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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장 죽으러 가자

LNCK 2026. 1. 5. 20:5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핍박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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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러 가자              요11:11-16                 2006-06-11 순교자기념주일

 

신앙을 가진 자라면 몇 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 천국가겠나’

‘이렇게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이 이것밖에 안되나’

 

자신의 신앙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자기 절망 속에 빠져 있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믿음이 좋다고 여기는 인물들도 보면,

우리와 같은 실수와 고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를 든다면,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온유함의 표상으로 우리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승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세의 혈기가 대단했습니다. 우선은 바로 궁에서 40년 동안 살다

밖에 나온 모세가 자기 민족의 청년과 애굽 청년이 다투는 것을 보고

왕자의 신분을 잠시 망각해버린 채 애굽 청년을 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 처벌이 무서워 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나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단련된 인격이라면 이제는 지도자가 되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모세를 불러 애굽의 노예로 있는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죠.

그런데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어떤 행동을 보여주었습니까?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10계명이 적힌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전혀 뜻하지 않은 백성들의 불신앙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즉 아론과 함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곧 자기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시내산에서 받았던 은혜와 내려오면서 고이 간직한 은혜스런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돌판을 그들을 향하여 던졌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불살라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금송아지에게 절을 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모세가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을 시켜서 잘못을 저지런 백성들을 처단케 했습니다.

그날 목숨을 잃은 자의 수가 무려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비록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모세의 혈기는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젊은 날의 혈기를 청년 한 사람을 죽였지만

40년이 지난 완숙한 인격이라고 생각했던 지도자가 되어서는 무려 3천명이나 죽였습니다.

그것도 원수가 되는 다른 민족이 아니라

자기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한다고 한 동족이었습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 우리가 건설하자’고 손잡고 나아가던

사랑스런 형제요 다정한 동료였습니다.

단 한 번의 혈기로 그들 중에서 3천명이나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니

모세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마도 그 날 밤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이 오겠습니까? 그래서 날이 밝기가 무섭게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32:31~32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는 것은 자기를 죽여달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인해 자신에 대해 처절하게 절망해 본 자가 아니면

결단코 자신을 대신 죽여 달라고 기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기의 행동이 떳떳하다고 생각했다면 죽여 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그만큼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있음을 나타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모세와 비슷한 인물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우선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 즉 ‘나를 따르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같이 일하던 아버지도, 그물도, 배도, 친구들도 다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얼마나 큰 결단입니까?

처음 만난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이렇게 따라나섰다는 것은 이상하리만큼 큰 결단입니다.

 

그 후부터 베드로는 예수님의 크고 작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고,

떡 일곱개와 물 고기 두 마리로 7천명을 먹인 사건,

귀신을 좇아내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말할 수 없는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단단한 결단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할거야’ ‘나는 그분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거야’

사실 이런 마음이 곳곳에 베어져 나옵니다.

 

마26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먹고 난 다음 감람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얼마나 자신만만한 믿음입니까?

그때 다시 예수님은 한 번 더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역시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실 때

마침내 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은 로마 병정들이 곁에 다가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꺼내어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는 용기 있는 믿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도, 베드로만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지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끌려가서 대제사장 집 안 뜰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여종이 나아와 말하기를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그러면서 베드로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까지 걸어 나갑니다.

이때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서 거기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고 할 때,

베드로는 아니라고 잡아떼며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서 베드로에게 다시 말하기를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고 했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더 약해졌습니다. 점점 더 믿음이 나약해졌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맹세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이 베드로가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베드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끼오--”하고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우니 더욱 미칠것만 같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게 보였겠습니까? 자기를 저주하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닭이라도 안울었으면 좋으련만 닭울음소리에 베드로의 양심은 고동쳤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통곡한 후에 회개하고 난 다음 이제는 베드로가

정상적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가 했더니

성경을 읽어보면 베드로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지쳐 쓰러지실 때도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베드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도 예수님 눈앞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무덤 속에 갇혔을 때도, 그들은 무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위대한 선지자 모세도, 위대한 사도 베드로도 이렇듯 자기 절망으로 몸부림쳤다면,

범인에 불과한 우리에게 어찌 자기 절망이 없겠습니까?

 

▲이 목사도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보다도 더 큰 절망감을 느낄때도 있습니다.

목사가 이 모양밖에 안되나’

‘목사가 되어서 평신도 보다 못한 신앙이 되어서야 말이 되나’ 등의 고백을 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절망이 적은 것이 아니라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모든 성도의 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얼마나 절망감이 커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되는 것은 적어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라면 다 겪는 일입니다.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겪는 절망감은

반드시 그것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절망감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자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

인간 내면으로부터 비롯되는 자기 절망이야말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접촉점인 동시에,

성숙한 신앙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발판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믿게 된 동기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든지 잘 믿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어느듯 사라지고

서서히 절망 속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기 한계,

죄악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할수록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기 한계를 너무나도 또렷하게 확인케 되는 까닭입니다.

 

이런 갈등과 고민이 없다면 결단코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갈등과 고민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더 크게 사용하십니다.

 

▲모세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고,

여호수아에게 자기 임무를 넘길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혈기부림을 통해서 가나안을 보고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베드로도 보면 결국 마가다락방에 들어가 기도했을 때 성령을 받아

그는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를 시키고 5천명이나 회개시키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미 예언해 주신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으로 인해

그동안 자기 절망감에 빠지게 만들었던 잘못을 만회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교훈을 받습니다.

진리 때문에 비탄에 빠져보지 아니한 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진실로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절망감에 빠져본 자만이

진정 주님 안에서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거닐때에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에워싸고서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지기도 하고, 돌을 던져 해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와서 다시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강 쪽으로 와서 있을 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소식을 듣고서 이틀을 더 지내다가 유대로 다시 올라가시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기보다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예수님이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그리로 다시 가시려고 합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무가내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죠.

 

이때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듣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죠.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11:16) 그동안은 베드로가 이런 말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여기서 베드로보다도 앞질러 이 말을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다시 유대로 올라가시고자 하는 것은

결국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돌에 맞아 죽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은 모습입니까?

그러나 불과 두 주 후 예수님께서 막상 십자가에 매어 달리는 그 순간,

과연 도마도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죽기는커녕, 주님을 배신한 채 단지 제 살 길을 찾아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주님과 함께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결국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도마가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비겁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증오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절망감에 빠졌던 도마가 후에 인도로 건너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장렬하게 순교했음을 도마행전이 전해주고 있고,

지금도 인도 첸나이라는 도시에 가면 도마 유적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배신자 도마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말할 수 없는 자기 절망 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돌아가시고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기 절망감으로 비탄에 빠져 있던 도마를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도마는 그분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주님일 수 있는지

증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예수님과 대면한다는 것은 참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마에게 아무런 말도 않으시고 못박혔던 손바닥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의

상처 자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상처 자국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을 한 모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

 

주님의 그 상처야말로 도마 자신을 살리시기 위한 상처였습니다.

그렇지 아니했던들 그 상처 자국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배신자 도마를 찾으셨을 리 없고,

또 설령 찾으셨을지라도 배신자였던 도마를 호되게 정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도마를 다시 찾아 주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에 감동을 받은 도마는 결국 자기가 한 말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던 결단의

말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만이 절망적인 생각으로 고민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3년 동안이 좋은 것을 누리다가

예수님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자신들이 다 피해버렸다는 절망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님이 임재 하셔서 그들의 모든 죄를 회개하기에 이르렀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모두가 순교자의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서 보면 열 두 제자의 순교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힘을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여 죽임 당했습니다.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부탁하신대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모셨으며

유대 국내에서 전도하다가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로마군에게 멸망된 후

에베소에게 가서 전도했습니다. 거기서 핍박을 만나 요한을 끓는 기름 가마에 집어넣었지만

기적적으로 튀어 나오게 되어 저를 박해하던 무리들이 놀래서 요한을 밧모섬에 귀양보냈죠.

거기서 요한은 묵시를 받아 쓴 후, 에베소로 돌아와 자기 수명대로 살다 죽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는데,

터키에 있는 사도 빌립의 순교 유적지는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 있으며,

현재의 파묵칼레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의 순교를 기념하는

사도 빌립 순교 기념교회와, 그의 무덤이 발견된 성 빌립 무덤 교회 터가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꺼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 당했으며,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 당했습니다.

 

시몬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유대국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죽었습니다.

야곱의 동생 유다는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고,

가롯 유다 대신 선거된 사도로 뽑힌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 자기 절망의 비탄에 빠져 계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진리대로 살려고 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절망도 해 본적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와 같은 자는 자신의 욕망이 빚어낸

주님의 허상만을 만날 뿐 구원이신 주님의 실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제

 

▲오늘은 1992년도 77회 총회에서 매년 6월 둘째주일을 순교자 기념주일로 정하여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믿음의 뿌리를 확인해서

나태하고 게으른 우리의 이기적인 신앙, 신앙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믿음을 지켜나갈 것을 확인하며 결단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순교자 기념주일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우리가 전도를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역사가 오래되어서도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엄청난 고난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켜온 신앙의 절개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부흥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기 때문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우리나라만큼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로마의 10대 박해가 있었지만 우리나라만큼 많지는 않습니다.

 

천주교 순교자가 1-3만 명 정도이며, 개신교 순교자가 약1-3천여 명이 된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를 낸 것이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2세기 교부였던 터툴리안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부흥의 씨앗은 순교자들의 피였습니다.

복음에 척박한 이 한반도에 피뿌림을 받아서 기름진 복음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를 통해서 부흥된 오늘의 한국교회에 아직도 순교정신이 살아 있는가요?

과연 복음 때문에 일사각오를 한 신앙을 가진 자가 얼마나 있는가요?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마처럼 주님과 함께 죽으러가자고 외치는 자가 있는가요?

이런 외침의 소리라도 있으면, 언젠가는 순교하는 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침마저 없다면,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아 다시

우리가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하겠다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순교하지 못한 절망감이라도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주님을 만날 기회를 타서 순교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감이 큰 무너진 결단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깊이 돌아봅시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남을 희생의 제물로 자신을 세우려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무한경쟁을 통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인정되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보의 미덕보다는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하고 당당하다고 칭찬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이런 사회 속에서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희생시키려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이러다보니 교회생활이나 신앙을 자신의 이익과 개인적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여 편하게 신앙을 유지하려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순교의 시대처럼 물리적인 억압과 위협은 없을지 몰라도

순교의 시대 못지않게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들,

‘소금과 빛처럼 살아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도 주라’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라’‘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등을 실천하며 신앙을 지켜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발표한 것이 순교정신입니다. 일사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안일한 가운데서 믿음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을 각오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어 팔자 고칠 생각하지 십자가를 지겠다는 생각을 하는 성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 잘 믿어 복을 받아 흥왕 된 삶을 누리려고 하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로 올라가려고 하는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일본이 한국을 착취하고 있을 때,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주에 있던 독립군을 찾아가서

자기도 투신하겠다고 하면 혁명선배들이 물어 본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추위에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성도는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일사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한 혁명을 위해서도 이렇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확인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부활을 얻는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Utopia>를 쓴 토마스 모어 경이 교수형을 당할 때 마지막 남긴 말은

"스데반이 죽을 때 바울은 찬성했고, 스데반은 기도하며 죽어갔다.

후에 바울이 회개했고, 그도 순교했다. 그들이 천국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되어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것으로 나는 믿는다.

오늘은 내가 당신의 손에 죽지만, 언젠가는 당신네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날

수 있어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한다."라고

토마스 모어(대법관)는 선으로 악을 이기고, 엄청난 신앙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자들의 후손들을 돌봐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들이 순교자의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일사각오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팔자 고칠 생각하지 말고, 예수 때문에 쫄당 망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흥하는 지름길요, 영생을 얻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러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바가 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의 삶이 되도록 합시다.

 

작금에 우리에게 필요한 성도,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성도가 어떤 성도일까요?

돈 많은 성도도 아닙니다. 명예를 가진 자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아닙니다.

지식인도 아닙니다. 무식한 사람도 아닙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성도는 무식하든 유식하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젊든 늙었던 상관없이 오직 주님을 위해 일사각오를 가진 성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자가 되십니까?

 

비록 가겠다고 나셨지만 아직도 넘어진 채로 있다면 다시 일어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당신을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진정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적 결단이 따라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 죽으러 갑시다. 가다가 부인하고 돌아서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있게 나아갑시다. 그러면 반드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비로소 순교의 복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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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야고보의 행적

세 명의 수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잖아요.

베드로는 뭐 항상 말이 앞서고 행동에 앞서는 전체 보스기질을 갖고 있는 리더 역할을 했고

요한은 막내 사랑받는 막내로서의 역할이 있었어요.

근데 가장 애매한 위치가 야고보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자기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추정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까지 대동하고 자기 동생까지 끼워 팔아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자리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를 했던 것이죠

 

물론 제 상상이 틀릴 수도 있어요

근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후에 나오는 말씀이

예수님이 순교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인데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어요

야고보가 순교를 했어요 그래서 야고보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자 36절 대해서 7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죄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자 예수님이 그래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두 사람이 대답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우편 하나는 좌편에

고난의 십자가는 보이지 않고 영광의 보좌만 보였던 것이

십자가를 계속 바라보시면서 결혼한 의지로 가고 계신 예수님이 볼 때 얼마나 한심했을까

 

자 예수님께서이어서 말씀을 하십니다 38절에서 40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자를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구원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구하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 내가 받는 세례 받을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네 할 수 있습니다

일단 할 수 있다고 대답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뭘 구하는지도 모르고 구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뭘 하게 될 줄도 모르면서 할 수 있다고 대답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자를 마시고 내가 받는 세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영광의 좌우편은

 

마태복음 20장 대조건물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해서 예배하셨든지 그들에게 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이 장면에서 말씀하신 자는 고난의 잔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는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이었어요.

그것도 모르고 당장의 영광을 얻고 싶어서 넙죽 잔을 받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이 시점에 야고보의 인생을 잠시나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야고보의 인생을 간단하게 좀 정리를 해봤는데요

갈릴리 벳세다의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특권까지 포기하면서 주님을 따라갔는데

사복음서 전체를 보면 특별한 대사도 없고 특별히 한 것도 없고 기여한 것도 없어요.

 

존재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를지고 죽으셨을뿐만 아니라

다시 부활하셨어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승천하시고

얼마나 야고보에게는 충격이 컸을까요?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야고보의 행적에 여러 가지 의문 보호가 찍힙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됐잖아요.

 

그런데 12 사도가 사역을 했던 그 예루살렘 교회에, 야고보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은 기둥과 같은 지도자들로 역할을 했는데,

그럼 도대체 사도 야고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라는 것이죠.

 

교회사에 따르면 그는 다른 제자들은 다 가만히 있었는데

가장 먼저 짐을 싸서 일어나 스페인으로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이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원이죠.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란 뜻이고요)

이베리아 반도 땅끝까지로 ‘내 증인이 되리라’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잖아요.

 

모두가 예루살렘 교회 부흥의 그 영광의 취해 있을 때,

예수님 저에게도 역할이 좀 필요합니다 저에게도 자리를 허락해 주십시오.

1번 자리를 저에게 주시면 안 되겠습니다. 요청했던 그 야고보가

1번 타자로 선교사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한 12년 사역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장면이 사도행전 12장의 장면이에요.

사도행전 12장에 AD44년 헤로드왕에게 붙잡혀서 처형을 당합니다.

그렇게 야고보는 첫 번째 사도 순교자가 된 것이죠.

 

성령 받은 야고보는 무엇이 진짜 영광인지를 알게 된 거예요.

주를 위해서 영광의 자리를 내려놓고 가장 먼 곳에서 헌신하는 그는

정말 주님 나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를 가게 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