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2 15 주일 말씀 / 창세기 강해 (5) / 창세기 2:1-3 / 안식 Youtube
◈안식 창2:1-3 2026.02.15. 창세기강해5
오늘 본문 창세기 2장입니다. 2: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앞에 창세기 1: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었죠.
1:1절이 창조의 시작이라면
2:1절은 창조의 끝입니다.
1: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가, 2:1절에서 끝납니다.
1:1절과 2:1절은 시작과 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셨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끝내셨습니다. 오늘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일곱째 날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도 피곤하셨을까요?
6일 동안 일하시느라 피곤하고 지치신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이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사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처럼 피로를 느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는,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히 마쳤기 때문입니다.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 라고 하실만큼 완벽하게 끝났기 때문에 안식하셨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안식’이라는 단어와 같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이루었다, 마쳤다’라는 단어입니다.
2:2절에 보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3절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으니라’
‘이루었다, 마쳤다’라는 단어가 ‘안식’ 앞에 나옵니다.
‘안식’ 그러면 우리는 머릿속에 피곤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는, 피곤해서가 아니라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일을 다 완벽하게 끝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이 남았으면 쉬지를 못합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닙니다.
안식이 안 됩니다. 찝찝하고 불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피곤해서가 아니라,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창조는, 점진적 창조가 아니라, 완성된 창조입니다.
코넬리우스 반담 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점점 개선되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과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가 처음부터 좋았으며 완성된 전체로서 심히 좋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악이나 불안전함의 근원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혀 없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심히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요. 점진적 창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된 창조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바로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더 이상 손댈 게 없는 완벽한 창조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이 안식하신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도 이 하나님의 리듬으로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대로 안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출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 4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출20:8~10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20:11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6일 일하고 하루를 쉽니다. 물론 주 5일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7일의 리듬으로 살아갑니다. 7일마다 하루를 쉽니다.
왜 이런 리듬을 갖게 되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7일에 하루를 쉬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기를 들었던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였는데요.
프랑스 대혁명은 사실 반기독교(가톨릭) 혁명이었습니다.
이 혁명 세력이 프랑스에서 기독교의 색채를 다 없애기 원했는데,
달력이 너무 기독교적이었습니다.
달력 자체가 6일을 일하고 하루 쉬게 되어 있는, 기독교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혁명주체 세력들은, 이 달력부터 갈아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프랑스 달력을 고안해 냅니다. ‘굳이 7일을 1주일로 정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우리는 열흘 주기로 달력을 만들자.'
해서 10일 주기의 십진법 달력을 도입했습니다.
주일이 사라진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 5일째 되는 날, 절반만 일하라고 했습니다.
0.5일을 쉬는 거죠. 그리고 10일째 되는 날을 '데카트'라고 부르는데 하루 종일 쉬었습니다.
그러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 환영할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사람들이 적응을 못했습니다. 경제가 붕괴했습니다.
자살율이 치솟았습니다. 생산성이 곤두박질 쳤습니다. 혁명 세력들이 말했습니다.
'아휴 그동안 너무 7일째 쉬는 것에 익숙해서 그렇다고...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 거라고...
몇 년만 더 하면 곧 적응할 거라고... 이 달력이 정착되고 더 좋아질 거라고...'
그런데 신기하죠. 12년 동안을 시행해도, 프랑스인들이 적응을 못합니다.
결국 12년 만에 다시 '7일 주기 달력'으로 복귀하게 됐습니다.
왜 새 달력이 실패를 했을까요? 왜 모든 나라가 7일을 한 주로 채택하고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냥 경험상 7일로 한 주를 묶는 게 좋더라'고 알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리듬으로 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7일의 리듬으로 태초에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6일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7일째 안식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 일곱째 날, 이 안식일을 매우 특별하게 다루셨습니다.
본문 3절인데요. 우리 3절을 같이 한번 읽어볼게요.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보시면 두 개의 키워드가 나옵니다.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일곱째 날 안식일이 얼마나 특별한가 하면,
첫째 이 날은 하나님이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둘째 이 날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1. 첫째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복되게 하셨다’는 말은, 그날에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까지 어떤 날에도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첫째 날 보시기에 좋았다고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시기에 좋다고는 하셨어도
그 날에는 복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섯째 날에도 복을 주신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일곱째 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날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날입니다.
특별히 ‘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바라크 입니다. 이 단어는 ‘무릎 꿇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이 이 일곱째 날이 왜 복받는 날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이 날은 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즉 공휴일이 아니라, 예배하는 날입니다.
겔46:3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 하루에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
안식일은 뭐하는 날이라고요? ‘하나님 앞에 예배할 것이며’
안식일은 예배하는 날입니다.
레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일곱째 날은 성회의 날이라’
성회의 날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예배의 날입니다.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닙니다. 집에서 퍼지는(쉬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날 복을 주시는 이유는,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그치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육체에 복을 주십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복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비결은, 세상에서 일하는 6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인 일곱째 날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6일을 잘 살아도 이 일곱째 날이 잘못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7째 날을 복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날로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7째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구별되게 지킬 때...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으십니까?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2절에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여러분 우리가 6일 동안 열심히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일 동안 열심히 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6일 동안 일찍이 일어나 늦게 눕는.. 열심히 직장 일에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즉 여호와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헛되고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6일을 내 힘으로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인생입니다.
이뤘다고 보일지라도, 결국 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특별히 복 주시는 날,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날이,
바로 일곱째 날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여러분의 영혼과 육체가 복을 받습니다.
실제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안식일은 오늘날 주일인데요.
하나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힘을 얻습니다.
예배할 때 우리는 진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예배드리기 전에는 얼굴에 낙심이 있습니다. 뭔가 어둡습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고 나갈 때, 어둡던 얼굴이 밝아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살려주셨구나 그 마음을 일으켜 주셨구나’
이게 진짜 복 아닙니까?
반대로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죽습니다. 힘을 잃습니다. 불안합니다. 방황합니다.
안식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 빠지고 경치 좋은 데 놀러가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가 없고,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7일째 안식일, 이 예배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마르바 던은 <안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킨다」
너무나도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안식일을 위해 우리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막2:27
안식일이 우리를 지킵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 날에, 복 주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안식일은 복받는 날일 뿐 아니라, 거룩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곱째 날이, 이전의 엿새와 두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첫째 이날은 복받는 날, 두 번째 이날은 거룩한 날입니다.
앞에 6일은 다 좋은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특별합니다. 단순히 좋은 날이 아닙니다. 복받는 날이고 거룩한 날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께서 최초로 거룩하게 하신 대상이 뭐였다는 말입니까?
‘시간이었다. 안식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선언입니다.
고대 근동의 종교들은 다 공간을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장소를 성스럽게 여겼습니다.
성스러운 산, 성스러운 우물, 성스러운 나무, 성스러운 돌, 다 어떤 공간의 거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시간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헷셀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공간 속에 거룩함을 가르치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거룩함을 가르친다.
안식일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지성소이다.」
탁월한 통찰력 아닙니까? 신성한 장소가 아닙니다.
신성한 시간, 기독교는 거룩한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일곱째 날 안식일입니다.
특별히 ‘거룩’의 히브리어 단어가 카도시 입니다.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 카도시는 ‘구별하다, 따로 떼어놓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구별이냐면, 하나님을 위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을 때 카도시 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안식일은 철저히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안식일은 누구의 날이라는 강조입니까?
하나님의 날이라는 강조입니다.
물론 앞에 6일도 하나님의 날입니다. 시간의 주인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로 따로 떼어놓은 특별한 날입니다.
한번 확인해 볼까요?
출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누구의 안식일이라고 하십니까? 나의 안식일, 하나님의 날입니다.
나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 하나님께 속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그날을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로 구별했습니다.
제가 신년 특별새벽기도회 때도 말씀을 드렸는데요. 요즘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꼭 주일만 거룩한 날이냐? 모든 날이 다 거룩한 날이다.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날이다.
그러니 주일만 아니라, 평일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걸 남용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냈냐면 ‘주일의 평일화’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주일도 평일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주일의 구별(거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은 분명 일곱째 날, 이 주일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날로, 하나님 중심의 날로, 구별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따로 떼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6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되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날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 나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하나님의 날로
떼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평일과는 다른 날로 떼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안식일을 구별해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날을 특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복을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하나님의 날,
하나님께 속한 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첫째는 그쳐야 합니다. 즉 멈춰야 합니다.
이 안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샤바트입니다.
이 샤바트라는 단어는 ‘쉰다’라는 의미보다는, ‘하던 일을 멈춘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지만, 하던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은, 시험 공부를 멈춰야 합니다.
장사하는 성도는, 장사를 멈춰야 합니다. 평소에 하던 일을 멈춰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 부득이하게 멈추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생명과 관련된 일들은 멈추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의료, 치안, 국방, 인명구조와 관련된 일은 목숨과 관련된 일은 멈추면 안됩니다.
만약 모든 의료진과 군인과 경찰과 소방관이 주일에 쉰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주일에 근무가 겹치면, 주일이 아닌 다른 날 하루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고는 다 멈춰야 합니다.
자기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는 멈춰야 합니다. 평소에 하던 일을 다 멈춰야 합니다.
자 그리고 무엇보다 멈춰야 할 게 있습니다. 어떤 멈춤이냐면,
내가 하나님 되려는 시도들을 다 멈춰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되려는 노력들을 멈춰야 합니다.
내가 마치 하나님처럼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모든 노력과 시도들을 멈춰야 합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가 주일에도 일을 멈추지 못합니까?
학생들은 학원을 멈추지 못하고 돈 버는 사람들은 왜 장사를 멈추지 못합니까?
내가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입니다. 이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고 주관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주일을 지키면 그만큼 손해가 있습니다. 그만큼 공부를 못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돈을 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삶을 책임지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바로 주일 성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 위에 함께 하십니다. 약속된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 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기억해야 합니다.
뭘 기억해야 하냐면, 이 기억이라는 단어는, 다른 의미의 기억입니다.
뭘 기억해야 하냐면, ‘시간의 주인’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셨으니’ 2:3
하나님은 일곱째 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 속한 날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나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날의 주인, 시간의 주인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주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까?
이 날도 나의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의 주인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하며 하루를 보내는 거죠.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 독서 모임에서 나누고 있는 책 중에 하나인데요.
스카치테이프가 아닙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이 스크루테이프는 악마의 이름이죠. 스크루테이프라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삼촌 악마가,
풋내기 조카 악마 웜우드 에게 쓴 편지입니다. 악마가 왜 편지를 썼겠어요? 나쁜 의도겠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릴 수 있을까?’ 그 계략을 조카에게 전수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21번째 편지를 보면, 스크루테이프가 조카마귀 웜우드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제가 한 부분을 발췌해 봤는데요.
「이제 너도 알아챘겠지만, 사람이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을,
이 시간을 느닷없이 빼앗겨 버리는 것만큼 화내기 쉬운 상황은 없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있다는 거죠. ‘내 시간은 내가 주인이다’)
퇴근하고 한적한 저녁 시간을 보내길 고대했는데, 뜻하지 않는 손님이 왔다거나,
또 친구의 아내가 마구 수다를 떤다거나,
친구와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하는 작은 일들이 환자(기독교인)의 절제심을 무너뜨린다.
이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야
네 환자(웜우드 담당 기독교인)도 이런 사소한 결례를 참지 못할 만큼 무자비하거나
나태한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 시간은 그야말로 자기 것인데,
도둑맞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 다음이 킬 포인트입니다)
그러니 너는 열심을 다해 ‘내 시간은 나의 것’이라는 그 기묘한 전제가
환자의 마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꼭 틀어막아야 한다.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서, 매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라!
신자들의 어둠의 중심에 ‘내가 시간의 주인’이라는 그 기묘한 전제가
환자의 마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네가 꼭 틀어막아야 한다.
마치 자신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 소유로서
매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라고!
신자들의 어둠의 중심에, 내가 시간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도록.. 네가 공작을 펼치라고!」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사단의 목표가 이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이 자기의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일마저도, 우리가 시간의 주인인 것처럼 떠들게 만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스크루테이프가 조카마귀 웜우드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들 하여금 시간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라고!
그러면 그 시간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면, 화를 내게 된다고...
자기 시간이 도둑 맞아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된다고...’
그렇게해서 기독교인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주일날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주일의 예배 시간도 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편의대로, 내 상황대로... 만약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예배 시간이 이것밖에 없냐고요. 그런데 화내는 기저에는 뭐가 있죠?
내 시간이 빼앗겼다는 분노가 있습니다.
주일마저도 하나님의 날이 아니라, 나의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니요. 어느 시간이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이니까요.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회유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너무나 수고했어. 그래서 나는 오늘 주일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하면서 푹 쉴 권리가 있어. 나는 오늘 여행할 거야.
오늘은 예배에 빠지고 여행 갈 거야.. 아니면 나는 오늘 집에서 퍼질 거야..’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것 또한 시간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을 잘 지키려면, 여러분, 시간의 주인을 날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거 놓치고 살 때가 많거든요.
왜냐하면 평소에 어쨌든 시간 관리를 하면서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면 내 시간, 내가 시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시간의 주인을 확인해야 합니다.
특별히 주일에는 더 선포해야 합니다.
‘주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이다!’라는 고백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요. 안식일을 지키되 기쁨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는 저항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면 저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안식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1차 독자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아닙니까?
애굽에서 그들은 쉼이 없었습니다. 안식이 없었습니다.
출5: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에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모세는 바로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약길로 사흘쯤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모세의 요구에 바로가 답합니다.
그게 위 5절입니다.
‘바로가 또 이르되 이 땅에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출5:5
여기 ‘쉰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보면 놀라운 단어입니다. 샤바트라는 단어인데요.
오늘 본문에 ‘안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왕 바로는 뭘 주지 않는 사람이냐면, 안식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배하러 가지 말고,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가만히 보면, 바로의 체제와 같습니다. 애굽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노예로 살던 체제아래서의
삶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깁니다. 끊임없는 생산, 끊임없는 성과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재독 철학자 한병철씨가 이 시대를 ‘피로사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가 바로의 체제처럼 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더 공부하라고 말합니다. 예배도 빠지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냅니다.
회사는 쉬지 말고 더 열심히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승진할 수 있으니까요.
안식일에는 더 열심히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더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세상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은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월터 부르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려면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을 구별하여 잘 지키기 위해서, 저항한 적 있으십니까?
저항하며 사십니까?
▲다 아시는 예화일 수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영국 단거리 국가대표로 나간 에릭 리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국가대표로 출전을 했는데, 자기 주 종목인 100미터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나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국가대표인데요. 온갖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주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옹졸한 신앙인, 조국을 배신한 배반자...’
그러나 그는 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동료가 부상을 당해서
100M가 아닌 400M 경기에, 생애 처음으로 처음으로 리들은 출전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경기에서 자기 주종목이 아닌데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게 됩니다. 처음 뛰는 종목이었는데요.
그리고 그는 후에, 중국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영화인데요. <불의 전차>라는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주일을 지키고도 손해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릭 리들처럼 주일을 지켜서 금메달을 딴 사람도 있지만,
선수 선발 자체가 안 된 사람도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다 이 세상에서 금메달 따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내가 적어도 이 세상에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선택한 적이 있다’는
간증을 선물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을 복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식을 구별하여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 가지를 기억합시다 멈춤, 기억, 저항,
-하던 일을 멈추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 되려는 시도를 멈추기 바랍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일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날입니다.
-세상에 저항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일에도 저항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안식이를 지킴으로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