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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52장 예레미야서 전체의 3대 교훈

LNCK 2025. 6. 15. 22:4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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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전체의 3대 교훈                렘52:1-3                            2008년

      

서론

 

예레미야서 설교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51장 마지막 절인 64절에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51장으로 예레미야의 모든 말은 끝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왜 52장은 기록되었느냐?

52장은 30년 이상 지난 후에 다른 사람이 첨가한 것으로

역대하 24장과 25장의 내용을 요약하고,

예레미야 1장~51장까지의 예언을 모두 요약해서, 다시 한번 복습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장은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 가지 단순하고 명백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말씀의 실현성

 

하나님 말씀은 단순히 언어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현실이 되고 역사가 됩니다. 역사가 되지 않는 예언은 거짓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52장에는 예레미야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지만

예레미야가 증거한 내용이진실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원수가 북에서 온다. 그 원수는 바벨론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느브갓네살 왕의 포로가 되고 성전은 불타버릴 것이다.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으면 유다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예레미야 홀로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게 52장의 주제입니다.

 

다른 거짓 선지자들은 “아니다. 평강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싫어해서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증거한 예언만이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현실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은 거짓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52장은 “되돌아보니 예레미야가 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은 과연 능력있는 말씀이요 실현성이 있는 말씀이다.” 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인 매튜 헨리는

“예레미야 52장에는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이 피묻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조롱하다가 그들의 생명과 자유와 안전을 모두다 빼앗기고 나서야

진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면서 자유, 생명, 안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예레미야가 말한 것이 진실이었구나. 그 때 믿을 것을 왜 안 믿었던가?

그 때 순종할 것을 왜 안 순종했던가? 그러나 때는 늦었도다.”라며 후회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현실이 되는데현실이 되기 전에 믿고 순종했어야지

현실이 된 후에는 때가 늦었다는 말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예언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재림할 것이라는 예언이 남아 있습니다.

그날이 되면 하늘과 땅은 모두 불로 절단나 멸망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과거 노아 홍수시대 때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이제 물은

더 이상 안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써 하늘에 무지개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물보다 더 강한 불의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은 무론대소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예언이 남아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영원천국과 생명의 부활을 누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기의 죄를 그대로 안고 가는 사람은

사망의 부활을 해서 영영한 지옥불의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이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라는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조롱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은 모두다 실현성이 있는 능력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섬기는 것은 억지로 해도 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백배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수고는 위대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성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18, 19세기에 미국과 영국에는 이신론자들(deist)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멀리 떠나셔서 더 이상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을 창조(creation)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직접 보존(preservation)하시고

또한 아울러 통치(government)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와, 보존과, 통치 ... 세 가지를 합쳐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providence of God)이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중심에 계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성입니다.

 

세속 역사가들은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을 세속적인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유다 왕들이 18세와 2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 왕이 되어 지도력이 부족해

경제가 어렵고 군사력이 갖춰지지 않아서 패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군사력을 준비했기 때문에

그가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스스로 준비하고 강화하는 자의 편이다.

세속 역사가들은 아마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도 시드기야와 유다 왕들이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었고

바벨론은 강하여서 유다와 애굽을 모두 지배했다고 기록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52장의 기록자는 이런 모든 현상은 2차적인 원인에 불과하고,

그런 설명은 피상적인 설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2:3절은 우리가 역사와 세상을 보는 매우 중요한 해석의 관건을 제공합니다.

52:3절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라는 주어가 중요합니다.

유다는 왜 포로가 되었는가?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셨다.

바벨론은 어찌하여 유다를 지배했는가?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다.

이처럼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모든 역사적인 현상의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역사에 일어난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활동(God's action)이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불타고 유다백성이 노예되어 끌려가는 것은 시드기야 왕이나

느브갓네살이 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연출자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국제관계나 전쟁사나 세계 역사의 배후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들의 뜻에 의해서 역사가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영어로는 history라 하는데 이것을 어떤 분은 그분의(his) 이야기(story)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역사는 하나님의 스토리요 하나님의 활동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11절에서 바울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만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은 이런 관점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현실과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성을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KBS 9시 뉴스 아나운서가 “여러분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내려주심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또 뉴스의 두 번째 기사가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태풍을 보내셔서 200명이나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찾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나라가 다시 바로서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저 아나운서는

원래 목사님 이시거나 기독교를 믿다 광신자가 된 사람이다’ 라고 평가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 아나운서의 말이 진실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세상의 불경건한 시각의 영향을 받고

하나님을 어떤 종교적인 영역에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잠시 만나는 하나님으로만 제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일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예레미야 52장은 하나님께서 역사현실의 모든 일에 주권적으로 관여하고 계시다고 하는

절대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이 진리를 붙들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영적인 조상들은 우리보다도 이런 의식이 더 강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들은 신이 누구인지 몰라 방향이 잘못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신이 노하셔서, 용왕님이 노하셔서,

삼신할머니가 노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비록 신이 누구인지 몰랐어도

그들의 삶 가운데 신의 역사를 인정하는 의식이 우리보다 강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에게 이런 축복과 승리를

주셨도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기도로 찾아보자.

이 일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 있는지 기다려보자.”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과 의식이 21세기에는 약해졌다는 말입니다.

 

▲제 학창시절 친구의 아버지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셨습니다.

저는 그 집에 자주 가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분의 회갑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이처럼 축복해

주셔서 제가 회갑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분은 자연스럽게 드린 기도인지 몰라도 제 영혼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가? 이렇게 지적인 분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분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아주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아직 미신자) 그리고 지금도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우리 의식 속에 말 한마디라도

“내가 이렇게 잘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내가 요사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 조금 진노하신 것이 있으신가 보다.

그것을 찾아서 내가 고쳐나가야 되겠다.” 이런 의식과 말을 우리가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장소, 어느 시간, 어느 사건에나 만사의 중심에 계신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예레미야는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를 훤히 꿰뚫어 보던 지식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지식얘기가 아니라 이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예레미야서를 기록했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더욱더 공경하고 경외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4:35절에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이것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제정신을 차린 후 하는 말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천하를 통일하고 왕궁에서 “내가 내 손의 힘으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을 치셔서 그가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머리털이 독수리 털처럼 되고 손톱이 새발톱처럼 되었습니다.

소처럼 풀 뜯어먹고 하늘 이슬을 맞으며 7년 동안 미친 사람이 되어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7년 만에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신을 뺏다 다시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방나라의 왕인 느브갓네살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그분은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00% 다 실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삶과 역사의 중심에 서계신 통치자인 것을 아시고

하나님과 언제나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성

 

하나님은 그 가운데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52장의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은 도무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섭고 황폐한 심판의 와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하고 의심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있습니다.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습니다.

 

먼저 작은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52:17~23절에 “갈대아인이 또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전의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불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시위대 장관이 또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는데 솔로몬왕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 있는 열 두 놋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를

헤아릴 수 없었더라 그 기둥은 한 기둥의 고가 십 팔 규빗이요 그 주위는 십 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사지놓이며 기둥 위에 놋머리가 있어 그 고가 다섯 규빗이요

머리 사면으로 돌아가며 꾸민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며

또 다른 기둥에도 이런 모든 것과 석류가 있었으며, 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구십 륙이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일백이었더라”

 

이것은 느브갓네살 왕이 성전에 있는 모든 여호와 섬기는 기명들을 가져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리스트를 정확하게 적어놓으신 것입니다.

 

금을 얼마나, 은을 얼마나 가져갔는지 그것의 길이와 높이가 얼마인지 다 적어놓았습니다.

도둑놈이 도둑질해 갈 때 내가 이집에서 뭘 가져가는지 리스트를 남겨놓지 않습니다.

또 전쟁에서 포로되어 끌려가는 사람이, 무엇을 빼앗겼다고 적어 놓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52장에서 성전기물 잃어버린 것을 이렇게 자세하게 리스트로 작성해

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물들을 미래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찾아오시겠다는 의미입니다.

 

27:22절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김을 입고 내가 이것을 돌아보는 날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옮겨 이곳에 다시 두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느브갓네살이 나를 섬기는 기명들을 가져가지만

그것은 그가 잠시 맡아두는 것뿐이고 내가 유다백성의 포로를 70년 뒤에 다시 돌이킬 때는

그 성전 기물도 남김없이 다 돌아오리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을 통치하던 벨사살은 그것을 가지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자 그날 밤 그의 앞에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메네 메네 데게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릇으로 술을 마시다가 그날 밤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 1:7절에 “고레스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유다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느브갓네살 왕이 가져왔던 예루살렘 성전

그릇들은 다 가져가라.”는 고레스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벨사살이 술을 마시다가 죽은 것을 생각하면

나는 이것을 건드리고 싶지도 않다. 이것을 다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고레스 왕이 돌려줘야 할 때에 돌려주지 않았다면

페르시아에는 온갖 역병과 기근과 심판이 임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뺏어 다곤 신전에 두었을 때에

다곤 신상과 여호와의 법궤를 같이 두자 다곤 신전이 그만 넘어져 목이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워놓으면 또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에 온갖 재앙과 독종(독한 종기)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돌려보냈습니다.

빼앗긴 성전 기물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다시 포로에서 해방시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것이나, 유다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모두 자기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와 지옥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받는 것도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레미야 52장에는 더 큰 은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1~34절에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이월 이십 오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정한 양)가 있어서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야긴은 주전 598년 혹은 597년인 18세에 왕이 되어 3개월을 통치하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감옥에서 37년을 지내고 55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대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세대는 지나가고 느브갓네살 왕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에윌므로닥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여호야긴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여호야긴의 위를 바벨론에 있는 다른 나라 왕들보다 높였습니다.

죄수의 의복을 벗기고 왕복을 입혀 일평생 먹고 쓸 것을 모자라지 않도록 공급해주었습니다.

(에윌므로닥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잠시 감옥에 들어가 있었는데,

거기서 여호야긴을 만나서 친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여호야긴이 종신토록 이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드기야와는 완전히 다른 운명입니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두 눈을 뽑히고 자식들이 다 죽고 끌려갔는데,

어디서 죽었는지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은 55세 이후에는 해방되고 대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대접을 받는지 왕 앞에서 늘 먹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도 여호야김을 본받아 악한 왕으로 3개월 왕위에 있다가 쫓겨나서

37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왜 여호야긴은 이런 대접을 노년기에 받았겠습니까?

그것은 여호야긴이 대접받을 만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저는 예레미야서를 마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는 버리시고

‘여호야긴’은 살려두시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느냐?”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호야긴은 바벨론에 살았고 결혼해서 자녀를 얻었습니다. *마1장 족보

그리고 비록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가 왕위를 얻지는 못했지만 행복한 노후를 보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에게는 주지 않으신 은혜를 여호야긴에게 주셨느냐는 질문입니다.

 

마1:12~16절에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여호야긴)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호야긴의 이름은 여고냐 라고도 하고 고니야 라고도 합니다.

여호야긴의 후손 가운데 요셉이 나고, 결국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여호야긴의 핏줄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드기야는 버리더라도

여호야긴은 결혼해 자식을 낳고 은혜받고 잘살도록 대접해주셨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총결론은 이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국제적으로도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가정적으로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는 자연히 어려워집니다.

어둡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우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에 은혜를 주시는가요?

 

▲제가 세계를 선교하러 돌아다니며 보니 역시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하는 나라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많은 천연자원이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동족인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보다 더 성격도 강하고 부지런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남한을 축복하시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외국에 나갔다 오면 우리나라가 더 살기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능력이 있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잘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물질과 교회의 부흥과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 중국 등 아직 복음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중국도 지금 조금씩 문을 열고 복음을 받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저는 앞으로 회교권에 전도할 나라로 중국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중국 선교를 이루어 중국에 교회를 세우고

중국도 복음을 전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더욱 복주시고 잘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끊어 지셨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분에게서 복음이 중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중지되면 축복도 중지되고

복음이 계속 흘러나가면 축복도 흘러나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복음에 별 관심없고 아무상관 없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는 네가 잘되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우리는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52장을 기록한 이유는 결국

“죄로 말미암아 멸망과 지옥가기에 합당한 인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여호야긴을 그렇게 잘먹고 잘살게 한 것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생은 잘되는 것이라”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잘될 것입니다.

현세도 잘되고 미래는 영원히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고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은

현세에도 안되고 죽으면 더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예언입니다. 이 말씀은 그대로 현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슴에 품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도 마지막에는 심판을 받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본 장에서는 그 예언들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언급함으로써

예레미야서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내용구조>

시드기야의 포로된 (1-11절),

예루살렘의 파괴 (12-27절),

유다인의 포로된 숫자 (28-34절)

 

◑절별 해석

 

52:1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21세라 예루살렘에서 11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시드기야란 이름은 그의 왕명이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의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였다(왕하 24:17 참조).

그는 조카인 여호야긴이 폐위되고 난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B.C. 597년).

 

52:2 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 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이것은 시드기야 통치의 결산에 해당되는 말이다.

아울러 이는 유다의 패망에 대한 주요 원인을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52: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진노하심이 그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여호와께서...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유다에서 일어난 일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으며,

결국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이 유다 땅에서 쫓겨나는

여호와의 진노가 성취되었던 것이다(왕하 24:20 참조).

 

한편, 일반 역사가들은 유다의 멸망이 주변 상황에 따른 것이지

여호와의 진노로 인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이시고 또 유다 멸망의 변수를 만드신 분이 여호와이시란 것이

신앙인의 역사에 대한 관점일 것이다.

 

52:4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시드기야 9년은 현대력으로 B.C. 588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히브리 종교력 10월은 양력으로는 12-1월에 해당한다.

바벨론 군대는 겨울의 혹한을 이용하여 기습적 공격을 감행했던 것 같다.

 

52:5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11년까지 에워싸였더니' 앗수르 고분 부조를 연구해 보면,

예루살렘 성의 포위공격의 형태가 어떠했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전투 양상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을 포위하여 진을 치고, 그리고 성벽 파괴용 무기들을 가동했으며,

또한 임시 망루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불화살이나 돌 따위를

성안으로 던지는 그런 전략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포위 공격은 시드기야 제 11년 넷째 달(6절) 즉, 현대력으로 B.C. 586년

6-7월경까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은 약 18개월동안 계속되었던 셈이다.

 

52:6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성중의 기근에 대해서 39장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서와 애4:1-10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

 

'심하여'의 히브리어 '하자크'는 '달라붙다', '지속되다'는 뜻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포위당함으로 인해 기근의 상태가 극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52:7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그 성에서 나가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들이 아라바 길로 가더니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본절의 내용은 39:4에도 언급되고 있다.

시드기야와 그의 근신들은 삼엄한 바벨론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달아났을 것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서와 같이 맛소라 사본은 시드기야의 탈주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서, 그리고 39장에 언급된 사실로 보아서도 왕의 탈주는

분명하다. 아라바는 사해 남쪽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넓은 광야 지역이다.

 

52:8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왕의 호위대가 왕을 혼자 내버려두고

흩어지게 된 상황이 언급되는데, 어쩌면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일사 불란하게 왕을 호위하지 못했을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갈대아인들이 왕을 목표로 해서 추적해왔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39:1-10에는 이같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사건은 애 4:19, 20에 반영되고 있다.

 

52:9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하맛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가 시드기야를 심문하니라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신하들에 관한 내용은

39:5-7과 왕하 25:5-7에 기록되어 있다.

'하맛 땅 립나'는 오론테스 강가에 있는 가데스 남쪽 고대 수리아의 한 도시였는데,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원정군의 전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립나는 또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군사 도로가 마주치는 전략적인 요충지

이기도 하였으며, 느부갓네살의 임시 본부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다.

 

52:10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예레미야의 권면을 끝내 거부함으로써,

그 목전에서 자녀가 살해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한 아픔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곳의 모든 방백이란 립나에 죄수로 수용되어 있던 유다 방백들을 말한다.

 

왕하 25장에는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송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이들에 대한 처형은 예루살렘 함락 후 몇 주가 지나서 행하여졌을 것이다.

 

52: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겔 12:13의 성취이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옮겨져 거기서 죽을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상세한 설명은 39:7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 성의 함락 전후에 겪었던 그 쓰라린 육체적, 정신적 고초를 감내하면서

그 이후 그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는 그 이후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52:1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 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본절의 내용은 39:1-10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오 월'은 현재의 7-8월에 해당되며,

'십 일'은 왕하 25:8에서는 7일로 나타나 있다.

아무튼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때였다.

 

한편 그의 도착 연대로 언급되고 있는 느부갓네살 십 구 년은 B.C. 586년에 해당된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실제적으로 왕위에 등극한 때가 B.C. 605년이었다는 연대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52:13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을 불사르는 장면이 언급되는데,

그 불길은 전 도시를 휩쓸었을 것이다.

 

52:14 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 중에 기드론 계곡이

탐사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황폐가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헐다'(나타츠)라고 하는 말은 본서에서 빈번하게 쓰였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열방을 헐어내리는 임무를 맡기셨으며(1:10),

또한 여호와 자신이 한 나라를 헐어내리실 것이라고도 말씀했다(18:7),

그리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이미 헐어내리셨던 것이다(31:28).

 

52:15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가난한 자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갔고

 

본절은 느부사라단이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언급한다.

백성 중 빈한한 자에 대한 언급이 왕하 25:11, 렘 39:9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맛소라 사본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사본에는 수록되어 있다.

 

본절의 '빈한한 자'나 16절의 '빈천한 국민'은 히브리어로는 모두 '달로트'이다.

결국 느부사라단은 유다의 지도층 뿐만 아니라 빈부 귀천을 막론한 일반 백성들까지

상당수를 잡아갔던 셈이다. 무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몬'은

'군중', '무리'로도 번역되나, '공교한 기술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52:16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빈천한 국민을 남겨 두어'

정치적으로 비중이 없는 자들은 남아서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힘이 없고 빈천한 자들이었다.

갈대아인들은 유다를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킬 만한 충분한 포로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람들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한편, 40-41장의 내용을 보면, 미스바 지역 공동체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듯이 보인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 군대를 용케 피했던 자들로 짐작된다.

 

52:17 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놋바다'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성전 기구들은 왕상7:15-39에 나온다.

이 '두 놋기둥'에는 기둥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하나는 야긴이었고 좌편에 세워진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그 꼭대기에는 백합화 형상이 있었다. 상세한 설명은 왕상 7:15-22을 참조하라.

 

'놋바다'는 왕상 7:23-26에, 그리고 '받침'에 대해서는 왕상 7:27-39에 언급되고 있다.

이 기둥의 용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제단의 불이나 화롯불을 담아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기둥들은 수리아 신전 벽화를 보건대 B.C. 10세기경에 대단히 유행했던 것 같다.

 

52:18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고

 

'가마들과 부삽들과 불집게들...'

'가마'는 조그마한 물건들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아무튼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여러 기구들은 크기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놋바다의 직경은 약 456cm 정도되었다. 이런 기구들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바벨론으로 옮겨갈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52:19 사령관은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으로 만든 물건의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의 은을 가져갔더라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 갔는데'

아마도 이 말은 본절의 잔들, 화로들, 주발들, 솥들 등이 모두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금으로 만들어진 제기들이 출25:29 이하에 언급되고 있고,

왕상 7:49 이하에는 이들 항목 중 대부분이 언급되고 있다.

 

52:20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에 있는 열두 놋 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는 헤아릴 수 없었더라

 

'열 두 놋소 곧...놋 중수를' 왕하 25:16에는 본절에 언급된 항목들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놋으로 만들어진 열 두 소들이 한세기 반 전에 이미 앗수르의 공물로

보내졌기 때문에 본절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설령 앗수르로 보내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그 이후에 다시 되돌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52:21 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52:22 기둥 위에 놋머리가 있어 그 높이가 다섯 규빗이요 머리 사면으로 돌아가며 꾸민 망사와 석류가 다 놋이며 또 다른 기둥에도 이런 모든 것과 석류가 있었더라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며'

기둥의 장식이나 조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왕상7:16-20에 언급되어 있다.

이런 류의 장식은 대제사장의 의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출 28:33).

 

한편 라스 삼라(Ras Shamra)에서 발견된 용기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이런 장식은 이스라엘 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변 나라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52:23 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아흔 여섯 개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백 개이었더라

 

'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구십 륙이요'

몇몇 세부적인 사항들은 왕상 7장의 내용과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여기서는 예루살렘 함락 당시 바벨론으로 약탈되어 간 성전 기물들에 대한

대략적인 요약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본장의 기록 목적도 세부적인 사실 전달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52:24 사령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여기서 다시 느부사라단이 등장한다.

'스라야'는 요시야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의 손자였다(대상 6:13-15).

스라야의 아들은 여호사닥으로서, 포로기 이후 성전 재건을 주도하였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부친이었다(스 5:2, 학 1:1 등 참조).

 

그리고 '부제사장 스바냐'는 29:24-32과 37:3에 언급되었던 스바냐와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 명의 문지기는 성전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이는 높은 직책의 제사장들이었다.

 

52:25 또 성 안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과 또 성중에서 만난 왕의 내시 칠 명과 군인을 감독하는 군 지휘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 안에서 만난 평민 육십 명이라

 

이들의 숫자가 본절에서는 칠 인으로 되어 있으나

왕하 25:19에는 다섯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군대 장관의 서기관'이란 것은 부사령관이나 부관 정도 되는 그런 위치였을 것이다.

'평민'(메암 하아레츠)의 문자적 번역은 '그 땅의 백성'으로서 일반 서민을 가리킨다.

 

52:26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그들을 사로잡아 립나에 있는 바벨론의 왕에게 나아가매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시드기야가 압송되어 갔던 립나로 이들 선발된 무리들

역시 이송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그곳에서 처형 당하기 위해서 붙잡혀 갔을 것이다(27절).

 

52:27 바벨론의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났더라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이들 포로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바 있으며(50:17-20, 51:45-49 등)

이런 내용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서도 나타난다(사 52:1-12, 겔 37장등).

 

반면에 바벨론에 투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나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52:28 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제 칠 년에 유다인이 삼천 이십 삼이요'

바벨론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여기서의 제 칠년은 B.C. 597년이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등극 년도인 B.C. 605년부터 계수한 것이 아니라

이듬해인 B.C. 604년부터 그의 즉위 년도를 계수한 방법이다.

 

열왕기하도 이와 같은 연대 계산법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때 잡혀간 유다인 삼천 이십 삼인은 유다 전역에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숫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왕하 24:14, 16에 언급된 포로들의 숫자와는 틀리는데,

아마 열왕기하에서는 이미 국외로 추방당해있던 사람들의 숫자를 모두 합하였던 것 같다.

혹은 본절의 숫자는 성인 남자만을 센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52:29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간 자가 팔백삼십이 명이요

 

'느부갓네살의 십 팔 년에' 바벨론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B.C. 586년에 해당되며,

열왕기에 따르면 그의 즉위 19년에 해당된다.

 

52:30 느부갓네살의 제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

 

'유다인이 칠백 사십 오 인이니'

28절에서부터 본절까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무리가 세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B.C. 597년,

두 번째는 B.C. 586년,

세 번째는 B.C. 581년의 사건이다.

 

본 절에는 세 번째로 끌려간 무리들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사건 이후에 발생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친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또다른 반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면 그다랴를 암살한 범죄에 대한 처벌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포로로 끌려간 전체 숫자가 4600명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가던 중에 죽었을 수도 있다.

 

비록 적은 숫자로 보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자들이

바로 이들 중에 있었다.

 

52:31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월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에윌므로닥은 느부갓네살의 아들로서 B.C. 561-56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의 원 이름은 '아멜-마르둑'으로서 '마르둑의 사람'이란 뜻이다.

 

'이십 오일'이란 말은 70인역(LXX)에서는 24일로, 왕하 25:27에는 27일로 표현되어 있다.

날짜가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떤 세부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시드기야 이전에 잠시 왕위에 있었던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석방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유다에서는 시드기야보다 여호야긴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여호야긴이 돌아오게 될 것으로도 믿고 있었다(28:1-4).

 

바벨론의 고고학 발굴에 나타난 그 당시의 기름 영수증에는

그가 '유다의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머리를 들게 하고(나사 로쉬)는 창 40:13, 20에 처음 나타나는 표현인데,

여기서처럼 '석방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나사'는 '높이다', '명예롭게 하다'의 뜻을 내포하므로, 로쉬는 머리,

여호야긴이 석방된 뒤에 후한 대접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52:32 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바벨론에 있는 왕들'이란 말은 여호야긴처럼 볼모로 잡혀온 피정복국의 왕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를 단순히 포로로서 잘 대우해 주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바벨론 왕실에서 특권을 지니고 생활하도록 배려하였음을 뜻한다고 본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윌므로닥은 어떤 연유로 인해

선왕(先王)인 느부갓네살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이때 여호야긴과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52:33 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왕의 면전에서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은 왕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이다.

여호야긴은 적어도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실은 앞에 언급된 기름 영수증에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은택은 그의 평생 동안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에윌므로닥을 몰아내고 그 후 왕위에 올랐던 네리글리살 때에도

그런 특권을 계속 누렸음을 짐작케 한다.

 

52:34 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에게서 받는 정량이 있었고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더라

 

본장의 마지막 네 구절(31-34)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오랫동안 살았으며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은

회복의 때를 예언한 예레미야의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의 징후였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미래가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이나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있다는 예언의 성취에 관한 전조(前兆)이기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