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4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법 Youtube
◈믿음을 켜고 믿음을 행하는 법 고후5:7 2026.03.04. 축약, 정리
※위 동영상 설교를 이해하기 쉽게, 나름대로 축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녹취록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으니, 위 동영상을 직접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켜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은 행하여야 합니다.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은 내면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행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내면으로 행하지 않으면,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근데 그렇게 믿음을 행하려면? 믿음을 켜야 합니다.
TV켜고 휴대폰 켜듯이 믿음을 켜야 해요.
믿음을 켠다는 것은, 내가 의식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뜻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실제 일상생활에서, 막 이것저것 신경쓰면서 살다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도,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좋으신 분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내 머리털까지 다 세시며,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도 주관하시는 주권자라는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고 삽니다.
그 상태가 믿음이 (핸드폰 꺼지듯이) 꺼진 상태예요.
내가 의식해서 믿음을 켜놓지 않으면, 믿음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주제
예를 들어, 집안에 TV가 있고, 냉장고가 있고, 에어컨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TV도, 냉장고도, 에어컨도... 켜지 않습니다. 꺼 두었어요.
그러면 그 가전 제품이 없는 것과 똑같아요.
이런 상황과 같은 거예요.
켜지 않은 냉장고로, 냉장의 효과를 볼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켜지 않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 교회 2000년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뭐냐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이 얘기를,
‘믿음을 가졌으면, 믿음을 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씀을 하셨으면,
‘그 믿음을 켜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안에 식구들이 같이 있을 때, 자식을 보면서 내가 반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선하심도,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도 사라진 게 아니에요.
그러나 내가 믿음을 켜지 않고 있는 한,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고, 선하지 않으신 것 같고,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가 아니신 것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거예요.
왜냐면 그 사실들이, 내게 피부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나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믿음을 켜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면 오늘 내 삶 속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꺼진 믿음으로, 켜놓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럼 ‘믿음을 켠다’는 게 뭐예요?
쉬운 말로 ‘깨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죠.
이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에요.
자식을 보고 내가 개입하려고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다가,
제가 믿음이 꺼진 상태잖아요. 그러면 내가 개입을 안 하는게 좋아요.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유일한 선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내 모든 삶의 주권자 되심이 분명한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직접 자녀를 세상적인 시각으로 대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공부 몇 등 했느냐? 밥은 잘 먹느냐? 취직은 어떠냐? .. 세속적 시각으론 안 된다는 거죠)
자식과 하나님 중에 하나님이 더 먼저지요.
그러면 그렇게 자식에게 내 마음이 빼앗겨서, 내 의식이 세속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상태를
얼른 알아차리고... 내가 그 순간에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반응하는 내가,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얼른 부활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유일하신 선아심과 내 삶의 주권자 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마주하고 의식합니다. 이것이 2, 3초밖에 안 걸려요.
실제로 삶에서 해보면, 얼른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올라가고(승천하고), 하나님을 마주하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게, 2~3초면 돼요.
그렇게 믿음을 ‘켜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내 의식을 ‘켜는’ 거예요.
이렇게 켜는데 2, 3초밖에 안 걸려요.
그런데 성도들이 이걸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꺼진 상태로 하루 종일 사는 거죠.
(전기 즉 성령이 소멸되어서, 꺼진 내 믿음을 다시 켤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은 주권자도 아니신 것 같고,
하나님은 선하지 아닌 것처럼... 뭐 그게 당장 피부로 내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그런 세상에 젖어있는 상태에서, 즉 믿음을 ‘끈 turn off’ 상태에서
자녀와 대화하고, 자녀 일에 다 관여한 다음에,
뒤늦게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별 소용이 없는 거죠.
‘내가 죽어야 되는데 못 죽었다...’ 뒤늦게 후회하는 거죠.
믿음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안 믿는 거예요.
내가 믿음의 스위치를 켜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세상적 판단으로 일을 다 저질러 놓고 나서,
즉 내 마음에 세상을 가득히 담아 놓은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나서,
그 다음에 십자가를 붙잡겠다고 하는 것은... 뒤늦은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성도는,
늘 믿음의 스위치를 켜놓고, 믿음으로 행해야 돼요.
▲‘믿음을 켜서 믿음을 행한다’는 게 뭔지 말씀을 드릴게요.
수4장에 보면, 요단강에서 열두 돌을 주워 와서, 두 군데에 세우잖아요.
법궤를 메고 제사장들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열두 돌을 세우고, 수4:9
또 요단강 바닥에서 열두 지파에 각 사람이 하나씩 들고 와서, 4:20
요단강 건너서 처음으로 진을 친 길갈에다가 또 하나 세워둡니다.
수4: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래서 표징을 삼았는데, ‘표징’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오트라는 말이에요.
‘표시’라는 뜻이죠.
그러면 이 12개의 돌들이 뭐를 나타냅니까? 뭘 표시합니까?
요단강 도하의 사건을 기억하자는 게 아니에요.
역사적인 사건을 잊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그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당신의 살아계심과,
선민을 사랑하심을 드러내셨는데... 그걸 기억하자는 표시이죠.
그렇게 살아계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그 12개의 돌을 보면서 잊지 않고 의식하자는 겁니다.
앞서 창세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했는데, 그것도 ‘표시’인 거예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 의식’을 놓치지 말라는 표시인 거예요.
그 표시를 보면서, 지금 이 자리에 살아계시며,
주권자로서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을 잊지 말고 의식하라는 표시죠.
그리고 그런 표시로, 또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에는 돌로 제단을 쌓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오고 가고 하다가 그 돌로 쌓은 제단을 보면
‘아 하나님을 내가 이 자리에서 만났구나’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 표시가 됐어요.
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란 말이에요. 주1)
▲우리는 구약에서 나오는 모든 표시의 완성으로 *또는 표 token
신약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의식하는 믿음이 ‘켜지는, on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 예수님을 보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 고백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봄으로써
믿음을 ‘켜서, on 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실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의 삶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신약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계신 나의 동행자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갈2:20
그래서 여러분 믿음은 감각이에요. 어떤 감각이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각이 있잖아요.
줄여서 ‘시청후미촉’이라고 부르죠,
시청후미촉의 5감각이 있으면, 믿음은 ‘제6의 감각’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만약에 시각을 잃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볼 수 없잖아요.
또 청각을 잃으면..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도 못 듣습니다.
미각을 잃으면.. 산해진미를 먹어도 맛을 못 느껴요.
그와 마찬가지예요.
‘믿음’이라는 제6의 감각을 잃으면,
예수님도 하나님도 성령님도 천국도 성경의 내용도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도, 그 뜻도.. 도무지 못 느낍니다.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을 켜라 on’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믿음의 제6감각을 켜야, 즉 활성화 시켜야,
예수님도 하나님도 성령님도 천국도 성경의 내용도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도, 그 뜻도.. 다 밝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제6의 감각을 꺼놓고 있거나,
아예 믿음이란 게 자기 속에 없으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그리고 천국 그리고 성경의 모든 영적 내용들...
이 장엄한 사실과 세계가... 전혀 보거나 느껴질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거예요.
지금 이 방에 전기를 끄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깜깜해지듯이,
‘믿음을 꺼버리면, off 해 버리면’ 그 장엄한 영적인 세계가 다 캄캄해져 버리고 맙니다.
‘믿음을 꺼버린다’와 비슷한 표현으로, ‘믿음이 비활성화, 휴면계정’ 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어요.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일 working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아무리 세상적으로 눈에 보이게, 휘황찬란하게 번영을 했다 그래도,
그건 그냥 저주의 세계에 갇혀있는 거예요.
상상을 해보세요. 내가 믿음을 지금 딱 껐어요. ‘믿음의 제6감각’을 꺼버렸어요.
그리고 오감으로만 만나는 세상 속에 갇혀있어요.
이게 얼마나 큰 저주인 가를 여러분은 아시겠죠?
영적으로 맹인이요, 복음의 소리가 귀에 들어도 들리지 않고...
그야말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말죠.
그런데 믿음의 감각, 제6감각을 딱 켜요.
켜자마자 과거 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들어도 들리지 않았던
이 장엄한 영적 세계의 실체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천국과 영생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에 들어가서, 거기서 머물면서 사는 거예요...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장기 휴면 상태’가 지속될 수 있는 거예요.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워낙 찌들려서
‘믿음의 제 6의 감각’이 병들었거나, 비활성화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이 소진된 거예요.
그래서 어쨌거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든지, 기도에 몰입하든지, 찬송에 빠져들든지,
손발로 봉사하든지, 입을 열어 전도하든지...
‘믿음의 제6의 감각’은 내가 의식적으로 켜야 해요.
우리 5감각으로 느끼는 것들은, 쉽게 피부에 닿게 느껴져요.
눈에 보이는 것은 저절로 보여요. 소리가 나면 귀도 저절로 들려요.
냄새도 나면 저절로 냄새가 맡아져요. 맛도 입에 넣으면 저절로 느껴져요.
무엇이 손에 닿으면 저절로 어떤 대상의 질감이 느껴져요.
그런데 ‘믿음의 제6의 감각’은, 이게 피부로 느끼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이고, 이 ‘믿음의 제6의 감각’은 4차원이라서
이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3차원의 현실 세상에서는 쉽게 피부에 닿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내가 의식적으로 믿음을 켜지 않으면, 저절로 느껴지지 않아요.
천국도 저절로 느껴지지 않아요.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성령님도 마찬가지예요.
‘믿음의 제6의 감각’을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켜지 않으면, 그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이 ‘믿음의 제6의 감각’을 켜놓고, 그리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겁니다.
‘믿음의 6감각’이 켜져 있는 바탕 위에서,
내 눈으로 보며, 행동하고, 들으며, 말하는...
그게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으로 행한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내 믿음의 감각을 켜놓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보고, 듣고, 행하는 거예요.
♣“잡종 강세”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잡종이 순종보다 항상 질기고 강합니다.
잡초가 농작물보다 더 강합니다.
밭을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뒤덮어버리고 농작물은 말라 죽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 kick 한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즉, 당장은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려는 마음과 행동보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하려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믿음으로 살려는 힘보다
내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는 힘이..훨씬 더 강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이삭)을 기다리려는 자세보다
내 생각과 수단대로, 이스마엘을 낳아버리는 자세가 훨씬 더 힘이 셉니다.
아브라함만 이스마엘을 낳지 않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스마엘들을 낳고 있는지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꾸 육신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이 믿음이라고 유지하고 있는 거죠.
♣작고 사소한 것 때문에 믿음을 망각하고 불평합니다. (펀 글)
제가 시골에서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걸어서 심방을 했습니다.
시골길은 아직 아스팔트로 포장되기 전이라서
바위를 폭파해서 생긴 뾰족뾰족한 돌들로 덮여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나는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습니다.
그런데 입은 옷은 겨울 양복이었습니다.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정장이었습니다.
땀은 나고, 힘은 들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를 더 짜증나게 한 건,
바로 빵꾸 난 신발 밑창으로 들어온 모래였습니다.
그 작은 것들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들 줄 몰랐습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해
"나를 화나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작은 문제들이구나!"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받은 큰 은총은 다 잊어버리고,
작은 문제들 때문에 불평하고 짜증낸다면...
말 그대로 <내게 믿음이 떨어진 증거>입니다.
큰 은혜 받고도,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 걸고 불평한 사람이
구약에 대표적으로 '요나의 박넝쿨' 입니다...
작은 문제로 속상하고 괴로울 때, 믿음으로 이기십시오!
그래서 제 삶 속에서 바로 바로 벌어지는 문제들로 인해서
속상하고 괴로울 때,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전에 거의 가진 게 없었지. 하지만 넌 감사했고, 행복했어.
이제 너는 더 많이 가지고 있어.
너에게 내린 하나님의 은총이 이와 같이 풍성하고 넘치는데,
왜 작은 일들로 인해 짜증내고 힘들어하는 거지?’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크다는 걸 믿으면,
지금의 문제가 작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문제 때문에 시달립니다.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방황합니다.
그렇게 불평이 지속되면.. 그만 믿음이 식어버리기도 하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천국과 예수님 성령님을 자꾸 망각한다는 것은,
즉 믿음의 6감각을 잃어버리며 산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세상을 좋아한다’는 뜻일 거예요.
너무 좋은 것을 마주하면, 그 외의 것은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자꾸 잊어버리는 이유는, 세상 일이 너무 좋아서, 거기에 빠져서 살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재미있게 지낸다고 하면,
그 동안 국내에서의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직장 일도, 집안 일도 다 잊어버려요.
마17장에 변화산에 올라간 제자들을 보면, 거기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세상 일도, 가족도, 다 잊어버렸어요. 미래의 자기 야망도 다 잊어버려요.
그냥 거기서 예수님과 함께 집 짓고 계속 살고 싶어 했어요.
우리가 ‘믿음의 6감각’을 켜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고,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 살게 되면,
변화산 체험과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하나님(성령님)의 임재와 동행이 너무 좋아서,
다른 세상 일들은, 그리 크게 보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오직 천국,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복음 전파, 영혼 구원)에만
관심 기울이고, 그 일을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거죠.
하루 하루의 삶이 의미가 있고,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며,
제 머리도 못 깎으면서, 주위 사람들의 일을 함께 걱정하고, 기도해주고, 도와줍니다.
자기 삶에 매사에 여유가 있으니까요...
여러분, 혹시 미래가 걱정이 되십니까?
그럼 믿음이 뭐예요?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고,
내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획을 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면 그 ‘믿음을 켜야’ 되잖아요. 믿음을 활성화 시켜야 되잖아요.
그럼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면,
하나님이 광야에서 4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참새 한 마리 목숨도 주관하시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믿음을 활성화시켜서 피부로 와닿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요.
그러나 ‘꺼진 믿음, 휴면 계정의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삶을 오늘날 누릴 수 없습니다.
‘켜진 믿음’으로 믿음을 행해야 합니다.
‘믿음의 제6감각’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물론 이론이 이런 것을, 이제 자기가 많이 경험, 체험하면서, 실전 감각을 쌓아가야 되겠죠.
그러면서 믿음이 더 커지고, 견고해지고, 성숙해지겠지요.
‘이게 뭐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워?’ 하지 마시고,
우리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내가 믿음의 발자국을 한 걸음 떼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 믿음의 길을 온전히 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신학생 때 김은국 씨의 [순교자]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노벨 문학상 후보까지 되었다는 소설이라고 강력 추천하여 읽었는데,
너무나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한국 전쟁 중 평양에서 목사 14명이 붙잡혀 처형당하게 되었는데,
그 중 2명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누구나 생각하기를 ‘죽은 12명의 목사는 순교했고,
살아남은 두 명의 목사는 배교하지 않았나?’ 하겠지만,
진실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을 총살한 인민군 장교가, 나중에 국군에 붙잡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처형당한 12명은 신앙을 포기하고 살려달라고 애걸했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목사 중 한 사람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정신 이상이 되어 살았고,
한 목사만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그 목사는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했습니다.
사실이 알려질 경우 신자들이 얼마나 절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목숨을 구걸한 배교자’가 되기를 자처했고,
12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되어, 합동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배교자라 손가락질받은 이 목사님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요, 순교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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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란 말이에요.
성막의 모든 기구를 봐요. 법궤도 그렇고, 분양단도 그렇고, 떡상도 그렇고, 등잔대도 그렇고,
오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를 만들어주신 겁니다.
절기도 왜 절기를 행하라고 하십니까? 이 열두 돌과 같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절기를 행함으로써, 과거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음을 기억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만나야 될 하나님을 의식하도록 돕는 겁니다.
근데 지금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선민을 사랑하셔서 열두 재앙으로 출애굽을 시키시고, 광야 40년에서 먹여 살리시고...
그런 하나님이다 라는 걸 기억하기 위하여... 절기를 지키는 겁니다.
모든 이야기가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잊지 않고 의식하며 사느냐? 여기에 집중이 되어 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표시들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분명하잖아요? 어쨌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관계를 해야 되는데,
관계를 하려면 상대자로 포착이 돼야 돼요.
그런데 보이지도 않으시고, 들리지도 않으시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안 나고,
맛도 안 나는 그 하나님을 상대자로 포착하여 관계를 하려면,
우리가 의식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 귀로 듣는 것들,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이 나는 것만
의식하며 사노라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맛도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관계의 대상으로 포착하는 것을, 우리가 자꾸 잊어버려요.
자꾸 망각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그 성막을 한번 봐요. 눈에 보이는 일들이 있죠.
법괘라든지, 번제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봅니다, 분향단에서 향냄새가 나잖아요.
그리고 떡상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떡을 맛을 봅니다. 또 등잔대가 있어요. 빛이 있어요.
그러니까 오감각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갔던 거예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냄새도, 맛도 없는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는 표시를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건 구약 때의 이야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