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전12:8 2026.01.04. 핵심감정 12강.
전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핵심감정’ 시리즈 설교를 사실은 작년에 끝낼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를 못했어요.
마지막 <허무>에 대해서 오늘 배울 텐데요.
정리하면, ‘핵심 감정’이란, 신앙생활을 그냥 열심히 하는 것으로만 신앙생활이 되는 게
아니고, 생각해야 되고요. 생각은 되게 중요하잖아요.
신앙생활은, 생각하면서 ‘내가 이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까?
이 말씀이 나한테 어떤 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이제 생각해야 된단 말이에요.
생각은 너무나 중요해요. 그래서 신앙이 성장한다는 거는,
단순히 열심히 교회 다니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이 성숙할수록 자신을 알게 돼요.
나 스스로 내가 나를 아는 것이 얼마나 한계가 있겠어요.
나 스스로 나를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겠어요? No
또 ‘객관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이해도 되게 중요하겠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 그것을 알아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관계를,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우리의 자리매김을
더 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허무”에 대해서 살펴보는데,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의 말을 먼저 인용합니다.
이분이 예일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25살 된 아들 에릭이 등산하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돼요.
이분은 철학자이면서 되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래서 이분이 되게... 그 아들을 애도하면서 쓴 책이 유명한데,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의 죽음이 내게 주는 고통은
내 아들의 죽음이 그분에게 주는 고통이며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그분의 고통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한번 여러분들이 천천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핵심 감정 “허무”는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가요?
니체가 말하는 허무, 허무주의는.. 무의미하다고 우리는 느낄 때가 많죠.
‘인생은 너무 무의미해.. 그리고 내가 하는 일도 너무 의미가 없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근데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무의미예요.
의미라는 거는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허무주의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에요.
근데 이거하고 사람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무슨 철학적 허무주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핵심 감정이, ‘허무’로 형성되는 사람도 있다는 거죠.
제가 처음에 설명드릴 때, 핵심감정을 이렇게 설명했잖아요.
쌀 포대가 있으면, 그걸 어디를 푹 찔러보면 다 쌀이 나온다고...
쌀 포대의 왼쪽을, 오른쪽을, 아래를, 위에를 어디를 찔러도 쌀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의 ‘핵심 감정’이라고 하는 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한 사람 안에.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굉장히 주도적인, 대표적인 그 어떤 것이 있으면,
쉽게 말하면 억울함이 핵심감정인 사람은.. 범사에 억울하잖아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억울해 합니다.
옛날에 제 친구가 생각나는데, 짜장면을 먹으러 가면,
맨날 이렇게 보고 자기 그릇에 담긴 면이 작게 나왔다는 거예요.
그럴 수 있겠지요. 주방에서 정량을 무게 달아가지고 주진 않잖아요. 대충 눈대중으로 담죠.
근데 왜 맨날 자기 그릇에 담긴 면발이 작겠어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억울한 감정이 일종의 이런 거죠. 그런 것들이 다양하거든요.
근데 그런 면에서 우리 각자가 ‘내게 이런 부분이 있는 거구나’
그러면 그게 목엣가시 같아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한테 억울하고 섭섭한 게 되게 많이 생겨요.’
근데 그 문제를 풀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억울하게 하시는 분인가요? No
그건 자기 문제인 거죠. 자기가 어릴 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그게 자기 핵심감정으로 자리잡아 버린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핵심감정을 12가지로 뽑아서 살펴보았습니다.
열등감, 억울함, 불안함, 분노,
소외, 부담감, 그리움, 경쟁심,
두려움, 슬픔, 무기력, 그리고 허무.
이것들이 다 그런 역할을 하거든요.
이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우리의 모습인데요.
복음은 이거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요. 근본적으로 해결해요.
제가 말하는 거는,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상담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상담을 부정하는 거는 아니에요.
또는 내가 때로는 정신과 약을 먹을 수도 있어요. 그걸 부정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근본적으로는 ‘복음은 이걸 치유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핵심 감정들이 나오는 게 뭔가 하면,
사실은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죄가 만들어낸 수치심과 두려움의 문제, 여기서 파생되는 많은 것들이죠.
그럼 예수님께서 죄의 권세를 멸하려 이 땅에 오셨다고 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셔서,
지옥 갈 인생을 천국으로 가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심플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죄의 결과로 삶이 다 망가져 있잖아요. 사실은 정상이 아니라고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렇게 얘기하다가 ‘저 사람은 좀 이상한 거 같아’ 그럴 때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의 반대 쪽을 쳐다보고
자기 검지손가락을 얼굴로 들어올려 까딱 움직이면서, ‘미링’ 그러거든요.
정상이 아니고, ‘기울어졌다’는 뜻이지요. 그가 비정상이란 욕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예전에 ‘(머리에) 꽃 달았네’ 했습니다. 정신이 이상하다는 거죠.
뭐 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은,
이런 약함과... 약함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악함(죄)도 있어요.
그래서 이것들이 점점 완전, 온전해져 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허무’의 핵심 감정은,
양육자의 급작스러운 상실을 초기에 경험했을 때 시작합니다. 그때 생기기가 쉽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너무 어린 시절에, 18개월이든 20개월이든 간에 아주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었어요.
톨스토이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후에 할 건데, 그런 케이스죠.
그러면 이런 상실의 경험, 내게 우주와 같았던 어머니, 아기들에게는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어머니를 잃어버렸어요. 그럴 때 생길 수 있는 것이라는 거죠. ‘허무’가.
그래서 6~18개월 어간에 보통 애착관계가 형성되는 기간이라고 보는데,
주요 대상과의 관계인 부모를 잃어버린 거예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하게 되죠.
‘왜 하나님? 하나님 왜?’ 이렇게 질문을 하게 되잖아요.
고난과 고통은 신학자가 되게 하잖아요.
신학적 질문을 하지 않던 사람도, 신학적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아기가 그랬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기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겠어요?
갑작스럽게 엄마, 아빠를 잃어버렸을 때,
그때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질문을, 아기는 못 하죠.
그러면서 이런 ‘허무’가 자기 핵심 감정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 감정 중에 ‘무기력’은, 어둡고 무기력한 느낌을 준다는 면에서 특징이 있다면,
핵심 감정 ‘허무’는, 매사에 초연하고 덤덤한 느낌을 많이 주는 거죠.
그러니까 마치 불교에서 해탈한 사람처럼,
‘그게 뭐 중요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지’ 한다는 거죠.
그래서 혼자 있는 게 힘들지도 않아요.
자기의 양육자 상실에 더 큰 (허무) 감정이 형성되고,
좌절시키는 대상이 부재 不在하기 때문에, 적개심이 덜 발달되기는 하죠.
그러니까 나한테 자꾸 ‘줬다 뺏었다, 줬다 뺏었다’ 하는 존재가 아니고,
그 존재가 아예 없어요. 그냥 그래서 의존적인 사랑의 욕구도 낮아지겠죠.
자기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것을 성취하려는 의도도 거의 없고,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핵심 감정 ‘허무’는 혼자 노는 경향이 큽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관심을 두는 건, 초월적 세계입니다.
이미 저 세상을 사는 것 같은 태도로, 삶의 어떤 역경도 덧없어 합니다.
세상을 등지는 수도자 같은 경향, 현실을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죠.
이런 것들이 한편으로 신앙적인 영역에서는 되게 좋은 신앙인으로 간주될 수도 있죠.
그리고 이런 것들이 매개가 돼서 사실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죠.
진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죠. 그런 길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세상을 등진다는 개념, 그래서 절로 들어간다,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겠다.. 이러기가 쉽다는 거죠.
물론, 절에, 수도원에 들어가신 분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요.
‘허무’를 자기 핵심 감정으로 가진 사람들이, 그러기 쉽다는 겁니다.
▲핵심 감정 ‘허무’의 주요한 느낌과 호소 중 하나는,
세상에 덩그러니 나 혼자 던져진 느낌이 강합니다.
핵심 감정 ‘허무’의 주요한 태도는, 초월한 듯이 세상을 관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냉랭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뭔가 의미 있는 관계의 진전, 의미 있는 관계들을 별로 원하지도 않아요.
핵심 감정 ‘허무’는, 그를 대하는 타인의 노력과 섬김을 허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좀 뭔가 의미있게 좀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가 그걸 안 받아주는 거죠.
그래서 지쳐요. 도우려고 하는 사람이 지칠 수 있죠.
그래서 생활력도 떨어지고요. 경제활동을 할 의욕이 떨어져 있는 거죠.
핵심감정 허무를 가지고 있어도,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죠.
그냥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냥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거지’
그러면서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다닐 수는 있겠죠.
일반적으로는 생활력이 떨어지고, 또 주변 사람들과 정서적인 공유가 안 되니까
그런데 가족하고는 같이 살아야 되는 거잖아요.
가족 중에 만약 이런 사람이 있게 되면, 그의 가족들은 상당히 지치게 되죠.
그리고 직장에서 자기 업무에서도 나태하고, 관심도 의욕도 부족하니까,
제가 이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 거죠.
▲근데 만약에 여러분이 ‘핵심 감정 허무가 나하고 좀 관계가 있는 거 같은데’ 그러면
좀 더 현실적인 목표들을 세우면서, 해결하려고 기도하며 몸부림 쳐야 합니다.
근데 장점도 있어요. 핵심 감정 허무의 건강한 면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엉뚱한 일에,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죠. 그게 큰 의미가 없으니까!
쉽게 타인에게 져 주고, 타인의 의견이나 태도도 문제될 게 없어서 포용적이에요.
그리고 내 것, 내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남의 것에 탐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와 다투지도 않죠.
남의 것을 내 거라고는 안 하지만, 내 것을 쉽게 내주기도 하죠.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되게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어요.
내가 완전히 외톨이로 살겠다고 하지만 않는다면, 이 사람은 되게 호인이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현실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며, 내세나 초월적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경우,
그래서 이게 기독교 신앙하고도 일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인 것 자체를 힘들어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지내는 느낌을 줍니다.
핵심감정 ‘허무’를 지닌 사람을 만나면, 적개심이나 지배욕, 조종 manipulation 등은
그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들죠.
예를 들어서 내 배우자의 핵심감정이 '허무'라고 생각해 보세요.
배우자의 관계는 참 묘한 거잖아요. 서로가 무의미할 수는 없는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다툼, 부부싸움이라는 게 얼마나 많이 존재합니까?
근데 부부사이에서 지배, 조정.. 이런 것도 별로 없고요. 뭘 성취하려는 의도도 별로 없어요.
관심사는 초월적 세계로, 세상을 등지는 수도자 같은 경향이 우월하게 많이 나타난다는 거죠.
▲그럼, 이런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초월적 하나님입니다.
세상을 달관한 것처럼 행동하는데, 그러니까 뭐 아주 세상을 떠난 사람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고, 천국과 내세에 있겠죠.
당연히 그래서 성경에서 ‘너희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라고 얘기하면,
정말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아주 레디컬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과 등지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영성 이런데 관심이 많고, 수도원 생활 이런데 관심이 많은 거예요.
톨스토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톨스토이는 기독교인이었지만,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할 만큼
제도화된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반한
자신만의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 신앙을 발전시킨 독특한 기독교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교회와 국가 권력을 비판하며, 원시 기독교의 단순한 사랑과 비폭력, 도덕적 삶을
강조하는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정통 기독교가 아니었어요.
그는 생후 23개월에 어머니를 여의고, 9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할머니가, 13세에는 자기를 돌봐주는 고모도 돌아가셨습니다.
사실 옛날에 유럽에서도, 우리 한국 사회도 그렇고,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실을... 나중에 되게 슬프게 회고해요.
「나를 작게 만들어 상상 속 어머니에게 매달리고 싶다.
(그러니까 톨스토이가 아기가 되고 싶다는 거죠)
말을 할 줄 몰라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엄마,
지친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엄마, 이리와 나를 안아주세요.’」
그러니까 작가로서 토스토이는 나중에 회고하면서 이런 표현들을 쓰는 겁니다.
톨스토이가 처음에는 예술 영역, 미술이나 이런 쪽에서 되게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노년에 아주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모를 하게 되죠.
근데 거기에는 핵심 감정 ‘허무’가 작용했을 것이라고도 봅니다.
또 이런 회고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무나 고상하고 순수하며 영적인 존재다.
나의 장년기에 물리치기 힘든 삶의 유혹과 싸울 때
나는 어머니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는 언제나 나를 도와주었다.」
그러니까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이런 엄마에 대한 그리움..
유아기에 엄마와 아버지를 상실했던 이 경험이,
특히 핵심 감정 ‘허무’의 주요한 이유가 됐고,
그것 때문에 그는 기독교의 눈을 돌려서,
어떤 내세적, 초월적 이런 부분들을 사랑했던 사람인 것 같아요.
▲핵심 감정 ‘허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인물은 솔로몬이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러서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를 하나님이 데려가시잖아요. 이게 이제 솔로몬의 형이잖아요.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어본다면,
솔로몬은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셨어요. 솔로몬의 엄마가 밧세바죠.
근데 솔로몬이 엄마의 돌봄을 받고 자라면서, 엄마 밧세바를 잘 지켜봤을 거 아니에요.
근데 왕궁에서 사람들은 다 알아요.
어떻게 해서 자기 엄마(밧세바)가 왕궁으로 들어오게 됐는지를 알 거 아닙니까?
그리고 심지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지도
왕궁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거 아닙니까?
사실 밧세바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굉장히 힘든 왕궁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죠.
그걸 어린 솔로몬이 다 보고 자란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런 면에서 보면, 솔로몬이 엄마를 통해서,
이제 얼마나 돌봄을 잘 받았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애착관계가 각별했겠죠. 주위에 사방의 눈초리가 매서우니까요.
솔로몬이 1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뭘 줄까?’ 라고 말씀하니까
권력을 구하지 않았고, 부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에 세상을 달관한 거예요.
왜 이걸 솔로몬을 핵심감정 ‘허무’와 연결시키냐 하면,
이 사람처럼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 사람은
성경 어디에도 없잖아요.
그런데 솔로몬이 아주 놀라운 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졌던 사람이거든요.
가장 많은 것을 누렸던 사람이거든요. 근데 ‘헛되다’고 얘기하는 거죠.
솔로몬이 수많은 잠언을 짓고, 책을 지은 것도,
이것도 혼자 지내니까 다 되는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왕자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지만,
어머니가 (아울러 자기가) 당하는 괴로움을 보면서, 그 권력의 허무를 느꼈겠죠.
그래서 ‘다 물렀거라. 인생은 허무하도다’ 어려서부터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핵심 감정 허무의 치유
핵심 감정이나 믿음은 모두 성향이고 습관이에요. 이게 되게 중요한 말인데요.
제임스 K. A. 스미스 라는 기독교 철학자가 있는데
<습관이 영성이다> 라는 좋은 책을 썼어요.
근데 ‘핵심 감정’은 습관인데, 어떤 습관인가 하면,
내가 아기 때부터 경험을 하면서, 나에게 습득된 그런 습관인 거죠.
그냥 감정이 생기는 게 아니고, 내가 겪어온 많은 일들을 통해서
나의 핵심 감정으로 형성이 되는 거예요.
근데 믿음도 습관이에요. 이거는 주입된 습관이에요.
바깥에서 나에게 그냥 탁 던져진, 주어진.. 이 말은 무슨 말이겠어요?
우리가 내가 살아오면서 겪으면서, 나의 성품도 인격도 형성이 돼요.
그 중에 핵심 감정이 있겠죠.
힘이 있어요. 힘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무슨 일을 만나도, 그 핵심 감정이 작동을 해요. 반응을 해요.
그런데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진짜로 나의 것이 됐어요. 그런데 핵심 감정과 달리 이거(믿음)는 그냥 주어진 거예요.
외부에서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바로 믿음으로 반응을 하고,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 다운 반응을, 믿음으로 바로바로 하진 않아요.
종종 우리는 지나고 나면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반응하지 못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믿음이 습관’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안에서 핵심 감정만큼이나 힘을 가지고 내 삶에 영향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을 경험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습관으로써.
근데 그 전에 믿음이라는 게 그냥 ‘주여, 믿사오니’가 아니라, 믿음은 세계관이에요.
믿음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내 가치관의 가장 근저에 있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인생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힘이 있어요.
근데 그런 관점을 배워야 되는 거죠. 어떻게 배워요? 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거예요.
성경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지,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사의 모든 것들을, 성경이 가르치는 관점을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배운 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실행도 하고, 그걸로 선택도 해보고, 결정도 해보고,
이런 과정들이 없으면, 시간이 아무리 몇 십 년이 지나도,
교회에서 살아온 시간이 오래 지나도, 그 사람에게 신앙은 힘이 없죠.
여전히 내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그 내 방식이 뭐예요?
그게 자기의 핵심 감정이에요.
저는 사실 ‘어떻게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가?’
이게 저한테는 제일 큰 관심이에요. 저 자신에게도 그 질문을 던지고,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그 질문을 던져요.
‘왜 이분은 이렇게 성장을 할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가 이렇게 일어날까?’
‘왜 저 분은 신앙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되게 많은 질문을 해요.
그 질문이 제 머리 속에 꽉 차 있어요.
근데 여기서 지금 얘기하고 있는,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이해, 사람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내가 그걸 배우고, 그렇게 적용해보고, 그렇게 살아보고...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해요.
▲또한 습관은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되는 정서적인 지식이에요.
습관은 정서적인 지식이예요.
그래서 성경을 통해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정서가 변하는 거예요.
단순히 이게 지식으로만 딱 떼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지’ 조직신학적으로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내 삶에서 습관이 되어가면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정서적 지식이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것이,
‘그냥 선하시지, 그럼 뭐 악하시겠어?’ 이런 게 아니고,
그 선하심을 내 삶 속에서 계속해서 씨름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에게 체득되고, 정서적 지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죠.
이때 우리 신앙이 힘을 가지게 되는 지점이에요.
▲'믿음의 눈으로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이게 되게 중요한 거에요.
그걸 하셔야 돼요.
드라마를 보실 수 있고, 영화를 보실 수 있고, 소설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들을 보면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것에 대해서 내가 가지는 관점은 뭘까?’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하는 거죠. 그 내용을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소위 비평을 하는 거죠.
그래서 세계관을, 우리가 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믿음) 수준 밑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직감적으로 내가 반응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정서적인 틀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고, 거부하고,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이
핵심 감정 '허무'의 정서적인 반응이에요. 집착하지 않아요. 보내버려요.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요.
이런 습관이 굳어지다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는
가능성이 있는 거죠. 저 세상에 관심이 있으니까,
핵심감정 허무는 ‘자기 곁을 잘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핵심감정 ‘소외’와도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과정을 함께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겠어요?
내가 누군가와 깊은 관계 속에서, 그래서 힘든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관계,
대개는 부부가 그렇죠. 그런 관계가 필요하죠.
근데 교회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참 좋죠.
그래서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나와 다른 반응과 태도를 보여줄 대상,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필요해요.
나에게 맨날 ‘맞아 맞아’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래야 내가 깎이고, 내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돼죠.
▲오늘 논의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이거예요.
이런 사람을 도우려면 기다려야 돼요. 공명이 일어나는 순간을 기다려야 돼요.
핵심 감정 허무인 사람이, 자기가 사실은 ‘엄마가 미웠다’고,
그걸 깨닫고 표현하게 되는 시점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이 사람은 적개심이 없다고 했잖아요. 근데 내 안에서 그걸(적개심) 보게 돼요.
사실은 정말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점,
사랑받고 싶은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회피하는 거예요.
근데 내가 감정으로 뭔가를 느끼기 시작해요. 그런 시점이 온다는 거죠.
자신이 그 사랑을 얻기 위해, 구걸하는 거지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시점,
사실 힘든 시점이죠. 근데 그때 옆에 누가 있어야 돼요. 그러면 도움이 되죠.
그래서 이런 변화는, 평가나 판단받지 않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자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데,
저는 그게 교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교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안전한 교회.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세요. 핵심 감정 ‘허무’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이 있어요.
그날도 그분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도 평범한 설교를 통해
성령님께서 그 심령 가운데 어떤 것을 만지시고, 다루셨습니다.
그럴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죠.
그래서 이 핵심 감정 허무도 있고, 전체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핵심 감정이 어떻게 죄의 이란성 쌍둥이인 수치심과 두려움과 연결되는 지점이 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게 그냥 감정의 문제다’가 아니고, 죄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거든요.
근데 죄가 인간에게 가져온 즉각적 결과는, 수치심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수치심과 두려움은 다양한 방식(여러 핵심 감정)으로 표출될 수 있겠죠.
그리고 복음이 두 번째는, 어떻게 수치심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빚어내는 핵심 감정을
치유하는지, 저는 여기에 우리 모두가 다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실험이라기보다는
이걸 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가 정말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게 교회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그게 돼야 된다는 거죠. 교회밖에는 그게 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전제가 필요하겠어요?
교회인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충분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일 때, 교회는 치유에 안전할 겁니다.
점점 그렇게 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처럼, 여기를 딱 들어오면 ‘뭔가 숨이 안 쉬어져 답답해...’
처음에는 그러다가, 점점 교회를 다니다가 보면,
어느 날 교회에 들어오면
‘아,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아.. 복음의 공기를 좀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뭐겠어요? 세상은 다 경쟁을 부추기고, 능력자를 우대하고...
근데 판단과 정죄 그런 것들이 아니라,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런 기운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그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믿어요.
그리고 우리는 더디고 버벅대고 하기는 하지만, 그 길을 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 교회가, 저 목사가?’
그렇게 허무주의로 그러지 마시고,
그냥 순종하면서 이 길을 한번 잘 걸어가 봤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지켜보면서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