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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1장 검으나 아름다우니

LNCK 2026. 1. 7. 11:2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내적 치유

검으나 아름다우니 | 1:5-7 | 화특새 | 25.12.30 - YouTube

 

◈검으나 아름다우니                    아 1:5-7                     2025.12.30

 

오늘 본문에서는 술람미 여인의 내면의 불안감이 살짝 비치는 대목입니다.

5절은 여인이 독백처럼 말하고 있죠.

 

◑1: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말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루살렘 딸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죠.

 

여인은 그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나는 비록 검으나’

외모에 대한 얘기죠.

그녀는 자기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검다. 얼굴이 검다. 피부가 검다.’ 자신에 대한 자각이죠.

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이 ‘검다’는 것은,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좀 외모가 좀 떨어진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한다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못 맺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면,

자신을 객관화하기를 잘 못하기 때문에... 즉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더 낫게 보이려고 하거나, 더 나쁘게도 보려고 하지 않는,

자기의 본래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아는 것,

자신에 대해서 정직한 게 아주 중료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렵습니다.

 

오늘 이 술람미 여인은,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정직해요. ‘나는 검다’ 하는 거죠.

검다는 말 속에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예요.

 

여기서 ‘피부가 검다’는 것은, 인종적인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피부가 그을린 것이며, 그녀가 포도원에 내몰려 노동을 많이 한 결과로 검게 탄 거죠.

 

◑1: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태양 빛이 나를 태웠다.. 이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했다.. 그러니까 가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라’

그러니까 이 검은 피부의 색깔로 인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 거죠.

자신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 어머니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

본서에는 술람미 여자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고,

다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만 몇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3:4, 6:9, 8:2)

 

이런 이유로 혹자는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고,

술람미 여인은 어머니와 오빠들과 함께 살았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오빠들이 술람이 여자의 어머니가 재혼하여

다른 아버지에게서 낳은 배다른 오빠들 또는 사촌 오빠로 보기도 합니다.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 이는 아버지의 유업을 다 차지한 오빠들이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을 지키는 일꾼으로 일을 시켰음을 암시한다. 고용자처럼 대한 거죠.

고대 근동 지방에서 여자들이, 들에 나가 일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창29:9, 10, 출2:16, 19)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인이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고, 자신의 포도원은 미처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상징적 의미에서 볼 때, 이는 성도들이 다른 일상적이고 피상적인 일들에

몰두한 나머지 정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맡은 신앙적 임무는 잘 감당하지 못함을 암시하죠.

(나중에 설교 후반부에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게달은 이스마엘 후손인 유목민을 가르켜요.

그런데 이 유목민들의 장막은, 염소털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그 염소털 가죽은 햇빛에 많이 노출될수록 점점 더 검어지는 특성이 있죠.

그래서 검은 빛깔의 장막을 ‘게달의 장막’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얼굴이나 피부가 살짝 탄 게 아니고 많이 탄 거예요. 까매진 거죠.

슬럼미 여인은, 자기 신분이 어떻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신분 자체가 궁중의 여인이 아니에요.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을 만한 신분이 아니에요.

궁중의 여인이 아니고, 신분이 하청민이었다.는 거예요.

시골 출신, 그리고 노동자였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나는 검다’는 것에는 많은 게 담겨 있습니다.

얼굴이 검게 된 이유는, 아름다운 빛으로 곱게 선탠한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바깥 일을 하다가 피부가 검게 그을려졌습니다. 이 말은 뭘까요?

자신의 외모를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6

 

뭐 좀 찍어 바르고 이럴 틈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자신의 컴플렉스가 되는 거죠.

그리고 충분히 자신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것이었어요.

가리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죠.

 

여러분 여인에게는 외모는 매우 중요한 영역입니다.

당시 문화로는 검게 거을린 얼굴은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검으나’ 이 표현 속에는,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5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내가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을린 피부로 인해, 여인은 스스로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성의 얼굴은 매력을 발산하는 핵심이죠.

 

남자들은 거울을 그렇게 많이 보지 않습니다. 아침에 한번 보고 말죠.

혹시 남자분들 가운데 거울을 가지고 다니시나요? 아마 안 가지고 다니실 겁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거울을 꼭 가지고 다니죠. 또 수시로 거울을 꺼내서 쳐다봐요.

또 화장을 수시로 고쳐요.

 

외모가 중요한 이유가 뭘까요? 이목을 끌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거죠.

아무래도 남성보다 여성들이 외모에 굉장히 더 많이 신경을 쓰는 것은, 본능적인 거죠.

주목을 받고 싶고, 찬사를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고, 예쁘게 보이고 싶고,

또 예쁘면 대우를 받잖아요,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죠.

 

그래서 성형을 할 때 주로 어디를 하죠? 얼굴을 하잖아요.

그래서 여성들은 미모를 위해서라면, 모든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여성들은 ‘미모가 권력이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외모가 자존감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검으나’ 이것은 치명적인 컴플렉스가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여인에게 반전이 일어나요. ‘나는 검으나 아름다우니’

사실 이 표현은 맞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검으니 망했다’ 이게 맞는 말이예요.

근데 ‘나는 검으나 아름다우니’는 반전이죠.

 

‘나는 피부가 검으니, 이제 집밖에 나가지 않을 거야. 외출 안 할 거야,’

하면서 이불 뒤집어쓰고, 집밖에 안 나가는 거예요.

근데 여인은 ‘나는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또 여기에 뭐라고 표현해요?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거예요.

휘장은, 베를 뜻하는데, 왕궁에 장식하려고 치기도 하고, 태양을 가리려고 치기도 하죠.

에스더서의 페르시아 왕궁에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쳤어요. 에1:6

우리나라 경복궁에도 휘장을 친 자국이 있는데, 마당에 휘장을 매는 둥근 쇠고리가 있어요.

 

내가 검은데 솔로몬의 휘장처럼 너무 찬란하다는 거예요. 역설이죠.

그녀는 자신의 그을린 피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왜요?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이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본문 1:1~4에서 뭐라고 했죠? 왕이 그녀를 방으로 이끌어들였어요. 1:3

왕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녀는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자존감이 높은 거죠.

‘나는 검으나 아름다워’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는 거예요.

피부의 색깔로 인하여 자신을 비하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해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오늘 술람미 여인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건강한 거예요.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고 비천하게 여기고 할지라도,

‘아니야, 나는 아름다워’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나를 맞춰 가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우리가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어요.

완전하게 자유롭게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내가 독립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너무 많이 종속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것에

더 많이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해도,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보면

내 삶은 어두워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정적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나에 대해서 긍정적인 얘기를 해도,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다루는 겁니다. ‘아니야’ 하며, 그 말을 안 믿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로우 셀프 이스템 low self-esteem 이라고 그러죠.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밀어내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밀어내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무시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그러죠?

열등감이라고, 내가 나를 의심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나친 자기 비하, 그게 열등감으로 몰아가게 되고,

누가 나를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술람미 여인은 이미 솔로몬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어요. 1:2, 4

이 말은, 자신이 건전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self-esteem이 건강하다는 거죠.

 

▲여러분, 이 열등감은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자신의 열등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돈을 악착같이 버는 그 내면에는, 숨기고 싶은 자기의 내면의 열등감이 있는 거예요.

열심히 성공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그 안에는 뭐가 있어요? 열등감이 있을 수 있어요.

 

일을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그 내면에 뭐가 있을 수 있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안에 열등감이 있는 거예요. 열심의 뿌리를 잘 파악해서 봐야 돼요.

 

‘누군가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 거예요.

뭘 얻었긴 했는데, 그 자리에 올라갔는데, 열등감은 사라지지가 않아요. 그대로 있어요.

 

여러분, 아무리 많은 걸 쌓아도, 성공을 해도, 낮은 자존감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너무너무 피곤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날 특별히 양극화 현상이 앞으로 더 심해질 겁니다.

그러니까 벽이 높은 거죠. 갈수록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개천에서 용난다’ 이런 게 이제는 안 된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일반적으로 ‘흙수저, 금수저’ 하는 얘기도, 비교 문화에서 나온 얘기이고,

그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고, 그 비교 문화 속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뭐예요?

그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되고, 우울증은 불가피합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세상은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나 우리는 술람미 여인에게서 배우는 거죠. ‘검으나 아름다우니’

 

신랑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자기 열등감을 단번에 해결하게 되고,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여러분, 자신의 외모에 집착할수록, 더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지나친 자기 중심적 본성, 그것이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외모에 쏟아부어요.

 

무엇보다도 자존감이 낮으면,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공감 능력이 없어요.

자신의 외모에 대해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까, 상대의 감정을 읽을 능력이 나에게 없는 거죠.

 

상대를 못 읽어요. 공감 능력이 많은 사람들,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관계들 안에서 조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모두의 감정을 읽으면서, 잘 조율까지도 하거든요. 이게 관계를 잘 맺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항상 불화를 일으키죠. 왜? 자기 감정, 자기에게 빠져있어서,

상대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신을 아름답게 하려고 성형을 합니다.

어느 정도 하고 만족할 수 있다면 괜찮아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거죠.

내면의 거짓된 욕구가, 계속 그 외적인 콤플렉스를 해결하라고 부추기면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계속 손을 대야 돼요. 계속 성형을 하게 된다는 거죠.

 

저는 요즘은 이게 잘 안 보이는데, 제가 옛날에 몸무게가 20KG 적을 때,

제 턱 광대뼈가 되게 튀어나왔어요. 양쪽 턱의 광대뼈.. 이게 제 콤플렉스였어요.

이게 되게 컴플렉스였어요. 근데 우리 집안이 다 그래요.

우리 동생들도 좀 그렇는데, 특별히 제가 광대뼈가 많이 튀어 나왔어요.

 

그것 만이 아니에요. 그죠. 눈도 작고...

우리 아이들은 자꾸 ‘아빠, 눈 좀 떠라’ 그래요.

‘아ᄈᆞ는 눈 떴는데?’

 

여러분, 마음의 성형이 필요해요. 내가 나를 건강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안 바뀌면,

뭐를 다 고쳐도 안 돼요.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뭐냐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술람미 여인의 얘기는 기가 막힌 거예요.

‘나는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반전이에요. 반전!

 

이 말은 뭐냐면, 술람미 여인은 지금 자기 자신의 상태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걸 가르쳐서 우리는 뭐라고 얘기해요? ‘건강한 자기애, 건강한 자화상, 건강한 자존감’

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누군가와 친밀한 사랑을 나누려면,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돼요.

제일 첫 번째 출발이 그거예요.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이 안 돼요. (그러니 결혼이 안 되는 거죠. 못 하는 거죠)

 

성경은 이게 너무너무 중요해요.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잖아요.

그러면 ‘네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면 먼저가 뭐예요? 먼저 ‘내 몸을 사랑해야’ 돼요.

 

나를 사랑해야, 나를 사랑하는 만큼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구를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정말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랑이 결국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 이웃도 나도 하나가 되는 거예요.

 

문제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오늘날 자기를 증오하고, 자기를 질시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비애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정죄하고, 내가 나를 학대하는 거예요.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겁니다.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의심을 해요.

 

여러분,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요. 그 사랑을 받을 줄 알아요.

사랑을 일단 받을 줄 알아야 돼요.

그러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거나,

때로는 폭력적인 부모 아래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받을 줄을 몰라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세상 속에서 나가서도 언제나 불안한 거죠.

 

사랑을 의심하는 거에요. 누가 나에게 다가와도 그 사랑을 의심해요.

절대 자기의 마음을 안 열어요.

 

여러분, 이미 자녀들을 사랑하겠지만, 자녀들을 어릴 때 충분히 사랑해주는 거에요.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도록 해야 돼요.

어릴 때부터 여러분 엄마가 아이를 사랑해 줄 때,

그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얻는 거예요.

 

자녀들이 나중에 다 문제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어릴 때, 어머니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그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거예요.

‘사랑 결핍 증세’, 이것은 혈액이 결핍한 것보다 더 심각해요.

요즘 맞벌이 부부가 급증하여, 어머니들이 나가서 일을 하는데,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죠.

 

사실은 사랑의 결핍이에요.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거예요.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유산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거예요.

 

요즘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어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지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이게 오늘날 현대인의 정신병이 그걸로 다 일어나는 거잖아요.

음치가 있는 것처럼 ‘관계치’가 있는 거예요.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몰라요. 이게 지금 보통 일이 아니에요.

 

요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데이트 폭력이라든가, 스토킹이라든가, 집착이라든가...

이게 소위 뭐냐면 ‘관계 중독 현상들’이죠.

건강한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출발점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거라는 거죠.

근데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생각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게 어려워요.

어느 순간 밀고 들어오는 어두운 생각들이 많은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길은, 복음의 담금질을 반복적으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될 때, 모든 게 달라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때, 나의 존재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아마 이번에 아가서를 계속 다루는 가운데, 이 부분이 여러분들 안에 스며들면서

우리의 내면에 나도 모르게 치유가 일어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가를 만나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바라보는 새로운 기준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만나면, 그 십자가 안에서 나에게 비추어진 나는 새로운 나예요.

건강한 새로운 거울을 하나 가지는 거예요.

 

이전에는 깨진 거울을 보고 살아왔어요.

옛날에는 껴진 그릇으로 자기를 보는데, 거울 자체가 깨져 있죠.

거울이 껴져 있으니까, 자기의 정상적인 본래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하나님의 형상

 

때로는 다른 사람의 거울을 가지고, 자기를 비추어 본 거예요.

그건 다른 사람이 비추어 준 거울이에요. 그건 내 모습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 십자가를 바라보면, 새롭게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생기는 거예요.

전혀 다른 나 나에 대한 가치, 나에 대한 존중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게 주셨다는 이 복음은,

나를 바라보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괴테가 그런 말을 했어요.

태양 빛이 비추어지면 먼지도 반짝인다.’

먼지인데 태양 빛이 들어가니까, 먼지도 빛이 나는 거예요.

 

나라는 인생에 예수 복음의 빛이 비추어지면, 내 삶에 광채가 납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복음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담금질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계속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그림자들이, 죄의 그런 악영향들이...

또 죄를 짓고 나면 또 이게 한 번씩 오는 게 있어요.

그때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하여 나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꿔놓으셨어요?

 

엡2:10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헬라어로 포이에마, 유명한 단어예요.

영어로 마스트피스, 걸작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이 됐대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작품을 우리는 걸작이라고 그럽니다.

그건 상품이 아니에요. 그건 그냥 팔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걸작품은 가격이 없어요. 그건 어마어마한 밸류를 갖고 있는 거기 때문에, 판매가 불가능해요.

가격이 안 나와요. 그게 걸작품이에요. 그거는 유일한 거, 유니크한 거기 때문에

다른 것과는 비교를 안 해요. 비교 불가.

 

여러분, 우리는 누구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걸작품,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걸작품이야’ 엡2:10

 

‘나는 내 아들을, 너를 위해 희생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너를 샀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나 자체로 충분히 독특한 가치를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나를 꾸며야 할 이유가 없고,

나는 나로서 충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확신을 가지셔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내가 더 멋지게 보이려고 애를 안 써도 돼요.

지금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는, 이건 어마어마한 존재로 바뀐 거예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그러니까 가장 좋은 것은, 나를 그냥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거죠.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잖아요. 우리 엄마 아빠들에게는,

지금 이 우리 자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저는 우리 교회 신생아들을 축복기도 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늘 감탄합니다.

근데 그 엄마 아빠 눈에는 얼마나 더 예쁘겠어요? 제 눈에도 너무너무 예쁜데.

 

근데 여러분, 자녀 정도는 또 아니에요. 손자로 가면요. 이거는 한 단계 더 가버려요.

제가 손주가 3명 있잖아요.

우와 이거 완전 뭐 예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해요. 할아버지를 뒤집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혼을 속 빼버려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알려고 하면, 할아버지 마음으로 가야 돼요.

아버지는, 애가 말을 안 들으면 한 대 쥐어박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그게 아니에요.

손주가 너무너무 예쁜 거예요. 그냥 하나님 우리를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냥 너 존재 자체로 충분해!’

 

근데 우리 아이들이 요즘 보니까, 초등학생인데도 막 화장하고 막 그런대요.

‘그거 안 해도 돼. 그거는 작품을 버리는 거야.

레오나르드 다빈치 작품에 막 페인트칠 하는 거야’

 

여러분, 이 우주 공간에 나라고 하는 존재는 유일하다는 거예요. 유일하다는 거예요.

뭐 누가 나를 무시한다고, 내 존재가 가치가 떨어지지도 않아요.

높인다고 해도 올라가지도 않고요.

그냥 내 존재 그대로,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보시는 가치예요.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으려고 예를 쓰지 않아도 돼요.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모든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먼저 만끽하는 거에요.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으면, 달라지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달라져요. 자신감 뿜뿜, 자존감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하잖아요. 그 사랑은 조건이 없어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합니까?

어떤 기준에 들어가야 돼요. 뭐 직장에 취직하기 전에 얼굴도 고치고, 그냥 스펙을 쌓고,

모든 걸 끌어와서 내가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약점을 보이면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달라요. 내 모습 있는 그대로예요. 자격, 조건 따지지 않습니다.

연약한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세상과 다릅니다. 왜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십자가로 인해

우리의 모든 허물이 가려워졌어여.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허물이나 약점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나는 검으나 아름다우니’ 하고 혼잣말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술람의 여인이 자기 자신에게 했던 말이지만,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향해 ‘너는 검으나 아름답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단이 우리를 속여요. 거짓된 자아에 빠져 살도록,

세상의 온갖 기준들을 들이대고,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그 마귀...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자꾸 ‘나는 검다’고만 주장하면, 신랑과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신랑은 받아들여주는데, 신부 스스로 마음이 닫혀있다면, 친밀함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요? 사랑은 위기를 맞는 거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있으면,

그분과 사랑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검 다는 어두운 자아상, 그 어두운 자아상을 걷어내는 거에요.

그 자아상은, 내면에 숨어 있는 겁니다. 이제 그것을 걷어내라는 거예요.

 

여기 ‘나는 아름다우니’ 라는 이 말은, 스스로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신분을 의미하는 거예요.

은혜의 빛 아래에 비추어진 나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6절을 보십시오.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6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내가 주눅들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름답다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한 평가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라는 존재의 변화를 깊이 인식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 보시기에도, 내가 스스로 나를 보기에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존중감, 이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자기를 리스펙트하는 거예요.

여러분, 막 사는 사람들 특징이 뭔지 아세요? 자기에 대한 리스펙트가 없어요.

자기 존중이 없어요. 자기 몸이나, 자기 모든 것을 삶을 막 내던져버려요.

자기의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막 사는 거예요.

 

자기를 존중이 여기는 사람은, 막 살 수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거절하면 갈 데가 없어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필요해요.

그리고 자기를 정말 존중이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존중이 여길 수밖에 없어요.

 

그때 관계가 열리는 거예요. 모든 관계가 열리는 거예요.

관계가 열리면, 삶은 열리게 돼 있어요.

삶이 닫혀있는 이유는, 관계가 닫혀있기 때문이에요.

관계가 안 풀려요. 꼬여요. 자꾸 그럼 인생이 불행해지는 거예요.

 

나이가 들어가는데 자꾸 관계가 꼬여요. 그건 불행해지고 있다는 뜻과 똑같아요.

여러분, 다른 사람에 대한, 또한 나에 대한 존중감을, 내가 포기해서는 안 돼요.

‘나는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고 하는 여인은, 정말 사랑스러운 거에요.

 

그리고 존재감이 드러나고, 기품이 있고, 성숙함이 나오고 있고,

검은 것은 결함이 아니에요. 이전에는 검은 것이 결함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검은 것으로 인하여, 더 아름다움이 돋보여요.

 

검은 것이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 된다는 거예요.

복음안에서 일어난 변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

누가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대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 안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적일 때,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타인에 대해서 자꾸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자기 안에 내면에 정리가 안 돼 있는 뒤틀린 자아상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 고운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곱게 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다 나처럼 삐딱한 사람처럼 보이는 거예요. 내가 삐딱하니까, 다 삐딱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안에서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나고, 내가 검으나 아름답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변화는, 이제 나로부터 시작해서, 또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열어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6b

‘나의 포도원’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 한다는 거예요.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포도원을 돌보지는 못 했다는 거예요.

술람미 여인은, 자기도 작은 포도원을 상속 받았나봐요.

 

여기서 ‘포도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술람미 여인의 외모로 해석하기도 하고,

-술람미 여인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그 내면이라고도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은 뭘 의미하느냐? 돌봄을 받아야 할 영역을 말하는 겁니다.

자기 포도원을 지키려는 일에는 신실함이 필요해요.

 

자 오늘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자기 포도원을 지키는 일,

즉 자기 내면을 가꾸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기 내면은 방치되죠.

외적 결함이 문제가 아니고, 외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적인 결함이 결국 우리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위험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삶이 무너지는 것은 과정이 있어요.

어느 순간에 삶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대부분의 인생에 무너지는 것은, 서서히 무너져요. 서서히 잠식되고 있는 거죠.

근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사는 거예요.

 

근데 그 무너지는 원인 중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내가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입니다.

 

그녀의 오빠들이 일을 시켰어요. 여인은 햇빛에 그을릴 정도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뭐에요?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지키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분주함 때문입니다. 일이 바빴던 거예요!

 

여러분 영적 실패는 주로 분주함에서 옵니다. 영적 장애물은 분주함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일을 하다가,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잃어버립니다.

 

특히 사역자들은 더 조심해야 합니다. 사역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영혼은 방치됩니다.

일이 바빠지면, 나중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가꾸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포도원입니다.

문제는, 삶이 분주해지면, 자신의 내면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분주함은 영혼의 질병이다그랬어요.

분주한 삶은 특징이, 일 중심입니다. 친밀한 교제와 거리가 멉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정은 대화가 없습니다. 바쁘니까 대화할 틈이 없어요,

가족들도 식탁의 교제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고민을 들어주고, 상대의 위로음을 달래주고,

상대의 감정을 읽어줄 여유가 없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서 섬세한 마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족간에 대화가 끊어지는 순간, 매우 위험한 징조입니다.

그 끊겨진 대화, 대화가 끊어진 관계 안에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대화가 끊겼다... 관계가 깨어진 상태입니다.

친밀함 관계로 나아가라고 하면, 친밀한 대화부터 이어져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 때문에 기도가 한쪽으로 밀려납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기도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겨우 남아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의 척도는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친밀한 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바쁘면 기도하는 시간도 일이 됩니다.

의무감에 기도를 하지만, 주님과 친밀함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결국 기도는 흉내만 내고 끝냅니다. 사건은 거기에서 터집니다.

 

기도의 형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것을 구하는 기도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요.

여러분, 내가 원하는 일방적인 기도, 그 기도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대부분 웬만한 것은, 20분 기도면 다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친밀감을 가지려고 하면,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기도에서 친밀감을 놓쳐버리면, 하나님과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내면세계는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내가 포도원을 돌보지 못하면, 결국 포도원을 잃어버립니다.

 

다윗에게 밧세바 사건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진쟁을 치르나, 자기 내면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던 어느 날, 밧세바 사건이 터진 거예요.

 

내 영혼을 방치해서는 안 돼요. 내 영혼을 가꾸어야 돼요. 내 포도원을 가꾸어야 돼요.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내면,

일만 하지 말고, 돈만 벌지 말고, 영혼을 방치한 후유증은 자신이 치러야 돼요.

내 영혼을 돌보는 일이 우선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만들어내야 되고,

그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1: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하여 함께 있고 싶어서 한 말입니다.

(아직 여인은, 그가 솔로몬 왕인줄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저 부티나는 목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양 치는 곳을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남자를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내 사랑하는 자여’

그녀의 관심은 온통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내가 네 친구의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가 같이 되겠느냐?’ 반문합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친(솔로몬)의 친구들에게, 남친의 소재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요즘도 그렇지만, 중동의 풍습이 낯선 남자에게 다가갈 때는

여인들이 보통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지요.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어디에서 양을 먹이시며, 한낮에 어디에서 쉬십니까?

어디로 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며, 여인이 남친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어디로 가야, 내가 당신 예수님 안에서 내가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디를 가야? 내가 당신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주님을 찾는 모습이죠.

 

이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정오에 열기를 피해서, 뜨거운 한낮은 쉬워야 돼요.

 

여기서 삶의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이에요.

피곤하고 지치게 되는 순간, 영성은 위기를 맞습니다.

바쁜 가운데서 여유를 가져야 하는 거예요.

 

신앙의 여정에서 숨을 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정신없이 나를 내몰면,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남친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여인은 그가 아직 왕인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솔로몬을, 평범한 목자나 연인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도시에서, 시골로, 휴가를 왔다가 만났을 겁니다. 평복을 입었을 겁니다.

 

아3:6-11절에서 솔로몬의 왕의 가마가 60명의 호위 무사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그녀가 그의 지위를 깨닫는 중요한 순간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안식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사람을 가르쳐서 우리는 성과주의자라고 얘기합니다.

성과주의자가 되면 잔인해집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그렇습니다.

히브리인들에 대한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 압력을 가합니다.

더 많은 걸 생산해내라고 채찍질합니다. 생산성을 높여야 하고, 할당량을 채워야 합니다.

 

그런 시스템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언제나 긴장감이 있고 그곳은 관계가 깨어져 있습니다.

일에 빠진 사람들은 관계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관계를 회피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사람은 일종독자라고 부릅니다.

일종독이란 일에 갇힌 상태를 말합니다. 일에 포로가 된 사람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통제합니다. 그리고 일을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는 순간 불안해져요. 중독과 불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안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불안으로 끝나지 않아요.

시대 전체를 뒤덮고 있는 불안, 그래서 ‘불안사회’라고 해요.

 

불안할 때 인간은 우상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대체품을 찾습니다.

일만 하면, 결국 어느 순간 멈추게 됩니다.

생산을 추구하던 사람은 소비되어지고, 결국은 자신의 삶이 망가지게 되는 겁니다.

 

여인은 얼굴이 검게 되도록 일을 했습니다. 오빠들의 학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거운 멍에를 던져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지금 쉴 곳을 찾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시는 분입니다.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고, 일곱 번째 날을 쉬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쉴 곳을 제공하십니다. 쉬어야 할 때 쉬는 게, 영성이에요.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 믿음이에요.

 

지칠 대로 지쳐 쓰러져서 쉬는 것은 쉬는 게 아니에요. 그건 요양이에요.

그것은 회복이기보다는 치료에 가까워요.

그래서 지치기 전에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등산이나 하이킹을 할 때도, 지치기 전에 쉬는 것이 지혜입니다.

일단 지치고 나서 쉬면, 회복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식사도 마찬가지죠. 배고파서 허기 지기 전에, 가볍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적 쉼은 다릅니다. 쉼을 통하여 영혼의 소생을 얻는 것입니다.

쉼은 새 힘을 얻게합니다. 그 새 힘은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에요.

 

▲자 결론을 맺읍시다. 우리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덮어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기에 부적합한 것 같은 생각이

우리에게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때마다 멈칫거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 없어 하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내가 감히 하나님 앞에...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 아래에서, 여러분들 눈치 보지 마시고, 움츠러들지 마시고,

자신감을 가지시고, 당당하시고 ‘나는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그 음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고, 두려움 없이,

 

때로는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수하고 죄를 지어도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붙들고, 그분의 품 안에 달려들어가십시오.

그 품 안에 안기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누리십시오.

그 사랑이 결코 우리를 거부하지 않고,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님의 사랑, 지금도 폭포수처럼 부어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 누리시고,

그 사랑 안에서 여러분들의 움츠러졌던 겨울같은 그 어두운 내면이 다 풀어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