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16ㅣ이른 비와 늦은 비 사이 (약5:7~12) - YouTube
◈이른 비와 늦은 비 사이 약5:7~12 2025.11.16.
이스라엘의 농사에는 두 번의 비가 있습니다.
이른 비는 씨를 뿌릴 때 내리고, 늦은 비는 추수 직전에 내립니다.
이른 비가 없으면,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없고,
늦은 비가 없으면 곡식이 익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이른 비는.. 젊은 날의 설레임, 새로운 출발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의 눈부신 순간, 첫 직장의 합격 소식, 새로운 도전의 흥분이 있습니다.
눈부신 출발이 아니어도, 기대하는 미래가 있었고,
아주 넉넉하진 않아도 차근차근히 모으면 더 나은 생활을 꿈꾸어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죠.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생은 열심히 해볼만하다’ 싶은 의욕이 넘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른비 뒤에 메마른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바라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더 치열한 경쟁, 상대적 열등감이 있습니다.
남들이 꿈의 직장이라 부르는 곳에 입사 성공했는데,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질 지경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것이 마치 죽으러 가는 것 같고,
‘여기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후에 추수전에 늦은 비가 오죠)
화려한 결혼식 이후에, 배우자를 위해 헌신하고, 땀 흘리고, 마음 졸이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시간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삶에도,
가슴 설레이는 출발이 있는가 하면, 메마름을 견뎌야 하는 시간도 다가옵니다.
목사님들도 그래요. 하나님께 헌신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는데,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에 매여있고, 상처는 많고, 허무감까지 몰려올 때가 많습니다.
어떡하죠? 본문 7절말씀을 다함께 읽습니다.
약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우리에게 뭔가를 시작하게 해준 이른비가 있다면,
결실케 하는 늦은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닐 수 있습니다.
늦은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농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농부의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농부의 (기다리는) 마음이 있을까요?
▲오늘날 대부분 현대인의 마음들은 이렇습니다.
약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현대인들은 마음이 들 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금방 성공이 손에 잡힐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는 4장에서 도시 이야기를 하고,
5장에 와서 농촌의 농부의 마음을 말합니다.
도시인의 욕망 과 농부의 인내를 의도적으로 대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라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주로 어디에 살았을까요. 농촌일까요, 도시일까요?
약1:1절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 그랬습니다.
태어나 살던 고향을 떠나서 타지로 이주했다면, 대부분 도시에 가서 정착했을 거예요.
거기서 부대끼며 살아갔을 거예요.
도시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빛도 있지만, 그림자도 짙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외로움도 좌절도 깊은 곳이 도시입니다.
‘1년을 머물며 성공하겠다...’ 4:13
‘내가 거기 가서 1년 동안 돈 많이 벌어올 게...’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세요? 특히 사업해보신 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세요?
‘1년 동안 승부를 보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 이건 철 없는 생각이죠.
사업이든, 공부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긴 호흡으로 인내를 갖고 임해야, 뭐든지 될 수 있습니다.
도시의 마음, 그 열정은.. 순간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호흡이 짧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한번 해보겠다는 사람들 다 어디 갔어?’
도시의 삶은 즉각적 해결 instant solution, 즉각적 만족 instant satisfaction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빠르게 결정하고 신속하게 성과를 보기를 원하고, 기다림없는 성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여기 갔다가, 저기 줄 서 봤다가..’ 합니다.
그런데 농촌은 어떻습니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오던 삶의 스타일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한국교회에 처음 기독교가 전래되어서
추수감사절 지키던 시기에, 농사 짓던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되었을까요?
농촌에 사는 인구가 조선 후기에 80%가 넘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60%였습니다.
그 중에서 농촌에 살아도 다 농사짓는 거는 아니니까,
농가 인구만 따지면 1970년대에 45%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배웠잖아요.
지금은 4%입니다. 그리고 농사 짓는 대다수가 70대 이상입니다.
여러분, 현대인은 대부분 한 번도 흙을 밟지 않고 살아갑니다.
신발, 아스팔트, 콘크리트 바닥, 고층 건물, 그리고 자동차.
흙을 밟을 필요를 없게 만듭니다. 문제가 없을까요?
구약 성경에 '아담'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으며,
'흙으로 만든 사람' 또는 '인류'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므로, 본래 흙을 밟고 살아야 된다, 흙하고 가까워야 됩니다.
요즘에 맨발 걷기 (earthing) 하는 분들 많이 계시죠.
얼싱을 해보시면 발바닥에 감각이 느껴지잖아요.
아프면 아픈 대로, 따끔한 대로, 시원한 대로 감각이 회복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땅에서 떨어질수록 우리의 감각은 둔해지고, 관계는 얕아지고, 생태적 책임은 잊혀지고,
우리의 영혼은 뿌리 뽑혀서, 여기저기 떠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 있다가, 내일은 저기서 얼쩡거리고,
아무데나 갈 수 있는 것 같지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이것을 자유라 착각하는 사람들...
부유한 시대에 부유 浮游하는 영혼들... 현대인의 깊은 불안이 설명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교회 오면요, 그래도 맥추 감사, 추수 감사.. 이런 말을 듣잖아요.
‘우리가 땅과 연결되어야 하는 존재구나.. 하나님께 뿌리 내려가는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그나마 알 수 있고,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시대에, 우리가 밥 한 그릇, 한 모금의 물, 한 줄기 햇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이 추수감사절이 얼마나 귀한 절기인지 모릅니다.
식물이 뿌리 내리는 것을 착근한다고 말하죠.
인간이나 동물이 처음 수정되고 나서, 모체의 자궁내벽에 모체에 안착하는 것을
착상한다고 그러죠. 식물이 여러분 착근하지 못하면, 자라지 못하죠.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착상이 안되면, 수정이 되어도 착상이 안되면, 생명으로 자라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재밌는 것은, 이 ‘착상’이라는 말이 사람의 생명이 생길 때 뿐 아니라,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든지,
작곡을 하는 사람이 음율이 떠오른다든지 할 때, 이걸 ‘착상’이라 그러잖아요.
이런 창조성이 있으려면, 뭔가 착상, 착근.. 이렇게 붙어있는 게 있어야 된다는 거죠.
생각이 부유해서 제맘대로 떠돌아다녀가지고는.. 절대로 창조적인 일이 생길 수 없습니다.
착근은.. 또 무슨 제도가 잘 자리 잡는다 할 때, 착근이란 말을 쓰잖아요.
아주 중요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상상력에는, 창조성에는, 집요함이 있어야 됩니다. *착상, 착근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지점에, 하나의 질문에 오래 머무는 능력!
오늘날에 여러분, 위대한 예술이 자꾸 없어지는 것은, 그게 없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이 디지털 시대에, 한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시인이 있죠.
가을이면 생각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전기를 읽어보면요. 1875~1926
로댕이 작품을 하고 어떤 대상을 응시하고 살펴보고 고민하고 몰입하는 과정에
릴케가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매일 거기 가가지고, 로댕과 함께 얘기하고,
그냥 로댕이 작품을 옆에 앉아서 지켜보고요.
나중에는 릴케가 로댕의 비서 역할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로댕>이라는 책도 썼어요.
그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술은 기다림 속에서 완성된다.’
‘한 번의 (더) 끌질, 한 번의 (더) 빛 조율이 작품 전체를 바꾼다.’
로댕은 형태를 찾아가는 시간을 서두르지 않았다.」
릴케는 그 인내와 몰입의 순간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시인한테 가서 어떻게 단어를 배열하나.. 그걸 배운 게 아니고요.
‘어떻게 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가, 몰입할 수 있는가?’
즉 ‘착근할 수 있는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로댕에게서 그걸 배운 거예요.
자기 경험에 착근된 창조,
혹은 자기 공동체나 전통에 착근된 창조,
자기 상처와 몸의 기억에 혹은 자연과 땅, 사물 무언가에 착근, 즉 뿌리 내리고 있어야
뭐라도 이루어집니다.
한 가지에 오래 머물 줄 모르면.. 창조적 결과는 없습니다.
▲여러분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아시죠?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그 시를 읽으면서요. ‘야 나도 별을 봤는데, 난 왜 이런 시를 못 썼지?’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누구나 다 보는 별을,
윤동주 시인은 얼마나 많이 몰입해서 봤겠습니까? 거기서 창조성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왔다 갔다가 아니라,
하나님 주신 음성에 착근(뿌리내림)할 수 있어야 됩니다.
라틴어로 흙을 ‘후무스’라 그러거든요.
거기서 인간 human 이란 단어도 나왔고,
겸손 humility 이라는 단어도 나왔습니다.
흙에서 멀어지면, 인간이 인간됨을 잃어버리고 교만해진다는 거죠.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비, 즉 이른비와 늦은비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마음대로 내 인생을 어떻게 잘 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잖아요. 그렇죠?
옛날에는 날씨가 더우면, ‘아휴 날씨 더워서 너무 힘들다’ 했는데,
요즘은 그냥 에어컨 틀면 됩니다. 날씨가 더워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얄팍한 생각인지요...
우리가 재난을 당해보면 알게 되죠. 깨닫게 되죠. ‘아 우리가 자연을 통제할 수 없겠구나’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생태계가 회복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그런 아주 우울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계의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사람들이 ‘No’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일군의 학자들이 그런 말을 해요. ‘방법이 하나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옛날처럼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서,
밭 갈고, 논 매고, 농사 지으며 살면, 생태계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사상을 ‘급진적 농본주의’라고 말합니다. Radical Agrarianism
한국어로 말하면 적어도 70년대, 인구의 45%가 농사짓던 시절로 되돌아가면 된다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요.
이분들의 사상이, 옛날 농사짓던 때를 너무 이상화하고 있습니다. 그때도 정답은 아니에요.
그때도 엄청난 불평등이 있었고요. 착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주장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상태가,
이 지구의 상태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 상태가,
본래에서 떨어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자각해야 됩니다.
농본 農本이라는 말이 서양인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개념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농자 천하지 대본’ 이라는 말 아시죠? 農者 天下之大本
이걸 줄이면 뭡니까? 농본이에요.
도시를 떠나라는 말이 아니라, 도시에서 살되, 도시를 넘어서는 삶의 비전이 있어야 됩니다.
현실을 살지만, 현실을 넘어서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만, 현재의 내 눈에 보이는 것, 그 시야에 제한되지 않는 미래,
하나님이 펼치실 늦은 비를 바라볼 줄 아는...
그러면서 겸손하게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땅에 붙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은혜를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 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지요.
▲여러분, 앞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 갈까요?
AI 인공지능이 활개치는 세상!
오늘 오후에 청년 예배 때 <AI 컨퍼런스> 합니다. 그때 그 이야기를 할 거예요.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갈지...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겁니다.
요즘 한국에 최근에 ‘GPU 26만 장이 들어온다’는 뉴스를 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 나라들이 GPU 확보에 명운을 걸고 있다’ 그러잖아요.
*Graphics Processing Unit'의 약자로, 그래픽 렌더링과 같은 시각적 작업을
가속화하기 위해 설계된 프로세서입니다.
‘그게 뭐야? GPU가 어떻게 생긴 거지? AI를 구동하려면 이게 꼭 필요한데..’
제가 사진 보여드릴게요. 제가 지난 여름에 엔비디아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찍어왔던 사진입니다. 저 옆에 있는 기계가 뒤에 있는 게 GPU입니다.
(*위 동영상 14:30초 가량의 사진 참조)
엔비디아 라는 회사의 로비에서 찍은 사진이고요.
그때 제가 같이 세미나 했던 분들하고 함께 방문을 했었습니다.
그다음 사진은 점심 먹는 장면인데, 거기 구내 식당에 가니까
최고 인기 메뉴가 김치버거 라고 그러더라고요.
맛있게 먹으면서... 그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좀 했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현상 하나는요. 오랫동안 이 실리콘 밸리는
세계에서 신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가장 냉소적인 동네였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 몇 년 동안에 예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많은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실리콘밸리가 과연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Can Silicon Valley Find Christianity? - The Atlantic
그런 주제의 기사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작년과 올해에 급증하는 뉴스, 기사들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가 그렇잖아요.
‘도시를 떠나지 않고, 여기 도시에 살면서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실리콘밸리야말로 일확청금이 가능한 곳이고요.
세계를 뒤흔드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박 스토리의 본고장이고요.
IT, 비즈니스 계의 고수 중의 고수들이 꿈을 안고 모여드는 곳입니다.
근데 그 최첨단의 기업들, 기업 숲들 가운데
뭐 구글, 애플, 엔비디아, 넷플릭스, 페이스북 본사가 여기에 다 있습니다.
근데 그 엄청난 그 동네에도, 아주 깊은 공허감과 어두운 긴장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거기 있어도, 농부의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이 가능하다..
아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우리는 자세히 모르지만,
좀 앞서가는 도시들을 보면, 우리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래의 사회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다림이 필요한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성경 본문이 하는 거예요. ↙
▲약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선지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고난과 오래참는 그들의 삶을 본으로 삼으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인내하는 삶의 모범으로, 원탑 one top 으로 구약성경에 욥을 꼽습니다.
욥의 삶을 보면, 조급한 낙관주의가 믿음하고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조급한 낙관주의’라는 말은, ‘곧 잘 될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금방 나아직 거야’
그냥 그런 가벼운 위로를 말하는 거죠. 그런 정신 승리를 말하는 거죠.
△스톡데일 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미군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서
정말 혹독한 환경 속에서 7년 반을 견디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많은 군인들이 죽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7년 반을 견디고, 결국 살아 돌아온 이 분에게, 기자들이 가서 물었습니다.
‘스톡데일 장군님, 비결이 뭐죠?’
「오,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낙관주의죠.
그런데 그냥 무조건 낙관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가게 될 거야‘ 막 기도하고...
그럼 크리스마스 되었는데 그냥 지나가잖아요. 실망합니다.
’다음 부활절이면 꼭 나갈 거야‘ 또 실망합니다.
그럼 또 ’그 다음 추수감사절에는 나가겠지‘
그렇게 한두 번 크리스마스 지나는 동안에 다 낙심해서 믿음도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마음이 병들고, 몸도 쇠하게 되더라는 거죠. 못 버티더라는 거죠.
그래서 낙관은 필요.하지만 조급한 낙관주의는 금물이다.. 라고 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무너지지 않는 신념과, 자신 앞에 놓인 엄중한 현실에 대한 인식,
이게 필요하다는 거죠.
그저 ’곧 괜찮을 거야.. 할 수 있을 거야..‘ 그걸로 해결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You must never confuse faith that you will prevail in the end...
with the discipline to confront the most brutal facts of your current reality
(당신이 역경에 처할 때) 결국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면서도,
현재 당신이 당면한 가장 잔혹한 현실에 맞서는 훈련 discipline 을
당신은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낙관적 믿음도 가지지만, 냉혹한 현실도 감내해야 된다는 거죠.)
특별히 이 말을 Stockdale Paradox 라 그럽니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다 받아들이라는 거죠.

▲지난 목요일, 전국의 수험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르렀습니다.
수학능력시험..말 그대로는 ‘다음 단계의 학교에서 공부할 능력이 되는가’ 알아보는 시험이죠.
수학 능력, 지금이 인생의 수확기가 아닌, 씨뿌리는 시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이것이 인생의 파이널인 것처럼, 결승적인 것처럼,
모든 게 다 지금 결정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만든 것은,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죠.
그래서 저는 사실 목회를 하면서도, 수능 시험을 위해 응원하고 기도하는 거를
너무 요란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조심스러운 마음이예요.
기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때만 기도하는 거는.. 잘못이라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수능 끝나고 나서도..
또는 그 훨씬 전에, 아이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어야 될 줄 믿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갈 길은 멉니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수많은 기회들 다양한 도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른비와 늦은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면, 조급함에서 벗어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농부의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기업에서 사장, 부장 해보신 분들 알 겁니다. 사람들 만나면서 많은 분들이 속이 터집니다.
기업에서는 사람을 기계처럼 정비하려고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시정하고, 교육하고, 효율을 따지죠.
근데 여러분,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계산한 대로 되지 않아요.
서로 잘 정렬 align 되는 순간은 별로 없어요.
이걸 겨우 맞춰놓았다 싶어도, 또 금방 상황이 바뀝니다. 생각들이 바뀌어요.
관계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게 사람을 기르는 모든 일은,
기계보다는 살아있는 식물에 비유하는 게 더 지혜롭습니다.
리더는 정비사가 아니라, 정원사이어야 합니다.
제가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보면, 공대 출신 목사님들은 그런 로망이 있습니다.
‘톱니바퀴 같이 딱딱 맞아들어가는 목회’
군대 출신 목사님들은 ‘일사불란한 목회’
여러분, 그거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장은... 식물을 돌보듯이, 화분 하나를 돌보듯이,
스스로 자라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물을 주고, 햇볕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틀로 찍어내려고 하면 100% 실패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6
부모들에게 꼭 필요한 것, 신앙의 어른들에게, 선생님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내가 심고, 내가 물 주고, 사람이 할 바를 다하지만
어떤 모양이 나올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게 했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못해?’
여러분, 다른 거예요. 사람 자체가 다르고, 시간도 다르고, 시대도 다른 거예요.
그래서 부모들을 포함해서 사람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다 알잖아요.
성적보다 우리 아이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 알잖아요.
그러면, 내 생각에 못 미치는, 내 기대와 어긋나는 모양이 보일 때에,
이것이 포기해야 될 때가 아니고, 기다려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기업에서 부하직원을 대할 때.. 다 마찬가지입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심고, 물 주고, 그 후에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을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인내가 굉장히 중요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야고보 장로가,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인내의 모범으로 욥을 이야기합니다.
원탑 인내의 사람 욥!
근데 여러분, 욥기를 자세히 읽어 보시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욥이 인내의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인가?’
욥기는 2장부터는 죽겠다고 난리칩니다. 불평하고요.
여러분, 욥도 인내의 완벽한 모범이 아니에요. 그게 여러분,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소위 위인들, 성공했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오랜 기간 기다려서, 인내해서 이루었다' 그러지만,
그 안에 수없이 그만두고 싶은 때가 많이 있었어요. 좌절할 때가!
그때 어떻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서,
그때 그때 순간 순간 면케 해 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 주시는 늦은 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선물처럼 다가오지 않으면,
여러분 자기 삶을 제대로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약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누가 주신 결말입니까? 주께서 주신 결말이에요.
자, 보세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그 욥의 탁월한 인내가 만들어낸 결과를 보았다.
욥의 불굴의 의지가, 투지가 일구어낸 결과를 보았다...’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누가 사업을 잘 하는데, 그의 멋진 아이디어와 성실성이, 판단력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았다.’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중요한 건 꺾기지 않는 마음이지만,
그게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면, 인간이 안 되는 대목이 있는 거예요.
욥이 받은 그 결과는, 욥의 인내의 열매가 아닙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11
줄이면 ‘들었고 보았거니와’
우리가 듣는 것과 그 결말을 보는 것은 언제나 차이가 있습니다.
이른비와 늦은비 사이에 차이가 있죠. 그 사이에 메마른 시간이 있습니다.
말과 삶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은 얼마나 잘합니까? 그렇죠?
그런데 그게 삶으로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습니까?
게으름이 있죠. 합리화가 있죠.
말한다고 그대로 사는 거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들었고 보았거니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말씀을 듣지만,
그 결과를 보는 사람은, 여러분 그 중에 소수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를 보는, 결말을 보는 은혜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었고 보았거니와’
보세요. 여러분, 어디가서 맛있는 요리를 맛보았습니다. 너무너무 집에서 만들고 싶어요.
어떻게 만들어요? 셰프가 레시피를 알려줬습니다. 조리법 설명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해봅니다. 레시피대로 한두번 해본다고 그대로 나온다는 보장이 있어요, 없어요?
‘내가 해보니까 안 되네...’ 맛도 다르고 향취도 달라요.
그러면서 계속하다가 마침내 그 맛을 보게 될 때가 오는 거죠.
요리를 예로 들었지만, 여러분 공부도 그래요. 운동도 그래요. 건강관리도 그래요.
‘이렇게 먹고, 이렇게 운동하면 건강해질 거야...’ 근데 금방 안 돼요.
기다리고 인내해야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렇죠? 그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근데 그 들음에서 하나님이 은혜 주실 때에,
우리가 그 믿음으로 살아낼 수 있는 힘까지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인내하며 살아갈 때에, 마침내 결말을 보게 되는 거예요.
열매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결말입니까?
나의 열심이 만들어낸 결말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결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결론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11
그 다음 부분을 함께 읽습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1
농부 이야기도 하고요. 비 이야기도 하고요. 인내 이야기도 하고요.
원망하지 마라 말씀도 하고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뭔가 하면.. 하나님이에요.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여기까지 와야 돼요.
사업 성공이 아니라, 병이 낫는 일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게 되었는가?’
그것이 여러분 신앙인의 결론이 되어야 돼요.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이런 간증을 듣잖아요. ‘내가 암에 걸렸어요. 울고 불고 매달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몇 년 고생하다가 나았어요. 완치되었어요.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교통사고 당했는데도 잘 치료가 돼서 너무 감사해요.’ 하고 간증합니다.
그렇죠. 맞죠.
근데 생각해보면요. 아예 암에 안 걸린 사람도 있어요.
아예 교통사고 안 당한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이 훨씬 더 감사하지요.
그런데 누가 더 감사할까요?
그냥 고만고만하게 사는 사람은, 감사한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고생해본 사람은, 감사한 줄 아는 거예요.
인내해본 사람은, 기도하면서 기도 응답받은 사람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내 삶을 얼마나 든든히 붙잡고 계신가를 알게 된 거예요. 할렐루야!
그것이 진정한 감사예요.
그래서 인내하는 삶의 가장 큰 열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친밀히, 개인적으로 알게 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열심히 들으십니다.
들었고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그 결말을 보게 되는...
그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결말,
주께서 이른비와 늦은비로 인도하시는 그 자비와 긍휼 가운데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고 알려주시는...
그래서 바로 그 믿음이, 우리의 또 다른 소망이 되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우리의 삶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