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빗나가도 하나님의 약속은 빗나가지 않는다 창38:1~30 2026.02.13.
요셉시리즈 3
오늘은 창세기 38장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실 창38장부터 요셉시리즈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중에,
‘창38장 유다 이야기를 설교 할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1) 오늘 본문 창38장은 요셉이 아니라, 유다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실은 창세기 37장에서, 38장은 건너뛰고, 39장으로 가면 문맥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그렇게 한번 읽어볼까요?
37: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이렇게 창38장을 건너뛰고 읽으면, 문맥이 '요셉 스토리'로 너무 자연스럽죠.
그런데 어색하게 그 사이에 38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38장을 건너뛰고, 39장으로 가서 설교를 하려고 처음에 마음 먹었습니다.
2) 두 번째 이유는, 38장의 내용이 19금입니다. 그래서 언급하기가 좀 꺼려지는 거죠.
하지만 성경이 이 부분을 기록해 놓았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을 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그 내용이 좀 부자연스럽고, 또 그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 좀 민망한 내용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 부분을 이 가운데에 기록해 놓으셨을까요?
창세기 38장의 내용은.. 읽는 것도, 듣는 것도 괴롭습니다.
오늘 아마 설교를 듣는 가운데 많이 부담스러우실 겁니다.
그 이유는, 제가 잘못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말씀이 그런 내용임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우리 현실 가운데 벌어진다면, 우리는 참 민망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벌어지면, 뉴스에도 금방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38장을, 창세기에서 빼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굉장히 거북한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기록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의 족보를 설명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7장부터 ~ 50장까지의 모든 내용은
‘야곱의 족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창37:2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그 뒤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 37장부터 이후 모든 내용은, 야곱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가운데 주로 등장하는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딱 한 장, 38장에 유다와 관련된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족보’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두 인물은 요셉과 유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와 관련된 이 본문을, 성경은 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다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 내용이 다소 민망스럽다 할지라도, 이 부분이 있어야만 유다가 유다 됨을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 부분을 솔직하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와 요셉의 인생은 매우 닮아 있습니다.
굉장히 다른 인물인데 하나님께서 동일한 방법으로, 이 두 사람을 이끌고 계십니다.
1) 먼저 두 사람 다 집에서 내려가게 됩니다.
39:1절은 이렇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요셉은 원치 않았지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8:1절은 이렇게 되어져 있어요.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둘 다 ‘야레드 go down, come down’ 같은 히브리 동사를 씁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간 이유와,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유는 다르지만
하여튼 둘 다 내려가게 되었어요.
요셉은 팔려서, 유다는 자의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게 됩니다.
2) 더군다나 두 사람의 인생 가운데 중요한 도구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옷과 염소입니다.
요셉의 인생에도 이 두 가지는 중요했고,
유다의 인생에도 옷과 염소는 중요합니다.
3) 또한 두 사람 다 여인들의 유혹을 받습니다.
또한 두 사람 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과 결혼하게 됩니다.
야곱의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중요한 두 사람, 유다와 요셉의 인생 가운데 벌어진 스토리는
두 사람이 너무나 닮아있어요.
그런데 이 닮아있는 상황을 반응하는 방법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옳은 방향으로 반응하였던 요셉의 인생을 보기 이전에, *창39장
불편한 방법으로 반응하였던 유다의 인생을 성경은 먼저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창38장
◑오늘은 그 유다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유다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유다의 이름 뜻은 ‘찬송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부터 유다지파가, 12지파 중에서 우두머리로 부상합니다.
광야 40년을 행진할 때도, 유다지파가 항상 선두에 섰습니다. 민10:14
군대에서 선두에 서는 부대는, 가장 용감하고 유능한 부대를 세웁니다. 선봉대 라고 그러죠.
여호수아서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갈렙이 유다지파의 장군이었어요.
사사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민족을 구하는 첫 번째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다윗이 유다지파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지파에서 나오셨나요? 유다지파입니다.
그러니 ‘유다’ 그러면, 우리는 참 대단하고 고귀하고 명예롭고 단단하고 강한 지파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유다의 첫 시작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에서 유다지파의 첫 시작이었던 유다를 대표하는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1) 첫 번째는 무엇이냐면 조연으로 감당하게 되는데,
그것은 동생 요셉을 팔을 때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유다가 ‘우리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그냥 돈이나 벌자’는 제안을 해서,
형제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마침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동생을 팔아버립니다.
2) 유다에 대한 두 번째 사건은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본문은 유다가 주연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건드려 쌍둥이를 낳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와 관련된 두 가지 대표적인 사건이에요.
그가 젊었을 때는 동생을 팔아버렸고,
그가 나이가 들어서는 며느리와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은 것입니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그 사람이 유다의 첫 시작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야말로, 유다의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유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유다는 진짜 그 집안의 영적 장자다운 모습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없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에 흐르고 있는
유다지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대하는 가운데,
유다를 다루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 역시 동일하게 다루실 것인데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길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이야말로, 복음이 무엇인지,
그 진한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그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깨달아가는 시간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는 어떤 사람일까요?
네 가지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는, 유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자기의 길을 선택합니다.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게 되었어요.
여기서 ‘그 후’는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요?
동생 요셉을 팔아버린 그 사건 이후에, 유다는 자신의 집의 공동체를 떠나
혼자 다른 길로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는 동생을 파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맏형이었던 르우벤은 ‘죽이지 말자. 구덩이에 던지자’라고 말을 하고,
이후에 몰래 요셉을 꺼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가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을 보더니만
‘우리 손에 피를 묻히지 말고 돈이나 벌자’는 마음에, 동생을 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서, 유다는 그 집안의 암묵적인 장자가 된 것입니다.
맏형인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통간하여 장자의 위치를 잃어버렸어요.
그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에서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함으로써
그 장자권에서 또한 비껴나가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넷째 아들이 된 유다야말로, 장자의 계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유다의 입장에서 가장 거슬리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채색옷을 입고 있는 요셉이었어요.
‘저 옷을 내가 입어야 되는데...’ 그 옷을 요셉이 입고,
그가 마치 장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 유다 마음에는 매우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요셉 인신 매매) 사건을 계기로 하여서, 그는 요셉마저 제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입으로 선포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그 집안에 영적인 장자의 위치를 얻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장자의 위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버립니다.
아니 왜 유다는 그 가족 공동체를 떠나서, 혼자만의 길을 가는 것일까요?
집안이 풍비박살이 났습니다. 그 집안에 웃음기가 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나도 요셉을 따라 죽겠다’며 계속해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야곱은 다른 아들들의 위로를 거부합니다.
‘나도 죽겠다. 내가 살아서 뭐하냐?’ 맨날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없으면 이제 아버지가 나를 좀 바라봐주지 않을까?’
다른 형제들 역시 ‘그 애가 없으면 이제 아버지의 사랑을 좀 받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예 아들들의 어떤 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유다가 맏형인 르우벤과 사이가 좋을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르우벤은 ‘유다 너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형제들 역시 ‘유다가 (팔아버리자) 말을 꺼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따라 한 거죠.’
그런 눈치가 보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모든 식구들이 자기를 향하여 ‘너 때문에..’ 라는 비난의 눈빛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자의 권한을 받은들, 무슨 유익이 있단 말입니까?
유다의 입장에서 엄청난 죄책감과 함께, 형제들의 배신과 따돌림과 함께,
자기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자책감 또는 자기에 대한 분노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 지긋지긋한 이 공동체에서 나는 떠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 집을 떠나 아둘람으로 가는 것입니다.
△유다의 이 모습은, 집을 나간 둘째 탕자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집을 나가자마자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유다는 믿음의 집안에 태어났어요. 이름도 유다(찬송)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순간에, 믿음의 공동체를 떠납니다.
‘믿음이고 뭐고 다 싫다, 장자의 권한도 싫다, 하나님도 싫다.
이제 나는 내 뜻대로 내 인생을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나자마자, 세상의 사람들과 사귀게 되고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그는 히라 라고 하는 사람과 어울렸어요.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는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있는 집 헤브론을 떠나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둘람에 갔습니다.
여러분 아둘람은, 나중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쳐서 멸할 때,
멸한 가나안 왕 중에 한 명이 아둘람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유다는 누구하고 사귀는 것이냐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 타락한 백성과
지금 사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내가 자주 만나는 세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을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지금 유다의 인생 가운데, 히라가 그 옆에 있는데, 그와 어울릴 때마다 사고가 터졌어요.
그는 그곳에서 한 여인과 동침하게 됩니다.
38: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유다가 아둘람이라는 곳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냐면
‘그를 보고 데리고 동침했다’
성경에서 그를 데리고 ‘동침했다’는 말은, 욕망에 이끌리는 관용구처럼 쓰여지는 표현이에요.
유다는 아버지 집을 떠나자마자, 가나안 여인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엘, 오난, 셀라입니다. 38:3~5
△여러분, 아브라함 가문은요. 이방인과의 결혼을 엄격히 금했습니다.
특별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과의 결혼은 정말 엄격하게 금했어요.
같은 민족끼리의 결혼을 통하여,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기를 원했던 가문이
아브라함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정할 때, 자신이 신뢰하는 종을 불러다가
그 먼 고향으로 보내서, 하란에서 며느리를 구해오게 만듭니다. 창24:3~4
헤브론에서 하란은 직선거리로 900KM 떨어져 있어요.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라’ 라고 명령했어요. 24:3~4
그만큼 아브라함은 900킬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며느리를 구해올 만큼
이 결혼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야곱의 며느리를 구할 때 이렇게 부탁합니다.
28:1~2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이삭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말을 하고 있죠.
이 즈음에, 에서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듯 가나안 여인 둘과 결혼해 버립니다.
창26: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에서는 대놓고 아버지에게 반항하듯 가나안 족속의 여인 둘과 결혼해 버립니다.
그래서 26:35절에 보니까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이렇게 근심이 되는 일을 한 것이죠.
△근데 지금 유다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냐면, 에서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해 버립니다. 38:2
여러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가나안 사람이 아닌, 같은 동족들과 결혼을 진행했습니다.
이 부분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야곱의 아들로서 장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면
유다가 누구와 결혼하는 것이 맞겠습니까? 자기 동족이죠.
근데 지금 유다는 동족 히브리 인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과 동거를 해버립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이죠? 나는 이제 다 싫다는 겁니다.
'장자의 권한이고, 믿음의 집안이고, 믿음의 세대 계승이고 뭐고 간에
나는 그냥 모르겠다’ 인생을 그냥 막 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면,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상태를, 자유롭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는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그를 붙잡고 있는 연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져 버리면 자유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방황하고 떠돌다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만 안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 안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힘들어도 약속의 땅에서 쓰러지십시오.
넘어져도 하나님 품 안으로 넘어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노아 홍수 때 배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지만 배 밖으로 나가면 죽음이에요.
힘들어도 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의 가치를 폄하하며 교회의 공동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를 안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가나안’ 가정을 만들었어요. 주1) '가나안 교인'
▲2. 그래서 두 번째, 유다는 무너지는 가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다는 약속의 가정을 떠나서,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터를 잡고 산 곳이 어디냐면, 거십 이라는 곳입니다.
38: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거십’이라는 뜻은 어떤 의미가 있냐면, ‘실망’시키는 곳이에요. *기만, 속임, 실망시키다
이름 자체가 실망시키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 가운데 실망스러운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유다는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습니다. 엘, 오난, 셀라입니다.
유다가 집안에서 어떻게 그들을 교육했을까요? 신앙을 따라 교육했을까요?
아닙니다. 혼합주의로 교육했어요.
어느 부분은 하나님 나라, 어느 부분은 가나안의 정서를 가지고 그들을 교육했습니다.
유다는 첫째 아들 엘을 결혼시킵니다.
그는 엘의 아내로 다말을 만나게 해줍니다.
38: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장자의 이름은 ‘엘’인데, 하나님의 이름에도 나오고, *엘로힘
임마누엘, 이스라엘, 다니엘, 브니엘... 거기서 전부 다 ‘엘’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첫째 아들에게 쓰여진 ‘엘’은, 하나님을 뜻하는 ‘엘’이 아니에요.
발음은 같은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쓰이는 ‘엘’은 어떤 뜻이냐면 ‘깨어있는’ 입니다. awake
(그래서 새번역, 공동번역은 구분하기 위해서 ‘에르’로 번역했습니다. 원래 발음도 ‘에르’죠)
그런데 엘은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38: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엘은, 세상의 처세술에 밝은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악한 자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어요.
성경에 나와있는 바, 하나님이 직접 누군가를 죽이셨다고 말하는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 보기에 악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니 여러분, 아버지 유다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새롭게 자기 인생을 시작하기 위하여, 아버지 야곱의 품을 떠나서
자신만의 인생을 일구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을 낳았어요. 얼마나 기대했을까요?
그런데 그 아들 역시, 며느리를 가나안 여인으로 만나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녀도 못 낳고, 그만 죽어버립니다. 얼마나 유다의 마음이 아팠을까요?
△이때 고대 근동에서는 장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합방하여 형을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주는 ‘계대결혼’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계속 씨를 이어주는 관습이었어요.
그렇다면 둘째가 형의 자리를 대신하여, 형수와 합방을 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합방합니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어요.
거부하면 ‘신발을 벗기운 자,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오명을 받습니다. 신25:5~10
그 사람은 형수를 맞이하지 않아도 되는데, 평생 수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형제 집안을 세우기를 싫어하는 자’가 되는 거죠. 신25:9
(물론 오난 사건은, 신명기 율법이 반포되기 전이지만, 그런 문화가 이미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오난은 그런 오명이 싫어서, 형수 다말과 합방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오난은 더 악한 자였습니다. 형수를 통하여 육체적인 즐거움만 취하고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38:9~10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오난은 결정적인 순간에, 다말이 자녀를 못 낳게 하기 위하여, 땅에다 설정해 버립니다.
왜냐면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형이 죽었어요. 원래 형제가 셋이었는데,
형이 죽으면 형제가 둘 남잖아요. 그러면 장자에게는 재산이 두 배가 오기 때문에
형의 자손이 없으면, 장자인 자기에게 떨어지는 재산이 3분의 2가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약에 형수와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가 장자의 권한을 갖기 때문에
자기에게 오는 재산이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그는 그의 아버지의 재산을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일부러 형의 자녀를 안 낳게 하기 위하여, 땅에다 설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신발을 벗긴 자’라는 오명은 피하고, 재산은 재산대로 실익을 취하려 한 거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의도를 아시고 그 역시 죽이십니다. :10
그러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갑자기 두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아들 하나 죽었다고 해서, ‘내가 스올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그게 너무 듣기 싫어서, 집을 뛰쳐 나왔는데,
자기는 지금 두 아들이 죽어서... 큰 슬픔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에 유다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이 며느리 다말이 보통 여인이 아니구나..
이 다말에게 내 셋째 아들까지 넘기면.. 자칫 잘못하면 걔도 죽겠구나’
라는 조바심을,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38: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그리고 셋째 셀라가 아직 어리니까, 그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말은 친정집에 가서 기다리게 된 거예요. 셀라가 클 때까지.
△여기서 보십시오. 유다는 자기의 아들들의 죽음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말에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 그들이 죽은 원인은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그들 자신에게 있었어요.
그 아들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치신 것인데,
유다는 영적 분별력이 떨어지자, 자기의 아들의 죄악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며느리 다만에게 그 원인을 전부 다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만큼 죄악의 구덩이에 빠져서, 서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자기의 두 아들이 악에서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는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며느리 유다는 친정집으로 가게 됩니다. 수절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11
그런데 유다는, 그 막내 아들을 다말에게 줄 마음이 없어요.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냥 파혼시키면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체면 문화가 강한 사람이었어요.
자기가 파혼시키면 이 ‘계대결혼법을 깬, 나쁜 시아버지'라는 이미지를 갖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싫어서, ‘이 아이가 자랄 때까지 친정집에 가서 기다리라’ 라고 말을 합니다.
차라리 파혼시켰다면, 다말이 자기 인생을 그냥 살아가면 될 것인데,
가나안 여인이니까요.
그런데 유다는 그것마저도 못하게 지금 막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정말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또 시아버지로서 최악의 인물입니다.
△그런 유다 집안에 또 한 가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집니다.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38: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유다 집안의 벌써 세 번째 죽음입니다.
유다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어요. 자기 손으로 가정을 일구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을까요?
믿음에서 벗어났지만 세상의 방법으로 집안을 일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두 아들이 악하여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며느리를 친정집으로 보냈습니다. 아내마저 죽었어요.
얼마나 유다의 마음가운데 자괴감이 들었을까요?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주어짐을
유다의 인생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떠나면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금방 어떤 일을 당하진 않겠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유다의 삶이 정확히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유다는 여기서 더 비참해집니다. 유다는 비참한 삶 인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유다는 사별했어요. 홀아비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장례에 대한 애도기간이 끝났습니다.
그쯤 되어서 양털을 깎는 시기가 되었어요.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사꾼에게는 추수하는 날과 같습니다. 축제의 날입니다.
그날에 유다는 자기 양떼를 보기 위하여, 딤나로 갑니다.
그런데 딤나는 어떤 지역이었냐면, 다말의 친정집이 있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누군가가 다말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너의 시아버지가 이곳에 오셨어’
그러니 아마 이 다말은,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 이제 셋째 아들 셀라를 나에게 주려나 보다’ 라고 하는 기대감을 갖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유다는 그곳에 다말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 방문도 하지 않습니다.
다말을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그 순간에 다말은 깨닫게 되는 것이죠.
‘시아버지가 나를 속였구나.. 나에게 아들을 줄 마음이 없구나..
그렇다면 파혼시키면 될 것인데, 나를 지금까지 과부의 옷을 입게 만들고,
지금까지 이렇게 마냥 기다리게만 만들었구나...’
그 순간에 다말은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이렇게 평생 과부로 끝낼 것인가?
아니면 자기 (엘의)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마지막 가능성, 그 카드를 꺼낼 것인가?
그 마지막 카드는 무엇이냐면, 약속을 전혀 지킬 의도가 없는 시아버지가,
직접 약속의 수행자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말은 위험한 계획을 세웁니다. 다말의 고향은 우상숭배 하는 신전이 있었어요.
그 신전에는 여러 ‘신전 창기’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다말은 창녀의 옷을 입고, 시아버지가 지나갈 만한 길가에서 창녀의 (야한) 옷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38: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
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여러분 보십시오. 과부의 옷을 그때까지 입고 있었어요.
그러니 새 출발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딤나 길 에나임 문 곁에 앉아있어요. 그곳에서 시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거리로 왔고, 길가에 있는 한 창녀의 옷을 입고 있는 여인에게 눈길을 보냅니다.
여기서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왜 다말은 자신이 창녀로 보이는 옷을 입고, 유다를 기다렸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다말은 유다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못 지나가듯이,
자기가 그곳에 창녀 옷을 입고 있으면, 유다가 반드시 넘어올 것이라는 것을 다말이 알았기에
그 옷을 입고 유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듣기에 좀 불편하시죠? 제가 ‘19금’이라고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유다의 평상시의 모습을, 다말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가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반드시 성적 정욕에 끌려올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의 계획대로, 유다가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38:15~16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다말의 예상은 적중했어요. 유다가 먼저 보고 말을 걸어오기 시작합니다.
다말이 먼저 유혹한 것이 아니에요. 다말은 그냥 옷 입고 앉아있었을 뿐입니다.
유다가 먼저 보고, 말을 걸어오는데 흥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너에게 들어가려고 한다’
그때 다말이 말을 합니다. ‘네가 무엇을 주려느냐?’ (얼마 주겠습니까?)
유다가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없으니 외상으로 해달라는 겁니다.
아니 돈이 없으면 그냥 가든지... 외상으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정말 어디까지 떨어져야 정신 차리는가를 보여주는 굉장히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다말이 말을 합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담보물을 주십시오’
38: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은 담보로서, 유다가 갖고 있었던 도장과 끈, 지팡이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오늘날로 말하면 인감도장과 주민등록증입니다.
지팡이에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도장은 자기를 표시하는 겁니다.
그러니 뭘 맡긴 거냐면,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맡긴 거예요.
그만큼 지금 유다는, 얼마 전에 아내가 죽어서 상을 치른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
지금 정욕에 이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넘기고, 아무 거리낌 없이 합방을 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유다가, 우상숭배가 있는 지역에 있는 창녀와 합방을 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비록 다말이 성전 창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단순히 몸을 섞은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 하는 일에 거리낌 없이 동참한 거예요.
그 행위 자체가 우상숭배였기 때문에.
그러니 유다는 정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날 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친구 히라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주고,
그 지역에 가서 그 여인을 찾아 건네주고, 담보물을 찾아오라고 말을 합니다. :20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여인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동네에는 창녀가 없는데요. 유다는 깜짝 놀랍니다.
히라가 돌아와서 유다에게 ‘여기는 그런 여자가 없다’라는 말을 전했더니
유다가 뭐라 그러냐면 ‘그러면 묻어 두자. 더 이상 찾지 말라’ 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괜히 들쑤셨다가, 자기가 안 좋은 여인과 성적 관계를 맺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꼴이 되니, 그냥 부끄럼을 면하기 위하여 덮어 두자고 말을 합니다.
이게 유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강조점 중 하나입니다. “인간은 빗나가도 하나님의 약속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의 인생까지 지금부터 아프지만 과감하게 그의 인생에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유다는 그렇게 하룻밤에 실수가 다 끝난 줄 알았어요. 그렇게 3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사람이 소식을 전합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고요.
38: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유다 자신 역시 창녀와 함께 잤으면서, 내로남불이라고,
며느리가 행음했다는 소식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뭐라고 말을 하냐면 ‘그를 끌어내어 불태우라!’
보통 유대인법의 이런 경우는 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불태워 죽이라’는 거예요.
율법에서 말하건대 가장 강한 형벌을 며느리에게 내리게 되는 말입니다. 주2)
이런 상황을 정확히 내로남불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유다는 왜 지금 이 상황에서 불같이 화를 내고 있을까요?
자기야말로 음행에 빠져있는 사람인데,
왜 다말을 향하여 비이성적으로 노발대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은 원래 자기 안에 비슷한 죄악을 범한 사람에게
더욱더 가혹하게 내몰아치는 법입니다. 일종의 방어기제인데
이를 통하여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원래 자기가 그런 사람인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작용이 나오는 거죠.
유다안에 그런 욕망이 컸기 때문에, 자기와 비슷한 죄악을 저지른 며느리를 향하여
‘불살라 죽이라’고 지금 고함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폭발은 며느리를 향한 폭발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향한 폭발이었어요.
그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명목상 크리스찬이었습니다. 가나안 성도였어요.
동생을 팔아버립니다.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여버렸습니다.
그 집안이 너무 싫어서 뛰쳐나왔어요. 그러면 잘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어요. 아들을 셋이나 낳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이 죽이신 첫 번째 사람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자기가 욕심을 부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 며느리에게 셋째 아들까지 맡겼다가, 그 아이까지 죽을 것 같아서
그 염려로 며느리를 친정집으로 보내버립니다.
그 사이에 아내가 죽임을 당했어요. 자기 역시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는 정욕을 참지 못하여 길가에 있는 여인과 성관계를 맺어버립니다.
그러니 유다가 자기 인생을 바라볼 때 얼마나 한심했을까요?
그런데 그 가운데 다말이 아이를 가졌다는 거예요.
내 두 아들을 죽인 여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여인이 아들을 가졌다고 하니,
다말을 불살라 태워버리라고 지금 외치고 있는데,
그 외침은 사실 자기 인생을 향한 외침이 되는 것이죠.
유다는 밑도 끝도 안 보이는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추락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역시 이런 일들을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뭐가 안 되는 거예요. 이 집안이 너무 지긋지긋한 것입니다.
그 집안을 뛰쳐나가요. 막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쪽에서 양심이 찌르고, 신앙심이 찌르고,
세상에 끌려가는 자기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더욱더 악한 죄를 저지르지만,
그 가운데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유다가 지금 그런 상황 가운데 빠지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말을 불살라버리기 위해서 붙잡고 끌고 갑니다.
그 순간에 다말이 담보로 지니고 있던 그 도장과 끈을 내보이면서
‘이것의 주인이 이 뱃속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라고 말을 해요.
38: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는 그것을 보자마자, 자기 것임을 알았어요. 그렇죠, 자기 거잖아요.
그러니 유다가 며느리를 속여 친정집에 가게 만들었는데,
도리어 자기가 속임을 당해서, 며느리를 임신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다말의 탈선은, 단순히 남자가 그리워 탈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한, 이방 여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유다는 한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다말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만 나보다는 옳구나’
‘나는 내 자녀의 종족보전도 책임지지 못하는 아버지인데, 너는 나보다 옳구나’
그 순간 유다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봤을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 밑바닥까지 오게 된 것인가!’
누구보다 잘 살기를 원했고, 믿음의 집안에 태어났고, 믿음의 장작권을 이어가길 원했는데,
지금의 나의 모습은, 가나안 사람보다 더 추락한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자의 비참함을, 지금에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자기가 당하는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 않고 붙잡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유다의 인생 가운데 벌어진 이 일이 우연일 수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느끼는 것입니다.
유다는 편애하는 그 아버지가 너무나 싫어서 아버지를 속여버렸어요.
그 아버지를 속이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었냐면
그 아버지가 그 아버지를 속이는 방법 그대로 속였어요. 어떻게 속였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형의 옷을 입고 들어가고 염소 고기를 먹여다가 이삭을 속여
야곱이 장자권을 얻어냈잖아요.
그 방법 그대로 유다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동생 요셉을 팔아버리면서
그 옷을 찢어 염소의 피를 묻혀 아버지가 아버지를 속였던 똑같은 방법으로
자기가 아버지를 속였어요.
그런데 그 동일한 방법으로 자기도 며느리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창녀의 옷을 입고 있어요. 요셉과 똑같은 ‘옷’입니다.
그가 ‘염소’로 돈을 주겠다... 염소가 등장합니다.
똑같이 3대에 걸쳐, 그들은 아버지를 속였던 동일한 방법으로
자기가 또한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죠.
그 순간에 유다는 ‘이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하여,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구나’
‘내 잘못을 깨우쳐주시는 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자신이 징계를 당하고 있지만,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그 손길을 느끼며
지금 매를 맞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다는 야곱이 아들로서 실패했어요. 아버지로서도 실패했습니다.
남편으로서도 실패했어요. 시아버지로서 실패했어요. 공동체의 일원으로 실패했어요.
그는 모든 관계에서 망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워 떠나고 싶었어요. 그는 빗나간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사람이 언약에서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빗나가지 않으셨어요.
이 순간에 유다는 ‘내가 하나님 안에 있구나’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또한 결정적으로 유다가 다말을 통하여 나왔던 그 아이들을 보면서, 소름을 끼치는 거예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순간에 다말이 어떤 마음을 들었을까요?
두 아들에게서는 한 아이도 어찌 못했는데, 쌍둥이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으로 느꼈을 거예요.
유다가 두 아들을 잃었는데, 대신에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기회로 느꼈을 것입니다. 회복으로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태어나는 그 현장을 보니까, 마음이 또 복잡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 쌍둥이는 생각해 보세요. 유다의 아들일까요? 손주일까요?
굉장히 복잡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이후에 베레스와 세라는 ‘유다의 아들’로 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단순한 쌍둥이가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 야곱과 동일한 사건이
그 쌍둥이 아들들의 인생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8:28~30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자신의 아버지 야곱과 동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아이의 손이 쑥 나왔어요. 쑥 나와서 산파가 그 손을 보고
아 얘가 형이니깐 홍색 실을 묶었습니다.
야곱은 어땠죠?
어머니 뱃속에서 형 에서와 서로 다투었잖아요.
그래서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납니다.
베레스와 세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서로 싸우는 겁니다.
첫째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가, 그 손이 쑥 들어갔어요.
그리고 갑자기 둘째가 역전하여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 아이를 베레스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그 이름은 ‘터뜨리다’
엄마의 배를 터뜨리고 나왔으므로 ‘베레스 – 터뜨리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레스야말로 누굽니까? 야곱이에요.
야곱이 뱃속에서 못 한 그것을, 베레스가 실행하여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레스야말로 진정한 야곱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죠.
그 사건이 벌어지는 모든 광경을 보는 가운데, 유다는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집, 믿음의 집 안에서 쫓겨난, 빗나간, 장자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는데, 자신을 통하여 나왔던 두 아들의 모습이,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또한 미워했던 아버지 야곱의 출생과 동일하게 닮아있는 거예요.
*창37:2참조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더군다나 아버지가 못했던 그 일을, 베레스가 하고 나와서,
아버지 야곱과 같은 모습으로 지금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유다는 ‘아, 나는 빗나갔으나, 하나님이 내 자녀들의 인생을 통하여
야곱에게 향하셨던 놀라운 일을 이루시겠구나’ 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가문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느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빗나가도 하나님은 빗나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정조준하고 계십니다.
▲짧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첫 번째,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자녀를 주겠다 약속하셨어요.
그런데 그 집 남자들은 전부 다 이상하게 다 뭔가 하자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딴 남자의 집에 집어넣었습니다.
자녀를 못 낳을 뻔했어요.
그 아들 이삭은 아버지를 꼭 빼닮아, 아버지가 한 그 일을 똑같이 합니다.
그 아들 야곱은 열두 명이나 낳았는데, 누가 장자인지 모르겠어요.
요셉은 죽었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장자권을 이어받은 아들은 유다인데,
그 유다는 집 밖을 나가버립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버렸어요. 소식이 끊겨버립니다.
이 집안이 어떻게 될까 싶은데,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에서도, 유다의 인생과 함께하셔서
그를 돌이켜 약속의 집안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오늘 사건 이후에 유다는 다시금 아버지 집을 찾아가, 그 집 안에서 쌍둥이를 기릅니다.
그 집 사람들은, 약속의 자녀를 낳을 만한 능력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 집안까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여러분, 그 신실하신 하나님 믿으십시오.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어요. 아멘.
우리의 업적과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반드시 받아내세요.
유다가 집을 떠났어요. 동생을 팔아버리고, 두 아들이 죽고, 아내도 죽고...
며느리와 성적관계를 맺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정말 모든 부분에서 유다는 넘어진 사람이었어요.
근데 그 순간에 유다는 깨닫게 되는 것이죠. ‘네가 옳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틀렸다.. 내가 틀렸구나.. 지금까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했는데, 내가 틀렸고 네가 옳았구나’
그 순간에 유다는 하나님께 항복하는 거예요. ‘제가 틀렸습니다.
내 인생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쌍둥이를 안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그러니 빨리 두 손 들고 항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야 매를 덜 맞습니다.
그래야 고생을 덜 합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셔서 두 손 들고 주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세 번째,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주십니다.
여러분 유다는 혈통을 따라 결혼하지 않았어요.
윗 조상들이 히브리인과 히브리인 간에 결혼을 했는데
자신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어요.
그러면 그 집안의 믿음의 대가 끊기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지는 메시지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계승의 중요한 핵심을, 유다 가문이 보여주고 있어요.
그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지지 않았어요.
여전히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혈통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믿으면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우리는 이방인들이에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믿으면, 그 계보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더군다나 다말을 통하여, 심지어 예수님이 오십니다.
놀라지도 않으시는데 마1:3~6절까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여인 4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또 보아스는 룻 에게서 오벳을 낳고’
6절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 다음에 마리아가 등장해요. 주3)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여인 다섯 명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네 명을 보십시오.
그 가운데 첫 번째 여인이 가나안 사람 다말 이에요.
부끄럽게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던 다말이,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라합은 누구입니까? 여리고 사람이에요. 기생 라합이에요.
룻은 누구예요? 모함 여인이에요. 남편이 죽었어요. 보아스가 품어줍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누굽니까? 간음했던 밧세바예요.
예수님의 족복 가운데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인 가운데,
마리아는 처녀가 임신해서 예수님을 낳았고, 위에 있는 네 명을 보십시오
유대인이 어디 있어요? 믿음의 자손이 누가 있어요? 다 흠집이 있어요. 넘어졌어요.
실수했어요. 그런데 그 계보를 통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십시오.
마음 한켠에 무거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믿는 가정인데, 믿는 가정이 되고 싶은데
이 가정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답답하고,
이 가정을 때로는 나가고 싶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기도 합니다.
근데 여러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그 가정 안에서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그 일들을 이루실 거예요.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가족들을 진심으로 끌어안고 기도하고,
기회가 된다면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오늘 이 밤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에게 자격을 주십니다. 누가 자격을 논할 수 있겠어요?
다말이, 라합이, 룻이, 밧세바가? 아무도 없어요.
모든 사람은 전부 다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빗나가지 않으십니다.
그 신실한 하나님을 붙잡고 이 밤 찬양하며 기도하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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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요즘 교회의 가치를 폄하하며 교회의 공동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를 안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뭐라고 명하냐면 가나안 성도라고 말합니다.
2012년 <교회밖 신학>이라는 책에서 이 ‘가나안 성도’라는 용어가 맨 처음 쓰여졌습니다.
2023년 개신교 총 인구는 771만 명입니다.
한때 천만 명이 넘었다라고 말을 했지만 2023년 국가에서 조사한 개신교 총인구는
771만 명입니다. 그런데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를 보면 개신교 인구가 968만 명이었어요.
그러니까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200만 명이 줄어든 것입니다.
놀라시길 바랍니다. 엄청난 숫자가 빠져나간 겁니다.
그 숫자 가운데 2023년 기준 개신교 인구 가운데 29%가 가나안 성도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성도라고 체크했어요.
이 숫자가 얼마나 되냐면 출석 개신교인이 545만 명인데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가 226만 명입니다.
출석 교인이 545만 명, 가나안 성도가 226만명이에요.
2025년 자료에 의하면 가나안 성도는 2023년도보다 더 올라갑니다. 31%예요.
29%에서 처음으로 30%가 넘게 됩니다.
이 가운데 20대 기독 청년들 가운데 가나안 성도는 44%입니다.
20대 가운데 44%가 넘게 됩니다. 가나안 성도예요.
그러니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장학금 수여식을 했지만, 이들은 정말 귀한 젊은이들입니다.
정말 이름 그대로 남은 자입니다.
우리 교회에 주어진 여러 가지 많은 사명이 있지만,
우리 교회의 교육 철학은 ‘가정과 교회 간의 연합’입니다.
교회 안에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 안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 가운데, 가나안 성도는 한 명도 없기를 축복합니다.
주2) 율법에서 ‘불 태워서 죽이라’고 명한 경우는
제사장의 딸이 음행했을 때 (레위기 21:9)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근친상간 했을 때 (레위기 20:14): "누구든지 아내와 그의 어머니를 아울러 데려오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모두 불사를지니..."
아간의 범죄 (여호수아 7장): 같은 중대 범죄일 때
이러한 조항은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우상 숭배나 음란한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한 강력한 처벌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죠.
주3) 우리아인가, 우리야인가? 개역개정 성경에서
구약에는 밧세바의 남편을 ‘우리아’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같은 사람을 ‘우리야’로 표기하고 있는데, 통일이 필요합니다. 마1:6
구약에 ‘우리야’는 다른 제사장의 이름이기도 해요. 왕하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