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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사는 삶 | 요14:16-18 25.12.14. Youtube
◈성령 안에서 사는 삶 요14:16~18 2025.12.14.
여러분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면 좀 잊어버리는 게 있는데요.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
익숙해 있으면, 사실 잘 잊어버리죠. 질문하지 않습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게 사실은 신기한 일이에요.
여기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어떤 분은, 그런 분이 계실 거예요.
‘나는 절대 교회 안 다닌다’ 그랬던 분이 계실 거예요.
‘나는 예수쟁이가 너무 싫어’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막 갈구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욕하고 했던 그런 분들도 아마 있을 거예요. 분명히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괜히 예배당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기도 하고,
어떤 분은 또 그런 분이 있더라고요. 자기가 예수 안 믿을 때, 괜히 교회 예배당 담벼락에
소변보고 그랬대요. 그런데 그분이 목사님이 됐어요.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분명히 내가 믿기로 결정하고, 내 의지로, 교회에 온 건 맞아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욕하고, 그렇게 핍박하고, 미워하고 했던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왔느냐?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느냐?’는 거죠.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됐지? 무슨 과정이 있었던 거야?’
여러분, 그게 사실 기적에 속하는 겁니다. 우리의 이성과 자기 경험의 세계로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게
쉽지 않은 거거든요. 그래서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가 믿었다’ 라기보다는,
‘믿어졌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근데 믿어졌다면, ‘왜? 어떻게 믿어지게 되었는가?’
이 설명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새로운 전환점이 요14장에 나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제자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죠.
절대적으로 의지 하고, 자기의 모든 걸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를 좇았는데,
그분이 훌쩍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자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자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떠나심이 절망적인 사건으로 보였는데, 예수님의 약속은
‘내가 떠나야 너희들에게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야 보혜사를 보내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16절에도 또 나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의 떠나심과 성령의 오심이 연결되어 있는 거죠.
공생의 사역에 예수님이 끝나심으로 새로운 전환점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누가 오심으로? 성령이 오심으로!
▲그러면 성령이 누구이시기에 ‘내가 떠나시는 게 유익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요3장에 보면, 니고네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데 뭐가 안 통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결정적인 얘기를 하시는데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다시 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가야 합니까?'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고전12: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롬8: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16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셔야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내 안에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인, 또는 육체적인 인간으로는 '내가 믿는다'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영으로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말은
내주 內住라는 단어를 써죠.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순간, 우리의 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가 됩니다.
여러분, 성령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바람, 호흡'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루아흐, 프뉴마
예수님도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를 했어요. 요3장에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으셨죠.
생령을 불어넣으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성령을 간단하게 정의하는 건 어려워요.
눈에 보이는 어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것보다도 확실하게 존재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영, 성령이시라는 거예요.
자연인, 육적인 사람으로는 성령을 볼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부는데, 바람이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바람이 불 때 그 증상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바람이 부는 걸 우리가 느낍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에 대한 가장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데,
미래가 불투명한 제자들은 근심 속에 두려움에 떨며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곧 세상을 떠나셔야 하는데,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누구이신가?' 하는 겁니다.
그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여기서 '다른'은 헬라어로 '알로스' 인데, '똑같은 종류의 또 하나'를 의미합니다. allos
참고로, ‘본질이 완전히 다른’을 뜻하는 헬라어는 헤테로스입니다. heteros
그러니까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고 성령도 보혜사이십니다.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보혜사’라는 말은 ‘헬퍼, 곁에서 돕는 분이다. 곁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
곁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분’ 이런 뜻이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保惠師로 번역했죠.
그러니까 ‘고아처럼 버림을 받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과 더 강력한 결속을 시켜줄 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과 똑같은 역할을 하신다는 겁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는 육체를 입고 계심으로,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받으셨어요.
그런데 좋은 점은 예수님이 눈으로 보이는 거죠.
그런데 성령은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받지 않으세요.
단지 영이시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거예요. 이 차이를 잘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좋은 점은, 한 번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우리를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신다
는 것입니다.
자, 보혜사를 주신 이유는 뭘까요?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진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공생애 동안에 제자들의 모습 속에 확인한 것은,
그들은 말씀을 배우고 뭐 아무리 깨달아도, 그렇게 말씀대로 살 능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이었어요.
성령이 돕지 않으시면, 마치 엔진이 없는 자동차와 똑같아요. 움직이질 않아요.
▲여러분 로마서 7장에 바울이 탄식을 합니다.
롬7: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선인데, 삶은 내 마음과 따로 노는 거죠.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탄식하는 거잖아요. 이게 과거의 우리 모습이에요.
그렇게 말씀대로, 또는 예수 믿으며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아는 능력이 없는 거죠.
만약에 로마서가 7장까지만 끝났다면, 우리는 사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8장이 있어요. ‘그러므로..’ 이렇게 시작해요.
롬8:1~2절을 보면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렇게 새로운 대자유의 현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이렇게 완전히 바꿔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성령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성령을, 주님이 약속하기를
요14: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을, 불안해했습니다. 근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내가 버림받았다 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성령을 약속하시며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는다. 내 대신 보혜사가 오셔서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들은 결코 홀로가 아니다.’
▲여러분 가끔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외로워, 나는 혼자야, 아무도 나를 관심가지지 않아’
여러분,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 이런 감정이 있어요?
고통의 순간에, 실패의 순간에, 때로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직장에서 혼자가 될 때가 많잖아요.
여러분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내가 홀로 있다’는 감정에 휩싸일 때입니다.
외로움의 감정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고,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주로 극단적인 생각과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홀로 있을 때입니다.
‘나는 혼자야.. 아무도 내 곁에 없어.. 내 편은 없어’ 이 고립감이 위험한 거죠.
그런데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신자는 결코 홀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를 거닐며, 대화를 하며 걷는 것과 같은 경험이
지금도 가능해요.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운동을 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일을 하면서, 운전을 하면서도 가능해요.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날 120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주님의 승천 이후에 그들은 고아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홀로 있다는 감정이 사라져요. 그리고 담대해집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병상에 홀로 있다 해도 혼자가 아닙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혼자가 될 수 없어요.
모두가 나를 떠나도, 한 번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실 이 설교는, 이론과 지식의 설교가 아니고,
사실은 경험을 해야 되는 메시지에요.
이론은 우리가 이미 아는 얘기이고, 이제 경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 안에 오시는 성령,
그분을 우리가 믿어야 되는 거죠.
그분은 최고의 위로자이세요. 최고의 카운셀러이세요. 가장 놀라운 치유자, 힐러예요.
성령은 우리를 치유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위로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주시는 위로는, 사람이 주는 위로와 차원이 다릅니다. 깊은 위로, 완전한 위로!
그래서 요14:1절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신
이 말씀은, 성령의 오심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의 위로는 단순히 어깨를 다독여주는 정도가 아니에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깊은 결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참 평안을 약속하죠.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이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평안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가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십니다. 자, 성령이 어디 계신다고요?
요14: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이 ‘너희와 함께’ 어디에요? '너희 속에! in me' 내 안에!
여러분 내가 성령의 임재를 느끼지 못해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이 함께 계신다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러나 어떤 때는, 성령이 함께 하심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가끔 성도들 가운데 오해하시는 분이 계세요.
자신의 감정으로 성령의 내주를 확인하려고 하는 겁니다.
느낌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느끼지 못해도 성령은 나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주
그러므로 나의 느낌과 감정에만 몰두하면, 성령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을 때가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해도, 성령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오늘도 여러분들이 예배에 나오신 것, 예배 속에서 찬양을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기도하고 하는 모든 일들...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애를 쓰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자 하고, 우리 일상의 삶에서 예배자로 살아가고,
하는 일마다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이미 성령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임재를 매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홀로가 아니에요.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매일 파티를 해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게 성공적으로 돌아가는데도, 외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고독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죠. 여러분, 이거 무서운 겁니다.
▲근데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부시대가 있습니다.
교부시대에 보면, 그때부터 기독교 역사에 보면, 홀로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홀로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홀로 있는 걸 원했어요.
그래서 사막으로 간 거죠. ‘사막의 교부들’이라고 그래요. Desert Father
그리고 수도사들을 라틴어로 '모나쿠스'라고 하고,
수도원은 '모나스테리움'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뭐냐 ‘혼자, 홀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모노스'에서 이 단어가 왔어요.
그들은 스스로 사막에 들어갔습니다. 근데 그 사막에서 그들은 ‘홀로’가 아니에요.
사막 한가운데서 성령과,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홀로 믿음의 여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도피 중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있을 때도, 친구들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분,
홀로 있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성령과 함께 하심이 없는 ‘홀로’가 문제죠.
성령과 함께하는 일상의 경험이 축적된 그런 영성을 소유하면,
의도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어, 홀로 있는 걸 선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깊어지면요. 홀로 있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홀로 있는 시간도 즐깁니다.
물론 공동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지만,
홀로 성령과 함께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외로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고통은 외로움이에요. 외로움.
홀로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요?
공허하기 때문이에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외로움은 뼛속까지 쓰리게 하는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외로움은 병이 되죠.
외로움은 생각보다 지독한 병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외로운 일이에요.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외로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외로운 일이에요.
이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배교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외로움을, 이 인간적인 외로움을.. 인간적 힘으로 이길 수 없어요.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실 때, 시련과 그리고 환란 중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이 복을,
이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성령은, 또한 우리와 영원히 내 곁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는 거죠.
요14:17절에 보니까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16:13절에도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여러분, 성령과 말씀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십니다.
여러분 성경은 흥미로운 책이에요. 초등학교 아이라도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라 해도 전혀 못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요3장에 나누는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지했어요. 그는 육의 세계에 묶여있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소통이 되지 않는 걸 느끼셨어요.
그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요.
여러분, 죄인된 인간에게 진리는 철저히 감춰져 있습니다.
지식은 있으나 진리에 대해서는 캄캄한 거죠.
성경은, 머리로만 분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의 한계를 내려놓아야 되죠.
여러분, 공부를 하면 나도 모르게 오만해질 위험성이 높습니다.
물론 많이 공부하면 겸손해지는데, 웬만큼 공부를 많이 하면 내가 오만해지는 거죠.
그래서 자꾸 판단하게 돼요.
여러분, 판단하는 것과 분별하는 건 다릅니다.
영의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하면 판단을 하는 거죠.
그런데 영에 눈을 뜨지 못하면, 육은 무익한 겁니다.
여러분 16C 종교개혁 이후에 인문학이 발달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었어요.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의 생각, 이성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철학이 뭘까요? 철학은 질문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계몽주의가 1750년경부터, 서구 문화 안에서
인간이 가진 이성의 위력을 크게 강조했어요.
그 시대는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신도 다 포함되는 거예요.
이 계몽주의 Enlightenment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 메시지는 뭔지 아십니까? '더 잘 이해하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기독교 안에서도, 신자들이,
성경공부 지식이 풍부해지고, 배우는 데에 열심을 내고...
이게 굉장히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것이 많았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문제가 뭔가 하면, 영성의 빈곤함을 가져온 것입니다.
결국 지식과 이해력이, ‘인간의 이성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느냐’에 따라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사색을 하고 철학을 합니다.
그러나 그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을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풀립니다.
이성의 힘으로만 성경을 풀려고 하면 어디로 가는 줄 아십니까? 자유주의로 가는 거예요.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멋대로의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아담은 그걸 무시해요.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성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성도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 지성의 끝은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C S 루이스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강한 무신론자였어요.
그는 기독교인이 사는 모습에 대해서 매우 비이성적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의 대상은, 언제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실제였어요.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를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게 다가오심을 느꼈어요.
그러나 그는 지성의 힘으로 버틸 때까지 버팁니다. 결국 무너지죠.
하나님의 다가오심 앞에 자기 이성의 체계가 무너집니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죠.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지성으로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밀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실존 앞에 무너집니다.
그 이후에 그는 기독교 편에서 무신론자들과 싸우는 든든한 지원군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아요.
그러나 성령을 통해 알면, 지식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선명히 알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도 제가 설교를 하지만, 이 설교를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지성이 아닙니다.
요14: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위대한 교사이십니다.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들이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적 의욕만 가지고 접근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이해도 안되고 믿어지지도 않고요.
성경이 온통 검은 색 글자로만 가득한 책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깨달음이 중요하죠.
깨달음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깨닫느냐 하는 거예요.
말씀의 깨달음,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이 모든 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래 말씀하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그것은 무지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시는 모든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가끔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오해를 해요.
성령이 어떤 때는 우리에게 강하게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들이 있지만,
그럴지라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임을 우리가 믿어야 돼요.
말씀을 벗어나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성경은 해석이 안됩니다.
성경은 사상과 철학적 이론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 그리스도 안에 참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는 태도로, 성경을 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성경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나를 판단하셔야 돼요.
내가 성경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성경에 의해 내가 해부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어떤 분은, 그래서 ‘이 성경을 내가 한번 쪼개(파헤쳐)보리라’ 했는데,
먼저 자기가 쪼개져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역사해야 영안이 열립니다. 그때 성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성경 말씀을 조명하신다고 그래요. 마치 빛이 비추어지는 것처럼,
내 영혼에 빛이 환하게 비추어져서 (조명해서)
그 성경의 말씀이 밝게 드러나는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어리석게 보이는 거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십자가의 도를 듣고,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꼬꾸라지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왜요? 성령의 역사라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의 도움 없이,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십시오. 와닿지가 않아요.
여러분 똑같은 설교를, 똑같은 장소에서 듣는데
어떤 분은 은혜를 받고, 어떤 분은 시험에 들어요.
말씀이 귀에 들려져야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 신앙은 성령과 함께 시작하고, 성령으로 동행하며, 성령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합니다.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 진리는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이 진리가
결국 우리에게 깨달아질 뿐만 아니라, 결국 성령은 그 깨달은 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까지 인도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적용
오늘 우리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말씀의 기갈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말씀이 풍성해 보이죠. 온라인상으로.. 미디어를 통하여..
수많은 설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재앙은 딴 게 아닙니다.
비가 오지 않는 재앙이나 기근이 아니고 말씀의 기근입니다.
말씀이 더 이상 잘 들려지지 않는 시대!
암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또한 엘리 시대가 그랬습니다. 삼상3: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게 그 시대의 재앙이었습니다.
아무리 척박한 광야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삽니다.
만나가 떨어져도, 말씀이 닫히면, 길을 잃고 결국은 방황하고 죽게 되는 것이죠.
삶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빈곤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빈곤’의 특징은, 선지자들이 사라지고, 말씀의 종들이 희귀해질 때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그 성령이 임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사도행전 2장이에요. 오순절날!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며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을 때,
행2:1절에 오순절 날이 임하매 홀연히 갑자기 그 방에 성령이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시고
120문도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신약교회가 탄생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여러분 이전과 같은 사람이에요. 달라진 게 없어요.
상황도 모든 게 다 똑같아요. 근데 딱 하나 바뀐 게.. 성령이 오셨다는 거예요.
보혜사 성령이 오셨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셨던 그 성령이, 마침내 이 사도행전 2장에 임하신 거예요.
신약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교회를 만든 것은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무슨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고, 시스템이 있어서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신약 교회의 출발은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그게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건물이 있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간판을 달았다고 교회가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하셔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행2장 이전에,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신자가 되고, 성령이 임하셔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너희들은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제자들은 그걸 알아들었습니다. 신약이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증인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는 것입니까? 성령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요14장에 보면, 우리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도의 능력, ’나보다 더 큰 일을 너희가 할 것이다.‘ 이 기도의 능력!
-그리고 성령을 강조하셨어요.
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과, 내 안에서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은 다른 차원이에요.
성령이 이끌어가시는 내 기도는, 또한 우리의 기도는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성령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삶 속에 일상적으로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임재하시는 성령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면, 내 일상은 특별해지는 것입니다. *동행, 교제
여러분 성령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살리시는 영‘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으십니다.
생기가 돋게 하십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십니다.
이 성령이 주시는 능력은 우리 안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하십니다.
죽음의 힘도 이겨내게 하는 게,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령이에요.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어요.
성령이면 충분해요. 이보다 더 큰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눅11: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이것을 마7장의 말씀과 연결시키면 너무도 놀라운 거예요.
마7장에서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마7장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눅11장에서 답을 알려줍니다. 그 좋은 것이 성령이라는 거예요.
기도 응답 중에 최고의 응답은 성령이시라는 거예요. 눅11:13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구하되, 절실하게 구해야 합니다.
이미 성령이 내주해 계시지만, 그 성령을 활성화 시켜야 합니다. 충만하시도록!
성령이 내주해 계시지만, 휴면 계정처럼 아무 역사가 안 일어나는 분들이 많아요.
또는 '비활성화'라고 하죠. *인터넷 용어
여러분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성령께 빠져듭니다.
여러분 우리 곁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항상 내 곁에 계신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거 어마무시한 얘기 아니에요?
이거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존재를 너무 간과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얼마나 무시하며 소홀히 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친밀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신앙은 관계입니다. 누구와요? 성령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고 맺어갈수록
신뢰가 쌓여가고, 신뢰가 쌓여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관건은 무엇입니까? 성령과 함께하는 일상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뭐냐 묻는다면.. 성령과 함께하는 일상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기도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못 해요. 기도는 영적인 일입니다.
예배? 우리의 정성으로 되나요? 안 돼요.
우리의 마음관리, 우리의 노력으로 되나요? No
아니면 죄를 이기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무시하고 살면, 무기력한 종교생활만 남게 됩니다. 영의 세계가 안 보여요.
그러면 아차하면 빈껍데기만 돌아가는 거죠.
영을 무시하고, 외적인 활동만 하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면,
금방 신앙이 쇠퇴하게 되고 종교생활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러분, 종교생활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미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환영하십시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 익숙해지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님이 '활성화' 되시도록, 동역하십시오!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음을 확신하시고,
언제나 그분을 의식하시고, 그분을 존중해 드리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십시오.
내 모든 감각이 그분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오감이 그분에게 반응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음식을 먹으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성령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그런 어떤 때는, 내가 말을 할 때도, 갑자기 내가 불편해짐을 스스로 느낄 때가 있어요.
그 불편한 감정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옳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성령님이 원하지 않으시는구나’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대화도 달라지게 됩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성령을 알아차리는 거죠.
모든 사건과 일들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매 순간 성령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묵상 안에
그 성령과 함께할 때, 점점 내 의식의 세계가,
나에 대한 인식보다. 성령에 대한 인식이 더 깊어지는 단계가 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보다 더 강력한... 임재하시는 그분에 대한 인식이 더 강해질 때...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임재를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죠.
그러면 어느 단계까지 가는지 아십니까?
‘나는 한순간도 성령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나오는 거죠.
마치 호흡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이 그런 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신자의 삶이란 단 한마디로 표현돼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
그리스도는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도록...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5:16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영어성경은 walk by the spirit 이라고 그랬어요.
‘성령과 함께 걸어라’ 걷는다는 말은 일상을 말하는 거죠.
‘모든 일상의 삶을 그분과 함께 동행하라,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과 함께 보조를 맞추고 걸어가라! (살아가라!)’
여러분 그분과 함께 일상을 살면, 평범한 일상의 삶도
하나님의 초월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총명이 아니라 영적 총명이 일어나는 거죠.
그냥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심령을 파고 들어와서
전인격적으로 흔들어 놓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거죠.
그때 우리의 삶에 내적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 엡3:16
‘그러므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 갈5:16
육체의 욕심과 싸워서 우리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이 자동적으로 떠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칙칙하고 힘들고 어렵습니까?
끊임없이 욕심들이, 육신적인 욕심들이 우리를 더덕더덕 사로잡고 있으니까,
삶이 점점 무거워지잖아요. 왜 삶이 이렇게 무거워지는가요?
그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힘이, 우리의 능력으로는 안 돼요. 성령께 맡기는 거죠.
여러분, 신자가 누리는 특권 중 특권(성령 동행)을 알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염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다른 어떤 기적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어렵다면 답은 하나예요. 여러분, 성령과 함께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자기 혼자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여러분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은 뭘까요?
여러분, 고아는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잖아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너무 무겁게 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기꺼이 즐겁게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요, 우리에게 기쁨을 주세요. 우리를 무겁게 하지 않아요.
기쁨으로 모이고, 기쁨으로 봉사하고, 기쁨으로 헌신하고, 기쁨으로 생명까지도 드립니다.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활력이 넘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시는 거예요.
힘내라고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고, 생기를 돋워주고,
생동감이 넘치게 하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고,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게 하고... 이 비밀이 성령 안에 있고,
성도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답이 성령님께 있습니다.
성령은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느끼고, 순종해 보십시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보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 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능력있고,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안 계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이미 오셨습니다. 성령이 이미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믿었고,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성령을 마음껏 누리시고,
또 그 성령과 함께 매일매일 민감하게 그분에게 반응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고,
그분이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성령의 인도대로 따라가기로 결정한다면,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기이하고 놀라운, 그리고 초월적인,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도 남을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경험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하고 있는
성령님을 우리의 마음과 삶의 한가운데로
깊이 다시 인정해 드리고, 존중해 드리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따라가고,
인도를 받는 성령과 함께 걷는 일상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실패로 살아가는 게 당연하게 이겼던 우리의 삶을 청산하고
이제 성령과 함께 또 다른 차원의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성령과 함께 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