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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인 무리를 분리케 하였느니라 느13:1~31 2009.10.04.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귀에 익은 말입니다.
실제로 이 말은 우리나라 사회의 어디에서나 부동의 진리로 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남북통일을 민족의 최대 당면 과제로 안고 있는 현실에서
'통일'과 비슷한 뜻의 이 '뭉치자'라는 말은 그 단어 자체에 이미 그 어떤 비판이나 이의를
제기할 여지조차 없는 절대적인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에 급속히 유행하고 있는 말도 역시
'뭉치자', '합치자'라는 소리입니다.
즉 모든 기독교 교단들을 뭉쳐서 하나의 교단으로 통일하자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교회들이 이렇게 수많은 교단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합쳐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에서 점점 드높아지고 있는 이 소리는,
정말 일고의 여지도 없는 백번 지당한 말로만 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압도적인 여론, 이런 대세적 조류에 대하여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는 과연 어떻게 대답하고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유다 백성들 중에
제3차로 귀환한 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변 이방 민족들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완수해 내고, 지난 주일에 보았던 것처럼
바로 앞의 12장에 나오는 대로 즐겁고도 감격스러운 낙성식을 올렸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큰 일을 완수해 내고 봉헌 예배까지 드렸으니,
보통 생각에는 바로 그런 최고 정점의 분위기에서
느헤미야서의 대단원의 막이 내릴 법도 합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사명은 결코 거기서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대공사를 완료한 직후 느헤미야가 새로 시작한 일이
바로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바로잡고 고쳐 나가는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 여러 가지 개혁운동들 중에 제일 첫 번째로 나타난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앞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다'라는 뜻입니다.
정말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고치는 일에 당연히 제일 앞장서야 할 교회가
바로 개혁주의 신앙 노선을 따르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개혁주의 교회는 오늘날의 이런 '교단 통합 운동'을
어떻게 판단하고 대처해야 합니까?
개혁주의 교회 운동이란 '가시적 교회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교회의 성별'을 지키는 진리운동입니다.
본문 느13:1~3절은 느헤미야가 시행했던 첫 번째 개혁운동을 보여 줍니다.
"1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그 어느 날 이와 같은 일대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은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려주던" 중에 갑자기 발생되었습니다.
즉 특별한 개혁운동을 한다고 무슨 실천위원회 따위를 만들고 해서
그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가다가 어떤 정점에 이르러서 터진 사건이 아니라,
그냥 평상시의 정기적인 예배 도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일순간 발생하게 되었던 개혁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곧 '암몬과 모압 족속은 옛날에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저주했던 까닭에
이제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신명기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회"란 말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모이는 "총회"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별히 '예배적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한 총회 안에 몸으로는 하나가 되어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아주 이질적인 무리가 섞여 있었는데, 바로 '암몬과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고국이라고 찾아온 땅이기는 했지만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땅에 원래 살고 있던 암몬과 모압 족속의 자녀들과 자기네 자녀들을
통혼시키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훨씬 더 쉽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불신결혼을 통해 유다 민족 가운데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온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회' 즉 '이스라엘 교회' 안에까지 섞여 들어와서 교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이 율법을 듣고", 즉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곧 "섞인 무리", 즉 혈통적으로 암몬과 모압 핏줄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려내어
"몰수히 분리케" 하였습니다.
즉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모압과 암몬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게 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록 이방인이라 해도 하나님을 진실로 믿겠다고 하면
그런 자들의 개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압 여인인 룻이 시모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을 믿겠다고 왔을 때에
베들레헴 사람 모두가 그녀를 칭찬하며 받아들인 사실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몰수히 분리했다'는 말은, 하나님은 믿지 않으면서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사회적으로 섞여 있다 보니
그들의 예배에도 그냥 의례적으로 참석하던 이방인들을 구별해 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란 것이 순수한 신앙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섞여 있던 불신앙적인 무리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됨' 이 필연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과 통혼을 율법은 허락하지 않지만, 동시에 '선교적 사명'으로 이방인에게 나아갈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이 둘은,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만,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이방인을 전도해서, 그가 여호와 신앙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면.. 이방인을 가까이해도 되죠. 그러나 이방인을 전도해도, 그가 여호와 신앙을 거부하고, 되려 이방신앙을 주입하려 하면.. 그를 잘라내고, 쫓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이 경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불신자인 세상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까이해야 됩니까, 아니면 멀리 해야 됩니까? (성경엔 둘 다 나옵니다) 내가 그를 전도할 수 있고,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 그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그에게 전도를 받고, 그가 세속적 영향을 내게 미치면.. 그를 끊어야 됩니다. |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개혁주의 신앙을 지키는 교회에서도
부단히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 중에 하나입니다.
교회라는 이 공동체가 그 생명과 같은 특성인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못한 것과 분리'되는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나누다, 잘라내다'라는 어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불결한 것, 불경한 것, 더러운 것, 죄악된 것들을 구별하여 나누고 분리해야
거룩한 것만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떤 이유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것은 '부정'한 것과 결코 타협하거나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주1)
오늘날 '합동, 연합'이란 말을 '분리'라는 말보다 무조건 좋은 것으로 여기는 선입관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남은 다 뭉치자고 하는데 혼자서 반대하면 당연히 욕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섞이는 것'보다 '나뉘어져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예도 찾아보면 비일비재합니다.
물리학의 열역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이 있는데,
'일로 변환시킬 수 없는 물리량' 혹은 '에너지의 쓰레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두 다른 물질들이나 두 다른 온도의 계(界)가 각각 나뉘어져 있으면
가치가 있지만, 섞여 버리면 질이 나쁜 것이 되고 맙니다.
내연기관이 동력을 낼 수 있는 이유도 실린더 안에는 휘발유가 타는 뜨거운 공기,
실린더 밖에는 찬 공기라는 이 온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8기통 엔진을 만들어도 실린더에 구멍이 있어서 뜨거운 공기가 바깥 공기와
섞여버리게 되면, 즉 실린더 안팎의 온도 차이가 떨어지게 되면
그 엔진의 성능은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리 세계는 가만히 놔두면 모든 것이 '섞여 버리는 쪽'으로 진행되지,
절대로 서로 '나누어지는 쪽'으로 저절로 가지는 않습니다.
바위는 풍화 작용을 거쳐 모래가 되고 흙에 섞여 버리지,
흙 속에 섞인 모래가 절로 뭉쳐져서 바위가 되지 않는 것이며,
태양이 타들어갈 때마다 태양열이란 에너지는 주변 태양계에 점점 더 섞여 버리게 되지만,
그 타버린 열에너지를 다시 끌어 모아서 태양을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리켜 물리학자들은 '엔트로피가 증대'하는
'비가역현상(거꾸로 되돌아 갈 수 없는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섞이는 과정이 계속되면 우주 전체의 물질이 완전히 다 고루 섞여서
어디나 똑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고 우주 전체의 온도 역시 다 고루 섞여서
어디나 똑같은 온도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 즉 어떤 에너지도 생성될 수 없고 우주 전체에서 일이나
힘의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는, 다시 말해서 시공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바로 그 상태가 소위 '우주의 열적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질은 나누어져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 가치가 있고,
온도 역시 그 계(界)가 분리되어 있어야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즉 무조건 '합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선입관과는 정반대로
물리 세계에서는 '섞이는 것'보다 '나누어져 있는 것'이
훨씬 질 좋고 가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물론 위와 정반대의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즉 연합하고 합쳐져서 좋은 예죠.
이 사이트는 분리/연합의 상반된 두 입장을 모두 포용, 수용합니다.
두 입장 모두 장점과 유익이 있고, 또한 동시에 단점이나 위험성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나누어져 있어야만, 진리의 가치가 살아납니다.
그것은 물과 잉크가 반씩 섞여 있으면 그 액체는 마실 수도 없고
글을 쓸 때에 사용할 수도 없는 것이나,
쌀과 모래가 섞여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쌀과 모래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을 때, 그 순수한 쌀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죠.
마찬가지로 참된 교회와 가짜 교회가 화해니 협동이니 하는 미명 아래
한 교단을 이루게 되면, 실상은 그 합쳐진 전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
질 낮은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타적, 고립적으로 나가서 역사적으로 성공한 예도 있지만,
반대로 역사적으로 볼 때, 발전하지 못하고 실패한 경우도 있죠.
또한 분열이 연쇄적으로 도미노로 계속 일어난 경우도 있습니다. case by case)
만약에 이 지상의 모든 가시적 교회들, 모든 교단들, 아니 기독교 계통이라고 불리는
모든 종파들이 다 하나로 섞여 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영적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도달한',
즉 '아무 영적 에너지를 발휘할 수 없는 유명무실한 종교만 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는'
최악의 상태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눅9:50절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참 의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예수님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어떤 무명의 사람은 "주의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 믿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었는데, 한 가지 요한이 기분 나빴던 점은
그 사람이 "우리(제자들)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열두 제자의 그룹에 들어와서 함께 활동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그 그룹에서 떨어져서 독립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볼 때에는 아주 괘씸한 일이어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을
내리고 예수님께 와서 제 딴에는 잘했다고 보고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천만뜻밖에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 원래 하던 대로 신유 기적을 베풀면서
내 이름 증거하는 것을 그대로 하게 두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당장 불러와서 '우리와 함께 따르면서' 그 일을 하도록 해라.
기왕에 우리와 같은 뜻 같은 목적으로 사역하고 있으면
같은 그룹에 속해서 할 것이지 왜 저 혼자 '독립 교단'을 설립하고 있느냐?"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비록 육신적으로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할지라도
같은 주의 이름 증거하는 사람들이면 영적으로 이미 같은 편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된 교회는 비록 이 지상에서는 각 지역 교회와 교단들로 떨어져 있어도
'우주적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보편적 교회' 안에서는
벌써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오직 천국의 새 예루살렘에 가서 완성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꼭 이 땅에서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도 아직 하지 않으신 일을 자기네들이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총회'는 암몬과 모압을 '몰수히 분리해' 냄으로써
그 거룩함을 지킬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금송아지를 섞어 놓는 '가시적 교회의 통합'을 배척하고
오직 '거룩한 교회의 성별을 보존'하는 진리 운동의 대열에 가담함으로써,
진짜 개혁주의 교회를 함께 끝까지 사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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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느13:15~22 2006.07.09. <안식일>
<마카비서>라는 외경에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나옵니다.
예수님 초림하시기 전에 유다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라는 이방 임금의 통치하에 있었죠.
그가 유다인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말고, 그리스 신을 섬기도록 강요했을 때,
신앙이 투철한 일부 유다인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면서
맛다디아 라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고 반란군을 조직하여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곧 군대를 보내었는데,
그들은 일부러 안식일을 골라서, 그 유다인 반란군의 한 진지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 전투가 시작되자 유다인들은 단 한 명도 무기를 들고 대항해서 싸우지 아니하고,
천 명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떼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 전투행위를 하는 것은
안식일 성수하라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맛다디아와 잔존 동지들은 방침을 바꾸어서
앞으로는 적군이 안식일에 공격해 와도 저항하여 싸우기로 결정을 내리는데,
그러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전멸밖에 없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카비서는 정경이 아니므로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유다인들이 그 얼마나 안식일 성수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반영해주는
이야기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1973년에 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는데, 전쟁 개시일은 "속죄일"이자 정규 안식일이었죠.
그래서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죠)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다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안식일 성수를 철저히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율법 준수에 열성적이었던 유다인들 중에서조차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에 쉽게 빠져 들어가는 일들은 빈번했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받고 돌아온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공사가 완성된 후에,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바사를 (1년 정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짧은 공백 기간 중에, 유다인들은 영적 긴장이 풀리면서 몇 가지 죄악을 짓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안식일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것을 발견한 느헤미야는
즉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일대 개혁운동에 착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어진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주일성수를 바로 하기 위해 깨닫고 실천해야 할
자세들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차원 높은 것까지 차례로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주일 성수는 사람의 육신적 욕심과 직결되는 까닭에
신자가 된 이후에도 가장 범하기 쉬운 계명입니다.
유다인들도 바로 이것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게 되었었습니다.
본문 느13:15~16절에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술틀"이란 포도주틀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것을 발로 밟아 포도즙을 짜는 것과
"곡식단"을 운반하는 것은 바로 농업행위였으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가지고 와서 "식물을 파는" 것은 상업행위였죠.
느헤미야가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을 "경계"한 이유는,
그 어떤 형태의 생업이든지 간에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제4계명이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가장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죄는 비단 물건을 파는 쪽뿐 아니라 사는 편에서도 저질러졌는데,
이것은 특히 "두로 사람"들의 상업행위에 의하여 더욱 자극되었습니다.
'두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북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서,
고대사에서 페니키아인으로 불리고 있는 그 지방 사람들은 당시 근동사회의 국제무역업에
있어서 최대의 교역체제를 형성하고 있던 뛰어난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는 상품들 또한 유다인들의 구매의욕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고급품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물고기"라고 한 것은 바로 지중해에서 잡힌 바닷고기를 가공한 건어, 훈제 생선,
또는 염장 생선 따위를 두고 한 말이며,
"각양 물건"이란 그 두로 사람들에 의하여 수입된 각양 희귀한 외제품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팔 때,
유다 백성들은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소매상인들은 그런 좋은 수입품들을 다른 경쟁업소에 빼앗기기 싫었을 것이며,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역시 보기 드문 외제상품을 구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준수가 온 민족의 국시요 각 개인의 좌우명과도 같았던 유다인들마저
바로 그처럼 돈 더 많이 벌고 싶은 욕심, 좋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게 되었던 것은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도 꼭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신자가 된 이후에도 다른 여러 계명들 중에서 유독 제4계명을 가장 잘 범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는데도, 좁은 생각으로 판단할 때에는, 주일을 바로 지키면
내 육신생활에 여러 가지로 손해가 되고,
조금만 어기면 많은 이익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당장에라도 주일 하루 더 가게를 열어놓으면 입금장부에 돈이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이
더 올라가게 된다는 계산이 오늘도 많은 교인들의 머릿속을 주장합니다.
모처럼 연휴로 이어지는 주일에 가족끼리 어디 놀러가지 않고 교회에 오면
마치 부부사이에 큰 문제나 생기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큰 손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혹은 학생들이 주일날 공부하지 않으면 무슨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예사로 주일예배를 거르곤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신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조차 주일 범하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주일성수는 신자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가게 문을 열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 중에 어느 쪽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일에 시험공부 때문에 성경공부 빼 먹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학교 성적 중에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일에 교회봉사하는 것보다는 밀린 집안 청소나 빨래를 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교인이 평소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를
변명의 여지없이 증명해주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배자들만 특별히 더 가난해지게 만드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주일성수 충실히 하는 바람에
대학에서 떨어지고 집안에 불화가 생기게 만드실 분이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그처럼 치사한 사람처럼 함부로 여긴다는 말입니까?
주일성수는 하나님과 자기 육신의 소욕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가장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내어줍니다.
열 가지의 계명들 중에서 다른 것들은 다 잘 지키면서도
유독 이 제4계명만 자기 신앙생활에 제일 취약점이 되고 있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 정말 하나님을 믿기는 믿고 있는지부터 다시 한 번 겸손하게 점검해보시고,
일단 주일부터 성수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첫 단추부터
바로 꿰매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은 직업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일주일에 하루를 '주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2. 주일을 범하는 악습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죄악과 징벌에 빠지는
영적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그런 범죄행위가
그들의 조상 적부터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악화되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17절과 18절에 보면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여기서 '범하다'는 말은 '거룩한 것을 평범하게 여기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행위'를 두고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어떤 악한 일을 안식일에 저질러야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안식일을 보통날과 같이 범상하게 지내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유다의 귀인들을 불러놓고서 "너희 열조가 이같이 안식일을 범했고
이제 너희도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책망하는 것은,
유다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시작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모스 8:5절에 보면 유다의 조상들은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라는 불평을 했었습니다.
즉 '빨리 안식일이 지나가야 밀을 시장에 내놓고 팔 텐데...'라는 조급한 심정으로
안식일 온종일을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그들 조상들의 그런 죄는 예루살렘 함락 직전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는
더욱 악화일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선지자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렘 17:19-27)
하다가 끝내는 망국의 징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하고 유다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고국으로 귀향하는 은혜를 입은 유다인들은
당연히 그들 조상의 잘못을 거울삼아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그 악습을 또다시 재판(再版)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이제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라고 하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너희들은 과거에 우리 민족을 망하게 했던 바로 그 조상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TV에 보면, 예루살렘의 극우파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 때가 되면,
자신들만 안식일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일절 매매를 못 하고 가게 문을 닫도록
자경단을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은 잘잘못을 판단하진 않습니다.
그렇다는 거죠. 그들의 멘탈은, '너희의 안식일 규례 어김으로, 민족 모두가 망한다' 입니다.)
이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열조가 안식일을 범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더욱더 악화되어
끝내는 민족 전체가 망하고 말았던 그 필연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또다시 재현시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일을 잘못 지키는 것은 가장 습관화되기 쉽고
점점 더 악화되기 쉬운 범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라도 주일을 범하는 어떤 습관이 일단 정해지면
그것은 매주일 반복해서 저지르는 죄가 됩니다.
또한 그러다보면 결국 점점 더 큰 문제에 있어서도 주일을 함부로 범하게 되는 것이
곧 뒤따라오는 패턴이 되기 십상입니다.
주일예배만 겨우 드리고 성경공부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조만간 걸핏하면 예배까지도 간단하게 빼먹게 될 것 아닙니까.
또한 이처럼 주일을 범하는 것은
세대가 교체되면서 더욱 악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선조 세대가 주일 지키던 모습들을
오늘날과 비교해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부모님들의 주일성수 방법들 중에는
좀 율법적이고 지나친 것도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분들의 마음 중심은 어디까지나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날 주일성수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들을 찾고 있는
우리들의 본심을 솔직히 판단해 본다면, 그런 신앙의 선조들보다는
훨씬 더 느슨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추세라면 이제 우리 자녀들의 세대에 가서는 과연 주일성수라는 것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게 될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겨우 유지나 될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일성수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떤 '마지막 선'을 그어놓아야 합니다.
그런 선을 교리적으로 정하려고 한다면 율법주의가 될 것이므로,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신앙양심의 소리에 따라서
그 최후의 선을 분명히 설정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일에는 아예 학교공부를 하지 않겠다.'라든지,
'나는 주일에는 장보러 가지도 않겠다.'라는 식으로,
주일성수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방어선을 그어놓고,
만약 거기서 한발 더 뒤로 물러서면 바로 더 큰 신앙적 타락과 영적 몰락의 낭떠러지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단호하게 그 선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처럼 주일을 조금씩 어기기 시작하면 개인적으로나 세대별로나 더 큰 죄에 빠지며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될 뿐인 것을 늘 염두에 두고서, 주일성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해이해지지 않도록 늘 스스로를 채찍질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일성수는 형식적으로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온전히 지켜야만 완성됩니다.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바로 이 점에까지 신경을 써서
유다 백성들의 안식일 성수 생활을 개혁시켰습니다.
19~21절에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 장사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 두번
예루살렘성 밖에서 자므로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저희가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성문"은 아시다시피 고대사회에서는 그 성의 상업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시장도 되는 장소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상거래의 기능을 안식일 동안은 완전 정지시키기 위하여
"어두워갈 때에" 즉 유다인들이 하루 24시간을 따지는 계산법에 따르면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그 시점부터 성문을 닫아걸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치를 취한 이후에도 일부 상인들이 성 바깥 성벽 바로 밑에서
야영을 하면서 안식일을 지내는 것을 느헤미야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의 목적은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인들은 안식일에 상품을 가지고 성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용무를 핑계로 성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아보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안식일 24시간 동안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대신에 안식일이 끝나게 되기만 하면 일분도 허비하지 않고
즉시 성안에 들어와서 장사를 시작하겠다는 속셈일 수도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런 의도로 성 밑에서 야영하는 상인들을 향하여
'한번만 더 그러면 체포하겠다'고 경고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쫓아버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한 번 한다고 말하면 꼭 하는 사람인 줄을 그 상인들도 잘 알고 있었던지라
그들은 그 이후부터는 "다시는 안식일에 오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그들을 쫓아내었습니까?
사실 성벽 밑에서 야영하는 그 자체는, 결코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가 형식적인 안식일 성수에는 아무 하자가 없었다 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인들이 성 밑에서 기다리면서, 누가 우연히 나오는 길에라도 물건 하나 사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혹은 장사할 수 없는 안식일이 어서 빨리 지나가고
성문 열릴 시간만을 기다리는 마음 자체가 이미 정신적으로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까 아모스서에서 나왔던 유다 조상들의 악한 마음,
"안식일이 언제 빨리 지나가서 우리가 밀 장사를 계속할꼬"하던 심보와 똑같은
정신적인 범죄였던 것입니다. 암8:5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정말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자 한다면
우리의 외면적인 주일성수만으로 다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주일날 가게 문을 닫아놓고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자신이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고 아까워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주일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예배당 좌석에 앉아 있어도 속으로는 '어서 예배가 끝나야 집에 빨리 가서
TV 스포츠 중계를 10분이라도 더 많이 볼 수 있을 텐데...' 하고 마음의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교인은 그 주일예배에 아예 빠지고 아침부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문자 그대로 오십보백보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외식적인 페인트 모션에 속아 넘어갈 만큼
그렇게 만만한 신이 결코 아니십니다.
아무리 주일을 24시간 내내 지키고 교회당이라는 장소까지 지켜도,
그 마음에 억지로 지키는 것은 여전히 주일을 범하는 죄입니다.
신자가 주일을 그렇게 무슨 '죽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처럼 지켜서야 하겠습니까?
목사가 주일성수의 명령을 설교하고 전도사가 심방해서 권면하고
심방장과 구역장들이 주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손을 잡아 이끌어서
겨우 나오는 것은 초신자 때에나 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의 평생의 주일 패턴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매사에 우리의 '행위를 살피시는'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 드렸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예물'을 같이 보시고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으며,
'아벨과 그 예물' 역시 같이 보신 후에 그의 제사는 받으셨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점수를 매기실 때에는
그 생활, 즉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동시에 그 신앙 즉 그런 행동의 원인이 되는 마음자세,
이 두 가지를 항상 동시에 보시지 결코 하나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그저 외면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꺼운 마음으로 지키며,
날짜만 따지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온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는,
주일성수의 온전한 수준에까지 꼭 이르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끝 22절에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안식일이 거룩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을 때
느헤미야는 그것을 개혁해내려는 의지를 끝까지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안식일 성수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로 아껴주심'을 받게 되는
축복의 원리인 것 또한 그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주2) 일화 중략
우리의 사회는 사실상 주일 지키기 훨씬 더 쉬운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주말연휴가 확장되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가
완전보장된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넉넉한 돈과 시간을 노는데 쓰느라고 바빠서
오히려 주일을 더 쉽게 범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5일제 근무가 확산되면서 특별히 연휴가 있는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인들의
주일예배 출석률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이 현대 교인들이 실로 얼마나 '악하고 게으른' 것입니까?
하나님을 제쳐놓고 육신의 소욕을 먼저 따르는 악습이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아홉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꼭 지켜야만 할
이 제4계명을 너무나도 쉽게 어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일성수에 대한 작은 범죄가 일단 시작되면 그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
다른 죄들을 계속 낳게 되고 결국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그 더러운 곳으로 되돌아가는' 타락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형식적으로 날짜만 겨우 지키면서 주일성수를 한다고 자부할 때,
그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마음과 정성과 뜻으로는
'거룩한 것을 범하는' 죄를 사실상 매주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정말 '즐겁게 안식할 날'로 정해주신 날이며,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는 '반갑고 좋은 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 날은 '천하만민 다 보좌 앞에서 참 되신 삼위일체 거룩타 부르는' 예배의 날로
100퍼센트 사용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아예 특별히 구별해 놓으신 날입니다.
주일을 지극히 소중히 여겨 '성문을 지키며.' 주일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면서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바로 그런 성도를 '아껴' 주시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매주일 하나도 남김없이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ttps://blog.naver.com/karamos/220697097784
◈이와 같이 저희로 깨끗하게 하고 느13:23~31 2014.02.23.
주3) 골프 선수와 사진 같이 찍은 일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인들끼리만 서로 통하는 언어와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그 언어란 바로 '성경말씀'이며 그 생활양식이란 바로 '경건생활'입니다.
적어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아 한 '천국백성'이 된 성도라면
이 두 가지는 당연히 서로 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제3차 포로 귀환 때에 유다 백성들과 함께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완수해 낸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대 공사를 끝낸 이후에도, 유다 사회의 여러 가지 영적 문제들까지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는데, '민족 대각성 회개운동'을 실시한 것이라든지
'성전 봉사를 위한 서원' 및 '제사장 조직 재정비' 등을 이끌어나간 것 등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느헤미야는 여러 가지 영적, 사회적 개혁운동을 일으켰는데,
본문에 기록된 내용은 그 마지막으로서 바로 '가정생활의 개혁'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의 신세대와 구세대 사이에 아주 심각한 '영적 단절'이 생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다의 '부모 세대'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지켜 왔던 것을
이제 재건된 조국에서 성장하게 된 '자녀 세대'가 오히려 잃어버리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느헤미야와 귀환한 백성들이 그토록 노심초사하면서 이룩해 놓은
'유다 재건 운동'을 근본적으로 망쳐 버릴 수 있는 아주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그런 일을 결코 방관할 수 없었고. 당장 개혁에 착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이 진정한 '선민'으로서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꼭 지켜내야 했던 것들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1. 성도들은 '성경의 언어'가 통하는 선민의 후손들이 되어야 합니다.
느13:23~26 "23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24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25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로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여기 나오는 "아스돗"은 유다 서쪽의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과거 블레셋 지역
"암몬"은 유다 지방에서 볼 때에 요단강 건너 동남쪽에 살던 이방 민족으로서
느헤미야의 대표적인 대적이었던 도비야가 다스리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레위기 18장이나 열왕기하 23장 등에 보면, 이들은 특히 '몰렉'이라는 우상 앞에
"자녀를 불로 통과하게 하는" 제사,
즉 유아를 산 채로 바치는 인신제사로 악명 높은 민족들이었습니다.
암몬의 바로 아래 지역에 살던 "모압" 역시 '그모스'라는 우상 앞에 그와 똑같은 인신제사를
지냈는데, 심지어는 왕의 맏아들까지 불에 태워 바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에스라 9장 1절과 2절에도 나타나듯이,
이런 악한 이방 민족들과의 통혼을 엄금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사람"들 중에
그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의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은" 자들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불신결혼은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한 큰 죄였지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녀들에게서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유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이방 여인일 경우에
그 자녀들은 아무래도 집안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어머니의 말을 더 쉽게 배우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미국 이민사회에서 집에 할머니가 계셔서 손주들을 돌보아 주시는 가정의 자녀들이
그래도 우리나라 말을 잊지 않고 더 잘하게 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느헤미야는 그처럼 유다 백성의 자녀들이 유다 방언은 하지 못하고
이방 민족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격분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는 그런 유다 사람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기까지" 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사람의 머리털을 뽑는 것은
상대방에게 특히 심한 모욕을 주면서 크게 꾸짖는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느헤미야는 그토록 크게 흥분하고 분노했습니까?
자기 민족의 2세들이 자기나라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물론 화가 날 일이기는 하지만,
그처럼 그 부모들을 '저주하고 때리고 머리털을 뽑을' 정도까지 분노할만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느헤미야에게는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에게 있어서 '유다 방언' 즉 히브리어는
바로 그들의 신앙 전수와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유일신앙'은 오직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만 전수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성경의 언어를 모르게 되면, 바로 정통신앙을 계승할 길이 막히게 됨을 의미했죠.
즉 유다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유다 방언'이란
단지 자기 부모와의 의사소통만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그들이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으로서 영적 정체성을 배우고
그 축복의 전통을 물려받기 위한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교포들의 가정에 그런 일이 흔히 벌어집니다.
그곳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은 미취학 시기에는 일단 우리나라말을 배우고 자라지만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금세 영어가 그들의 모국어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십대 청소년이 될 때 즈음이면
그들처럼 영어를 잘 구사할 줄 모르는 부모들과는 그저 간단한 일상 언어만 통할 뿐이지
부모자녀 간의 진솔하고 깊은 대화는 이미 단절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하고도 심각한 '의사소통의 단절'은 그런 모국어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신세대가 '성경의 언어'를 모를 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은 청소년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한글성경에 나오는
'예스러운 한글 표현'을 잘 모른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비록 여러분이 성경의 글은 읽을 줄 알아도
그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깨달을 줄 모르고
그 성경이 명하는 법도를 순종할 줄 모를 때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학생들 중에 그런 '유다 방언' 대신에, '아스돗 방언'만 더 많이,
더 빨리 배우는 학생들이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쓰는 말들에는 줄임말 즉 '약어'나 '은어', '속어'들이 너무 많아서
저 같은 구세대 사람들은 바로 곁에서 들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정도입니다.
지금 제가 예를 드는 문장이 무슨 뜻인지 어른 교인들만 한번 알아 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야, 지금 김천 앞에서 애들이 웬 찐찌버거 때리는 거 봤냐?"
아마 우리 부모 세대가 머리를 싸매고 짐작해 본다면
'야, 지금 경북 김천에서 애들이 햄버거 먹는 거 봤냐?'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야, 지금 김밥천국 앞에서 애들이 웬 찐따 찌질이 버러지 거지 같은 애를
때리는 것 봤냐?'라는 뜻이랍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 알아. 안여돼 주제에 노페 입고 설쳤다며."
인데 이건 무슨 말 같습니까?
우리 어른들은 기껏해야 '어, 알아, 볼품없는 주제에 유행 지난 옷을 입고 설쳤대.'
정도로 짐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어, 알아, 안경 쓴 여드름 돼지 주제에 노스페이스 점퍼 입고 설쳤다며.'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지나친 줄임말과 속된 표현들이 이 나라 청소년들로 하여금
표준말을 잊게 만들고 의사소통을 저질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어나 속어는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합니다.
여러분 세대가 '대단히, 아주'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하는, 'ㅈ'과 'ㄴ'으로 시작되는 *존나
두 음절의 말은 원래 아주 상스러운 욕인데,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ㅅ'와 'ㅂ'으로 시작되는 두 음절의 말 역시 청소년들은 그냥
'제기랄'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제가 여러분만 할 때에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으로서, 그저 첫 글자의 된소리와 두 번째 글자의 격음을
조금 부드럽게 바꾸어 놓았을 뿐인 단어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리 교회 고등부에 속해 있고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학생회장까지 한다는
어느 학생이 페이스북에서 그런 '욕설'을 거침없이 쓰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어떤 공익광고에서도 몇몇 청소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이 흔히 쓰는 그런 '속어'를
사용하지 않고 친구들끼리 한번 대화를 해 보라고 하면
조금 전까지 그처럼 재잘거리던 친구들 사이에서 갑자기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 버리는 장면이 나오던데, 정말 현실이 그럴 것 같습니다.
우리 경향의 학생들은 제발 그런 저질스럽고 악한 '아스돗 방언'을 절대로 배우지 마세요.
더러운 말이 입에 담기게 되면 자연히 그 생각하는 것도 오염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당연히 '유다 방언' 즉 성경 말씀이 여러분의 입에 익숙하고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학생들은 신구약 66권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및 '성령의 감화감동' 등등의 말을 들을 때,
그 '언어'뿐 아니라 그 '의미'까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러한 '유다 방언'을 알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 교회를 통한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 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 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라는 표어는
그야말로 '공허한 표어 제창'으로 끝나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리 같은 교회를 출석해도,
아무리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아도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남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보면, 두 명의 고등부 학생들이
지난 동기수양회에서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간증한 소감문이 실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라든지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라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직 '성경 언어'를 배운 학생들만 말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정말 멋지고도 수준 높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저질스럽고 악한 '아스돗 방언'은 아예 입에 담지도 말고
오직 바른 신앙을 배우고 익히게 해 주는 '유다 방언'만을 말함으로써,
진정 '선민의 후손', '개혁주의 신앙인의 제자'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향 SFC 운동원들은 '경건한 생활양식'에 익숙한 제사장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느13:26~31 "26 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27너희가 이방 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29 내 하나님이여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옵소서
30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31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여기서 느헤미야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이었던 "솔로몬"의 예를 들어 백성들을 훈계합니다.
솔로몬은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태평성세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또한 장엄한 성전을 지어 봉헌했으며 자신을 위한 화려한 궁전도 지었습니다.
또한 그의 국제적 지위도 대단했는데, 스바 여왕이 멀리 남서쪽 아라비아 지역에서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여행을 마다않고 그를 찾아올 정도였으며,
애굽 왕 바로도 그의 딸을 솔로몬에게 왕비로 주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다른 역사적 기록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단한 특례였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영적인 은혜와 물질적인 축복까지 넘치도록 누렸던 사람으로서
실로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였던 것이었습니다. 느1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말년에 가서
자신의 가정조차 거룩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7백 명의 아내와 3백 명의 첩들을 두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처첩들 중에는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족속 등 주변의 이방 민족 출신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솔로몬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기네가 원래 믿던 우상신들까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솔로몬까지 그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함으로써
결국 "이방 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우상숭배가 솔로몬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나중에 아합 왕 때는 북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과 아세라 상이 들어서게 되고
결국에는 남조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 안에까지 바알의 상이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하고 명성이 자자했던 솔로몬 왕조차 '불신결혼'이라는 이 한 가지 때문에
그런 치명적인 죄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와 똑같은 일이 느헤미야 당시에 재현되었던 거죠.
그것은 다름 아닌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른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일이었습니다. :28
이방인과의 통혼금지는 일반 백성에게도 물론 그렇지만,
레21:14~15절에 명시되어 있듯이 제사장에게는 더욱 특별히 강조된 명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제사장도 아닌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그 금령을 어긴 경악할 일이 발생했던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안과 사돈이 된 "산발랏"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로서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재건 운동을 처음부터 제일 앞장서서 방해했던 대표적인 원수였죠.
그런데 명색이 대제사장의 손자라는 사람이, 그 산발랏의 딸과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산발랏의 딸을 너무 좋아하게 된 것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의 아버지인 요야다나 할아버지인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상대편 집안의 권력과 재력만 보고서 사돈을 맺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오늘날로 치자면 목사의 아들이나 손자가, 불신 결혼을 한 셈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안티 기독교인 집안과 말이죠.
느헤미야는 "대제사장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이 그처럼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것을 알고
당장 그를 "쫓아내어 떠나게", 즉 예루살렘에서 추방시켰습니다. :28
그 이유는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기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9
평민의 경우에는 한두 대 때리고 책망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나중에 예루살렘의 제사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방 여인과 불신결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신자의 경건생활을 가르치고 가정의 성별을 지도해야 할 사람이
그처럼 '직분을 더럽히고 언약을 어겼으니'
만약 그런 사람이 나중에 정말 제사장이 되었다면 유다 공동체 전체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불신결혼과 우상숭배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이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우리 신자 부모들이 꼭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내 아이들은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고 유년주일학교 때부터 주일마다 꼬박꼬박 날 따라서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겠지..'라고 한눈팔고 있다가는
그야말로 제대로 '큰 코 다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안은 목사 가정이고 장로 가정인데,
설마 우리 애들 가운데서 곁길로 빠질 애가 있을라고.' 하면서 방심하면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딤전3:5절에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정국가의 왕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대제사장의 자손이 불신결혼을 하게 되는 일은
그때뿐 아니라 오늘날 역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한순간이라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기독신자라는 사실이
여러분도 자동적으로 성도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설혹 교회의 장로, 집사, 권사라 해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디까지나 여러분 자신의 책임일 뿐입니다.
제가 아무리 주일마다 설교를 해도 그 말씀을 순종하여 신행일치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바로 여러분 스스로가 해야 할 몫입니다.
여러분이 중등부부터 시작해서 대학부에 이르기까지 총 10년에 걸쳐서
매주일 성경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이제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정말 '빛'처럼 밝고 '소금'처럼 거룩한 경건생활을
지키고 발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이 직접 서원하고 이행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 시기의 대표적인 경건생활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건전한 남녀교제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가 제멋대로 불신결혼을 했던 것처럼,
무조건 '사랑'만이 유일한 조건이요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동질의 신앙'이라는 조건은 뒷전으로 밀어두는 교제를 시작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또한 피차 기독신자이면서도 '우리는 어차피 결혼할 사이니까'라는 핑계로
혼전관계를 가져서도 결코 안 됩니다.
그런 '사랑'이라는 것은 실상은 '참되고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음욕'에 불과한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십대들이 'MT 간다'라는 말의 뜻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이제 겨우 중학생에 불과한 청소년들이 남녀 여럿이 한 방에 들어가서
무슨 '왕 게임'이라는 것을 하면서 음란한 행위를 강요하고 동영상까지 찍어서 유포하거나
나중에 협박용으로 사용한다는 뉴스 따위를 보면,
'이것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하고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 정도이니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보고 어른이 꾸중을 하면 오히려 봉변을 당하고,
교실에서 학생을 야단치는 교사가 즉시 119에 신고를 당하는 기가 막히는 일조차
이제는 조금도 특별한 기사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흔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만큼은 그런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모양이라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불신 급우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다니고 '학생신앙운동원'이라는 영적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있는 여러분이 그런 불신 사조에 휩쓸려 간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될 일입니다.
불신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불신앙적인 행위에 빠져드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교역자 자녀들이, 장로의 자녀들이, 집사와 권사의 자녀들이
그처럼 '산발랏의 딸'과 어울려 다닌다는 것은
'언약의 자녀'로 유아세례를 받은 특권을 저버리고
'나실인으로 서약된 자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더럽히는,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하늘 아버지의 양자'답게 순결하고 경건한 생활을 지켜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자손'답게 저 '바벨론 음녀'와 어울리는
장망성의 자녀들과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룩한 나실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배에 참석하고
하루 종일 '성수'하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독신자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경건생활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금통으로 선교헌금을 하고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용돈 중에서도
십일조를 바치고 첫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 전액을 감사헌금으로 바치는 것이
우리 교회에서 '의의 후손'으로 성장하고 있는 자녀들이 실천하고 있는 생활양식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놀러가거나 학원에 가기에만 바쁜 방학 중에도
우리 수양회나 부흥회에 꼭 참석하여 은혜를 받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학생신앙운동 고유의 실로 아름다운 영적 문화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라는 '바른 신앙의 족보'가 분명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특히 학생신앙운동이라는 '뼈대 있는 집안'에서 자라고 있는
거룩한 그루터기와 같은 후손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간곡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실족하여 '이방 여인에게 빠져 범죄하는' 자리에 들지 않고
자신의 심령과 육신을 동시에 '깨끗하게 지키는' 경건생활을 단련하고 실천함으로써,
진정 '왕 같은 제사장 집안의 자녀'답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성별된 교회 앞에서
더욱 아름답고 순결하게 성화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학부모 여러분, 유다 백성의 차세대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불신문화'와
그들의 부모가 저지른 '내적 방관과 태만'으로 인하여
'성민 이스라엘'의 순결과 정통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보고 느헤미야는 '책망하고 저주하며 때리고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새로운 서원으로 맹세를 하게 했으며,
비록 제사장의 손자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회중에서 추방시킴으로써
거룩한 공동체의 순결을 유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야만 유다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율법의 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을 자자손손 지켜낼 수
있었고 '구별된 경건생활'을 통해 거룩한 생활양식을 민족 대대의 유업으로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말을 순화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아스돗 방언'을 따라 하지 말고, 오직 '성경의 언어'만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자신의 생활도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받은 '직분을 (여러분이) 더럽히고' 여러분이 유아세례 받았을 때의
'언약을 어기는' 배교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더욱 연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은 '개혁주의 신앙인'의 순수한 혈통을 계속 지킬 수 있으며,
'세계를 받은 사명인'의 복스러운 유업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중에 태어났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신민'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 자녀들이 아닙니까?
그처럼 혈통이 깨끗하고 족보가 분명한 '언약의 후손'답게
늘 '성경 말씀의 언어'로 말하고 '경건의 생활양식'을 지킴으로써,
언제 어디서든지 누가 앞에서도 진정 순수한 '예수 사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1) 중략된 부분
오늘날의 우리나라 기독교계는 '하나 되기 운동' '교단 통합' 등의 구호 아래
어찌하든지 '합쳐 놓고 보자'는 분위기 일색입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민감한 주제이므로, 각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세밀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한 20여 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우리나라의 모 기독교 잡지사에서
주요 교단 총회장들을 상대로 '교단 통합 문제'에 관한 여론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교단 통합 장래를 어떻게 보는가?',
'지금 본인이 총회장으로 있는 교단이 교단 통합을 한다면
우선 어떤 교단과 통합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는가?'라는 등의 설문이 있었습니다.
그 설문 조사는 교단 통합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고
무조건 시행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아예 부동의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문 조사에 응한 각 교단의 총회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야말로 이구동성으로, 교단 통합 문제는 이미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언제 어떻게 하는가의 문제'라는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마치 교단이 나뉘어져 있다는 자체가 큰 죄나 되는 것처럼,
어찌하든지 이 여러 교단들이 하나 되도록 하는 일에
모두가 진력해야 한다는 분위기 일색이었습니다.
다들 '우리 교단은 어떤 교단과는 합칠 수 있다.'는 대답만 하셨지
'우리 교단은 어떤 교단과는 결코 합칠 수 없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든지 합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신
그 훌륭하고 유명한 목사님들께서 '왜 애당초 나누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의식이나
'자기네 교단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에 대한 긍지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합쳐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
'처음에 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이것부터 먼저 기억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사에 제일 큰, 가장 중대한 교단 분열이 언제 생겼습니까?
바로 종교개혁 때였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로마 가톨릭이라는 '한 교단'뿐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세에도 참된 진리를 지키는 극소수의 무리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로마 가톨릭이라는 이 일당 독재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가하면 당장 싹부터 잘라버렸으니
그 소수의 무리들이 교단으로 자랄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외면적으로는 그 얼마나 '완벽한 교회 일치'였습니까?
전 세계에 기독교 교단은 단 하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단 통합'을 기독교의 최대 과제인 양 떠드는 사람들은
이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있기 전까지 한국의 장로교 교단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십계명 제1계명과 제2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다 보니
그 성경 말씀을 지키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그렇지 아니한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과 자연히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신사참배에 찬성했던 목사나 교회들은
결국 자유주의 신학과 결탁하는 교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교단 통합을 이상적으로만 착각하는 사람들은,
마르틴 루터나 요한 칼빈이 기독 교회사에서 교단 분열의 창시자였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나 출옥성도 한상동 목사님 같은 분이
한국 장로교회를 사분오열한 원흉이라고 욕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성취되고 나면 그 다음에 곧 이어지는 것이 바로
기독교와 천주교의 통합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 종교의 일치 운동'으로 직결됩니다.
하지만 순결한 쪽은 그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불순물과 섞일 수 없습니다.
깨끗한 물과 구정물이 섞이면 그냥 구정물이 되지
절대로 깨끗한 물 반, 구정물 반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북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지만,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통일이라고 해서 공산주의를 인정하고 민주주의를 포기하면서까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단이나 자유주의 신학과 뒤섞이는 교단 통합을 이해와 관용을 앞세워서
무조건 따라간다는 것은, 진정 복음의 진리를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고자 하는 신자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이 지상에 완전한 알곡들만 모인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히 가라지만 뿌리고 있는 교회, 천당 구원이 없는 교회,
예수 십자가의 대속 공로를 믿지 않는 교회들이 분명히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왜 그런 교회들과 합쳐야 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이단 교회들과 통합할 수 없다는 것은 옳은 말씀이지만,
분명히 예수 믿고 천당 믿는 교회들끼리는 정말 교단이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참된 교회들이라 하더라도, 민족의 특성이나 지역의 사정에 따라
교단이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복음 전선에 있어서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또한 신앙은 틀림없이 같아도 그 신앙대로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다 특색이 있고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는 자신의 신앙생활의 색깔이나 분위기에 맞는 교회를 선택하여
출석할 자유가 있는 것이고, 교회 역시 신학뿐 아니라 생활 윤리와 교회 운영 방법까지
다 같은 교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교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교회들이 구태여 억지로 한 교단에 속하여
진리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같은 교단 안에서 티격태격 잔 싸움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2) 일화
제가 지난 주중에 교역자 수련회를 다녀오면서
우리교회의 어느 강도사님 한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까 이 분이 원래 다른 교단 신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알고
어떤 계기로 우리 교단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연이 참 기구(?)했습니다.
그 강도사님이 그 다른 교단의 신학교를 다니면서
그 교단의 어느 교회에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의 유력한 어떤 집사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담당하던 고등부의 어느 한 학생이
주일을 자주 빼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당연히 그 학생에게 심방을 가서
주일성수를 잘해야 한다고 본인으로서는 간곡하게 권면을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에 그 교회 목사님이 이 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찾아갔더니 그 목사님이 하신다는 말씀이, '네가 뭔데 그 학생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라고 오히려 자기를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분은 큰 충격을 받고서, 그 교회 전도사직은 곧 사직서를 내었고,
그 상처로 인하여 아픔을 겪던 중에 어떤 아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교단에 속한 어느 교회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첫 출석하시는 주일에 마침 그 목사님께서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하는 설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은 그 교회를 통하여 결국 우리 고려신학교로 오시게 되었고
덕분에 우리교회는 정말 좋은 강도사님 한 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인들에게 주일성수를 가르치기는커녕 그렇게 하는 부교역자를
오히려 야단치는 목사까지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 정도이니 교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십계명의 다른 아홉 가지가 중요하고 절대적인 명령이라면
이 제4계명 역시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주3) 골프 선수와 사진 같이 찍은 일화
제가 작년 여름에 미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였습니다.
저는 휴가 때마다 'LPGA' 즉 미여자프로 골프대회를
직접 관람하는 것이 제일의 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도 두 주간에 걸쳐서 두 개의 대회를 다 따라다니면서 구경을 했는데,
그 첫 주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묵고 있던 호텔이 마침 경기가 열리고 있던 골프장과 제일 가까운 숙소여서
골프선수들도 많이 숙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골프대회에 가게 되면 아침 첫 조가 출발할 때부터
마지막 조가 끝날 때까지 구경하기 때문에 그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텔에서 제공해 주는 뷔페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문득 보니 제 테이블 가까운 곳에 어떤 미국 여자프로골프선수가
자기 캐디와 같이 와서 식사를 시작하는데,
세상에, 바로 저 유명한 폴라 크리머(Paula Creamer)였습니다.
'핑크 레이디'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폴라 크리머는
미국 선수들 가운데 단연 최고의 '얼짱'으로 통하고 있는 미녀이며,
비단 미국 안에서 뿐 아니라 LPGA 대회가 외국에서 열리게 될 때에도
항상 가장 많은 팬들을 끌고 다니는 선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골프계의 여신'이 제 눈앞에, 5미터도 안 되는 지척에 앉아 있었는데,
텔레비전 화면으로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예뻤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땠겠습니까?
먹고 있던 아침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폴라 크리머와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몰두하여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식사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사진을 찍자고 요구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실례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식사를 끝내고 호텔 로비로 나갈 때 부탁하는 수밖에 없는데,
사실 지금 막 라운딩을 떠나려 하는 선수를 붙잡고 사진을 같이 찍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도
어쩌면 경기 준비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 때문에 폴라 크리머라는 '골프의 여신'과 나란히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는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식사는 대충 마치고 먼저 로비 쪽에 나가서, 폴라 크리머의 캐디를 기다렸습니다.
콜린 칸(Colin Cann) 그 영국인 캐디 역시 과거에 박세리 선수의 캐디를 했던 적도 있는데,
저는 감히 폴라 크리머에게 직접 말하기는 너무나 어려워서 그 캐디한테 부탁하려 했던 것이죠.
그런데 콜린 칸은 제 부탁을 듣자마자 즉시 저의 휴대폰 카메라를 받아 들었고
마침 로비로 나오고 있던 폴라 크리머 역시, 자기 캐디가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제 옆에 서서 포즈를 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황송하고 고맙고 또한 황홀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때 찍은 사진을 즉시 페이스북에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제목과 함께 올렸었는데,
여러분도 이 시간 한번 화면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를 모르는 사람이 이 사진을 보게 될 때,
혹시 제가 폴라 크리머의 아버지나 혹은 삼촌 아저씨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물론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폴라 크리머와 저는 그냥 한 눈에 척 보아도 인종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피부색깔과 얼굴모양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녀와 저는 혈통과 모국어부터 시작하여
고유문화와 생활양식까지 완전히 다른 '서로 다른 민족'인 것입니다.
사실 그날도 제가 그저 폴라 크리머와 사진만 같이 찍었을 뿐이지
일단 대회장에 가서는 그녀가 플레이하는 조를 따라가지 않고, 하루 종일 오로지
우리나라 선수들, 그 중에서도 유소연, 박인비 선수만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특히 박인비 선수는 그 주간의 대회에도 우승을 했고
바로 그 다음 주간에 열린 'US 오픈'에서도 우승을 함으로써
'메이저대회 3회 연속 우승'이라는 엄청난 대기록을 세웠는데, 그 배후에는
바로 저의 열렬한 응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만약 작년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 오픈'까지 가서 응원할 수 있었더라면
박인비 선수가 '메이저대회 그랜드슬램'을 틀림없이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때는 제가 이미 휴가를 끝내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다시 목회에만 전념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박인비 선수는 저의 '현장 응원'을 받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울 기회를 놓치고 마는(?) 아쉬움을 남겼던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저는 아무리 폴라 크리머와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해도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어디까지나 같은 대한민국 사람끼리 서로 말이 통하고 문화가 통하며
마음이 통하고 사는 방식도 통하는 '한민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