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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7장 죄와 거룩, 약함과 공동체의 하나됨

LNCK 2026. 3. 8.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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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2_로마서강해(32)_죄와 거룩, 약함과 공동체의 하나됨 (7:24-25) Youtube

 

◈죄와 거룩, 약함과 공동체의 하나됨     롬7:24-25     2026.02.22. 로마서강해(32)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난주일까지 제가 로마서 7:14~25절의 본문을 세 차례 다루었습니다.

 

이제 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롬8장은 성경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장엄한 장이다’

로이드존스는 ‘성경에서 로마서 8장은 에베레스터 산’에 비유를 했습니다.

 

롬8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제 마음을 붙잡는 두 가지가 일주일 내내 있었어요.

그래서 8짱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한 번 더 이 말씀을 다루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 마음에 부담이 있었던 것은 뭔가 하면

1) 첫 번째는 바울의 이 고백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 개인적으로 자기가 죄와 싸우는 경험을 하는...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는 탄식, 이런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왜 바울은 이렇게 했을까요? 그냥 말씀을 가르치면 되는데,

왜 굳이 자기 얘기를 이렇게 하는 걸까?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로마교회 공동체를 하나 됨으로 이끌려고 하는 사도의 의도적인 선택

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저를 붙잡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죠.

 

2) 또 하나는 오늘 우리 중에 다수가, 바울의 이 탄식을 제대로 경험하고, 또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부담이 있었습니다.

 

뭔가 하면, 죄의 무게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거룩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바울의 이 탄식을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바 대로 죄의 무게를 우리는 얼만큼 알고 있는지...

그리고 정말 우리는 삶의 목적이 거룩함인지...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이.. 바울이 이런 탄식을 했다’

하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아무리 경건하고 성숙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런 내적 갈등을 할 것이다...’ 라는 정도로 겉치레로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이 탄식이 내 것은 아닐 겁니다.

 

제 마음을 붙잡았던 이 두 가지는, 다 하나의 문제입니다. 핵심은 이거죠.

바울의 탄식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 탄식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하나됨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죄 인식의 부재... 저는 이게 오늘날 한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현대 사회 자체가 그러합니다.

‘죄인식의 부재.. 그래서 결국은 바울의 이 탄식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것은 공동체의 연대를, 공동체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근원적인 장벽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골프가 좋아서 주일날 골프치러 가는 모임은 아닙니다.

또는 산을 좋아해서 등산하는 모임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의해서 하나가 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나하고 가까운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곳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정말 서로가 깊게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럴 수도 없죠.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과는 내가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나와 형제가 된 사람들인가?’ 하는 이 영적 하나됨으로 이끌어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뭔가 하면, 바로 이런 탄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

-바울의 탄식을 아는가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

 

공동체적인 맥락에서 다시 한번 이 바울의 고백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질문을 해 봅니다. 바울이 왜 굳이 가르치면 되는데,

다른 곳에서 하듯이 ‘성숙한 성도라고 하더라도 내면에서는 죄와 싸우는 사람이고,

죄에게 넘어지고, 지고.. 하는 참담한 상황을 인하여 탄식할 수 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되는데, 왜 굳이 바울은 자기 (개인 체험같은) 얘기를 했을까요?

 

가령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나 빌립보교회 같이, 자기를 잘 알고 있고,

또 자기하고 엮여져 있는 어떤 사건들, 또는 사연들이 있는 교회 같으면,

바울은 그 교회들에게 편지했을 때는, 자기 개인 얘기를 더러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자기가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로마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을 다른 곳에서 만나서, 그곳(로마교회)에 간 사람들은 있지만,

바울은 로마교회를 잘 알지 못해요.

 

바울은 일반적으로 자기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얘기를, 그것도 가장 내밀한 깊은 얘기를, 로마 교회에다가 하고 있는 거거든요.

 

아마 바울사도는 가르침의 형태로 이 로마서를 주지 않고,

자기 얘기를 통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뭔가 그냥 단순히 가르치고 싶은... ‘성숙한 성도도 이런 사람이야’ 라는 것을

그냥 이해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로마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아픔이 뭔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교회는 가정교회들이어서, 오늘날처럼 이렇게 많은 숫자가 모일 수가 없었죠.

그 모임들 안에도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로마 교회는 이런 갈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을 복음으로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데 되게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이거든요.

 

물론 이것을 그냥 두루뭉술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게 있어요. 그걸 부인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계 속에서입니다.

보세요. 성경에서 얘기하는 많은 것들은, 전부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거든요.

‘서로 사랑하라’는 어떻게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을 길이 있을까요?

 

공동체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공동체적인 맥락에서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가 이제 이 로마서 7장 후반부에 있는 이 본문 말씀을,

개인적으로 내가 죄와 싸우고, 거룩을 추구하고... 뭐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공동체 맥락에서 이것을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보세요. 로마서를 제가 시작할 때 그런 말씀을 드렸죠.

‘로마서는 구원론 교과서가 아니라고...

바울은 구원론 교과서를 집필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쓴 게 아니라고...

성도 개인이 알아야 할 구원의 위대한 교리를 설명한 책도 아니라고...

그것이 로마서를 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공동체를 의식해서 썼음

 

우리가 개인적으로 편지를 쓸 때도 그렇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 그 사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쓰잖아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한 마디를 하려면, 그 사람의 상황과 처해있는 처지를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이 말이 정말 적절하게 저 사람에게 위로가 되거나, 격려, 힘이 될 수 있도록’ 하죠.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을 한다고 할 때, 그냥 내 얘기, 내 자랑만 막 늘어놓는 게 아니잖아요.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교회 상황을 너무 잘 알았어요.

그리고 이 교회가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의 능력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갈등이 풀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복음밖에 없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로마 교회가 잘 회복이 된다면, 자기가 스페인 선교를 가기를 원하는데,

스페인 선교를 가는 아주 중요한 교두보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도, 그는 잘 알았습니다.

그런 말도 나중에 바울은 하죠. 롬15:23~24, 28

 

이런 맥락에서 바울 사도가 자기 체험을 고백적으로 담아낸 7장 후반부, 오늘 설교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중략    주1)

 

▲바울의 고백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고백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7장 후반부의 본문을 바울사도의 현재적 경험을 고백한 것이라고 읽을 때,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라고 읽을 때,

이 본문이 분열된 공동체의 영적인 하나됨,

복음 중심적인 하나됨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로마교회를 향한 의도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냥 일반적 가르침으로 준 게 아니고, 자기 얘기를 한 거죠.

 

그렇다면 바울의 이 고백이, 공동체 형성을 향한 의도적 선택이라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적인 근거를 좀 더 살펴보죠. 구원의 큰 그림에서 살펴보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리스도를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이 뭡니까?

 

롬8:29절을 한번 찾아 읽어보죠.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이게 구원의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 영광이,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그런 영광스러운 존재로 우리를 빚어가시는 것이,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살전4:3절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살전에서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쭉 얘기하고나서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대할 줄을 알고...’

이렇게 쭉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부부관계에서의 거룩함을 여기 살전에서는 얘기하는 거죠.

 

거룩함(구별됨)이라는 것은, 두루뭉실하거나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고, 드러날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거룩은 내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제의(제사 의식)적이거나,

또는 예배 시간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 이런 것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또는 모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다’라는 큰 그림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면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나?’ 스스로 질문하자면

‘거룩함을 위해서 구원하셨다’ 그래서 거룩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구원의 목표니까요.

 

바울사도가 롬7장 후반부에서 자기 경험을 고백적으로 쓴 것은,

‘단순하게 나도 죄와 싸우는 사람이야.

너희들이 볼 때 나는 죄와 싸우지 않고, 갈등 없는 사람 같지? 나도 죄와 싸우는 사람이야!’

단순히 이런 메시지만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추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내적 싸움을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을 추구하는 신자가 아니면,

이런 내적 갈등, 죄와의 싸움을 경험할 가능성이 없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런 내적 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하는 사람만이

8장에서 선언하는... 8장에 뭐라고 얘기하죠?

 

8:1~2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런 자유함, 정죄로부터의 자유함, 그리고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함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구원의 감격과 은혜’라는 말을,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구원의 감격’이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말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여러분을 설명하는 말입니까?

‘나는 그게 뭔지 알지’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난 예수 믿은 지가 한 50년 돼가지고, 그때 비로소 내가 알았어’ 이렇습니까?

 

▲이렇습니다. 구원의 큰 그림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거룩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교회, 하나된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기도하셨던 게 뭐예요?

요17:21~23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과 동일한 하나됨이

그 공동체 가운데 있기를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요17:23

 

‘내가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 이제 죽습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제 죽습니다’

라고 주님은 기도하시는 거죠.

 

그 공동체는, 고전5장에 의하면 ‘누룩이 없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말하자면 ‘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공동체’라는 얘기죠.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으셨다. 어린 양이 죽으셨다’ 바울사도는 또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또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이 우리의 구원의 목표라면, 거룩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탄식, 오호라 나는 공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인생을 사는 게 고단하고, 인생을 사는 게 고생의 연속이라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어요.

‘아 정말 인생은 비참하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내가 왜 살아야 하나?’

본문의 바울의 고백은 그런 차원의 고백이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차원인가요?)

죄와의 싸움 속에서.. 죄와 씨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고백은, 낯선 언어일 뿐입니다.

이 탄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탄식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하나됨에도 참여할 수 없고,

그것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두 번째로 무겁게 말씀드리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한번 해봅시다. ‘나는 이 탄식을 아는가?’

 

롬7:24-25, 이 본문 앞에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성화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은 배워서 이해하는 지식의 문제는 아닙니다.

 

24절에서 바울이 탄식하는 것과 같은 탄식을 ‘아는가? 나는 이런 탄식을 아는가요?’

이건 지식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탄식이 많죠.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탄식을 하고 살죠.

‘아이고, 젠장, 맙소사...’ 이게 다 탄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탄식은, 바울이 지금 얘기하는 건, 
죄와의 투쟁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나오는 탄식... 이걸 아는가요? 

이 탄식이 뭔지.. 경험적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여러분, 제가 이렇게 돌려서 질문을 해 볼게요.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의 삶의 목표에서, 여러분의 삶의 내용에서.. 
거룩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또한 저 같은 목사는.. 얼마든지 교회 일에 바쁠 수 있습니다. 
설교 준비에 바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 종교적인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스스로 묻습니다. 
'너에게 거룩은 중요하니? 하나님의 뜻은 거룩이라는데, 너는 거룩에 신경 쓰니?'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너를 거룩한 사람으로 빚어가시기 위함이라고 말하는데, 
거룩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수많은 어젠다들이 있다면,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이기는 한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했던 말을 기억해 봅니다.
스코틀란드에서 목회를 했던 분인데, 29세 젊은 나이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종종 우리가 맥체인을 얘기할 때, 알려진 유명한 말들은 이런 겁니다. 
"맥체인이 설교하러 강단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맥체인이 '오 하나님' 하며 기도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를 쳐다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거예요. 

그는 29살에 죽었어요.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을 향해서 내가 가지는 의무는 
첫째도 거룩이고, 둘째도 거룩이고, 셋째도 거룩이다." 
설교를 잘하는 게 아니고, 심방을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거룩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거룩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돈을 버는 것보다, 여러분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보다.. 거룩은 더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여러 관심사의 목록에 거룩함이 있습니까? 

만약 거룩이 중요하지 않다면, 별로 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주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본문의 바울의 탄식... 그 근처에도 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지금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그래도 거룩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거룩을 원하지 않아..'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아예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거나, 
설령 과거에 은혜를 받은 적이 힌 때 있었을지라도,
지금은 심각하게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상태일 것입니다. 

제가 두 주일 전에 설교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제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거룩을 원하지 않습니다. 별로 관심 두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거룩을 생각하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라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분들에게, 
제가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위험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진정한 은혜를 받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계속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제가 롬7:14~25절의 의미가 뭔지, 여러분에게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저는 애썼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과연 '이 바울의 탄식'을 정말 알고 계시는 지를 묻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에서 여러분의 꿈이 좌절되는 것에 대한 탄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분의 영혼에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대부분에게, 거룩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주제라면, 
거룩이 내가 소중하게 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참담한 공동체이겠습니까? 

기도를 한다고 칩시다. 이런 탄식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한 채
그저 '이거 주세요, 하나님, 저거 주세요!' 하고 요청하는 것 뿐이라면,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과연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맞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한 주간 동안 저를 짓눌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 거룩을 추구하고 있나요? 우리 교회는 왜 존재하죠? 
우리는 바울의 이 탄식을 피부로 느끼고 있나요? 

죄의 기만성과 파괴적인 힘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거를 믿고 느끼고 있나요? 

▲영국에서 "승리하는 삶" 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19세기 말, 
영국 성공의 목사 존 라일 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리버풀 주교였습니다. 존 라일은 '거룩'이라는 주제로 일련의 설교를 쭉 했습니다. 
   ☞존 라일 설교모음  https://blog.naver.com/coldwater1cup/223183163775

그리고 1877년에 그 설교가 <거룩, 그 본질, 장애물, 어려움 그리고 뿌리>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난 150여 년 동안, 그 책이 여러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우리 말로도 두 차례 번역이 되었죠.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읽으신 분이 많이 계실 것이고, 우리 교회 도서관에도 그 책이 있고, 
저도 몇 차례 이 책을 여러분께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150년 동안 많은 사랑을 받는 기독교 고전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총 20장 chapter 이 있는데, 그 중에서 첫 장의 제목이 '죄'입니다. 
죄를 다루지 않고서, 거룩을 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물론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게 바울이 롬5장, 6장에서 쭉 했던 얘기입니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게 신자예요. 
그래서 신자의 삶은 본질상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입니다. 맞아요. 

 

"하지만 신자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몸부림, 매일의 사투(죄와의 싸움),
속사람을 지키기 위한 빈틈없는 경계, 영과 육의 싸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탄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같은 모든 것들이, 
바로 죄가 얼마나 거대한 능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말입니다. 

▲이제 제가 얘기하는 '공동체의 하나됨'이라는 주제와, 
'죄와 거룩'이라는 이 주제를 연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탄식은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한 의도적인 선택적 고백이다' 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그렇다면 이 탄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탄식을 알지 못해요. 그냥 우리는 되게 늘 해피하고, 늘 그냥 뭔가 들떠있고, 
우리는 뭔가 늘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거룩'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뭔가 되는 것 같습니다. 뭔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내면에서 '나는 이런 것을 전혀, 바울이 얘기하는 이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수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그 교회가 만 명이든, 이만 명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거룩을 추구하지 않으며, 
내면의 싸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바울이 이 고백으로 만들어내려고 했던 공동체의 하나됨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탄식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탄식이 낳는 결속안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하나됨이죠. 

'죄인식'의 부재는, 단순히 개인의 경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가지고 있는 나의 개인의 문제라고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하나됨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약함의 고백이 만드는 공동체'라고 하는 주제를 살펴보죠. 

 

제가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바울의 이 탄식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공동체가 생길까요? 
우리가, 여러분과 제가 바울의 이 탄식을 알아요. 
그 탄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렇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성숙한 신자도.. 죄와 싸우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라고 고백할 만큼, 
죄에게 져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자리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탄식하는 사람이다' 
이걸 바울이 자기 고백의 형태로 설명을 해줬습니다. 

로마서를 연구하는 다수의 학자들은, 로마의 가정교회 속의 갈등, 
그리고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갈등, 
이런 것들이 로마서의 근본적 정황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공동체 내 갈등의 이면에는 뭐가 있었겠어요? '우월감 경쟁'이라는 게 있었겠죠. 
그 천박한 우월감 경쟁이죠. 

바울사도는 이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하나됨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열쇠는 
복음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얘기합니다. 

'내가 복음을 너보다 더 많이 알아' 그렇게 우월감을 갖는, 그런 일도 일어나거든요. 
'우리 교회는 너네 교회보다 복음을 더 많이 알아' 하는 일이 일어나거든요. 

복음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죄와 내적인 싸움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롬7:14~25에서 바울은 '나도 이렇게 연약한 사람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울림있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죠. 

이 자기 약함의 고백은, 단절된 관계를 다시 결속하게 하고, 
공동체를 연대하게 하고, 하나됨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에서만 그게 가능한 것이죠.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자랑하기를 원하지, 
누가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기를 원하겠습니까? 

이 말을 (바울의 고백을) 오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죄와 타협하고, 거룩이 아닌 내 유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러면서 '그래도 괜찮아, 복음이 있잖아.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걸 이루어 주셨잖아? 
하나님이 다 (구원해) 해주셨잖아?'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또한 서로를 위로하면서 
가는 것이 교회의 사귐의 본질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중심적 하나됨도 아니고, 주님이 말씀하신 공동체도 아닙니다. 
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나는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야. 나는 이렇게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온 사람이야' 라고 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태도... 역시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분열'이라는 것은, 싸움을 일으킨다가 아니라, 분리시키는 거죠. 
나를 너와 분리시키는 거죠. 

이런 일이... 정말 무슨 뭐 세상에 천박한 물질을 자랑하고, 
뭐 이런 것으로만 나타나는 거는 아니에요. 우리는 이걸 '웃프다'고 말해야 되겠죠. 

심지어 신학의 영역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더라고요. 
'얼마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은 완벽한 신학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죠.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됨에 이르는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이, 죄와의 싸움을 감당하고 살아가면서 
어떻게 승승장구해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죄와의 싸움을 감당하고 살아가면서, 뼈아픈 패배를 경험할 때, 무너졌을 때, 
그리고 이 약함을 나눌 때, 
교회는 복음중심적 연대를 경험하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세워가게 됩니다. 

이게 바울사도가 7장 후반부에서 자기의 고백을 로마 교회와 나눈 의도이고, 
또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가, 이것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건 복음 중심적 공동체가 가지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약함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나의 약함 안에서 하나님이 강함을 드러내신다고 하는 바울사도의 고후12장의 그 고백을, 
이 복음의 역설을 아는 사람들이... 이 자리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얘기하죠. 기뻐한다고 얘기하죠. 
그래서 이 약함은,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하는 끈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이 본문의 근거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여러분, 거룩을 추구하십시오. 그냥 신자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교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거룩을 추구하십시오!

*자기 의지 주도적인, 유교윤리적 추구와 구분되죠. 성령충만적 의지로 추구하는 겁니다.  

이것은 오순절 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장로교인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성하십시오. 거룩이 여러분의 최우선순위가 되도록,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을 재설정하십시오. 

'만물보다 거짓된 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그만큼 부패했다고' 렘17:9절에서 말합니다. 
존 오웬은, <신자의 내재하는 죄>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마음도 부패해서 나를 속이는 기만적인 것이 되어버렸는데, 
본질적으로 기만적인 죄는, 교활하고 기만적인 죄는, 
이 부패한 마음 속, 기만적인 마음속에 들어와 숨어서... 내가 찾아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얘기하죠.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십시오" 히12:4

여러분, '영끌'이라는 말을 씁니다. '혼신을 다하다'라는 뜻인데, 
옛날의 이런 격조 있는 말들보다는, 콱콱 심장에 와닿는 말들을 요즘에 많이 하잖아요. 

여러분, 영혼을 끌어다가 집을 살 게 아니에요. 
영혼을 끌어서 거룩함을 이루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의 탄식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탄식을 알게 될 때,
그 탄식이 낳는 공동체의 결속 속으로 들어가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실제적인 권면을 드릴게요. 
그것은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죠? 
날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2021년에, 5년 전이죠.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연습을 했었습니다. 
매일매일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이것은 1년 동안 회개하자는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1년 365일 동안 우리가 매일 밤에 했던 회개가, 
내 평생의 삶에 습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야말로, 죄와 싸워 이기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개인의 단순한 경건 훈련이 아닙니다. 
회개는 공동체의 하나됨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교만과 우월감에 대한 회개, 이게 로마 교회에 정말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요? 
'내가 너보다 나아!' 
유대인들이 '너 유대인 출신이잖아? 너네 뭐 했어 그동안?' 

또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이방인에게 말합니다.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서로가 자기가 잘 났다고 생각합니다. 우월감 경쟁입니다. 교만함입니다. 

1) 교만과 우월감과 교만함  이게 우리에게는 없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자유하세요? 
이 교만에 대해서 날마다 회개하는 사람이, 자기가 곤고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고 
탄식하겠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얕보지 않고, 깔보지 않고 연대할 수 있겠죠. 

날마다의 회개가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렇게 회개하십시오. 

제가 오늘 여러분이 집에 가져가시라고 양면으로 된 자료를 준비해두었습니다.
'깊은 겸손 또는 교만에 대해서'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무시하고 깔보는지 몰라요. 
제가 그렇다고요. 

나에 대한 누군가의 비판에 대해서, 누가 나에 대해서 뒤에서 나를 비판했다고 하면, 
화가 나고 잠이 안 오죠. 고통스러운 겁니다. 

죄와의 싸움 때문에 고통스러운 게 아니고, '지가 뭔데 뒤에서 나를 욕했어? 확?' 
이런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는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나의 오만함이 줄어들고, '나도 똑같은 죄인이잖아?' 

비판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 때까지...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보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더 추구했던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나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면 되는 거잖아? 
'내가 사람의 인정을 너무나 구했구나' 회개하라는 거죠. 

예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회개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 아래서만 
나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만!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죠. 사람들 앞에 좋은 이미지를 주고 싶죠.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이미지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살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 이상 자기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평판 따위에 
신경 쓰고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감사와 평안한 기쁨을 경험할 때까지, 주님이 거져주시는 은혜를 묵상하면서 
회개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뜨거운 사랑 또는 무관심에 대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불친절하게 말하거나,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이 말을 하면 벌써 걸리는 게 많아요. 

마음속에서라도 누군가를 풍자하면서,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이런 사람도 있잖아? 내가 이만하면 괜찮지..' 

어떤 일에 참을성 없고, 조급하지 않았는지? 
자기에게 몰입돼서 (과몰입이죠. 자기 자신에게 꽉 차 있는 거죠.)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건 아닌지? 

차가움이나 불친절함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조급함이 없어질 때까지,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없어지고, 사람들에 대해서 따뜻함과 애정을 보이기까지 
'아 주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셨지?' 생각하며 회개할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 지혜로운 용기 또는 불안에 대해서 
직면해야 하는 줄 알지만 피하는 경우가 많죠.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저에게도 지금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거를 더 잘하기를 원하고, 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회개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불안하고 염려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끊이지 않습니다. 
신중하지 못하고, 조급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말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하셨던..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셨던.. 그 일을 생각하면서, 
이걸 회피하고 싶어하는 그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의 믿음 없음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나를 지켜보신다는 걸 증명하신..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묵상하면서  
불안함, 조급한 행동이 없어지도록... 없어지기까지 회개할 수 있습니다. 

불안해하는 것은 신앙의 부재이고 결핍입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만큼 우리는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인정해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경건한 동기에 대해서 회개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나?' 
이게 거룩이거든요. 

고후5:15절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 살라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얘기하거든요. 

이게 거룩이거든요. 아니면 두려움,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위로와 편안함에 대한 사랑,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 칭찬과 권력에 대한 굶주림,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군가를 시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욕이나 폭식의 욕구에 순응해서 행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이런 무절제한 욕구 때문에, 내 시간을 중요한 일이 아니라, 허무하게 날려버리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인정받고 채움받고 이런 것들이죠. 
이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셨다는 사실을, 
내가 이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이 나에게 충분히 모든 것이 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요. 

'오 주님, 제가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주님 안에서 저를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세요.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제가 주님 안에서 충분히 지혜롭게 해주세요. 
언제나 주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게 마음을 살피는 복음적 회개입니다. 
이때 우리는 날마다 바울의 이 탄식에 동참하게 되겠죠. 이런 회개를 통해서! 

왜냐하면 이것들을 하루 생각하며 돌아보면, 
아마 이 점검의 리스트에서 '아 오늘은 정말 내가 너무 잘 살았네' 라고 평가할 수 있는 날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만적인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파괴적인 죄의 존재를 아시니, 
하나님이 모든 죄를 찾아내주시고 멸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일... 이게 회개예요.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잖아요. 시139편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바울의 탄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탄식이 만들어낸 공동체의 하나됨,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놓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살아생전에 아주 지지리 싸우고, 그냥 교회 가려고 그러면 타이레놀 하나 먹고 가야 되고... 
그냥 교회 가면 머리가 아프고, 지끈지끈하고... 이런 교회를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탄식 가운데, 이 탄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룩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할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하셨던 바로 그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가 완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거룩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거기에 있습니다. 왜?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이게 복음중심적 공동체가 가지는 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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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중략 된 부분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는데, 제가 여러 번 설명드렸지만, 
롬7장 후반부가, 만약 소위 육신적 그리스도인이 
즉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닌, 
즉 나는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나 말고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겠어요? 나를 위해서 살고 있고,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일날 예배에는 참석하겠죠. 

그러면서 살아가는 소위 ‘육신적 그리스도인’ 
그런 사람들이 만약에 본문의 고백이 ‘그건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고백이지’
라고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 (참 그리스도인은 그런 고백을 안 하지)
‘아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위로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 내 삶의 목적과 이유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정직하게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만 
‘나는 나를 위해 살고 내 자식을 위해 사는 거지만,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인이잖아’ 
위로를 받을 수 있었겠죠. 

그러나 그런 거짓된 위로는, 로마 교회의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소수의 영적인 엘리트와, 말하자면 ‘나는 이런 걱정 안 해.. 어떻게 아직도 죄와 싸워?  
예수 믿은 지 20년이 됐는데... 그거는 이제 극복해야지’ 

이런 소수의 거짓된 영적 엘리트들과, 
그리고 이런 고민 속에서 머물러 살아가는... 
그리고도 육신적 그리스도인이 있고 
또는 그 사이에 진짜 그리스도인이지만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분열이 됐겠죠. 

참된 복음적인 위로는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참된 보금적인 위로는, 관계의 결속을 가져오고, 공동체의 하나됨을 만들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