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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24장 엘리바스의 세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II

LNCK 2026. 1. 1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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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세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II            욥24:1~25                   2006-10-31

   "하나님은 어찌하여 심판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

 

욥기의 중반 24장 이후부터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인다면, 욥의 날카로운 사회 의식입니다.

친구들은 인과율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는 반면에

욥은 자기 외에도 이같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욥의 안목은 점점 넓어져 개인적인 질문들을

사회적이며 예언자적인 것들로 확대시켜 날카로운 예각을 세우게 됩니다.

 

이미 이러한 조짐은 악인의 필망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친구들에 대하여

정반대의 현실을 폭로하며 반박할 때부터 움트기 시작했습니다(21장 참조).

 

이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시야를 넓혀 마침내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이웃들의 고통까지 끌어안고 고뇌하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24장은 부자와 세도가에 의해 억압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셋째 마당 3rd round 의 대화를 보면, 친구들과 욥의 발언이 경계선이 불분명해집니다.

긴 시간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혈전을 벌여서 그런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논점이 흐려집니다.

 

권투 시합에서 3회전 동안 사투를 벌여온 선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소모되어 자주 클린칭을 하고

주먹이 서로 엉겨붙어 나중에 누구의 주먹인지 알 수 없게 되는 형국처럼 되고 만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24:18-25절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이 욥이 엘리바스에 응답한 말씀 안에 들어가 있지만

욥의 평소 주장과 잘 맞지 않기 때문에, 흔히 소발의 발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셋째 마당의 논쟁에서 소발의 이름이 빠졌다는 사실과,

이 부분의 내용이 악인의 필망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소발의 주장(20장 참조)

엇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주장하고 있는 악인의 일시적 번영과 급작스러운 멸망은

빌닷의 주장(18장)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발의 발언이라고 단정짓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셋째 바퀴의 설전이 진행되는 동안 유독 소발만 빠져 있기 때문에,

소발의 발언으로 유추하는 것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성경의 원문 그대로, 욥의 발언이라고 보는 것도 틀린 견해는 아니며,

저는 이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욥 역시, 친구들의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고,

더욱이 친구들이 내뱉은 진리의 말을 비꼬듯이 인용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악인에 대한 심판의 날은 언제?         24:1

 

23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 문제를 추적했다면,

24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 문제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때를 정하셨다면

억압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1절).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날을 미리 정해두셨다면

악인은 두려워서 함부로 악행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안에 있습니다.

(행1:7 참조)    또한 하나님께서 심판을 더디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를 오래 참으셔서 긍휼과 자비로 기다리시는 까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벧후3:8-13절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벧후3:8-13

 

◑2.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이웃의 참상                  24:2-25

 

21장에서 욥은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악인의 장수와 번성에 대해서 전율했습니다.

22장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24:2-12절에서 욥은, 무죄한 사람들이 악인에 의해 당하는 참상을 아주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서 엘리바스의 주장을 다시 반박합니다.

 

여기서 무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없이 많다는 동료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더욱이 이 고통이, 부자와 권세가에 의한 조직적인 약탈과 착취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회적 고발의식이 두드러집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누구나 다 어떤 정의감 때문에

혀를 차고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 정도로 리얼합니다. 2-12절을 보세요.

 

"경계선까지 옮기고 남의 가축을 빼앗아 제 우리에 집어 넣는 사람도 있고,

고아의 나귀를 강제로 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부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과부의 소를 끌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가난한 사람들이 권리를 빼앗기는가 하면, 흙에 묻혀 사는 가련한 사람들이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서 숨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나귀처럼 메마른 곳으로 가서, 일거리를 찾고 먹거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먹일 것을 찾을 곳은 빈 들뿐이다.

(빈자들은) 가을걷이가 끝난 남의 밭에서 이삭이나 줍고,

악한 자의 포도밭에서 남의 것이나 긁어 모은다.

 

잠자리에서도 덮을 것이 없으며, 추위를 막아 줄 이불 조각 하나도 없다.

산에서 쏟아지는 소낙비에 젖어도 비를 피할 곳이라고는 바위 밑밖에 없다.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를 노예로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빚을 못 갚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지도 못한 채로 헐벗고 다녀야 한다.

(부자의) 곡식단을 지고 나르지만, 굶주림에 허덕여야 한다.

 

올리브로 기름을 짜고, 포도로 포도주를 담가도, 그들은 (못 먹고) 여전히 목말라 한다. *노동

성읍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 들은 체하신다."

 

아, 억압자와 피억압자, 수탈자와 피수탈자의 물고 물리는 참상을

이 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을까요!

이들은 부와 권력을 독점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대합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모순과 부조리는

생산자가 응당 누려야 할 생산의 이익을 제 몫으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식량과 포도주를 생산하는 사람이, 굶주리고 목말라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집 없이 떠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못된 짓을 골라하는 악인들은 13-17절에 보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주로 한 밤중에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같이 한낮을 무서워하고 한 밤중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은 오늘까지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고난의 참상을

일거에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12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귀와 입을 닫고 침묵만 하신다고 한탄합니다.

 

욥이 자기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 소송을 걸 듯이 다 털어놓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다시 냉정한 현실로 돌아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엄폐,

소리 없는 하나님의 침묵에 화들짝 놀라듯이, 마치 하나님이 없기라도 하듯이,

이와 같은 악행이 너무나 당연하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탄식이지요!

 

희망에 들뜬 상승과 절망에 사로잡힌 좌초, 이것이 욥이 자기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 때마다 매번 경험하는 시소놀이의 역설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결국 1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언제냐?’고 묻는

욥의 울부짖음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맥락에서 18-25절을 보면

욥이 세 친구들의 말을 종합해 풍자적으로 인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발의 말이 아니라

 

물론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욥 자신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친구들이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이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빌닷이나, 특히 소발의 발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만,

이렇게 천인공노할 악인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염원하는 욥의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욥이 죄없이 억압과 수탈을 당하는 모든 이웃들과 자기를 동일화할 때

이와 같은 악인의 졸속한 멸망에 대한 기대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악인은 잠시 동안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린 나무처럼 망하고 말 것이며

결국 구더기 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들에게 안정을 주셔서 그들을 평안하게 하여 주시는 듯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낱낱이 살피신다. 악인들은 잠시 번영하다가 곧 사라지고,

풀처럼 마르고 시들며, 곡식 이삭처럼 잘리는 법이다"(23-24절).

 

욥이 1절에서 염원했던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희망이지요!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욥기를 읽을수록 놀라는 것은, 욥의 지평이 날로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처럼 부당하게 고난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본격적으로 체감하고

대담한 필치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욥이 서술한 내용 그대로 비참한 현실에 빠진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는 물론이고,

공산주의와 전제주의의 억압 속에 신음하는 국민들은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한 정권의 압제하에 굶주리고 헐벗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욥이 이러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합니다.

 

"가재는 게 편이다"라는 속담처럼, 자기가 부당한 고난을 당하기에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품고 옹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 우리는 욥이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온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서 봐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욥이 불의한 자들의 악행을 가차없이 고발할 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정의 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부당하게 학대하는 쪽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한문으로 '평화'(平和)라는 말을 뜯어서 분석해보면

골고루 한다는 '平'자와 벼 '禾'와 입 '口'가 연합된 화목할 '和'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밥이 입에 골고루 들어가게’ 함으로서 두루 화목해진다는 의미이지요.

오늘 우리는 부당하게 억압받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사65: 21-22).

 

♣관련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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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4장 절별 해석

 

욥24: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

여기서 '때'(이팀)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이다(15:32; 18:20).

그날은 악인을 위해 준비해 둔 형벌이 쏟아진다(21:19).

 

본문에서 욥은 악인에게 곧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욥에게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했을 것이다.

 

첫째는 악인들이 더욱 기세 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신실하게 생활허던 자들이 낙심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편파적이고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욥이 현재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그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 혹은 보응의 원칙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적용된다는 것이다.

 

욥24:2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이제 욥은 악인이 오히려 번영하고 있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고대 동방에서는 이웃하는 땅의 경계를 담이나 울타리를 쌓지 않고,

돌이나 바위 등을 경계선 자리에 놓아 표시하였다. 이러한 지계표를 옮김으로써

이웃의 토지를 부당하게 빼앗아 소유하려는 죄악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저주받는 것으로

금지된 사항이다 (신19:14;27:17).

 

또한 이것은 지혜서(잠22:28; 23:10)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호5:10)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일로 죄악시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작 행위는

개인의 소유를 약탈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 '빼앗다'의 히브리어 '가잘'은 '벗기다', '잡아뜯다', '강탈하다' 이며,

'기르며'는 '방목하다', '풀을 먹이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은 양떼를 강제로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뻔뻔스럽게도 탈취한 양떼를 공개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다는 의미이다.

 

욥24: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 '몰아가다'의 히브리어 '나하그'는 '몰다', '끌어내다'란 뜻이다.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는 나귀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자 유일한 노동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귀를 약탈하는 행위는 고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 원문에는 '소' 앞에 '멍에 메인' (알람)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여기서 '소'(쇼르)는 농경에 필요한 황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볼모잡다'의 '하발'은 '담보물로 속박하다'는 뜻으로 과부의 생활 밑천인 황소를

저당물로 빼앗음을 의미한다.

, 아주 적은 부채를 이유로 과부의 전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는 것을 시사한다.

 

특히 그 재산이 의지할 곳 없는 과부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죄악의 무게를 더해 준다.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외층인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율법은 그들의 송사(訟事)를 억울하게

하지말고(신27:19; 사1:23), 또한 그들으 재산을 전집(典執)하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 24:17).

 

욥24:4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길에서 몰아내나니 - 빈궁한 자들을 자기들이 다니던 길로부터 밀어내어 방황하도록

만들거나, 약탈 행위로 인하여 그 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가난한 자들은 압제자들에 의해 길에서마저 쫓겨 다녀야 했다.

 

혹자는 본문을, 가난한 자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나

그 근거가 희박하다

 

다 스스로 숨는구나 - 그들은 압제를 피하여 '땅'(에레츠)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배자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깨닫게 한다.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삿 5:5; 암5:11-13).

 

욥24:5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공동번역 : 들나귀처럼 일거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행여나 자식들에게 줄 양식이라도

있을까 하여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저 모양을 보게.

 

그들 - 에 대해서 혹자는 2-4절의 '사악한 자들' 곧 '약탈자'로 생각하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압제자들로부터 억압받는 가난한 자 (4절)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Delitzsch, Driver, Gray, Lange, Tyndale, Pope, Hartley).

 

본절에서 욥은 피압제자들의 상황을, 험난하고 메마른 스텝 지역에서 소량의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는 들나귀의 모습에다 비겨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39:5; 호8:9).

 

광야가... 식물을 내는구나 - 여기서 '광야'(아라바)는 '건조한 땅', 또는 '사막'을 가리킨다.

혹자는 '아라바'를 '에레브'로 보고 '밤'이라고 옮긴다,

이럴 경우 본문은 '그들이 밤늦도록 수고해도 아이들을 먹일 음식을 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하다.

즉,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서 칭얼대는 자식들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나설 곳이라고는

광야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LB, They are sent into the desert to search for food for their children)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사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음식조차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 허덕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분명 욥의 눈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사악한 자들의 압제로 인한 결과로 보였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욥은 그러한 불의(不義)를 가만히 두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24:12, 22, 23).

 

욥24:6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 '남의 곡식'의 히브리어 '벧릴로'는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1) 고르디스(Gordis)같은 학자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유사하게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곡식'으로 옮긴다. 이 경우에는 가난한 자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도둑질을 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름을 암시한다.

 

2) 이 말을 '섞다', '혼합하다'란 뜻의 '발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혼합된 가축 사로'(mixed fodder)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이 해석은,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가축 사료로나마 배를 채워야했다는 뜻이다.

 

3) 본절 하반절의 '악인'과 대구를 이루게 하기 위해, '벧릴로'를 '악한' 이란 뜻의 '벧리알'로

읽는다.

 

4) 이 말을 '밤에'(in the night)란 뜻의 '발라엘라'로 읽는다.

 

이중 1)과 2)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 직역하면 '그들이 사악한 자의 포도원에서 남겨진 것을 따다'.

이는 가난한 자들이 심지어 악인의 밭에 남겨진 것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꼴이 되었다는 뜻인 듯하다(LB, glean in the vineyards of the wicked).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확을 얼마 남겨두는 규정은 율법에도 있다(레 19:10; 신 24:21).

그러나 악인이 가난한 자를 위해 열매를 남겨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렇게 곡식을 모아봤자 가족의 굶주림을 해결할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악인'이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괴로움이 더욱 가중되었을 법하다.

 

욥24: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6절에 이어 본절과 8절에서는,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문제

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입을 옷이 없는 것은 워낙 가난해서이기도 했지만,

악인들에게 볼모잡힌 것을 돌려받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9절).

 

욥24:8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 그들은 마땅한 은신처가 없어서 산으로 피하지만

거기에서도 소나기에 흠뻑 젖어 어찌할 바 모른다.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 '안고'의 히브리어 '하바크' 는 '포옹하다',

'손으로 꼭 껴안다'라는 뜻으로 편안히 쉴 곳이 없어서 바위라도 의지하여

추위와 소나기를 피하려는 열악한 생활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혹자는 '하바크'를 '바위 틈 속으로 몸을 밀어 넣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찬 바람과 산중 소나기로부터 보호해 줄 구석을 찾는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바위 밑에 몸을 숨기는 것은 아마 그들이 바위 밑에 천막을 치고 살거나

아니면 바위 밑 동굴에 거주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욥24: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고아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으며 - 여기서 '어미 품'에 해당되는 '쇼드'는 원문에서 단지

'가슴' 곧 '젖'을 가리킨다(사60:16; 66:11). 즉, 어미의 젖가슴이다(70인역, KJV, NIV, RSV).

그리고 '빼앗다'의 '가잘'은 '벗기다', '잡아채다', '강탈하다'란 뜻이며

'고아'에 해당하는 '야톰'은 '홀로 있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특히 '아버지 없는 아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아직도 어려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무자비한 채권자들이 아비 없는 아이를 그 어미가 빚을 갚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담보물로 빼앗아 간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어린 아이들이 가치있는 재산으로 인식되었는데,

채권자들은 아직 젖도 떼지 아니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느 5:5)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다(왕하 4:1). 이것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자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포악한 행위로서 그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켰다.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잡으므로 - '옷'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맛소라 원본상으로는 '알',

곧 '...위에'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역본 성경은 본절 상반절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가난한 자의 옷'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아이'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등).

 

즉, 가난한 자가 돈이나 곡물로 부채를 갚기도 전에

채주들은 그들의 유아들을 담보물로서 압류한다는 의미가 적당하다(LB).

 

여기서 '볼모잡다'의 '하발'은 담보물로 속박하기 위하여

'압류 또는 탈취하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파괴하다', '멸망시키다'란 뜻도 있으므로(34;31)

본문을 사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난할 것 같다.

 

욥24: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 이미 7절에서 비천한 자의 헐벗는 모습을 묘사한 바있는데,

7절이 추위를 막을 따뜻한 옷의 결핍을 말한다면,

여기서는 노동자들이 안전 사고에 대비한 작업복마저 입지 못하는 형편을 가리킨다고도 본다.

 

이것은 압제자의 비정한 착취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압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억압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시켰지만

그에 필요한 어떠한 대가나 보호해줄 의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 굶주림을 당하면서도 곡식단을 날라야만 하는

고통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압제자들은 짐승들에게도 금지해서는 안 될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고 있다(신 25:4).

그것은 노동의 삯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여 정죄하고 있다(신24:14, 15; 딤전5:18).

 

욥24:11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여기서 '담'(슈로탐)은 원어의 뜻이 불명확하여 해석상의 논란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담'또는 '축대'(시 18:29;렘 5:10)의 의미에 동의한다(KJV, NIV).

 

RSV는 이를 '나무의 줄(row) 사이'로 번역하며,

혹자는 '담'과 관련돤 '맷돌'(millstone)로, 또는 '노래'나 '암소'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타당하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본문은 압제자들의 담 안에서(KJV, within their walls) 올리브 기름을 짜며,

포도주 틀을 밟는 장면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낫다.

 

즉, 압제자들의 매우 철저하고 혹독한 감독이 시행되고 있는 그들의 정원 안에서

비천한 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포도주의 틀을 밟고 잇지만

가장 가깝게 있는 포도즙으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욥은 이러한 성읍 내에서의 불의와 압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욥24:12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이제 욥은 도시 가운데서 행해지는 강포와 불의에 대해 언급한다.

'사람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팀'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1) 뒤에 나오는 '상한 자'와 대등구로 보고서 압제자의 횡포로 인해 거의 죽게 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경우(70인역, NIV, LB, RSV, Lange, Dlitzsch 등).

 

2) 조금 약한 의미에서 '심한 곤경에 처한 자'로 해석하는경우(KJV, Jerome 등).

 

이 둘 중에 전자의 해석이 본문의 문맥에 더 자연스럽다.

즉, 압제와 심지어는 살륙으로 인하여 상하며 죽어가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음하며'의 '나아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가 외치는 부르짖음을 뜻한다(렘 51:52 ; 겔30:24).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부상당한 자의 영혼이 부르짖다'이다.

여기서 '상한 자'(할라림)는 단순한 부상이 아닌 치명적인 상처로 거의 죽게된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억울하게 습격당하여 거의 죽게 된 자들이

매우 처절하게 도움을 호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 '참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티플라'는

원래 '어리석은 짓'(1:22)을 뜻하는데(KJV),

여기서는 사악한 범죄 행위, 또는 도덕 질서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행위를 뜻한다.

 

즉 사악한 자들이 도덕 질서, 또는 신적 법칙을 조롱하고 비웃는데도

징벌을 당하지 않은 채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편, 두 개의 히브리어 사본과 수리아 역은 '티플라'를 '테필라'로 읽어서

본문을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은 체도 않으신다'로 해석한다(RSV).

이런 해석도 본절의 주어가 억압당하여 상한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기는 하다.

 

결국 욥은 이 땅에 폭력과 억압이 계속되고 정의가 짓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욥24:13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이제 욥은 앞서 언급한 사악한 자들외에 또 다른 부류의 악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빛을 반역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십계명의 제 6, 7, 8,계명을 어기는

살인자들(14절), 간음자들(15절), 밤도둑들(16절)이다.

 

이런 부류의 악인들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은 본절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광명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덮여진 은밀한 죄악을 남몰래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밤과 어두움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감춰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이 분명하다(34:22).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 '광명'의 '오르'는 '빛'을 뜻하지만 그 해석은 다양하다.

1)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자연의 빛, 율법의 빛, 양심의 빛이라고 보는 견해.

2)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빛이 있는 '낮'으로 보는 견해.

3)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을 언급한다고 보는 견해.

 

여기서는 이 세 가지 해석 모두가 가능하다. 한편 '배반하다'의 '마라드'는 '반역','배도'를

뜻하며, 다른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빛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빛의 원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 '알다'의 '히키르'는 '인식하다', '익히 알다', '관심을 갖다'란

뜻이다. 즉, 악한 자들이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거나 그 유익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 악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어두움 가운데서 계락과 음모를 꾸밀 뿐, 그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 밝은 곳은 어디든지

가까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의 길에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삶과 진리의 근본이 빛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욥24: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밝을 때에 일어나서 - '밝을 때'(라오르)는 동이 트기 전의 캄캄한 어둠의 때를 가리킨다.

즉 악인은 인적이 드물고 주위가 캄캄한 때를 골라,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기동하는

궁핍한 자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욥24:15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 직역하면 '어두움을 살피는 간음자의 눈'이다.

여기서 '바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는 '주의 깊게 지켜보다', '관찰하다'란 뜻으로

은밀하게 행하기를 원하는 음탕한 마음을 타나낸다 (잠 7:9).

 

그리고 '저물다'의 '네쉐프'는 해질 무렵, 곧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황혼 무렵을 가리킨다.

결국 본문은 음행의 수치와 그 죄를 감추기 좋은 어두움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간음자의 특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얼굴을 가리며 - 직역하면 '그가 베일을 얼굴에 얹다', 곧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베일'의 '세테르'는 '숨기다', '감추다'의 '사타르'에서 유래된

명사로 가면이나 마스크를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를 생략하고 위장한다는 의미로만 번역한다(KJV, NIV, RSV).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마스크 같은 것이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을 들어

'세테르'가 기혼 여성들이 얼굴에 착용했던 '베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간음자가 여자의 옷으로 변장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장은 밤에 더욱 용이했을 것이다.

 

욥24:16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낮에는 문을 잠그고 - 탈무드와 고대 랍비들은 도적들이 밤에 뚫고 들어가기 위하여

낮에 미리 대문에 표시해 두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닫다'(하탐)는 '봉(封)하다', '밀폐하다'란

뜻으로 자물쇠로 문을 잠가두는 것을 의미한다(9:7; 14:17).

즉, 도적들이 낮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집의 문을 잠그고 몰래 숨어 있다는 뜻이다.

 

욥24:17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아침을 죽음의 그늘같이 여기니 - 원문을 직역하면 '왜나하면 흑암이 그들에게는 아침이 되기

때문이니'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은 그들에게 발각될 위협을 가져오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깊은 밤은 그들에게는 아침처럼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의미다.

 

도적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숨겨주는 어둠이 올수록 기뻐하면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흑암'을 '죽음의 그림자'(shadow of death)로 번역하여

간접적으로 도적들의 파멸적인 결과를 묘사하기도 한다(KJV).

 

두려움을 앎이니라 - 즉, 깊은 밤이 도적에게는 아침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밤의 위협적인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밤의 두려움에 놀라지 않고 도리어 그런 위험을 미리 예견하고 피하는 것에 능하다.

 

그들은 어두움의 특성을 노련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의 집을 뚫고 재산을 훔치는 데

교묘하고 능란하다. 이와같이 어두움에 깊이 빠졌기 때문에

그들은 빛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고후 6:14).

 

한편, 본절의 '흑암의 두려움'에 대해서 혹자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즉, 사망 또는 수치의 공포가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그들에게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어두움과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욥24: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 즉, 악인들의 존재는 물 위에 떠서 빨리 흘러가 보이지 않는

물체처럼 쉽게 잊혀지고 만다는 것이다(9:26; 호10:7).

 

욥24: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뜨거운 태양이 눈을 녹이고 물을 증발시키듯이

음부(陰府)가 악인을 재빨리 채간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본절을, 평생 죄를 짓고 불의하게 살았던 자들의 죽음이 고통이나 괴로움없이 찾아와

그들을 편안하게 잠들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그들에게 처절한 고통이 임하기를 바라는 욥의 불평 섞인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악인의 허망한 파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봄이 더 자연스럽다.

 

욥24:20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본문의 두 문구가 서로 대조를 이루어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한다.

즉 악인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조차 버림을 받으며

그를 가까이하고 달려들 자는 구더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모태'의 히브리어 '레헴'을 '땅'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그를 잉태한 모친'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욥24:21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사악한 자의 생전에 저지른 죄악의 실상이 밝히 증거되고 있다.

이것은 욥이 불의한 현실을 명백하게 고발하기 위한 구절이다.

 

즉, 욥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쌍한 여인들을 학대하거나 약탈하고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악한 자의 불의한 죄악이야말로 반드시 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눈에 목격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은

흥하고 있었다. 이는 또한 욥 자신의 처절한 체험이기도 했다. 이것이 욥의 딜레마이다.

 

욥24: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강포한 자'에 해당하는 '아비림'은'능한', '용감한'의 뜻을 가진 '아비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자기 자신의 힘만 의지하는 교만하고 대담스러운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의 뜻을 완고하게 거역하는 자들이기도 하다(사46:12).

 

그리고 '끌어내시다'(마솨크)는 '끌다', '연장하다'는 뜻으로 생명을 길게 연장시켜

계속 살아가게 함을 의미한다.

본절은 하나님이 오히려 스스로 거만하게 행동하는 강한 자들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뜻이다.

욥은 이처럼 모순된 현실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욥24:23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고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이는 하나님이 악인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악한 일에)담대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그들을 평안하게 휴식하도록 만든다는 욥의 불평이다.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 한편 원문상으로 본절 상반절과 하반절을 이어주는 접속사 '와우’

는 순접 관계(and) 혹은 역접 관계(but) 등 두 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순접 관계로 볼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불법 행위와 계략들 위에

오히려 빛을 비추어서(10:3) 안전하게 성공하도록 악행을 도우신다는 의미가 된다.

(LB, and helps them in mamy ways).

 

반면에 역접 관계 but 으로 보면, 본문은, 24절 내용과 연결되어 악인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를 나타내는 셈이 된다(KJV, yet his eyes are upon their ways).

 

욥24:24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높아지다'의 '라맘'은 '스스로 일어서다', '높이 세우다'란 뜻으로

악인의 교만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변론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즉, 이 변론(23, 24장)이 진행되는 동안 욥은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통’ 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끝내 불신할 수 없었던 욥으로서는 본절에서처럼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는 강한 기대감으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욥24: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욥은 지금까지 표명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감을 누구든지 공박할테면 해보라는 투로

확언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욥은 그 친구들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또한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호소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무죄를 변호해 주실 분은 하나님이며,

또 이 고통의 신비를 깨닫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22).

 

따라서 욥의 현재의 소망은 극심한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기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리라는 생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