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택하라 렘21:1-14
◑예레미야가 심판을 예고하다 21:1~10 출처, 정리 예레미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이는 BC 588년의 일로, 이집트의 파라오 호브라의 군사지원에 힘입어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반역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오래 전부터 이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예언했음을 기억하고
사람들을 예레미야에게 보냅니다.
▲21: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예레미야를 찾아갔던 사람은 모두 둘, 바스훌과 스바냐입니다.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20장에서 예레미야를 때렸던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 다른 사람입니다.
이 바스훌은 렘38:4절에 언급된 “대신들”의 범주에 드는 사람으로, 정치인이었습니다.
한편 스바냐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렘 29:25, 29; 37:3).
만약 이 스바냐가 52:24절에서 언급된 부제사장이라면,
그는 사건 당시, 유다의 제사장 중에 두번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자면, 지금 예레미야를 찾아온 바스훌과 스바냐는
왕이 신임하는 정치인과 종교인으로,
바벨론의 침공을 초래한 친이집트 그룹의 핵심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 없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1:2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시드기야의 머릿속에는 선대先代 왕인, 히스기야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시드기야 때는 바벨론이지만, 그 당시에는 앗수르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이 보낸 협박 편지를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 저 원수들이 우리를 이처럼 모독하고
여호와 하나님 이름을 모독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어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전염병을 보내서 그 다음날 일어나니까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다 병들어 송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앗수르 군대 침략에서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런 스토리가 열왕기하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그런 역사를 알고있기 때문에, 그 기적을 생각하며 지금 기적을 원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그런 기적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주지 아니하실까?’
하는 신앙을 가리켜 요행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 기적을 일으켜 주시면 우리가 살아 날 텐데.”하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기도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삶속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의 평소 모습은 없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할 때, 슈퍼맨처럼 나타나셔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고,
자판기처럼 내가 원하는 것들만 공급해주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이 주신 인생을 살아갈 의무가 있습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품고 이뤄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예레미야의 대답은 절망적입니다. 그들이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지난 시간 동안 한결 같이 선포해왔던 메시지였습니다.
렘21:5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6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느부갓네살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기적적인 구출은 없을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들과 싸울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2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강한 팔로, 그동안의 진노를 유다에게 쏟으실 것이고,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다 쳐서 죽게 만들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포위된 상황입니다. *총 2년 반 가량 포위됨
얼마간의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면 영양실조에 걸립니다.
면역력이 약해지고, 전염병이 발생하여 사람과 짐승들이 죽어나갑니다.
허기가 지니 전투력이 약해지고, 성이 함락되면,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느부갓네살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비도, 연민도, 동정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말입니다.
21:8-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다는 선포입니다. 사는 길은 딱 하나, 항복뿐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는 이 말은,
다른 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예레미야에서만 네 번 등장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생을 덤으로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나라를 등진 배신자의 조언처럼 들렸을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항복하기를 거절한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우리 삶의 판단 근거가 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김정일이 쳐들어왔는데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 서서
“여러분 김정일에게 항복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끝까지 싸워서 나라를 지켜야지 저런 매국노가 있나?” 할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해라. 그러면 산다.
예루살렘 성안에 있으면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대언한 이유는, 그 진의는, 하나님이 정하신 벌을 달게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 중에 변화되어 돌아오라는 거죠.
하나님이 유다를 등졌습니다. 맹렬한 진노로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다.
살려면 항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마땅히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유다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말씀 따라 살아갈 용기가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목숨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두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나라가 참 소중합니다.
이 나라의 안녕과 번영,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나라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관심과 참여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바대로 움직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자신의 정치지향으로 사람들을 손가락질 해서도 안되고,
자신의 지향점과 다르다 하여 정죄해서도 안됩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인간 논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권이.. 세상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찾아온 왕의 사절단 앞에서,
항복하는 사람만이 살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선포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세상의 생각과 정면으로 부딪히더라도,
예레미야처럼 말씀대로 사는 것 때문에 고난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선포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으셨으면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걸어야 할, 주님 따르는 길입니다.
◑유다 왕과 지도층에 내리는 경고와 심판의 말씀 21:11~14
11절부터는 유다 왕가에 내리는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왕의 사절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1: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은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인간 왕으로서의 책무에 충실할 것을
명령합니다. 왕이 아침마다 공무를 집행할 때,
억압 받고 착취 당하는 이들을 정의로운 판결로 구원해야 합니다.
힘있는 이들과 연이 닿지 않고,
힘이 없어 자기가 가진 것조차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감당해야 할 가장 본연의 일에 충실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전쟁 상황입니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인 상황에,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말씀이
“충실하게 왕의 책무를 감당하라”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물러나는 것, 다시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주어진 하루를 말씀대로 살아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어서 바벨론이 침공을 해왔지만 실상 바벨론은 하나님의 손과 발일 뿐,
유다를 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21:1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삼면이 급경사의 계곡으로 둘러쌓여 성을 지키기에 아주 유리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다윗이 처음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원주민이었던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조롱하며, “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삼하5:6)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천혜의 요새를 하나님께서 직접 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기회를 주시며, 돌이키기를 기다리시지만
진정한 회개 없이 자기 욕망에만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언제가 하나님이 어려움을 겪게 하실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우리의 지나온 여정을 반추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인생길을 조율해야 합니다. 바로 이 삶을 위해, 우리 주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의 무기로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일성에게 항복하라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거민들은 칼과 기근과 염병 그리고 무자비한 학살로 모두다 죽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기 목전에서 아들들이 처형당하는 꼴을 보고
자기 자신도 두 눈이 뽑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어 항복하지 않고 두 눈이 뽑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매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흐릿하지 않고 분명합니다. 본문 8절 후반에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대로 앉아 있으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이니, 일어나 생명의 길로 가라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칼과 기근과 염병에 걸려 죽을 것이니
그대로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 생명의 길로 가라’는 말입니다.
◑적용 -이 단락 출처-
렘2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모세도 신명기에서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신30:19절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모세의 말이나 예레미야의 말이나
모두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모두 신약성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실체인 것입니다.
마7장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좁은 길과 넓은 길에 관해 말씀하셨죠.
마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전 세계 사람 중 95%가 넓은 길로 간다고 해도, 그 길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넓은 길을 따라가면.. 친구가 많아 좋아보여도, 가다보면 낭떠러지에 다 떨어져 죽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 보고 계시므로, 사람들이 그길로 가는 것을 그냥 놔두시지 않으시죠.
그리고 “여기에 좁은 길이 있다. 길이 좁고 협착하며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이긴 하지만
내가 보니까 그 길이 사는 길이고 그 길로 쭉 가면 생명이 나오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 길과 지옥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좁은 길과 넓은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에 두 길을 두셨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중간 길도 없습니다.
우리는 두 길 중에 하나를 가야되는 것입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이 두 가지를 결정해 주는
그 길을 우리는 가야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좀 잃었다고 할지라도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돈이야 잃을 때도 있고 딸 때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Frank Sinatra의 “My Way”를 좋아합니다.
이 노래 중에 “내가 잃어야 될 몫(my share of losing)도 내가 잃었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딸 때도 있지만 잃을 때도 있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돈을 벌 때도 있지만, 잃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으면 “그러려니”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업도 잘 될 때도 있고 못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생의 문제는 생명이냐 사망이냐 하는 영원한 문제에 비하면
중요치 않다(insignificant)는 말입니다.
▲사망의 길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죽었느냐 살았느냐 이런 주제를 생각하면 보통 육신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관하여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먼저 현재적 사망(present death)이 있습니다.
엡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귀와 그 졸개인 귀신들을 숭상하고 죄와 허물을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죽을 사람이나 죽을 뻔한 사람도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소망, 축복, 선, 진리, 천국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육신은 살아 숨을 쉴지라도 영혼은 죽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몸은 살아서 걸어 다녀도 영혼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산송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엡2:4~5절에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육신이 죽어 천국에 갔더라도
그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를 따르며 죄용서 못 받고
죄와 허물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적인 사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eternal death)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는 시간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갈 세상은 영원(eternity) 세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에 살면서 영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원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실제(real)적이듯이
영원도 실제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을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원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 약 70~80년의 현세 혹은 이생의 삶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70~80년의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며 출세하고 높아지며
돈 벌고 명예를 가졌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죽고 난 후에 내세를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곳에서 영영한 불 못에서 고통 받고 지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련한 사람이요 영원한 사망, 둘째 사망을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Synoptic Gospel)이라고 합니다.
보는 관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질문이 있습니다. 마16: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목숨은 영혼 soul을 말합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사랑하다가
그 영혼은 영영히 타는 불 못에서 영영토록 고통을 받게 되는 길을 간다면
그는 자기 영혼을 저주하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현재 살아도 죽었고
또 육신의 사망을 하게 되면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게 된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2천년동안 하나님의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온 책이요
베스트셀러입니다. 마귀와 수많은 비판가들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했지만 결코 부인하지 못한 책입니다.
물론 성경은 육체적인 사망도 말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되고, 여름이 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되면 죽습니다. 자연이 그런 것처럼 우리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봄을 가는 사람도 있고 여름을 가는 사람도있습니다.
물론 여름을 가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가을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가도 겨울은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때가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사망은 단순히 이사가는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육신은 장막 집(tent)으로 흙으로 지워졌습니다. 저는 몇 일전 나산백화점 무너질 때
그 옆에 지나갔습니다. 건물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저는 철거를 위해
일부러 폭파하는 줄 알았는데, 사고로 무너져 사람도 죽었다고 하는 끔찍한 말을 들었습니다.
육신의 집은 나산백화점 무너지듯이 무너질 때가 옵니다. *2008.10.31. 서울 논현동
그런데 이 집이 무너져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으로
이사 가는 줄로 믿으십시오.
죽는 것은 이사 가는 것이므로, 먼저 돌아가신 분들은 없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산자의 땅, 영원한 집에 지금 살아계신 줄로 믿으십시오.
그러므로 육체적인 사망을 두려워하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여 현재적인 사망 상태에 있다가
영원한 사망에 들어갈 이것을 두려워하고 이것을 벗어나야 할 줄로믿습니다.
사람이 사망의 길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만있으면 저절로 사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리 그곳이 난공불락의 성일지라도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안 하면 저절로 영원 사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망의 길에서 나와 생명의 길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의 길은 어떤 것인가?
본문에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라고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지금 하나님의 종으로 와서 예루살렘을 벌주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잠21:1절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면 그가 아무리 잔인해도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주장해 항복한 사람을 모두 살려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바라는 것은 요행과 기적이지만
하나님의 요구는 “무기를 버리고 무조건 항복해라. 그것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대언한 이유는, 그 진의는, 하나님이 정하신 벌을 달게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난 중에 변화되어 돌아오라는 거죠)
▲17세기 영국침례교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이 존 번연(John Bunyan)입니다.
그는 성경 다음으로 유명한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이라는 책을저술했습니다.
그런데 천로역정 다음으로 유명한 책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인간 영혼이라는 뜻을 가진 맨소울 (Mansoul)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를 마귀를 의미하는 디아볼로스(Diabolos)라는 자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주민들은 디아볼로스의 지배를 받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마누엘(Immanuel)왕이 맨소울의 주민을 구하러 왔습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 해서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맨소울의 주민들은 디아볼로스의 사주를 받아서 임마누엘을 대적합니다.
구원하러 온 왕을 대적하고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 왕은 전능한 왕이라, 반항자를 죽입니다.
그렇지만 항복하는 사람은 살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Holy War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죽을 고통에 처하면 요행과 기적을 바랄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해도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살길은 요행이나 우연히 기적처럼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축복과 은혜는 요행히 오거나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길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임마누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항복하는데서
오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구원자에게 반항하고 대항하며 무시합니까?
그분이 만왕의 왕(King of the Kings)이고 만주의 주(Lord of the Lords)이신데
만왕의 왕을 무시하면 살아남겠습니까?
지옥은 도둑질, 살인, 간음한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들이 만왕의 왕에게 항복하면 천국 즉, 생명으로 가는 것이지만 항복하지 않고 대항하면
지옥 즉, 멸망으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요16:8~9절에도 “보혜사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항하고 거역한 죄를 회개하시고 그에게 손을 들고
전적인 항복, 완전한 항복, 전적인 순종, 전적인 신뢰, 전적인 믿음을 보여야 됩니다.
이것이 살 길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분 계십니까?
사람들에게 구걸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만 금식해보십시오.
3일째 되면 자기 문제가 별것 아니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4일째 되면 “이렇게 하면 산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5일째 되면 용기가 생기고 6일째 되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기적을 일으키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으면 항복하지 않음만큼
사망의 세력이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항복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쳐들어 왔을 때 예루살렘에 머물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는 것은
누가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왕에게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내나 남편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홀로 결정해야 됩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사망이다. 지금도 내가 가는 길은 사망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께 항복하겠다. 이 길이 살길이다.”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이미 항복하여 사시는 분은 이미 사신 줄로 믿으십시오.
그러나 항복했다가도 또 반항하고 그러면 항복하지 않고 반항하는 만큼
사망의 세력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항복, 완전한 항복, 전적인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