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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4장 만물의 찌끼

LNCK 2026. 1. 3. 11:1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성경적인 참 성공

영적세계의 원리들11: 만물의 찌끼 - - YouTube

 

◈만물의 찌끼             고전4:8~13         2019년 신년특새      *영적세계의 원리들 11강

 

저희가 영적인 원리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으로 사는 삶이 있고, 우리의 혼으로 사는 삶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그냥 우리의 혼과 육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또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혼의 작용들,

내 감정, 내 의지, 내 생각을 좇아서 그냥 살아왔어요.

그렇게 10년도 살고, 20년도 살고, 30년도 살다가.

그러던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죠.

 

그래서 우리 삶 가운데는 어떤 습성들이 남아있냐면,

그냥 혼으로 살아가던 습성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혼의 생각을 좇아, 또 혼이 원하는 것을 좇아 그냥 그렇게 살아가던

삶의 습성들이 남아있어요.

 

오는 주일날 침례식을 하는데, 이 세례, 침례 라는 것은 뭐냐면

옛사람, 옛 습관이 죽고 이제부터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의 습관들이 시작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그런 혼을 좇아 사는 삶을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영을 좇아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우리가 혼을 좇아 살았던 삶과

극명하게 다른 아주 극명하게 대비되는 다른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을 따라 살아갈 때,

그곳에 복을 누리도록 삶을 디자인해 놓으셨어요.

 

2019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복에 이르는 길과, 저주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혼으로 살아가는 삶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혼으로 살아가는 삶의 끝에는, 그냥 저주와 죽음이 기다릴 뿐이에요.

 

혼으로 살아가는 삶을 계속 살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 인생도 파괴되고,

또 자기가 누리던 많은 관계들 가운데도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다 비슷한 경험들을 하셨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의 삶과 우리의 관계 가운데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하지만,

그 결혼생활 가운데 정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100명에 1명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대부분 사람들을 만나보면, 다 결혼생활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내 때문에 힘들어하고,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고... 다 그렇게 살아요.

그게 뭐냐면, 혼으로 살아가는 삶의 그냥 끝이 그런 거예요.

 

가정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그 조화롭고,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진짜 맛보기 원하신다면, 영으로 살아가는 법들을 배우시고,

영으로 살아가는 삶들을 사셔야 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영적 세계의 원리들] 오늘이 11번째 시간인데,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영적인 원리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는 이유는, 그냥 지식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시라는 거예요.

이 영의 원리를 따라서, 삶을 선택하시라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 삶 가운데, 이전과는 다른,

예수 만나기 전에 우리 혼의 생각을 따라서 살아갔던 것과는 다른 삶의 열매들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영을 따라 살아가는 축복들이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대충 고린도전서를 이렇게 쭈욱 살펴보니까,

약 50가지 이상의 영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겠더라고요. (오늘은 그 중에 16번째입니다)

 

‘너희는 자랑하고 배부르고 강한데, 우리는 겸손하고 배고프고 약하고 비천하다’는 거예요.

이 두 가지를 대비시키고 있죠. 고전4:10참조

 

‘너희는..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우리말 번역본이 약간 애매하게 되어있어서,

이게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는 건지, 야단치는 건지 어떨 땐 헷갈리는데요.

그 뒤에 보면 분명하게 써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걸 쓴 건 아니지만' 고전4:14

그러면서 내가 갈 때 어떡하나 보자’ 이렇게 바울이 얘기하는 걸로 봐서, 야단치는 겁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이 야단치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해서 ‘너희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야단치고 있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대비시키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살고 있는 삶과,

사도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대비를 시킵니다. 이게 무슨 대비겠어요?

혼으로 살아가는 삶과, 영으로 살아가는 삶을 대비시키고 있는 거죠.

 

너희는 지금 혼을 좇아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과 어떻게 다른지, 한 번 보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고린도 성도들을 권면하고,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혼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떻다는 거예요?

‘너희가 어찌하여 자랑하느냐? 너희가 이미 배부르지 않느냐?

너희는 강하지만 우리는 약하고, 너희는 존귀하지만 우리는 비천하다.’ 4:10참조

 

혼으로 따라가는 삶은 혼을 따라 사는 삶은 추구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것을 추구하냐면

자랑하고, 배부르고 강하고, 존귀해지고...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혼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과 혼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게 돼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까,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들,

또 이 세상에서 나를 배부르게 할 것들...

 

배부르다고 하는 것은, 꼭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이 세상의 것들,

그 다음에 더 강해지고 싶고... 더 큰 권력을 갖고 싶은 거지요.

더 존귀한 자리에 올라가고 싶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거죠.

이런 것들이 여러분 ‘혼을 따라가는 삶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반면 영을 따라가는 삶의 특징들은, 그것하고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는 거예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데, 어떤 모습이냐면, 뭐라 그랬죠?

겸손하고, 늘 배고프고, 약하고, 비천하고, 헐벗고... 뭐 이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을 따라가는 삶과, 혼을 육을 따라가는 삶은 이렇게 대비가 됩니다.

 

성경에서는 육을 따라가는 삶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그래서 자랑하고 싶고, 내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더 얻고 싶고,

더 강해지고 싶고, 존귀해지고 싶고... 이런 게 뭐예요?

이게 그냥 육을 따라 사는 삶, 세상에서부터 주어지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영을 따라 사는 삶은 전혀 다릅니다.

영은 여러분, 이 세상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영은 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주어져 있는 기능이 아니라 그랬어요.

 

우리 처음에, 영과 육에 대해서 얘기할 때, 사람은 두 세계에 끼웠다 그랬죠.

그래서 보이는 세계에도 살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속한 존재로 지음 받은

아주 특별한 존재인데, 그래서 이 보이는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의 육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소통하기 위해서 영을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 영은, 이 세상에 있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집어넣어도,

영은 그것 때문에 기뻐하거나, 만족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그렇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배가 고파요. 그럼 배고픈 것은 육신의 욕구죠.

그래서 맛있는 것을 많이 먹어요. 그러면 우리 육신은 만족해요.

또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우리의 정신도 행복해요. 그렇죠?

근데 이건 우리 육을 만족시켜요.

 

그렇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산해진미 같은 음식들을 배부르게 먹어도,

영은 그것 때문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영이 배고프고 영이 목마른 것은,

우리 육신의 욕구를 아무리 많이 채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배가 불러서 행복하고, 배를 두드리고 있어도,

우리 영혼의 배고픔이 있으면, 그것은 여전히 배고픔으로 그냥 남아있잖아요.

우리 영은 여러분, 세상의 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배불러도, 영이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요.

우리의 그 삶이 강해지고 존귀해져도,

아무리 존귀한 자의 자리에 올라도 재벌 총수가 되고 대통령이 돼도, 영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재벌 총수들이, 자기 삶을 다 마치고 죽을 때

그것 때문에 행복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왜요? 돈이 많고 존귀한 자리에 오르고, 많은 사람이 인정을 해주면,

우리의 육은 만족을 해요. ‘아이고 총수님’ 하고 인정해주니까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혼도 만족스러운 것처럼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에 ‘내 인생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다’라고 얘기하냐는 말이에요?

영의 배고픔이 있는데, 그건 하나도 채워지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의 것으로는, 여러분 영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아무리 많은 걸 성취하고,

아무리 존귀한 자리에 올라도, 절대로 영은 이런 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이 여기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영은 이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더 많이 가지는 것을 추구하거나, 더 높은 자리에 가는 것을 추구하거나,

더 많은 것을 먹기를 추구하거나... 영은 이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이 추구하는 삶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했냐면

‘가난하고 비천하고 연약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정처 없고 헐벗는대요.’ 4:11참조

오늘 읽으신 본문에서는 그대로 따온 겁니다.

 

이게 영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보면, 따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

반드시 가난하고 비천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이래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영적인 것이 이런 것이라면, 수도승들 말고는 아무도 영적인 사람이 없겠죠.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런 어떤 외적인 상태를 가지고,

부자냐 가난하냐, 아니면 비천하냐 존귀하냐,

이런 걸 가지고 영적이냐/ 육적이냐를 판단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건 뭐냐면,

영은 세상에서 부해지고, 강해지고, 존귀해지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하고, 메마르고, 헐벗고, 비천하고... 뭐 이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은 이런 세상 것에 전혀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영은 이런 세상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런 것을 내려놓고 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영적인 삶이에요. 또한 그게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들이니까요.

 

우리가 영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 일부러 우리가 가진 물질도 다 내버리고,

편안한 삶도 다 내버리고, 정말 수도승처럼 일부러 고난을 찾아가야 되냐?

아니요, 여러분 이것은 성경적인 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건 잘못된 금욕주의인데,

그래서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영적인 건 아니에요.

 

잘 들으십시오. 가난을 일부러 추구하고, 비천해지는 것을 일부러 추구하고,

그런 게 영적인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런데 영적인 삶은,

 

그런 것보다 더 다른 더 영원한, 더 영생의, 더 소중한 가치들을 추구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그런 세상 것들을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영적인 삶의 비결입니다.

 

바울에게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리려면 누릴 수 있었던

어떤 수많은 그런 권리들이 있었어요.

뭐 바울은 가말리엘 문화에서 자랐고, 로마 시민권이 있었고,

뭐 그 당시에 편안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바울에게 더 소중한 어떤 가치가 있었을 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게 뭐예요?

‘이 천국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언해야 된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더 소중한 가치가 바울에게 보여졌을 때,

바울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들을, 전혀 고민하지 않고 그냥 내려놨어요.

이게 영적인 삶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영적인 삶은, 이 세상 것들에 매이지 않는 거예요. 이해가 되세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에 휘둘리지 않는 거예요.

 

일부러 막 내려놓고 포기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기만이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걸 수 있어요.

 

영적인 삶이 꼭 가난하고 청빈하고 헐벗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 차이를 잘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억지로 추구하는 건 아니에요.

 

추구하는 게 아니라 뭐냐 하면 그냥 관심이 없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거기에는 반응을 그냥 하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도, 영에는 아무런 만족이 없듯이,

그냥 심플리 다른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이 아무리 만족을 주고,

어쩌고 저쩌고 해도... 여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영은, 이 세상 것에 대해서, 뭐 버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추구하지도 않는...

그래서 매여 있지 않는 거예요.

매여 있지 않은... 이게 아마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누려라’ 그러면 얼마든지 누리지만,

또 하나님께서 ‘아니야 그거 말고 조금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러면 얼마든지 쉽게 내려놓고 갈 수 있어요. 왜? 매여있지 않으니까.

이게 영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혼을 좇아서 살아가면, 세상 것에 매이게 돼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배부를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존귀해질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까?’ 이것에 매이게 돼서,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들이 우리 앞에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 놓고 떠나지를 못해요. 그냥 거기에 매여있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 앞에 놓여있는 영원한, 복음의, 천국의 복들을 누리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 영적인 삶은 다르다는 거예요.

영이 우리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런 것들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시면, 다니엘이나 요셉처럼 누릴 수도 있지만,

또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니야, 그거 말고 다른 거 좀 할 게 있어’

그러면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진짜 고난의 길을 가기도 하고,

뭐 얼마든지 매이지 않고 갈 수 있다는 거예요.

 

영은 여러분, 이 세상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가난을 선택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비천해지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연약해지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주 기꺼이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영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영이 역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내 삶에 자유함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여러분들이 메이게 되는 그것에 종노릇 하는 거예요.

(주식에 종노릇, 부동산에 종노릇, 자녀에 종노릇, 직장에 종노릇, 인간관계에 종노릇)

 

결국 메이게 되는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야금야금 잠식해서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불행해지고 파괴되게 되는데

그런데 이 마귀란 놈이 워낙 똑똑하고 교묘한 놈이라서

이걸 한꺼번에 확 그렇게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야금야금 갉아먹어요.

내가 전혀 파악하지 못 할만큼, 미세하게 야금야금 내 삶으로 잠식해 드러오는 거예요.

 

그래서 냐 안샹아 한꺼번에 인생이 폭망하는 게 아니고,

야금, 야금 삶을 이렇게 갉아먹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한참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그것에 종이 돼 있고, 노예가 돼 있고,

그 노예가 된 것 때문에, 다른 모든 삶의 나머지 부분들이 파괴되게 되는데...

그걸 내가 모르는 거예요.

그냥 좋은 건 줄 알고 계속 가도록 만들어요.

 

여러분, 혼을 좇아 사는 삶의 위험이고 결과입니다.

영을 좇아 사는 삶은 여러분 전혀 다릅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그 삶을 좇아 살기 시작하면,

이 세상 것에는 별로 그렇게 관심이 없어요. 별로 세상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주시면 누리는 거고, 안 주시면 안 누리는 거고...

먹을 게 있으면 먹는 거고, 없으면 안 먹는 거고...

(맛있는 거 먹는 거 못 참는 사람들은, 이게 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하하하)

 

그런데 우리의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의 특징은, 이 세상 것에 중립적인 거예요.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 거예요.

그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훨씬 소중한 것들이 보여질 땐,

얼마든지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 그랬냐면 ‘하나님이 자기를 끄트머리에 두셨다.. 만물의 찌꺼기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세상에서는 꼴찌다’ 이런 얘기예요.

고전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요, 여러분 영을 따라 사는 삶은

세상에서 첫째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래서는 절대로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어요.

영적인 사람은 첫째가 될 수 없느냐? 아니요.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올리시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는 않아요.

경쟁사회에서 남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밟고 일어서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요셉이나 다니엘 같은 사람은, 왕 다음으로 나라에서 두 번째 자리에 올라갔어요.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이걸 추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다니엘 같은 경우에는, 이런 자리를 내려놓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을 내려놓아야 되는 자리에도, 아무 망설임 없이 그냥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총리 자리를 추구했던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날 많은 현대 크리스찬들이 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넘어지고 실패하는 줄 아세요?

첫째가 되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첫째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자꾸 착각하는 거예요.

 

아니요, 여러분 첫째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한 계획이,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다니엘이나 요셉처럼 사용하시는 거라면, 그게 축복이겠지만,

원래 그 사람을 향한 계획이 그게 아니었다면, 그게 무슨 축복이겠어요?

 

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이 두시면 그 두신 곳에서 누리는 거지,

그것을 추구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공이라고 하는 신화를 영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포장해서

이상한 신학들을 만들어냈어요. 이상한 신학들을 만들어내서

결국 이 첫 번째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하는 자기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욕심들을, 마치 하나님의 축복으로 행복과 영적인 것인양 포장해서,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니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뭐라 그랬냐면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배부르고, 너희는 존귀하지만,

우리는 비천하고, 헐벗고, 목마르고, 만물의 찌개 같이 되었다’ 그랬어요. 4:10, 13

이게 영을 따라가는 삶이었다는 거예요.

 

▲바울의 삶 가운데는, 그 상황이나 시대 자체가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 높은 곳에 올라갈 수는 없는 시대였어요.

그렇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 어떤 시대에 있느냐,

또는 개인적으로 어떤 가정이나 어떤 상황에서 태어나느냐,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때가 있어요.

 

아주 큰 핍박을 받고 있는 나라 가운데 태어난다든지,

예를 들면 이집트, 파키스탄 같은 데서 크리스찬으로 태어난다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하층민, 이게 그냥 결정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뭐 핍박이나, 어려움이나, 헐벗음이나, 비천함이나 이런 걸

면할 길이 없어요.

 

모든 시대, 모든 상황이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시대에는 크리스천으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간다고 했을 때도

그 사람들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시대나 상황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비천함에 처하든, 부요함에 처하든

그것은 우리의 혼의 반응일 뿐이고, 영은 그런 것에 무관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상황 가운데 들어갔을 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목숨 걸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목숨 걸고 발버둥치지 않아요.

 

이 가난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 핍박을 어떻게 하면 피할까?

그걸 피하려고 목숨 걸고 발버둥치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이 두셨으면 그냥 뭐 그렇게 사는 거지요.

그것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바울이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뿐만이 아니라

6.25 전쟁 때 여러분 우리나라에 ‘포로들의 성자’라고 불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맹의순 씨라는 분인데 이 소설로도 나왔었지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근데 이건 소설로 쓴 것이고, 이분의 일기를 엮은 책도 나왔습니다. <십자가의 길>

 

근데 이분이 어떤 분이냐면, 27살에 돌아가셨는데,

혹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책을 읽어보신 분 있으세요?

 

근데 성도님들이 이런 책은 잘 안 읽어요.

왜냐하면 비참하게 살고, 힘들고, 헐벗고, 고생하고 살다가 죽는 얘기거든요.

이런 건 아무도 안 읽어요.

 

사실은 이 책은, 1970~ 80년대에는 한국교회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에 하나였어요.

그러니까 지금 현대 기독교가 한국 내에서 어떻게 변해왔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예요.

 

그러니까 1970년대, 80년대의 영성은 뭐였냐면 ‘바울의 영성’이었어요.

가난하고, 비천하고, 희생하고, 헐벗고, 정말 만물의 찌꺼기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그 길을 따라가기를 다 싫어하는 거예요.

 

다 그 길을 따라가는 거를 싫어하고,

그것보단 강하고, 배부르고, 존귀하고...

그러니까 그걸 하나님의 어떤 축복, 또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교묘하게 포장해 놓은 거죠.

 

맹의순, 이분이 어떤 분이냐면 ‘포로들의 성자’라고 불렸던 분인데,

6.25전쟁 때,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갇힙니다. *북한군, 중공군 포로

포로수용소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겠어요? 1950년대고, 전쟁 중이었는데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폐렴도 걸리고, 나병에도 걸리고, 병으로 많이 죽어갔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거기서 이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런데 단순히 섬긴 것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워요.

그 안에 ‘광야교회’ 라는 교회를 세우고, 거기서 사람들을,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이분이 포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 이제 오해를 받아가지고, 원래는 피난민이었는데,

‘맹의순이 북한군을 도왔다’는 오해를 받아서

미군에 의해서 이제 포로로 잡혀들어오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한 1년이 지나고 나서는,

여러 조사를 통해서, 또 진정서도 올라오고 해서

‘아유, 이 사람은 빨갱이가 아니구나’ 오해가 풀려서

이제 거제수용소에서 나오게 되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는 나오기를 거부합니다.

 

‘내가 나가면, 이 돌보던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그래서 나오기를 거부하고, 계속 거기서 포로로 지내면서

포로 중에 아픈 환자들을 돌보다가, 1년인가 더 있다가 이제 소천해요.

그때 그는 27살이었어요. http://www.namdaemoon.or.kr/html.do?menuSeq=16

 

이게 여러분 영을 좇아 사는 삶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의 권리가 있어도

더 소중한 일이 있으면, 이 권리를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거예요.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나올 수 있는 권리, 부자가 될 수 있는 권리,

또 바울 같은 경우에는 로마 시민권이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권리,

모든 권리가 다 있었는데,

더 소중한 일을 위해서는 이거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영적인 삶의 특징입니다.

 

▲본 회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죠.

독일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순교하신 본 회퍼 목사님은

사실은 20대 때 이미 세계적인 신학자의 반열에 올랐던 천재였어요.

그래서 세계 신학계가 본 회퍼 때문에 깜짝 놀랐을 정도로,

20대 때 엄청난 그런 철학적인 역량과 신학자로서 이미 스타 반열에 올랐던 사람이거든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본 회퍼는 당시 미국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미국의 안전한 피난처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1939년 6월 20일에 나치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전후 독일 기독교 생활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는

내가 이 시련을 내 민족과 함께 나누지 않으면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자진 귀국한 것입니다.

 

이제 미국에서 자기 삶을 누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빠져나와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고,

또 히틀러가 추구하는 거 조금만 동조해 주면 얼마든지 보장된 미래가 있었는데,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순교하시지요.

 

그러니까 이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이 세상 기준으로 봤을 땐 맨 꼴찌라는 거예요.

왜요? 세상에서는 감이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기회가 왔는데 왜 안 누려?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왜 안 나와?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왜 돈을 안 벌어?

미국에서 살면 되는데, 왜 나치가 득세하는 독일로 돌아가?’

 

그러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땐 꼴찌, 만물의 찌꺼기라는 거예요.

왜요? 우리의 영은 세상 거에 반응하지 않거든요.

그건 그냥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누리게 되면 누리는 거고,

누릴 수 없는 거면 그냥 못 누리는 거고...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한 영적인 가치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영은 그걸 바라보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 그 영광을 쳐다보고 가는 거예요.

이런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영적인 삶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가난해져’

‘그렇게 살면 존귀한 자리에 갈 수 없어’

‘그렇게 살면 무시당해’ ... 이런 세상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 영을 좇아 사는 것이 그런 것이면, 나는 기꺼이 만물의 꼴찌가 되지 뭐’

이게 여러분,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의 원리인 줄 믿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첫째가 되고 싶어해요.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신28:44 이 구절 때문인가요?

이걸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십자가 지는 데 있어서, 희생하는데 있어서 머리가 되라’입니다.)

 

아니 여러분 이 유혹에 넘어가시면 안 돼요.

세상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시면 안 돼요.

 

그냥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두셔서,

그거 하게 하시면 뭐 그 일을 성실하고 충성되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게 여러분의 목표가 되어선 안 돼요.

그게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되는 순간, 그것이 여러분을 잡아먹어 버릴 거예요.

 

조금 인생을 살아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아시잖아요.

그것이 여러분의 목표가 되면 안 돼요.

 

바울은..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강해지는 게 아니라, 연약해지는 거라고 했고,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천해지는 것이라고 했고,

영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끄트머리가 되는 거라고 했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만물의 찌꺼기 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했어요.

 

이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품으십시오.

혹시라도 이 가운데 아직도 세상에서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헛된 꿈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건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혼이 10년, 20년, 30년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그 혼의 습관이,

계속 여러분을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그걸 좇아가면, 그 끝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어요.

 

첫째가 되려고 하는 생각들을 내려놓으십시오. 아멘

그냥 영적인 것에서, 십자가 지는 일에 첫째가 되겠다고 하는 욕심만 가지세요.

‘나는 세상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거야.

나는 세상에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이 될 거야’ 이 욕심만 품으십시오.

그것이 영의 욕심이에요. 할렐루야! 그것이 여러분을 자유케 할 줄 믿습니다.

 

◑고전4:12~13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육과 영의 차이점인데요. 육은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받아칩니다. 
육은 누가 나를 모욕하면, 방어를 하고 받아칩니다. 

아이들 싸우는 거 자세히 보시면, 정확히 그렇게 싸우지 않나요? 
바로 받아칩니다. 받아치지 않는 아이들은 없을 겁니다.

‘야 이 바보야!’ 그러면 ‘네가 더 바보야’ 그러면서 자꾸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이게 육이에요. 육은 모욕을 당하면 받아칩니다. 
상대에게 똑같은 모욕을 주려고 합니다. 

육은.. 박해를 당하면 폭동을 일으키거나, 상대를 죽이려고 합니다. 
육은.. 비방을 당하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사방으로 로비를 하거나, 

비방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매일 보고 있는 일들이잖아요. 
이게 세상을 그냥 세상의 원리에요. 혼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영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반응합니까?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축복한다는 거예요. 
'주여...' 하면서

박해를 받으면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그냥 참는다는 거예요. 
또 비방을 당하면, 같이 비방하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 권면한다는 거예요. 
맞받아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치 스폰지 같아요. 

'바보야' 그러면, '맞아, God bless you' 이러고 끝난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영의 반응이라는 거예요. 

▲제가 아는 미국 목사님 한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젊었을 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젊은 목사가 교회를 개척한다니까, 
그 도시에서 제일 큰 목사님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기 시작하셨어요. 

큰 교회 목사님이었는데, 도와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저것 도와주고, 멘토도 해주고 그랬어요.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젊은 목사 교회가 너무 빨리 부흥을 한 거에요. 
너무 빨리 부흥을 해서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이 교회가 더 커져 버렸어요. 
그러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거지요. 

그랬더니 이 나이 많은 큰 교회 목사님이 시험에 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질투, 질투 귀신이 붙은 거죠. 
그래서 시험에 들어가지고서, 이 젊은 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비방하기 시작한 거예요. '뭐 이 사람은 이런 문제도 있고, 나쁜 놈이고..' 
뭐 계속 비방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가 그냥 말로만 비방했으면 괜찮은데, 그 동네에 있는 크리스찬 신문에 
이분을 비방하는 열몇 가지 조항들을 조목조목 써가지고 신문에 기고를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목회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 젊은 교회 목사님의 성도가, 그 신문에 난 걸 보고 막 들고 왔어요.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이거 보셨습니까?' 그러면서 신문기사를 이렇게 보여줬어요. 

젊은 목사님이 이렇게 읽어보더니, 반응이 뭐였냐면 
'몇 개는 맞네요. 대부분 맞는 말이네요.' 그런 거예요. 
그리고 아무 반응을 안 보여줬어요. 

이게 여러분, 영적인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에요. 
되받아 친 게 아니고,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우리도 신문에다 내자. 뒷조사해!' 이렇게 한 게 아니라는 거죠.
 
'오, 대부분 맞네요.' 이러고 그냥 끝낸 거예요. 
물론 그중에는 이제 과장되고 거짓말이 태반이 그런 거였죠. 
태반이 그런 거였는데 '그중에 맞는 말도 많네요.' 이러고 끝낸 거예요. 

이게 여러분,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맞받아치지 않는 거예요. 
박해를 받으면 그냥 견디고, 모욕하면 축복하고... 그냥 스폰지 같은 거예요. 
푹 찌르면 찔리고... 

여러분 참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시간이 많이 흐릅니다. 
20년쯤 흘렀는데, 중간에 큰 교회 목사님은 목회가 망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됐냐면, 이 큰 교회 목사님이 말년에 
이 젊은 목사님이 하시던 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가서, 
평생을 이분을 섬기고 도와주다가 아름답게 소천하셨어요. 중간에 이분이 회개를 하신 거죠. 

중간에 그 교회에서 쫓겨나고 나서, 회개하시고, 그 다음에 신문에다가 다.시 기고를 하셨어요. 
'사실은 내가 과거에 이러저러해서 이 분을 비방했는데 그 중에 태반은 거짓말이었고..' 
그래서 화해를 하신거죠. 

이 늙은 목사님이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은퇴하시고, 
나이가 많은 분이니까 은퇴를 하신 거죠.

말년에 젊은 분 교회에 이제 스태프로 들어가가지고... 이게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소천하실 때까지 잘 동역하시다가, 이제 소천하셔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영적인 결과입니다. 그냥 맞받아 쳤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맞받아 쳤으면 절대로 이런 결과가 안 나오죠. 그냥 개싸움하다 끝나는 거죠. 
'네가 맞냐 내가 맞냐?' 이러다가 끝나는 거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영적인 삶을 사는 것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육의 삶도 결과가 있고요. 영의 삶도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의 삶의 열매들, 그 결과들을 취하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라고요? 억울한 일을 당하면, God bless you 하고 그냥 참는 것입니다.
굳이 사람들한테 내 억울함을 다 설명하고, 
내 억울한 일을 풀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하소연하고
'사실은 저놈이 나쁜 놈이야.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한 거야' 이런 일 하지 말라고요. 
이게 다 육에 속한 일입니다.

억울한 일 당했으면, 그냥 참고, 
모욕을 당했으면 God bless you로 축복하고 끝내라고요. 아멘? 

그런데 '내가 당한 억울한 일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게 된다' 
그런 경우 잘 설명하는 건 해야지요. '사실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이렇게 돼서 그렇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건 오케이지만, 
그 오해를 다 풀고자 '저 놈이 나쁜 놈이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뛰어다니면 안 됩니다. 

그건 영적인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삶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비방을 당하면 권면하고, 박해를 당하면 참고...' 아멘!   고전4:12~13

◑고전4:14~16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우리 다음 번에 고전5장을 살펴보면서 조금 더 깊게 다루긴 할텐데요. 
혼은 스승이 되려고 하지만, 영은 자녀를 낳습니다. 

혼의 특징은 뭐라고 그랬어요? 이해하는 거라고 그랬어요. 
혼의 특징은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은 끊임없이 가르치려고 합니다. 
왜요? 이해를 시켜야 되니까!              

그래서 혼의 결과는, 스승과 제자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을 보십시오. 다 이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혼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배우고, 누구한테 가르침을 받고... 
뭐 그렇게 다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영은 다릅니다. 영은 영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거예요. 
영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은 사랑 안에서 자녀를 낳습니다. 

혼은 제자를 만들고, 영은 자녀를 낳아요. 
그래서 영이 전수되는 것은, 영이 흘러가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본받는 것입니다. 

영은 반드시 실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의 전수는 가르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이 전수되는 것은, 가르침의 실체가 있어야 되는데, 그 실체는 본이 되는 거예요.

본이 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영의 실체가 전달되는 거예요. 
그래서 영은, 여러분 언제 영이 전수되는가? 
언제 영적인 것이 아비에서 자녀가운데로 흘러가는가 하면, 

그것은 가르치는 게 물론 필요합니다. 사람은 이제 영혼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가르치는 것에 대한 실체가 있어야 돼요. 

가르치는 것에 대한 실체가 있어야 된다고요.

그래서 그 실체를 보고 본받는 거예요. 
그때 가르친 내용이 실제로 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영이 전수되는 것은, 절대로 가르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가르침만으로 되지 않고, 반드시 본이 되는... 
또 사랑으로 자녀를 낳는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자 여러분이 영으로 살고 있다면, 두 가지 특징이 있을 것인데, 두 가지 특징은 뭐냐면 
누군가 여러분을 영으로 낳아준 사람.. 즉 아비가 있을 것이고, 
둘째는 여러분이 사랑 가운데 낳은 사람.. 자녀가 있을 거예요. 
이게 영으로 살아가는 삶의 특징입니다. 

영은 여러분 역동적인 생명력이에요. 
영은 역동적인 생명력이라서, 반드시 흘러가게 돼 있어요. 
영은 정체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은 반드시 흘러가게 돼 있어요. 

영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생명이라는 것은, 여러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씨앗을 하나 심었어요. 그럼 생명이 있다면, 그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큰 나무가 나타나게 되지, 씨앗을 심어 놓고 1년, 2년, 5년, 10년 지났는데, 
아무런 변화가 안 일어나고, 그냥 씨앗으로 남아 있어요.

그럼 그건 죽은 거지요. 생명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흘러가게 돼 있어요. 반드시 흘러가게 돼 있어요. 

영은 여러분, 생명이기 때문에 멈춰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흘러가요. 
반드시 흘러가는데... 그래서 누군가가 그 영의 흐름 속에서 여러분을 낳은 거예요. 

이 가운데 여러분, 영적인 아비, 어미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군가는 복음 안에서 영으로 여러분을 낳았으니까, 여러분이 여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사람도 통하지 않고, 직통계시를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이런 일은 하신 적이 없어요. 그건 하나님의 원칙이 아니에요. 

그럴 거였으면 뭐하러 우리더러 복음 전하라고, 뭐하러 선교하라고 그러시겠어요? 
그냥 하나님이 직접 하시면 되지요. 그건 (직통 계시는)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리는 반드시 생명이 생명을 낳아요. 
해산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 영이 흘러가게 하는.. 이게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이기 때문에, 
절대로 직통계시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영적인 영향력 가운데 여러분이 태어난 거예요. 

한 사람의 영향력은 꼭 아닐 수도 있어요. 
할머니의 기도를 통해서 일수도 있고,  
나는 모르지만 그 영적인 영향이 흘러왔을 수도 있고, 
또는 누군가가 나한테 복음을 전해주고 사랑해줘서, 예수를 믿게 될 수도 있고... 
하여간 여러분에게 누군가 영적인 어미나 아비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누가 내 영적인 아비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
누가 영국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줘서 그럴 수도 있는 거죠.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토마스 선교사와 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죠.

또 여러분을 태어나게 해 준 그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을 영적으로 잘 키워주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은 정상적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낳아준 사람이든지, 키워준 사람이든지, 하여간 누가 있어요. 
키워준 것도 부모잖아요. 낳아준 것만 아니라. 

낳아준 부모든지, 키워준 부모든지.. 하여간 누가 있다고요. 
그래서 여러분이 영적으로 잘 건강하게 성장해서 온 거예요. 

꼭 낳아준 사람이 키워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하여간 여러분에게 영적인 부모가 분명히 있어야 돼요. 

그런데 실제로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면, 영적인 고아들이 진짜 많아요.
자기가 누구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누구로부터 돌봄 가운데 커왔는지.. 전혀 몰라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예요. 이런 사람들은 혹시 '지적 동의'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닌지,
곰곰히 기도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성경은 영적인 고아로 사람들이 크지 않았거든요. 
바울이 디모데를 낳았고, 또 디모데가 그 다음 사람들을 키우고 쭉 이어져오는 
영적인 어떤 계보들이 있어요.

그런 계보도 없고, 족보도 없고, 가문도 없는 경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는 많은 핸디캡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도 이제 한 20년 이렇게 목사로 살다 보니까, 보면 대충 알겠어요. 
고아로 여러분이 자라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온전히 영이 성장하지 못해요. 

표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영이 거칠어요. 
영이 거칠고 뭔가 약간 균형이 맞지 않고, 
보면 어떤 부분은 굉장히 헌신되어 있고, 은사도 굉장히 많고 그런 것 같은데, 
또 어떤 부분에 가보면 정말 형편없이 성장이 안된 부분이 있고 그래요. 

이게 고아들의 특징인데, 고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거 열심히 파서 
은사는 개발이 되었는데, 이게 건강하게 균형 있게 자란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만나보면 저는 거의 알겠어요. 

요즘은 이제 사람들을 만나서 조금만 교제해 보면 '아 그냥 고아구나' 
그래서 여러분 반드시 영적인 아비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건강하게 크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고아로 살다가 끝나는 거예요. 

고아가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사실은 공동체가 참 중요한 거예요. 
이 이야기는 이제 고전5장부터 나옵니다. 

또 동시에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자녀들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영적인 삶을 산다면, 당연히 나의 삶을 보고 본받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겠어요? 

바울이 뭐라 그랬냐면 '나를 본받으라' 그랬거든요. 고전4:16
그 본받는 게, 아비 됨의 어떤 특징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아비는 어떤 사람이냐면, 본받고 싶은 사람이에요. 본받고 싶은 사람! 
'아 저 사람을 보니까,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아 나도 저 사람을 본받고 싶어' 
이게 아비란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만약 영적인 자녀가 없다면, 
미안하지만 본받고 싶은 매력이 없는 거예요.

영적 자녀가 내게는 없다는 말은, 본받고 싶은 매력이 없는 거예요. 
그 사람하고 아무리 오래 있어도, 별로 본받고 싶은 매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영성의 문제예요. 
본받고 싶은 영적인 매력이 없으니까, 자녀가 없는 거지요.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10년을 예수를 믿고, 20년을 예수를 믿었는데, 
사람들이 나에게서 본받고 싶은 것 하나를 발견하지 못할까요?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세요. 

내가 5년, 10년, 15년, 20년 신앙생활을 했는데, 
사람들이 내 삶에서 본받고 싶어하는 게 뭘까요? 뭔가 하나는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뭐 탁월해지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뭐 진짜 힘든 삶을 살아갈 수도 있어요. 
그래도 믿음으로 힘든 삶을 이겨내는 모습이라든지... 
하여간 뭔가는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뭔가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저 사람을 보니까, 나도 저 분처럼 
참 연약하고 약점도 많고 그런 사람이지만, 
믿음으로 저것들을 저렇게 이겨나가고 계속 잘 극복해가네?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어!' 뭐 이런 게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탁월한 무슨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이런 얘기가 아니라, 
뭔가는 여러분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서 
'아 나도 한 발짝 저 사람처럼 저렇게 더 나가고 싶어' 이런 게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본받는 자잖아요. 본이 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자녀들이 생깁니다. 
반드시 누군가는 여러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기도 하고, 
또 생명은 다른 데서 얻었어도, 여러분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받고 싶어해요. 

와서 물어보기도 하고..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런 거를 물어본단 말이에요. 

대단한 카리스마가 없어도 괜찮아요. 아시겠습니까? 
영적인 자녀들을 낳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전4:19~20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영은 말이 아니라 능력이라는 거예요. 영은 여러분 반드시 실체가 있습니다. 
반드시 실체가 있다는 것은, 임팩트(영향력, 충격)가 있다는 거예요. 

'저기서 공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실제로 공이 날아오는 것은 다르죠. 
'공이 여기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리 이렇게 말을 해도 
여기 이 자리에 아무런 임팩트가 없어요. 

그런데 실제로 공이 날아오면 임팩트가 있습니다. 
유리창이 깨지든지, 머리에 공이 와서 부딪히든지.. 임팩트가 있잖아요. 

이게 실체라는 거에요. 실체! 
영은 여러분 실체이기 때문에, 뭔가 여러분들이 말하고 선포했는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거는 혼으로 한 거예요. 

영으로 한 일은 여러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능력이에요. 능력!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 고전5장을 살펴보면서 조금 더 깊게 살펴봅시다. 
우리 같이 좀 일어나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