늑대까지도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곰이나 사자는 죽는 거잖아요.
이게 이제 믿음의 훈련의 영적인 원리입니다. 물리적으로 어렵진 않아요.
그런데 항상 두려움이라고 하는 장벽이 우리를 막아요.
그래서 믿음은 결국 뭐예요? 두려움을 뛰어넘는 거예요. 두려움을 뛰어넘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늑대도 잡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다음은 곰이겠죠.
곰을 잡는 방법도 앞서 얘기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그냥 물매를 돌려서 던지면 돼요.
그런데 이제 곰부터는 차원이 달라지죠. 그다음부터는 자기 생명을 걸어야 돼요.
맞출 수는 있는데, 이게 자칫 잘못하면, 자기 생명이 위태로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인 훈련을, 항상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더라고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그래서 처음에는 가능한 것부터 하게 하세요.
작은 것부터 순종하게 하시고, 작은 것에 믿음을 걸게 하시고,
그런 것들을 계속 훈련을 시키십니다.
계속 훈련을 시키시다가 때가 되면 곰이 나타나게 하세요.
때가 되면 사자가 나타나게 하세요.
근데 곰하고 사자도 그냥 내가 꾸준히 해왔던 것이 있으면, 그냥 그대로 순종하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두려움의 크기가 달라요.
'아이쿠야 이건 했다가 안 되면, 그냥 돈 좀 손해보고 마는 게 아니라,
이건 했다가 잘못되면, 내 인생이 송두리째 꼬일 것 같고,
잘못하면 인생이 송두리째 끝날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다윗도 똑같았을 거예요. 곰을 잡을 때도, 여우 잡을 때나, 늑대 잡을 때나 똑같아요.
똑같이 물맷돌을 돌려서 던지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
결국 여우를 잡다가, 늑대를 잡다가, 곰을 잡다가, 마지막에 사자까지 잡는 거예요.
반복된 훈련, 반복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모든 영적인 능력은, 반복으로부터 나와요. 반복으로부터 나와요.
▲3. 훈련에서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불평이 없어야> 된다는 거예요.
훈련에는 우리 마음의 태도가 진짜 중요합니다.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불평하기 시작하면 훈련이 안 됩니다.
다윗이 앙을 치고 있는데, 드디어 사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옵니다.
아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을 거예요. 이것은 반복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겁니다.
사자가 다가오는데, 반복한다고 익숙해지겠어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립니다.
용기를 내서 이제 맞서야 할 타이밍입니다. 이제 물매에 돌맹이를 넣어서 던집니다.
다행히 사자 정수리에 딱 맞았어요. 사자가 도망갔습니다. '어휴~' 다윗이 산 거죠.
그런데 이런 사자가 매일 나오는 건 아니죠.
만약 매일 사자가 나온다면, 양 치는 곳을 옮겨야죠.
매일 사자가 들락날락하는 곳에서 양을 치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건 정말 가끔 나오는 일이죠.
정말 1년에 한두 번이나 나오는 곳이지요. 그러니까 거기서 양을 치겠죠.
그런데 살다 보면, 사자와 곰이 연속으로 출몰해서 괴롭히는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안에 뭐가 올라오기 시작하냐면, 원망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무슨 인생에 맨날 사자이고 곰입니까?
어제도 곰이 나왔는데, 오늘도 사자 나오고...' 그러면 원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 인생 가운데 그런 순간들이 있죠.
'하나님, 이거 좀 해도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어제 곰 두 마리 잡았는데, 오늘도 사자가 나오고...'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서요?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왜 이러십니까?'하고 원망합니다.
제 마음에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오전에도 얘기했지만,
저희가 사역자들이 벌써 3명, 4명째 젊은 나이에 소천하면서,
다른 목사님들은 그런 사건 한 번 겪으시는 것도 힘들어 하시는데,
이게 두 번도 아니고, 세 번, 네 번... 그러니까 제 안에도 힘든 마음이 올라오죠.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거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이거는 한 번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저도 감당하기 힘들고, 교인들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제 안에도 이제 그런 마음이 올라오죠.
지난 번이었어요. 지난 번에 제 속에 그런 마음이 올라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을 때였어요.
'하나님 한 번도 아니고, 이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왜 이러십니까?'
이때 성령께서 명확한 음성을 들려주시더라고요.
'왜 네 인생 가운데 사자가 계속 나오는 줄 아느냐? 너는 다윗이니까!
너는 언젠가는 골리앗을 때려잡아야 될 사람이거든!'
'그냥 여기서 여우와 매와 놀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
너는 언젠가 골리앗을 때려잡아야 될 다윗이거든!'
그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 곰과 사자가 끊이지 않는 진짜 이유라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곰과 사자가 끊이지 않는 줄 아십니까?
다윗이니까!
양이나 치면서 평생을 마칠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골리앗 앞에 서서, 골리앗을 때려잡고,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되는 다윗이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 가운데는, 양과 여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사자와 곰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다윗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혹시 여러분의 교회 가운데, 믿음을 요구하는 두려움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은 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윗으로 보고 계신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이 창일란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렘12:5
그러므로 불평하지 마십시오.
사자와 곰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거기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지 않으면, 언젠가 골리앗 앞에서 맞아 죽는 거예요.
이해하십니까?
오늘 사자와 곰을 때려잡지 않으면, 언젠가 골리앗 앞에서 맞아 죽는 거예요.
골리앗을 넘어가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아멘!
화려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면에는, 광야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묵묵히 양을 치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없는 다윗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라고 하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그 화려한 스팟라이트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대부분의 시간은 무엇이었죠?
외롭고 한적한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고 양을 지키기 위해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는 그것이,
여러분 다윗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한 거 아니에요?
골리앗을 때려잡는 건 단 하루예요. 딱 하루에 일어났던, 그것도 순식간에 일어났던,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한 사건이지,
다윗의 대부분의 시간은 뭐예요?
양을 치면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던... 어찌보면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이었어요.
그러나 성경에는 단 한 두 줄로 기록된 짧은 기록이지만
다윗의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이게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은, 여러분 믿음이 발휘되는 골리앗을 때려잡는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다윗의 일생에서 아주 짧은 한 단편이고요.
실제 다윗의 대부분의 시간은 뭐예요?
사자와 곰을 때려잡고, 불평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양을 치던 그 긴 시간들...
그것이 다윗을 다윗되게 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이 시간이 없었다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없어요.
인생이 성공하는 진짜 비결은,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화려한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뒷이야기에 있습니다.
뒤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사실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이 이야기,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끊임없이 예배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래서 오늘도 역시 돌멩이를 들어서,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백발백중이 될 날을 기대하면서, 신뢰하고 던지며 또 던지는...
이 다윗의 시간을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아요.
그것이 다윗의 진짜 얘기예요. 그것이 다윗의 진짜 얘기예요.
제가 젊은 사역자들을 멘토할 때, 늘 해주는 얘기가 있습니다.
'너무 빨리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다윗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라.
그러면 무대에 오르는 날이 온다. 반드시 무대에 오르는 날이 오는데,
무대에 오르는 날을 준비해야 된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무대에 올랐을 때,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고
골리앗한테 맞아 죽는다. 무대에 오르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무대 아래에 있는 그 시간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시간을
경건의 훈련으로 잘 보내야 된다...'
여러분, 다윗의 시편이 대부분 이때 나온 거를 아십니까?
다윗의 시편이, 나중에 죄 짓고 나서 참회하는 참회시 말고,
다윗의 예배하는 시편들은, 대부분 다 이때 나와요.
하나님과 친밀함 속에서 매일 매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자기를 주목하지 않고
자기가 무대 위에 아직 올라오지도 않은 그 시간 속에서,
다윗의 시편들이 탄생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윗 인생의 진짜 비결이에요.
다윗과 같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음의 마지막 세 번째 비결은 뭐냐면 <실제로 움직여야> 된다는 거예요.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열정이 있고 아무리 훈련이 되어 있어도, 실제로 움직이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의 열정과 그의 훈련이, 진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에요.
믿음은 여러분, 실제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정이 있고, 아무리 훈련이 되어 있어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출애국기에 보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뭐라 그러시냐면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아니 하나님이 부르짖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부르짖을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기도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때, 움직일 때가 있다.는 거예요.
부르짖어야 되는 때가 있고, 움직여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라. 어짜하여 기도만 하고 있느냐?
이미 지팡이를 주지 않았느냐? 너에게 발이 있지 않느냐?
그 지팡이를 들어서 사용해라. 발을 떼라.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기만 하느냐?
이미 네 손에 물맷돌이 있지 않느냐? 돌을 집어들어라.
그리고 발을 떼라, 골리앗을 향해 돌진해라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하고 소리치며 달려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물맷돌을 꺼내라. 힘껏 돌려라, 그리고 골리앗을 향해 던져라.
그가 쓰러질 것이다!'
이게 여러분,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응원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이 하나님의 응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어요.
사람은 여러분, 기도해야 될 때가 있고, 움직여야 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을 완성하는 것은 뭐냐면, 움직여야 될 때 움직이는 거예요.
순종해야 될 때 순종하는 거예요. 결단해야 될 때 결단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골리앗이 쓰러지게 돼요.
아무리 다윗에게 열정이 있고, 아무리 훈련이 되어 있어도,
실제로 움직여서 돌을 던지지 않으면, 그러면 골리앗이 쓰러지지 않는 거예요.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여러분의 놀라운 데스티니가 다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이세요. 신앙은 여러분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에요.
아주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액션이에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액션이 없으면 믿음이 아니라' 그랬어요.
액션이 없으면 믿음이 아니라 그랬어요. 믿음은 아주 구체적인 거예요.
작은 거라도 실제로 움직여야 돼요.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자매를 사랑하십니까? 액션이 있어야 돼요.
형제를 사랑한다면, 단 돈 5만 원이라도 헌금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사랑하는 거지, 아무런 액션이 없이, 감정만, 그거는 자기 기만이라고요.
제 얘기가 아니고 성경이 하는 얘기입니다. 자기 기만이라는 거예요.
모든 영적인 일은 믿음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예배도 그렇고...
구체적인 게 있어야 돼요. 신앙은 여러분 추상적이면 안 돼요. 아주 구체적이어야 돼요.
아주 구체적이어야 돼요.
오늘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액션이 우리의 믿음이고요. 이 액션 가운데 골리앗이 쓰러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 한번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 삶 속에 있는 골리앗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위기고, 어려움이고, 큰 두려움일 수 있지만,
골리앗이 없다면 다윗도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왕으로 다윗으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에 사자와 곰이 끊이지 않는 거 아니겠어요?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음성을 듣는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너의 인생 가운데 사자와 곰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너는 다윗이니까!'
'너는 내 다윗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나의 다윗이야!'
이 성령의 음성을 듣는 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예, 하나님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다윗이 보여줬던 그 믿음의 삶들을 나도 살기를 원합니다.
주의 나라를 향한 열정으로 훈련된 실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움직이는...
그렇게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마음 가지고 주여 한번 부르시고 다 같이 합심해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주1)
장로교의 주류 신학은, 이런 성령받음, 성령세례 받음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죠.
그냥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럼 성령받은 것이다... 라고 봅니다. 고전12:3
성령의 내주를 성령충만, 또는 성령세례와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봅니다.
근데 성령론에 관한 '신학'.. 이런 거 너무 따지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성령받으면 됩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신학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거기에 얽매이는 겁니다. 유연해야 됩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을..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