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놀람 애2장 출처, 정리
◑1.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놀람 애2:1-10
5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애가는 시인데, ‘알파벳 시 acrostic poem’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래서 오늘 본문도 모두 22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1)
▲1-10절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지에 대해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절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슬프다’로 시작됩니다. 1장, 2장, 4장이 모두 ‘슬프다’로 시작 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그 성경을 시작하는 첫 단어가, 책의 제목입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에이카(슬프다)’가 제목입니다. *공교롭게 ‘애가’와 발음이 비슷하네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구름으로 시온(예루살렘)을 덮으셨다고 탄식합니다.
‘진노하다’는 ‘코에서 불과 연기가 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시는 것을
‘진노하다’라고 표현합니다. 그 진노의 먹구름이 시온을 덮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시온은 그 무엇도 예외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시온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이 비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본래 구름이 덮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것의 상징인데,
이제는 진노의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온(예루살렘)이 얼마나 초토화되었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2절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거처들을 삼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처’는 ‘주거지’가 아니라 ‘초장’, ‘목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다의 주요 산업인 목축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성채들을 허물어 뜨려 땅에 엎으셨다’고 하십니다.
고대에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최고의 보호막은 성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너진 성벽으로 인해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담벼락과 대문이 없는 집에서 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나라와 지도자들은 욕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유다는 이제는 더 이상 나라도 없고, 왕도 없고, 지도자가 없는 곳이 되어서,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유다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3-4절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뿔을 잘랐다고 합니다.
‘뿔’은 문자적으로는 양이나 염소, 황소 등의 뿔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는 ‘힘’, ‘권세’등을 뜻합니다.
또한 그런 힘을 부여받은 사람, 특히 왕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3~4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는 ‘오른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오른손은 ‘권능’, ‘능력’, ‘구원’,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른손을 거두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더 이상 능력을 베풀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오른손을 들었다’는 것은 심판의 권능을 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6절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초막’을 헐어버리시고, 절기와 안식일을 폐하시고,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한 것을 보여줍니다.
‘초막’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여기서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표현입니다.
또한 초막은 ‘회막_만남의 장막(Tent of Meeting)’으로도 불렸습니다.
초막(회막)은 유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된 ‘만남의 장소’와도 같았습니다.
그것을 헐어버리신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유다 백성들을 만나 주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초막’이 유다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약속된 장소’라면,
절기와 안식일은 ‘약속된 시간’과도 같습니다.
대표적인 절기는 ‘유월절’인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절기와 안식일은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출발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이방 민족과 구별하게 해 주는 가장 또렷한 증거와도 같습니다.
이제는 그것은 잊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왕과 제사장’은 모두 기름을 부어서 세우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은 유다 백성들이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누구의 말씀을 받으며,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기억매체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9-10절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성곽과 성벽이 무너졌고 이제는 성문도 땅에 묻혔다고 합니다.
‘성문이 땅에 묻히다’는 것은 성문이 불에 전소되어 재가 되어 땅에 묻혔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성문은 드나드는 통로서의 기능은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있었습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공포하는 장소였고,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의 기능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능은 성문에서 각종 송사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진
법정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한 역할을 했던 성문이 무너졌다고 하는 것은
그 동안에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 판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 가운데 있다’는 것은
왕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음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매여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옥사했고, 신하들도 죽임을 당하거나 함께 끌려갔습니다.
또한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묵시(말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로 나라와 왕에게 자문역할을 했던 장로(원로)들이 할 일이 없게 되었고,
또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생에 가장 꽃다운 나이에 있어서 결혼을 준비하며
미래를 꿈꾸고 있어야 할 처녀들이 소망이 없어지고
절망만이 가득한 암울한 상황을 말합니다.
유다의 적령기의 청년들이 전쟁으로 죽음을 당하고,
이제 자신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종의 신분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중보 2:11~22
11-22절은 심판을 바라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처절한 호소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1-12절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부아(폐)가 치밀어 오르다’와 ‘간이 배 밖에 나왔다’ 등 우리말도
신체의 장기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대부분의 언어에서 신체의 장기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히브리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참담한 심경을
장기를 예로 들어 3중적으로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첫째는 ‘내 눈이 상하며’라고 합니다.
18절에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증거합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물에 담가 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이 흐려지고
생선이나 고기가 부패할 것입니다. 그처럼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무 많이 운 것이
마치 눈동자를 물에 담가놓은 것과 같아서 눈이 상하였다고 합니다.
둘째는 ‘창자가 끊어지며’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에도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단장(斷腸)’입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말이죠. 주2)
셋째는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간’은 ‘격한 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이 쏟아졌다는 것은 극한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라 잃은 슬픔은 이러한 표현(눈이 상함, 창자가 끊어짐, 간아 쏟아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더 나아가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곡식과 포도주(먹을 것)’가 없느냐며
굶어 죽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시드기야왕 통지 9년인 B.C. 588년부터 1년6개월 동안 예루살렘은 포위되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시내에 1년 6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것이 외부로부터 아무 것도
공급되지 않는다면, 참극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물며 2500년 전이겠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처참한 것도 견디기가 어려운데, 주변의 나라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15-16절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고대 각 도시들은 자체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모든 전쟁은 신들의 대리전이었습니다.
즉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이 이기고 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지거나, 재난을 당한 도시나 국가를 공개적으로 비웃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무너지게 되니,
‘지나가는 사람들’, ‘원수들’로 대변되는 이방인들은 박수를 치면서 비웃고,
머리를 흔들어가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를 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것보다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싸늘한 눈빛과
비꼬는 듯한 말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 고통과 이방인들의 조롱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습니다.
▲이 같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기”(17)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그들은,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축복의 언약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거기 나타난 저주의 언약이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언약이 뭐 진짜 이루어지겠나?’ 그게 아니라,
그 언약이 일점일획도 틀림 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이 1년 6개월 동안 포위되었을 때,
성 중의 여인들은 서로의 아이를 잡아먹었습니다.
그것은 신28장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신28:55, 57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시대 홍수심판을 무시하다가 심판받았던 이들처럼
이스라엘은 귀를 막고 외면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말에 미혹되어 죄를 간과했습니다.
바로 내가 그처럼 오늘과 같은 심판의 날이 도래함을 선포할 때, 돌이켰더라면
이 같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적군의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미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을까요.
18~19절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쉬지 말고 하며, 가식적으로 하지 말고,
물을 쏟듯이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간절하게 토로하되,
지금 죽어가는 미래의 희망인 어린 자녀의 생명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달리 무엇을 하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기도할 때 이스라엘은 과거 선지자들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던
자신들의 죄악을 뉘우치게 합니다.
기도는 현재의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게 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뉘우친 사람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의탁합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깊이 신뢰하는 기도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원동력입니다.
또한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일원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가 없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존재하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바로 이 시대를 향한 노아와 예레미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육적인 향락만을 추구하는 이 세대를 보면서 “에이카”라고 탄식하고 애통해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탄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메신저로 택하셨기에 우리는 깨어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되, 우리 가족, 일가친척, 동료
그리고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이 사회와 나라
그리고 민족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외면하지 않으시고 듣고 계십니다.
▲20-22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참상을 겪고 있는 유다를
다시 한 번 기억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20절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이 부분은 읽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데,
“하나님, 어떻게 어머니가 자기가 낳고 기른 자녀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성전에서 맞아 죽을 수 있습니까”라고 절규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렇게 행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라고 처절하게 절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21-22절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길거리에서 살육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치 절기(명절)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살육을 당했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고,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노래하는 예레미야애가는 정말 슬픈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향해 호소하는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도원 심겨졌을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해 찍힘을 당할 처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위해서 중보하는 포도원지기와 같습니다.
포도원지기가 포도원의 주인에게 무화과나무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를 요청하면서,
무제한으로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한 해만 더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한 해, 한 해 오랫동안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 한해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왔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한 해, 한 해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과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을 목적 삼고 살아감으로
진리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한날과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백성들이 살육당하는 끔찍한 상황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 2:11~22절을 통해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합3:2
정말 단장이 끊어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2:11절
간혹, 부모가 징계한다고.. 집을 나가버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911같은 대형 사고가 터지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등돌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지 말고, 오히려 겸손하게 주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의 예레미야처럼요!
1) 유다 왕 여호사밧을 보십시오.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을 때에 겸손하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많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가문과 혼인을 맺을 뿐 아니라
함께 손잡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대하 18:1, 19:2)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에 진노를 내리셨습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마온 사람과 함께 연합하여 유다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중에 하나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은 매우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모압과 암몬 마온의 3개국 군인들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모두가 죽었고,
유다나라는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서 찬송만 불렀는데도 기적으로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 중에도 즉,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어서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가져왔던 전리품을 3일 동안이나 거두어서
나라의 경제가 회복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 그 유명한 다윗왕도, 히스기야 왕도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노를 받는 중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와 회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많은 실수가 있었고, 본의 아니게 죄를 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노 중에도 오히려 그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게 감사합시다.
3)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복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꾸중을 할 때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를 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을 주면서 야단을 치고, 칭찬을 하면서 야단을 칠 때도 있습니다.
매를 때리면서도 일부러 살살 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기에 진노의 강도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 중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이고 하나님의 뜻이니까, 얻어 맞자' 이렇게 버튕기면 안 됩니다.
본문의 예레미야처럼, 또한 하박국처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고, 간절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야 합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갔지만,
그러나 '진노 중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그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자기 사명을 계속 감당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 에스라, 모르드개 등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 포로의 징계'를 통해서 변화되어,
그 이후에 '바알과 아세아의 우상숭배'의 죄를 드디어 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는 완전히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풍요'를 좇다가 망했다는, 철저한 교훈을 배웠던 것입니다.
좋지도 않은 것을, 왜 숭배한다고 좇았겠습니까? 좋으니까 좇았던 것입니다.
바벨론은 '벨'신이 있었는데, '바알'의 바벨론 식 이름입니다.
'이쉬타르'는 '아스다롯'의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그걸 버렸다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잠시 징계하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언약은 결코 깨뜨리지 않으십니다.
........................................
주1) 예레미야애가는 ‘알파벳 시’
예레미야애가는 ‘알파벳 시’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자음)이 22자입니다.
그래서 1, 2, 4 장이 모두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단어가 A, B, C, D, E .. 이렇게 알파벳 순서대로 나오죠. *알레프, 베스, 김멜...
이렇게 알파벳 시를 만드는 이유는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알파벳 시’를 한글 가나다 순서로 예를 들자면
가정이 화목해서 모든 일이 편안하네
나의 삶에 활력이 샘솟게 해 주는 우리 가정
다른 그 어느 곳에서도, 그 행복을 찾을 수 없네
2: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알레프로 시작 אֵיכָה
2: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베스로 시작 בִּלַּע
2: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김멜로 시작 גָּדַע
그런데 3장은 모두 66절이죠.
각 3절씩 묶어진 ‘알파벳 시’입니다.
1~3절은 알레프로 시작,
4~6절은 베스로 시작
7~9절은 김멜로 시작
마지막 64~66절은 타우로 시작
히브리아 알파벳이 모두 22자이니, 총66절이 되는 겁니다.
5장의 경우는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어 있지는 않지만
앞의 시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22개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가 이같이 균형 잡힌 시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은
기억과 암송을 용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주2) 단장(斷腸)
중국 동진의 환공이 촉나라를 정벌하러가다가 양자강에서 새끼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배에 싣고 갔는데, 어미원숭이가 울부짖으며 100여리(약 40㎞)를 따라왔다고 합니다.
배가 정박했을 때 배로 뛰어오른 원숭이는 그대로 숨졌는데,
환공이 어미원숭이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전해진 말.
옛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도 같은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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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별 해석
2: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천둥치는 구름처럼 유다 왕국을 덮고 있으며
무서운 권세로서 그 진노를 폭발시키실 것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사1:7, 렘4:31, 6:2.
이 민족은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특권을 나타내는 증표로만 생각했었으나,
도덕적, 영적 영역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그런 특권적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민족의 찬란하던 수도는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신성 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성소도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성소가 이처럼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2: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전유다가 황폐해졌다. 70인역은 '나라' 대신에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왕과 그 대신들도 그들의 영광스럽던 신분을 다 상실했다.
‘욕되게 하셨도다' 의 히브리어 '할랄'은 '상처를 입히다', '살해하다', '모독하다',
'더럽히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2: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뿔'에 해당하는 '케렌'이란 말은 구약에서 권세와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사용된다.
본절은 거대하고 튼튼한 성과 요새들이라도
하나님의 분노가 집어 삼킬 때는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2:4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자기 백성에 대한 강력한 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백성들은 오랫동안 죄와 우상 숭배에 젖어서 하나님께 대항하여 왔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사되었던 하나님의 권세가
이제 이들을 파멸시키는 목적으로 등장한다.
본절에는 불타오르는 장막이 예화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좋은 것이면 무엇이나
약탈해 가는 약탈자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는 그나마 약탈해 갈 만한 좋은 것도 없다.
또한 '불'의 이미지가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이를 심판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마13:42, 18:8, 25:41 등.
2: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귈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근심과 애통'은 히브리어 '타아니야'와 '아니야'를 번역한 말이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로 두운법을 이루고 있으며 통렬하고 날카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개역 성경에서는 그런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
2:6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2: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수세기 동안 이 민족의 자존심이었던 찬란한 솔로몬 성전도 이 파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8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여기서는 건축자가 어떤 건물을 파괴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여호와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시온이 황폐화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의 '곽' 곧 성벽이란 말은 일부로서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법적 표현으로서,
예루살렘 성벽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파괴 작업은 너무나 정확하고 섬세하여서
성전 돌 하나가 다른 돌 위에 놓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독교 초기에 예루살렘은
다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된다. AD 70년, 마24:2, 막13:2, 눅19:44, 21:6,
2: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7절에서는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나,
8절과 본절에는 다시 예루살렘 성의 파괴와 왕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애도하고 있다.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율법 없는' 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판이나 돌에 새겨 성전에 비치된 율법이 갈대아인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져버린 사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처럼 이를 '열방'을 수식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이스라엘은 제의적, 도덕적, 시민법적 차원의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권을 누렸으나
이를 거역하고 파기함으로써, 이제 이방 땅에 추방당하여 율법 없는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2:10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장로들'은 가문의 머리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리고 민 11:25에는 모세를 도와서 백성들의 재판을 주관하기 위해서
장로 70인이 임명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출 24:1 참조.
그리고 가나안 정착 시대 이후에는 각 고을에 장로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지역적 문제를 관장하였다. 신 19:12, 21:2, 삿 8:14 참조.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알려진 이 국가적 위치의 집단은 포로기를 전후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이 땅이 황폐해졌기 때문에
장로들은 더 이상 시민의 업무에 관여할 것이 없었다.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란 말은 슬픔과 애도의 독특한 표현이었다. 욥 2:12, 겔 27:30.
'굵은 베' 옷은 초상집에서 입던 것으로서, 고인을 애도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창 27:34, 삼하 3:31.
이것은 주로 염소 털로 만들어졌으며 검은 색깔이었다.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창자'와 '간'이란 말은 예리하고도 견딜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이나 슬픔을 상징한다.
간은 정신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또한 깊은 정서적 반응과 결부된 곳으로 여겨졌다.
몇몇 영역 성경들은 이를 심장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heart, NIV, RSV,
이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예루살렘 포위 공격 동안 어린 아이들이 당한 그 처절한 운명이 언급되면서
슬픔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주제는 19-21절과 4:4, 10 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곳에 보여지는 생생한 장면은, 그것을 묘사한 자가 목격자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이 아이들은 어미 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양식을 호소하고 있다.
'곡식과 포도주'란 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기보다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식량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한편, 이런 장면들은 민족이 회복될 때의 약속의 상황,
곧 예루살렘 거리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행복한 때와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슥 8:5.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시인은 그들의 고난이 너무나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굳이 비교한다면 바다의 크기에나 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다는 그 크기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황폐가
마치 태초의 혼돈의 바다를 연상시킴도 아울러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 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본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거짓 선지자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밝히며
렘 23:18-22, 겔 13:10-16,
또한 이 거짓 선지자들을 환영하고 좇은 백성들의 영적 우매도 신랄하게 지적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위대하고도 찬란함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또 신성 불가침이라는 대의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어서
그들이 해야 할 의무는 실행치 않고 기득권 유지와 세속적 인기에만 연연하고 있었다.
한편 '어리석은'이라 번역된 '타펠'은 음식에 적용될 때에는
‘평범한', '맛없는'이란 뜻이지만 '우둔한', '거짓된'의 의미도 내포한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유다의 대적들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짐으로 매우 기뻐하는 광경이다.
한편, 고대에 각 도시들은 그 자체의 신들을 섬겼는데
그 신들이 비록 서로 경쟁적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재난을 당할 때는 공개적으로 비웃거나 하는 것을 자제하고
상호 묵과해 주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두고 대적들이 기뻐 뛰며 조롱과 혐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또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며
예루살렘이 그 수도임을 주장하면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자부심에 대해 주변 국가들은 시기하고 있었던 바,
그 도시가 파괴되자 마치 자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처럼 기뻐하였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여기서 시인은 유다를 대적자들의 비소거리로 전락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지적한다.
포로기 이전 대다수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는 변함이 없으심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그 성전을 버린다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노골적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선언하셨던 내용은, 오경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 뜻에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 레 26:1-45, 신 28:15-68.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본절에서부터는 주제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는 이 책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시인은 황량한 이 도시를 향해서 하나님께 탄원할 것을 촉구한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생존자들의 잠을 깨워 이전의 죄악으로 인해 처절한 심판을 받았다는
슬픈 사실을 상기 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는 특이한 표현은
열정적이고도 진지한 기도를 나타낸다.
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여인들이...아이를 먹으오며' 부모들이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죽은 자기 자녀들을 먹는 끔찍
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광경은 예루살렘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허물어져 간 그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극명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아마 시인의 뇌리에는 그때의 그 사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2: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내 처녀들과 청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젊은 남녀들이 살육당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세대란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시온은 이제 바람의 씨를 뿌리면 결국 태풍을 거두게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변함없으시고 또 일관된 신적 심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2: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