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는 원리 | 고후 12:1-10 | 2026.01.09. Youtube
◈인생을 바꾸는 원리 고후12:1~10 2026.01.09.
자 오늘 본문은, 여러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본문이에요.
우리는 강함을 강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스트롱맨, 슈퍼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 하여튼 할리우드 영화들도 보면
람보, 록키 하여튼 대단하잖아요. 신화적인 존재들처럼 다 강한 사람이에요. 강한 이미지죠.
또 세상은 어때요? 힘의 대결이죠. 양육강식.
약하면 죽고 강하면 살고... 이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에 모든 리더십들은 다 힘을 내세우죠. 트럼프, 얼마나 강력해 보입니까?
푸틴, 완전 감당하지 못할 분들이에요. 다 강한 이미지예요. 힘을 가져야 지도자가 되죠.
이게 세상입니다.
세상은 힘을 숭배해요. 또 힘을 가진 것을 성공이라고 말하고,
세상은 결코 약함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약한 부분을 숨기려고 하죠.
약함을 드러내면 그건 위험한 거죠. 자기가 피해를 입어요.
약하면 보호해주고 이렇게 도와주는 게 아니고, 되려 이용하는 세상이죠.
그게 인간의 악이죠. 이 세상 문화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강하게 보일까?’ 이렇게 노력해요.
항상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거죠. 그런 세상 문화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약하면 안 돼, 강해야 돼!’ 그게 우리에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은 자아도취가 심하죠. ‘너는 자신감을 가져라!’
늘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자녀들에게도 그런 걸 많이 강조합니다. ‘어깨를 쫙 펴!’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들이 늘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 도장을 막 찍어줘요.
자신감을 심어주는 거죠. 별일 안 했는데도 잘했다고 그러고,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넘치는 거죠.
그래서 어린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는, 자기가 다 잘 하는 줄 알아요.
그런데 학교를 가면 이제 달라지죠.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고,
또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많고, 또 자신감만으로 안 된다는 걸 이제 조금씩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상급 학교로 올라가면서, 점점 그게 더 현실화돼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네’
또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하고, 깨질 때가 많이 있는 거죠.
여러분 실제적으로 세상에서 사람들이 맛보는 것은, 성취보다 실패입니다.
성공을 한 사람도 엄청난 실패를 많이 겪은 사람이죠. 그리고 나서 성공을 하는 거죠.
자기 능력의 한계를, 세상 속에서 우리가 처절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강함을 강조하는 이런 문화, 이것은 교회의 바깥에 만연하지만,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도 들어오면 ‘세상 힘’을 가진 사람들이, 교권도 장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저계발국가에 가면, ‘세상 권력자=지주=교회 지도자’를 겸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통 세상 권력자들이, 그 도시에서 최고 부자인데,
기독교가 주류인 나라들에서는, 그가 또 ‘교회 지도자, 목사’인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자기 능력을 발휘해서, 목사 안수까지 받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이런 문화 속에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엄청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고백이죠.
고후11:30절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2:10절에는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바울이 약함을 인정하는 이 모습은
그 세상의 문화와 정반대의 논리죠.
‘약할 때 강함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강함은 강함이고, 약함은 약함이지...
역설을 얘기하는 거죠. 이 말의 뜻을, 사실 우리가 많이 들었어요.
교회를 다녀본 분들이 이 본문을 많이 우리가 들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을, 진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거죠.
여러분, 오늘 이 메시지는, 바울의 삶을 이끌어 가는데, 결정적인 어떤 프린시플, 원리예요.
바울이 바울되게 했던.. 그 바울의 인생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견인해 나갔던 원리가
바로 ‘약할 때 강함이라’ 했던 거예요.
바울의 삶과 사역에 비밀이 있었던 거죠. 엄청난 비밀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바울이 깨달았던 이 원리,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갔던 이 말씀의 원리를,
우리의 삶에 계속 적용해간다면,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바울이 누렸던 그 은혜를
동일하게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굉장히 큰 비밀이 있는 거예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이 대충 넘어가면 안 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는 하는데, 이것을 현실의 삶에 실제화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거죠.
성경적 원리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해봐야 되는 거거든요. ‘체득한다’고 그러죠.
아무리 이론으로 아는 것만 갖고 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이 말씀을 만약에 대충 넘어가고,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돼요.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삶의 태도만 바꾸어도,
이 말씀의 원리가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우선 우리는 강하지 않다는 거죠. 우리는 실제로 약한 존재예요.
‘약할 때 강함이라’ 사실은 우리의 인생이 강해 보여도,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을 길러도, 또 우리가 아무리 지혜를 길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무리 동원해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강함을 드러내려고 하고, 자기 강함을 자랑하고 싶어해요.
자랑거리를 자꾸 만들잖아요.
우리의 커리어나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자랑거리를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게 인생에서 끊임없이 하는 거잖아요.
우리의 모든 노력들이.. 우리의 자랑거리, 우리의 스펙들, 우리의 경력들을
축적해 나가는 거기에 쏟아부어집니다.
오늘 특별히 이 본문에서는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 봤던 신비한 경험을 잠깐 말해요.
이거는 어마어마한 자랑거리예요. 그렇죠? 소위 말하면, 천국을 갔다 온 거예요.
이것은 어마어마한 경험이에요. 누가 이걸 경험해보겠습니까?
바울은 삼층천의 경험을 한 거죠. 근데 자기가 경험했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본문 고후12:1~6절에 보면, 3인칭을 쓰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했다’라고 얘기 하지,
자기가 했다고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자기 입을 닫는 거죠.
자기가 어마어마한 경험을 했는데 입을 닫아요. 자랑의 말을 하지 않는 거죠.
이게 여러분,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맛집 한번만 갔다 와도 자랑하잖아요.
자기가 상 받은 거, 이런 거 다 자랑하잖아요.
그리고 또 외국 갔다 오면, 또 갔다 왔다고 자랑하잖아요.
지금 바울은 천국에 갔다 온 거예요. 이게 유럽 여행 갔다 온 거하고 게임이 안 돼요.
어마어마한 영적 경험을 한 거죠. 큰 자랑거리가 될 만한 거잖아요.
그런데도 자기 입을 닫는 거죠. 그렇죠? 고후12:1~6
그러니까 이것은 바울의 자기가 약함을 자랑하는 것과 맞물려 있는 거예요. 고후12:7~9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하는데, 이게 맞물려 있는 게,
이 엄청난 영적 경험, 이게 자기를 교만하게 할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거죠.
그래서 본문 7절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7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할 만한데,
하나님은 바울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은혜(천국 방문)의 체험이 큰 만큼, 육체에 가시를 주시는 거죠.
그 가시가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시가, 바울의 인생에 어마어마한 고통을 준 거죠.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이 가시로 인하여, 바울 자신이 굉장히 약해져 있는 거죠.
남들이 못 하는 어마어마한 경험을 했는데,
그 경험이 자기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 뻔했는데, 자랑할 것들이 엄청났는데,
하나님이 가시를 주셔서, 그를 약하게 만들어버린 거죠.
그래서 여러분, 약하게 만들어버리신 것,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강함을 자랑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약하고요. 정신적으로도 약하고요.
우리는 많은 것들의 한계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만심을 가지고 우리가 자고하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내면에 계속 있는 거예요.
여러분, 강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하죠?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바울이 그 어마어마한 경험을 하고 난 이후에도,
그 가시를 통하여 그의 존재 자체를 딱 묶어두시는 거죠. 엄청 자고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자신이 환상에 갇혀있지 않도록,
만약에 그 가시가 그 바울을 약하게 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진짜 그냥 방방 날랐을 거예요.
근데 바울이 여러분 영적인 사람이고, 굉장히 신실한 사람이지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울 정도의 영성이면 그거 충분히 이겨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가시를 주어야, 바울 같은 사도도 결국은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자기 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하나님이 아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시를 주신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강한 척해서는 안 돼요.
여러분이 강한 척하면, 여러분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강하지 않는데 강한 척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연기를 해야 돼요.
연기를 하면 어떻게 돼요? 여러분 ‘페르소나’ 라는 말을 하잖아요.
배우들이 가면을 쓰는 거, 즉 외식하게 된다는 거죠.
사실은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자꾸 그런 것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약한데 강한 척하는 거예요. 그럼 계속 연기(외식)하는 겁니다.
여러분, 강한 척하는 것과, 강한 것은 다른 겁니다. 강한 척하면 피곤해져요. 힘들어져요.
자신의 실체를 계속 숨겨야 되니까, 들키지 않아야 되니까... 굉장히 불안한 거예요.
자기는 사실 텅 비어 있는데, 자기는 별 게 없는데, 자기의 신앙은 대단하지 않는데,
대단한 것처럼 자꾸 뭔가 보이려고 하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어요?
여러분 그리고 그것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다 해요.
근데 그 열심이 어느 날 자기를 지치게 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을 신뢰할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연약합니다. 그죠?
우리는 뭐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킬 때가 있잖아요.
내가 뭐 지키고 싶은데, 지킬 수 없는 환경이 와요.
갑자기 독감이 걸리거나, 아프거나, 사고가 나거나... 그러면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어요.
연초에도 우리가 다짐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짐이지,
그 다짐을 하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한 말이, 언제나 이런 공수표를 쓸 때가 종종 있어요.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켜 어렵다’ 잠10:19
이런 말들이 왜 성경에 나오죠? 우리는 그 말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말을 적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나도, 다른 사람도 신뢰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그렇게 바라봐야 돼요.
너무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후1:9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은 계속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도록’ 이끌고 가신다는 거죠.
바울의 가시에 이어서, 이제는 사형선고 같은 고난이 닥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린 연약한 존재다’ 그걸 잊지 말라는 거예요.
강한 척하면 언젠가 들통이 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연약함을 인정을 잘 안 해요.
우리의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을, 계속 다른 걸로 커버하려고 하는 거죠. 이게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거죠.
내가 누구인지, 자신의 실체를 잘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도 보면, 자신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꾸 헛소리하고, 또 실수하고... 자꾸 그렇게 하잖아요.
여러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나중에 요21장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죠.
겸손하게 예수님께 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여러분 성숙이란 뭘까요? 성숙은 자신을 바로 아는 거예요.
자기를 잘 아는 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걸 아는 거... 이걸 알아야 돼요.
이걸 아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죠.
여러분, 아이들은 자기를 잘 몰라요.
특별히 유치원, 이때가 참 사랑만 받고, 인정만 받고, 계속 잘한다 그러니까
진짜 자기가 늘 잘하는 줄 아는 거예요.
배트맨 런 영화 보여주면, 또 엄마가 배트맨 옷 사주면, 자기가 진짜 배트맨인줄 알잖아요.
자기 인식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일평생 어떤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뭐 대단한 줄 알고, 자기가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를 과대포장하는 거죠.
아주 자기를 너무 과시하는 거죠. 자신을 자꾸 부풀리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마치 개구니라 복어가, 자기 몸을 부플리는 것과 같은 거죠. 막 허세인 거죠.
그게 뭐예요. 여러분? 허영이고 교만인 거잖아요.
계속 자신이 뭐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류가 가지고 있는 태도예요.
이게 절대로 자기 고집을 안 꺾고,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허물과 실패를 계속 가리려고 하는 거...
성공하는 사람들의 이면에도, 성공을 굳이 그렇게 끊임없이 하려고 하는 그 목표 안에는,
뭐가 있어요? 자기 내면의 불안함, 자기의 연약함과 실패와 이런 것들을..
낮은 자존감을 덮으려고 하는 자기 방어..
노력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 내면에는 뭐예요? 죄로 인한 수치심,
인류가 갖고 있는 끊임없는 그런 태도인데, 잘못과 실수를 가리는데 능수능란하는 거죠.
문제는 뭐냐면,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이게 안 돼요.
이게 안 되면, 지금 바울이 ‘내가 약하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어렵다는 거예요.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의’의 오류에 빠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모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세는 자기 자신을 아는데 몇 년 걸렸어요?
40년 걸렸어요. 40년을 일반 학교를 다녔으면 배우지 못했을 거예요.
이것도 근데 광야학교에서, 40년 과정의 이 광야학교는 어떤 학교냐 하면, 특수학교예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탈탈탈 터는 학교가 이 광야학교예요.
그러니까 40년 동안 훈련 받은 것이, ‘자기 부인’의 특수학교 과정이었어요.
애굽의 궁궐에서는 무슨 훈련을 받았어요? 엘리트 교육을 받은 거죠.
그러니까 엘리트 교육을 받으니까 뭐가 돼요? 자신감이 넘치는 거예요.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 자신감 뿜뿜이에요. 결국은 그 자신감으로 뭘 해요?
자기가 뭘 해보겠다는 거죠. 이 나라를 살리겠다는 거죠.
히브리 민족을 일으켜 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돼요? 사람을 죽이고 말았어요.
자기 힘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다고 그러는데... 하나도 못 바꾸죠.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광야 40년 학교로,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시는 거예요.
‘너 그 궁궐학교에서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그렇죠?
근데 광야학교에서 40년을 뺑뺑이 돌리시는 거죠.
그리고 나중에 모세를 불러내실 때 어때요? 40년 후에 하나님이 불러내시니까
자신은 못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제야 주제 파악이된 겁니다.
‘그거 나 못합니다.’ 그래요.
40년 전에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그 자신감이 없어져 버렸어요.
내가 할 줄도 모르며, 심지어 말도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그냥 안 찾아오십니다. 정확한 때에 찾아오십니다.
아무 때나 안 부르십니다. 정확한 때 부르십니다.
40년 딱 지나고, 광야 수업이 끝나니까, 이 모세가 완전히 자기 주제파악이 된 거예요.
I'm nothing,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받은 수업은 딱 한 강좌였어요.
그 한 강좌가 뭐냐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거 배울려고 40년이 걸렸어요.
그럼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을 것 같아요?
광야 40년을 통과하신 분들은 이게 장착되어 있는 거예요.
그거 꺠닫는데 40년 걸려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 ‘사단의 가시’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중적인 면이 있어요. ‘사단의 가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편에서도 허락하신 거고, 사단도 공격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을 꼼짝 못하게 한 거예요. 이 가시가 그를 약하게 만든 거예요.
‘아니 꼭 그렇게 하셔야 됩니까?’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거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 이게 굉장히 큰 메세지 잖아요. 여러분 어떡하죠?
이게 인간의 한계라는 거예요. 이게 없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딱 (올가미) 장치를 하나 걸어 놓은 거에요. 꼼짝 못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많은 경우에는, 일평생 이걸 못 배우고 떠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발악을 하고, 고집을 피우고, 자만하고, 자랑하고, 자기 어깨 힘주면서 평생 살다가
어느 날 때가 차서 죽는 거예요. 그 자아가 일평생 안 죽는 거예요.
그렇지만 모세는 확실하게 레슨을 받은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냥 집어 넣으셔서 돌리신 거예요.
그러니까 40년 동안 뭐 했어요? 모세의 ‘자아의 왕국’이 완전히 무너진 거예요.
그 강하게 보였던 왕실의 공주의 아들 모세는 어디 갔어요?
혈기왕성했던, 그 방자했던 모세가 흔적도 없어요.
두 손, 두 발 다 들어서 항복한 거예요. 자기 의, 자기 교만이 꺾인 거죠.
이게 자아의 죽음이에요. 갈2:20절이에요.
이걸 배우지 않으면, 이제 계속 제자리 걸음입니다. 한 걸음도 앞으로 못 나갑니다.
▲여러분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헬라 문명, 그리스-로마 시대입니다.
힘을 숭배하던 시대, 로마의 힘이 세계를 제압하던 시대예요.
그런 문화 속에 바울도 자랐어요. 힘이 뭔가를 알아요. 성공이 뭔지를 알아요.
그러니까 강한 남자가 매력적인 시대였어요.
자신감을 키워주는 문화, 스포츠나 이런 것들이 흥행했던 그 시대 속에
‘강한 남자, 힘을 가진 사람들’ 이 제국주의의 힘이 살아있던 그 시대 속에,
그 문화 속에 자랐던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완전 정반대의 길을 걷는 거예요.
여러분, 바울은 지금 겸손한 척 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육체의 가시는, 바울에게 깊은 고통을 준 겁니다.
‘이 가시가 있어서 약간 불편하다’ 이게 아니에요.
불편한 정도가 아니고, 상당히 심각하게 중대한 무엇이었어요...
학자들이 여러 가지 얘기하잖아요.
만성적 질환, 간질...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고통도 줬지만 수치심을 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들을 해요. 그러니까 자기를 너무 힘들게 한 거죠.
오죽하면 바울이, 그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을 간절히 기도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솔직해요. ‘나는 약하다’
성경에 바울의 표현은 극단적인 표현들을 많이 써요.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이런 표현은 믿음이 부족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만큼 그가 겪은 고통이 컸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뭘 보죠?
바울도 인간이에요. 그가 인간적으로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는 거예요.
내외적인 시련과 고통이 늘 밀고 들어왔어요.
바울은 자기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몰아넣으신 거죠.
자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에요.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거고,
또 하나는 그 자신의 상태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거... 정직함!
자기 평가에 솔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내가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말해야 되고,
내가 참 허약하다고 말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네 여러분, 어떤 때는 내가 버틸려고 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까지 몰아가실 때가 있거든요.
여러분,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를, 우리가 너무 후하게 하려고 하는데,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인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십니까?
기꺼이 자신의 약함을 노출할 수 있는가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나의 강함이 드러나기를 원하는가요? 나의 약함이 드러나기를 원하는가요?’
중요한 것은 정직성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가시를 숨기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기의 약함을 숨기지 않았어요.
여러분 여기에서 바울의 ‘약함의 신학’이 나와요. ‘약함의 신학’이 나와요.
그 신학이 오늘 이 9절의 말씀인 거죠.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바울의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응답이 안 되는 기도였어요.
여러분, 응답이 안 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응답이 안 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응답하지 않은 것이 최고의 응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비밀이죠. 역설이죠.
우리는 기도 응답 자체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바울의 생애 전체예요. 그렇죠?
여러분, 우리는 그 기도 제목 그것만 봐요. 기도할 때 ‘이것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만 보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인생 전체를 보고 계세요.
그러니까 바울이 인생 전체를 위한 응답은, 지금 바울의 기도를 안 응답해주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그 기도에 응답을 안 해주니까 ‘안 해줬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그 기도보다 훨씬 더 큰 게 있는 거예요.
훨씬 큰 응답을 해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넓게 보세요. 그리고 멀리 보세요.
우리는 당장 일어난 문제만 보잖아요. 매우 협소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막 힘을 주고 기도할 때, 조심하셔야 돼요.
내가 거기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많아요. 거기에서 빠져 나와야 돼요.
여러분, 우리는 ‘나에게 왜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습니까?’
바울이 응답받을 만합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생명바쳐 일하는데,
이거 하나 못 해주십니까?’ 얼마든지 합리적인 간구잖아요. 그렇죠?
‘이거 하나 안 줍니까? 쬐쬐하게 하나님?’ 발을 동동 굴리면서 하나님한테 원망할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그거 응답을 해주시면 안 돼요.
‘너에게는 가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니까요! 비례적으로 가시가 큰 거죠!
우리가 기도하는데, 우리도 그럴 거 아니에요?
여러분 진짜 들어줄 만한데,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하나님은 뭐예요? 너에게 가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붙들어야 될 것은,
이 가시가 바울에게만 필요할까요?
‘바울이 교만해가지고, 바울은 좀 풀을 죽여야 돼.
그래서 가시 하나 확실하게 박아 놔야 돼!’
근데 가시가 그 믿음의 거장 바울에게 필요했어요.
그렇다면 믿음이 연약한 우리에게는 가시가 필요할까요? 안 할까요?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우리 모두에게 가시가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가시로 인해 바울의 사역이 결코 방해받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 가시를 제거해야, 내 사역이 풀릴 거라고 생각해요.
가시를 제거해야 내가 진짜 멋있게, 더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반대예요. ‘그 가시로 인하여 너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조금 더 방해되지 않고,
오히려 유익할 거야’ 야 이게 진짜 엄청난 거죠.
‘가시가 너에게 방해된다고? 아니야 도움이 돼!
가시로 인해 훨씬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어!’
여러분 바울의 놀라운 사역들은 그의 타고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자랑할 만한 많은 것들이 있다면, 바울의 자질, 능력 때문이 아니에요.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능력 있는 그런 사역을 감당했던 것은,
그 개인의 능력, 재능, 그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가시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시가 바울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 거예요.
여러분, 여기에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여러분, 연약함이 실패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연약한 어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세요?
그게 내 삶을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그게 내 인생에 꽃을 피우게 하는 거죠.
더 멋진, 기가 막힌 삶을 살 수 있는 비밀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 당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어요.
그러니까 가시는 물리칠 일이 아니에요. 가시야말로 고마운 거죠.
가시가 축복이요, 가시가 은혜요, 가시가 비밀이요, 가시가 신비예요.
그러니까 바울의 약함은, 단순한 심리적 육체적 결핍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적 정체성’이라고 말해요.
▲예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까? 아니죠?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힘으로 하셨다면 로마도 뒤집어 엎으셨을 것입니다.
열두 군단의 되는 천사면, 로마 제국을 다 뒤집어 엎고도 남아요.
정치적 메시야로 오셨다면, 예수님이 광장에 나가서, 다 뒤집어 엎어버렸을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혁명가는 될 수 있지만, 구원자는 될 수가 없었겠요.
예수님이 혁명하러 오신 게 아니요. 이 땅에 구원을 베풀러 오신 거예요.
주님은 당신이 가진 능력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약하신 방식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십자가는 완전히 능력을 해체한 거예요. 자기 능력을 과시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완전히 예수님의 능력을 해체해버린 거예요.
성도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런 모습을 뜻하는 거죠.
예수님의 가시는, 바울의 가시와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온몸의 가시, 머리에 가시를 뒤집어쓰신 거예요.
약함의 상징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요. 거기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요.
여러분, 십자가를 우리가 너무 가볍게 보는 경향이 너무 많아졌어요.
오늘날 시대에 너무 우리가 가볍게 보죠.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에요. 구원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식이 십자가의 원리에요.
이걸 모르면, 이 약함의 원리를, 바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걸 아니까, 바울이 ‘약함의 신학’을 받아들인 거예요.
우리는 이걸 잘 익혀야 되는 겁니다.
지금 ‘약함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십자가적 정체성’
이것은 결국은 오늘 우리가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는 프린시플, 원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리는 안 바뀝니다. 여러분 원리는 시간이 흘러도 원리예요.
그리고 원리대로 되게 돼 있어요. 모든 게 원리를 지켜야 돼요.
원리와 싸우면 안 돼요. 원리에 내가 순종해야 되지요. 그죠?
십자가는 원리예요. 약함에서 강함이 나오는 것도 원리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아무리 대단한 결과를 얻었다 해도, 십자가의 방식이 아니면,
이미 실패예요. 강하면 그냥 결과가 나와 있어요. 실패!
약할 때 꼭 강합니다. 이건 원리에요.
여러분 약함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강함이 숨어있는 거에요.
우리가 그걸 못 보는 거죠.
그리고 강함이라고 하는 문화 안에 우리가 늘 살아왔고,
그 강함이 성공이고, 실력이라고 하는 그게, 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들어 있는 문화속에
자랐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워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설교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또 본래대로 돌아가버려요. 힘의 원리로 가버려요.
그러니까 삶에 적용이 안 되는 거죠.
바울도 그렇게 살았을 텐데... 바울에게는 가시를 딱 주신 거예요.
그게 또 안 빠지는 거예요. 그 가시를 못 빼요.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자 여러분 누가 솔직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진짜 믿는 사람이에요.
내 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그 십자가가 답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사람,
그 연약함을 아무나 꺼낼 수가 없어요. 꺼내면 당하는데.. 그죠?
그런데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꺼낼 수가 있어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할 수 있어요.
고백할 수 있어요. 왜? 그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 신앙에는 항상 십자가의 복음이 선명하게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내 약함을 끄집어낼 때 가져올 수 있는 수치감을,
내가 그 복음으로 극복했기 때문에, 그 수치감과 정죄감에 내가 빠져있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이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은,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방식을 내려놓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약함은 장애물이 아니에요. 반대죠. 그렇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가 중요해요.
내 연약함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여러분 뭐 하다가 실패했잖아요.
그때가 연약함이 드러날 때예요. 그걸 인정하는 거예요. 완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죠?
그때가 중요한 거죠. 내가 굉장히 자존심이 바닥이 났을 그때에,
내 자신의 그 어떤 자아의 보호를 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하는 거예요. 자신이 실패했던 걸.
그때 십자가의 능력, 약할 때 강해지는 능력이 나타나는 거죠!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