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1 – 가인의 성 바벨론과 사냥꾼 니므롯 2021.01.16 신년특별기도회 Youtube
*7분부터 녹취
※2021년의 코인 열풍에 이어, 2026년에도 주식 광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바벨론 시스템'일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 없이, 사심 없이 건전한 투자로 주식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불안 심리, 고 배당을 취하겠다는 탐욕, 물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물질의 우상화..
이런 것을 버리며 사는 것이,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 성에서 사는 삶입니다.
주식으로 사람들이 부자 되는 것은 좋지만, 반대로 쪽박을 찰 수도 있으며,
그게 뭐든지, 성도가 추구하는 천국 지향적인 삶에, 그게 큰 영향을 못 미치게 해야 되는 거죠.
◈가인의 성 바벨론과 사냥꾼 니므롯 슥2:1~13 2021.01.16. 스가랴11강
오늘은 스가랴서의 세 번째 환상(‘측량줄을 가진 자’)의 후반부 내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전반부는 지난 시간 10강에서 살펴봤고요. 후반부는 슥2:6~13절입니다.
자 그런데 이 후반부의 내용은 뭐냐면, 그 주제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주된 메시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해야 되는 그 이유와, 또 성읍에 거주하는 축복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 성읍에 거주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6절부터 쭉 이어지는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크게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1) 첫째는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려면 바벨론 성을 떠나야 된다는 것이고,
2) 둘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두 가지가 예루살렘 성읍에 우리가 거주하는 방법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는 길 첫번째는, 먼저 우리가 살던 옛 성을 떠나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새 성읍 가운데 들어갈 수 있죠. 당연한 원리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그 성읍에 거주하게 됩니다.’
◑1. 첫째는 새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려면, 우리가 살던 옛 성읍 바벨론을 떠나야 됩니다.
슥2:7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그 영광된 성읍에 가기 위해서는, 첫째 바벨론에서 빠져나오라는 거죠.
거기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또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보호하시는 예루살렘에서
자기 삶의 터전을 잡기 원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던, 인간이 세운 삶의 터전인 바벨론,
또 우리가 지난 주에는 ‘가인의 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사실 두 개는 의미가 동일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세운 인간의 성, ‘가인 성’을 성경에서는 ‘바벨론 성’이라고 때로는 부릅니다.
이 두 성은, 그 의미가 똑같은 거예요. 영적인 의미로 똑같은 건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두려움과 욕심으로 인해서 반복적으로 성을 쌓습니다.
창10:8~12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여기 보면 니므롯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바벨에 처음으로 성을 쌌습니다.
이게 바벨론 성이죠.
여기 보면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 라는 히브리아 전치사를 보면,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파님’, 원래는 ‘얼굴 face’이란 뜻인데, 의역하면 ‘앞에서 before’가 되죠.
-하나는 before him ‘그 앞에서’ 이런 뜻을 가지고 있고, 구약에 1,137회.
-또 하나는 against him ‘그를 대적하여’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님’이 against 라는 말로 구약에 17회 번역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삼상12:15, 레26:17, 겔14:8, 민12:14 등입니다. 주1)
그래서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데, 우리나라 개역개정에서는 ‘그 앞에서’ 라고 번역했죠.
대부분 영어성경들도 다 before 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는 against him 이라는 뜻도 들어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 다음 단어인 ‘니므롯’이 중요한데요.
이 니므롯 이라는 이름의 뜻은 뭐냐면 ‘반역하다, 대적자’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니므롯’ 이라고 하는 뜻을 고려하면,
아마 before, in front of 보다는 against가 더 타당하거나 더 어울리는 번역일 것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against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창10:9
그러니까 니므롯은 어떤 사람이냐면 대적자예요.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한,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한 그런 사냥꾼이었다는 것입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또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었는데
또한 뭐라고 묘사하냐면 ‘세상의 첫 용사’래요.
‘용사’라는 말은,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니므롯은 어떤 사람이냐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질서와 상관없이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싸웠을까요?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의 스토리들을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운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어떤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 사람은 용사, 싸우는 사람인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운 사람이에요. (오늘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죠)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싸웠고, 자기 보호를 위해서 싸웠고,
자기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싸웠고, 끊임없이 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감한 사냥꾼이었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냥꾼’이란, ‘용사’의 또 다른 표현인데,
열심히 싸워서 자기가 원하는 걸 획득했다는 뜻이에요.
사냥꾼은 요즘하고는 조금 다른 시대였잖아요.
그 당시에는 뭐 그렇게 삶에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처럼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필요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필요를 어떻게 채웠다는 거예요? 사냥을 해서 채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싸워서,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계속 쟁취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니므롯은 어떤 사람이냐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인데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이 원래 공급하셔야 되는 모든 공급이 다 끊어진 거죠.
그러니까 이제 싸우는 거예요. 싸워서 사냥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활을 들어서 쏘고, 창을 들어서 던지고,
모든 그런 자기의 힘과 능력을 사용해서,
그 대상이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실제로 이 니므롯이 했던 것을 보면, 많은 성읍들을 점령을 해요.
여러 곳에 성을 세웁니다.
이건 뭐예요? 짐승만 사냥한 게 아니라는 거죠.
사람을 사냥했다는 거예요.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계속 정복해 나갔다는 거예요.
'유능한 정복자'였다는 거예요.
자, 그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바벨론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바벨론이 의미하고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것을 세운 니므롯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 안에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 그렇고 바벨론 성도 그렇고, 무엇을 함축하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터전을 함축하고 있죠. ‘성 city’이라고 하는 것이 터전의 의미죠.
내가 살아가는 어떤 터전이 되는 것, 내가 그곳에서 밭을 갈기도 하고,
내가 집을 짓기도 하고, 거기서 자녀를 키우고, 이렇게 살아가는 그런 터전인데,
두 가지 성읍이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세운 가인의 성, 또는 바벨론 성이 있고,
-하나님이 세운 예루살렘 성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성을 세우는데,
가인이 세운 에녹 성도 있고, 또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 성도 있고,
이게 다 같은 종류라는 거예요. 다양한 이름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다 사람이 세운 똑같은 성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그 성을, 가장 여러 군데서 반복적으로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이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요한계시록이 끝날 때까지
굉장히 여러 번 바벨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바벨론이 영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다 동일해요.
지금 얘기했던 니므롯의 그 특징들이에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
사냥해서 세운 성 city 이라는 뜻이에요. 싸워서 얻어낸 터전이라는 뜻이에요.
그것이 바벨론 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세운 나라의 삶의 터전의 이름이 바벨론 성이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면,
창10:10~12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그가 바벨에서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 그의 나라가 앗수르로 나가고, 니느웨로 확장되고
레센같은 큰 성읍들을 세웠대요. 뭐한거에요? 계속 정복해 나갔다는 거에요.
그게 빈 땅이 아니라, 거기 사는 원주민들이 있었는데, 계속 사냥을 했다는 거에요.
사냥이란, 사람을 잡아서 먹는다는 이런 뜻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정복하고 싸웠다는 거에요.
계속 사냥꾼으로 살아가면서, 큰 성읍들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벨론 성이고, 가인 성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세운 성인, 가인 성 또는 바벨론 성은, 네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
1) 하나님을 떠나서
2)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의 욕심이나, 나의 미래나,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3) 자기의 힘으로 싸워서 획득한..
4) 두려움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줄 성읍이라는 거예요.
이게 그 성읍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성경은 이 ‘가인의 성’의 이름을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까지
가인의 성을 대표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바벨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자기의 힘으로 쌓아서 획득한, 두려움에서부터 스스로를 지켜줄 터전!
그게 바벨론이라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떠나야 된다는 거예요?
바벨론을 떠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 삶의 방식을 탈피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서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터전 위에 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 백성아,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 계시록에서 그렇게 말씀하시죠. 계18:4
또 본문 스가랴에서에도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슥2:7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로 바벨론으로부터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은 그 삶의 터전 위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삶의 터전이 뭐라고요?
하나님을 떠나서, 내 자신을 위해서, 나의 힘으로 사냥해서 획득한,
나의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줄 성, 그 터전에서부터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분, 많은 경우에 우리가, 잘못된 터전 위에 살아갈 때 보면,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스가랴 때에도,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머물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았죠.
오히려 돌아온 사람들이 소수였고요. 남아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들은 얼마 후 에스더-하만 사건 때, 한 번 다 몰살당할 뻔한 큰 위기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바벨론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1) 익숙한 삶의 터전이었다는 거예요.
2)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니까 굉장히 두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남아있게 됐는데, 뒤에 가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어쨌거나 거기 바벨론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결국 예루살렘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두 곳에 동시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의 삶의 터전은 어쨌거나 하나를 선택해야지,
우리 삶의 터전이 바벨론에 가하면서, 그 바벨론에 여호와의 임재가 임하시고
그 바벨론 성읍을 여호와께서 ‘불성곽’으로 보호해 주시고... 이렇게는 안 된다는 거예요.
바벨론 성읍은, 그냥 바벨론 성읍일 뿐이에요. 인간이 세운 성읍일 뿐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운데 계시고, 불성곽이 그것을 두르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 가기 원하는
자들은, 바벨론 성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어요. 반드시 바벨론 성을 떠나야 돼요.
여호와를 떠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사냥해서 획득한..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줄 터전, 그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으면,
그 삶의 패턴들, 그렇게 살아온 내 삶의 습관들을 떠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제공하시는 예루살렘 성, 그 터전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자 정말로 여러분들이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바벨론 성을 떠나셔야 됩니다. 먼저 바벨론 성을 떠나셔야 됩니다.
그래서 스가랴 때,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원하는 그런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리적으로 바벨론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야 됐다면,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도, 영적으로 그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스가랴서에는 1차적으로 물리적으로,
실제로 바벨론에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빨리 피하라, 빨리 피하라 거기는 곧 망할 거야’
실제로 망하죠. ‘빨리 피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렇게 얘기했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을 영적으로 확장합니다.
그래서 신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성 바벨론에서 빨리 빠져나오라’고 합니다.
계1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여러분 보십시오.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 바벨의 이야기가, 계시록까지 쭉 이어지는 걸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그만큼 ‘바벨론’이라고 하는 주제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거예요.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엇인가요? 인간이 세운 삶의 터전인가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삶의 터전인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주제라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삶의 터전 위에 살고 계십니까? 물리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떤 삶의 터전 위에 살고 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그 터전을, 어떻게 마련해 왔는가를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누리시고 계신 집, 직장, 가정을 다 포함해서
실제로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물리적인 터전들이,
여러분의 어떤 동기와 어떤 방법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를 돌아보시라는 거예요.
그것이 내 두려움과 내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이 내가 쟁취하고 싸워서 얻어낸 것들인가요?
누굴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두려우니까
그렇게 해서 내 힘으로 만들어 온 삶의 터전인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가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내가 여호와의 집을 세우겠다’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터전이 되어주시고, 불성곽이 되어주시고,
주의 임재가 되어주셔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터전인가요?
이걸 지금 도전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 사람의 힘으로 세운 바벨론 터전 위에 살고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2021년은 재편되는 해인데,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한 방에 무너질 수 있어요.
왜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있는 성이 아니거든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한 성이 아니거든요.
성경은 분명히 뭐라고 얘기했냐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너는 바벨론으로부터 피하라. 시온아, 너는 바벨론으로부터 피하라’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 이야기는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계신 것들을, 전부 다 갖다버려라..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변혁을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쌓아왔던 삶의 터전들이, 잘못된 동기와 잘못된 영성을 가지고 세워왔던
거라면, 지금 당장 영적으로 그것을 바꾸라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되고, 어떤 터전 위에 서야 될지를... 바꾸라는 거예요.
그것이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바꾸는 과정 가운데, 어쩌면 물리적으로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일부분은 포기해야 될 수도 있어요.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생길 수 있단 말이에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당장 버리라’ 이런 얘기는 아닐지라도,
영적으로 ‘그렇지, 내가 니므롯으로서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안 되지’
그런 것들은 과감하게 포기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 걸, 내가 계속 붙잡고 있는 거거든요.
그걸 포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깝게 생각되고, 크게 희생하는 것 같고,
크게 손해보는 것 같지만’ 성경이 뭐라 그러냐면
‘야, 그거 무너질 거야. 좀 있다가 금방 무너질 거야’
지금 내려놓는 게 지혜로운 거라는 거예요.
‘좀 있으면 주식 폭락합니다. 지금 빨리 팔아치우라’ 이런 얘기가 될 수도 있죠. *2021년 활황
욕심 없이, 사심 없이 건전한 투자로 주식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불안 심리, 고 배당을 취하겠다는 탐욕, 물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우상화..
이런 것을 버리라는 거죠.
영적으로 여러분, 바벨론의 터전에 거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거해야 될 터전은, 예루살렘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면, ‘바벨론은요. 그저 익숙한 터전이 아니라
악한 터전이라고’ 그러셨어요.
◑2. 그렇다면 우리가 떠나야 될 바벨론의 영적 본질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악하고 더러운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되는 곳입니다.
계18:2~4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바벨론의 본질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삶의 터전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이 제공하시고 세우시는.. 그런 주의 백성들을 위한 터전과 대조되는,
반대되는 삶의 터전입니다. 모든 면에서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바벨론은 인간이 세웁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지만, 바벨론은 두려움이 가득한 성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지만, 바벨론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어서 지켜주시지만,
바벨론은 사람이 자기가 싸워서 지켜야 됩니다.
예루살렘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성이지만, 바벨론은 사냥해서 쟁취해야 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성경이 영적으로 묘사할 때,
바벨론은.. 사람이 자기의 영광과 자기 두려움으로 인하여 쌓아가는 성으로 묘사합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을 쌓을 때 그렇게 쌓죠.
그런데 예루살렘은 뭐라고 묘사하는지 아세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그래요.
묘사를 그렇게 하죠. '새예루살렘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래요. 계21:2
무슨 뜻이냐면, 인간의 삶에 두 개의 대조되는 터전이 있는데
-사람이 싸워서 쟁취해서 세워내는 터전이 있고,
사냥꾼으로 살면서 쟁취하는 터전이 있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터전이 있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터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만, 바벨론은 자기가 사냥해서 쟁취해요.
또 예루살렘의 본질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지만
바벨론은, 나 중심의 삶이에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 보면, 가장 중앙에 누가 있냐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그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요.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왕이신 성이에요.
그래서 ‘예루살렘 터전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나의 왕은 하나님이시고, 내 인생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내 중심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을 얘기해요.
바벨론은 정반대예요. 바벨론은 그 중심에 ‘사람’이 있어요.
니므롯이 있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원하는 왕이 있고, 철저하게 사람의 성이에요.
나중에 바벨론 성을 세울 때 보면 ‘우리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 성을 세워요. 창11:4
그 성 중심에 사람의 이름이 있고, 사람의 영광이 있고, 사람의 욕심이 있고,
사람의 힘이 있고... 이것이 바벨론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과 바벨론 성의 제일 극명한 차이는,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예요.
예루살렘 성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에요.
그러나 바벨론에는, 다른 뭔가가 중심이 돼 있어요. 바벨론의 중심에는 돈이 있고요.
바벨론의 중심에는 권력이 있고요. 바벨론의 중심에는 쾌락이 있어요.
결국 뭐냐 하면, 바벨론은 나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삶의 터전이라는 거예요.
돈도, 권력도, 힘이나, 쾌락도 다 뭐예요? 나를 위한 것들이죠.
나를 만족시켜주는 거죠. 이게 뭐 하나님의 영광하고는 아무 관련 없는 거잖아요.
주의 나라를 영화롭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나를 만족시켜줄 돈, 나를 만족시켜줄 쾌락, 나를 만족시켜줄 권력,
그것이 중심에 있는 거예요. 그것이 중심으로 만들어진 터전이에요.
열심히 터전을 쌓습니다. 일터도 개척하고, 직장도 만들고, 사업도 시작하고, 가정도 만들고,
사방에 뭐를 만드는데... 이 터전에 가장 중심에 뭐가 있는 거예요?
내 돈을 위해서, 내 쾌락을 위해서, 내 권력을 위해서,
결국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삶의 터전들을 잔뜩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두려우니까, 성을 막 쌓고, 그것이 바벨론 성입니다.
바벨론 성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욕심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입니다.
그것이 돈, 권력, 쾌락, 명예 이런 건데... 나를 위하고,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자랑하는...
그런 ‘나’가 중심이 된 삶, 그것이 바벨론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문제가 뭐냐면, 이것이 점점 확장돼서 공동체로 확장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문화, 또 그 문화가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법구조,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뭐냐면, 개인적으로 우리가 이런 곳에 살아간다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가 없겠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런 바벨론의 환경 가운데 우리 크리스천이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세상의 어떤 문화가, 바벨론의 그런 가치들이, 세속 문화를 만들고,
그 인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문화가.. 어떤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그 문화가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요.
그러면 믿는 자들도 그 안에 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믿는 자들이 그 안에 속해서 계속 살아가다 보면, 계속 공격을 받아요.
잠깐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 같다가도, 또 세상에 다 그런 것들만 돌아다니니까
‘어? 가만히 있어 봐, 나도 그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도 좀 노후를 보호하려면 돈을 모아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이제 비슷한 유혹들을 받는 거죠.
노후를 위해서 돈을 저축하는 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중심에, 두려움 때문에 돈을 모아두는 거라면.. 믿음이 없는 거예요.
바벨론 문화예요.
노후를 위해서 지혜롭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따라서 대비하는 건 좋은 거지만,
하여간 무엇이든지 간에, 주변에서 그런 것들이 막 그렇게 돌아가다 보니까
내 마음도 그런 유혹들을 받죠. 내 마음도 그렇게 흔들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긴 하지만,
여전히 내 힘으로 뭔가를 해야 될 것.. 부담들..
여전히 내 힘으로 사냥을 하고 싶은 마음들... 이런 것들이 계속 있다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뭐라고 명령하시냐면, 그거 끊어버리라는 거예요.
그거 계속 붙잡고 있다가는 ‘너는 바벨론이 망할 때, 너도 같이 무너진다’는 거예요.
2021년에 여러분, 이 바벨론의 모든 유혹들을 다 끊어버리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여러분 삶이 되시기를, 다시 한번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격변의 때, 재편의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슥2:5)으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무슨 수로 살아남겠습니까?
바벨론의 유혹들을 과감하게 여러분, 정리하셔야 됩니다. 빠른 시간 내에 털어내셔야 됩니다.
바벨론의 터전 위에 계속 머물러 계시면 안 돼요.
바벨론, 그 땅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머물러 계십시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성전을 향한 열심으로 사시라는 거예요.
신약적으로,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열심으로 사시라는 거예요.
그랬을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의 어떤 변화보다도,
더 힘있고 더 우선된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했잖아요. 그것을 붙잡아야지,
다른 어떤 거로도 이 흔들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예루살렘에 여러분의 터전을 두십시오.
예루살렘 성에, 여러분의 터전을 두십시오. 할렐루야!
그 사람들은 살아남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셋째,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바벨론을 떠나지 못하는가요?
떠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의 삶이 익숙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두렵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특별히 해당하는 얘기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바벨론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터전이 그것밖에 없죠,
여호와 하나님이 제공해 주신 삶의 터전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믿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
그 당시에도 스가랴 때에도 분명히 유대인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바벨론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잖아요. 그들이 왜 거기 남아있었던 가요?
▲1. 자 바벨론이 익숙하기 때문에 거기에 남아 있습니다.
바벨론은 지난 70년 동안 살아온 곳입니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요. 안정되어 있는 삶의 터전입니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을 보니까,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거예요. 아무도 다.르게 살지 않아요.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삶의 터전을 여전히 바벨론에 두는 이유는,
주변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살고요.
문제는 뭐냐면 교회를 나와도 별로 다르지 않게 산다는 거예요.
교회에 나왔는데,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대부분이 다 거기서 거기예요.
교인들의 관심사도 별로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교인들의 관심사도 세상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교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도, 세상과 별로 큰 차이가 없고,
추구하는 것도 거기서 거기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사냥꾼의 삶을 사는 것도, 니므롯과 다를 바 없어요.
가인의 성을 쌓아가는 것도.. 교인이나 불신자나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헷갈립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정상 아니야?’ 헷갈린다는 거예요.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게 그냥 정상 아니야?’ 헷갈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있다 보면, 이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냐면,
오히려 성전을 재건한다고, 익숙하고 당연한 바벨론의 삶의 터전을 떠나서,
하루아침에 바벨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5만 명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이고 광신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게 여러분 현실 아닙니까? 여러분의 눈은 어떻게 보이세요?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내 삶의 터전을 내려놓고
주의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헌신해서 사는 사람들이 조금 비정상적인 광신도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게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이게 내 영적인 현주소에요.
바벨론 문화에 섞여있다 보면, 그냥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있다 보면,
문제가 뭐냐면 ‘그게 노말, 스탠다드가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사실은 공동체가 참 중요해요. 결국 공동체가 중요해요.
하나님께서 정말 아무런 기초가 없는데서, 그냥 특별히 헌신된 사람을
그렇게 전격적으로 발탁해서 세우실 때도 물론 있어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보면, 대부분 보통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냐면,
그 공동체의 수준이, 그 안에 있는 개인의 수준을 대충 규정해요.
왜냐하면 보고 듣는 게 그거기 때문에 그래요.
다들 비슷하게 여호와 중심의 삶을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게 그냥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서 보는 게 그냥 다들 '바벨론의 삶'이에요.
교회 나와봐도 교인들이 다들 바벨론의 삶을 살고있어요.
그러면 그냥 그게 스탠다드(표준)로 보이고,
진짜 하나님 중심의 터전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 사람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실 제가 20년 전에 목회 시작할 때도 비슷했어요.
20년 전에 제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서, 교수 안 하고 목회를 하게 됐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뭐냐 하면 ‘너 왜 그러니?’ 이 말이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축복해! 맞아, 잘 선택했어!’ 하는 이런 얘기를 들은 게 아니고요.
‘너 왜 그러니?’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었어요.
‘너 지금 무슨 생각으로 그러니? 너 어떡하려고 그러니?’
근데 물론 불신자들이 그런 얘기하는 거야 뭐 당연한데,
심지어 목사님한테도 그런 말을 들었어요. ‘너 왜 그러니?
너 지금 박사 되려고 몇 년을 공부했는데, 지금 뭐 하는 거니?’
모든 사람들이 다 그냥 그렇게 바벨론 문화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데
‘왜 너만 다르게 살려고 그러니?’
제가 한참 그거 듣고 있다 보니까, 나도 헷갈리더라고요.
‘가만히 있어봐, 내가 지금 뭐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분, 사람들이 바벨론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익숙함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실제적으로 보면, ‘여러분 주변에 얼마나 영적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매일 만나서 교제하고 있는, 신앙 안에서의 영적인 친구들, 가족들이
어떤 영적인 수준에 있는가?’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있어요. 인간적인 의리가 있어서,
‘아휴 여기가 좀 영적으로 갑갑하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의리가 있지.
나라도 이 공동체를 지켜야지 뭐..’ 이런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이런 생각은, 하여간 잘 분별이 필요합니다. 분별이 필요하다는 게 뭐냐면,
맞아요. 어쩌면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생각일 수 있어요.
그런 부담감을 가지는 사람을 먼저 하나님께 세우셔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영적인 수준을 끌어올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반대로 인간의 생각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분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인본주의적인 생각일 수도 있어요.
‘지금 다 같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는 네 영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없냐?’
이게 하나님의 메시지일 수도 있어요.
‘거기 네가 아무리 오래 머물러 오래 있다고 해도, 거기서는 안 변해!’
‘너라도 빨리 살 곳을 찾아!’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보니까
‘내 주변에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 함께 교제하고 있는가’가 정말로 중요해요.
인간은 그 수준을 뛰어넘기가 참 어려워요.
정말 특심한 열심을 가지고 쫓아가려고 해도 쉽지 않아요.
맨날 보고 듣는 게 그런 거기 때문에.. 나중에는 헷갈려요.
‘아, 이게 나 혼자 미친 짓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바벨론을 버리고 예루살렘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게) 참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분, 만약 그게 여러분의 상황이라면.. 심각하게 분별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어쩌면 여러분들이 먼저 떠나야 될 수도 있어요.
자 어쨌든 간에, 바벨론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이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그래요. 익숙함, 자연스러움, 그것 때문에 그래요.
▲2. 두 번째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바벨론을 떠난다고 하는 게 두려운 거예요.
고레스 칙령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위성이야 다 알죠. 당연히 돌아가서 성전 세우는 것이 중요하고,
당연히 돌아가서 성전과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중요하 거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막상 내가 가서 그 일을 한다? 이건 이제 두려운 거죠.
막상 내가 가서 그 일을 한다고 하면, 걸리는 게 너무 많아요.
‘가면 뭘 먹고 살지? 아이들 교육은 어떡하지? 치안은? 노후 대책은?'
걸리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모든 것이 다 걸립니다.
이 두려움, 내 힘으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항상 두렵습니다.
잘 들으세요. 내가 내 힘으로 살아가던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두렵습니다.
왜요? 죄의 중심은 뭐냐면 내가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주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을 컨트롤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죄의 가장 핵심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하도록,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내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분께서 내 삶을 운행하시고, 지키시고, 이끌어가시도록 그렇게 지음받았지,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고, 내 힘을 다해서 삶을 끌어가도록 지음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게 익숙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다'고 하면 못 믿어요. 이게 뭐예요. 여러분?
믿음의 문제잖아요. 하나님을 못 믿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못 믿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한테 뭔가 부탁하려고 하다가, 못 믿으면 어떡해요?
내가 해버리지 않습니까? 저도 약간 그런 스타일인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럴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러면 안 돼죠.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내가 못 미더운 거죠.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게 뭐냐면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삶이 너무 익숙해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바벨론의 삶과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 성을 삶을 비교해보면
사냥꾼과 농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할 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하여간 씨뿌리는 농부로 비유한 적은 있어도, 사냥꾼으로 비유한 적은 없어요.
성경을 잘 한번 보세요. 오히려 사냥꾼은 니므롯이에요.
근데 주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농부로 묘사를 해요.
여러분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농부는 하늘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농사의 특징이 뭐냐면, 내가 아무리 능력이 많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일했어도,
하늘에서 비를 안 주시면,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잖아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땅이 안 좋으면 열매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게 농부예요. 그래서 농부는, 결국 하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심지어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나라에서 기우제 같은 거 드리고 그러잖아요.
뭐냐면 농부들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농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농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냥꾼은 어떻습니까?
사냥꾼은 하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활만 좋으면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냥꾼은 활만 좋고, 활 쏘는 실력만 좋으면, 하늘에도 관계없고 땅에도 관계없고
그냥 지나가는 짐승 잡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벌어먹고 사는 거예요.
내가 내 능력으로 쟁취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니므롯은 ’큰 사냥꾼‘이라고 그랬고요.
이 사냥꾼은 뭐냐면,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바벨론 삶의 핵심은 뭐냐면 사냥꾼이에요.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쟁취하는 삶,
그 일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당해야 돼요.
짐승이 희생당하든, 사람이 희생당하든,
타인을 희생시켜가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 힘과 능력으로 빼앗고 쟁취해서
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사냥꾼! 그게 바벨론의 삶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을 '바벨론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냥꾼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니므롯이, 니느웨와 여러 성읍을 세우기 위해서는 사냥꾼으로 살아야 했어요.
힘과 능력을 사용해서 정복하고, 죽이고, 빼앗고... 그래서 큰 성을 만들었죠.
바벨론 터전은은 여러분, 사냥꾼으로 세워진 터전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터전은 달라요. 예루살렘은 뭐예요?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새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또한 농부의 삶을 사는 거예요. 이 말은, ’하늘 바라기‘로 산다는 뜻이에요.
거기에는 여러분 성실함이 물론 필요합니다. 농부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농부도 봄에는 씨 뿌려야 되고요. 여름에는 열심히 김매 줘야 되고요.
가을에는 추수해야 되고요. 정말 부지런합니다. 농부가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어떻게 보면 사냥꾼보다 농부가 더 부지런하죠. 새벽부터 나가서 일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지하는 거예요? 하늘을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농부는 근본적으로 하늘을 의지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그건 내가 해야 될 본분이고, 결국 내가 어떤 소산을 얻을 건가는, 하늘에 달린 거예요.
똑같은 노력을 하고, 똑같은 씨를 뿌리고, 똑같이 수고를 해도.. 풍년이 드는 해도 있고요.
완전히 망하는 해도 있어요. 하늘에 달린 거잖아요.
농부는 여러분, 하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농부는 하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다시 한번 우리한테 묻습니다. '너는 사냥꾼이냐, 아니면 농부냐?
너는 네 힘으로 터전을 열심히 마련하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냐?'
△그런데 여러분, 사냥꾼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농부로 살려면 두렵습니다.
그 이유가 뭐 때문에 그러냐면, 내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 인생 여정을 봐도, 저는 여기에 대한 정말 감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 인생은 철저하게 사냥꾼이었어요. 여러분도 비슷했을 거예요.
제 인생은 철저하게 사냥꾼이었어요.
내가 내 힘으로 쟁취해야 돼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돼요. 경쟁해서 지면 안 돼고...
아이고 제가 고등학교 내내, 우리 집에 제 책상 앞에 붙어있던 슬로건이 뭔지 아십니까?
지금도 창피하지만 기억이 나요. ‘누구에게도 지면 안 돼!’ 이걸 빨간색으로 써 놓았어요.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난 절대 지지 않아..’ 이렇게 써붙여 놓고요.
그렇게 철저하게 사냥꾼으로 살았어요. 내가 이겨야 되고, 얻어야 되고, 쟁취해야 되고...
근데 정말 은혜로 제가 거듭났잖아요. 그리고 지나온 35년간의 여정을 보면,
한 번에 변한 건 아닐 수 있어요. 그래도 계속 하나님이 바꾸어 가시는 게 뭐냐 하면
농부로 바꾸어 가시더라고요.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어요.
지금은 물론 성실하게 일하면서, 주님이 저한테 주신 그 사명에 최선을 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면 누리는 거고, 안 주시면 할 수 없는 거고... 얼마나 평화로운지 몰라요.
옛날에 바벨론에서 사냥꾼으로 살 때는요. 마음이 항상 불안했어요.
항상 ‘지면 어떡하지? 못 잡으면 어떡하지? 떨어지면 어떡하지?’
요즘은 여러분, 너무 평화로워요. ‘너무 안 되면 어떡하지?’ 별로 염려하지 않아요.
‘이거 안되면 어떡하지?’ 그래도 괜찮아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그러신건데...
그래서 제가 너무 평화로워요. ‘안 되면 주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주시면 감사한 거고, 안 주셔도 감사한 거고...
그게 여러분,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의 평화에요. 예루살렘이 ‘평화의 성’이잖아요. 이르+샬롬
평화의 성이잖아요. 샬롬, 평화가 있는 곳이잖아요.
기억하십 시오, 여러분,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삶은 두려워요. 항상 불안해요.
그곳에 머물지 마십시오. 그리고 2021년 재편이 일어날 때, 바벨론 성은 무너집니다.
거기는 위험한 곳이에요. 거기서 나오십시오!
☞도망치십시오 ! / 카터 콜론 https://rfcdrfcd.tistory.com/15978554
▲정리하면,
계시록에 보면, 이 바벨론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계18:2~4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18:12~13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옷감과 비단과 붉은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의 본질은 뭐냐면, 사치스럽고요. 자랑하는 거고요. 그리고 사람의 영혼이에요.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는 거예요. 누군가를 빼앗는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벨론입니다.
또는 창11:4절에 보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 이건 교만한 거예요.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곳이 영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이 더럽게 보시냐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영적으로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렇게 보신다는 거예요.
바벨론을 떠나야 되는 이유는, 그곳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벨론은 심판이 있다는 거예요.
바벨론을 떠나야 되는 이유 심판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
슥2:7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2:9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바벨론)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자기 종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2:9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대적들을, 위협하는 몸짓으로 그의 손을 들어올린다는 뜻이고,
'내 손'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곧 신적 전능을 나타냅니다.
그 능력의 손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해서 대적 바벨론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계18:2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바벨론은 결국 무너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은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시는 곳이지만,
바벨론은 소멸하는 불이 되시는 곳이에요.
그래서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언젠간 심판하십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더럽고, 취하고, 귀신의 영이 모이는 곳이고,
사람의 피와 사람의 영혼을 팔고 사는 곳이고, 계18:13
절대 바벨론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여러분의 삶의 터전이 그 위에 기초하고 있다면,
2021년 새해에는 빨리 떠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후략
...................................
주1) 히브리어 ‘파님 face’이 against 란 의미로 번역된 성경구절을 물어보니
AI가 이렇게 찾아주었습니다.
1 Samuel 12:15: "But if ye will not obey the voice of the LORD, but rebel against the commandment of the LORD, then shall the hand of the LORD be against [panim] you, as it was against [panim] your fathers.“
Leviticus 26:17: "And I will set my face against [panim] you, and ye shall be slain before your enemies: they that hate you shall reign over you; and ye shall flee when none pursueth you."
Ezekiel 14:8: "And I will set my face against [panim] that man, and will make him a sign and a proverb, and I will cut him off from the midst of my peopl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Numbers 12:14: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If her father had but spit in her face [panim], should she not be ashamed seven days? let her be shut out from the camp seven days, and after that let her be received in again." (In this context, it is "in" or "against" her face).
Job 16:8: "And thou hast filled me with wrinkles, which is a witness against me: and my leanness rising up in me beareth witness to my face [panim]." (Used here to mean to my face/against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