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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5장 새 영, 새 마음 그리고 자유의 새 날

LNCK 2026. 1. 1. 18:2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자유>       ▣ 복음 관련

[갈라디아서 1] 새영 새 마음 그리고 자유의 새날 5:1   2025.12.28. - YouTube

 

◈새 영, 새 마음 그리고 자유의 새 날          갈5:1                  2025.12.2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아멘.

 

2026년도에는 저희가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올해 주신 말씀의 주제는 “새 영, 새 마음 그리고 자유의 새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2025년도 올해 한 해 동안 저희가 살펴봤던 히브리서와

직접 이어지는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죠.

'새 언약'의 내용이 뭐냐면, '새 영을 부으셔서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히브리서가 쓰여졌던 때는, 이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초대교회 때죠.

그래서 '새 영을 부으시고 새 마음을 주셨을 때'

구약이라고 하는 한 시대가 끝나고, 신약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새 영을 부으시고, 새 마음을 주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셨던 그것이

이제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니까 이것이 이제 '새 언약'의 내용이죠.

'새 언약'은 우리 안에 새 영을 부으셔서, 새 마음을 가지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새 마음은 뭐냐면, '새 언약'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거죠.

성경에서 '마음이 굳다' 하는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잘 반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내 생각, 내 고집, 내가 원래 했던 생각대로

딱딱해진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고,

'마음이 부드럽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내 안에 있는 마음을 딱딱하게 굳은 채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에 그때그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런 마음을 주시겠다는 거죠.

 

▲그게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봤던 성령의 탈레마입니다. *갈망, 소원

그래서 이제 그럴 때 우리는 육체에 열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 가운데 행하는데,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새 날은 새 마음으로 열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될 때, 우리 앞에 이전과는 다른 날들이 열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새 날은 모든 속박과 저주에서부터 자유케 되는 날입니다.

이게 '새 언약'의 내용이죠.

새해 2026년에는 이 '새 언약'의 내용들을 경험하고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개인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그리고 민족과 국가적으로도,

새 날을 누리는 자유를 누리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자 <갈라디아서>에 대해 살펴 볼텐데, 갈라디아에서의 서론과 배경에 대해서는

내일부터 살펴보도록 하고요. 오늘은 <새 영, 새 마음 그리고 자유의 새 날>이라고 하는

이번 특새 주제 구절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눈치 보는 삶으로부터의 자유!

‘자유’는 복음의 본질이에요. 그리고 창조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타락으로 인해서 잃어버렸던..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부여하셨던 그 자유를 회복하고

다시 누리는 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자유를 주신 겁니다. 선악과가 그렇죠.

 

선악과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선택권을 주신다는 의미지요.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우리가 선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런 자유를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하신 것은, 선악과를 주시면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야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 우정, 선택, 책임, 삶의 의미 등 성숙한 인간의 모든 것은 자유에 기초합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무의미하고요. 책임이 없는데, 성숙한 세상이 될 일은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책임을 어떻게 물어요?

나에겐 선택권이 없고, 그냥 기계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행한 걸 가지고, 잘못했다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죠.

그리고 책임이 없는데, 어떻게 성숙한 사회가 되겠어요?

 

책임이 없는 사회라고 하는 건 뭐냐면, 그냥 아무거나 싸질러놔도

‘아이 나 몰라’ 그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잘못에 대한) 책임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루는 성숙함인데,

이것은 책임(자유 의지)이라는 게 없으면,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책임은.. 자유가 있어야 책임이라는 게 생겨요.

그러니까 자유가 없으면, 사실은 성숙한 사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맹점은 뭐냐면, 책임 없는 사회예요.

국가가 알아서 다 하기에, 개인은 무기력합니다.

책임질 것도 없고, 책임의식을 느끼지도 않아요.

 

자유를 구속당한 인간은, 영혼 없는 인형처럼, 기계적이고 무기력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공산주의가 유지된 사회에 가서 보면, 사람들이 눈빛이 없어요.

사람들이 눈빛이 멍~하고, 그 속에 생기가 전혀 없어요.

 

뭐를 해야겠다는 열정도 없고, 뭐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위에 있는 수뇌부들은 조금 다를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은 지 맘대로 하는 자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밑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없어요. 그냥 기계적이고 무기력한...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존엄성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은 기계며, 숫자일 뿐이에요. 영혼 없는 껍데기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뭐예요? 자유를 뺏기는 거예요.

자유를 뺏기면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요.

 

자유를 뺏기게 되면, 인간은 기계나 그런 숫자로 전락해버리고요.

인간의 존엄성도 없어져버립니다. 자유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굉장히 중요한 기초 foundation 를 이룬다는 거예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도 자유가 그 기초예요.

제가 여러 번 나눴던 말씀인데, 사랑은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수 있어요.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남자가 총을 들고 여자한테 찾아가서 딱 머리에 들이대고

‘나 사랑해, 안 해? 대답해!’

그러면 이 여자가 대답할 수 있는 거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합니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죠. 바보 같은 짓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왜 그러냐면,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세상에 40억 남자가 있고 40억 여자가 있는데,

‘39억 9,999만 9,999명을 제외하고 나는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감동적인 거거든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사랑을 할 수가 있어요.

C S 루이스가 한 말인데,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거예요.

 

만약 그 자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프로그램한 대로 움직일 수는 있지만, *AI 로봇 천사

그거는 굉장히 기계적이고, 바보 같은 짓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돼요.

 

자, 이렇듯이 사랑의 기초도 뭐예요? 자유예요.

그러니까 사랑도, 책임 있는 성숙함도.. 모두 자유에 기초합니다.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가 자유에 기초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필요에 떠밀려서, 세상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창조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내가 이놈들 창조해서 좀 부려먹어야지’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이건 이단입니다.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주1)

 

하나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유로운 의지로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신 거예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자유로운 선택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지,

사정이 있어서 창조하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가 뭐에 기초합니까? 자유에 기초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자유는 영의 기초입니다.

영적인 존재라는 의미는, 자유가 주어진 존재라는 뜻이에요.

 

주의 영이 계신 곳에 뭐가 있죠? 자유가 있어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자유가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선악과, 이것이 인간을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합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주의 영이 계시면 자유가 있다는 명제와 똑같은 말이 무슨 말이냐면,

자유가 없으면 주의 영이 없는 거다이 두 개는 같은 말이라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성경이 뭐라고 말씀해요? ‘자유가 없으면 주의 영이 없다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영의 기초는 뭐예요? 자유죠.

자유가 없으면 영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주의 영이 계시면 항상 자유가 있어야 되는데, 자유가 없으면 주의 영이 역사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자유가 뭐의 기초인 거예요? 영의 기초가 되는 거예요.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이 자유를 제한하는 속박과, 성령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어요.

외적인 육체의 속박은 괜찮아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서 육체의 자유를 뺏겼지만, 그렇다고 성령의 역사가 멈춘 건 아니죠.

그러나 내적인 자유, 이것은 성령과 상극이에요.

내적인 자유를 뺏기면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멈춰요.

 

그래서 율법과 성령이 물과 기름처럼 상반되죠.

율법이 있으면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고, 성령이 역사하신 곳에는 율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쇠퇴하는 것 역시 결이 같습니다.

 

제재나 통제나 속박이 반복돼서 문화가 되고 구조가 되면

그 속박은 외적인 속박을 넘어서 내면화되기 시작해요.

그러면 성령의 역사는 끝난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 사회에 통제가 필요합니다. 통제가 필요하죠.

같이 살아야 되는데, 뭐 아무 통제 없이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이 통제는 어디에 머물러야 되는 거냐면, 공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되는 거예요.

내 사적인 영역을 통제하면 안 돼요.

 

사적인 영역이라고 하는 건 뭐냐면,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 내가 생각할 자유,

내가 말할 자유... 이것은 통제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통제되기 시작하면 성령의 역사가 죽어요.

 

육체의 자유는 성령의 역사는 관계없어요.

우리가 그 뭐 핍박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뭐 그런다고,

성령의 역사가 없어지는 게 아니죠.

 

근데 이 내적인 자유가 침해당하면, 이거는 침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유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자유를 주셨어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건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인간이 통제하면 안 돼요.

 

근데 이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이 영역을 침범해요.

이 영역을 통제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다 죽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역의 자유는 절대로 침범당하면 안 돼요.

이 영역의 자유는 절대로 침범당하면 안 돼요. 그러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 자유가 영의 기초라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영은 뭐라고 그랬죠? 갈망을 일으키는 거라고 그랬어요.

 

탈레마, 갈망, 소원.

탈레마는 빌립보서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나옵니다.

아주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했을 때, 빌2:13

소원은 탈레마라고 하는 단어인데,

하여간 영은 우리 안에 어떤 원하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 탈레마를 만들어요.

 

그리고 이 탈레마는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모든 것의 시작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사람 안에 영이 임하면 뭔가를 갈망하고 원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움직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무런 원함이 없어요. 아무런 탈레마가 없어요.

그래서 아무런 욕망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요?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니죠. 그냥 껍데기만 남은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움직이게 하는 건 뭐냐면,

우리 안에 있는 탈레마 라는 거예요.

 

성령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의 영도 속성은 비슷합니다.

뭐 돈의 영, 권력의 영... 그게 뭐예요?

돈을 원하게 만들고, 권력을 원하게 만들고, 그럼 뭐예요?

돈을 추구하면서 하여간 살아가죠.

 

그러니까 사람이 무언가를 위해서 움직이고, 열정을 가지고 살고,

뭐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근데 만약에 아무런 탈레마가 없으면 어떻게 돼요? 인간은 죽은 거죠.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여간 성령도 우리 안에 거하시면.. 이제 거룩한 열망을 만듭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모습, 그 열망을 가지게 돼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해요.

그래서 성령이 만들어내는 탈레마가 뭐냐면,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충성, 온유, 절제, 자비로운 마음

이런 마음들을 이제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막 추구하고 싶어져요.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삶들을 살아가게 되는데, 만약에 자유가 없으면 어떻게 돼요?

갈망은 일어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자유가 없으니까.

 

그 말씀은 뭐냐면, 이 엔진이 막 돌아가긴 합니다.

탈레마가 들어와서 막 엔진은 돌아가는데, 바퀴는 못 굴러가요. 바퀴가 꽉 묶여있어요.

그러면 아무리 돌아가도, 차는 못 나가는 거잖아요. 그럼 다 꽝이죠.

 

그래서 갈망이 아무리 부어져도, 그 갈망의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하면

그러면 영의 역사는 죽어버려요. 그러면 영의 역사는 죽어버립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은,

자유가 없으면 주의 영이 죽는다는 거예요.

바꾸어 말하면, 주의 영이 죽는다는 것은, 자유가 없다는 거예요.

 

주의 영이 죽는다는 말은 이상하고, 주의 영이 역사, 성령의 역사가 꺼진다는 거예요.

자유가 없으면, 성령의 역사가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자유를 제한하려는 원수의 공격은,

복음이 선포된 직후인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왔어요.

 

아니 사실은 창조 직후부터, 원수마귀는 우리의 자유를 뺏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의 자유를 엿보는 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갈2:4

우리를 엿보고 엿보는 존재가 있대요. 원수마귀죠. 가만히 들어왔대요.

 

그 말씀은 뭐겠어요? 좋은 것처럼 위장하고 들어왔다는 거죠.

물론 이 갈라디아서가 쓰여졌을 때, 이것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말씀하는 건데,

그 뒤에는 마귀가 역사하는 거죠.

그 뒤에는 교회 안에 있는 자유를 뺏기 위해서, 이제 마귀가 역사하는 건데

가만히 좋은 것처럼 교회로 들어왔다는 거예요.

 

‘율법은 좋은 거야.. 지켜야 돼’ 이렇게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율법폐기론을 지금 지지하는 것은 아님. 율법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중)

그런데 그 목적이 뭐였냐면, 자유를 엿보고, 호시탐탐 엿보면서,

그걸 뺏어서 종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성도인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아서,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뺏고 종을 만들려고, 원수가 호시탐탐 엿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어 왔어요.

예를 들면 노예제도부터 시작을 해서, 유대교, 이슬람 같은 각종 종교들,

 

여러분, 복음을 제외하면 모든 종교는 속박하는 겁니다.

모든 종교는 속박하는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이거 하면 안 돼, 이거는 해야 돼’ 다 자유를 뺏는 거잖아요.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거예요. 복음만 달라요.

 

그 이야기는 우리가 앞으로 1년 동안 지겹도록 살펴볼 텐데,

복음만 다르고, 나머지 종교들은 다 자유를 속박합니다.

 

또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정치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원수마귀는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를 뺏기 위해서 엿보아 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법인 율법조차도 왜곡해서 자유를 속박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잖아요.

 

그리고 이 원수는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도 또 우리 각 개인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원수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엿보고 있습니다. 원수의 목적이 뭐예요?

하나님의 창조를 무너뜨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를 무너뜨리려면, 가장 밑에 있는 기초가 되는 거 하나만

탁 망가뜨리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라는 거예요? 자유라는 거예요. 자유!

 

이 자유 하나만 탁 무너뜨려버리면, 그 위에 기초에 있는 모든 창조의 질서들이

다 무너져버려서, 하나님의 창조는 굉장히 쓸모없는, 굉장히 바보 같은 짓이 돼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원수마귀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 기초(자유)를 무너뜨리려고,

인간의 자유를 뺏으려고 호시탐탐 엿보아 왔어요.

 

이 관점을 가지고 여러분 교회사를 보든, 세계사를 보든, 쭉 한번 보세요.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원수 마귀가 정말 가진 음모를 다 썼는가?

 

제도를 통해서, 종교를 통해서, 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통해서 계속 시도했던 게 뭐냐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예요. 복음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은 뭐냐면, 원수에게 빼앗겼던 자유, 그래서 꽁꽁 묶여버린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되찾아 누리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개인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에 이르기까지!

 

선교의 본질 역시 똑같아요. 한민족이 빼앗긴 자유,

거짓 종교로, 타락한 문화로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자유로 되찾아 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여러분 얼마나 사람들이 비참한 줄 아십니까?

미신과 샤머니즘과 또 이슬람이라고 하는 종교, 그곳의 이상한 문화들,

타락한 인간의 죄악성으로 하여간 자유를 다 뺏어요.

 

남자들은 힘이 좀 세다는 그거 하나로, 여자들을 정말 종처럼 만들어버리고,

이 자유를 빼앗는 비참한, 꽁꽁 묶여버린 민족 위에 자유를 되찾아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 이게 선교라는 거예요.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이 위대한 자유의 대헌장을 선포하는 거, 그래서 새 날을 여는 거,

오랜 속박의 날을 끝내고, 자유의 새로운 시간을 여는 거, 이게 선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복음의 역사는, 다 자유를 회복하는 거예요. 아멘!

 

▲그래서 여러분, 자유가 선포될 때 새로운 날이 열립니다.

개인에게도 민족에게도 그래요.

 

100년 전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땅에 새날이 열렸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을 때, 또다시 새날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할렐루야!

 

여러분에게 자유의 새날이 열리는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은 자유를 주고요. 자유는 새로운 날을 엽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에요.

속박된 옛 존재로부터 새날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26년은 자유의 새 날이 열리는 한 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유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요?

 

결국 복음인데요. 복음은 여러분 은혜믿음자유라는 세 단어로 정리가 됩니다.

복음의 내용은, 은혜믿음자유예요.

 

복음은 은혜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거예요.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거예요.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죄의 속박으로부터,

원수의 압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게 은혜죠.

 

그런데 이 은혜를 믿을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에 대한 반응은, 믿음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너, 내가 감옥문 열었어. 이제 자유야. 나가도 돼!’

 

근데 안 믿어요. 그러면 그냥 감옥 안에 있는 거죠.

문을 여는 걸 은혜라 그러는 거예요.

 

‘너를 지금 가두고 있던 옥문을 열었어. 나오기만 하면 돼!’

그러면 그것을 믿으면, 나와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만약 믿지 않으면 뭐 할 수 없죠. 그냥 그 안에 있겠죠.

 

그래서 은혜에 대한 그 다음 반응을 →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게 되면 뭐를 누리는 거예요? → 자유를 누리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은혜와 → 믿음과 → 자유

 

그렇다면 이 자유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누리게 됩니까? 성령에 내주하심으로!

아멘 그래요. 여러분 복음은 행함을 통해, 의에 이르는 게 아닙니다.

더 열심히, 더 헌신되게 그건 율법의 구호지, 복음의 구호가 아니에요.

복음은 믿음을 통해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거예요.

 

▲자 갈라디아서는 여러분 믿음과 자유에 대한 책입니다. 뭐 그것은 널리 알려져 있죠.

갈라디아서는 이신칭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하는 믿음의 책이고요.

 

또한 갈라디아서에 붙은 별명이 뭐냐면, '자유의 대 헌장'이에요. 자유에 대한 책입니다.

믿음과 자유에 대한 책인데, 갈라디아서 전체를 읽어보면

1장과 2장에서는 바울이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자유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을 설파하고 나서 3장에 딱 넘어오면

거기서부터 5장까지는 다 성령에 대한 말씀예요. 왜 그럴까?

 

믿음과 자유가 있는데 은혜, 믿음, 자유 이렇게 연결되잖아요.

은혜, 믿음, 자유.

 

그런데 믿음과 자유가 있는데, 이 사이를 연결하는 게 성령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1장과 2장에서 굉장히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씀해요.

 

강한 어조로 설파하고 난 다음에, 3장부터는 줄곧 성령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하는 것도 갈5장이죠. 5:22~23

 

왜냐하면 믿음으로 자유에 이르는데, 그 실체가 뭐냐 하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3장부터는 성령에 대한 말씀을 계속 이어갑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행위로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냐?’ 갈3: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믿었을 때가 아니냐? 그렇다.

율법을 행했다고 성령을 받았느냐?

 

그런데 왜 지금 성령을 받은 걸 말씀해요? 그게 결국 자유로 연결되는 거니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다뤘지만, 2026년도에 우리가 살펴볼 아주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는

성령의 텔레마입니다. 이 탈레마라고 하는 건 아까도 말씀했지만 원함, 소원 그런 뜻인데요.

성경에 여러 번 사용됩니다.

 

특별히 로마서 8장에 많이 사용되고, 갈라디아에서도 여러 번 사용되고,

빌립보스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라’ 할 때, 이것도 다 탈레마 라는 단어인데,

 

▲지난 시간에 우리 다뤘죠. 우리 안에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두 개의 제너레이터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이라고도 불리는 타락한 자아

여기서는 어떤 생각을 만들어내냐면, 자기 중심적인 생각, 자기의, 자기 욕심, 정욕,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요.

 

반면 또 하나의 제너레이터는 내주하시는 성령님 거기서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사랑, 희락, 화평...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요.

 

우리 마음은 생각보다 그렇게 룸이 많지 않아서,

이 육체가 생각을 만들어서 마음을 채우면, 성령의 생각이 자리할 데가 없어요.

 

반대로 성령의 생각이 자리를 채우면, 육체의 생각이 자리할 데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이 육체의 생각을 계속 저항하려고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싸워봐야 백전백패라는 거예요.

그게 율법인데 마음에는 계속 이쪽 생각이 만들어지는데,

행위만 계속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하면 백전백패라는 거예요. 그렇게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싸우는 것은, 성령을 따라가는 거지, 육체를 안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육체를 안 따라가려고 해봐야 그거는 싸움이 안 되고...

왜요? 마음은 계속 이걸 만들어내고 있는데, 행동은 딴 거 하려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뭐 억지로 할 수는 있겠지만, 이건 지옥 같죠. 그게 뭐냐 하면 종이라는 거예요.

 

예배 가기 싫은데 가야 돼, 기도하기 싫은데 해야 돼... 계속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싸우는 게 아니라, 성령이 만들어내는 생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행동의 싸움이 아니라 뭐예요? 예배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예배의 기초 위에 있다는 거예요.

 

예배 가운데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의 제너레이터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하고 싶은 마음들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더 예배하고 싶고,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막 그 마음이 만들어져서

나는 내가 너무 하고 싶어서 하는데, 그게 그냥 하나님을 기쁘게 해요.

이게 자유라는 거예요. 이 자유를 주시겠다는 거예요.

 

이게 왜 자유냐 하면, 아니 자유라고 하는 거는 뭐 육체가 만들어내는 텔레마도

그냥 그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면 자유가 아닙니까?

그게 자유가 아닌 이유가 뭐냐 하면,

그렇게 살면 자유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어요? 계속 삶이 파괴돼요. 계속 삶이 파괴됩니다.

관계가 깨지고 건강도 망가지고 정신도 망가지고... 계속 관계가 깨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잠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은데,

조금 가다 보면 다른 속박들에 매이게 돼요. 그렇죠.

인생이 파괴되니까, 뭐에 중독되기도 하고, 또 정신적인 결핍을 겪기도 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망가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른 속박에, 더 이렇게 올무에 걸린 것처럼, 망가진단 말이에요.

이게 자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했는데, 맞아 그게 자유의 출발인데,

결과적으로도 점점 자유해져야 돼요.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길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원래 창조의 계획대로 가야 돼요. 그래서 성령께서 만들어내시는 탈레마(소원)를 좇아갈 때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건 똑같을 수 있어요.

육체의 탈레마를 좇아가나 성령의 탈레마를 좇아가나...

 

근데 한 스탭만 더 나가보면, 여기는 올무에 걸리게 되고, 이쪽은 점점 더 자유해진다는 거죠.

그래서 성령이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아멘.

 

▲자 이 이야기는 26년 한 해 동안 계속 반복적으로 살펴볼 겁니다.

하여간 하나님을 더 섬기고 싶고, 하나님께 더 순종하고 싶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새 영이 부어지면 새 마음이 만들어져요.

새 영이 부어지면, 다른 마음이 만들어져요.

 

그전에는 내 욕심을 쫓아서 정욕과 욕심과 자기의 의와 그런 것을 원하고 추구하던 마음에서

새 영이 부어지면... 다른 걸 추구하고 싶어져요.

 

즉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고,

더 예배하고 싶고... 새 영이 부어지면 새 마음이 만들어져요.

그리고 새 마음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의 새로운 날을 누리게 돼요.

새 날이 열립니다. 이게 2026년도에 기대하는 바입니다.

 

▲자, 이것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그래요.

작게는 가정과 교회에서, 크게는 나라와 민족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으로도 똑같아요.

 

성령이 한 공동체 위에 임하면, 거기서 뭐가 만들어지냐면 공동체적인 탈레마가 만들어져요.

공동체적인 탈레마가 만들어져요. 더 하나님을 추구하고 싶고 더 하나님을 높이고 싶고

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고 더 하나님을 전하고 싶고 하는 공동체적인 탈레마가 만들어져요.

 

이걸 뭐라 그러냐면 부흥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것이 가정이 됐던, 교회가 됐든, 아니면 한 나라가 됐든

하여간 성령이 한 공동체 위에 임하시면서, 공동체적인 텔레마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공동체 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날들이 열리게 돼요. 이것이 2026년도에 기대하는 바입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 위에도, 그리고 우리 나라와 민족 위에도 새 영이 부어지고,

그래서 새로운 성령의 텔레마가 만들어지고,

그래서 새로운 날이 열리는 그런 부흥의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새 날을 약속하십니다.

갈4:4~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당신 백성을 자유케 하셨어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거예요. 아들을 보내시는 때가 있고,

우리 인생 가운데도 성령이 역사하시는 때가 있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가 있어요.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새 날을 여시는 때가 있습니다.

 

자 이 ‘때가 차매’ 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토 플레로마 투 크론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토하고 투는 전치사들이고, 플래로마 크로누 라는 두 단어를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때로 번역된 단어는 크로누 라고 하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크로노스입니다.

시간이란 뜻이에요.

 

‘차매’는 플래로마 인데 ‘충만한, 완전한 분량이 채워졌다, 만땅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가 찼다’고 하는 건, ‘크로노스의 시간이 만땅으로 꽉 찼다’ 이런 뜻이에요.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데

그 타이밍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시간인 카이로스가 아니라,

충만해진 크로노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상의 시간이 어떤 기준에 비추어서 채워지고 또 채워지고 또 채워지고

그러다가 완전히 채워지면, 그때 예수께서 오셨다는 거예요. 이게 영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때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타이밍인 카이로스가 아니라, 충만해진 크로노스라는 거예요.

 

그래서 ‘때가 차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시간을, 크로노스를 채우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누군가가 크로노스의 시간들을 계속 채워야 돼요.

그렇게 해서 그 시간이 차야, 그래야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한다는 거예요.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구약에도 보면, 이 때를 채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크로노스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모세가 등장해서 아브라함이 약속하셨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룹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다윗이 약속의 왕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등장하고, 다니엘과 에스더가 등장하고

에스라와 느헤미아가 등장해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워가요.

 

그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들을 하나씩 둘씩 1년, 2년, 5년, 10년, 30년,

다니엘은 70년... 그 시간을 채워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드디어 그것이 충만하고 완전하게 채워지면.. ‘때가 차는’ 거예요.

그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줍니다.

하나님의 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그럼 하나님의 카이로스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이니,

우리는 그냥 기다리면 하면 돼!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공식이 있어요. ‘카이로스 = 크로노스의 시간이 차는’ 거예요.

그러니까 ‘꽉 찬 크로노스의 시간 = 카이로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랜덤하게 하나님께서 아무 때나 지금이 주권적인 타이밍이야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분명히 있어요. 주권적인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크로노스가 꽉 채워지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의 주권적인 시간이 온다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누군가에 의해서 크로노스의 시간이 충만하게 채워졌을 때,

믿음의 삶을 통해서, 매일의 일상을 통해서

크로노스의 시간이 채워져 충만함이 이르렀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됩니다. 그게 ‘때가 차매’ 아멘!

 

▲자 이것은 개인의 삶 속에서도 똑같아요. 우리 삶 속에 언제 하나님의 역사가 임합니까?

때가 찼을 때! 

때가 찼을 때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매일의 삶 속에서 매일의 삶 속에서 나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으며

하루하루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워갈 때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응답이 더딘 것 같아도

한결같이 그 크로노스의 시간을 하루, 일주일, 한 달, 1년 채워나갈 때

어느 순간 크로노스가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완성이 돼요.

그리고 그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다는 거예요.

 

그때가 카이로스의 때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역사는 아무 전조 증상 없이 홀연히 갑자기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게 97%, 98% 찰 때까지도 아무 증상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과연 되려나?’ 뭐 아무 역사도 없는 것 같고,

기도도 안 들어주시는 것 같고, 97%, 98%, 99%가 될 때까지도,

그냥 아무 전조 증상이 없어요. *물이 100도씨에서 끓는 것과 같죠.

 

예수께서 오실 때 어떠했나 보세요. 갑자기 오셨어요.

물론 태어났기 직전에 침례 요한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거 빼고는요. 400년 동안

아니 그 전부터 구약의 모든 역사에 아무 전조증상이 없이, 그냥 깜깜한 어둠인 것 같아요.

400년을.. 깜깜한 어둠인 것 같고, 하나님이 아무 역사도 안 하시고,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고... 그게 뭐예요? 시간이 차가는 거예요.

 

80, 90, 91, 92, 93, 94, 95, 6, 7, 8, 99가 될 때까지 아무 전조증상이 없어요.

그러다가 suddenly, 홀연히, 백을 꽉 채우는 순간,

플레로마 투 크로노, 때가 차매, 홀연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십니다.

이게 하나님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고, 공동체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항상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은 때가 찼을 때예요.

한 시대 속에서 그 시대의 역사적 사명, 또는 그 시대가 감당해야 되는 어떤 사명들이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충성되게 감당하면서, 아무 징조도 안 보이고,

기도응답도 더딘 것 같고 하지만, 그냥 믿음의 자리에서 약속 붙잡고

하루, 일주일, 한 달, 1, 10

다니엘은 70년을.. 그 시간을 누군가가 채워가는 거예요.

 

누군가가 채워가서 ‘플레로마 크로노’ 때가 찰 때까지 그걸 감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때가 차는 것을 보시고, 새 시대를 여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새 시대를 기대하십니까?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민족적으로도

여러분 새 시대를 기대하십니까? 그렇다면 때를 채우십시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때는 찬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을 카운트하고 계십니다. 언제 때가 차는가 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시간은 헛되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어떤 땐 보면 우리가 헛되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고 이렇게 하나님한테 매달리는데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마치 400년 깜깜한 밤중을 걸어가는 것처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니요. 여러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뭐예요? 크로노스의 시간이 채워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시간은 절대로 헛되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그 카이로스의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크로노스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홀연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때를 채우는 것이 필요해요.

우리가 크로노스의 시간을 약속을 붙잡고,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고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워갈 때, 어느 순간 정말 홀연히 때가 찹니다.

그리고 새날이 홀연히 열릴 겁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때를 채운다’는 건 구체적으로 뭔가?

 

1) 첫째 그것은 약속을 붙잡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는 것, 이게 때를 채워요.

이 때를 채우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우는 것은요. 정말 믿음의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꽉 찰 때까지는 아무 징조도 잘 안 보여요. 아무 징조도 안 보여요.

 

그래서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아니면 하나님이 주무시나?’ 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런데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아니야 하나님이 약속하셨어요.

그래서 그 약속을 붙잡고 버틸 때 그게 시간을 채워가요. 그게 시간을 채워가요.

약속을 포기하면 어떻게 돼요? 더 이상 크로노스의 시간은 안 채워져요. 딱 멈춰요.

 

그런데 그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붙잡고 일주일 버티고 한 달 버티고

1년 버티고 5년 버티고 10년 버티고 그럴 때, 그 시간이 채워져 가는 거예요. 아멘.

 

2) 둘째,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우는 것은,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은 항상 기도로 나타납니다. 기도의 자리를 꾸준히 지키십시오.

보이는 것이 없어도 응답이 더더 보여도, 그 자리를 지킬 때, 크로노스가 채워져 가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의 분량의 잔’ 이거를 많이 말하잖아요.

이게 이제 크로노스의 시간이 채워지는 것을 비주얼라이즈 한 거죠.

 

기도의 자리를 지킬 때, 크로노스가 채워져 갑니다.

기도응답이 안 되는 것 같고, 계속 기도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 같고.. 이게 뭐예요?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워가는 거예요.

 

여러분 97% 됐을 때 포기하면 얼마나 아까워요?

3%만 더 가면 되는데... Keep going 하라는 거예요.

끝까지 Keep going 하라는 거예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기도로 채워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분량의 잔이 찼을 때,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합니다.

 

3) 셋째,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우는 것은,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자리가 있어요. 시대적인 사명, 그 시대에 감당해야 될 일들,

그 공동체가 감당해야 될 일들, 각 개인이 감당해야 될 일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 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될 건 이거야!’

그 사명의 자리에 머무를 때

하루, 이틀, 일주일, 1년, 10년..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워요. 아멘,

 

그리고 이렇게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시는데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서 나게 하셨대요.

무슨 뜻이냐면 우리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는, 항상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인간 문제의 가장 핵심 그 한가운데로 치고 들어오세요.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삶에 임하시고 역사하실 때는

항상 핵심으로 들어오시지, 변두리 문제만 하나둘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항상 그 근본과 뿌리를 송두리 체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면, 항상 새로운 날이 열려요. 왜?

그전까지 있었던 것은 뿌리와 근원까지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거기서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날이 열리는 거예요. 아멘.

 

예전에 우리가 묶여있고 고통스러워하고 씨름하던 문제들은

그냥 대충 변두리만 몇 개 해결했다면, 여전히 거기서 해야 될 게 있잖아요.

싸워야 될 게 있는데, 아니 가장 근본으로 들어오셔서 뿌리채 송두리채게 해버리시기 때문에

더 이상 거기서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날이 열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날이 열려요. 이제 이전의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그래서 새 날이 열립니다. 아들이 오실 때 성령이 오실 때 새 날이 열립니다.

인류에게도 교회에게도 그리고 각 사람에게도 아멘 새 영 새 마음

그리고 자유의 새 날,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멘!

이 날이 열리는 2026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기도 응답 받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대로 있고 응답 안 된 것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아요.

낙심하지 마세요. 그 시간은 크로노스의 잔을 채우고 있는 거예요.

 

믿음으로 여러분 행했던 모든 시간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응답을 받았던 아니던

그 시간은 헛되지 않습니다. 결코 헛되지 않아요.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도,

성령이 임하고 새 마음이 부어질 때 새날이 열립니다.

 

우리 다가오는 한 해 동안에 새 영이 부어지는 역사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크로노스의 시간이 채워지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충성되게 자리를 지키며 이 시간을 채우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때를 채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믿음으로 기도로 사명의 자리에서 때를 채워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오니

하나님의 시간이 차게 하여 주시고 새 날을 시작하여 주십시오.

이 마음 가지고 우리 한번 기도합시다.

 

........................

 

주1)

실제로 이단 주장 중에 이런 게 있거든요.

베뢰아라고 하는 이단이 뭐라고 주장하냐면,

‘하나님이 사정이 있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해요.

 

처음에 베뢰아에서 하는 말씀인데, 천사들이 타락하면서 원수 마귀가 돼요.

하나님이 얘네를 좀 어떻게 해야 되는데, 그게 좀 여의치 않아서,

그래서 세상을 창조해서, 마귀의 이를 멸하기 위해서 창조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