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평강의 왕 | 이사야 9:6-7 | 2025.12.28. - YouTube
◈예수 – 평강의 왕 사9:6-7 2025.12.28.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보통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긍정적으로 답을 합니다.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라는 질문에 ‘나는 안녕 못 합니다’ 라고 답할 때는 거의 없겠죠.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냥 마음속으로 솔직하게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안녕하십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삶의 여러가지 고통과 고난으로 인하여
걱정, 불안, 근심에 시달리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강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진정한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소개해주는 것처럼,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간 동일한 본문 사9:6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묘한 모사이십니다. Wonderful Counselor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Al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Everlasting Father
오늘 본문 말씀은, 이제 예수님을 평강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Prince of Peace
평강의 왕이 다스리셔야 우리의 삶에 참 평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선사해 주시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1.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 첫 번째 메시지는
<평강을 위해 주님은 낮아지십니다>
자, 오늘의 본문 말씀을 담고 있는 이사야 9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가장 마지막에 언급되고 있는 ‘이방의 갈릴리’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4:15
도대체 왜 ‘이방의 갈릴리’일까요? 갈릴리는 분명히 이스라엘 땅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을 하는 것일까요? 사9:1
이것은 실제 지명이 아니라, 갈릴리 땅의 별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이스라엘 지도를 보시면, 갈릴리 지역은 북쪽의 위치해 있죠.
다른 나라(아람, 앗수르 등) 이방 나라와 접경지역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있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겠죠.
그래서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들의 색채가 가장 짙었던 곳입니다.
그와 동시에 굉장히 변방에 있는 도시였고, 또 접경지역이다 보니까
다른 나라가 침략해올 때 가장 먼저 짓밟혔던 지역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을 경멸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깡촌 시골이라고 무시했던 거죠. 언어도 갈릴리 사투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이방의 갈릴리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셨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죠. 9:1
이 예언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성장하셨고, 또 생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죠.
그러나 실제로 성장하신 곳은 어디죠?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성장하셨고, 생활하셨으며, 사역을 하셨죠.
요2장에 보면, 예수님의 첫 표적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죠. 가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요?
갈릴리 지역입니다. *호수를 기준으로 9시 방향
눅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처음으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그곳 또한 갈릴리입니다.
마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처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 곳도
역시 갈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그곳에서 시작만 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가 예수님의 공생의 기간 동안에 주 무대였고, 주 사역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셨고, 또 사역을 하셨죠.
예루살렘은 명절 때 가끔씩 올라가셨죠.
이상하지 않나요? 왜 하필이면 갈릴리일까요?
요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했을 때, 그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날 리가 없다’는 것이죠.
‘아니, 나사렛 같은, 갈릴리 같은 깡촌 시골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주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고 무시하는 갈릴리로 임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낮은 곳으로 임하십니다. 주님이 임하시는 곳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온전히 낮아져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전쟁, 싸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모두가 높아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내가 더 높아져서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하기 때문에
싸움도, 전쟁도 끊이지 않는 것이죠.
어린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왜 싸울까요?
내가 더 좋은 장난감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놀이를 하고 있는데, 내가 대장이 되고 싶고,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에,
모두가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전쟁은 끝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만 그럴까요? 어른들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왜 부부싸움을 하셨습니까?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우신 분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아무도 없겠죠.
내가 겸손이 낮아져서 내 아내를 섬기고 싶은데,
내 아내도 나를 위해 희생하겠노라고 고집하고 있으니,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 부부싸움은 제가 머리털 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내가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죠. 내 생각에 당신의 생각을 맞춰야 되고,
내 방식에 당신이 따라와야 되며, 내 가치관과 인생관을 따라
당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가 더 높이 올라갈 것인가’하는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는,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는
싸움, 분쟁 그리고 전쟁이 끊일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분이죠. 만앙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낮아져야 비로소 전쟁도, 싸움도 끝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모두가 경멸하고 무시하는 갈릴리에서 생활하시고, 또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우리도 따라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께서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함께 겸허히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를, 함께 세워나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선사해 주시기 위해서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평강을 위해 주님은 통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선사해 주시기 위해서 먼저 낮아지셨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다시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빌2: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합니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가장 높게 올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천하 만물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천하 만물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합니다.
그 만유의 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젠 통치하십니다.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그곳에, 참된 평화가, 참된 평강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고 계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삶에는 아직 평화가 없는데요? 저는 아직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고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평화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또는 평강은, 모든 고난과 환난, 핍박, 전쟁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난과 핍박이 지나가면 이제는 평강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의 삶의 모든 문제와 환난과 역경과 고난과 고통이
사라져야 된다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강이란,
아직 전쟁 중이지만, 아직 환난과 핍박이 있지만, 삶의 고난과 고통의 폭풍우가
아직도 휘몰아치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거하면, 그곳에 참된 평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꼭 소개해드리고 싶은 한 편의 그림이 있습니다.
미국의 잭 더슨이라고 하는 아티스트의 그림인데요. Jack Dawson

자, 이 그림을 한번 잘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번개와 천둥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죠.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졌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다 보니, 그 거센 바람에 물이 절벽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것이 너무 거세 너무 거세다 못해, 바위가 깨질 지경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그림에 제목을 붙여주세요.
여러분이 이름을 지어주신다면, 이 그림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주시겠습니까?
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은, 아마도 ‘흑암’, ‘혼돈’, ‘굉음’ 또는 ‘폭풍’이겠죠?
그렇다면 실제로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이 그림의 제목은 <폭풍 중의 평강>입니다.
Peace in the midst of strom.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무슨 평강이에요?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 그림에는 평강의 흔적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그림의 제목이 ‘폭풍 중의 평강’일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 중에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자세히 보시면, 폭풍우 가운데 물이 거세게 흘러 넘치고 있는데요.
절벽 한 귀퉁이에 움푹 들어간 곳에, 새 둥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어미 새가 있는데,
어미 새가 아기 새들을 날개 그늘 아래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기 새들은 아주 평온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폭풍우가 회물아치고 있습니다.
천둥, 번개로 인해서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물이 너무 거세서 바위가 깨질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 새들은, 어머니의 날개 그늘 아래서 절대 평강을 누립니다.
어머니를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죠.
어머니가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온전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딱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평화요, 평강입니다.
전쟁이 끝나야지만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고난과 역경과 환난과 핍박이 다 사라져야만
이제는 드디어 참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폭풍 중에도 우리는 노래할 수 있고, 고난 중에도 소망을 바라볼 수 있으며,
환난 중에도 절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가 거할 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거할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오늘도 고난 중에 힘들어하시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평강의 왕 되시는 예수님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나의 삶에 어려움과 역경이 있겠으나,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참된 쉼을, 참된 평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참된 안식을 받아 누리시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삶에 참된 안식과 평강을 허락해 주실까요?
<평강을 위해 주님은 희생하십니다>
평화의 관점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 참담합니다.
총체적인 난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심지어는 개인적으로나 전쟁과 싸움과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선악과 나무 아래서 시작되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반복적으로 말씀을 하셨죠.
그렇게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살았더라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절대평강을 누리면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평화가 산산조각 나버리게 됩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는 바로 그 순간, 평화가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실 때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도망가버리게 되죠. 평화가 깨지고, 두려움이 엄습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만 평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평화는 깨져버립니다.
자 하나님께서 ‘네가 이것을 먹었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답을 하죠?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저 여자 때문입니다.’ 너무 치사하지 않나요?
분명히 하와를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데리고 와주셨을 때는
‘나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하면서 뛸 듯이 기뻐했던 그가,
조금만 불리해지자 이제 모든 책임을 자기 아내에게 전가시켜버립니다.
이렇게 인간 대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평화는 깨져버립니다.
그런데 죄에 빠진 인간은,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하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의 힘으로는,
평화와 평강을 되돌릴 수가 없고, 회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려 놓으셨죠.
그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그 희생 덕분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해 되었고,
이웃과도 참된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희생은 십자가에서 끝이 나나요?
그때 한 번 희생하시고, 이제 다시는 희생 안 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아니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기보다는,
내 욕심 따라 살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동행하사
매일매일 우리를 위해서 희생해 주셔야 됩니다.
우리를 참고 인내해 주시며, 우리를 돕고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을 너무나 슬프게 해 드릴 때마다,
예수님을 너무나 슬프게 해 드릴 때마다, 예수님은 또 용서하시고 용납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딱 부모와 자녀의 관계 같지 않습니까?
시간을 한번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아주 어렸을 때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의 절대적인 희생이 없이는, 이 아기는 잘 성장하기는커녕
생존조차 불가능합니다. 아기를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줘야 됩니다.
그런 부모의 희생이 없이는, 이 아기는 생존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를 두신 엄마들은 항상 피곤합니다. 얼굴과 몸이 퉁퉁 부어 있습니다.
하룻밤도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기가 어릴 때는, 소원이 굉장히 소박해집니다.
‘제발 하룻밤만이라도 그냥 두 다리 쭉 뻗고 계속 잤으면 좋겠다’ 합니다.
밥을 먹는데 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먹는 것이 아니라 ‘좀 차분히 앉아서 한 끼 식사를 즐겼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의 소원입니다.
나의 모든 자유 시간을 다 반납해버렸습니다.
오직 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전부를 쏟아붓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제 이 아이가 자라나서 학교 갈 나이가 되면, 이제 희생은 끝난 것일까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 아이야 학교 공부 뒷바라지를 하랴,
혹시라도 우리 아이가 왕따를 당하지는 않는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가?
학폭을 당하지는 않는가? 항상 노심초사합니다.
자 이 아이가 사춘기가 되잖아요? 와우! 끝내줍니다.
‘이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야? 인간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과 말들을 매일 들으면서, 보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춘기를지나, 이제 대학교에 진학하면, 이제는 고생의 끝인가요?
아니요. 이젠 또 학자금을 대야 되잖아요.
아이의 취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되잖아요.
‘혹시 우리 아들딸이 장가는 갈 수 있을까,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해야 됩니까.
자 이제 결혼했어요. 이제는 고생 끝인줄 알았는데, 손주들이 태어나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또 맡깁니다. 그래서 손주가 오면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손주가 가면 더 행복해요. 얼마나 기쁩니까!
마치 구원받은 기쁨 같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희생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노년기에도, 가장 간절히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누구를 위함입니까?
여러분의 자녀와 손주들을 위해서, 지금도 간이 저리도록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의 모습 아닙니까! 부모는 죽는 그 순간까지 희생하고 사랑합니다.
▲이러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애틋한 사랑과 한결같은 희생’의 손길을 잘 묘사해주는
한 편의 영상이 있습니다.
한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희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위 동영상 23:41~26:43초
「우리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아빠예요.
우리 아빠는 제일 잘 생겼어요.
가장 똑똑하고, 가장 머리가 좋고, 가장 친절해요.
아빠는 나의 슈퍼맨이에요.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잘 하길 바라세요.
아빠는 정말 멋진 분이에요.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해요.
아빠는 직장이 있다고 거짓말해요.
돈이 있다고 거짓말해요.
피곤하지 않다고 거짓말해요.
배고프지 않다고 거짓말해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해요.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도 거짓말해요.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하세요.
아빠 사랑해요.
지금 이 시간, 화면을 통해서 이 아이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이 아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절대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죠.
이 아이가 예쁘고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이유, 이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는 이유,
이 아이의 식탁에 삼시 세 끼의 밥이 올라오는 이유,
이 아이가 학교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아버지의 희생이 그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식탁 위에 일용할 양식이 올라오는 이유,
우리가 오늘도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이유,
나 같은 죄인이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오늘도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이유,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희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53:5절에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찔림으로, 예수님의 상함으로, 예수님이 채찍질을 맞음으로
예수님이 목숨을 내려놓음므로, 예수님이 오늘도 희생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2025년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바라보면서, 전심을 다해 오늘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그 예수님을 찬양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전심을 다해 그 주님을 예배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고난과 역경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통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안녕하신가요?
여러분의 삶에 고난과 아픔이 있다면, 평강의 왕 되시는 예수님께로 달려가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그 날개 그늘 아래서
참된 쉼을, 참된 안식을, 참된 평강을 누리며
오늘도 나의 전부를 내 걸고, 주님을 예배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