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28ㅣ주는 대대로 우리 거처가 되셨나이다.(신34:1-12) Youtube
◈주는 대대로 우리 거처가 되셨나이다 신34:1~12 2025.12.28.
※아래 내용 중에, 오늘날의 전자기기로 인한 '주의력 결핍의 시대'에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며.. 하나님께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하는
그런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 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연말이지만
우리 교회로서는 120년의 긴 역사를 마무리하는 뜻깊은 주일이기도 합니다.
설교 본문으로, 모세의 일생 마지막 장면을 읽었습니다.
모세는 120살을 살았기 때문에, 모세의 120년과 포항제일의 120년을
견주어 볼 수 있는 본문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40년, 광야의 목자로서 40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역시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중략. '포항제일교회의 120년' 주1)
모세의 삶은, 태어나자마자 자기 생명을 염려해야 됐죠. 나일강에 버려졌죠.
홈리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왕궁에 살지만,
어느 순간 ‘여기가 내 집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그네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집트 체제의 가혹한 착취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떠나야 했었고,
그 후에 처가에 가서, 내 집 아닌 남의 백성과 섞여 살면서, 목동으로 40년을 보내죠.
그리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는데, 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평생 떠돌이 삶을 살았고,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신명기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때입니다.
이제야말로 처음으로 내 땅이 생기고, 우리 집이 생길 것 같은 순간,
‘이제는 죽어도 내 땅에 묻힐 수 있겠구나’ 했는데,
모세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그네로서 삶을 마감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세는 불쌍하구나’ 싶겠지만,
사실은 모세의 인생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복된 삶이었다..
라고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 모세의 삶은 우리에게 “홈, 집이 어디인가? 집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집을 잃은 인류, homeless humanity의 실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는 공간이 있지만, 집에 들어와도 썰렁하고 아무도 없으면.. 집이 아닙니다.
어릴 때 여러분, 집에 엄마가 없으면 어때요?
밥 주는 사람도 없고, 필요한 걸 찾아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집이 텅 빈 것 같은 느낌... 우리가 다 경험한 적이 있죠.
그 사람이 없으면 집이 아니에요.
반면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답답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과거에 며느리가 시집 와서 시집살이를 하는데,
시댁 어른들이 가족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매일 어색하고 힘들고 긴장돼요.
그러면 ‘집’이라 할 수 없겠죠.
요즘에는 반대로 며느리하고 같이 사니, ‘부모가 시집살이한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집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내 자리가 있고,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바로 ‘집’입니다.
집이라는 게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른들 부부 두 분이 잘 오손도손 사시다가, 한 분이 세상을 먼저 떠나시면,
그 집에,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 하는 분들이 많죠.
아내/남편이 없으니, 집이 집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아, 여기가 내 집이 아니구나’ 하는 때도 있고요.
반대로 ‘여기가 내 집이구나 I feel at home’ 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말을 만들어봤어요. ‘Feel at home moment’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여기라면 내가 좀 오래 머무르고, 마음 둘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 사이, 그런 관계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품 안에서
(feel at home) moment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순간은 지나가지요.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은 어떤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건축가들 중에서도 그런 비슷한 생각하는 분들 많습니다.
프랭크로이드 라이트는 미국을 대표하는 20세기 대표적인 건축가입니다.
제가 이분이 건축한 건물을 좋아했어요.
이 분의 대표작으로 “폭포 위의 집”이 있습니다.
아주 시골에 있어요. 제가 미국에 살 때, 그 집을 찾아서 멀리 운전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한 말 중에, 「건축 사진은, 건축의 진정한 본질,
즉 그 안에서 경험되는 방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건축은 벽과 지붕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인테리어 아무리 잘해도.. 이 벽과 저 벽을 만드는 게 건축이 아니에요.
그 안에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 안에 우리가 살아가는 거죠.

그래서 한 집의 진가는, 벽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벽에 있는 만들어내는 공간,
거기에 들어가서 살아봐야 (진가를) 압니다.
여러분, 네 계절 지나는 동안에.. 처음에는 참 그냥 평범하고 지겨운 집이었는데,
어느 여름날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소리,
집에서 본 해지는 모습에 반할 수 있고요.
그러면 ‘여기가 내 집이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핀란드의 유명한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그런 말을 했어요.
「건축은 준공된 딱 그 시점에 어떻게 보이나가 아니라, 30년 좀 살아봐 안다」
‘그 안에 어떻게 살았다... 라는 결과로 평가받아야 된다’는 거죠.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이런 시각이 있으니까, 세계적인 건축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벽이 아무리 훌륭해도, 건축은 벽과 벽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공간을 창출해내는 거예요. 공간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행복도 느낍니다.
사실은 그 공간이 허락해 준 시간이죠.
그 시간 안에 사람이 있고, 만남이 있고, 생각들이 흘러갑니다.
그래서 집은... 내 자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이가 집을 떠나서 군대를 가고, 유학을 가도
부모는 그 침대, 그 책상을 그대로 둡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집에 돌아와가지고
아들 침대에 누워가지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런 글을 쓴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집은 흩어진 마음들이 한 곳에 모이는 곳입니다.
현대인들은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가 힘듭니다. 마음이 많이 흩어져 있어요.
마음이 바쁜 세상을 사느라 많이 빼앗겨져 있어요.
조각조각 난 마음들이 하나로 모여서 한 그림을 만들 때,
그 안에서 우리는 ‘내가 누군인가’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집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면,
우리는 작별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집은 다 지나갑니다. 기껏 공간 하나 마련해놓고, 큰 집 하나 사놓고,
‘이게 내 집이다. 이 집이 있으니 우리 집은 안심이다’ 라고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 안에 함께할 시간이 없으면,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가정예배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가정예배 시간을 특별히 “패밀리 타임”이라고 그러잖아요.
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꼭 교회에서처럼 형식을 갖춘 예배가 아니어도,
가정이 가정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Feel at home moment 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머물 집 없는 나그네로 평생을 살았는데, 어떤 마음으로 120년을 살았을까요?
모세가 쓴 시편이 있습니다. 90편 1, 2절을 함께 읽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의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90:1~2
모세가 집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네요.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다. Feel at home 했다’는 거예요.
그는 이방 땅에서도, 나그네 생활에도, 처갓집에서도 Feel at home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니이다” 라고 하는
시간에 대한 아주 깊은 통찰이 있었습니다.
“대대로” 무슨 말입니까?
나의 120년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고, 우리 조상들과도 함께 하셨고,
앞으로의 미래에 우리 자손들의 삶에도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그게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게 진짜 우리가 물려줘야 될 영적인 유산인 거예요.
이제 여호수아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 다른 시간이 펼쳐질 것입니다.
지난 40년은 광야시대에 살았잖아요.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전쟁하고 정착하게 됩니다.
집이 생길 겁니다. 그 집이 어떤 집입니까? 벽과 지붕으로 된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홈, 사람이 사람 대접받고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바로 그 집, ‘여호와가 거처가 되신 집’
“대대로”라는 말은,
오늘까지 모세가 경험하고 누렸던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feel at home moment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본문은 신명기를 마치는 대목이죠) 신명기를 마치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 자손들은 모세와 같이, 즉 부모 세대와 같이,
‘우리 거처가 되신 하나님’을 누리며, 그 보호 아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세대가 될 것인가?
여러분,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갈 것 같습니까?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 길은, 이미 신명기 28장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힘든 삶을, 수치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두 갈래 길이 여러분 앞에 있다. 어떤 길로 갈 것인가?’
우리 자손들의 세대는, 여호수아 세대가 될 것인가?
자신의 욕심을 섬기다가 망해 가는 바알의 세대가 될 것인가? *여호수아 그 다음 세대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포항제일교회 120년 역사를 마치면서,
내년 121년 째부터는 어떤 길로 가야 할 것인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년에 지방선거가 있죠?
지방선거의 이런저런 자리에 꿈을 가지신 분들을 가끔씩 만나게 되는데,
제가 그런 당부를 합니다.
「우리 지금 한국 사회에.. 포항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림길에 있습니다.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이 기회가 웅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대한 통찰, 인식, 무거운 소명 없이
그저 4년 무사안일 한 자리 지키겠다... 그러면 안 되죠.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세계가 올 한 해, ‘한국 사회 미래 전망’에 대해서 평가해놓은 평가들을 보면,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2050년쯤 되면 한국은 완전히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는 심각한,
그러면서도 아주 진지한 리포트들이 있고,
‘한국은 더욱더 세계적인 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하는 전망도 있습니다.
완전히 극과극으로 갈리는 두 개의 전망이 있는데,
어느 하나도 부정할 수 없는 데이터들입니다.
그 갈림길에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거예요.
▲가장 현실에 우리가 경험했던 거, 포스트 코비드,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우리가 겪었잖아요.
이게 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게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이 빨리 다가온 거예요.
온라인 사회라든지... 그렇죠?
이게 10년, 20년에 일어날 일을 1, 2년 만에 급하게 경험하였습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중요한 거는요, 불가피한 일이라는 거예요. 피해갈 수 없는 길입니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가 막 엄청난 속도로 열리고 있잖아요.
여러분, 얼마나 이 사회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됩니다.
제가 지난 7월에 샌프란시스코 갔었는데, 이미 운전수 없는 택시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운전수가 아예 없어요. 웨이모라는 택시입니다.
한국은 좀 늦는데, 아마도 2년 후면 일반화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제가 어떤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교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이고, 우리 집은 행주대교 지나서 있는데, 그 복잡한 길을 어떻게 기계에 맡겨요?’
제가 그랬습니다. ‘조금만 있어보세요. 그렇게 복잡한 길을 어떻게 사람이 운전해요?
그건 말이 안 돼요.’ 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사실은요. 이게 미래일이 아니고, 지금 이미 그렇게 되었어요.
지난 달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웨이모가 자율주행을 하는데 사고를 분석해보니까,
에어백이 터질 정도의 중상은 90%가 줄었습니다.
모든 사고, 경미한 사고까지 다 합치면, 그것도 85%가 줄었습니다.
보험사에 보고되는 재산 피해가 88%가 줄었습니다.」

정말 놀랍죠. 보험사들이 이걸 놓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미래는 이미 우리한테 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우리 가운데, 우리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들의 생각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요.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서, 개발도상국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 한반에 60명 넘는 아이들을 콩나물 시루처럼 모아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오전반, 오후반 하던 시기를 지나왔잖아요.
지금 아이들은요. 선진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에요.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은요. 한국이 1등이면, 세계 1등인 분야가 너무 많습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양궁 하나뿐이었죠.
지금은 음악과 영화와 산업에 한국에서 1등이면 세계 1등도 됩니다.
한국이 잘났다는 말도 되지만,
그만큼 세계 모든 나라의 수준이 전부 딱 붙어있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격차가 없다는 거죠)
작년에 우리가 캄보디아에 단기선교 갔을 때,
여기서 프랭카드를 만들어 가는 것을 잊고 안 만들어 갔어요.
거기서 아침 먹으면서 ‘아이고 어떡하냐?’ 이랬는데요.
누가 주문하더니, 점심 먹기 전에 오전 시간에, 프랭카드가 도착했습니다.
한국도 아니고 캄보디아에서! 전화로 주문했는데, 몇 시간 만에 도착 완료했습니다.
여러분, 캄보디아라고 얏보지 마십시오.
지금 해외여행하면서 동남아나, 아프리카 국적 항공사 비행기 타보셨습니까?
거기에 소개하는 영상이나 인쇄물 디자인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미국, 영국보다 훨씬 낫습니다.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Flat world, 편평해진 세상, multi-centric world 다극화 시대
지금의 전세계 젊은이들은, 인스타 그램으로 실시간 영상보며 자라는 세대예요.
그래서 인도네시아 청년이 그런 말을 해요.
‘우리가 주머니가 얇지 감각이 뒤진 것은 아니다!’
지금은 문화적으로 후진국도 없고, 당연히 시골도 없어요.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몇 번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한강 이남에서 우리가 이거 최고 먼저 했습니다.’
여러분 ‘한강 이남’이라는 말이 언제 말입니까?
옛날에 부산대학교나 경북대학교에서 그런 말들 (한강 이남)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가 한강 남쪽으로 옮긴 게 1970년대입니다.
‘한강 이남’은 이미 아득한 옛날 이야기예요.
지금 한국 사회는 수도권에 뭐가 너무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과
문화적으로 지방도 함께 동기화되어서
여기 지방에서도 뭔가 창조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올해 5월에 창립120주년 기념예배 일에 영상을 만들어서 올려놨는데요.
가끔씩 저한테 연락이 옵니다. ‘어떻게 그런 영상을 만들었나요?’
한국 최고 규모의, 최고 수준의 교회들이 보고 깜짝 놀랍니다.
‘교회가 이런 영상을 만들 수 있다니...’
여러분, 앞으로 우리 가운데, 대단히 많은 도전도 있고, 유혹도 있고,
또 기회도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여호수아 세대로 갈 것인가? 바알 세대로 가고 말 것인가?
▲여러분, 시대는 완전히 바뀌겠지만, 변치 않는 것이 있잖아요.
변치 않아야 할 것이 있잖아요.
모세를 모세되게 했던 그 삶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
‘주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셨습니다.’
시편 90:1~2절을 함께 읽습니다.
‘시90: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옛날부터.. 모세가 활동하던 홍해를 가르던 그 시기부터..
앞으로 가나안 정착기까지.. 영원히 주는 하나님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이 주님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신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어떤 업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가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고 말하기 전에, 딱 하나 모세를 말하는 특징이 있다면,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모세를 모세되게 했어요. 나머지는 전부 다 부수적입니다.
▲최근에 독일 철학자 한병철 씨가 <신에 관하여>라는 책을 냈습니다.
시몬느 베이어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는 말을 듣는 여자분이죠.
그보다 앞서 시몬느 베이어라는 분이, <신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쓴 적이 있는데,
이 책도 아주 깊이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중심으로 시몬느 베이어를 묵상하면서 쓴 책이
한병철의 <신에 관하여>입니다.
저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에요.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단순히 특정한 믿음의 내용들이 타당성을 상실한 탓으로
우리가 더는 신을 믿지 않는 탓으로, 또는 교회가 신뢰를 상실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건 너무 맞는데요. 지역적인, 너무 표피적인 분석입니다.
‘오히려 더 깊은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이유들이 신의 부재를 일으킨다.
한 가지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대인의 주의력의 attention의 몰락이다.’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일 줄 모른다는 거죠.
무언가를 진득하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기다릴 줄 모른다는 거죠.
‘종교의 위기는 attention의 위기이다. 보기와 듣기의 위기인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오늘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드러남을, 하나님의 계시를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사람들은 신에게 주의를 기울일줄 모른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열망하시는데, 우리가 외면하고 산다는 거죠.
(신을) 알아차릴 감각과 능력을 상실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주의력의 상실은, 종교만의 위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위기입니다.

특별히 정보와 사회에서, 정보는 어떻게 우리의 주위를 산산히 조각내는가요?
정보를 향한 꺼지지 않는 욕망!
인간이 게걸스럽죠. 무슨 말입니까?
비만에 걸린 사람이 끊임없이 입에 뭘 넣는 거, 그것을 못 참듯이,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끊임없이 쇼츠 보고, 유튜브 보고,
그 게걸스러움이 인간을 얼마나 파괴하는가요. 흥분되잖아요.
그런데 그 흥분은 현재성에 갇혀 있습니다. 이거 보다가 또 다른 거로 넘어가면,
앞에 보던 거를 완전히 잊어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현재성, ‘정보의 현재성’이라는 게,
우리의 주의력을 산산히 토막내어버린다는 거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게 깊은 주의, deep attention 인데
그게 산산조각 나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서 ‘처분 불가능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다림!’
여러분 오늘날은 핸드폰만 갖고 있으면,
옛날에 도서관에 가야만 찾아볼 수 있는 정보를, 금방 찾아볼 수 있잖아요.
옛날에 하루종일 장을 돌아다녀야 구입할 수 있는 거를,
금방 그냥 손으로 주문할 수 있잖아요.
마치 이 세계 전체가 나에게 ‘처분 가능’하게 되었다는 착각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으면 짜증나죠. ‘이거 왜 이래?’ 그러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현대인의 아주 깊은 병입니다.
‘세계가 처분 가능하다’ 즉 내 마음대로 조작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심대한 착각,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기다릴 줄을 모르는 거예요.
가족의 문제도 여기서 옵니다. 궁극적으로 자기가 ‘처분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거죠.
즉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관계를 주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분 불가능성’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내 마음대로 오라 하면 오시고, 가라 하면 가시고... 내 비서입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앉으라면 앉고, 웃으라면 웃고... 아니잖아요.
하나님을 내 뜻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생각, 그 처분 가능성에 가둬놓는 것,
이게 인간의 병입니다. 현대인의 병입니다.
디지털 세계는, 주의를 집중하고 기다릴 줄 모르게 하고..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갖게 합니다.
이건 깊은 병의 원인입니다.
시편 90:11에 보면 굉장히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시90: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는 자’라 그랬고,
하나님과 친구처럼 사귀었던 자라 그랬는데,
대대의 우리의 그체가 되셨던 분이라 말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릴까?’ 라고,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싫은 건가? 하나님이 부담돼? 가까이 가기 싫어?’ 아니에요.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인조이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주의 두려움을 알까?’
이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처분 불가능성이에요.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분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게 가능해집니다.
깊은 주의는 도리어 자극을 견뎌내고, 심지어 (디지털 자극을) 물리친다.
‘깊은 주의는 기도와 같다.’ 기도가 가장 깊은 생각인 거예요.
‘주의가 충만할 때는 오로지 신만을 생각할 수 있다.’ *한병철 씨의 책 계속 인용
거꾸로 말하면, 오로지 주의 attention 가 충만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금방금방 지나가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짧은 생각에 포착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위기입니다.
인간이 인간되려면 이 깊은 주의를 회복, 해야 되는데,
즉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신과) 만남이 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이 책에서 그렇게 말해요.
‘최고의 주의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 성경을 우리가 읽으면,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만 만나주시고, 하나님이 왜 모세만 특별히 만나주셨는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 사람들만 특별히 만나주신 게 아니고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나기 원하시는데,
그분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을 뿐인 거예요.
하나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만나기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게 여러분, 교회의 사역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알리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회가 할 일이에요.
여러분, 오늘 ‘예배가이드(주보)’ 보시면 ‘예수님과 함께하는 한 주’라는 란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주보가, 그냥 교회 행사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삶을 인도하는 가이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집에 가져가셔서 쭉 한번 읽어보십시오.
‘새해를 어떻게 준비해야 될지..’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삶의 한 예로
<맥체인 성경 읽기>를 소개했습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잘 하고 계신데, 올해도 상도 많이 받고 그러셨죠?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 1년에 구약 1독, 신약 2독 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성경읽기 습관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attention, 깊은 주의를 하나님께 기울이는
그런 ‘집중력 훈련’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주고 싶으십니까?
‘번듯한 집 한 칸 물려주어야지...’
좋지만, 여러분 자녀가 어디에 살기를 원할지,
그 집의 자산 가치가 어떻게 될지... 미래는 모르잖아요.
‘주는 대대의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90:1
내가 주님을 거처로 삼고 살면, 그 거처는 대대에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 될 줄 믿습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내 인생 마지막 날까지!
모세의 유산이 뭡니까?
여러분, 모세가 이런 일을 했어요. 저런 일을 했어요. 저런 대단한 스펙터클이 있었어요.
여러분 아무리 위대해도요. 그거 다 과거의 일이에요.
홍해를 가른 일, 그건 앞으로는 필요 없어요. 다른 게 필요해요.
중요한 건 모세의 중심이에요.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는 삶!
그 위대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뿌리를,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출33:8~11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요. 회막이 이스라엘의 중심이에요.
거기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친구처럼 만나서 얘기하고,
그 옆에서 여호수아가 다 보고... 듣고...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중요한 유산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모세는 돌아갔는데, 여호수아는 자기 장막으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렀다는 거죠.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예배 드리고 나면, ‘이 자리를 떠나기 싫어...’
저는 현대교회가 막 주차도 빼고 이래야 되니까,
예배 끝나고 썰물 빠지듯 나가버리는 게 참 아쉽습니다.
예배 후에 잠시라도 머물러서 하나님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도 끝냈는데
그 옆에 앉아서 구경하던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 일어나고 나서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고 생각하면... 참 흥분스런 일이죠.
‘야 가정예배 드리자. 빨리 거실에 모이자’ 그러면, 그냥 마치 도망가는 아이들이 아니라
예배가 끝났는데도, 그 자리에 머무르기 원하는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
그리고 모세가 누렸던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얼마나 얼마나 깊고 멋져 보였으면
그렇겠습니까?
그 여호수아와 하나님이, 또 평생 함께 동행하시고,
새로운 세대를 여호수아에게 맡기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가 이런 영적유산을 물려주기를 새해에는 소원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나중에 커서 이런 진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예배의 사람이었어요.
정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을 제가 알아요.
우리 엄마 아빠는 기도의 사람이었어요.
엄마 아빠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나는 몸으로 알았어요.」
그런 유산 나눠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치는 말
Feel at home moment,
날이 저물어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빈들이에요.
근데 그때가 하나님의 때라는 걸 알게 되는...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어느 때보다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여러분,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셨다는 것요.
모세 혼자만 누린 복이 아닙니다.
(한 줄 묵상) “주님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시니 언제 어디서나 평안을 누립니다”
여러분 외우시고요.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이 내용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시니 언제 어디서나 평안을 누립니다.’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한 주간을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해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한테 가깝게 다가오시는지요...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제를 드립니다. 여러분 주보를 꼭 집에 가져가셔서, 한 주 동안 계속 들여다 보세요.
주보에 보면, 중간에 네모가 세 개 있습니다.
‘모세의 인생이 120년이라 그랬는데, 나는 내 인생을 3부분으로 나누면
어떤 타이틀을 붙일 수 있을까?’
1기는 언제까지? 2기는 언제까지? 지금 3기는 어떤 시간인가?
지금 한번 묵상하시면서... 잠시 타이틀을 적어보시겠습니까?
(모세는 1기가 왕궁, 2기가 광야, 3기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목자 시대였죠)
여러분 집에 가져가셔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정리를 해보세요.
내가 일평생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금년 한 해 주제가 ‘돌봄’ 이었잖아요. 내 인생을 잘 돌아보면요.
내년 한 해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에 그 기도 제목 들고 이번 언약갱신예배(송구영신)에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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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포항제일교회는, 1905년 을사늑약이 있던 해에 출발해서, 민족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힘든 시절 3.1운동을 비롯해서 당시에 저항의, 신앙적 저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 625 한국전쟁 때도, 포항 시내 전체가 폭격당했는데
남아있던 유일한 건물 그것이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까지 알려져서
세계의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도의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1970년대에 이미 우리 교회는
한 2천 명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가파른 성장은 그 이후에는 없었습니다.
2003년에 지금 이 자리로 옮겨 와서 계속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네이밍 naming 하지 않고 일단 비워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