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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6장 보시고, 들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

LNCK 2025. 8. 25. 19:4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보편성>

보시고, 들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  (2025-05-18) - YouTube

 

◈보시고, 들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        창16:6~16               2025-05-18  

◑도입

성경을 읽다 보면, 수많은 믿음의 영웅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모세, 다윗,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웅장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그들의 삶에 의해서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이런 마음이 솔직히 들기도 합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는 모세니까... 그는 다니엘이잖아... 그는 다윗이잖아... 
나는 그들과 다르다' 이런 생각을 종종 갖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쓰임받은 것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쓰임받은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나와 내 가정은 그들과 다르다' 라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 쓰임받은 것이 아니라, 
특별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아름답게 사용받은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그저 보통의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처럼 두려움이 많고, 무엇인가 시도하기를 주저하며, 
무언가 인생에 큰 변화를 이루기 보다는, 소소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들 안에도 있었습니다. 

모세 역시 처음 부름받았을 때, 이렇게 반응했어요.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그와 같은 일을 행하겠습니까?' 하는 것이 
모세의 솔직한 마음이었어요.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 역시 처음 부름받았을 때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렘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예레미야는 큰 슬픔 가운데 처했어요.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사사 가운데 가장 큰 전쟁에서 승리하였던 기드온, 
그 역시 처음 부른받았을 때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삿6: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그렇죠. 기드온은 자신의 집안과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입니다. 
'우리 집안도 그렇고, 나는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수제자라 불리는 베드로 역시, 처음 부름 받았을 때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눅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여러분 이들 모두의 반응을 살펴보십시오. 우리의 반응과 같지 않습니까? 
이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자, 그들의 인생이 아름답게 쓰임받은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이라서, 특별하게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면, 그가, 평범한 보통 사람일지라도,
특별하게 쓰임받는 것이죠.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서 가정과 관련된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는데, 
본의 아니게 가정과 관련된 말씀을 나누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우리 가정, 내 인생 가운데는 불가능하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5월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정과 관련된 말씀 말고, 다른 본문 말씀을 설교로 들었으면 좋겠다' 라는 
솔직한 마음이 우리 안에 들기도 합니다. 

혹시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오늘 말씀은 그분들을 위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자신의 가정이 은혜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라고 생각됐던, 
그 가정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우리 가정은 세상의 주류 가정이 아닌, 비주류 가정 가운데 놓여있어' 라고 
생각해왔던 그 가정 가운데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을 비추지 않고, 하갈을 비추고 있어요.>

철저하게 소외된 것처럼 보였던 하갈의 인생, 
그의 인생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갈의 가정 가운데 임한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 가정 가운데 모실 수 있는 복된 시간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세 가지인데, 
보시고, 들으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1.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지켜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참다 못해 도망칩니다.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술 로 가는 길까지 갔다' 라고 나와 있어요. 

창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술 Shur' .. '수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가 '담장, 경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 하갈은 헤브론에서부터 술 광야까지 도망을 친 것입니다. 
굉장히 먼 길을 도망쳤어요. 
지도를 보면, 지금 헤브론에서 술광야까지는 총 170~220KM 정도 됩니다. 
굉장히 먼 길을 도망친 것입니다. 

 
이 술 광야, 술 길은 어떤 지역이냐면, 가나안과 애굽의 경계선이에요. 
술 광야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애굽이고, 돌아서면 가나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술'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듯이, 지금 하갈은 
인생의 경계선, 인생의 담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갈은 원래가 애굽 여인으로, 바로 왕의 노예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애굽에 들어가서,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 속이고 
여차여차 해서, 그 대가로 하갈이, 아브라함 집안의 노예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비자발적으로 함께했던 여인이 하갈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다시금,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었던 헤브론에서 도망쳐서 
애굽, 자신의 고향, 자신의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지금 하갈은, 술 광야, '인생의 담, 인생의 경계선' 앞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그녀의 인생과 내 가장 큰 인생의 담 앞에, 갈림길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이죠. 

-다시금 길을 돌이켜서, 믿음의 가정의 대열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옛 애굽의 삶으로 넘어갈 것인가? 
지금 그 갈등 가운데 하갈은 놓여져 있습니다. 

하갈의 입장에서, 애굽의 종살이는 견딜만 했는데, 
아브라함 집안의 종살이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결국 도망쳐서, 자신의 옛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담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의 입장에서, 그 담을 넘어가 애굽에 들어간다고 한들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어요. 

하갈은 애굽의 왕의 명령으로 인하여, 아브라함 집안의 노예가 되었는데, 
그 노예가 도망쳐서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 안전을 누구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갈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인생의 가장 높은 '담' 앞에,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하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광야 가운데 혼자 던져진 하갈을 누가 보고 있기나 할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하갈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 길에서 그를 만났어요. 
여기서 '만났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짜아'인데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찾았다'입니다. 

보았다, 만났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찾았다' 라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찾아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갈이 여호와를 찾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찾아 거기까지 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중요해요.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 같은 인생에게도 찾아오시고, 
그 인생을 보시고, 그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 같은 인생도.. 나 같은 가정도 하나님께서 돌보실까?'
그런 마음이 드는 가정도, 하나님이 보시고,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갈을 찾아오실 때, 추노꾼 같은 마음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니에요. 
*추노꾼 : 도망간 노예를 추격하는 자

마치 집 나간 둘째 아들을 향하여 달려갔던 아버지의 그 마음처럼 
지금 하갈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광야의 땡볕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는 하갈, 
배는 불러오고 있는데, 부른 배를 움켜쥐며 
인생의 나아갈 방향을 몰라 갈등하고 한숨짓고 있는 그 하갈을 
지금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인생 역시 '보시고'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하갈을 '샘 곁'에서 만났는데, 
'샘'은 히브리어로 '아인'인데,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무엇이냐면 '지켜보는 눈'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아인'(עין)은 '눈'뿐만 아니라 '샘' 또는 '우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두 단어는 동일한 히브리어 '아인'에서 파생되었으며, 문맥에 따라 뜻이 결정됩니다.

샘 곁에서 지켜보는 눈,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갈을 지켜보고 계시는 거예요. 

믿음의 대열에서 벗어나 200KM 이상을, 
옛 삶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떠내려가고 있는 그 하갈, 
그 하갈의 인생을 보시고, 여기까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더 깊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인생의 담을 만났을 때, 거친 광야에 나 혼자 있다고 하는 그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세요.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주류 mainstream 가정처럼 보이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찾아가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13년 그 이상 동안 지금 계속해서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리어 하갈을 찾아가 주십니다. 
이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16: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먼저 하갈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여러분 성경을 가만히 보세요. 

이전에 하갈을 표현할 때, 하갈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어떻게 하갈을 불렀냐면 '네 종' 또는 '당신의 종'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하갈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어요.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갈아!' 

'하나님이 과연 나를 아실까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아실까요? 
하나님이 내 이름을 아실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지금 하갈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것이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부르는 것과 같아요. 
이름은 존재를 말합니다. 
'하갈'이라는 이름의 뜻은 '도망자 flee, 날아감 flight, 이주자' 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하갈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갈이 지금 어떤 상황까지 처해 있는지, 
하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지금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갈아!'

▲그리고 질문하세요.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16:8
이 질문은 장소를 묻는 게 아닙니다. 

1) '어디서 왔으며' 그의 인생의 과거를 묻는 거예요. 
그의 인생의 출발을 묻는 것입니다. 

2) '어디로 가느냐?' 이것은 미래와 방향을 묻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죠. 
정체성을 말씀하신 다음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오늘 우리가 이 예배 가운데, 이 질문 앞에 서 있기를 원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결국 살아가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보여주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하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였나이다.'  16:8 

지금 하갈은 어디서 왔는지만 말해요. 
어디서 왔냐면 '사래를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못합니다. 왜요? 본인도 몰라요. 
이것이 하갈의 인생의 한계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똑같이 우리 인생의 한계가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은, 내 인생의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 고통스런 인생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인생이 
바로 하갈의 인생이며, 우리들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찾아오신 하나님은, 질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우리 가운데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갈이 만난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본문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 입니다. 

그는 보셨고, 이 순간에 또한 들어주십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는 가야 할 자리를 알려줍니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은 다시금 사라에게 '돌아가서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아니 지금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도망쳤는데, 
지금 220KM나 내려왔는데, 아니 어떻게 다시 돌아간단 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돌아가서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갈이 견딜만 했으면, 아예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데 '그 자리로 다시 가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그냥 '돌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돌아가야만 하는 약속 세 가지를 줍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여러분, 고통이 진짜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 앞에, 오랜 시간을 견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꺼이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고통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고통은 더 이상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은 도리어 삶의 연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고통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1) 첫 번째 약속은, '네 자녀가 번성할 것이다'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 하갈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은 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자녀를 통해서라도, 아브라함의 핏줄이니, 아브라함의 복이 흘러갈 것이다' 라는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세요. 
지금 이 모든 상황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실수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실수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를 통해서라도, 합력하여 아름다운 일을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하갈은 제2의 아브라함으로 서 있어요.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이 약속 붙잡고 믿음의 길을 출발했듯이, 

지금 하갈은, 갈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금 헤브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2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2) 두 번째 약속은 무엇이냐면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세요.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천사는 하갈의 복중에 있는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줘요. 
'그 이름을 이스마엘 이라 하라'  :11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나의 소유다' 라는 의미에요. 
즉 그러니 '그 아이는 하나님의 소유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거야' 라는 
약속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하갈은 성경가운데, 여러가지 의미에서 최초의 여인이에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인들 가운데 
처음으로 천사가 이름을 불러준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첫번째 여인이에요. 

-태어날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첫번째 여인입니다. 

그 엄청난 성경상의 '최초의' 기록의 여인의 지위를, 
사래가 얻은 것이 아니라, 하갈이 얻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주류 가정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비주류가정처럼 보이는 하갈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큰 영광으로 하갈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시는데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스마엘, 이 이름은 정말 좋은 이름이에요. 
이 이름은 샤마 + 엘,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샤마'는, '들다'입니다. '쉐마'라는 단어와 뿌리가 같아요. 
엘은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이스마엘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하나님이 들으셨다'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이름을, 네 아들의 이름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의 고통을 듣고 있어, 내가 너의 아픔을 듣고 있어' 
그 약속의 자녀를 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지금 하나님께서 엄청난 약속을 하갈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약속은, 그 자녀의 미래를 알려주십니다.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여러분, 이 예언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어요. 
'그가 들나귀처럼 되리라' .. 힘이 세고 두려움이 없는 아들로 큰다는 것입니다. 

들나귀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나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갈의 입장에서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유예요. 
속박이 아니고, 자유예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네 자녀는 자유인이 될 거야. 완전히 자유인이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을 주셨어요. 그 약속을 갖는다면 
어머니로서 다시 한번 믿음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또한 지금 이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 형제와 대항하며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2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인데요. 

아브라함의 실수로 인하여 태어난 그 아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는 용서해 주시지만,
죄의 결과는 그들이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의 자녀와 너의 자녀들은 서로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21세기까지 이스마엘의 후손이 되는 아랍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다시 헤브론 땅으로 돌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네 자녀가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 아들은 이스마엘이 될 것이다. 
그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약속의 말씀을 들은 하갈은, 다시 한번 제2의 아브라함이 되어 
믿음의 길을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그 땅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에게 주어질 고통은 분명했을 것입니다. 
더 힘들 수 있어요. 하지만 견딜 수 있는 것이죠. 
고통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이후부터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안 가운데 
할 수 있는 한 강하게 단단하게 붙어있어요. 

여러분, '복의 근원'에 붙어 있는 것이 실력이고 능력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접붙임바 된 인생인 것입니다

하갈의 인생은, 비자발적이었지만, 믿음의 가문 가운데 접붙임바 당했어요. 
마치 좋은 포도열매를 맺기 위하여, 포도나무 가운데 접붙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가 접붙임할 때는, 그 사이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 책에서,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임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제가 읽었어요. 

"접붙임은 접목을 대목에다가 붙이는 것입니다. 
대목은 뿌리와 줄기 역할을 하는 튼튼한 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접목은 가지로서, 열매를 맺는 가지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강하고 튼튼한 대목에 접목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때 붙이기 위하여 대목에다 칼로 흠집을 내요. 

그런 다음에 접목을 그 사이로 우겨넣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데, 테이프로 끈으로 칭칭 감습니다. 
빈틈 하나 없도록, 완전히 답답할 정도로, 공기 하나 통하지 않도록 
칭칭 감는 것이 접붙임 하는 겁니다." 

이때 전문가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어요. 
"빈틈없이 딱 맞아야 해요. 접목한 부위가 틀어지지 않도록, 
바람 하나 안 통하게 꼼꼼하게 싸매야 합니다. 
접목한 것이 나중에 조금이라도 틀어져 버린다면, 
또는 대충 헐겁게 감아서 접목의 수분이 말라버리게 된다면, 
그때 가지는 죽는 거예요." 

그러니 접붙임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갑갑하고 힘들고 답답하지만, 공기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대목에 밀착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대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 바 된 인생인 줄 믿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바람 하나 통하지 않도록 완전하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약속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거예요. 
애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요. 헤브론 땅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복의 근원 옆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노아의 방주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면 죽음이에요. 
아무리 힘들어도,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시고, 들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세 번째는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하나님은 <살피시는 하나님> 이세요. 

하갈은, 그 은혜로운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그 순간, 
약속의 말씀을 들은 그 순간에, 그 샘의 이름을 지어요. 
브엘라해로이 라고 짓습니다.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6: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은 그 엄청난 은혜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에 
정말 감격적인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지금까지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래의 하나님, 주인님들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엘-로이 라고 하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직역하면 '나를 보시는 하나님, 나를 주목하신 하나님'이 됩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담아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 라고 짓는 겁니다.           주1) 브엘라해로이 분해

하나님은 하갈의 인생을 보고 계셨어요. 들으셨어요. 찾아오셨어요. 약속을 주셨어요. 
그 순간에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신 하나님을 뵈었는가'
이것이 모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동일한 고백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내가 이방 여인으로서 어떻게 여기서... 
내가 도망자로서 어떻게 여기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데 어떻게 내가 여기서 하나님을 뵈옵는가?'

뜻밖의 장소에서, 절망의 장소에서, 
인생의 담 앞에서,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지금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하갈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갈이 뭘 어떻게 한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은혜로, 전적으로 그를 만나 주신 것이죠. 

우리 역시 그런 간증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 같은 존재가,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나 같은 가정이 
하나님을 만났단 말인가? 
지금 그 고백을 동일하게 하갈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갈은 정말 비천한 인생이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였습니다. 
애굽의 노예였어요. 그래도 그때는 왕의 노예였어요. 

근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애굽에 들어오는 바람에, 여차여차해서 
히브리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강제적으로 애굽에서 쫓겨났어요. 
그러다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좀 인생이 편안해지나...' 그 마음에 교만하게 굴었어요. 
그랬더니 학대를 받고, 살기 위하여, 광야 가운데로 뛰쳐나왔습니다. 

도망은 쳤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요. 
애굽에 들어갈 수도 없고,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샘까지, 하나님이 보시고 찾아오셨어요. 
'내가 너의 고통을 들었다. 내가 너에게 자녀를 줄 거야. 
이스마엘 -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다...' 라는 약속까지 주셨어요. 

'그의 자녀가 번성할 것이다.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 약속의 말을 들었던 하갈은 그 순간에 고백하는 것이죠. 브엘라해로이!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 하갈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내 인생을 보신 하나님, 내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 
내 자녀의 미래를 책임지시는 그 하나님을 내가 지금 만났다.'

이 고백을 지금 브엘라해로이 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 사래가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이 만난 그 하나님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예배 공간이 브엘라해로이, 그 샘의 자리가 되기를 축복해요.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를 경험하는 샘으로 나오는 자리입니다. 
이 샘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죠. 

다른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갈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남몰래 신음하며, 
인생의 나아갈 방향을 몰라 고민하고 있는 그 가정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요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들어가세요. 요4:4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일부러 사마리아 땅을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수가 성의 우물을 찾아가시는 겁니다. 
그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경계선이에요. 

(눈에 안 보이는) 큰 담이 있었어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인데, 주님께서 찾아 들어가십니다. 
그곳에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이 있었어요. 

이 여인은, 인생이 너무 곤고하여, 인생의 방향을 몰라서, 
물을 길으러 올 때도, 모든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대낮에 나와서,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인이었습니다. 구약의 하갈과 같은 여인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곤고함을 보시고, 
내면의 아픔을 들으시고, 그녀의 인생을 살피기 위하여, 
지금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야 하겠는지라' 

먼저 가셔서, 그 우물 가 자리에서, 그 여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리고 만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배란 본시 '그 생명의 물을 마시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갈은 브엘라해로이 에서 그 샘물을 만났어요. 
수가성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서 그 샘물을 마시게 됩니다. 

그 샘물을 마신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모든 걸 내려놔요. 
그리고 다시금 자기 삶의 자리로 들어가, 그 안에서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만나자, 자기가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내려놓고 
다시금 마을로 들어가 외칩니다. 

요4:28~29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자신이 가지고 온 물동이를 내려놓고,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분이 그리스도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갈은, 브엘라해로이 에서 하나님을 만나자 
그는 다시금 헤브론으로 돌아가 외칩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사라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어요. 아들을 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하갈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 이라고 짓습니다. 

이를 보건데, 하갈은 그 집에 돌아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간증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갈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주류 가정이 아닌 비주류 가정처럼 보이는 그 하갈의 가정, 
은혜의 사각지대 가운데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가정, 

인생의 담을 만나, 그 경계선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등하고 있는 그 가정, 
그 가정에서도 하나님은, 그 가정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하나님이 듣고 계세요. 하나님이 살피십니다. 
브엘라해로이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 모든 예배 때마다 만날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 샘을 마시는 모든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샘의 물을 마시는 모든 자마다, 삶의 일상으로 들어가서 
'내가 만난 그 하나님, 내가 만난 그 주님'을 간증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그런 마음 가지고 "주의 은혜라"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

주1) 브엘라해로이

브엘(Be'er): 히브리어로 "우물"을 의미합니다. 
라(La): 히브리어로 "~에게", "~의" 라는 뜻의 전치사입니다. 
하이(hai): 히브리어로 "살아 있는", "생존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로이(roi): 히브리어로 "나를 살피시는", "나를 돌보시는" 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