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07 「신약개론 2강 – 신약의 흐름과 구조」 - YouTube
◈신약의 흐름과 구조 계1:1~3 2016.09.07. 신약개론 2강
오늘 우리가 읽은 계1:1~3절 말씀에 보면 "복 있는 자가 어떤 자인가?" 하는 말씀이 나오죠.
3절에 보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읽고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독을 통해서 집에서 읽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읽는 거 하셨고, 그 다음에 듣는 거 하러 오셨습니다. 그 다음에 지키는 걸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읽고,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읽고, 듣고, 지킬 때, 그때 하나님께서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1:3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또 이 자리에서 듣고 나누는 말씀,
그 말씀을 잘 지켜 행하셔서, 복된 인생들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1강 복습
지난주에 공부한 내용을, 집에서 가까이 계신 분들에게 한번 복습해 보셨습니까?
가르쳐 보셨습니까? 내가 그냥 듣고 끝내면, 내 것이 되지 않고, 그냥 귀에만 남을 뿐입니다.
내 것이 되려면, 들은 내용을 자꾸 옆 사람에게 말하셔야 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이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졌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남유다를 망하게 했던 나라가 바벨론,
바벨론 치세가 70~80년이 지나가고 나서,
바벨론 이후에 세계 패권을 장악했던 나라는 페르시아, 성경에는 바사.
페르시아 시대가 중간쯤 가면 없어져 버립니다.
페르시아 중반 이후부터는 성경 이야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암흑기로 흘러가죠.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세계사에 아주 위대한 족적을 남긴 왕이 누굽니까?
알렉산더죠.
알렉산더 사후에 알렉산더의 부하들 네 장군들이 패권을 나누어 가졌는데,
그 중에 프톨레미 (프톨레마이오스) 라는 사람이 애굽과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약 100년 정도 가나안을 통치하죠.
그 후에는 시리아의 셀류쿠스가 또 34년 정도 가나안을 통치하죠.
그래서 이 시기에 (신구약 중간기에)
그리스 헬라 문화가 약 164년 정도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후에 로마제국으로 패권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헬라 문화는 로마 제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온 제국 내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신약성경의 무대가 되는 가나안 땅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헬라화, 그리스화가 되어서, 그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스 문화는 뭐가 특징이라고 했습니까?
첫째, 다신교
두 번째, 인간중심이라고 했죠.
인간중심이라는 건 이성중심이고, 그리스 철학 중에서 특별히 이원론이 당시 유행했습니다.
이원론의 철학은 항상 하늘과 이 땅의 세계가 분리되어 있고,
영은 고결한데, 육은 더럽다고 믿었죠.
그로 인해서 생겨난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 시대 때, 또한 신약 시대 때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정치적인 상황이 아주 복잡했는데
그 복잡한 정치 상황의 제일 꼭대기에 있었던 나라는 로마였고,
로마에게 가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통치권을 사오다시피 해서,
로마와 내통한 사람이 헤롯이라고 했죠.
헤롯은 원래 안티파터였는데, 이름을 바꿔서 헤롯대왕으로 바꿨습니다. Herod the great
에돔 사람이었고, 원래 에돔 지역을 통치하다가, 로마에 협조한 대가로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로마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후대가 쭈욱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돼죠.
그런데 로마가 만만하게 헤롯에게 그 통치권을 다 내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을 파견했죠. 그러니 통치체계가 복잡했습니다.
그 총독과 헤롯 대왕에게 빌붙어서
유대 자치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살아갔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죠.
사두개인들, 즉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런 상황에 예수님이 오셔서, 신약의 문이 열렸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 복습이었고요.
이제 오늘은 신약의 흐름과 구조에 대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본론 / <신약의 흐름과 구조>
사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고 Four Gospels
공관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죠. Synoptic Gospels syn(같은)+optic(눈)
'공관'은 공통된 관점이고,
공관복음은 공통된 관점으로 기록한 복음서다.. 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관점이 좀 다릅니다.
그럼 요한복음은 누구의 관점이냐? 완전히 헬라인의 관점입니다.
이방인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고 기록했습니다.
아무튼 이 구분은, 신학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 들어가기 전에는 구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의 관점이, 나머지 공관복음과 확연히 다른 것에 동의합니다.
각 복음서의 특징이 있겠죠?
▲저는 옛날에 대학생 때 성경을 읽을 때, '왜 똑같은 얘기를 네 번이나 썼을까?'
책 부피가 늘어나면, 읽는 사람도 힘들잖아요.
마태복음에 다 있는데, 근데 마가복음에 예수님 수난이 또 나와요.
왜 똑같은 얘기를 두 번,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반복했을까? 그걸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사복음서가 다 이렇게 기록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했을까?'
무슨 말이냐면, 집에 식구들이 3식구, 4식구, 5식구가 사는데, 똑같은 드라마를 보잖아요.
그런데 보는 관점이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 다릅니다.
똑같은 연속극인데, 아버지는.. 극 중의 저 남자가 불쌍하다고 얘기하고,
엄마는.. 그 남자의 아내 편을 듭니다. '저 남자가 죽일 놈이라고'
자녀들은.. 그 드라마에 큰 흥미를 못 느낍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저기에 소품이 뭐가 예쁘고, 저 옷은 어디에서 샀을까?' 이런 데 관심이 있어요.
사람들이 다 보는 관점이 달라요.
그리고 똑같은 정치적 상황을 보더라도, 지금 우리나라가 정치적 복잡한 문제들이 있잖아요.
똑같은 정치적 문제를 보더라도, 지역별로 다르고, 세대별로 다르고, 성별로 다르고,
또 소득별로 다르고... 그래서 다 다릅니다. 십인십색입니다. 전부 다 얼마나 다른지요.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 한 분을 보고, 사람들이 다 똑같이 볼까요?
예수님의 행하신 사건 하나를 보고... 사람들의 시각이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행했잖아요.
그런데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 사건은 똑같이 다 4번 나옵니다.
중요하니까 다 나오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강조하는 건 각자 다릅니다.
마태가 그 현장에 있었잖아요. 요한도 있었습니다.
또 마가복음은, 마가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베드로 복음'이에요.
베드로가 학식이 조금 짧아서인지, 베드로가 말을 해 주고, 마가가 기록했어요.
아마 베드로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때는 필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마가의 도움을 받았죠.
그러니까 마가복음은 '베드로복음'이라고 보면 됩니다.
누가복음은 누가 라는 의사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로 쓴 게 누가복음이에요.
아무튼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마다 전부 다 똑같은 오병이어 사건이라도
보는 관점이 다 다른 거예요. *사복음서 대조표 (강추)
그래서 마14:13절 이하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병행구절을 찾아서, 같이 비교해서 보시면
훨씬 더 성경공부를 깊이있게 할 수 있습니다.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지...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네 복음서의 관점 https://onlyj777.tistory.com/357
사복음서가 이렇게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독자인 우리들에게 또 다른 묘미를 주고, 또 다른 의미를 주는 거죠.
교단도 마찬가지예요. 안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가끔 하죠.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싸웁니까? 왜 그렇게 나뉩니까?
한 하나님인데 왜 장로교가, 감리교, 침례교 등이 따로 있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복음서가 네 권인 이유를 보면서,
'그렇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 교단과 여러 교파들을 나눠놓은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우리는 다 기질이 다릅니다. 장로교인들은 장로교인 기질이 있어요. 시끄러운 거 싫어해요.
막 시끄럽고 이런 거를 정신없어 해요.
어디 가서 막 요란하게 찬양하면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또 미국에 흑인들 모이는 교회에 가 보면, 이건 마치 이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흑인들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처럼, 춤추고, 박수치며, 고성 지르며 예배합니다.
그들이 장로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면, 주무시다가 나옵니다. 이건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각자 다 자기 기질이 있어요. 또 자기 성향이 있고...
그래서 장로교도 필요하고, 감리교도 필요하고. 침례교, 오순절 교단도 다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입체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복음서가 네 개라는 건 우리에게 대단한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굉장한 복이다... 라는 거예요.
마태복음에 있는 게 마가복음에 없고요. 요한복음에만 있는 게 누가복음에 없고 그래요.
마가(베드로)가 볼 때는 이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그 관점으로 썼어요.
또 이건 누가가 볼 때는 이게 중요한데, 마태복음에는 없어요.
집에도 엄마, 아빠, 아들, 딸, 할아버지... 이렇게 골고루 다 있는 집이 훨씬 더 배울 게 많습니다.
간혹 모두 여자만, 모두 남자만 이렇게 사는 집이 있는데, 그곳도 가정이지만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있을수록, 서로 서로에게 배우는 점이 많다는 거죠.
(요즘 노인들은 핸드폰 쓰는 법을 몰라서, 자녀나 손주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자녀나 손주가 없는 노인들은, 큰 낭패를 겪고 있죠)
▲중간 정리 하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쓴 복음서예요.
유대인들이 가장 기다린 분이 누굴까요? 메시아죠. 당시 로마의 압재 가운데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메시아가 삼중직이잖아요. 왕, 제사장, 선지자.
그 중에 우리 유대인들이 가장 기다린 직책이 뭘까요? 제사장, 선지자가 아니라 왕이예요.
그래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누구를 위한 복음서일까요? 베드로가 구술했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부사가 있습니다. '즉시, 곧, immediately'
베드로가 성격이 급해서 '즉시, 곧' 이런 말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리고 설명을 길게 못해요. 베드로가 설명이 긴 걸 싫어합니다.
마가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어디입니까? 10:45절 외우시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은 정말 가난하고 힘들고 약한 자들을 위한 복음서예요.
베드로의 출신이 그랬고요. 시골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잖아요.
가난한 자를 섬기려고 오신 예수님,
가장 비천한 나같이 못 배운 자, 나같이 가난하고, 나같이 못 가진 자를
예수께서 발 씻어주신 거죠. 베드로는 그게 고마운 거예요.
그래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제자인 우리가 본받아야될 모습이기도 하죠.
누가복음은, 그래서 예수님의 가장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잉태되었고,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성장하셨고, 이런 일을 겪었고,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와 더불어 십자가 고난도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누가의 직업이 의사니까, 의사들은 기승전결이 확실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처음 신앙생활하는 분(기신자)이 읽기에 가장 좋은 복음서는 누가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또 다르죠. 요한복음은 그리스 사람들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데 아주 예민하냐 하면 시간에 아주 예민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가는 순서가 굉장히 예민해요.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요한복음을 볼 때,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볼 겁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를 시간 순서대로 쭉 정리를 했어요.
다른 복음서는 시간이 뒤죽박죽이에요. 생각나는 대로 막 썼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굉장히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썼습니다.
이렇게 각 복음서에 특징들이 있다 하는 걸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쓴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라고 했죠.
그러면 다른 복음서들은 마가복음이 나오고 난 뒤에 썼다는 얘기죠.
그럼 마가복음을 참고했을거예요.
거기에 있는 것도 참고하고, 없는 건 보태기도 하고 그랬겠죠.
◑사도행전과 바울의 13가지 서신서를 보겠습니다.
바울서신이 총 몇 권이죠.? 13권이에요. 신약 성경이 27권인데 그 중에 거의 절반,
13권을 바울이 썼습니다.
근데 그 중에 사도행전을 보면 1차전도여행, 2차전도여행, 3차전도여행, 로마행
그렇게 여러 번 전도했습니다.
근데 전도하러 가면서 다니면서 군데군데 편지를 써서 막 붙였어요. 그게 서신서예요.
예를 들어 바울은 1차 전도여행할 때는 편지를 한 통도 안 썼어요.
1차 전도여행할 때 다녔던 동네가 있잖아요.
근데 2차 전도여행할 때, 거기 가서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1차 전도여행 할 때 갔던 곳이 이단에 빠졌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화가 날 거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그게 갈라디아서예요.
바울이 화가 나서 2차전도여행 중에, 그 자리에서 갈라디아에 편지를 써서 사람 보냈습니다.
갈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같이 속히 떠났다'는 말은, 바울이 1차 전도행할 때 갈라디아에 갔거든요.
갈라디아의 위치는, 지금 터기 중앙 산악지대입니다.
사도행전 상 명칭은 (갈라디아는 지역 명칭이고) 그곳 도시 명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죠.
'다른 복음'은, 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도 받아야 된다. 율법의 의식법, 제사법도 따라야
된다'고, 아마 유대인 순회교사들이 와서 가르친 모양이에요.
2차전도여행 중에 쓴 서신으로 또 데살로니가전후서 가 있습니다.
바울이 너무 속히 데살로니가를 떠났기 때문에, 그가 후에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해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다고 봅니다.
지금 요지는 2차전도여행중에,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신약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될까요?
사도행전 따로 읽고, 갈라디아서를 또 따로 읽어야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1차 전도여행(13~14장)을 보고, 2차 전도여행(15~18장)을 보다가,
갈라디아서로 와서, 사도행전과 함께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그렇게 볼 겁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같이 읽는 거죠.
▲그 후에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하다가,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를 썼어요.
바울이 참 위대한 사람이에요. 3차전도여행을 하다가 로마서를 썼다니까요.
그 길고 그 교리적으로 복잡한 로마서를!
그런데 그때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아직 로마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 로마서를 썼어요. '내가 앞으로 로마에 가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로마서를 쓴 내용들이 나오는데
행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이 여기 에베소에서 로마 방문 전도에 대한 꿈을 꿔요.
그리고 나서 로마서를 바로 쓴다니까요.
그리고 로마에 뵈뵈 자매를 시켜서 보내요.
롬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이 말은, 뵈뵈가 로마서를 직접 들고, 로마 교회에 가서 전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을 읽다가 로마서로 가야 되겠죠.
사도행전과 로마서 등 바울서신과 함께 연결해서 읽으면,
훨씬 이해가 입체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과 로마서를 각각 따로 보면, 이게 뭐가 연결이 잘 안 되잖아요.
(성경 66권의 순서가 장르 별로 묶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로마서의 내용은 뭘까요?
그렇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연결하지 않으면,
로마서는 로마서대로 따로 놀고, 사도행전은 사도행전대로 따로 놀아요.
그러면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또 바울서신 중에 <옥중서신>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기록한 거죠.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4권입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어디에 나와요?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해서 로마에 가잖아요.
바울이 로마로 가서, 재판을 받기 전에, 가택연금을 당하거든요. 집에 갇혀서 못 나와요.
나오더라도 군사들이 바울을 데리고 돌아다니고 다시 들어가야 되었죠.
누가 바울을 만나러 오면 '이름 적고, 누가 만나고 갔음' 다 적어야 되죠. 그게 가택연금이에요.
행28:30절에 '바울이 거기서 온 이태 동안 있었다' 했는데, 만 2년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28:30~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때 기록한 서신이 옥중서신 4권이에요.
이때 바울이 갇혀가지고 어디 꼼짝을 못하고, 자유롭게 못 나가고 못 다니니까,
사람들이 바울에게 찾아왔어요. 면회를 온 것이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에바브로디도 를 통해 선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빌4:18 '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이 그를 통해서, 그동안 궁금했던 빌립보교회 소식을 다 들었죠.
또 그를 통해 보내준 선물(헌금)도 너무 고마우니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빌립보교회에 할 권면의 말도 있으니까,
편지를 하나 써준 거예요. 그게 빌립보서에요.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여성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었나봐요. 유오디아와 순두게
교회에 여성 성도들이 많으니까 화목하고 좋은데, 안 좋을 때는 서로 얼굴도 안 보잖아요.
행16장에 보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옷감장수 루디아를 통해 세웠잖아요.
그래서인지 그때부터 여성 성도들이 많아졌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 교회는 말이 많은 교회였나봐요.
빌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렇게 편지로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해요.
빌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바울의 서신서를 같이 끼워 넣어서 함께 읽어가면 좋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이후에 기록된 바울서신은 디모데전서, 후서, 디도서 입니다.
이건 <목회서신>이에요. 디도와 디모데는 바울의 목회자 후배들이잖아요.
디도 그리고 디모데에게, 목회적인 권면을 써서 보낸 편지가 목회서신이에요.
◑그리고 <일반 서신>은 그냥 뚝 떨어져 있죠. *공동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후서, 요한1, 2, 3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 중에서 우리가 좀 중요하게 봐야 되는 게 있어요.
뭐가 중요하냐? 야고보서가 중요하고, 유다서도 중요합니다.
야고보서가 왜 중요할까요? 행함을 강조한 책이라서 중요할까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에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쓴 편지입니다.
우리는 기억되는 게, 성경에 나와 있는 건, 예수님의 공생애 3년만 나와 있잖아요.
그런데 야고보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30년 세월을 거의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야고보가 한 말에는, 예수님의 삶이 묻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말이죠.
야고보서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 교회가 초대교회인데
그 교회의 지도자가 베드로, 요한, 야고보(예수님의 동생)가 3인방이에요.
이 세 분 중에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잖아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누가 가장 영향력이 있었을까요?
사실 베드로가 설교도 제일 많이 했어요. 요한도 역사를 많이 일으켰어요.
하지만 야고보가 한마디 하는 그 말의 권위가 어땠을 것 같아요?
아주 힘이 있죠. 권위가 있었죠. 야고보가 예수님 동생이니까요!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듣고 싶으면
야고보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은 옛날에 어땠어요?'하고 물어봤을 거 아니에요.
약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아래 말이 참 권세가 있어요.
'흩어져 있는 열두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아무나 이런 표현을 쓸 수 없거든요.
바울서신을 한번 보세요. 바울서신 13권 중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쓴 서신이 있는지요? (없어요)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게만 편지를 썼어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로마 교회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거든요.
그런데 야고보 장로는, 편지 한 번 쓰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서신이 다 가는 거죠. 회람되는 거죠.
온 열두 지파 유대인들에게 다 편지가 전달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을 (베드로 사도가 아니라) 야고보 장로로 봐요.
그 정도로 동생 야고보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행15장에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공의회가 열리는데,
그때 야고보가 결론적인 발언을 할 정도로, 그는 당시에 큰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발언이 곧 공의회의 '결론'이었습니다. 행15:13~21
그래서 우리가 야고보서를 함부로 보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자세히 볼 겁니다.
그 뒤에 유다서도 마찬가지에요. 한 장짜리 복음이지만, 저자 유다도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유다서는 이단에 대한 분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바울서신 13권 중에 10권은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끼워서 우리가 읽고,
나머지 3권(목회서신)은, 사도행전 이후에 읽는다... 그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이렇게 저렇게 대조해서, 좀 더 풍성하게 읽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치는 말
복음서를 읽으실 때 항상 포인트를 가지고 읽어야 됩니다.
포인트는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포인트!
항상 복음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왜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는가?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고 이런 행동을 하셨는가?'
이렇게 항상 예수님 중심으로 읽어내셔야 됩니다.
그리고 적용을 하실 때는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또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닮아서 살 것인가?'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예를 들어 마8장을 보면, 1절에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만져주시는 장면이 나오죠.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나병 환자는 손대는 게 아니에요.
율법에 '손대지 말라' 그랬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체로 거룩이고 정결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손대면 나병도 떠나가요.
예수님이 손대면 죽은 자가 살아나요.
또 마8:15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알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예수님은 열병 환자도 막 만져요.
전염될 걸, 내가 옮을 걸 생각하지 않고, 열병 환자도 손 잡아 주셨어요.
'예수님은 불쌍한 병자들, 사람들에게 손 대시는 주님이시다. 터치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여기서 마8장을 읽고 내가 묵상할 수 있는 예수님은 누구시다?
'손 대서 만져주시는 예수님'
그러면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
내가 아파요. 내 마음이 아프면 내 마음을 만져주시는 예수님!
내 몸이 아프다 그러면, 내 몸을 만져주시고 치료해주시는 예수님!
사람들은 나를 손 잡아주지 않고, 사람들은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아도,
우리 주님은 내 마음도 위로해 주시고, 터치해 주시고, 나를 손잡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