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돌봄 시대를 여는 교회

LNCK 2025. 6. 14. 11:5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돌봄>

돌봄시대를 여는 교회 ㅣ 포항제일교회  - YouTube

 

◈돌봄 시대를 여는 교회                                         2025.04.30    

<돌봄 목회 컨퍼런스>에 오신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돌봄 시대'라고 하는 타이틀을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한국 사회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실은 한국 교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길을 잃었습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떤 목적을 갖고 열심히 달렸는데, 
'지금 어디로 가야 되나, 어떻게 살아야 되나?' ... 길을 잃은 시대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시대는 "경제 우선주의", 뭐 예나 지금이나 '돈이 어른이다' 그랬습니다만, 
지금만큼 이 물질적 가치가 세계를 강하게 지배하는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도한 경쟁"이죠. 어른들도 그렇고, 아이들은 특별히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요즘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처음부터 친구들을 친구로 안 보고, 
경쟁상대로 보잖아요. 

'쟤가 넘어지면 내가 좀 잘 가겠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인간관계의 틀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를 일굴며 살아가면, 어떤 사회가 될까요? 굉장히 심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고 대화할 사람이 없고, 외롭습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날 뿐 아니라, 함께 사는 가정 내에서도 고립되어 있고, 
공동체의 붕괴, 학교 교육의 실패라 할 수 있고요. 

정치가 과잉되어 있는.. 양극화 현상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성장의 속도가 둔화된다. 옛날에는 해마다 몇 퍼센트씩 경제가 성장했는데, 
그래서 사회가 빨리 변해도, 좀 성장을 하면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빠 컴퓨터 사줘' 이러면, 조금 아끼면 사줬잖아요.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고, 시대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는 빨리 변하는데, 따라갈 수가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고, 시대가 급속하게 발전하죠. 

요즘 굉장히 많이 하는 이야기가 AI에 대한 이야기인데, 
당장 쓰기 편하고, 도움되는 점이 있습니다만, 여러분이 잘 아실 거예요. 
직업들이 급속히 사라질 겁니다. 

여러분 식당에 가면 서빙하는 로봇들 돌아다니잖아요. 
그거 한 달에 쓰는데 얼마인지 아십니까? 30만 원입니다. 
KT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일당 1만 원짜리 종업원을 고용하십시오!'라는 광고 로고가 뜹니다.
앞으로 훨씬 더 늘어날 겁니다. 

벌써 한국의 대부분 대기업들이, '대졸사원 신규채용'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뭘 먹고 살지?' 하는 고민이 있어야 되고, 
이것들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이해,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이 뭔가, 나은 점이 뭔가,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기계인가?' 하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심각한 어려움들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는 "돌봄"으로 가는 거죠. 저희 교회도 지금 그런데요. 
60대 여성분들의 취업이 굉장히 늘었습니다. 요양보호사를 많이 하시죠. 

제가 70대 분들 집에 심방 가보면, 대부분의 가정에 일주일에 몇 번씩 요양보호사가 오십니다. 
그리고 장애인들 돌보는 일들, 또 방과 후에 아이들 돌보는 일들, 
이렇게 돌봄의 수위는 굉장히 늘어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돌봄'이 굉장히 저평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연세가 들어서 요양병원이나 이런 데 가면, 
대부분 돌봄 노동은, 여성들이 하고, 해외 이주민들이 많이 하잖아요.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 스트레스가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죠. 돌봄 받는 어른들한테 가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만나보면, 어르신들도 그렇고, 예비 어르신들, 아직은 걸어 다니시는 분들도 
'내가 노후에 어떻게 살지? 누구 손에 의지해서 어디서 살지?' 라는 
아주 어두운 그늘들이 이렇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돌봄'을 좀 더 잘 평가해주고, 고귀한 일로 여기는 문화가 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외형적으로 아무리 성장해도... 다 불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돌봄을 돌보아야 된다' ... 이게 사회가 해야 되고, 교회가 해야 되는 일이고요. 

AI와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의 도전이 있고,
*포스트휴머니즘 : 인간중심주의인 휴머니즘을 비판하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상

그래서 여러분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가 이론적으로 아니라, 
몸으로 서로 돌보면서 인간과 인간이 터치하는 가운데서 이제 알아가야 됩니다. 
확인해 가야 됩니다. 

여러분 코로나19 때 우리가 이 '돌봄'의 필요성을 아주 밀접하게 알고,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2주 3주 한 달이 되어도 전화 한 통 안 오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 집은, 누가 그냥 가끔씩 전화만 해줘도, 그게 얼마나 큰 돌봄이 되고, 위안이 되고, 
안전판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가끔씩 전화해주고,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밥만 먹어줘도, 그게 굉장히 좋은 돌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립사회'에는 사람들이 다 '외롭다. 누가 나를 좀 도와두었으면 좋겠다' 그러지만, 
굉장히 외로운 그 사람들이 또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는... 
전화도 해주고, 함께 밥도 먹고,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가 <외롭고 힘든 사회>에서 → <돌봄시대>로 가야 되는 게 필연인데,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굉장히 많은 경쟁과 물질주의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하는 것들이, 
우리 한국 사회, 사실은 세계 전체에 지금 가장 큰 주제요,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목회를 할 때 어떻게 해왔나 보면,
전통적으로는 목회자가 평신들을 돌보고 심방하고 상담하는 목회를 주로 해왔습니다. 

그런데 한 수십 년 전부터 '임상 목회'를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우울증이 많고, 아픈 사람들이 많구나.. 전문적으로 돌봐야 되겠구나..' 

그래서 교회들이 상담센터를 만들고, 상담 전문가를 교회에서 양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임상목회교육 CPE 라고하는데, clinical pastoral education
꽤 많은 신학교에서 졸업하려면 안수받으려면 
CPE 교육을 받고 실습을 해야, 상담가로 전부 준비가 되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수십 년 동안 시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그걸로 부족하구나, 이걸로 잘 안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죠.
목회자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돌보는 목회를 해야 되구나' 

즉 '성도가 서로 서로를 돌보고, 그 힘으로 교회가 세상을 돌보는 교회가 되어야 
교회가 제대로 된 공동체가 되고, 사회의 기능을 기여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한국 교회 트렌드 2025>라는 책이 나왔는데, 거기에 10가지 트렌드를 제시합니다.
그 중 두번쨰가 '멘탈 케어 커뮤니티'입니다. 
즉 '임상목회'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고요. 그게 트렌드 라는 거죠.

그런데 '돌봄 목회'란, 그 특징이 '목회자 한 두 명이 아니라,  *이거는 '임상목회'
교인 전체가 돌봄 사역자'가 되도록, 교회가 훈련시키며 나아가는 거죠. '돌봄 목회'

그래서 정신건강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상담센터도 만들고, 전문가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상담받으러 다니고 정신과 치료받으러 다니면, 
뭔가 좀 신앙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그 인식을 바꾸어야 됩니다. 

사실 최근에 목회자들 중에서도, 공황장애가 굉장히 많거든요. 
믿음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좀 전에 말했던 임상목회의 패러다임입니다. 
한국교회는 전통목회, 심방중심으로 하다가 
언제부턴가 목회의 굉장히 방향이 양육, 제자훈련 쪽으로 많이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셀, 소그룹, 가정교회 열심히 하자. 이게 정답이다'라고 하는 쪽도 있고요. 

임상목회를 하는 그룹들이 잘하는 교회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있습니다. 
주로 대형교회들이 상담센터 만들어서 전문적으로 상담을 해왔는데, 
역시 이게 이제 어떤 한계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은 '이렇게 해 오던 방식이 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목회적 방편인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가 서로 서로 돌볼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그게 심방이든, 양육이든... 거기서 '돌봄'의 영역을 확대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야 소그룹이든 임상 목회든 다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목회 방향이, 
앞으로는 이렇게 (돌봄으로) 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전통적인 목회의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의사가 있고 환자가 있잖아요. 
상담자가 있고 내담자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가진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딱 구도가 이분법적이죠. 

즉 목회자가 있고 평신도가 있고 
돌보는 사람이 있고 돌봄 받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교회가 '소비자 기독교'라 그러는데, 
공급자가 있고 소비자가 있고, '교회 쇼핑한다' 그러잖아요. 
이런 이분법적인 구도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셀교회, 가정교회, 또 제자훈련 잘하는 교회들은,
어떻게든 열심히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평신도가 목회자 쪽에 서서, 목회자가 소그룹 리더들, 목자들, 구역장들과 함께 
다른 평신들을 돌보자 하는 쪽으로 진일보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돌봄 목회'는 뭔가 하면, 목사도 마찬가지고 구역장도 마찬가지고, 
모든 상담 전문가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돌봄을 받아야 되고, 
그리고 누구나 다 아이들까지도,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고,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하나의 웹, 이게 그물 망처럼, (위 사진)
모두가 돌봄을 받기도 하고, 또한 돌봄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게, 
이게 사실은 성경적인 교회, 오늘날의 가장 유효한 교회 모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임상목회와 공동체 목회를 비교해 볼 때, 이런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사회가 자꾸 분화되잖아요. 전문가가 요청 되잖아요. 
정신과 의사, 상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우리가 다 전문가가 돼야 되나요? 쉽지 않거든요. 
지금보다 더 많은 전문가가 필요한가요? 그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교회가 계속해서 어려움이 있는 분들, 우울증 걸린 분들을 
자꾸 이렇게 어떤 센터에 자꾸 보내다 보니까,
목회자로서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드십니까? '그럼 목사는 뭐해?' 

우리가 말하는 성경적인, 신앙적인 인간관, 
'인간을 건강하게 세우는 복음에 대한 확신' 이거는 어디 갔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목회 영역이 줄어드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을 보면,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고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세계 만물을, 피조물을 다스리라' 그랬잖아요. 
하나님의 다스림이 사실 '돌봄의 사명'인 겁니다. 

그래서 사실 모든 인간들은,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잠재력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타고났기 때문에,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성경적인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연약하죠. 그래서 여러분 최근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 받았을 때 
스웨덴 한림원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왜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강에게 노벨 문학상을 줬느냐?' 했을 때 
'한강 작가가 인간의 연약함, 프레절리티 fragility 를 가장 절실하게 잘 표현해냈다'
라는 이야기를 심사위원들이 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진짜 인간의 연약함을 가장 잘 터치하고 바라보고 만져줄 수 있는 것은
(문학작품보다는) 성경이거든요. 복음이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신학적 관점들을 갖고 신약성경을 보면, 
여러분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기도해라, 전도해라, 성경읽어라'가 아닙니다. 
'서로'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돌보라, 서로 기다리라'
'(서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이렇게 '서로'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돌봄에 대한 성경과 이렇게 세속적인 자료들을 많이 찾아봤는데 
아스 클라인먼 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하버드대학교 정신과 의사입니다. 
알츠하이머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분이에요. 

그래서 평소에 알츠하이머 환자도 상담하고, 그 가족들을 모아서 강의도 하고 
'이렇게 환자를 돌보세요' 하고 가르치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 아내가 50대 후반에 알츠하이머에 걸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루아침에 보호자가 된 거예요. 돌보는 사람이 된 거예요. 

굉장히 유능한 알츠하이머 전문 의사였는데 
그 환자 아내를 돌보는 남편이 되었을 때 '내가 철저하게 무능하구나'를 
뼈저리게 절감합니다. 그러면서 느꼈던 것들을 책으로 써낸 책이 
<케어> 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돌봄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들을 목격하게 하고 
자기 의심과 무력감을 수없이 마주하게 하지만..."

이 엘리트 의사가 '야 내가 정말 무력하구나' 

"그러면서도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나누게 하고 
서로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삶의 목적 의식과 감사를 키운다는 사실을 배웠다. 
돌봄의 영역이 의학의 경계를 얼마나 멀리 넘을 수 있는지도 배웠다."

의사가 처방하고 치료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아프고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는 시간, 
그 가족들이 함께 통과하는 과정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일부분 뿐이라는 거죠. 
'그 전체가 돌봄의 해당하는 거다' 라고 말을 합니다. 
(정작 환자를 케어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의사보다, 
돌봄을 베푸는 가족이나 간병인의 역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거죠)

"돌봄은 모든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행위이고, 
그와 동시에 가장 무겁고 좌절을 안겨주는 행위이다."

여러분, 돌봄을 주는 사람 중에 자신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장례식만 가면, 가장 많이 돌본 분들이 가장 서럽게 울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딸이든 며느리든... 
그렇게 잘해드리고도 죄송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좌절이 모든 돌봄에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안에 인간애를 온전하게 깨닫게 하는 실존적 행위이기도 하다. 
돌봄의 미천한 순간들, 즉 이마에 식은 땀을 닦아주고, 더러워진 시트를 갈고, 
환자의 짜증을 달래고,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볼에 키스할 때, 
내 안의 가장 훌륭한 나의 모습이 구현된다." 

이분이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 얼마나 자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야,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고 느낀 때는 
알츠하이머 아내를 돌보면서 자기 자신을 만났다(찾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아주 재밌는 말을 합니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에게도 일종의 구원이 찾아온다."
굉장히 놀라운 말입니다. 의사가 이런 말을 했어요. 

그가 말한 '구원'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구원',
즉 예수 믿고 천국 간다.. 이런 구원은 아니지만, 

그가 '일종의 구원'이라고 그랬죠. 
즉 이것은 '성화 (구원)'입니다.  
내가 더 나은 나,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길이라는 거죠.)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랬잖아요. 
사실 돌봄의 현장에서, 이게 가장 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돌봄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닮아간다' 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습니다. 성화의 길입니다.

여러분 현대사회는 전문화의 시대입니다. 
엄마들이 옛날에는 빨래도 집에서 하고, 밥도 집에서 하고, 다 집에서 했잖아요. 

요즘 빨래는 세탁소가 하고, 밥은 배민(배달업체)이 해주고, 외식을 많이 합니다. 
운동도 옛날에 아빠하고 했는데, 요즘은 학원에 가서 하고, 어디 가르쳐주는데 가서 하고, 
스포츠센터 보내고... 다 돈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돈으로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는 단 하나는요. 공감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외로워하면, 누군가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고, 
정신과 의사를 붙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엄마하고의 관계는 없잖아요. 아빠하고 관계는 사라지잖아요. 
공감해주는 것은 절대로 '외주'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뮤니티라고 할 때에 우리 인간의 문제, 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레리 크랩 이라는 분이, 한국에 그분의 책이 많이 번역되어 있죠. 
이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손상된 정신을 고치기 위해, 전문가를 훈련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다들 아프다. 그러고 우울증이 늘어난다. 
그러니까 상담 센터를 자꾸 확장하는 걸로 절대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그 센터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필요하기는 한데, 
좋은 훈련받은 전문가가 필요한데, 그걸로 안 된다는 거죠. 

문제는 단순히 손상된 정신에 있지 않고, 심리에 있지 않고, 
우리가 겪는 고통 뒤에 있는 진짜 문제는... 영혼이 단절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도록 권면하고, 그들을 책임지게 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그룹이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를 때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목사니까 돌봐야 된다, 장로 권사니까 사람들을 마땅히 챙겨야 된다'
이렇게 우리는 늘 '책임'을 강조하는데, 그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죠. 
더 나은 행동을 하도록 고민하는 것이 때로 필요하지만, 
책임을 강조하는 그것이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고치려 하거나 죄인들을 꾸짖는 것보다, 
연결을 상실한 영혼에 영양을 공급해 줘야 된다.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요즘 '함께 나누는 소그룹, 삶을 나누는 소그룹이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말을 우리가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이 돌봄사역을 해나갈 것인가? 라고 할 때 
'적정 기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컨셉은 슈마허 라는 분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책을 쓰면서 
경제학에서 유래한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제3세계 사람들을 돕는데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게
굉장히 첨단의 기술, 비싼 장비.. 그런 것 가지고 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로 아프리카나 남미 산골 오지에 가 보면, 
실제로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주 간단하지만 긴요한 기술들이 있다는 거죠. 


이게 뭔가 하면, 일례로 '큐드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프리카에 가서 우물도 파줄 수 있고, 다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못해도,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물을 길으러 가려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두 시간을 걸어갔다 와야 됩니다. 

갔다 오면 팔다리도 아프고, 물도 반쯤은 다 그냥 길에 흘려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누군가 이런 걸 개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노래 부르면서, 이걸 끌고 바퀴처럼 끌고서 물을 긷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노인들이, 장보러 갈 때 '끌차'를 이용하듯이 하는 거죠.

이게 세계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어떤 큰 원조보다도 
이 아이들의 삶을 정말 많이 도와주는 발명품이었습니다. 

이런 발명품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적정 기술'이라고 합니다. 
'약간의 지식과 기술만 있어도 이 사람들의 삶을 많이 도와줄 수 있구나' 

그래서 구글 같은 데서 해마다 시상도 합니다. 
아이들이 놀면서 펌프질을 하기도 하는, 재미있는 적정 기술의 예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혜진씨가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적정 심리학'
이분이 이제 아주 어려운 동네에 가서 그들과 함께 하며 돕다 보니까,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돌봐주는데 대단한, 엄청난 그런 첨단의 기술,
혹은 아주 고급한 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구나... 
약간의 지식만 갖고 있으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뭐라고 이야기했는가 하면 '심리적 CPR' 이라고 말했습니다.
CPR 아시죠? 급한 응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심장 누르며 호흡시키는 
응급조치!

저희 교회도 가끔씩 그런 일이 생깁니다. 
성도님들이 예배드리다가 갑자기 어르신이 막 숨을 몰아쉬면, 그럼 어떻게 합니까? 
119 부르죠. 119 오는 사이에 잘못되는 경우가 많죠. 

누군가가 CPR을 그 자리에서 조치할 수 있으면, 그 위기를 넘어갈 수 있거든요. 
그거를 육체적 CPR이라고 하면, 심리적 CPR이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자살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분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분들을 약간만 도와줄 수 있으면, 
즉 우리 모두가 우리가 다 '심리적 CPR'을 배우면, 
우리 교회가, 우리 마을이 훨씬 안전해지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이 전부 다 '심리적 CPR'을, 
목사님들이 먼저 배우고, 모든 성도들이 배워서
'아, 이 분은 이런 게 좀 문제가 있구나.. 이럴 때는 이런 질문을 해주는 게 좋겠구나' 
이럴 때는 좀 쉬게 해주는 게 좋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만 있어도, 
이 사회가 굉장히 안전해지고 삶이 풍성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정 심리학' 혹은 '심리적 CPR' 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봄에 대해서 좀 훈련을 받고, 
돌봄을 잘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세 가지 영역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자기 돌봄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 돌봄이 안 되는 상태에서 '서로 돌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 착한 그리스도인들, 
선교지에 나가보면, 한국 선교사님들이 정말 열심히 사역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렇게 말씀하세요. 
'우리 한국 분들은 미국, 영국 선교사님하고 다르게 
휴가도 없이, 안식년도 안 가고, 열심히 합니다...' 

좋아요. 그런데 10년 20년 가면 다 쓰러집니다. 사모님들이 굉장히 힘들어하십니다. 
한국 목회자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성도들을 돕고, 기도해주고 다니는데,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 목사님이 정말 목회를 열심히 하셨거든요.
또 이민사회에 어려움이 많거든요. 
여러분 여기 한국에서는 그래도 어려움이 있으면, 언니를 부르든지, 
오빠한테 전화하든지 그러잖아요. 미국에는 아무도 없잖아요. 목사님에게 전화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밤 한 시, 두 시라도 달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목사님이 은퇴할 때 사모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여보 여보, 나한테도 심방 좀 와줘' 
성도들 신방 가느라고, 사모님이 어떻게 죽는지 사는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자신을 돌보고, 
자신의 가정과 육체와 건강과 정서를 돌볼 수 있는 여유가 부족했던 거죠.

모든 성도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엄마들, 아주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일수록 
'자기 돌봄'을 못하는 경향이 있죠. 

2) 그리고 '서로 돌봄', 이 서로 돌봄을 잘하면, 교인들이 서로 돌봄을 잘하면 
바깥으로도 그 사랑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죠? 

3) 그게 바로 전도고, 세상을 섬기는 거고, 선교적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창조세계의 돌봄'까지 포함하는, 크게 세 가지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돌봄, 서로 돌봄, 창조세계의 돌봄

▲저희 교회는 상담소를 두 개를 운영합니다. 
하나는 생활상담이고요. 하나는 심리상담입니다. 

생활상담은.. 제가 엊그제도 심방 가서 그런 분을 봤습니다. 
'요양보호사가 오십니까?' 
그런데 요양보호사가 올 수 있도록 신청하는 것도 굉장히 힘듭니다. 
누가 안 해주면, 잘 못 하는 어르신들도 많아요. 

옛날에는 교회가 열심히 헌금해서, 필요한 분들에게 돈을 드리고, 
생활을 지원해주고 쌀도 사주고 그랬는데요. 
요즘에는 대부분 구청이나 보건소에 다 있습니다. 

치매 검사도 보건소에 가면 무료로 다 해줍니다. 
그런데 그걸 몰라서 못 하는 거예요. 뭐가 있는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교회가, 이거는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도 
목사님들이 조금만 지식이 있으면, 준비가 되시면... 하실 수가 있습니다. 

 

즉 여러 사회복지 제도, 또는 기관과 연결시켜 주는 거죠.
그게 교회가 헌금 모아서 도와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분이 구청에, 동회에, 보건소에 가서, 
어떤 기관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를 알고, 그를 도와주는 거예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 그런 것을 많이 배운다고 합니다.
물론 전공을 안 해도, 실무를 많이 뛰다보면 경험으로 배우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희는 '생활상담'을 하지요. 상담을 통해서,
그런 분들에게 사회복지 혜택을 연결시켜주는 겁니다.

또 한쪽은 '심리상담' 입니다. 
마음에 어려움을 있는 분들을 상담하는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생활상담을 받으러 오는지, 
누가 심리상담을 받으러 올 건지... 이렇게 실제로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사실 '내가 문제가 있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고 해서 
상담 받으러 나오면, 벌써 그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거예요. 안 오니까 문제예요. 
모르니까 문제예요. 고립되어 있으니까 문제예요. 

그래서 교회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자신의 수준에 맞게 
생활상담, 심리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또 잘 찾아보면 지역에서도 도움받을 수 있는 길들이 있습니다. 
심리상담도 전문가가 (사회복지 차원에서) 해 주는 거죠.

우리 포항지역에도 연합해서, '그런 걸 조금 더 만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런데 이런 시스템이 잘 구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성도들의 삶에서 연결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요. 
그래서 돌봄이 필요한 겁니다. 

'심리적 CPR'이 뭔가 하면,
'이분은 굉장히 힘드니까 내가 좀 만나줘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게 있을 수 있고요. 
'이분에게는 조금 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심리 상담소에 가보세요. 
우리 교회에 이런 생활 상담소, 심리상담소가 있습니다.'
아니면 '어느 교회에 가면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돌봄'이 되어야, 생활 상담, 심리 상담이 잘 움직여 갈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이, 집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도움을 받는지, 그 길도 모르니까,
'돌봄'이 잘 돌아가는 공동체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연결시켜주는 겁니다. 

'내가 다 하겠다'는 게 아니고요. 기본을 해 줄 수 있다는 거죠. 
그 이상은, 상위 기관으로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제사장입니다. *만인제사장 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제사장 역할을 하는 공동체가 돼야 되고, 
인류는 피조세계를 향해서 제사장 역할을 해야 됩니다. 

성직자 중심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동시에, 
이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맞추어 
전략적 실천신학은 교회의 실천이 교회 내부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여러분 그래서 목회자가 의사처럼, 환자를 돌보는 것처럼 
이렇게 일방적으로 돌보는 게 아니라, 성도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웹 (거미줄) 네트워크가 되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망이 있으면,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수없이 많은 인간관계의 망 WEB이 있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옆의 교회도 있고, 동창회도 있고... 
우리는 인간관계의 망속에 얽혀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지만 병원에 가면 환자이고, 아이들 학교 가면 학부모이고,
이렇게 여러 가지 관계 WEB 안에 들어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인간의 많은 망(웹) 중에서, 어떤 한 부분이 따뜻해지면,
사실은 이 온도는 내 주위로 퍼져나가게 돼 있습니다. 
그게 선교의 출발인 거죠. 

그래서 옛날에는 교회와 세상을 딱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여기에 있고, 세상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포스트 크리샘덤(후기 기독교)이 뭐냐? 
'세상은 이만큼 커졌는데 교회는 좀 쪼그라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이거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하고 분리되어져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서 살아가잖아요. 세상의 직업인으로, 소비자로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선교적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가 딱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인간의 관계망 속에서, 
세상의 모든 부분이 다 망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부분이 따뜻하게 온도가 올라가면, 그게 퍼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돌봐주는 사람으로 잘 훈련받으면,
옆집 사람도 돌봐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만나도 
조금 더 다르게 대화를 해 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서 마음이 열리고, 돌봄이 일어나고, 선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많은 관계망으로 되어 있다는 걸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요. 

지금 우리 사회에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정치적 양곡화라고 그러잖아요. 
코로나19 때에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 <고립의 시대> 영국 학자입니다. 
목사님들은 꼭 읽어보시기를 제가 권해드립니다. The Lonely Century

이 책에서, 고립은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세계에 막 그냥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이고, 장례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힘들어지는데, 
그러나 코로나 같은 전염병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은 고립, 외로움이다.. 라는 거죠.

그리고 이 책에서 '고립이 왜 위험한가?' 하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고립이 돼 있으면, 사람들이 외로우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다는 거죠. 

"사회적으로 덜 연결되어 있을수록, 고립되어 있다고 느낄수록,  
서로의 차이를 적절히 조율하고, 서로를 시민답게 협력적으로 대하는 연습이 
부족해지면, 
동료 시민을 좀처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결과 포퓰리스트가 제시하는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형태의 공동체의 매력을 느낀다" 는 겁니다. 

"내가 주변화되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를 바라봐주고 그에게 귀기울여 주겠다고 약속하는 누군가가 (포퓰리스트죠) 
어찌 매혹적이지 않겠는가?

그런 우리가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나의 조국에서조차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때 나는 히틀러를 만났다." 

많은 정치학자들이, 히틀러 같은 사람이 왜 탄생하는가? 
(또 정치적인 극단주의자들이 왜 나오는가?)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돌봄시대를 여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모든 성도가 돌봄을 받고, 돌봄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목회자도 돌봄을 받아야 되고요. 
여러분 아주 믿음 좋아 보이는 장로님도 돌봄을 받아야 되고요. 

반대로 그냥 교회에서 별로 존재감 없어 보이는 분들도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다'라고 하는 게 성경적인 인간관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모든 성도가, 목회자뿐 아니라 돌봄 사역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전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돌봄의 민감성'을 개발하고...
민감성이란, 우리가 다 사실은 머리 속에서는 '착하게 살아야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지' 하는 거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잘 모르는 거예요. 
캐치를 잘 못하는 거예요. 
그걸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되고, 함께 돌보는 성품과 문화를 만들어 가야 됩니다. 

한국 교회에 지금 심각한 어려운 문제가,
돈을 많이 내어서 사회를 많이 도와주는데,
사회에 기여를 많이 하는데, 그걸 세상이 잘 몰라준다 그러잖아요.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한 가지입니다. 교회의 아픔이죠. 

그런데 결국에 여러분 교회가 하는 일은, 사실은 돈으로 돕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돈으로 돕고, 행사로 돕고, 이벤트로 돕는 거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돌봄의 성품과 문화로 바뀌어져 가자는 것입니다.
내가 돌봄의 사람이 되어가자는 겁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해외선교에 비싼 돈을 들여서 왜 보냅니까? 
아이들이 바뀌기를 바라는 거죠.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주에 '창조세계 돌봄' 사역으로 
한 500여 분이 포항 시내 곳곳에 흩어져서, 플로깅, 즉 휴지 줍기를 했습니다. 

하루 동안 주워봐야 얼마나 줍겠습니까? 
그러나 이걸 통해서, 참여하는 많은 분들이 좀 더 자연을 아끼는 사람으로 
라이프스타일이, 문화가 바뀌어 가는 거예요. 

교회 모든 선교 프로그램은 '사람의 변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보의 문화가 교회 안에 생기고, 돌봄의 문화를 사회에 확산해 나가는 거죠.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는 시민으로, 따뜻한 이웃으로서, 
정치에 너무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목소리를 높여봐야 별 효과 없습니다. 

대신에 세상을 섬길 수 있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는 거죠. 
그게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목회자들은 뭐하는가요? 돌봄 제공자가 돼야 됩니다. 
전통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리고 심방, 상담 등에도 (평신도) 돌봄 사역자를 양육하고,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돌봄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연결해주고 계속 잘할 수 있도록 보살펴줘야 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먼저 나도 돌봄을 받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하는 겸손,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돌본다 그래도, 나도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그래야 건강한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가 없어요. 

자기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요즘에는요. 청년부 교역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제가 지난주에 서울에 집회하러 갔는데, 거기 청년부 목사님들이 그러더라고요. 

청년부 남자 아이들이, 목사님한테 와 가지고, 
이렇게 한 주간 지내고 보면 이렇게 자기 팔뚝을 찔러 본대요. 
'이번 주에 운동 좀 하셨네요?' 

젊은이들은 목사님들이, 기도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자기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함께 '자기 돌봄의 문화'의 길로 가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야 여러분, 앞으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돌봄을 위해서 계속해서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저희 교회가 콜로큠 이라는 타이틀로 매주 이렇게 모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다 모여서... 여러분 사실 목사님들이 목회를 하는데 
심방하고 상담하는데, '어떤 지식을 갖고 하는가?' 

어릴 때부터 그냥 했던 경험들, 귀로 흘려들었던 것 가지고 하거든요. 
이 부분을 교육받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인간의 문제는 굉장히 복잡합니다.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고 많이 바뀝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우리가 서로 점검하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목사님들끼리 한 교회에서 하든지, 

아니면 같은 지역에서 목사님들 너댓 분이 모여서 하든지, 정기적으로 공부하고, 
특별히 무슨 신학책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목회적인 가정이 흔들릴 때, 우울증이 있을 때, 자살 충동이 있을 때, 
혹은 자살 유가족을 어떻게 상담하고 돌볼 것이냐? 
이런 것들을 그때그때 함께 나누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이 모임을 꼭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있고요. 

'프로페짜이'는 함께 설교를 준비하는 좋은 모임인데, 
이것들이 목회자가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제, 또 스스로 잘 돌보고, 감독, 장로, 목사... 다 돌보는 직제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요. 

저희 교회는 교회 전체 제자 훈련이 이 목표로 되어 있습니다. 
1) '울림과 어울림' 과정은
인간은 모두 다 약하고 서로 의존되어 있는 존재다 ... 로 교회 생활을 시작하고요. 

2) '소명과 잠재력' 과정
하나님이 주신 자기 소명과 잠재력을 일깨우는 과정이고요.

3) '케어링' 과정
그리고 케어링을 공부합니다. 
돌봄 받고, 돌보는 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거죠.

각 과정은 매주 1회씩, 모두 10회 정도로 배움의 시간을 가집니다.

 

또 저희 교회가 이제 어떻게 하면 서로 돌보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자기를 잘 돌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제자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케어링'이라는 클래스가 있고,
'바나바 사역자'는 위로하는 자로 훈련하는 코스입니다. 막 진행되고 있습니다. 

돌봄이 필요한 상황들, 상실, 누군가 사랑하는 가족이 떠났을 때 애도, 
급격한 변화의 경험, 싱글 라이프, 경력 단질, 은퇴, 노화, 중독, 
이런 굉장히 많은 상황들이 있고, 이런 상황들에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의 아주 중요한 비전은 이겁니다.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 교회!' 
우리 교회가 아무리 건강하고 믿음 좋다 하더라도, 울 일이 안 생길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아무도 혼자 울지 않는 교회!' 저희들의 목표입니다. 

저희가 이런 교회다.. 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아무도 혼자 울지 않고, 누군가가 울 때 최소한 옆에서 함께 있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교회가 될 수 있다면... 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손길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오늘 이 컨퍼런스 하고, 여러분을 초청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광고 드리면 '케어링 세미나' 
저희가 돌봄 사역을 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과정, 첫 과정이 케어링 세미나입니다. 
이 세미나는, 교회들이 돌봄 사역을 실제로 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세미나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QR코드 찍으셔서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이게 인원이 많으면 힘들기 때문에 
소망수양관에서 20명 한정으로 함께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어떻게 돌봄사획자를 양육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이 함께 배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가실 때 약속드린 대로 한국목회상담협회에서 만든 가이드북이 있습니다. 
<돌봄 목회 가이드북>이 있으니까
이건 여러분이 가져가셔서 심방하실 때 참고하시면 굉장히 환자를 어떻게 돌보고 
어떻게 심방하고 권면하는지... 하는 것들이 케이스별로 잘 안내되어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교회 목자들까지 이 가이드북을 다 구비해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사역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돌보는 복된 교회 잘 세워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