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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4장 호세아의 첫 번째 설교

LNCK 2025. 6. 28. 21:3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호세아서 

 

◈호세아의 첫 번째 설교             호4장                         여러 설교 정리

 

▲도입

모두 14장으로 구성된 호세아를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면,

1-3장과 4-14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인 1-3장은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사(家庭事)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그에 따른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인 4-14장은 북이스라엘 백성의 심각한 타락에 대한 지적과 경고,

용서와 회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3절은 4-14장까지의 서론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것과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연까지 쇠잔해질 것을 고발합니다.

 

<호세아>의 두 번째 단락은 4~14장인데,

<이스라엘을 향한 호세아의 고발과 경고에 대한 모음집> 9편의 설교로서,      주1)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신랄하게 지적하지만, 

맨 마지막은 아주 희망적인 시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호11:8~11, 14장

 

◑1. 있어야 될 것은 없고, 없어야 될 것은 있는.. 거꾸로된 형편    4:1~3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먼저 있어야 될 게 없습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는

이런 참담한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1

 

이런 인간의 타락은, 자연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들짐승과 .. 새가 ..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3

 

꼭 있어야 될 것들이, 다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없어야 될 것이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니까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없고’를 3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땅에는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라고 모아서 쓰며,

‘없고’를 한 번만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번을 반복해서 씀으로 없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진실도 없고’     *에메트, truth

‘진실’은 ‘진리’와 ‘신실’을 뜻하는 말입니다.

진실이 없다는 것은 바름의 가치관도 없고, 바름을 따르는 삶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2) ‘인애도 없고’       *헤세드

‘인애_헤세드’는 ‘언약적인 사랑 unfailing love’과 ‘변치 않는 사랑 steadily love’이죠.

인애가 없는 것은 이런 사랑을 받고서도 받은 사랑과 상관없이 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다아트 knowledge of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다아트'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다아트'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 신들을 섬기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죠(롬 1:21).

 

게다가 사랑과 진실을 도외시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호세아서에 반복해서 나오는 키워드입니다.

4:1절에 이어서 4:6절에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오늘날 성숙한 교회, 부흥하는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알자’고 외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2,750년 전에, 호세아 선지자가 이 주제를 외쳤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정말 하나님과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신령한 지혜, 지식’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외치지 않았는데, 호세아 선지자가 제일 먼저 외쳤습니다.

 

앞서 잠언에서 ‘지혜, 하나님 경외’를 외치기는 했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알자’고 외친 선지자는.. 호세아가 독보적입니다.

오늘날에는 폴워셔 목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강하게 외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앙의 진정성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신앙, 껍데기만 보여주는 신앙,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진짜 기독교 내면적 신앙, 신앙의 속 알맹이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없어야 될 게 있습니다.

‘오직 저주속임살인도둑질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2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은 십계명의 3, 9, 6, 8, 7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이런 죄들이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고 현재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주’, ‘속임’, ‘살인’, ‘도둑질’, ‘간음’이 줄줄이 사탕처럼 저질러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게 될 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3

 

그 영향이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 온 자연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슬퍼하다’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 매우 슬퍼하며 우는 통곡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세상에 예속된 관계도 아니며,

사람은 모든 피조세계를 대표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3:18

 

땅의 슬퍼함은 고대보다 지금이 훨씬 더 심할 것입니다.

자연은 우리만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 후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자연과의 바른 관계도 세워집니다.

 

▲적용 / 마땅히 있어야 될 게 없으면, 그 빈자리에 엉뚱한 것이 들어옵니다.

 

예수님도, ‘...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죠. 마12:44~45

 

우리 속에 꼭 있어야 할 것, 진리,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여러 가지 ‘없어야 될 것’들이, 침투하게 되고, 내 속에 똬리를 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국이나 한국의 지방에 가면, 주인이 없는 ‘빈 집’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야말로 흉물 그 자체입니다. 집은 있는데, 그 속에 사는 사람이 없으니,

마당에 잡초들은 무성하고, 문이나 창문은 절반 부숴져 있고,

짐승이나 도둑들이 들어와서, 집을 거의 망쳐 놓습니다.

있어야 될 것이 없으니까, 없어야 될 것이 가득 있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타락       4:6~9

 

4-9절은 제사장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이 타락하여 우상숭배하며

타락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심판과 경고입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제사장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제사장의 임무는, 제사를 집례하는 것 말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 재판하는 직무도 있죠)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인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본문에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 그것이 제사장의 큰 죄라는 것입니다.

 

목자의 임무는, 양떼를 살지우게 잘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떼가 꼴을 먹든지 말든지 나는 상관 안 하겠다’ 하는 목자, 또는 제사장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무관심했던 제사장들에게서,

그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빼앗아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실제로 이스라엘이 망한 이후에, 모든 제사장들은 다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제사를 못 드리게 되었으니, 제사장들도 다 없어지게 된 것이죠.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을 '잊어버리는 것'(솨카흐)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이방인과 같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호세아의 예언이 선포된 지 약 20~30년 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했는데,

그때 열 지파는, 죽거나 이방인들과 혼혈되어서

거의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사마리아인’들만 남게 되었죠.

유대인들은 그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취급을 했죠.

 

이것이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제사장들의 첫 번째 큰 죄였습니다.

 

2) 번성할수록 더 타락한 제사장들

 

호4:7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위 구절이 선포한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도 될 수 있으나, ‘제사장’들로 봅니다.

왜냐면 지금 6절~9절까지 문맥이 ‘제사장’들에게 계속 선포하는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번성할수록... 타락하는’ 이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과거에 못 살고 힘들 때는,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이들이,

조금 형편이 펴고 수입이 늘어나면.. 다들 신앙이 퇴보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면, 또 그들을 가난하게 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목적은, 자녀들이 믿음에 부요하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했죠. 약2:5

 

그래서 번성할 때.. 타락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사장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보통 얼마나 가벼운지 (천박한지)

조금 권세를 줘 보고, 조금 물질을 줘 보면.. 금방 그의 가벼움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던 사람이..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 형편이 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호세아가 예언하던 당시 여로보암2세 시대는,

북왕국 209년 존속기간 중에서, 가장 부유하던, 잘 나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2세 이후로, 나라는 급전직하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6명의 왕들이 수시로 바뀌며, 그 사이에 쿠데타가 3번이나 일어납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침입해 왔을 때, 버텨낼 내부 결속력이나 힘이 전혀 없었던 거죠.

 

‘살진 양을 먼저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로보암2세 때의 번성은, 꼭 그와 같은 ‘번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이렇게 번성했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번성이, 나를 더욱 나태와 타락으로 이끌어가는 번성이라면,

호세아가 예언한 ‘본문의 제사장들’과 같은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제사장들의 지나친 ‘제사 강조’

 

호4:8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쳐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만,

병원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환자 수를 자꾸 늘이려고 하는 것은, 큰 잘못이죠.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집례해 주는 일은 선한 일이지만,

제사할 때 남는 제물(갈비뼈 부분과 넓적다리)을 얻기 위해서,

제사를 장려하는 것은.. 큰 잘못이죠. 위 8절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제사장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희생 제물을 더 많이 바치게 하여,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속죄 제물의 고기를 많이 거두어들였다는 것이죠. (레6:26, 10:17).

 

이것은 제사장들의 삶의 방식이 탐욕으로 가득 찼음을 보여줍니다.

이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의로운 행위를 가르치기보다는

가증스럽게도 ‘제물만 많이 바치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8:13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따라서 백성들의 제사 행위는, 제사장들의 죄악을 쌓는 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말씀(율법)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제사를 드릴 것’만 강조하게 되는 거죠.

별 의미 없는 제사만 반복해서 드리도록.. 그러면 다 되는 것처럼, 가르친 것입니다.

 

호4: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제사장이 먼저 타락하니, 자연히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도 따라서 타락하는 거죠.

백성이나 제사장이 모두 타락해가고 있는 현재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하 10~19절은, 제사장에서 → 제사장을 포함한 전체 백성들도

호세아의 예언의 대상이 옮겨갑니다. 주2)를 참조하세요.

 

그래서 아래의 '적용'은

위 구절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제사장으로서의 '좋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적용 / 20년동안 한결같은 컨디션을 관리한 사람

여러분 지금 미국의 농구선수 중에 최고 스타가 르브론 제임스예요.

1884년생이니까 지금 40살이에요.

 

고등학생 때도 물론 탁월했지만, NBA에 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이 됐어요.

르브론 제임스가 20년 동안 뛰었는데, 그의 신체 조건이 20대 때 컨디션과 똑같아요.

영적 지도자들이, 이걸 보고 배워야 된다는 거죠.

 

여전히 20대처럼 초스피드로 뛰어요.

모든 기록을 지금 갈아 치우고 있어요. 그 신체능력과 농구 실력이 탁월해요.

20년 동안 변함없이 커리어를 갈아 치우는 거예요.

 

자기의 소원은 뭐냐면 50세까지, 앞으로 10년 더

이 컨디션을 계속 유지할 거라는 거예요.

 

지금 아들과 함께 레이커스 팀에서 뛴단 말이에요.

그는 설탕을 섭취 하지 않는다고 해요.

생일 파티 등등 어떤 것으로도, 늦은 시간까지 어디에서 그냥 노는 법이 없어요.

 

친구들이 옆에서 팝콘을 막 먹어대어도, 자기는 맛없는 너트를 먹고 있고,

철저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자기 몸 관리를 하는 걸 보면

운동선수인데 거의 수도승처럼 해요.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는 거예요.

최상의 몸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느 언론이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고 찬사를 하는 거죠.

그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계속 스트롱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화려한 스타플레이어 예요. 화려해 보여요. 몸값이 천문학적이에요.

그 자리에 올라서는 것도 어렵지만, 계속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워요.

 

맨 아래 찰스 스펄전의 예가 나오지만, 신실한 제사장은

자기 영적 컨디션을 늘 일정하게, 유지 관리한다는 거죠...

 

△어떤 목회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균적으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1) 무명기, 알려지는 시기 10년

한 목회자가 개척을 해서 열심히 뜁니다. 이 기간이 10년이랍니다.

이 시기는 아직 무명입니다. 그가 알려지기까지는 약 10년이 소요된답니다.

 

2) 성장기 10년

그가 알려지면... 이제는 그의 교회가 성장합니다.

이 시기가 또 10년이라는 거죠. 10년 동안은 초고속으로 성장합니다.

 

선진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1~2%에도 못 미치지만,

계도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6~10%를 상회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무명의 목회자가 10년 고생해서, 인지도를 얻어서 ‘성장기’에 접어들면

그의 목회 성장 지수가 팍팍 올라갑니다. 외형적 성장을 뜻합니다.

 

3) 안정기 20년

그런데 10년이 지나서도, 계속 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거의 없다고 하죠.

왜냐면 성장기 10년이 지나면, 이제 ‘안정기’로 들어가는데, 다른 말로 하면 ‘정체기’죠.

 

이제 그의 사역도 제법 큰 규모가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거기서 안주하면서, 정체하는 것입니다.

 

성장기에는 그의 설교가 예리했습니다.

그런데 안정기에 들어가면, 그의 설교가 밋밋해 집니다.

과거와 비슷한 내용의 설교인데, 열정이 식었고, 열기가 미지근해 졌습니다.

좀처럼 과거의 예리함을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사역은 별 탈 없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왜냐면 교회 시스템이 안정기에 들어섰기 때문이죠.

그건 ‘대통령이 탄핵되어 공석이어도 나라가 별 탈 없이 돌아가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유형의 목회자는 ‘전성기 수명’이 10년인 거죠.

그런데 서두에 예를 든 미국의 농구스타 르브론 제임스는,

20년이 지나도, 지금 40세가 되었는데도

20년 전 20세 때의 기량이 전혀 녹슬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15세에 회심하고, 16세에 비공식적으로 설교를 시작했으며,

17세에 설교자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1850년 1월, 15세의 나이에 회심한 후,

1851년 10월, 17세의 나이로 가정에서 첫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1852년 1월에는 케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 침례교회에서

정식으로 설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설교의 황태자’로 불립니다. prince of the sermons

그가 1892년 소천하기까지, 총 3,563편의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가 쓴 책은 제외하고도 말입니다.

 

그가 남긴 설교 대부분이, 인터넷에 지금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50년 전의 설교인데도, 현대 설교자들과 견주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설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황태자’인 명성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도 말하는 (설교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그의 설교의 질 quality는, 대부분 대단히 ‘고급’입니다.

질이 떨어지는 설교는... 찾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스펄전의 설교는 복음 설교의 특징을 지니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성경, 죄의 타락성, 은혜 교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구원의 영광을 주제로 다룹니다.

 

그는 설교 한 편을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참고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설교는 신학적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아비의 마음,

열렬한 기도가 담겨있다고 평가됩니다.

그는 19세기 당시 침체된 영국 교회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그의 설교가 남아서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을 구하고 있죠. 심지어 지금도요!

 

이렇게 ‘있어야 될 것이 있으면,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

 

주1) 호4:1-14:9은 모두 9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1)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4:1-5:4),

2)인간의 교만을 지적함(5:5-6:3),

3)인애가 없으므로 망함(6:4-7:7),

4)세속과 혼합된 죄를 책망함(7:8-8:14),

5)부패의 죄로 징벌을 받음(9장),

6)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10장),

7)인간적인 계책을 책망함(11장),

8)우상 숭배의 죄악을 다시 책망함(13장),

9)회복에 대한 약속(14장)

 

주2)  4:10~19절까지의 절별 해석

 

호4:10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혹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더라도

지칠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큰 축복이었는데,

‘수효가 늘지 않는’ .. 즉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0절의 ‘음행’은 우상숭배에 따르는 ‘음행’으로 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니,

삶에 만족도 없고, 수효도 늘어나지 않는...

즉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와 연관된 음행은 종족 번식이라는 명분(소원)과는 달리

생식을 막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맙니다(28:18).

 

호4: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본절은 10절에서 여호와 좇기를 그쳤던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곧 음행과 술취함에 의해서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구하는 지성, 감정, 의지의 인격을담고 있는 마음을

음행과 술취함이 몽롱하게 함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여호와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여호와를 버리게 되었음을 뜻한다(신 31:16).

결국 그들의 방종과 도덕적인 타락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 숭배에 흠뻑 취한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호4: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백성들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 행위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나무로 새긴 우상에게 신적계시를 묻는다(렘 10:3, 합 2:19).

특히 이것은 드라빔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3:4). 드라빔의 재질이 나무.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막대기'(마켈)는 여기서 우상의 형상을

나무 꼭대기에 새겨서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막대기가 넘어지는 방향에 따라서

예언이 응답되는 것으로 믿는 점술적인 도구의 하나로 여겨진다.

 

'이는...떠났음이니라'

나무 우상에게 신탁을 구하고 점복술을 통하여 소원을 얻으려는 이스라엘의 우매함과

가증스러움에 대해 호세아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5:4).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감각적인 행음에 빠져서 더이상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언약에서 떠남으로써 멸망의 길을 자초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배후의 세력은 '음란한 영'(루아흐 제누님) 곧 악한 귀신의 능력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기보다는

음란과 우상 숭배를 자극하는 사탄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호4: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저희가 산꼭대기에서...작은 산 위에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교도적인 우상 숭배와

제사 의식을 거행한 사실을 나타낸다. '산꼭대기'는 아마 하늘과 신을 가까이 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선택된 듯하며(신 12:2), '작은 산' 역시 동일한 이유로 분향의 장소가 되었다.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산과 언덕들의 꼭대기뿐만 아니라 푸른 나무가 있는 곳마다 우상 숭배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푸른 나무로 우거진 숲이 태양의 뜨거움을 막아주거나,

또는 방탕한 의식을 거행하기에 적당하도록 은밀한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호4:14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딸들과 며느리들의 행음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에서 제외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죄악보다 남자들의 죄악이 더 많고 크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을 징계함으로써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아서 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제멋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이다(1:24).

이것은 여호와의 임재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음을 뜻하며,

동시에 그 백성들은 전적인 파멸에 떨어졌음을 시사한다(P.Butler).

 

'남자들' 원문에서는 '저희들'(헴) 곧 여자들의 남편과 아비들을 가리킨다.

 

'창기와 함께 나가며'

'나가며'의 '파라드'는 창기와 홀로 있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음부와 함께' '음부'(카데솨)는 아스다롯을 섬기기 위하여 신전에 바쳐진 방탕한 여자를

말한다. 남자들은 우상제사에 참여하여 음부들과 함께 부끄럼없이 음행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망하리라'의 '라바트'는 '밀어 넘어뜨리다', '내팽개치다' 등의 뜻으로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잠 10:8,10).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죄악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어 패망하게 될 것이다.

 

호4: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아...할 것이라' 이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을

유다 백성이 배우지 않도록 권고하는 내용이다.

이로 볼 때 당시의 남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 죄악의 위험 수위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 같은 대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행음을 징벌하지 않고 계속 방치하는 것은

이미 그 백성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길갈' 이곳은 이스라엘에 위치하였으며, 한때 선지 학교의 자리였으나(왕하 2:1, 4:38),

호세아와 아모스 시대에는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9:15, 12:11, 암 4:4, 5:5).

 

'벧아웬' 이곳은 일반적으로 벧엘 남동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알려졌으나(수 7:2),

여기서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웠던 '벧엘'을 다르게 부른 이름이다.

즉 하나님의 집이었던 벧엘이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자

선지자는 이곳을 '벧아웬', '사악한 집'이라고 언급한 것이다(10:5).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는 우상 숭배자들처럼 우상을 섬기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가증스러움을

배우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인하여 맹세하라고 하셨다(신 6:13, 10:20, 렘 4:2).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 신을 섬기면서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모방하는 망령된 행동을 했다.

 

호4: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완강하다'의 '사라르'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완악함으로 반역하는 것을 의미한다(신 21:18).

이스라엘은 멍에에 익숙지 못하여 다루기 힘든 송아지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고 반역하였다(렘 31:18).

 

'이제 여호와께서...먹이시겠느냐'

대부분의 번역본들(NIV, RSV, JB, NEB)과는 달리 맛소라 원문은

의문문이 아닌 평서문으로 되어 있어서 본 구절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뉘어진다.

 

1)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경우:이스라엘의 완강함 때문에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넓은 초장에서 어린 양을 먹이는 것처럼 먹이시지 않는다.

이 때에 '넓은 들'(메르하브)은 풍요와 축복의 초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2)평서문으로 해석하는 경우: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길잃은 어린양처럼 넓은 들에 버려두고

돌보지 않으신다. 이 때에 '넓은 들'은 사나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광야로 이해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상기시킨다. 한편, 본 구절을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넓은 초장의 어린양처럼 유순하게 되어 목자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거나,

아니면 살육을 위한 잠시동안의 포식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문맥상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본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가려내기란

그리 쉽지 않으나 이스라엘의 고통과 역경을 암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호4: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에브라임' 북왕국의 가장 뛰어난 지파 이름으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킨다(5:3,5, 사 7:2).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연합하다'의 '하바르'는 '교제를 나누다', '동맹

또는 계약을 맺다', '하나가 되다' 등의 뜻으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비통의 원인은 바로 우상과 연합한 이스라엘의 무지와 완악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라'(한나흐-)고 하신다.

이는 모든 훈계와 책망에서 '그들을 놓이게 하라'는 뜻이다.

 

즉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의 죄악된 행동을 막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최종적인 형태이다(롬 1:24).

 

따라서 본절은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우상 숭배에 대한 훈계와 책망이 헛된 것임을 선언하고,

최후적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내려질 형벌은 그들의 계속되는 죄악과 더불어 높게 쌓여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쌓여진 형벌이 이스라엘의 머리 위에 임할 것임은 자명하다.

 

호4:18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본 구절은 '다하다'에 해당하는 '사르'를 어떤 뜻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

'사르'는 '수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떨어지다', '제거하다', '떠나다', '외면하다', '그만두다',

'버리다'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서 그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술이 시다'라는 해석이나(KJV), '사르'를 '사드'로 고쳐서

'술주정뱅이 무리들'(A band of drunkards, RSV)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어색하다.

 

보다 가능한 해석은 1)더 이상 마실 것이 없을 때까지 술을 다 마셨다.

2)저희의 술이 타락하였다(렘 2:21 참고)이다.

 

이로 볼 때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술취함과 방종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한편, 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저희의 타락한 현실을 술취함에 비유한다고 보아도 어색하지는 않다.

 

'음행하였으며' 원문에는 '하즈네 히즈누'로 기록되어서 이스라엘이 매춘 행위를

계속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술취함과 방종은 결국 부도덕한 음행으로 연결되었다.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방백'에 해당하는 '마겐'은 '방어하다'의 '가난'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방패'를 뜻하나, 여기서는 나라를 보호하는 방백들을 상징한다(시 47:9, 89:18).

 

'수치'(칼론)는 사회적 또는 국가적 지위가 낮아지는 치욕적인 부끄러움을 뜻한다(렘 46:12).

그리고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부 헤부'는 히브리어 난제 가운데 하나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하브'(사랑)를 반복하여 강조한 형태로 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저희의 방백들이 수치를 극진히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의미이다.

RSV는 이를 '그들이 저희의 명예보다 수치를 더 사랑한다'고 번역했다.

 

호4:19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나니' '바람'의 '루아흐'는 강한 파괴력을 지닌 '태풍'이나 '폭풍'을 상징한다(겔 13:11).

'싸다'의 '차라르'는 '묶다', '봉하다' 등의 뜻으로 결국 바람에 날려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사 57:13).

 

결국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받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포로로 끌려갈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기도 한다.

 

'저희가...당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희생 제물은

그들에게 복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판의 정당한 증거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이방 나라에게 조롱을 받는 치욕으로 나타난다(10:6, 렘 2:36).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감각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희생 제물을 바친 죄악으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으로서 부끄러운 멸망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