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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3장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을 걷다

LNCK 2026. 3. 4. 18:0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여호수아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을 걷다 2026-02-22 Youtube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을 걷다            수3:1~5                   2026-02-22 

 

◑도입 /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새로운 일 없이, 늘 루틴을 반복하며 사는 사람들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우리는 자유롭다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실은 틀에 박힌 행동의 패턴을 보인다고 합니다.

 

노스이스턴 대학교의 알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교수께서 최근에 책 한 권을 집필하셨어요.

<포뮬러>라는 책인데, 그 연구팀들은 사람들이 쓰는 핸드폰에 주목했습니다.

 

핸드폰에는 그 사람이 어느 장소에 머물렀던가에 대한 정보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핸드폰 속에, 우리가 어느 장소를 갔는지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는 것이죠.

 

약 5만명의 사람들의 사용 이력을 조사해 보고 결과를 내렸는데

어떤 걸 연구했냐면 ‘개인의 이동의 불확실성’을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는 불확실성이 1.74로 너무나 낮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어느 정도의 수치냐면, 한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평균 두 곳 이내로 좁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많은 곳을 다니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가를 짐작할 때,

보통 ‘이곳 아니면 저곳이다’ 그 짐작 가능한 곳에, 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개 ‘다니는 곳에만 다닌다’는 뜻이지요.

 

저도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요.

한 달 동안 제가 다녔던 이동 동선을 생각해보니까, 집 아니면 교회인 것입니다.

제 인생 역시 제가 자유롭다고 여겼는데,

제가 가는 공간이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우리는, 우리가 앉는 자기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늘 자기가 앉는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가 조금 늦게 와서,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죠.

‘내 자리에 앉았네...’ 여러분, 교회에 내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많은 음식이 있는데,

우리는 꼭 몇 가지, 내가 주로 먹는 몇 가지를 선택해서 먹습니다.

해외 나가도, 한국 여행객의 절반 정도는 한식을 찾는 거죠.

 

집에서 교회까지 오는 길도,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많은 길이 있는데, 꼭 가던 길만 갑니다.

 

죄를 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죄를 다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넘어지는 ‘이것 아니면 저것의 죄’가 있습니다.

 

상처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상처를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과거의 일정한 패턴의 묶여 있는 사람인가요?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단순한 습관의 문제라면 큰 상관이 없겠지만,

인생 전체가 과거에 묶여 있어서, 하나님이 새롭게 인도하신 그 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만들어놓으신 새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새롭고 놀라운 일이 됩니다.

 

길이 없는 광야 가운데 길을 만드시고

물이 없는 사막 가운데 강을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본인 스스로가 선언하셨어요. ‘내가 곧 길이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정리하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냐면, 길을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그분과 함께하면, 모든 길이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까지 들어오면, 과거에 묶여있던 그 어떤 것인지 간에,

상처이든지 간에, 죄이든지 간에,

묶여있던 모든 것의 자유함을 누리고, 새롭게 만드시는 길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이 이전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수3:4b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그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40년 전에 그들의 부모 세대는, 이 길을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모들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두려움과 불신의 마음으로 그 길을 거절합니다.

 

그 길을 거절하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길을 선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평생 살아왔던, 애굽과 광야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을 이미 너에게 주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그 결정적인 순간에, 새로운 길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들이 익숙했던 과거의 길을 더듬어 찾아가, 광야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새 길을 밟지 못했어요. 그렇게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들의 자녀 세대가, 지금 동일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형편은 그들의 부모 때보다 더욱 안 좋았습니다.

넘실거리는 요단강이 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본문 3:15a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지금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그 길로 들어가야 되는데, 요단강이 그 길을 막고 있는 겁니다.

‘이때는 곡식 거두는 시기였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보통 건기 때 요단강의 너비는 30M 정도입니다. 그 깊이도 깊지 않고,

평균 어른 허리 정도의 깊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강인데, 우기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기는 보통 11월~ 이듬해 4월인데, 곡식 추수기가 우기에 속합니다.

 

요단강은 헐먼산과 레바논의 만년설이 사시사철 녹아내리는데,

우기 때는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요단강은 낮은 지역에 있기 때문에, 빗물이 요단강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때는 강 너비가 1.6KM까지 확장되고, 물의 시속이 16KM에 달하는 급류가 만들어집니다.

 

이 강은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굉장히 큰 어려움에 봉착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요단강을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이들 전부는 광야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넘실대는 강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인생에 처음 강을 만난 것입니다. 강에 대한 개념은, 부모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저 땅에 가면 강들이 있다는데 강이 뭡니까?’

‘강이란 물이 이렇게 흐르는 거야’ 라는 정도의 개념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텐데,

그들은 난생 처음 강이란 것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난생 처음 보았던 그 강, 지금 강물이 강둑을 넘칠 듯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들의 눈에 보이는 요단강은, 강이 아니라 거대한 홍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요단강이 있습니다. 살면서 처음 경험해보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야 되는데,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있는 겁니다.

 

말로는 그와 같은 장애물들을 귀로 들었습니다.

마치 강에 대한 개념을 들었던 것처럼...

 

그 질병, 그 빈곤, 그 고통, 그 상처, 그 헤어짐에 대한 개념은,

여러 많은 정보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이 실제로 내 인생 가운데 펼쳐질 때는, 새로운 개념이 들어오는 것이죠.

전혀 다른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 앞에 누구나 다 두려워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죠.

 

오늘 설교는, 그와 같은 요단강을 만난 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요단강이 있는 분들을 위한 말씀이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길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3:4b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아멘.

 

‘너희가 한 번도 이와 같은 길을 걸어본 적이 없을 텐데,

내가 요단강 가운데 길을 낼 것이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한 길을 내가 만들 것이다’

 

3:5b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아멘!

 

‘지금은 비록 요단강이 길을 막고 있지만,

내일이 되면 여호와께서 너희들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를 믿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미 시작한 2026년 모든 길을 걸어갈 때마다,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 그 기이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새로운 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세 가지의 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는,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십시오!>

 

기대하는 사람은, 새벽에 일찍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십시오. 우리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1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가 언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는 왜 아침 일찍 일어났을까요? 그는 새벽잠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니에요.

 

여호수아가 왜 아침 일찍 일어났냐면, 내일 행하실 하나님의 일이 기대되었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받는 모든 땅을 너에게 줄 것이다’ 1:3, 6

 

그 땅을 밟아야 되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정탐꾼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땅에 모든 백성의 간담이 녹더이다. 2:24

지금 들어가서 그냥 공격하면 우리 땅이 됩니다.’

그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늦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여호수아는 내일이 설레였던 겁니다.

내일 행하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늦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죠.

 

본문에 쓰여있는 ‘아침에 일어났다’는 말은, 몇 시쯤이 될까요?

본문에 쓰여있는 아침은, 원어로 보면 ‘보케르’ 인데,

그 의미는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대충 ‘오전’이 아니라, 어둠이 물러가 빛이 시작되는 시간을 말합니다. 이른 아침 여명 때죠.

이 단어가 창1장에 6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창1:5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러분, 창1장에 아침이 여섯 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가 그날 아침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쓰여있는 이 ‘아침’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을 말합니다.

 

어제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새로운 창조가 벌어지는 그 시간을 '아침'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지만,

창조의 하나님의 아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는 겁니다.

 

본문에 ‘일찍이 일어나서’는  3:1

의지적으로 자신을 깨워 일으킨 겁니다.

의지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자신을 깨운 것입니다.

 

여러분, 2026년에는 새벽마다 눈이 벌떡 떠지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놀라운 길을 펼치실 것인데, 그 기대감을 가지고 주무시고,

그 기대감을 가지고, 날마다 아침을 깨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맞이한 이 아침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새벽 예배에 나오십시오.

정확히 그 시간입니다. 새벽에 나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직 태양이 다 뜨지 않았어요.

어둡습니다. 어둠을 가르고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도착할 때쯤, 아니면 기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쯤 되면,

먼 동이 트고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본문 수3:1절이 정확히 그 시간이에요.

 

여러분 새벽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다 공감하시겠지만,

여러분 새벽 예배 나오실 때 어떤 마음 갖고 나오세요?

‘피곤해 죽겠다’ 이런 마음입니까?

 

물론 몸은 피곤할 수 있지만, 우리 마음은 어떤 마음이죠?

‘이 새벽에 만날 하나님을 기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

오늘 하루 동안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새벽을 깨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람이 울리기 전에, 하나님의 행하실 그 일들을 기대하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믿음이 있기를 축복해요.

그 기대감을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대합니다. 기대하는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뜰 수밖에 없는 거죠.

 

▲성경을 보면 내일 하나님께서 무언가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믿었던 모든 사람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났어요.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고

돌판을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출34: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어떻게 늦잠 잘 수 있겠니까? 이 돌판에 하나님이 새롭게 말씀을 적어 주실 건데,

어떻게 늦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까?

 

다윗은 늘 속에 있었어요. 동굴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밖에 적들이 있었어요.

그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와 같이 본문의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내일 놀라운 일을 펼치실 것인데,       *요단강 도하

내가 그것을 보기 위하여 새벽을 깨우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은 새벽의 사람이었어요.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아멘. 예수님은 정말 피곤한 일정을 소화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하시던 대로 새벽에 일어나셨어요. 왜요?

피곤하지만 그 육체를 이길 만큼의, ‘오늘/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있었기 때문에, 피곤하신 몸을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의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어떠하든지 간에, 내일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주무시고,

그 다음날 새벽에 온몸이 믿음으로 반응하여, 벌떡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발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래가 없는 사람들처럼, 오늘의 소중한 시간들을 아깝게 흘려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듯 과거의 관성에 매여서

그 안에서 반복적인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주님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 인생 가운데 행하실 것입니다.

 

맨땅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맨땅이 전부라고 믿는 농부는,

그 땅에 씨앗을 뿌릴 수가 없어요.

끝없이 보여지는 바다,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 선장은, 그 가운데 배를 띄우지 않습니다.

오늘 공부하는 영어 단어 하나가 전부라고 믿으면, 영어 공부에 몰입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너머의 것을 믿는다면,

농부가 맨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선장이 망망대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고,

학생은 공부에 열중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의 이 땀이, 피와 눈물이, 새로운 길을 만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자기 인생을 갈아넣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와 같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행하실 길을 믿는 것이죠.

그 믿음으로 한 해를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뒤따라야> 합니다.

 

수3: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말씀을 가만히 보세요. 여호수아는 누구를 따라가라고 말하고 있어요?

가만히 보시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언약궤입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핵심은 언약궤에 있어요. 여러분, 사람 따라가지 마십시오.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에요.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십계명 돌판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놓은 두 개의 돌판이 있습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돌판입니다.

 

2) 만나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시는 또한 돌보시는 하나님을 상징해요.

 

3)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언약궤를 바라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 가기를 원치 않으세요.

반대로 주저앉아 있기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되, 말씀의 속도에 맞춰서, 그 보폭에 맞추어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첫 번째로 말씀드렸던 바,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기대해야 된다고 말씀 드렸어요.

기대감에 있는 사람은 출발합니다. 그런데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그래서 ‘언약궤를 뒤따르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프란츠 카프카라는 분은 이런 말을 남겼어요.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으며, 다른 죄는 모두 여기서 나온다.

그 죄가 뭐냐면 조급함과 게으름이다.

게으른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조급한 사람은 앞서간다.’

두 경우 다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전에, 하나님의 뒤를 따르지 않고, 앞서가려고 했다가 무너졌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었어요. 그 말을 듣자 그들은 익숙한 길을 따라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다음처럼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 모든 부모 세대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그들은, 갑자기 두려움에 쌓여서 뭐라고 떼를 쓰냐면,

‘우리가 광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 당장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뒷북 치는 거죠. 자기들 의지로, 청개구리처럼 떼를 쓰고 있는 것이죠. 민14:28~35

 

이때 모세가 그들을 막으며 이처럼 말했어요.

민14: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조급함이 하나님을 앞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민14:44~45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결국 하나님보다 앞서갔던 그 모든 사람들은 (허락없이 가나안에 들어가려 했던 사람들은)

아말렉과 가나안 인에게 공격을 받아서,

그들이 있던 곳에서 한참 뒤로 후퇴하고 도망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따르십시오. 따르시되 앞지르지 마십시오.

 

▲여호수아는 그래서 한 가지 명령을 더 내립니다.

수3: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제사장의 언약궤를 매는 것을 보면 그 뒤를 따라가는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거리를 2천 규빗 되게 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한 규빗이란 45~50CM입니다.

그러니 이천규빗은 약 900M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되 900M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시고 사랑하는 분이지만, 그분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인구가 200만 정도 됩니다.

 

200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 그 맨 앞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런데 900미터 앞선 지점에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2백만이 되는 모든 사람이 언약궤를 볼 수 있는 거리에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모든 사람이 하나님만 보고 걸어갈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너무 뒤쳐지지도 않고, 앞서지도 않으면서,

일정한 보폭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죠.

만약 언약궤와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2백만 중에 앞사람만 보이고,

뒷사람은 궤가 안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가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해요. 하나님을 따라가되 앞서지 않는 것이며,

그분을 따라가되 그 말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겁니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안정규 선교사님 계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설교를 지난 주간에 듣게 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선교사님께서 아프리카 원주민들 가운데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예배 때마다 너무나 감동이 되었답니다.

 

여러분 혹시 아프리카에서 예배드리는 현장에 가본 적 있습니까?

제가 몇 번 동참해 봤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시작 시간은 있는데, 끝나는 시간이 없어요.

 

찬양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헌금하는 시간만 30분 이상이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열정적으로 찬양합니다.

 

그런데 더 은혜로웠던 것은, 그 회중 가운데 누군가를 상해한 강도도 있고, 도둑놈도 있고,

사기꾼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못 고칠 사람이 없구나’ 확신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희한한 것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가서,

또 사람을 상해하고, 또 훔치고 또 도둑질하고, 다시 들어와 예수 보혈 부르며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그게 너무 이상해서

하루는 마음을 먹고 그 예배에 참석했어요. 그때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찬양합니다.

 

‘지난 주간에 누구를 때렸거든요. 그 전주에 뭐를 훔쳤거든요.’

열정적으로 찬양하면서 ‘주의 보혈로 나를 덮어주시옵소서.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열정적으로 외칩니다.

 

대표 기도 시간에 마이크를 붙잡고, 그분이 또 ‘주의 보혈로 나를 덮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선교사님이 참다 못해 그분의 대표기도를 중간에 끊어버렸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보혈이 다 떨어졌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원주민들이 너무 놀라서 ‘아니 그럼 뭐가 남았습니까?’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힐 여러분의 몸만 남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감격하지만, 기뻐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과거의 자기 습관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 말씀의 무게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따라가십시오. 경외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인생을 향한 그 길들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하여,

세 번째로, 자신을 성결하게 하십시오.

 

수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길로 가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땅을 밟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 스스로를 성결하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성결하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냐면, 원어로 보면 ’카다쉬‘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아요. ‘구별하다, 따로 세우다, 하나님께 속하다’

 

우리는 성결 그러면.. ‘깨끗하다,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결‘이라는 것은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께 속한 상태로 자신을 분리하다’ 라는 의미가 있어요.

여러분 성결이란 무결점의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예배 드리는 순간조차,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결이란 어떤 의미냐면, 자신을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으로

구별해서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지만 여전히 흠이 있지만

내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결이란 세상과 담 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 안에 담아 구별해서 set apart

세상 속으로 들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결이에요.

 

하나님이 내일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성결하게 만드는 겁니다.

 

길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길을 못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시고,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냐면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레위기 전체가 성결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 되게 중요한 구절은 레위기 10:10절 말씀입니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보니까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여’ 라고 되어있는데,

영어성경이 원어적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요.

그래서 속된 것이라고 번역한 영어성경은 뭐라고 되었냐면 ‘더 커먼 the common’입니다.

common 이라는 의미는 무엇이냐면, ‘흔한, 보통의, 평범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말하는

‘흔한, 보통의, 평범한’ 것이 속된 common 것이랍니다.

 

그러면 커먼의 반대말, 성결한 것은 뭐일까요? 언커먼이 되는데,

uncommon 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일반적이지 않은, 특이한, 기이한’ 이게 이제 성결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성결하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봅니까? 특이하게 바라봅니다. 기이하게 바라봅니다.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자기들과 삶의 스타일이 다르니까요. 구별되었으니까요.

 

성도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맞게 살아가면, 우리를 어떻게 바라봅니까?

보통의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성결은 무엇이냐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맞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에 보기에 기이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이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기이하게 여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거룩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내야만 합니다.

 

‘저 사람은 크리스천이라는데, 이상하다, 다르다, 왜 저럴까?’

그런데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상하지만

부끄럽지 않고 부러운 거예요. 닮아가고 싶은 거예요. 영양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매력적으로 느끼는 겁니다. 그게 성결한 삶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부끄러운’에서 ‘끄’자를 빼버리면, 어떤 단어가 됩니까? ‘부러운’이 됩니다.

성결이 그와 같아요. 특이하게 사는 것 같은데 부끄럽지 않은 거예요. 부러운 겁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 거죠.

그럴 때 그 사람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거룩한 일이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결(구별됨)을 지키십시오.

요단강이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요단 강물이 거세니 수영을 배워라. 하체의 힘을 길러라. 뗏목을 만들어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한 가지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너희 자신을 성결하게 지켜라!’

 

성결이 능력입니다. 성결이 성공이에요.

우리는 성공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기도 제목을 가만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그 결론은 무엇이죠? ‘나에게 힘을 주세요. 나를 강하게 해주세요.’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의 결론이잖아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의 힘이다. 너는 스스로 힘이 있기를 원하지만, 내가 너의 힘이다.

네가 성결하면 나의 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냐면, 위대한 전사 대신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무기로

쓰임 받는 거예요.

 

근데 그 무기 가운데, 우리 수준이 칼날이 못됩니다. 우린 그 정도 존재도 아니에요.

우린 단순히 손잡이 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 손잡이가 더러우면(세속과 구분이 안 되면), 그분의 손에 쥐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붙잡힐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성결하게(구별되게) 지켜나가는 하나님의 사람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치는 말

2026년 하나님께서 새롭게 여실, 새롭게 밟을 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기대하십시오. 믿음을 가지세요. 내일 아침을 그냥 맞이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흥분된 마음으로 맞이하십시오.

 

말씀을 따라가세요. 뒤처지지 마시고, 앞서지도 마십시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지켜나가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아름답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