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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17장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II

LNCK 2026. 1. 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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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II         욥17:6~16              2006-10-23

"내가 희망을 둘 곳은 어디에?"

 

오늘 본문은 비교적 짧습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여기에 욥기의 매우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욥의 죽음에 대한 바램”이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죽음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욥기는 아직 내세신앙이 생겨나기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든 상황이 종결되는 끝으로 봅니다.

 

욥은 현재의 고난이 극심하므로, 자주 ‘내가 죽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합니다. 14:12~13

다시 말해 죽음은, 욥이 절망스런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 인식됩니다.

 

창조와 출생은 이미 이루어졌기에 자신이 손을 쓸 수가 없지만,

죽음은 아직 한 가닥 희망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은 욥이라는 존재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기 때문에

욥의 탄식에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3:11-19, 6:8-13, 7:15-16, 10:18-22,

14:13-15, 17:11-16).

 

여기에서 죽음에의 희망이 자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냥 탄식의 중요한 주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욥이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스스로 목숨을 끝장내고자하는 자살 의도에서가 아니라,

고난이 어서 속히 끝났으면하는 염원의 표현으로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욥이 죽음을 희망한다는 사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다시 절망스러운 상황으로         17:6-10

 

욥은 이제 냉정하게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니 만신창이가 된 모습입니다.

 

7-9절을 보세요. "근심 때문에, 눈이 멀고 팔과 다리도 그림자처럼 야위어졌다.

정직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며, 무죄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불경스럽다고 규탄하는구나.

자칭 신분이 높다는 자들은, 더욱더 자기들이 옳다고 우기는구나."

 

이렇게 세 친구들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정직하고 무죄하다고 우기면서

정말 정직하고 무죄한 욥 자신을 불경하다고 몰아 부친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욥은 이런 사람들이 모두 와서 자기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의 지혜자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진짜 정직하고 무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자기라는 주장이지요. 그렇다면 욥에게 남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2. 다시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른 스올           17:11-16

 

욥에게 희망은 과거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로부터 오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 보면 욥의 날이 이미 지나갔고, 미래에 펼칠 욥의 계획, 마음의 소원도

다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포기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12절을 보세요. "내 친구들의 말이 밤이 대낮이 된다 하지만, (새벽이) 밝아온다 하지만,

내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친구들은 고통의 밤이 지나가고 밝은 대낮이 찾아온다고 말하지만,

욥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현실에 대한 상심이 컸으면 이렇게 까지 절망할까요?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는데 욥의 경우 확실히 옳습니다.

자, 그렇다면 욥에게 희망의 빛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밝아오는 것일까요?

 

13-15절을 보세요. "내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로 가는 것이다.

거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뿐이다. 나는 무덤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내 주검을 파먹는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누이들'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는가?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욥은 스올, 즉 죽은 자가 내려가는 지하세계를 한 가닥 희망으로 떠올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스올을 욥은 하나의 가정(home)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자리,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 이런 표현들이 가정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또한 여기 구덩이, 즉 무덤과 구더기는 이와 같은 가족 개념과 연합되어

죽은 사람을 절대 무(無)로 돌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욥이 죽어서 아버지로 표현된 무덤 구덩이의 자식이 된다는 것과,

욥의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들은 욥의 어머니 자매처럼 된다는 것은

욥이 죽어서 흙이나 구더기와 같이 절대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이와 같은 한 가닥 희망마저도 욥이 죽어 스올로 내려가면

죽음과 함께 구덩이에 매장되어 구더기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희망은 산 자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죽은 자는 희망까지도 '해당 무'가 되기 때문이지요.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실레노스라는 사람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요,

일단 태어났다면 되도록 빨리 죽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고난 속에 처한 사람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절망감이지요.

 

욥에게서도 죽음에로의 바램은 현재의 부당한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서

인식됩니다. 그만큼 절망스러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치는 하나의 해방구로서

죽음과 스올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욥은 결코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 아닙니다.

다만 기가 막힌 고난의 상황에 대해서 탄식하다보니

하나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떠올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도 너무나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내 죽으면 이 고생 다 끝나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음은 불가해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탄식할 때

하나의 탈출구로서 흔히 그 기능을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죽음에로의 바램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망 선고를 받은 임종 환자들은 극심한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가 죽을 리가 없다며 죽음의 현실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고립'의 단계를 시작으로 해서

'분노와 거부의 단계'로 넘어 갑니다.

 

그런 뒤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이제부터는 선하게 살고 싶으니

좀 더 살게 해달라고 신과 타협하는 '거래의 단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절망에 빠지게 될 때 '침울'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욥이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며 죽음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욥이 아직도 '분노와 거부의 단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 싶습니다.

 

흥미롭게도 욥의 탄식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죽음이

오늘 봉독한 17:11-16절을 끝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이것은 욥이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는 않는지요.

 

▲이제 욥과 같이 처절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첫째, "차라리 내 죽으면 이 고통 당하지 않지." 하면서 죽음이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고난에 찬 현실로부터 피해 가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 듯이 보입니다.

 

둘째, "누구나 다 이런 고통 당하지 나라고 예외인가?" 하면서 포기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셋째, 고통의 의미를 물으면서 고통을 적극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은 참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욥의 경우에도 친구들의 말도 들어보고 탄식하고 절규를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에

죽음에로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피해가든, 포기하든, 뛰어넘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욥이 절망하듯이 죽음으로 고통이 끝난다는 발상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고 지나친 우려입니다.

그 전에 고통은 종결될 것입니다!

 

끝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하자"라는 의미인데, 아주 엄격하기로 소문난 시토 수도회에서

인사말 대신 쓰도록 한 말입니다.

 

중세 시대의 성화를 보면 토굴 속에서 해골을 앞에 두고 관상 기도에 빠진 수도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유럽의 성당 가운데에는 제단 앞 지하에 망자의 해골과 뼈를 차곡차곡 쌓아두어

위에서 내려다보게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너의 죽음도 기억하라’는 뜻이지요.

 

욥은 죽어서 들어가는 무덤이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으로,

무덤 구덩이가 자기 아버지요, 자기 시신을 파먹는 구더기를 자기 어머니요 자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죽음에 친숙하다는 표시이지요.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닌, 나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선교사의 딸로서 「기도에 관한 편지」라고 하는 책을 쓴

아그네스 샌포드(Agnes Sanford)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간까지도 자기감정과 욕망,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들.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느냐? 그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라."

 

그래서 '메멘토 모리' - 중세기 교부들이 많이 쓰던 말입니다.

메멘토 모리. 인사할 때도 굿모닝이 아니고 메멘토 모리 그랬어요.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죽는다고 생각하십시다.’ 이게 인사였어요.

 

왜요? 메멘토 모리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하게 되고

둘째, 나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가?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영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만이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짜 죽음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면,

현재의 모든 갈등, 분노, 실망, 좌절.. 등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불고, 핏대 올리고, 절망할 필요가 하등 없게 된다는 뜻이지요.

▲Nicholas Sparks가 지은 <A Walk to remember>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인데요.

 

1990년대에 North Carolinia, 조그마한 town에서 목회하는

미국의 침례교 목사님의 딸, 제이미 Jamie 라는 고등학교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Jamie는 어렸을 때부터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Jamie의 소원은 기적을 바라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고

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기적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여름에 친구들은 짧은 옷을 입고 다닐 때에도, 이 학생은 늘 스웨터를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Jamie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는데, 그 이름이 곧 Landon입니다.

랜돈이 제이미 가까이 오면서 ‘내가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하니까,

제이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좋은데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하면, 제이미는 랜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You have to promise, you will not fall in love with me.”

나를 사랑하지 않기로 한 후 친구가 되자고 합니다. 랜돈은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교제하면서 점점 점점 사랑은 깊어졌습니다.

마침내 랜돈이 제이미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사랑은 안 된다면서,

 

마침내 랜돈은 제이미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제이미가 백혈병 환자이기 때문에,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많이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랜돈이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면서,

제이미가 백혈병 환자인 것을 알면서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제이미도 랜돈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면서

“왜 젊은 나이에 이렇게 가야 하는지, 남들처럼 대학을 갈 생각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나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니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좀 더 살고 싶다고, 행복하고 싶다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둘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며칠후에 제이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고, 참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나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실거야,

 

하나님께서 너와 같은 착한 사람을 내게 보내어 주어서 사랑을 알게 해주셔서,

이 어려운 고통과 이 고독을 쉽게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하다. 너는 나의 천사야”

그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제미가 죽고난 4년후에 Landon이 Jamie의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Medical School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사실 랜돈이 제이미를 만나기 전에는 문제 학생이었고,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제이미는 랜돈이 좋은 학생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랜돈도 알았습니다.

 

랜돈은 제이미를 사귀고난 후에, 제이미의 좋은 영향으로,

정신을 차리고 좋은 학생이 되었고, 마침내 medical school 에 합격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랜돈이 제이미의 아버지에게 이러한 말을 합니다.

“제이미가 죽기전에 그토록 소원했던, 기적을 선물로 주지 못해서 너무나 슬퍼다”고 합니다.

 

그때 제이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제이미는 이미 기적을 선물로 받았다.”

랜돈이 변하여 좋은 학생이 되었으니 제이미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겼다는 말입니다.

“It was you!” 랜돈의 변화된 인생이 곧 제이미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제이미는 백혈병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에 놓고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기가 불치의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God has a bigger plan for me than I had for myself.”

“나의 인생에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욱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라는 신앙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바꿀수 없는 상황속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하는가?

이 선택에 따라서 불행해 질수도 있고, 행복하게 살아나갈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성도들은 늘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은혜 중심으로 생각하면,

은혜의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동물은 본능대로 살아나가지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생각 하는 기능이 있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

 

◑욥기 17장 절별 해석

 

욥17: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 '기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NIV, RSV, spirit),

'숨', '호흡'(KJV, breath)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이를 '호흡'으로 옮길 경우에, 본문은 심한 병약 증세로 인한 호흡 장애를 뜻하며,

'영'으로 볼 경우에는 극도의 고난 가운데 심령이 지치고 핍절된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욥은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 조차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욥은 이전부터 자신이 고난당함으로 곧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10:20-22).

그리고 그는 현재와 같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음부에

숨겨달라고, 즉 죽음에 이르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었다(14:12, 13).

 

욥17: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욥의 주위 사람들, 세 친구들의 비난과 책망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충동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라'는 '쓰디씀', '괴로움' 등의 뜻으로서(출 15:23)

욥의 괴롭고 씁쓸한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욥17: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담보물'이란 일반적으로경제적인 상호 거래를 위한 물질적인 계약 증표를 가리킨다

(창38:17-20, 출22:25, 26, 느 5:3). 따라서 본문은 욥이 하나님께

그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보증할 수 있는표를 주십사 하는 의미이다.

 

한편 '손을 잡아주다'란 어떤 사람이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으로

보인다(잠 6:1, 17:18).

 

욥17:4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욥의 친구들이 스스로의 경험, 전통,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J.E.Hartley) 본절 하반절을 '당신이 높임을 받지 못하시리이다'로 해석함으로써,

마치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끝까지 신뢰하고자 하는 욥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 본문처럼, 무죄한 자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종국적 패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는 시편에 자주 나타난다(시 13:3-5; 30:1,2; 38:19-22; 41:1).

 

욥17:5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

 

잠언적인 성격을 띤 문구로서 독설로 욥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친구들에게 징벌이 임하기를

바라는 말이다. 이는 친구들에 대한 욥의 적개심이 매우 컸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역본 RSV는 본절 전반절을 '그들의 재산을 나누기 위해 그의 친구들을 고발하는 자는’

(He who informs against his freinds to get a share of their property) 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NIV는 이를 '어떤 사람이 보수를 위해 친구들을 공격(비난)한다면’

(If a mandenounces his friends fot reword)으로,

KJV는 '그의 친구에게 아첨하는 자는'(Hethat speaketh flattery to his freinds)로 번역한다.

 

욥17:6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본문에는 주위 사람들의 모욕과 경멸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주권 사상이 암시되어 있으며, 아울러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안타까운 호소도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10:2-13; 13:23-28).

 

욥17:7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 이는 극심한 고통과 슬픔으로 인해 소위

'눈앞이 캄캄하게'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는 16:16에서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라고 고백한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시 6:7).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 여기에서 '온 지체'의 히브리어 '야추르'는 '구조물', '사지',

'뼈대'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의 온 뼈대가 약하고 야위어서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음을 뜻한다 하겠다(시 31:9, 10).

 

한편 성경에서 그림자는 종종 인생의 허무함 또는 연약함, 비련함 등을 나타내는 데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8:9; 시 39:6; 102:11; 109:23; 144:4; 전 6:12).

 

욥17:8 정직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죄 없는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 때문에 분을 내나니

 

정직자는 이를 말미암아 놀라고 - 욥과 같이 의롭고 흠이 없는 자가 창졸간에

그토록 엄청난 재난과 시련에 내던져짐을 인하여 정직한 자들이 놀란다는 뜻이다.

 

여기서 '놀라고'의 히브리어 '솨멤'은 '아찔하다', '마비되다', '소스라치게 놀라다'라는 뜻으로

의외적인 사실로 인해 크게 놀람을 가리킨다.

 

욥17: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 본문 서두의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는 경우에 따라서 약간 달리 번역된다.

영역본 KJV는 '또한'(also)으로, NIV는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로,

RSV는 '그러나'(Yet)로 각각 옮기고 있다.

 

그러나 앞의 내용이 의로운 자인 욥이 큰 시련과 고난에 봉착하였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의미로 번역됨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즉 욥에게 닥친 상황은 심한 회의와 좌절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탈선의 길로 가지 않고 끝내 정도(正道)를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 즉, 의로운 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그의

올바름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더욱더 강해진다는 뜻이다(잠 4:18).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 또한 하나님이 의인에게 축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소망을 지닐 수 없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회복을 기대하는 투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초점은 욥의 회복에 대한 기도보다는

자신의 결백에 대한 호소에 더욱 집중되어 있다. 한편 본문의 '손이 깨끗한 자'란

죄악과 손을 잡지 않는 의롭고 정결한 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시 18:24; 24:4; 약 4:8).

 

욥17:10 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앞에서 엘리바스는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한 바 있으나(15:9, 10)

본문에서 욥은 그들의 지혜가 아전인수 격인 편견에 불과하다고 공박한다.

 

혹자는 욥의 이 말을 친구들로 하여금 돌이켜 욥에게 위로하고 동정하는 태도를 갖도록

요청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할테면 해보라'는 식의 빈정됨으로 봄이 나을 것 같다.

 

욥17: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엘리바스에 대한 두 번째 변론을 마무리하면서(11-16절) 욥은 절망에 사로잡힌 채

음울한 죽음만 기다리는 심정을 토로한다. 한편 본절의 내 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지모티'는 문자적으로 '나의 계획들'(my plans)이라는 뜻으로서,

뒷문구인 '내...사모하는 바'와 함께 욥이 품었던 소원, 목표, 욕망 등을 통칭한다.

 

욥17: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본문에서 '밤'이란 하나의 은유적 표현으로서 욥이 당하는 바 고난과 질병의 고통을 뜻하며

'낮'도 역시 같은 문장 기법으로서 고통과 질병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 후반부의 '빛이 어두운 데 가깝다'는 말은 칠흑의 어두움이 지나면

곧 동이 터온다는 사실에서 착안된 것으로서,

여기의 '빛'과 '어두운 데' 역시 앞의 '밤'과 '낮'과 종일한 의미를 내포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본절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경우, 욥이 죽기 전에 곧 좋은 상태로 회복되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친구들의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5:17-26; 8:20-22; 11:13-19).

 

욥17: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욥17: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욥17: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 본문은 앞의 두 구절들(13, 14절)의

귀결절로 보인다. 본절의 '소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13절에서와는 달리 '티크아'로서

문자적으로는 '묶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끈', '기대', '소망' 등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소망'이란 현재의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아울러 그의 결백함을 입증받는 것을 뜻한다.

 

욥17: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내려갈 뿐이니라 - 이는 15절을 강조하는 부연 설명으로서,

욥이 죽어 구덩이에 묻히고 음부에 내려갈 때에는

그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는 뜻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