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26) / 사도행전 6:1~7 / 직분을 통해 세워지는 교회 - YouTube
◈직분을 통해 세워지는 교회 행6:1~7 2022.05.22. 사도행전26강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
오늘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문제를 다룹니다. 어떤 문제이죠?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사도행전에 처음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요. 바로 '원망' 입니다.
'원망'이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안에서 처음 나옵니다. 교회 안에 원망의 불씨가 일어난 거죠.
그러면 그 원망의 내용이 무엇이냐? 1절에 나오는데요.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러분 원망의 내용이 무엇이죠.? 구제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멤버는 거의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두 부류가 있었었죠.
헬라파 유대인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헬라어, 그리스 말을 구사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정확하게는 아람어를 구사하는 유대인들이었죠.
이 두 부류가 모여서 만든 교회가 초대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통일왕국을 유지했었죠.
르호보암 시대에 남과 북으로 갈라지죠.
그런데 나눠진 분단 체제로 가다가, 각각 다 멸망을 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요.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게 정복을 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끌려가고, 남유다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때 꽤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었죠. 그런데 모두가 끌려간 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은 안전하지 않구나' 판단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안전을 위해서, 앗수르, 바벨론 시대 부터~ 헬라, 로마 시대까지
이스라엘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들이라고 부릅니다.
흩어져 사는데, 주전 300년 경에 그리스어가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죠.
그래서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연스레 헬라어를 모국어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인데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죠.
그러니까 이들은 헬라 문화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흩어져 살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해외에서 살다가, 이스라엘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이 죽는다든지, 사업이 망한다든지, 고향이 그립다든지...
그런 문제로 다시 어디로 돌아오냐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복음을 듣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완전 이스라엘 토박이입니다.
태어난 곳도 이스라엘이고, 자란 곳도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문화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들이죠. 한마디로 정통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땅을 계속해서 지켰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해외에서 살다가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멤버십을 구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1절에 보면요.
'그때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 새 신자가 더 많아진 거죠.
성도가 많아지니까 문제도 생겼겠죠. 교회 시스템에 구멍이 생긴 것 같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의 명단에서 자꾸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행정적인 실수가 있었던 거겠죠.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매일 받아야 할 구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파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겠죠.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원망이 터졌습니다.
'니들만 입이냐, 니들만 과부냐? 우리는 토박이가 아니라서,
해외에서 살다 온 동포라서 차별하는 거냐? 교회가 사랑이 없어서 되겠느냐? 이게 교회냐?'
이렇게 교회 안에 처음으로 '원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원망'은 헬라어로 보면, murmuring, muttering, a secret debate
그러니 '수근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아주 커다란 위기가 찾아온 거죠.
잘못하면 교회가 반쪽으로 쪼개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 강해>라는 책에서,
본문 6장에 불거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지금까지 세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했다.
첫 번째는 산헤드린 공회와 사두개인들이 박해라는 수단을 통해 교회를 공격해왔다. *4장~
두 번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돈의 이슈를 가지고 교회를 흔들었다. *5장
세 번째 공격은,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갈등의 문제를 조장해서
교회 안에서 원망의 소리가 나오게 했다. *6장
그런데 이 세 가지 공격 중에 가장 심각한 공격이 무엇이냐?
(본문의) 원망의 문제이다」 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여러분, 민수기에 보면, 그때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린 죄가 무엇이었죠?
바로 '원망'이라는 죄였습니다. 이 원망이 왜 문제가 되느냐?
여러분, 원망이 무서운 것은, 이 원망 불평은, 반드시 전염력이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은, 절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불평이, 소수의 불평으로 번지고, 반드시 차츰 모든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결국 공동체 안에 원망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거죠.
그래서 공동체를 태우는 강력한 죄가 무엇이냐? 바로 교회 안의 원망과 불평입니다.
실제로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안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죠.
소수의 믿음 없는 사람들의 불평이, 다른 사람들에게 점점 퍼져갑니다.
그래서 결국 온 공동체를 흔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었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었죠. 여러분 이것이 원망과 불평의 파괴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본문에 일어난 이 원망의 문제는
교회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교회가 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죠?
◑일곱 명의 섬기는 자를 세우다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열두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부릅니다. 모든 성도들을 다 소집했습니다.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제자' 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는,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가장 보편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가장 자주 등장하는 크리스천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성도'란 호칭보다 더 많이 나옵니다.
그렇게 모든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가지 솔루션(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 솔루션이 무엇이죠? 한마디로 직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구제를 책임지는 직분자들을 세웁니다.
이 직분을 우리는 성경은 '집사'라고 부릅니다.
물론 오늘 본문 어디에도 '집사'라는 단어 자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는데요.
6:1절에 '구제'라는 단어가 나오고 *디아코니아 (섬김, 봉사)
2절에 보면 '접대를 일삼다'에서 '일삼다 serv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디아코네오 (동사)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디아코노스, 즉 '집사' 라는 뜻입니다.
정확히는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을 우리 말로 집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집사'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오늘 사도들이 뽑은 것은 '섬기는 사람' 즉 집사라는 직분입니다.
딤전3:8절에 나오는 '집사'라는 직분이, 본문 사도행전 6장에 기원이 있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집사를 뽑은 이유가 무엇이죠?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교회가 직분을 처음 세웠는데 직분을 왜 세웠어요?
가장 큰 이유는, 열두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뒷전에 버려두지 않기 위해 세운 자리가, 바로 직분입니다.
여러분, 원래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이죠.
그런데 자꾸 구제하는 일에 신경 쓰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시간이 빼앗기는 겁니다.
그래서 집사라는 직분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 직분을 세운 이유가 뭐였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직분을 앞으로 세울 터인데요.
교회가 직분을 세울 때,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오직 온 힘을 다할 수 있도록, 전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직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고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롬10:17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교회에 더 중요한 사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다른 어떤 일을 못할 정도로, 교회 안에 보호되어야 할 일입니다.
「미국에 존 맥아더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이분은 강해설교의 대가이신데요.
이분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 사역하는 교회에서 담임으로 청빙이 들어왔을 때 일인데요.
그때 이분이 청빙을 받는 조건으로 한 가지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매주 말씀을 준비할 수 있는 40시간을 보장해 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또 '설교 이외에 다른 교회의 업무는 사양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 조건을 교회가 수락해서, 지금도 굉장히 건강한 교회로 그곳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목사의 부르심이, 말씀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일은, 그 외 다른 어떤 일을 못할 정도로 보호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 구제의 일을 대신할 집사를 뽑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나 직분을 뽑는 게 아닙니다.
조건이 3절에 나오는데요.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여기 보면, 집사의 자격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너희 가운데서'입니다. 너희 중에서 뽑으라는 거죠.
여러분, 가끔 보면 돈을 줘서 사람을 고용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요즘 주방봉사를 그렇게 도우미를 고용해서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죠.
여러분, 이건 성경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직부는 너희 중에서, 즉 교회 안에서 뽑는 것입니다.
본문에 '너희 가운데서' 라고 했죠. :3
그런데 교회에 속해 있다는 건, 단순히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겠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말씀대로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직분을 세울 때 그 사람의 헌금 생활을 살핍니다.
여러분 이건 오해하지 마세요. 교회가 돈을 밝혀서가 아닙니다.
헌금은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감리교를 세운 존 웨슬리 목사님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갑이 회개해야 진짜 회개한 자이다.'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헌금 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직분자로 뽑으면 안 됩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세요. '헌금을 많이 하는'게 기준이 아닙니다.
여러분, 직분은 헌금을 많이 해야 받는게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직분자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헌금은 능력에 따라 다른 거죠. 그래서 액수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헌금 액수가 얼마냐가 아니라, '정말 충실하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하는가'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직분은 '너희 가운데 있는 자', 즉 교회를 위해 바르게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첫 번째 직분자의 조건입니다.
2) 둘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뽑는 직분이 무엇이죠?
집사(봉사자)라는 직분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접대를 일삼는 자'로 나오는데요.
여러분 집사의 조건이 뭐예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이어지는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이죠.
먼저 성령으로 충만한 자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죠.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입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는 자인 거죠.
그래서 말씀대로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자입니다.
디모대전서 3장에 보면 직분의 자격이 나오는데요.
거기에 기록된 조건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능력이 아니라, 성품을 다룹니다.
전부 다 직분의 조건과 자격을, 성령의 열매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된 흔적이 있는 사람인가?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이 나타나는 자인가?'
여러분 이게 중요한 직분자의 기준입니다.
그러니까요. 교회의 직분은, 능력직을 뽑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능력은, 주께로부터 오는 것이죠. 교회의 능력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절대로 우리는 세상적인 학벌이나, 사회적인 신분을 보고 뽑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는, 사람의 능력이 필요한 곳이 아닙니다.
능력은 주님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할 줄 알고, 자기의 죄성과 약함과 한계를 절절히 보고 있기 때문에
성령을 의지하는 게 뭔지 아는 그런 사람,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흔적이 묻어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요. 여러분 여기서 '지혜'는 무엇이죠?
여기 지혜는요. 세상적인 지혜가 아니겠죠. 말씀을 적용시킬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모르면 지혜로울 수가 없겠죠.
모든 판단의 기준을 말씀에 두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의 셈법에 밝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직분자의 조건입니다.
3) 세 번째 조건은, '칭찬받는 자'입니다.
단순히 교회 안에서 칭찬받는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에게서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딤전3:7
그래서 어떤 교회는 직분자를 세울 때, 몰래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편지를 보내서 자녀들에게 검증을 받는 거죠.
'너희 아버지가 가정에서도 믿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인가?
직분자로 세울만한 사람인가?' 자녀들에게 몰래 확인을 거칩니다.
여러분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죠. 직장에서 믿음으로 칭찬받는 자인가? 그게 중요한 기준이죠.
'그는 월급도 떼어먹고요. 그렇게 직원들을 괴롭힙니다. 불신자와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면, 그분이 직분자가 되면,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하게 되겠죠...
이 세 가지 가이드라인을 사도들이 제시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다 모여서, 말하자면 공동의회를 하는 거죠.
그리고 투표를 해서 7명의 집사를 뽑습니다. 뽑힌 명단이 5절에 나오는데요.
◑일곱 명의 집사를 뽑되, 다 헬라파 유대인을 뽑았습니다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일곱 명의 명단이 나오는데, 왜 일곱 명을 뽑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주석에 보면 그 당시에는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개 일곱 명을 선출했다고 합니다.
원래 7 이란 숫자가, 히브리어에서 완전 수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 7명의 명단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7명의 명단이 하나같이 이름이 헬라식 이름입니다. 7명이 전부 다 헬라파 이름이에요.
히브리파 이름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헬라파 유대인들만 뽑혔습니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신기한 일입니다.
초대교회에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숫적으로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헬라파보다, 히브리파가 더 많았습니다. 사도들도 전부 히브리파였고,
수장인 야고보 장로도 히브리파였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지금 구제에서 빠진 사람들이 헬라파 아닙니까? 헬라파 과부였죠.
자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을 챙기도록, 같은 헬라파 사람들을 뽑았다는 해석입니다.
-또 한가지 해석이 가능한데요. 이들은 단순히 인맥으로, 또 인정으로,
출신 성분으로 직분을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맥과 출신으로 뽑았다면, 누가 뽑혀야 되죠? 히브리파가 뽑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파가 다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다수를 이루었느냐? 정확한 수치는 아닌데요.
당시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인구가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민 대다수는 다 히브리파였던 거죠. 교회도 비슷한 비율이라고 보는 거죠.
그럼에도 집사들을 뽑았는데, 헬라파들이 전부 선출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단순히 같은 파여서, 인정으로, 친분이 있으니까... 그를 직분자로 뽑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연, 인맥을 따라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히브리파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뽑혔겠죠.
그런데 헬라파가 전부 다 뽑혔다는 건, 여러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사도들이 제시한 그 자격에 합당한 사람만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직분을 세우는 너무나 중요한 원리입니다.
직분은, 성경이 제시하는 자격에 합당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약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성호 교수님은 <직분을 알면 교회가 보인다>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직분의 왜곡'이라고 말합니다.
직분을 세우는데 성경대로 세우는 게 아니라,
교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세우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직분자들 때문에 교회가 말씀으로 세워지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에 필요한 교회 개혁은, 직분의 개혁이라고 강하게 말씀을 하더라고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직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교회 안에 직분이 왜곡되고 있는 현상 몇 가지를, 그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1) 교회의 직분을 성도들이 마치 벼슬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회사의 직위 같은 것으로 직분을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오해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 아직도 집사야?' '집사님, 아직도 집사님이세요?'
그러니까 아직도 집사이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 있는 거죠.
장로는.. 교회 일정 기간 다니면 누구나 맡을 수 있는 직분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교회에 다니면, 장로쯤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상당수가 있는 거죠. 장로, 권사가 안 되면 이상하게 바라보는 거죠.
2) 이런 질문에는 '장로가 집사보다 더 낫거나, 더 높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장로가 되는 것을, 집사에서 승진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장로에서 떨어지면, 마치 승진 시험에서 낙방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직분자를 선출할 때, 많은 교회가 휴유증을 앓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직분을, 계급으로, 승진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죠.
'장로가 집사보다 높다'는 생각이 교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너무나 이상한데요. 여러분 그러면 교회는 직분을 바르게 세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건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죠. 천주교는 직분이 계급 개념입니다.
수직적인 개념이죠. 피라미드식으로, 평신도에서 그 위에 부사제, 그 위에 사제,
그 위에 주교, 추기경, 그 위에 교황이 있습니다.
직분을 서열과 권력과 계급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거 아닙니까?
계급적인 수직적인 직분의 개념을,
수평적인, 성경적인 개념으로 제자리에 바르게 돌려놓은 거죠.
성경적인 질서로 돌려놓은 거죠.
계급이 아니라 기능의 차이로 성경적인 직분을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직분은, 기능의 차이입니다.
여러분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죠. 말씀으로 교회를 섬기는 직분이 목사입니다.
장로는.. 목사가 설교한 말씀을, 성도들이 삶에서 잘 열매 맺고 있는지를 살피는 자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교회에서 뒷짐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심방하는 자입니다.
원래 심방은, 장로가 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을 영적으로 보살피고 심방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어떤 교회들은 장로를 세울 때, 구두를 사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구두를 신고 열심히 심방하라(돌보라)는 의미로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 집사는 뭐하는 사람이죠? 성경에서 집사는, 오늘날의 안수집사를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말씀대로 살피고 돌보는 자입니다.
모든 직분이 어디에 지금 다 걸려있는 거예요? 말씀에 걸려있는 거죠.
이처럼 직분의 차이는, 기능의 차이이지, 계급과 서열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직분은, 절대로 승진이나 승급 개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은사가 어디에 있느냐? ... 여러분 그 차이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방의 은사가 있습니다. 영혼을 돌보고 살피는 일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장로가 되면 되는 거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 만나는 걸 잘 못합니다. 그런 성격의 사람이 있죠.
여러분 교회 안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자꾸 자기 눈에 보입니다.
그들을 남들보다 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집사를 시키면 됩니다.
여러분 이게 성경적인 직분의 원리죠. 절대로 계급이 아닙니다. 기능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자꾸 여기에 세속적인 가치가 교회에 들어와서,
직분을 마치 벼슬과 계급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심지어 직분을 돈으로 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직분을 받을 때 돈을 내는 거죠. 로마 가톨릭처럼 성직 매매가
교회 안에서 오늘날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장로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왜 그렇죠? 교회 안에서도 이 직분을 권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아닙니다. 직분은 계급이나 벼슬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직분은,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에 비해 더 낮거나, 더 높다는
서열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직분에 대한 세 번째 왜곡된 인식 입니다.
그럼에도 장로가 집사보다 더 낫고 더 높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데요.
대부분의 교회에서 장로가 안수집사 중에서 선출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굉장히 잘못된 것이죠. 왜냐하면 직분은 은사의 차이니까요.
여러분 내가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건 집사로서의 은사가 있는 거죠.
성경에 말하는 합당한 집사의 조건에 충족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은 집사를 해야 맞는 거죠.
그런데 단순히 그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집사를 잘하는데, 장로를 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교회 안에 두 가지 손해가 일어나는 거죠.
정말 좋은 집사 하나를 잃는 것이고요,
그저 그런 장로, 없어도 되는 장로를 교회가 하나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꾸 교회가, 집사들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요. 여러분 잘못된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직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장로교회이지 않습니까?
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장로의 나이가 나오는데요.
헌법에는 40세 이상에서 65세 이하의 남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7년을 경과한 자입니다.
그러면 40세만 넘으면 누구나 장로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는 '나이가 많아야 된다' 그런 개념이 교회헌법에는 없는 거죠.
안수집사에서 장로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나이가 어려도 바로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나이가 많아도, 그 사람은 평생 안수집사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은사의 차이이니까요. 그 각각의 직분 자체가 너무나 귀한 일인 거죠.
절대로 계급의 차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직분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만 알아도, 집사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왜곡되어 있는 거죠.
오늘 한국 교회에 너무나 팽배에 있는 것처럼,
그저 신분을 얻고, 직위를 얻고, 승진하는 것처럼... 직분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 이 나이가 됐는데 제가 아직도 집사예요' 여러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은사의 차이인데, 너무나 직분을 오해하고 있는 거죠.
너무나 왜곡되어서, 세상적인 개념이 다 교회의 직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렇게 좋아하는 명예, 명예 박사, 명예 교수처럼
명예 직분을 주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너무나 명예를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가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죠.
'직분'이란 단어 자체가 '섬기는 자'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가 직분의 자리인데, 명예를 얻는 게 아닌 거죠.
여러분 목사가 되는데, 명예를 누리려고 목사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명예 목사'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 '섬기라'고 직분자를 세우는 게, 교회 직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섬기는 데는 관심이 없고, 직위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리에 관심이 있는 거죠.
너무나 왜곡된 직분에 대한 이해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자꾸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분을 자꾸 남발하게 되고요.
직분을 남발하다 보니까, 직분자를 세우는 과정도 부실합니다.
여러분, 목사라는 직분은 그나마 나을 수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신대원에서 3년 동안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사실 부족하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더 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 목소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도 장로나 집사는, 체계적인 교육 없이 그냥 세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들이 제대로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런 말 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지점이 어디입니까?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성경적인 직분의 자리입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성경대로 바르게 직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직분자를 세우고 안수한 의미
특별히 우리가 초대교회의 직분에서 눈여겨 봐야 할 중요한 장면이 하나 있는데, 6절입니다.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일곱 명의 집사는 성도들에 의해 선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에 마지막 절차가 있는데요. 임직식을 하는 거죠.
사도들 앞에 일곱 명을 세우고요. 사도들이 그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합니다.
여러분 오해하면 안 돼요. 안수 기도가 아닙니다. 능력이 나가는 게 아니죠.
기도하고 안수한 겁니다. 손을 얹은 거예요.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사도들이 뽑힌 각 사람 위에 손을 얹습니다. 왜 얹어요?
모든 성도들에게 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성도들에 의해 선출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사실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수는.. 임직식 때 안수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그 사람을 그 직분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온 교회 앞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임직식의 안수를, 그 직분자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라고 해석했죠.
성도들이 투표로 직분자를 뽑았지만, 그를 세운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안수'라는 공적인 절차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은 섬기는 자인데, 여러분 누구를 섬기는 자입니까?
성도를 섬기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자는 성도의 종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인데, 하나님께서 성도를 섬기라고 명하셨으니 섬기는 것이지,
성도의 종이어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를 섬기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으로만 섬겨야 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섬겨야 합니다.
'교인들이 뭘 좋아하느냐?'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무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꾸 우리는 직분자를 '교인의 대표'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거기서부터 교회가 병들기 시작하는 거죠.
직분자는, 교회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부르신 자리이죠.
성도들은 다만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표로, 그분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게... 직분자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직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러분, 이런 직분에 바른 이해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대로 바르게 세워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럴 때, 그 결과를 한번 보십시오 본문 7절인데요.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러분, 직분을 바르게 세웠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죠?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말씀하는데요.
그런데 이 '제자'에 누가 들어와 있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이 누구이죠? 제사장의 무리들은 누구보다 신생 기독교를 심히 박해했던,
예수를 박해했던 대표적인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무리'가 예수를 믿고 복종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직분을 바르게 세웠을 때, 그러니까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직분자를 바르게 세웠을 때
교회 안의 말씀이 힘을 얻어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니까요. 6:4)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말씀대로 바르게 세웠을 때, 그래서 직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대로 섬겼을 때,
그 말씀의 능력으로 제사장들도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직분이 바르게 세워지고, 각각의 직무를 잘 수행하기만 하면,
교회는 평안히 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목사가 할 일을 장로가 자꾸 한다든지,
장로가 할 일을 목사가 하든지,
집사가 다른 일을 한다든지... 그러면 교회는 반드시 어지러워지는 거죠.
직분이 하나의 계급이 되거나, 유명무실한 타이틀이나 호칭이 되어버리면,
여러분,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게 사실 타락한 교회의 증거일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과중한 사역으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어디에 있었죠? 바르게 직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직분을 세우는 장면이 성경에 지금 나오는데요.
바르게 직분을 세웠을 때, 교회는 더 튼튼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런 말이 있죠. '참된 교회는 신앙 고백을 통해 세워지지만,
건강한 교회는 직분을 통해 세워진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앞으로 직분을 세울 텐데요.
성경적으로 바르게 직분을 세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더 많이 회심하고,
생명을 얻는 역사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직분의 이해와 세움으로, 이 6:7절의 역사가 우리 교회 안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하면,
본문에, 신생 초대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원망'의 문제가 터졌습니다.
교회가 반쪽으로 쪼개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죠.
그러나 그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풀어간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원리이죠. 그것이 2절의 고백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식탁 봉사)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 '제쳐놓는다'는 말은, 자기 뒤로 던진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무시하다 neglect 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는 일을 제쳐놓고서, 다른 모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회는, 100%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던지고 살아가는 신자는, 100%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쳐놓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찾는 게 뭐냐?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 언제나 돌아갈 본질은 말씀의 자리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앞으로 또 많은 위기를 만날 텐데요.
위기를 만날 때마다, 돌아가야 할 본질, 붙잡아야 할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위기를 풀어갈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가 일어났을 때 성경대로 해결하는 교회이다"
사실 성경대로 해결하면, 교회는 문제가 날 게 없습니다.
성경대로 해결 안 하니까, 꼭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
여러분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이 돌아가야 할 본질,
여러분이 붙들고 살아야 할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도, 말씀과 기도로 세워지고 성장하는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