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JU5pGzfD6-0
◈그대 다시 일어서리라! 삼상15:17~35 2025.05.25 사무엘상28강
아말렉을 진멸하라라는 명령에 불순종한 이후에, 사울 왕이 끝없이 추락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스토리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서 보면,
전반부는, 사무엘의 책망이 세 번 이어지는 가운데, :17~19, :22~23, :26
사울왕이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20~21, :24~25
후반부는,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7~35
여러분 사울이 온전한 순종을 했나요? 아니죠.
그래서 지난주에 제가 신조어를 하나 만들었죠. '반순종', 절반의 순종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순종했다고 자꾸 변명을 해요.
이때 사무엘이 굉장히 중요한 인생의 포인트를 짚어줍니다.
◑삼상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5: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라는 것은
'나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데..' 그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머리로 세우셨다는 거예요. 그때는 모든 것에 감사했죠.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백성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사울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악한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나서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인생은 이제 추락할 수밖에 없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크리스찬의 인생 원리 중에, '시소의 원리'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거예요.
시소가 중심축을 가운데 두고, 낮아지면 높아지고, 높아지면 낮아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그리고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는 거죠.
사울이 겸손할 때 그를 왕으로 세우셨는데,
그가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이 그를 낮추십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죠. 그가 빈들의 목동이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높여주셨잖아요.
그런데 그가 교만해서 범죄하니까, 하나님이 다시 그를 낮추십니다.
그래서 이 '시소의 원리'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죠.
1) 시소의 원리는 은혜의 원리입니다.
은혜로 인생을 시작했으면 은혜로 마쳐야 되는데, 엉뚱한 곳으로 가는 거예요.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업적' 이런 것으로 사람들은 마음이 이동을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이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힘의 논리가 들어옵니다.
교회에서도 '내가 신앙 경력이, 신앙 이력이 얼마나 됐는데...' 하면서 어깨 힘을 주려고 하고,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겸손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 지위에 오르고, 내가 어떤 업적을 이루고 나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자기 인생에 힘이 들어가는 거예요.
지금의 사울왕은 왕권을 휘두르고, 백성들을 압박하고,
사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오남용합니다.
크리스찬의 구원 여정도, 은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은혜로 마무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라'
여러분, 날마다 여러분의 삶이 은혜의 사건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 시작한 인생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면 너무 안타까운 것은,
어느 순간부터 목사는 교권을 주장하면서 목에 힘을 주고,
교인들은 교세가 성장하면 '나는 이런 큰 교회에 다녀' 이런 걸로 목에 힘주고,
직분자들은 직위를 가지고 목에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인데, 왜 세상적인 조직체로 전락을 시키는가요?
한국교회가 은혜 안에 다시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2) 두번째 시소의 원리는 반전의 원리입니다.
지금이 인생의 최저점이라면, 여러분 시소를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지금이 인생의 최저점이라면, 오르막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나 지금이 인생의 최고점이라면, 지금 이 순간은 좋을지 모르지만
내리막길이 기다리는 것이잖아요. (계속 올라가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고점에 서 있는가, 저점에 서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오르막이냐 내리막이냐가 ... 중요한 거예요.
사람들은 굉장히 시야가 좁으니까, 지금의 고점/ 저점만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지금 주식 투자에 관한 언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서 나를 낮추시는 시간,
즉 빈들의 시간, 광야의 시간, 무명의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오르막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는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마저 등지고 나 홀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유명의 시간, 화려한 시간... 이런 시간은 하나님의 징계의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죠.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
여러분 사울왕이 자기를 부족하다고 여길 때, 그때가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었고,
그때가 가능성의 시간이었고, 그때가 반전의 시간이었어요.
다윗이 목동으로 지내면서, 빈들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광야에 쫓겨나서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때가 좋은 시간이었고, 그때가 은혜의 시간이었어요.
사람들은 고난의 때, 그때가 얼마나 좋은 시간인지를 잘 몰라요.
그리고 본인의 삶이 세상적으로 잘 나갈 때, 그때가 얼마나 위험한 시간인지를 또 몰라요.
솔로몬이 자기 자신을 '종은 출입할 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왕상3:7
이렇게 얘기했을 때가, 좋은 때였던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통일왕국의 세 명의 왕을 비교해서 살펴봅니다.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
여러분, 이 세 사람을 보면 다 추락했어요. 사월도 추락했고 솔로몬도 추락했어요.
다윗도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의 최고 전성기에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은 추락은 했지만, 자기의 어떤 명성에 스크래치를 내면서
가치 하락은 하긴 했지만, 완전히 탈락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어제 이제 설교문을 다 쓰고 나서, 설교제목을 '추락인가 탈락인가?' 이렇게 써 놨다가
두 단어가 다 너무 우울한 거예요. 그래서 제목을 바꿨거든요. '그대 다시 일어서리라'로.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끝까지 초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
예배자로 평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추락은 했어도, 탈락하지 않은 것은, 주1)
예배자는 무너질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는 것이잖아요.
성전에서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깨어져서 자복한 다윗,
그게 회개하고 회복되는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가 세상적 관점에서 좀 하락하고 추락할지라도,
다시 또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제부터 넌 나와 상관없다' 이렇게 완전히 아웃을 시켜버리시면
그거는 추락이나 하락이 아니라, 탈락이란 말이에요.
3) 세 번째 시소의 법칙은 '추락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탈락이 두려운 것'입니다.
아이들이 시소를 탈 때 2명, 3명, 4명 서로 덩치를 비교해가면서 양쪽으로 배분해서 탑니다.
아이들이 시소를 탈 때, 타봤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기대감이 있잖아요.
그러면 탄 쪽에서 높이 올라가는 것도 재밌지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재밌어 하죠.
최저점에서 다시 반등해서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인 거예요.
▲사울은 도대체 인생이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시소의 원리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걸 안다면,
혹시 최저점으로 떨어질 때,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근데 사울에게는 그게 없는 거예요.
추락하는 왕권에 날개가 없을까봐... 하염없이 떨어질까 봐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추락하는 자기 인생을, 어떻게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붙잡아 보려는 거죠.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추락을 했더라면, 하나님이 건져주실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시간과 여지를 드리지 않고, 자기가 다 손을 쓰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하락하고 추락하는 게 두려워서,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 개입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나 우리 인생에 가장 두려워해야 될 것은
추락이나 하락이 아니라, 탈락이라는 거예요.
추락을 면하려 하다가 탈락해 버리는 거죠. 사울처럼
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넌 완전히 아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이에요.
지난 주에도 나눈 것처럼 '왜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는가요?'
이게 내 인생이고, 내 자녀이고, 내 사업이고, 내 경력이니까,
이게 망가질까봐 두려운 거예요.
그리고는 내 인생이 추락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세요.
'추락'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엇이 두려운 것이라고요? '탈락'이 두려운 것입니다.
내 인생이 추락할까봐,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다가
신앙과 인격의 본질에서 탈락하면
그러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거예요. 사울이 그 대표적 예죠.
◑15:20~21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여러분, 사올은 자기가 순종했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올의 순종은 어떤 순종이었다고요?
절반의 순종이었죠. 그래서 이걸 묵상하다 보니까,
이런 일은 우리 삶 가운데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어린 자녀가 '엄마 저 놀고 싶어요.' 그러면
엄마는 '오늘 풀기로 한 문제집 진도까지 다 풀고 나서 놀아라'
그래서 애가 다 풀었다고 말하고, 나가서 노는 걸 보고서
엄마가 문제집을 펼쳐보니까, 풀이도 제대로 안 해놨고, 답도 거의 다 틀리고,
대충 해놓고 나가서 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자기는 '다 했다'는 거예요.
절반의 순종인 거죠.
이 '절반의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종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늘 목격하는 바입니다.
학생들은 공부 시간을 대충 때웁니다.
직장인들은 근무 시간만 대충 채우려고 합니다.
때로는 중요한 가족 모임에 와 앉아 있으면서도, 이 사람이 몸만 와 있고,
마음은 떠나 있는 경우가 있죠. '이거 빨리 끝나고 딴 데 가고 싶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순종, 진정성이 없는 삶, 영혼 없이 사는 인생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요? 이게 상황과 환경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이 맡은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에요.
진심을 담아내기 어려운 내 영혼의 상태가 진짜 문제인 것이에요.
이어지는 22~23절에, 그래서 사무엘이 정말 정곡을 짚으면서 사울을 책망합니다.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변명으로 일관하니까, 사무엘이 아주 강도 높게 책망을 합니다.
이 구절이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간단하게 정리를 하자면 이런 거예요.
불순종을 계속 고집한다면, 예배조차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 받으실 수 없습니다.
불순종은 심지어 우상숭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번 이 성전에 모여서 감격적으로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 예배를 하나님 받으실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배는 그저 요식행위가 되는 것이고,
이 예배는 우리의 불순종의 삶을 멋지게 가려주는 아름다움 덮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상숭배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상숭배가 무엇인가요? 귀신들을 얼르고 달래서
내가 원하는 걸 타내기 위한 요식행위 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사무엘이 강력하게 책망을 했을까요?
샤머니즘과 참 신앙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내가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가?'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것은, 그 사실을 내가 인정해야 될 문제이지만,
만약에 내가 주인이 된다 그러면, 주인이 아닌 자가 주인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잖아요.
샤머니즘은, 귀신들에게 잘 보여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니까 우상들이란 것은, 내 소원 성취를 이루어주는 앵벌이 역할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든 싫든, 때로는 '왜 하나님이 그러시는지' 내가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간에
그분의 뜻이 선하시다는 것을 신뢰하고, 그분의 길을 청종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사무엘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이 이렇게 강력한 사무엘의 책망을 듣고 나서,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백성을 두려워하여' 라는 이 단어가 '야래' 인데,
'하나님을 경외한다' 이때 사용하는 똑같은 단어예요. '야래'
그리고 백성들의 말을 '청종했다'도 '샤마'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listen and obey, 경청하고 순종한다는 그 청종이라는 단어예요.
'샤마'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되는데 (야래) .. 백성을 두려워했고 (야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데 (샤마) .. 엉뚱하게도 백성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샤마)
사울이 드디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데,
자신의 범죄함의 이유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 누구이신가요? 하나님이시죠.
그러면 하나님의 시선을 바라봐야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울의 권력 기반이, 지금 하나님이 아니시라
이제는 '백성들이 자기를 얼마나 지지해 주느냐' 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를 하나님이 붙들어주셔야 되는 것인데, 백성들이 받들어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늘날 현대 정치도 마찬가지죠. 지도자들은 여론에 목숨을 걸고, 지지율에 목숨을 겁니다.
민심을 천심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때로 여론이 틀릴 때가 있나요? 네, 있어요.
▲미국에서 팬데믹 때 '그래도 우리는 자유가 중요하다.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
여론이 막 이럴 때가 있었잖아요.
그러나 모두의 생명을 살려내고 지키기 위해서, 여론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야 될 때가 있는 거죠.
하나님은 내 인생의 최고의 전문가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가?'
나는 사람을 그냥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면 사람을 경외하는 수준까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그들이 내 인생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아닙니다. 저는 당연히 신앙생활하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죠.
그러나 사람들을 배려할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친절한 것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더라고요.
제가 젊은 시절에, 사람들에게 저는 상당히 매너 있고,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잘 해주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거절감을 두려워하니까,
때로는 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내가 하나님 말씀을 어기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내 영혼을 갉아먹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 성경에 기존에 알던 구절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수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시면, 수1장에서 최고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죽었으니까,
여호수아가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즉 '위축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신 줄로 다들 알고 있어요.
'이제 들어가서 전쟁을 계속 치러야 되니까 담대하라,
이제 약속의 땅을 취해야 되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 그게 아니에요.
정확하게 문장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이유는,
'그가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요? 세상의 논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방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상담을 하면서, 정말 마음씨가 착하고 섬세한 분들이
세상에서 너무 많이 괴로움을 당하는 거예요.
그 결과 신앙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많아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마음이 착한 거, 그거 잘못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는 거 잘못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분의 성품이 착하고 친절해도,
여러분의 영혼만큼은,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까요?
제가 상담하면서 이렇게 권면하다 보면, 때로는 어떤 분들은
'아휴, 목사님 성경에서 그렇게 얘기해도, 사업을 하려면 말씀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말씀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말씀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까지도 '상황에 때로는 타협해야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있어요. 정말 그럴까요?
사울이 말씀에 순종해서,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아말렉을 진멸했다면,
백성들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군대가 자기에게서 흩어지고...
이런 트라우마가 그에게 있었던 거죠.
그러나 여러분 결정적인 순간에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여러분을 세우고 내리시는 분은 누구세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될 것은, 하락이나 추락이 아니라, 탈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탈락시켜버리시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내가 말씀에 청종하겠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소리에 청종하겠는가?
오늘 본문 스토리의 후반부를 한번 전체적으로 보여주시면
책망을 들은 사울왕이 사무엘에게 '절 좀 봐 달라'고 간청을 세 번이나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두 번이나 거절을 해요. ↑
결국에는 불쌍히 어겨서 한 번 수용을 해주는 내용으로 귀결이 되고 있습니다.
◑15:25~27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을이 '이번 한 번만 눈 감아주십시오. 사무엘 선지자여, 나와 함께 가서
백성들 앞에서 제 권위를 좀 세워주십시오.'
그러자 사무엘은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신을 버리셨다. 탈락이다'
이 얘기를 했잖아요.
그리고 나서는 사울의 청을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저는 영화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울은 키가 큰 사람이잖아요.
거구의 사울왕이 무릎을 꿇고, 돌아서서 가는 선지자의 옷자락을 붙잡았는데,
여러분 사울왕의 손의 악력이 센 건지, 아니면 사무엘이 너무 빨리 가려고 했는지,
옷자락이 찢겨졌습니다. :27
◑15:28~29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이 두 번째로 거절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당신에게서 떠났다.
(이 옷자락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왕권을 떼어서 당신의 이웃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결코 뜻이 변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래서 '두 번 세 번 매달려도 소용이 없다. 이미 끝났다' 이 얘기를 한 것이에요.
◑15:30~31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여러분 이 상황에서 사울의 최선이 무엇이었을까요?
'너는 이미 아웃이야!' 이렇게 사무엘이 말해도
엎드려서 통곡하며 회개를 하는 것이, 그에게 최선이 아니었겠어요?
다윗도 최고 전성기에서 그가 범죄하고 추락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합니다.
시51편 전부가 다윗의 회개 내용이죠.
그 중에서 11절과 17절입니다.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재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소서'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하나님, 내 인생이 나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 가치를 하락시키시고 추락시키신다 할지라도,
나를 완전히 아웃시키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 간구를 한 거예요.
그런데 사올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최선이라고 생각했는가요?
내일 왕좌에서 내가 끌려나가게 될지라도,
오늘 백성 앞에서는 내 체면을 유지하고 싶다... 이거예요.
여러분, 이게 어떻게 최선의 선택입니까?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보다, 자신을 높이는 명예가 더 중요했던 사람... 그가 사울이었어요.
과연 우리는 어떤가요? 제가 오늘 이 사울의 굴욕적인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이 세계사 공부할 때 많이 들었던 사건 '카노사의 굴욕' 이게 떠올랐어요.
여러분, 이 장면을 보면 계절이 겨울이죠.
이 작품 속의 사건이 일어난 게 1077년 1월 28일, 한겨울이었어요.
한겨울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한겨울에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빌었던 장면입니다.
'황제냐 교황이냐? 누가 더 옳으냐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파문이라는 것 때문에 그랬는데, 파문 (엑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뭐냐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격을 정지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교단에서 출교를 시키는 겁니다.
이게 왜 무서운 거냐면, 그러면 왕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명분이 사라지게 되고,
그리고 나면 그가 통치하는 나라는, '하나님이 지키시는 나라'라는 개념에서 박탈되는 거예요.
이게 무서운 것은 중세 유럽은 기독교 국가였잖아요.
그래서 '파문'은 가장 중요한 대의명분을 상실하는 것이었어요.
오늘날도 정치가, 힘의 논리로만 가는 것 같지만, 대의명분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카노사에서 추운 겨울, 교황 앞에 3일간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었던
하인리히 4세의 태도가 진심이었을까요?
'내가 정말 교회 공동체에서 탈락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이게 진심이었을까요?
진심이 아니었죠. 그래서 그는 나중에 힘을 키워서,
자기 명분을 회복하기를 원했서, 로마로 진격을 해서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을 굴복시킵니다.
힘의 논리로 세상이 다 돌아가고 있어요.
한국교회도, 대한민국도, 온 세계도, 오늘날 보면
은혜의 원리는 사라지고, 힘의 논리만 남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교회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여전히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시는 시소를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시소위에 우리 모두가 올라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높이시고 낮추시는 그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울처럼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는데, 자기 체면 세우고, 자기 앞가림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일시적인 것이죠. 근본적인 대책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인생이 상승곡선을 타는지,
아니면 하강곡선을 타고 있는지... 여러분의 삶에서 느낄 때가 있을 겁니다.
'내가 요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는구나.. 연봉이 오르는구나.. 지위가 오르는구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에게 결집하는구나..' 이런 때가 있고,
반대로 사람들이 내게서 흩어지고. 내가 무너지고, 추락하고, 하락할 때가 있어요.
자신의 잘못 때문에, 또는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또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시는 섭리 때문에...
여러분 내 인생이 일시적으로 하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지렛대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다시 반등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다시 회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인생의 오르막길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락이 두려워서, 세상 논리, 힘의 논리를 붙잡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면,
여러분 '하락'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탈락'이 두려운 것이라고요.
▲제가 목회사역을 해오면서 이런 경험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희가 처음에 교회를 시작 하고, 분당 새마을연수원에서 한번 쫓겨났었잖아요.
성도님들이 다들 너무 걱정을 하는데, 저는 너무너무 평안한 거예요.
제가 평안한 이유는 '그냥 하나님이 길거리에 나 앉게 하시면 나 앉자.
그래서이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시면, 다시 (예배당을) 회복시켜 주시겠지'
그런데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걸 원하지 않고,
불쌍한 처지, 불쌍한 지경에 이르는 걸 원하지 않아서,
세상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을 쓰겠냐고요?
가서 싸우고.. 돈으로, 인맥 등 인간적인 방법으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겠냐고요?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은 거예요.
그냥 깨어지고 추락해야 될 때가 있어요.
그때는 깨어지고 추락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하락'이지, '탈락'은 아니니까요.
지난 주 중에, 어떤 분의 가정에, 굉장히 힘든 사건이 터진 거예요.
그분이 너무너무 불안해하시더라고요. 왜 불안해할까요?
가정이 바싹 깨질까 봐... 그리고 그 한 분의 파편이, 가족 모두에게 떨어져서,
그 파편이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운 거예요.
근데 제가 볼 때는 그냥 깨져야 돼요. 그냥 바싹 깨져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바싹 깨져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돼요.
잘못이 있다면, 회개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언제까지 인생을 임기응변으로 살겠는가요?
근본적인 회개가 필요하다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엎드려야 되지 않겠는가요?
인생에 잠시 '하락'하고 '추락'하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기준에서 '탈락'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너의 인생에 상관하지 않겠다.' *사울
그러면 아무런 소망이 없는 거잖아요.
저와 여러분은, 다시 일어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주1) 우리가 구분을 해야 될 게 있어요. 반역과 불순종이에요.
반역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거예요. 작심하고...
이건 악한 거예요. 그게 우리의 옛 삶이에요. 이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에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죄를 짓죠.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고 죄를 지어요.
그런데 우리는 달라요. 그런 반역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불순종'이에요.
자, 반역과 불순종의 차이를 아시겠죠?
반역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예요. 노골적인 반항!
그러니까 죄를 지을 때, 옛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 않았을 때 생각을 해보세요.
옛날에는 하나님이란 존재가 나에게 없었어요.
죄를 지을 때 내가 하나님이 되는 거에요.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죄를 지을 때 내가 마음대로 하잖아요. 그건 내가 하나님인 거예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나에겐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반역이에요. 이 반역은 절망적인 상태예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반역할 수 없어요.
근데 불순종해요.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아요.
우리가 죄를 이제 더 이상 갈망하지 않아요.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늘 죄를 묵상합니까?
죄에 대한 음모와 계획을 꿈꿉니까? 그러지 않아요.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잘 안 되는 거예요.
아직 말씀을 따라 살만한 신앙을 갖추지 못한 거죠. 마음은 원해요...
불순종하면,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