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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3장 그냥 놔 두시는 이유

LNCK 2026. 3. 11. 10:2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삶의 통찰력        출처

 

◈그냥 놔 두시는 이유            마13:24~40              2013. 10. 06

 

언젠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사람이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자가 그 여행가에게 사막을 지나면서, 뭐가 가장 힘들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의당 작렬하는 태양이나 갈증, 또는 전갈 같은 독충. . 이런 걸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조그만 모래 알 하나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괴롭혔다는 겁니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사막에 들어간 직후,

그의 신발 속에 조그만 모래 알 하나가 들어 있다는 걸 알았나 봅니다.

그런데 꽁꽁 묶은 신발끈을 다시 풀기도 그렇고,

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사막을 그냥 걸었답니다.

 

막상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까 그 조그만 모래알이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찌르더라는 겁니다.

밤이 돼서 야영을 하게 됐을 때, 신발과 양말을 벗어서 그 모래알을 제거하려고 했더니

살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빼내지질 않더라는 겁니다.

 

그걸 빼내려면 핀셋이나 바늘 같은 날카로운 도구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준비를 못해서, 사막 횡단이 끝나는 날까지 그 괴로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큰 상해를 입히는 것도 아닌,

그 조그만 모래알 하나 때문에 그렇게 괴로움을 당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더랍니다.

 

이 여행가는 탐험 길에 그런 일을 겪었지만,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조그만 것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인생을 뒤바꾸거나 그렇다고 죽을 만큼의 괴로움이 아닌데도

만성 소화불량처럼 바로 옆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나 환경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엔, 그런 것들을 통칭해서 가라지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가라지는 벼 과에 속한 한해살이 풀인데, 모양이 벼와 비슷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벼와 나란히 자라게 되면, 당연히 양분을 빼앗기지 않겠어요?

 

그런데 오늘 농부이신 주님께서는 일꾼들에게 '그걸 그냥 놔 두라' 그러십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고 거기에 담긴 우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 보는 게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왜 가라지를 그냥 두라고 하셨는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이 얘기의 전체 배경을 아는 것이,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13장에서 계속 얘기하고 있는 중요 개념은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천국이 뭐냐 하는 것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상태가 천국이고, 어떻게 해야 천국에 있는 것이고,

무엇으로 그 천국을 얻겠냐 하는 겁니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길어지는데, 마침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이 의미를 잘 나타낸 기가 막힌 찬송가가 있더라구요.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른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입니다.

 

1절을 보면요, 어떤 상태가 천국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내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죄 사함을 받고 보니,

전에는 그렇게 슬퍼 보이던 이 세상이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의 장소가 아니라, 천국이 됐다는 겁니다.

 

그 다음, 천국이 어디냐 하는 것은 2절이 잘 가르쳐 주고 있지요.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천국이 꼭 죽어서만 가는 곳이냐,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을 살 방법은 없는 거냐?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뭐지요?

주님을 몰랐을 때는 천국이 내게 아주 먼 곳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내 맘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자, 바로 그 마음에 천국이 찾아 들었다는 겁니다.

 

그럼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그게3절입니다.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한 마디로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그게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초막이나 궁궐이나 모두가 다 천국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이란, 할렐루야 찬양할 것 밖에 없고,

그렇게 노래하는 이유는 주님이 지금도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이미 나는 천국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천국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장소나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또 미래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땅에서도 경험되어지는 통치적 개념이라는 겁니다.

즉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면 그 어디나 다 천국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13장에 나오는 천국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무슨 계시록에 나오는 열두 문이 있고 열두 천사가 있고,

또 무슨 무슨 보석으로 쫙 깔린 그런 장소적인 개념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나중에 이 비유를 재차 설명하실 때 보면, 밭을 세상으로 설명하시는데요,

만약에 천국을 미래적 개념으로 설명하셨다면, 밭은 도저히 세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누구든지 그 다스림의 영역에 순종해서 들어가기만 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도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탈북자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중국 땅에 들어온 뒤에는 어디로 가던가요?

미국 대사관이나, 한국 대사관, 아니면 다른 서방의 힘있는 나라의 대사관 담을 타넘지요?

 

중국 공안들이 그들을 뒤쫓다가도, 탈북자들이 일단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사관이 있는 땅은 중국이지만 대사관 안은 그 대사관을 설치한 나라의 영역입니다.

중국 법에 저촉을 받지 않는 곳이지요.

즉 미국 땅, 영국 땅, 대한민국 땅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다른 나라 사람이 허락 없이 들어오면 그것은 무단침입자가 됩니다.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나지요.

무단 침입자가 그 안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그 대사관은 중국의 통치권이 아니라 미국, 영국, 우리나라 대통령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기

때문인 겁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천국도 똑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죄 많은 세상일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님과 동행한다면,

즉 만유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사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그 천국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국>은, 지금까지 말씀 드린, 그런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놓여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괴롭히는 가라지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요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어둠의 세력과 결탁이 돼서,

몰라서 고통 가운데 있어서 그랬다 칩시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요.

이제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따릅니다.

 

그 분이 다스리기를 사모해서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예배 드리는데 왜 여전히 가라지는 없어지지 않느냐 이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꼭 해결 받고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27절부터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하고 종들이 묻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8

 

그랬더니 주인이 뭐라 그러지요?

"가만 두어라" 그럽니다.   :29

더욱이 그 다음 절 보니까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그럽니다.  :30

 

정말 이해 못할 일이지요.

하나님은 악한 가라지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가만 두라는 겁니다.

뭡니까?

가라지가 우리를 괴롭히도록 그걸 허용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접하고 있는 현실 아닙니까?

날마다 괴로움 가운데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것 아닌가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면서, 현재적인 천국이라면서. 왜 가라지를 허락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 우리 기도의 제목들이라는 게 뭡니까?

70~ 80 %가 바로 그거잖아요?

'하나님!저 가라지를 뽑아 주세요, 저 가라지를 제발 물리쳐 주세요!'

이게 매일 우리가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 나라 성(姓)중에서 가장 고집이 강한 사람들이 최(崔)씨와 강(姜)씨라고 하지요?

그래서 최고집과 강고집이 붙으면 승부가 안 난답니다.

고수끼리 붙으니까 서로 상처만 나지 끝이 안 납니다.

그런데 사실 고집 피우기로는 우리도 그 사람들 못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하나님 고집도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그러잖아요.

<저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 그러면 하나님은 <가만 두어라!>

<뽑아버릴까요?> <가만 두어라!>

<뽑아 버릴까요?> <가만 두어라!>

 

일년 내내 우리가 하나님과 싸우는 게 이겁니다.

새벽마다 매일 싸우는 싸움이 이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두 고집이 맞붙어 싸웁니다.

나와 하나님이 맞부딪칠 때 결국은 누가 이길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대 주제가 뭡니까?

<가라지는 그냥 두어라!> 이겁니다.  :29

 

이게 누구의 말씀이지요? 우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우리 주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말씀에 굴복하는 게 자기 신상에 이롭습니다.

굴복해야 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가라지와 친할까?' 그걸 고민하는 게 낫지,

가라지를 뽑아달라고 신음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제게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 동안 목회를 하면서 저를 괴롭히던 가라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가라지 때문에 매일 상처받고 괴로워하면서 쓰린 가슴을 움켜쥐었던 게

저나 여러분이나 어디 한 두 번 입니까?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하나님은 오늘 이 문제를 접하고 있는 각각의 대상들에 대해서

다 이유 있는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 악한 자의 아들들, 그리고 하나님 자신,

그 세 방향을 다 배려하고 있다는 겁니다.

 

첫째는 믿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요,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 배려요,

셋째는 하나님 당신의 입장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뭔지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왜 하나님은 가라지를 그냥 놔 두실까요?

 

▲1. 첫째는, 믿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배려라는 겁니다.

 

어디에 쓰시려구요?

나의 연단과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지난 2년 여 동안 여선교회 성경공부는, 사무엘서를 함께 읽어가면서 공부를 했었는데요.

주인공 다윗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상 16장부터 입니다.

그 전까지는 얘기가 좀 지루하게 전개되지요.

16장부터 비로소 재미있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8형제 중에서 막둥이인 그에게, 이스라엘의 두 번 째 왕이 되는 기름을 붓지요.

그때로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셨어요.

 

그런데 그 일 바로 뒤에 어떤 일이 생기지요?

17장에는 사울 왕이 나오고, 18장에는 골리앗이 나옵니다.

누굽니까? 둘 다 다윗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때부터 성경은 온통 다윗의 가라지들 얘기로 도배를 해 놓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어마어마한 나라의 왕으로 세우셨으면,

우리 생각엔 그 다음 이야기는 돕는 사람들 이름으로 도배가 되야 될 것 같은데,

그러기는커녕 가라지들이 줄줄이 나오는 겁니다.

왜 그래야 했습니까? 그 의미가 뭘까요?

 

만약, 다윗이 사울과 골리앗과 대적하는 사람들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그는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숨겨진 가시가 있었어요.

그걸 없애지 못하면 그는 왕으로서,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의 예표로서

구속사적이고도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쟁취해야 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자기 손에 넣어야 만족하는, 아주 고약한 습성이 있었다구요.

그러니까 자기 충성스런 부하까지도 죽이면서 밧새바를 취하잖아요?

한 마디로 결정적인 시기에, 자기 통제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그냥 왕으로 세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가라지가 필요했던 겁니다.

지금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은 요나단이나 아비가일 같은 조력자가 아니라

사울이나, 골리앗, 압살롬 같은 가라지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지겹도록 등장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 옆에도 가라지가 있다면 그건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닙니다.

뭔가 나한테도 모가 나서 깎여야 될 부분이 있다는 얘기고,

그건 곧바로 우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흔적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활어 청어 운반차 수조에, 바다 메기를 풀어 놓으면 어떻게 된다고 하던가요?

바다 메기는 청어들이 무서워서 진저리 치는 고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놈들을 피해 다니느라 정신 없는 거예요.

결국 몇 놈은 잡아 먹히지만 대부분이 가라지에 대항하다 보니

최종 운반지까지 너끈히 싱싱하게 살아온다는 겁니다.

 

천적 메기 때문에 내내 고통 당하지만,

그 고통이 고기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싱싱하게 만드는 겁니다.

두고 두고 교훈되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가라지는 징계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표시입니다.

 

왜요? 무엇에 쓰시려구요?

연단과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내 못된 성품을 고치시려고, 그 사람들을 보내서 다루게 하시는 겁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역사적인 성공의 절반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 속에서 비롯되었고,

역사 속 실패의 절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되었다"

 

정말 지당하고 엄숙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내놓고 보니까 나를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천적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예요.

 

오늘도 내 앞에 놓여있는 가라지 때문에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그 위기가 나를 버텨주는 힘이 됐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다 좋아하는 로마서 8:28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이제부터 가라지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 앞에 가라지 같은 사건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해야 할까요?

'가라지님, 고맙습니다! 저를 사람 만들려고 찾아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의 귀하신 배려를 깨닫고 새로운 시선으로 가라지를 맞이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가라지들이, 정해진 선을 넘어서 오버 액션히면, 

정해진 시간보다 더 일찍 하나님이 데려가시거나 옮기실 것입니다.)

 

▲2. 둘째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이유는,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배려도 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기다려 주신다는 겁니다.

본문 마13:28, 29절을 보면 종의 시각과 주인의 시각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종이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랬더니 주인이 "가만 두어라!" 그럽니다.

아마 종들은 재차 물었을 거예요.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만 두어라!>

<뽑아야 되는데요> <가만 두어라!>

<뽑아 버려야 됩니다!> <글쎄!가만 두래도!>

이게 종과 주인의 시각입니다.

 

그러면 왜 가만 두라 그러셨을까요?

먼저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인의 생각은 뭘까요?

 

벧전3:9b말씀처럼 '오직 주께서는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이게 바로 불신자들에게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십니다.

언젠가는 심판하겠지만,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게 아버지의 심정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우리 또한 그 마음으로 회복되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교회 공동체 안에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저게 없어져야 교회가 잘 될 텐데...' 혹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불신자들을 향해 가만 두라 하신 이유가 기다려 주시는 의미 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뭐냐 하면, 종들은 가라지와 곡식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29절에 보면 그 말씀이 나오지요?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껍데기만 가지고 판단하는 우(愚)를 너무 자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얕습니다. 중심을 잘 못 헤아립니다.

알곡인데 가라지라 하고, 가라지인데 알곡이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가라지를 뽑는 권한을 주면, 얼마나 많은 알곡이 다치겠습니까?

지금을 보시고 또 과거의 역사를 보십시오!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알곡이 가라지로 오인받았습니까?

그것은 정부 부처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드물지 않게 횡행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인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합니다.

아무리 생각을 깊게 한다 해도, 내 생각의 범주를 못 넘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어떤 정의롭지 못하고, 부도덕한 심판의 기준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

할 수있겠어요?

 

우리 모두 다 자신만의 잣대가 있습니다.

구별 못합니다.

그러니 내 생각이란 것은 더 더욱 믿을 게 없고,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금요기도회 때 드렸던 말씀인데, 한국의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부교역자를 뽑으려고 광고를 냈는데, 수백 명이 지원을 했더랍니다.

지원자들 모두 설교 테이프를 하나씩 내게 했는데,

혼자 듣다가 너무 많아서 부 목사님들께 몇 십 개씩 배당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말씀이, 그 결과를 보니까, 너무 너무 재미있더라는 거예요.

부목사님들이 각자 A등급으로 분류해 놓은 걸 보니까, 공통점이 있더래요.

전부 다 자기 스타일이더래요.

자기 스타일처럼 설교한 거면 다 A더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다른 목사님한테 갔으면 A맞을 게, 사람을 잘 못 만나서  C받은 게 있더라는 거죠.

아마 거기에 제가 끼었어도 상황은 똑 같았을 겁니다.

 

여러분! 목사님들도 이렇습니다.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납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곡이다 가라지다... 함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이렇다 저렇다... 자기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기다려 줍시다.

관용을 보여주고, 품어주고, 포용하십시다!

이 마음으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배우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셋째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것은 주님의 자신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30절 말씀을 보세요.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 안에 넣으라 하리라"

 

이 말씀이 뜻하는 게 뭐지요?

여기에는 우리 주님의 확신이 있습니다.

당당함과 자신이 있으신 거예요.

종의 시각으로는 지금 안 뽑으면 농사를 망칠 것 같은데 괜찮다는 거예요.

 

자신 있으시다는 거예요.

나중에라도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됩니까?

 

내 생각에는 저 가라지가 금방이라도 날 죽일 것 같은데,

저 사람 때문에 망할 것 같은데, 그래서 당장이라도 뽑아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은 괜찮다는 겁니다.

다 생각이 있으시다는 거예요.

 

결국은 승리케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이게 사도 바울의 간증이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훑어 보세요.

매 장마다 하나님의 자신감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겁니다.

노아에게 말도 안 되게 산 위에다 배를 만들라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을 버리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요셉을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이유가 뭡니까?

왜40년 동안이나 모세에게 양치기를 시키셨습니까?

소년 다윗을 골리앗 앞으로 내 모신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해할 수 없지만 악한 왕 아합을 들어 쓰신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소 키우던 이사야가 선지자가 됐고,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3일 동안이나 가두셨습니다.

이 모든 게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결국은 이기게 하실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으로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 하나님은 사건마다 인물마다 결국은 승리케 하시고

선을 이루실 자신이 있으셨던 거예요.

 

그것은 저와 여러분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있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 가라지를 극복하실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거예요.

 

그 가라지 때문에 우리가 변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주님의 그 자신감이 지금 우리를 뒤덮고 있다니까요!

결국은 우리를 승리케 하신다니까요!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아멘!

 

여러분!이 얼마나 당당한 자신감입니까?

여러분들도 이 자신감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우리를 괴롭히는 가라지에 대해 관대해집니다.

우리가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라지에 대해 비굴해지는 겁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라지가 없기를 갈망하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주님 주시는 확신 가운데 자신감을 찾게 되면,

우리는 가라지에 대해 여유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시간 이런 믿음과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므로 멀리 미룰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 성령께서 이 마음을 주시거든 꼭 붙잡으세요

그리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어차피 세상은 생선과 뱀이, 양과 염소가, 돼지와 진주가,

그리고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가 서로 섞여 있는 게 세상입니다.

좋은 것과 반대되는 것은 언제나 공존하는 법입니다.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고, 합격과 불합격이 공존하고,

미움과 사랑이 한 공간에 같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쪽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가라지 역시 아픔과 연단을 같이 줍니다.

그렇다면 그 가라지 때문에 오는 아픔보다는

그것을 통과한 후의 성숙된 자기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가라지는 가라지가 아니라 스승이고 용광로고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가라지에 담긴 우리 주님의 뜻을 알고, 우리를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나아가서 거기에 더 여유있게 대처하는 모습으로 성숙해지는 저와 여러분의 계절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씨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뿌려진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13:36~43

 

하나님은 조금 어리석은 농부처럼 여겨질 정도로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땅에까지 당신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길바닥에 떨어졌거나,

돌무더기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고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아직 경작이 덜 된 땅이어서

그 말씀을 온전히 다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말씀을 뿌리시며

기대하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봅시다.

 

삼류 농부는 밭을 탓하지만,

일류 농부인 하나님은 밭을 골라서 뿌리시는 분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열매 맺게 하는 분이십니다.

 

오늘 처음 듣는 듯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신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시지만

열매는 듣는 사람의 마음 밭이 어떠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해서는 안 되고

내 마음 밭이 어떤지 따질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마음 밭일까요?

 

저의 마음 밭은 길바닥 같습니다.

솔직히 매일 말씀 나누기를 하면서 유혹이 있습니다.

말씀 나누기를 그만 할까 하는 유혹입니다.

제 마음 밭이 길 바닥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것을 저에게 은밀히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말씀인 양

시장 바닥에 내 놓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말씀이기 이전에,

제게 주시는 은밀한 말씀으로 받으려 합니다.

 

가라지가 존재하는 이유 한 가지

 

오늘 어느 가족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몸이 좀 좋지 않아

음식부터 시작하여 위생에 굉장히 신경을 쓰며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절대로 시중에서 파는 음료수나 피자 등을 먹이지 않고

음료도 집에서 직접 발효를 시켜 만들어 먹이고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콜라를 마셔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인 것입니다.

 

가장께서 아예 요즘엔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공부하면서

몸에 좋은 음식들만 만들어서 먹이고 있었고

아이들도 그 입맛이 들여져서, 싱겁고 몸에 좋은 음식들만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토피까지 있어서 조금만 음식을 잘못 먹어도 피부가 즉시 반응하여

벌겋게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클 때는 아토피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그 때는 있었어도 몰랐는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지금 아이들처럼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요즘 아이들이 그렇게 약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면역력을 키워 줄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흙에서 장난치며 놀고,

먼지나 균이 있는 곳에 아이들이 노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체에서 그런 균들을 이기는 항체를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어나면서부터 무균실에 들어가고

집으로 와서도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아이들에게 면역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아예 처음부터 어느 정도 아이들이

보통 세상의 약간은 오염된 공기에 노출을 시켜 키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저계발국가에 가서 놀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줄 때, 가끔 땅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곳 아이들은, 즉시 땅바닥에 떨어진 빵이나 과자를 주워서,

흙을 툭툭 털어내고 그냥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도 얼마나 더러운지, 우리가 얼굴을 씻기도 꺼려할 물을,

그 아이들은 벌컥벌컥 마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래도 전혀 아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면역되었기 때문입니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몸에 약간의 감기 균을 넣어서, 그 균을 이길 수 있는 항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유행하는 독감에는 안 걸리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독감을 이기는 경우도 있는데, 독감에 한 번 걸린 사람입니다.

그 겨울에 독감에 한 번 걸린 사람은, 절대 두 번 걸리지 않습니다.

몸에 항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독감 예방이란.. 몸에 막바로 항체를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병균을 넣어서,

우리 몸이 그 병균을 이기고 항체를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가라지)이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이유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다 착한 사람으로만 뽑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똑 같았습니다.

착한 요한이 있었는가하면, 악한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

유다가 사도들 안에 있으면서 나쁜 짓도 많이 했겠지만

사도들은 그로 인해 참고 용서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악과 악한 사람들을 우리 곁에 두시는 이유는

다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악과 고통은 불평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더 건강해 질 수 있는 예방주사와 같은 것입니다.

 

피하려고만 한다면 점점 약해질 것이고

이겨내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더 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가라지를 뽑아 낼 때는 세상 종말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악은 세상 종말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곁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불평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우리 곁에 남겨 놓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더욱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