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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3장 열면 닫을 자가 없고

LNCK 2025. 6. 2. 10:3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교회론

열면 닫을 자가 없고 | 계 3:7-13  | 주일예배 | 25.4.27 - YouTube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계3:7~13                2025.04.27. 

오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만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참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겠습니다.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이 보시기에, 비난받을 일이 없고 칭찬만 하신 교회니까 
대단한 교회잖아요. 헬라어로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빌라델비아는 오래된 고대 도시는 아니고, 새로운 신흥 도시입니다. 활력이 있죠. 
로마 그리스 문명의 마지막 요새였던 동쪽 국경에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또 빌라델비아에는 대평원이 있었고,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포도 재배를 많이 해서 포도주 생산이 많았어요.
그래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했습니다. 

온천수가 많이 나와가지고, 이 지역에 치유의 목적으로 방문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근데 지진이 매우 잦아서, 거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던 도시가 빌라델비아입니다. 

오늘 빌라델비아의 교회에 세 가지 키워드가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 열린문, 성전의 기둥입니다.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다윗의 열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7절에 먼저 소개하는데 
그리스도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는 이사야 22:22절에 나옵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때에 엘리야김이라는 궁내 대신 오늘로 얘기하면 비서관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당시엔 누구나 막바로 왕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엘리야김을 통해서 왕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엘리야김이 왕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갖고 있었던 거죠. 

당시에 열쇠는, 오늘과 같이 작은 열쇠가 아니고, 굉장히 큰, 나무로 만들어진 열쇠였습니다. 

이사야 22:22절을 보면 '열쇠를 어깨에 두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 당시 그렇게 열쇠가 큰 것이었습니다. 

'열쇠'라고 하면, 우리가 금방 떠오르는 게 뭐냐면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열쇠'는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가지신 이 권세는, 구원과 심판에 대한 권세죠. 
그래서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이, 그분의 손에 있고 
또 우리의 구원이 그분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회당에, 처음에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회당문을 닫아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의 출입을 막아버렸어요. 그래서 회당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배경으로 이 '다윗의 열쇠'를 얘기하는 거죠. 

'내가 여는 문은,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로마 당국이 닫을 수 없다.'  
아무리 대적자들이 방해를 해도, 주님이 열어놓으신 그 구원의 문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천국으로 가는, 또는 지옥으로 가는 그 문의 열쇠는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주님이 판단하시고 결정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생사화복은 그분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요14:6절이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이라' 
오직 그분만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흥망성쇠도, 나라의 운명도, 권력자의 위치 이동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삼상2:6절을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러분 이 노래는 한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이 시작될 때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 한나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반전을 일으키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나, 그 한 불임의 여인을 통해, 사무엘이라는 한 인물이 태어나고, 역사를 바꿔놓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반전을 일으키시는 분! 

여러분 씨름에서 막판 뒤집기라는 게 있죠. 거의 질 것 같이 밑에 있는데 뒤집어 엎는 거예요. 
이게 실험의 묘미입니다. 막판 뒤집기! 근데 이것의 전문은 하나님이십니다. 
상황을 뒤집어 놓으시는 분,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의 운명을 역전시켜 버리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그래서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더 빛이 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주권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 생명과 죽음... 모든 게 하나님께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게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라는 뜻이죠.  

그래서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나 주어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살리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주어가 여호와예요.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무엇에 눈을 떠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행하심, 하나님의 그 의지, 그 하나님의 열심, 그 하나님의 역사의 두드라짐을 
보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겸손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 달려있음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예상을 벗어나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통하여 
있는 자들을 패하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답답한 상황 속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뭘까요? 
그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죠. 
그 주권을 믿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언제나 기다림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여러분, 기다리는 것이 빠른 길이에요. 때를 기다리는 게 믿음이에요. 
기다릴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주님의 때가 되면 주님의 권세로 
본물 터지듯이 한꺼번에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다윗의 열쇠', 그 열쇠는 주님이 쥐고 계세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눈치를 보고, 그 절대 권세를 의지하고,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속에 역사와 모든 일이 돌아가고 있음을 믿고 
잠잠히 그분의 행하신 일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열린 문'
자 주님이 주님이 문을 열어 놓으셨어요. 
이 '열린 문'이 뭘까요? 다양한 의미로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만, 
이 '열린 문'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회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 '문'은 구체적으로 성경 속에서 여러 곳곳에 나오지만 
요10:9절을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리스도가 '문'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길이 없어요. 
언제나 구원을 방해하는 이리 떼들이 있는데, 
성도들의 영혼을 노리고 있다는 거죠. 

'사단의 회당'(3:9)이 그 당시 빌라델비아에 있었는데, 일반 회당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기독교인들을 내쫓았으니... 마귀 역사가 거기에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주님은 당신의 구원받을 백성들을 향하여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그 백성들이 그 열어놓은 문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면 
그 구원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면 어디에서 역사가 일어나냐면, 
'하나님이 문을 어디로 열어놓으셨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전도하려고 하면 힘들어요. 
아무리 해도, 아무리 짜장면 짬뽕을 사줘도 안 와요. 

근데 어떤 분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졌는데, 이번 주에 교회에 따라오겠대요. 
신기한 일이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은 10년 20년 공을 들여도 꼼짝도 안하는데, 
그동안 사준 것만 해도 엄청난데, 그래도 꼼짝도 안하는데 
어떤 분은 그냥 따라오는 분이 있어요. 자석에 이끌려 따라오는 것처럼...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열린 문'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문을 열어놓으신 거죠. 거기로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행16:7~10절에 이런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지라' 성령이 그 길을 막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길이 막혀 당황하던 중에 '드로아의 환상'(열린 문)을 본 겁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길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16:10

여러분 사도바울이 전도하면서, 끊임없이 아시아 쪽(남쪽)로 이동하고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문을 막으시는 거예요. 

아무리 애를 써도 못 가게 하시는 거예요. 문을 닫으신 거예요. 
아시아의 문을 닫으시고 어디로 문을 여신 거예요? 마게도냐로, 유럽으로 문을 여셨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문을 열어 놓으신 길로 가야 되는 거예요. 
때로는 그 가는 길이 험난하다 할지라도, 그 길로 가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에 요나를 보세요. 니느웨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문을 다 열어놓으셨어요. 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요나가 다시스로 갑니다. 다시스는 하나님의 문을 열어놓으신 게 아니에요. 
거기는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곳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물고기 배 속에 집어넣으셨다가, 다시 그를 끄집어내시고 
니느웨로 반강제로 보내시죠. 거기 가서, 이 선지자가 사실 신통찮은 선지자인데요. 
마지못해 그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근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고, 그 니느웨 도시에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성도는 이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문을 어디에 열어놓으셨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문을 열어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하는 거 아닙니다. 
주님이 열어놓으신 문으로 가는 거예요. 

그 문으로 가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또 충성되고 신실한 자들에게, 주님은 문을 열어놓으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그 길, 그 문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주님이 열어놓으신 길, '열린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초청하실 때는, 이미 문이 열린 겁니다. 
어쩌면 오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을 여시고, 
오늘 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있는, 열린 문 시대예요. 

그런데 어느 날 이 문이 닫힐 때는, 심판의 날이 온다는 거죠.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인생의 문을 여시고,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일에 쓰임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작은 역량을 가졌으나 칭찬 받은 교회'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칭찬을 오늘 하셨는데 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규모 면이나 역량이 크지 않았던 교회예요. 
여러분 2000년 전 1세기의 교회들은, 대부분 열악한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외적으로 교회가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건물이 번듯한 교회가 있었겠습니까? 

근데 그 교회를, 주님이 보시기에는 '너희들의 교회가 능력은 적은데 
너희들의 교회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다. 외적으로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지만,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니다...' 이렇게 칭찬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숫자가 그 교회의 수준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교회는 얼마 안 돼요.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놀라워요. 작년 말에도 제가 그 교회에 한번 갔다 왔어요. 
그 교회는 워싱턴 DC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백악관하고 멀지 않아요. 

근데 그 워싱턴 DC의 분위기상, 교회에 공무원들도 많이 나오죠. 
근데 우리로 같으면 '사랑방'(구역) 같은 모임에서, 
몇 사람이 함께 홈리스 피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의논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어느 날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임대 아파트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까지 감당하는데, 
제가 이번에 가서 보니까 어마어마해요. 

겨우 몇 사람... 사랑방 모임의 몇 사람이 의논하고 기도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교회가 그걸 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랑방에서 그 지역에 눈에 띄는 연약한 사람을 
도와주고자 의논을 하면서... 그 일을 만들어낸 거예요. 

그 외에도 24시간 운영하는 병원,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회복 프로그램,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사역, 어마어마해요. 

그냥 봉사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봉사가 가능하게 하려면 
깊은 영성이 뒷받침해 줘야 되죠. 그래서 영성과 사역의 균형을 갖추려고 애를 쓰는, 
작지만 강한 교회였어요. 그래서 지금 미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많다고 다 되는 건 아니죠. 교인 수만으로 교회를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토인비가 얘기했던 것처럼 창조적 소수 Creavtive Minority 가 중요한 것처럼 
언제나 성경은 미약하고 작은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많기만 하면 도리어 위험한 증상이죠. 
몸집은 큰데 건강하지 않으면, 그것을 우리는 비만이라고 그러죠. 
숫자만 늘어난 교회는 비만증에 걸린 교회라고 볼 수가 있죠. 

비만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몸집이 클수록 행동은 둔해집니다.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어져요. 이렇게 그냥 덩치만 큰 교회는 굉장히 위험한 교회죠. 

▲교회는 메타 처치가 있고, 메가 처치가 있습니다. Meta Church, Mega Church 
메가 처치는 그냥 덩치가 큰, 교인 숫자가 많은 교회를 메가 처치라고 합니다. 
세상은 메가를 좋아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메타예요. 메타는 변화 change 를 의미합니다. 
끊임없이 본질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질적인 변화를 추구해가는 게 메타 처치인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물량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수보다 본질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 수많은 블레셋의 군사들과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즐비한 그 가운데 
성경은 유독 딱 한 어린 소년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소년 다윗입니다. 

전선은 화려한 무기와 갑옷을 입은 '별들의 전쟁'이었는데, 그런데 다 허수예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는 거예요. 소년 다윗이,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물멧돌 하나로, 
그것으로 전세를 바꾸시고, 뒤집기 하시는 하나님!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은 '역량'으로 바꾸면, 더 이해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소수의 제자들에게 주목하셨습니다. 군중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모으신 분이 아닙니다. 군중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왜요? 
군중에는 허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언제나 12명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이사야서 60:22절에 '그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겠고' 
제대로 된 한 사람이 천명 분을 감당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그런 사람이 천명이 모이면 어떻게 될까요? 역사를 뒤집어 놓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사60:22b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역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능력은 세상적인 힘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속적인 힘을 탐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날 때부터 앉아 있는 장애인을 향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3:6

그처럼 초대교회는 은과 금이 없었어요. 
은과 금은 도리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된다는 거예요. 

교회 역사를 보면, 은과 금을 많이 가지면서 영적인 권세가 쇠퇴해버렸어요. 
교회는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이게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입니다. 

아무리 작아 보여도, 그 안에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힘을 가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보기에는 매우 미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 이름의 능력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할 때가 있어요. 
우리는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놓쳐버리고, 
내가 뭔가 대단한 걸 가져야, 하나님이 역사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오병이어를 보세요. 
하나님의 손에 올려진 그 오병이어에 위대한 역사가 있는 거예요. 

작은 것을 통하여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다윗의 손에 들려진 물맷돌이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모세의 손에 지팡이만으로 충분해요. 그것으로 바로를 무릎 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 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있는 그대로 우리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내 작은 능력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지기만 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여러분 요한계시록의 핵심 중에 하나가 '예배'예요. 
그런데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힘없는, 아무런 능력도, 세상의 힘도 가지고 있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서 끌려다니는 그 어린 양, 그래서 마침내 도살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라... 이게 요한계시록의 핵심이에요. 

요한계시록에는 또 뭐가 나옵니까? 큰 용이 나옵니다. 
큰 용이 나오고, 바벨론이 나와요. 이건 세속의 힘을 말하는 겁니다. 
세상의 권력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는 세상의 힘을 숭배했어요. 
그건 용의 길을 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할 때 대단한 것을 이루려고 하지 마십시오. 허황된 꿈을 꾸지 마세요. 
내가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고 성공하면, 하나님이 나를 쓰실 거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약한 자를 들어, 미련한 자를 들어, 비천한 자를 들어 쓰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줄로 믿습니다.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여러분, 믿음의 길에 시험이 닥칩니다. 시험이 없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이 모양, 저 모양의 시험이 계속 다가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근데 시험이 올 때,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딱 하나예요. 인내인 것입니다. 

약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러분 시험은 참는 것, 견디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무슨 다른 돌파구가 있는 게 아니고, 시험은 참는 거예요.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험은 참는 거예요. 견뎌내는 거요. 
시험이 올 때는요. 그냥 버티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시험이 오면, 그냥 견디면서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겁니다. 

근데 이 시험은,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테스트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자인지 아닌지, 가짜 신자인지 진짜 신자인지를 
구분해 내는 게 시험이에요. 

누가 이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가요? 
여러분 '인내'라는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가져야 될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당장은 아무런 답이 없지만, 견뎌내며 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에요.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인내하면... 주님이 믿음의 승리를 주신다는 거죠.
나 혼자서는 감당할 힘이 없어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거죠.
'때가 되면' 주님이 시험의 환경을 거두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거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때가 올 때까지 '인내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데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해요.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말은 시험이 영원 무궁 계속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끝이 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거죠. 

여러분, 시련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의심이 찾아와요.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건가?'  
이 시련의 순간에 나 홀로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칫 잘못하면 주를 멀어질 수가 있어요. 

근데 주님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가진 게' 뭘까요?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이 악한 세상, 우리가 살고 있고 불법이 넘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하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닥쳐 옵니까? 

여러분 그런 시험이 닥쳐 올 때, 조금도 여러분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올 게 왔구나' 이렇게 하시면 돼요. 

여러분 결혼 생활만 해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부부가 같이 한평생 사이좋게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매일 전쟁터가 되죠. 

그래서 결혼생활도 '인내'를 기도하셔야 됩니다. 
한 가정을 건강하게 지켜내려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인내하셔야 돼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바울은 사랑에 대해 권면 하면서 
제일 먼저 무슨 단어를 언급합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제일 먼저 얘기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볼 때... 가정에서 '오래 참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고전13:7절 마지막을 보면 이렇게 나왔어요. 마지막 사랑에 대한 정의예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약1: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가 끝날 날이 와요. 그런데 그 인내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가장 완성된 경지로 이끌어 가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욥기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고난은 끝이 나는 날이 올 것이고, 시험은 끝이 나는 날이 올 것이고, 
주님이 오셔서 그 참고 견뎌낸 자들에게, 인내한 자들에게 
'이기는 자들에게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힘드신 분들, 그 힘든 것들이 언젠가 끝이 나는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자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약속이 하나 있어요.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 하나님의 성전은 9절에 '사탄의 회당'과 대조를 이뤄요. 
여러분 고대 세계에 요즘도 그리스나 이런 데 가면 엄청난 기둥들이 남아있지요.
건물은 무너져도, 기둥은 남아있어요.

고대 세계에 건축물을 세우는데 기둥은 너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별히 지진이 잦았던 빌라델비아 도시 안에, 기둥은 그 건물을 유지하는 데 
너무너무 중요했습니다. 이 기둥이 없으면 건물이 존재할 수가 없죠. 

그래서 '기둥이 되는 사명'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이름에는 '기둥 주柱' 자가 많이 들어가죠.  

여러분 어느 교회는, 그냥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문을 닫아버려요. 
그 교회에 기둥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흔들어도, 교회 기둥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그 교회는 흔들 자가 없습니다. 

▲2025년에 창립 50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는, 기둥 같은 일꾼들이 참 많은 교회예요. 
목회자의 눈에 봐도, 목회자보다 훨씬 더 탁월한 평신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얼마나 신실한지... 

여러분, 우리 교회 예배당 건물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IMF 때 지었다는 거 아시죠? 
그 이후에 오신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IMF 때는 국가적으로 너무너무 힘들 때입니다. 
근데 그때 이 건물을 지은 거잖아요. 아파트를 바친 분들도 계시고, 
그냥 상상할 수 없는 헌신들을 했는데, 참 신기한 거는, 
교회를 다 지어 짓고 난 이후에도 계속 헌금을 하시는 거예요. 

소천하신 원로 목사님 얘기를 들어보면, 건축할 때 그 당시에 
매주 그 건축비를 다 사용하고도 건축비가 남았다는 거예요. 빚을 진 적이 없어요. 
수영로교회는 빚을 진 적이 없어요. 

어떤 교회는 '빚가운데로 걸어간다'고 그러잖아요. 그 빚과 빛이 다르죠. 
여러분 50주년을 맞는 교회가 되기까지는, '기둥'들이 있었던 거예요.  
기둥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기록되는 거죠. 
그 말을 본문에는 '그이 위에 기록하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의 몸에 써 두겠다'라는 뜻이죠.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의 몸에 써 두겠다.' (새번역)

여러분 기둥은, 오래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리 힘들어도, 어떤 시련이 와도...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그가 (지진이 나도) 결코 다시 (집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지진이 찾았던 이 빌라델비아 도시 안에는, 늘 사람들이 불안하니까, 
지진이 약간 날 기세만 있어도 다 어디로 가버리는 거죠. 
언제나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도시 안에서, 
자기가 힘들다고 도피하는 게 아니라, 힘들수록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기둥이니까요.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호주에서 목회할 때도 그랬습니다. 
교인들이 빠르게 성장을 하고, 교회 건물이 필요해졌어요. 
근데 보니까, 건물을 사면 빨리 정착은 하겠는데, 그 당시 워낙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니까, 
만약 건물을 사면, 그 건물에 갇혀서, 더 이상 이게 안 될 것 같았어요. 

 

그 건물에 갇힐 것 같았어요. 그 당시에 우리 교회는 그냥 터져나갔으니까요. 
그래서 건물을 사는 게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이 한창 성장기에 옷이나 신발 사는 게 두렵죠. 왜냐면 조금만 지나면 
아이가 커서 옷을 못 입게 되니까요. 그런 이치인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교인들이 2천명 이렇게 늘어가는데, 
건물이 없이 지내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에요. 
학교 건물을 빌려서 하니까, 토요일마다 의자 세팅을 해야 되고, 
또 어떤 때는, 거기 못쓰면 또 다른 데로 옮기려고 하면, 트럭에 다 실어가야 되고...
모든 게 불편한 광야교회였어요.

주차장도 힘들고... 주택가에서 주민들에게 반대가 오니까, 
우리는 아예 멀리서부터 주차를 하고 걸어오는 그게, 그냥 문화가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점심을 하나 먹는 것도 쉽지 않고, 모두가 애를 쓰고, 
부족한 게 있으면 서로 채워주고.... 

예배 하나만 드리는 데도 
너무너무 힘든 그런 현실 속에서, 수고하고 헌신하는데... 성도들 얼굴에는 기쁨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가운데, 헌신자가 나오고 희생하는 사람이 나오면서 
뭐가 만들어지느냐? '기둥'들이 만들어지더라고요.

특권을 누리는 문화가 되는 때부터는 기둥은 사라져버려요. 
특권은 없고, 끊임없이 자기 희생이 있는 환경이 될 때... 일꾼, 기둥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들은 뭔가 거꾸로 되어버렸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교회가 나에게 뭘 베풀어 주는가?'를 더 염려하는 세태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미국의 많은 교회들, 큰 교회들이 어떻게 돼요? 
서비스를 잘 해 주는 거예요. 소비자 중심의 교회가 되고 있어요. 

굉장히 많은 편리한 환경들을 열어주면서, 고객 유치를 하는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이러면 어떻게 돼요? 마케팅에 능한 교회가 됩니다. 망하는 교회가 됩니다. 

실제로 미국의 어느 교회는,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 교회 부지에 유전이 터졌어요. 
그러니까 이건 돈방석에 교회가 앉은 거예요. 
그래서 그 유전이 나오는 그 땅을 팔기로 교회 제직회에서 결정을 하고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다른 부지로 이사하고도 돈이 남아서, 
교인들이 그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 가졌어요. 그 교회가 어떻게 됐겠어요? 
죽었어요. 사라졌어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않는, 교인이 주인이 되는 교회는.. 병든 교회죠. 

여러분 '하나님의 전에 기둥이 된다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묵묵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지키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뭘 얻는 게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어쩌면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온 것이, 한국교회에 기둥 같이 헌신했던 1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걸 누리고 있는 거예요. 

누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제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다음 세대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뒤따라올 수 있는 신앙을 
우리가 그들에게 본을 보여줘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시고 
지금도 행하시고, 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십니다. 

그분의 통치를 믿고, 어려운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쉽지 않지만,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수시로 끊임없이 닥치지만 
낙심하지 말고 견뎌내면서... 결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이기는 자로 인정해 주시고 
하늘의 면류관을 쓰는 은혜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까지 작은 능력일지라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가지고 
열심히 주를 위해 달려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