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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장 신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LNCK 2026. 1. 2.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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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8_[단편 설교] 신자는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7-18)   Youtube 

 

◈신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4:7~18              2025.11.16. 

 

어느새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오늘 여러분하고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오늘 로마서를 계속 진행하지 않고, 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신자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 이런 말을 가끔 하잖아요. ‘이번 생은 망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실 조금 아까 성가대가 부른 “선한 능력으로” 찬송은,

이제 나치가 폐망하기 직전이었죠. 본 회퍼 목사님의 사형이 곧 집행되는데,

그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가족과 약혼녀에게 써서 보낸 편지에 있는 시였습니다.

본 회퍼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쓴 시였습니다.

 

조금 아까 성가대가 부르는 걸 듣고, 저도 같이 부르면서 그 가사를 음미하면서,

‘오늘 말씀은 이것에 대한 설명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39살에 이 천재적인 신학자는, 미치광이 같은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레지스탕스에 가입을 해서

그 일을 참여하다가, 결국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조국의 현실과 유럽을 생각하면서,

그는 사람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조국으로 돌아와서, 결국은 사형을 당하게 되죠.

 

인생으로 보면 폭망한 삶입니다. 그렇잖아요.

자기가 많이 공부한 것을, 제대로 후학들을 위해서나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지도 못하고,

그냥 사형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을 바라봤던 거죠. 새날을 바라봤던 거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두가 본회퍼 같은,

그런 정말 비참하기가 짝이 없는 그런 인생은 아닐지라도,

우리 삶도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의 삶은 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삶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변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죠.

 

예수님을 만났는데, 여전히 내가 이전의 삶에서,

내가 추구하던 목표와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간다면, 그것은 뭔가는 잘못된 것이죠.

 

뭐가 잘못했을까요? 예수님을 안 만났을 가능성이 큰 거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의 목적과 목표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살아가는 삶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망했다고 하는 표현을 쓸 때, 세상적 기준에 의해서 우린 망했다는 것이죠.

실패하면 망했고, 또 뭔가 자식이 잘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망한 거고,

또 실직을 해도 망하고... 망할 일이 천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음 생은 없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 이번 생이 망하면, 영원히 망하는 겁니다.

진짜로 이번 생이 망하면, 영원히 망하는 겁니다. 다른 기회는 없으니깐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냅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는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이죠.

 

그러나 계속해서 그 삶의 관점이 견고하게 변화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신앙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다’는 말에 동의하는가를

묻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거죠.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내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정말 내 삶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뀐 게 맞나?’ 이거는 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같은 방식으로 내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는가?’ 물어야죠.

 

▲오늘 본문은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판단과 관점,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둘은 명확하게 다르죠.

 

회심과 더불어 이 변화가 시작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뭔가 하면,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대로, 질그릇과 보배를 구분하는 것이

이 삶을 견고하게 살아가는 출발점이고 종착점입니다.

 

질그릇과 보배를 구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죠.

자기가 질그릇이라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질그릇 안에, 질그릇과는 어울리지 않는 보배를 담으셨다...

고후4: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이걸 복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고후4:1을 한 번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말하는 이 직분은, 사도의 직분을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거는 복음의 직분이죠. 복음의 직분!

 

그러니까 나는 이런 걸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질그릇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맞지도 않는,

격에 맞지도 않고, 감당할 수도 없고, 너무나 분에 넘치고 과분한 그런 직분을,

복음을 나에게 주셨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인지 알았지만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사실도 잊지를 않았습니다.

 

이거 되게 중요한 것이죠.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신자가 자기 인생의 성패의 기준을, 성경적 기준으로 확립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요즘의 교육을 보십시오. 옛날의 교육은 좀 억압하는 교육이었다면,

사상사의 관점에서 보면, 계몽주의 이후에 교육, 그것은 우쭈쭈 하는 교육이죠.

‘괜찮아, 다 괜찮아’ 이런 교육을 우리는 받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아이를 혼내서도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당연히 체벌이라는 것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죠.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대단함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혼내지도 않고, 체벌하지도 않고.. 그래서 아이의 대단함만 가르치는 것은 한쪽 극단이죠)

 

물론 우리는 그렇게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존심을 세워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너 자신 안에 있는 훌륭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안에 보배 때문에, 네가 훌륭하다는 걸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 둘을 같이 얘기를 하고 있잖아요.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너는 존귀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성경은 이걸 같이 얘기하고 있단 말이에요.

‘너는 죄인이야, 죄인 중의 괴수야’ 라고 얘기해요.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변화 transformation 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는 질그릇 이지만, 깨져도 아깝지 않은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무한 존귀한 존재이지만, 역설적으로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해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바울사도는 자기를 비난하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러분이 보는 대로 질그릇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걸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사람들은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을 향해서

‘너 진짜 사도 맞아? 너 진짜야?’ 이렇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바울을 오해할 만한 정보들을, 거짓 교사들을 통해서, 제3자들을 통해서 들었던 겁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뭔가 문제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바울에게 시비를 걸었던 거죠. 이때 바울은 말합니다.

 

사실 여러분, 이런 상태가 되면, 자기를 증명하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바울은 ‘여러분이 보는 대로 나는 허접한 사람이고, 질그릇입니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전했던 복음,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자기가 전해 주었던 복음,

이 복음이 폄하되거나, 이 복음이 거절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변호하면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하잖아요. 나를 증명하면서 ‘내가 전한 복음이 맞아’

근데 바울은 ‘나는 별 볼 일 없어, 하지만 내가 얘기한 복음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복음이야!’

라고 말씀을 하는 거예요.

 

바울에게는 자기를 증명할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는 질그릇이니까.

질그릇이 질그릇을 증명할 이유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진품, 명품’ 이런 거 할 때,    *진품을 가려내는 TV프로

이게 진짜 이조 백자 도자기인데, 사람들이 다 이걸 무슨 사기그릇 정도로 안단 말이에요.

이게 1억을 호가하는 건데, 사람들은 그 그릇을 천 원에 팔겠다고 하는 거죠.

 

그럼 이조 백자 도자기는 자존심이 상할 거 아니에요?

‘이것들이 날 뭘로 보고? 나는 이조 백자 도자기야!’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왜? 자기는 원래 질그릇이니까.

질그릇이 질그릇을 증명할 이유가 있겠어요? 없죠.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보배’는 말씀하고 싶은 거죠.

이게 지금 바울이 가지고 있는 태도입니다.

 

질그릇과 보배를 구별하는 것, 이게 신자가 자기의 인생의 성패를... 결정합니다.

또는 자기와 타인을 판단할 때, 이걸 구분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력, 여러분의 성취,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을 최고급 도자기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의 자리만 놓고 봐도

우리는 사회적으로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다 질그릇일 뿐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깨져도 아깝지 않은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어서 7절에서 그 말씀을 하고 나서,

8절, 9절에서 사중의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먼저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압박을 당한다는 뜻이에요.

사방으로 우겨싸움을 당하는 게, 여러분 보세요. 영화 같은 데서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계속해서 압박이 조여들어오고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가 완전히 으스러지겠죠.

 

쓰레기 하치장 같은데 가면, 회전하면서 압축하는 기계가, 다 그냥 으스러뜨리잖아요.

그런 식으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거예요.

 

근데 이런 상태를 바울은 육체적으로도 경험했고, 영적으로도 참 많이 경험했던 것 같아요.

고후1:8,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거든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그런데 사방으로 우겨쌈(압박)을 당하는데... 쌓이지 않았다고 말씀해요.

으스러지지 않았다고 말씀을 해요.

 

2) 두 번째,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이란 낙심천만한 상황을 만나는 거예요. 답이 안 보여요.

출구가 안 보여요. 설명할 수도 없어요.

이런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우리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씀을 하죠?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낙심천만한 일을 당했는데, 낙심하지 않는다...

 

3) 세 번째로 바울은 ‘박해를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며’

박해라는 뜻은 ‘뒤쫓다, 사냥하다’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의 인생에는, 바울을 사냥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늘 쫓겨다녀야 했죠.

 

마치 먹잇감을, 사냥감을 찾아서 그것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하는 그런 사람들이

바울의 생애 끝까지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요? 예수님 만난 후부터.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항상 나와 같이 하셨다. 그래서 내가 버림받아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4) 사중고의 마지막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말은, ‘쳐서 쓰러뜨리다. 매어꽂다’

 

레슬링 할 때 그냥 매어 꽂는.. 이런 거예요. 죽이겠다는 뜻이죠.

링 안에서 복서가 다운은 당해요. ‘다운은 여러 번 당하는데 KO 패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 4중의 고난은, 인생이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사실 보세요. 인생을 쭉 보면, 저렇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면... 그는 망한 인생이죠. 그냥 보면 망한 인생이죠.

근데 사도는, 또한 우리같은 성도는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이 네 가지를 다 겪었지만, 사중의 고난을 겪었지만

세상에서는 다 나를 보면 ‘망한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안 망했다는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자의 망함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볼 때 망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 전에 쓴 편지,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했습니다. 고전15:31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으니까, 날마다 죽을 수 있겠죠.

 

그런데 바울이 이런 표현들을 할 때, 삶에서의 죽음을 표현할 때,

그는 이게 몇 번의 죽음의 사건,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과정, 지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의미로 죽음을 표현할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서 오늘 10절을 한번 보시겠어요?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음이라는 단어가 헬라어에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기본적으로 쓰는 단어는 thanatos 예요.

10절에서는 근데 이 단어를 쓰지 않아요.

이거는 죽음이라는 것을 하나의 사실,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말씀하는 단어거든요.

 

근데 바울이 10절에 쓰고 있는 단어는 necrosis 를 쓰는데,

이 말은 뭔가 하면 ‘과정으로서의 죽음’을 말씀하는 거예요. ‘죽음의 상태’를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의 과정을 바울은 말하고 싶어요.

‘한 번 내가 죽는다’가 아니고 ‘내 삶의 과정이 그러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럼 이걸 존 맥아더는 뭐라고 말씀을 하냐면 ‘고난은 바울에게 있어서 삶의 방식 lifestyle

이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유쾌하게 들리는 말은 아니죠.

 

그렇다고 여러분은 ‘주여 내 삶이 고난의 연속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실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거예요. 근데 저 생각에는, 바울도 그랬을 거예요.

누가 고생하는 거 좋아하고, 고난받는 거 좋아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삶을 그렇게 인도해 가십니다.

근데 바울은 자신의 삶을 한탄하거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망했다..

또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일은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원튼 원치 않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최적의, 그리고 최상의 길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라, 주님이 그러셨을 때

우리 삶의 여정은 그것 임을 주님은 이미 시사하신 것이 아닙니까?

 

고난과 죽음을 신자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하지만 열매가 있습니다. 진짜 열매가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인생에서 어떻든 결과를 경험하죠.

인생에서만 경험하는 결과가 있지만,

우리가 죽고 나서 영원 속에서 결과를 경험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열매를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거두시기를 원하세요? 어떤 열매요?

그 열매는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열매인가요?

그러니까 죽을 때, 천국에 가져가느냐/ 못 가져가느냐 보다도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바울도 그 말씀을 조금 후에 할 텐데,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야 그 열매 참 좋더라' 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바울은 본문 고후4:12~15절에서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이 그 열매를 말씀할 때, 그것은 내가 맺는, 내 안에서 내가 누리는,

내가 살아생전에 누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넘어서서, 형제자매들의 삶 속에서 맺어지게 되는 열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고난과 죽음이라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거예요.

 

교회를 위해서... 그 말은 뭔가 하면,

형제와 자매들의 삶 속에서 열매가 맺어질 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거 쉽게 생각하면 이럴 수 있어요. 내가 내 자식을 너무나 사랑해요.

그래서 내가 입지 않고, 먹지 않고, 아끼고, 희생하고... 자식을 위해서 부모들은 희생합니다.

 

자녀의 삶에서 열매를 보고 싶으니까요. 자녀의 삶의 그 열매가 뭔지는 차치하더라도,

바울은 지금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위하여 내가 고난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는 거예요.

 

이거를 골1:24절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했죠.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

이건 부모가 자식한테 할 수 있는 말이죠.

아니 부모도, 훌륭한 부모가 이렇게 말씀하죠.

‘너를 위해서 받는 고난을, 괴로움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운다’

바울이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이에요.

 

이게 바울 사도는 여러 곳에서 자신이 고난받는 목적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말씀했습니다.

하나만 더 찾아볼까요?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는 포도주를 쏟아서 드리는 제사예요.

이게 자기의 피를 쏟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를 위해서 내 피를 쏟아도 나는 기뻐하겠다’

 

다른 곳에서도 그런 표현을 썼죠.

그리고 이것을 본문 고후4:12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내가 죽고 너희 안에서 생명이 드러났으면 좋겠다.

내가 죽고 그 죽음의 열매가 너희 안에서 나타났으면 좋겠다.’

이게 바울이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걸 믿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고..

이 말은 13절에서 하는 말인데, 빈말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는 거예요. 진심이라고...

 

왜냐면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을 의심하고 있었어요. ‘이 사람은 가짜라고’

그런데 바울이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어요.

오죽하면 그는 ‘나 지금 진짜로 말하는 거다’ 라고 하면서 구약 성경을 이용하고 있죠.

진심이라고.

 

필립 휴즈 라는 성경학자가 있는데, 이분이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동일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피어나고

그들로 다시 다른 사람들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그리고 끊임없이

죽음에 내어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꺼지지 않는 생명이

이들로 그렇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대로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 믿음의 사슬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의 죽음으로 내가 살아난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음으로써 형제들의 살아남을, 형제들이 생명을 누리기를..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여기서 필립 휴즈는 되게 아름다운 표현을 썼는데

“내 고난이 내 고난이 아니고, 내 고난이,

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나의 모든 약함의 경험과 과정이

저들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나의 고난과, 나의 약함과, 나의 죽음이 나를 망하게 한다’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게 망한 게 아니라,
다른 데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바라보는 열매가 완전히 결실하는 것은

단순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사안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고후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바울은 그날을 바라봅니다. 본 회퍼가 바라봤던 그 새 날을 바라봅니다.

주님 앞에 내가 영광스럽게 서게 될 날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내가 혼자 서는 게 아니에요.

너희와 함께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인간관계를 맺든,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주님 앞에 설 거다

부부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이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설 것이다.'

이 생각으로 그날을 바라보고 사는 것, 이것은 거짓 없이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그저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하거나,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이렇게 자신이 마지막 날을 바라보고,

‘여러분과 내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나는 바라본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15절을 보십시오.

고후4: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바울이 쓰는 이 편지를 보면, 바울은

‘당신이 내 부모야?’ 라고 따지듯이 말씀하는 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영적 아비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대하듯이 말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날에 주님 앞에 설 때, 너희가 나를 오해하는 오해가 풀어지게 될 거고

그때는 너희와 내가 ‘아 그랬었구나’ 그리고 감사하며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비전입니까? 부부싸움을 해도, 이 생각을 해야 되고요.

우리의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이게 사실은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거거든요.

 

▲바울은,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봤던 그 천상의 예배,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계7:9~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바울은 이 날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망하지 않아요. 폭망하지 않아요.

우리의 고난, 우리의 약함, 우리의 실패, 우리의 좌절에는.. 다 열매가 있어요.

그것을 생각하셔야 해요. 그냥 내 인생은 고립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고,

그냥 내 인생은 내 인생으로 끝나는 거야...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사도는 16절에서 ‘자기가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낙심하지 않는 근거,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여기에 가치의 대결이 3가지 나와있어요.

-첫 번째는 겉사람이냐 속사람이냐

-두 번째, 미래냐 현재냐

-세 번째, 영원한 것이냐 일시적인 것이냐

 

이 세 가지를 비교하고, 어디에 내가 가치를 둘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낙심 천만한 일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

하는 거예요.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종종 썼습니다.

그 말씀을 저는 어떻게 이해를 하냐면

‘아 이분이 정말 낙심할 만한 일을 너무나 많이 만났었구나’

낙심한 일이 없는 사람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겠죠.

 

그는 낙심과 싸워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마찬가지고요.

근데 그가 낙심하지 않는 근거를, 세 가지로 말씀을 하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바울이라는 대사도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신자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1) 여러분 16절을 보세요.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게 첫 번째로 바울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요, 이유입니다.

육체의 노쇠함은 피할 수 없습니다. 기도 많이 해도 늙습니다. 쇠약해 집니다.

안티에이징 크림, 주름 개선, 탄력 피부 증진, 노화 방지... 이게 좀 과장된 광고죠.

 

근데 겉사람은 늘 후패하죠. 주름살 생기고요. 배도 처지고요.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요.

그것만을 만약에 우리가 주목하고 살아가면 좀 힘들 것 같아요. 노화는 누구에게나 오잖아요.

 

근데 ‘속사람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씀하거든요.

그런데 그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걸 보고 있는 거예요.

날마다 점점 더 건강해지고, 점점 더 괜찮아지고,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점점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고... 그러니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말씀을 해요.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겉사람도 계속 노쇠해지고 있는데,

속사람을 가만히 보니까 왠걸? 속사람은 더 빠른 속도로 노화가 진행되고 있네?

이건 재앙이죠. 무서운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겉사람을 적당히 하시고 하세요. 적당히 하시고 속사람을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일찍이 찰스 스펄전은 설교 중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인들은(사람들은) 몇 십년 후에 지옥에 가지고 갈 자기 육체를 위해서는

화장하고, 바르고, 가꾸고, 꾸미는데 하루에 몇 십분~몇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앞으로 천국에 가지고 갈 자기 영혼을 위해서는

하루에 단 10분도 시간을 내지 않는다’

 

2) 두 번째로 낙심하지 않는 근거는, 미래를 현재보다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17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지금 받는 환란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미래의 영광도 있어요.

둘 다 현실이에요. 어떤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길까요?

어떤 것에 우리의 마음의 무게중심을 둘까요?

 

환란, 고난, 아픔.. 바울은 이것들이

미래의 영광이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이것들 덕분에

왜냐하면 바울이 조금 아까 말씀했던 열매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살아생전에 다 안 보여요. 주님 앞에 갔을 때,

 

아니 내가 하지도 않은 것이고,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건데..

주님이 ‘야, 너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잖아’ 라고 말씀하면, 우리는 뭐라 그러겠어요?

그거 제가 안 한 거라고.. 그건 저하고 상관없는 거라고... 그런 열매들이 많을 거예요.

미래의 영광이 너무나 크고 영원하기 때문에,

현재 내가 받는 고난이 비교적 가볍게 느껴진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세 번째,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했잖아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그런데 그 앞에 뭐라고 그랬냐면 ‘생각하건대’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생각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생각하세요?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하세요?

 

3) 낙심하지 않는 세 번째 근거는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보다 가치 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잠시 받는 환란’은 일시적이죠.

‘영원한 영광’은 영원한 것이죠.

그 가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늘 지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우리의 기쁨도 지나갑니다. 우리의 사랑도 지나갑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쁜 것들도 다 지나갑니다. 구별하지 않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뭔가요? 여러분의 삶에서 영원한 것은 뭔가요?

여러분이 붙잡을 수 있는 영원한 것은 뭔가요?

 

여러분들이 현재에 붙잡혀서 살아가고,

현재의 상황에서 ‘내 영혼이 뭐 곤두박질을 쳤다가 또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런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은.. 지나가는 것들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거라고 말씀해요. 현재의 것들은 다 지나간다...

 

현재의 것들이 지나간다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아쉬움입니까?

아니면 바울이 그랬듯이 위로입니까?

지나간다는 것은 위로입니다.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영원한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현재라는 삶의 상황이 나를 냅다 꽂을 수도 없었고

현재라는 삶의 상황이 나를 하늘로 승천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현재라는 삶의 상황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체에 적용을 해봅시다.

‘복음이 우리를 깊이 결속하게 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친한 사람 다 있잖아요. 친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친한 거 말고,

복음이 만들어내는 우정, 복음이 만들어내는 너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어떻게 다를 수 있습니까?

 

복음은..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증명하고, 자랑하지 않게 합니다.

왜요? 처음으로 돌아가면, 7절에 말한 것처럼, 내가 질그릇이니까요.

복음은 내가 질그릇인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내가 나를 인정욕구, 나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

이런 것들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만들어줍니다.

 

세상은 내가 비록 질그릇일지라도, 내가 도자기라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거든요.

덧칠이라도 해서.

그러나 복음은, 내가 질그릇인 것을 계속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자기 증명의 욕구를 걷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 안에서 깊이 교제하며, 서로 영혼의 결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거는 절대로 우리의 자기 증명의 욕구, 내 자랑, 나의 강함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지지 않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렇게는 되질 않아요.

 

강함을 자랑하는 것은.. 세상은 다 자기 강함을 자랑하잖아요.

과거에 정말 부흥사 이력서나 명함 보신 적 있어요? 어마어마해요.

40일 금식기도 10회 실시, 지금까지 4천회 부흥성회인도, 자기 증명이 어마어마하죠.

 

이런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결속을 끊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만약 결속이 아니라, 고립과 단절, 참된 소외를 내가 정말 바란다면

계속해서 모든 모임에서 자기의 강함을 말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외로워질 것입니다. 고독해질 것이고요. 결속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고독과 단절과 고립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사실 자기의 강함을 드러내는 자랑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갈망의 왜곡된

표현이겠죠. ‘제발 나 좀 알아달라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자기 증명 욕구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적으로 여전히 죄성이 우리를 불쑥불쑥 나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를 긍정하게 만들겠지만,

그런 욕구를 느끼겠지만,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면서 이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자기의 약함을 말합니다. 자기의 약함을 기뻐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관계를 위해서 이게 복음이 만들어내는 교제입니다.

복음적 교제의 특징은 이겁니다. 내가 성경을 100번 읽었다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약함을 자랑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게 망한 거가 아니라는 것, 나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이 자신의 약함과 실패와 고난을 나눌 때,

여러분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답 없는 현실의 상황을 말할 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나이, 사회적 지위, 경륜을 불문하고 나를 좀 도와달라고,

날 위해서 좀 기도해달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형제자매를 얻게 되고,

진정한 영적 우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결속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겠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누리게 되겠죠.

여러분은 복음적 교제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난 질그릇에 불과하고 심이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지 나에게 있지 않아요.’

라고 말할 줄 알게 되는 것이죠.

 

4:7절에 왜 보배와 질그릇을 구분한다고 말씀합니까?

‘이는 심이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는 거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고’ 4:7b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나는 질그릇이라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보배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라고...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고...’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혜이고 복락입니다.

 

▲2025년 마지막 주일인 오늘, 여러분 한 해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 전부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떤 약함들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들이 있습니까? 어떤 실패들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을 절망하게 하고, 낙심한 것은,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은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한 해만 놓고 보면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잠시 판단을 보류하고,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관점에서,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실패라고 말해도, 그게 단지 내게 일어난 사건, 또는 내 눈에 보이는 어떤 일,

그런 것들 때문이라면 괘념치 마십시오. 잠깐이고 지나가는 거니까요.

 

주님은 본문 18절에서 우리에게 이걸 주목하라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의 실패, 좌절, 아픔, 고통이 있습니다.

그거를 부정하고 부인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걸 주목하십시오.

 

그 보이지 않는 게 뭐예요?

이걸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장차 나타날 영원한 영광의 중함(무거움)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또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사방으로 우겨쌌던 일들, 여러분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일들,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당한 것,

이유 없는 미움과 이유 없는 거절을 당했던 일들... 상관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잖아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어떤 의미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건가 하면,

시91편에, 시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있다.’ 91:1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죠. 은혜죠.

 

그리고 시인은 말합니다.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시91:5~6

 

세상에 이런 보장이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천명이 여러분의 왼쪽에서, 만명이 여러분의 오른쪽에서 엎드려져도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이 여러분을 삼킬 수 없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91:7

 

바울사도는 오늘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0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포인트는 이거예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데,

바울은 이것이 내가 세상에서 대접받고, 영광받고, 갈채를 받고, 칭찬을 받고...

이런 것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씀하지 않고,

자기의 고난과 죽음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한다고

 

죽음에 이르는 우리 인생의 약함들, 그리고 실패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영광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 자리(교회 성도의 자리)에 있을 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약함이 우리 안에 많습니다. 넘쳐나죠.

주님은 그 약함을 통해서, 예수의 생명이

내 형제와 자매들, 즉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12절에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여러분, 늘 하나님의 반전을 생각하십시오. 새날은 반전의 날입니다.

 

본 회퍼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는 새날을 바라봅니다.

반전의 날을 바라봅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오늘 이 주일에, 그날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약함과 실패의 날들에, 특별히 그날을 생각하십시오!

이게 반전이 아니고 뭐겠어요?

 

바울이 14~15절에 말씀한 대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4:14~15

이게 반전이 아니고 뭐겠어요?

 

지금 바울의 현실의 눈앞에는, 고린도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저들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그래서 내가 전한 복음도 오해하고 있는 이 현실을

뒤집어 놔야 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도 썼고 후서도 쓰고 있어요.

그리고 잃어버린 고린도중서도 있어요. 쓰고 또 쓰고 또 쓰고 또 썼습니다.

 

바울은 그날을 생각합니다. 이게 자신이 포기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근거니까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니까요.

 

위대한 반전이 저와 여러분 앞에도 펼쳐질 겁니다.

패자들이 승자로 인정되고, 승자로 인생을 구가했던 자들이 패자로 판명되는 날이 올 겁니다.

 

우리는 그날을 앞당겨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약함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가벼운 것에 불과한 이 모든 약함들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들을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그 길을 오늘도 걸어갑니다.

그리고 내 고난이, 나만의 고난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고, 형제와 자매들을 위하는 고난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사실을 아십시오.

성도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망해도 망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7

이 모든 일에 성도는 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다 포함됩니다.

 

하늘과 땅 온 우주에 여러분을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도 여러분과 함께 바울이 15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4:15

 

오늘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의 감사함이 넘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