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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3장 가장 고상한 지식

LNCK 2026. 3. 13. 10:5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지식>

 

◈가장 고상한 지식             빌3:4-9                 2003.11.30.  출처

 

자 여러분 지식과 지혜를 만히 생각해보십시오. 현대를 정보시대라 합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라고 합니다마는, 그런가하면 곤란한 지식의 감옥의시대라고도 합니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듣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요. 막 지식에 강요당하고 있어요.

듣고 싶지 않은 것도 들어야 되고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아야 돼요.

그래서 큰 사고가 세 가지가 있어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정보지식처리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정리되지 않은 지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어요.

너무 많은 지식, 너무 많은 정보가 되어서 헷갈려가지고

어느 걸 취하고, 어느 걸 버려야할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정리되지 아니한 지식이 나를 지배하게 될 때, 운명이 잘못되는 거예요.

 

2) 또 한 가지는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 문제예요. 한번도 실천해 본 일이 없어요.

다 남의 얘기뿐 이예요. 들어서 옮긴 거예요. 추상적 지식이예요.

 

실제로 자기가 경험을 해서 그래서 얻은 지식이 아녜요. 몇 번 거친 간접적인 것 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에서만 맴돌고 있을 뿐이에요.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에요.

 

3) 또 하나는 지혜를 생산하지 못하는 지식이에요.

우리가 가진 지식은, 이것이 소화되면서 지혜를 생산해서 미래로 향해야 되는 거예요.

 

지식은 과거에 대한 것이고, 지혜는 미래에 대한 것이에요.

알았으면 힘이 생기고, 알았으면 길이 열리고, 알았으면 소망이 있고 그래야겠는데,

우리의 지식이라는 것이 우리를 용기 있게 하는 게 아니라, 전부 죽여 버리게 돼요.

정신적으로 완전히 죽여 버리는 그런 지식만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현대의 모순이올시다.

 

▲유명한 Marcus J. Borg라고 하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Jesus, A New Vision> 이라는 아주 문제가 된 아주 중요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깊이 연구하면서, 그는 현대신학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현대 신학이라고 하는 지식은 바람 빠진 타이어와 같다”.

 

여러분 바람 빠진 타이어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얼마나 이 문제가 됩니까? 그 바람이라는 말이 헬라말로 ‘푸뉴마’입니다.

그건 바람이란 말도 되고, 영이란 말도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빠져나간 지식, 이 자유신학이란 것은,

마치 생명 없는 것 일뿐만 아니라, 거치장스러운 것이에요.

 

▲여러분 자전거를 타고 어딜 다녀보셨습니까? 전 어렸을 때 자전거를 많이 탔는데요.

자전거란 게 잘나갈 때는 아주 좋아요. 기분 좋게 타고 다닐 수 있지만,

이 놈이 펑크가 나면은, 아이고 정말 이거 자전거 내버릴 수도 없고...

 

제가 펑크 난 자전거를 둘러메고, 40리 길을 한번 걸어봤어요.

그래서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어요. ‘펑크 난 자전거는 없는 거보다 못하다’

간단한 거 같지만, 이거 중요한거에요.

펑크난 타이어, 펑크 난 자동차, 아이고 골치 아파요. *바람 빠진, 성령 빠진 것

 

저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오늘날 지식이란 게 펑크 난 타이어와 같은 거에요. 알긴 많이 아는 거 같은데,

그거 맹랑한 거예요. 그 지식이 사람을, 아니, 내 인격을 죽이고 있어요.

 

◑가장 고상한 지식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위 본문 말씀에는 ‘가장 고상한 지식’이란 말이 나옵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찾았어요. 찾는 순간 여기 본문에 세 가지로 말하는데

알고, 얻고, 발견되고... 중요한 말입니다.

 

1) <알고> .. 지식은 알아야죠. 첫째는 알아야 되고   '예수를 아는 지식'  :8

 

2) 그 다음은 얻고... 아는 것만 아네요.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게 ‘얻고’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8

 

2) 그 다음에는 뭡니까?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해요.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9

아주 그 속에 푹 빠져서... 그거 외에 나는 없어요.

그 안에서 내 자신의 정체를 찾아요.

바울 그는 가장 고상한 지식에 완전히 빠져들었어요.

 

가장 고상한 지식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였어요.

그것은 그대로가 ‘유앙겔리온’ 복음이었어요. 복음.

 

그가 말하는 지식 예수에 대한 지식, 그 복음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어요.

 

▲1. 첫째로 오늘 본문에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에요.

이건 추상적 이론이 아네요. 이건 철학적 논리가 아네요.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에요. 이걸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에요.

 

여러분 혹 구라파를 여행해보셨습니까? 적어도 딱 하나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적사건이 여기에 있었어요. 역사적 사건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역사적 사건이 로마에 있었어요.

 

그래서 카타콤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이 굴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죽어갔어요. 그건 뭘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엄청난 사건이,

그러나 그것이 부활 사건이었기에, 로마가 359년 후에 그리스도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인정

하며 기독교국가로 태어납니다.

*기독교 공인은 313년 콘스탄티누스1세, 기독교 국교 선포는 380년 테오도시우시 1세

 

십자가사건 그 부활사건이 역사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역사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는 것이죠.

 

▲2. 또 하나는 이 지식에는 <영이 함께> 합니다.

즉, 이 지식을 듣는 자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합니다.

 

강의와 설교는 이래서 다른 거예요. 대학 강의하고, 교회 설교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교는... 이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행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낯선 사람의 집입니다. 이방사람의 집입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의 집입니다만, 거기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할 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듣는 자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니라”.

행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성령이 임해서 알아듣도록, 받아들이도록, 감동하도록 또 믿도록,

그리고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생명적 진리로 작용하도록 역사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설교 말씀을 하나님 말씀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씀의 역사가 알아서 나를 다스리는 것이에요.

 

▲3. 또한 이 고상한 지식은 <영원한 약속, 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내 앞에 있는 운명을 전망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땅이 보입니다.

그게 대학 강의하고 다른 거예요.

 

이 말씀 들어서 돈번다는 얘기도, 출세한다는 얘기가 아네요.

이 말씀을 듣는 중에 나의 생명이 소중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보장된 영원한 미래가 보입니다.

 

이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에요. 가장 고상한 지식이에요.

 

▲4. 사랑을 통해 배웁니다. 깨닫습니다.

어린아이가 때때로 어머니를 알아봅니다.

아주 어렸을 때 모르다가 조금씩 있다가 어머니하고 눈이 마주치면, 애가 방긋 웃습니다.

 

그러면 얘가 엄마를 알아본다고, 그 어머니는 좋아합니다. ‘애가 엄마를 알아본다고...’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어린아이가 말은 못하지만, 심리적으로 한번 물어봅시다.

“네가 아는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냐?”

 

대답은 간단해요.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를 사랑 한다” 그것뿐이에요.

간단해요. 나이를 아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학벌을 아는 것도 아니에요.

무조건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그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 어머니가 제일 예쁜 거예요. 천하의 미인이에요.

그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작은 지식은 완전한 것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지식이 중요하다. 사랑을 통해 깨닫는 지식이 있다’는 뜻

 

▲5. 또한 이 지식은 샘물같이 솟아오릅니다.

요4장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아나서 흘러넘칠 것이다”

 

그래요. 이 지식을 내가 받고, 이 지식이 내 지식이 되고, 내 영혼을 사로잡게 될 때

여기서 머물지를 않아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죠.

 

이 생명, 이 귀중한 가장 고상한 지식은

내속에서부터 주위로 넘쳐 흘러가는 것이에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죠.

생수의 강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

 

▲6. 이 가장 고상한 지식 알게 될 때

또 얻게 될 때.. <옛것을 버리게 됩니다. 옛 생활 양식을 버리게> 됩니다.

옛 관습을 버리게 됩니다. 옛사람을 버리게 됩니다. 아주 쉽게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돼요. 아직도 버려야 될 것을 못 버리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얻어야할 것을 못 얻었다는 뜻이에요.

 

아직도 우리가 지식이 방황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참으로 고상한 지식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아직도 잊어야할 분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만나야할 분을 못 만났다는 뜻이에요.

 

◑적용

 

이걸 알아야 돼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얻고 나면, 그 시시하고 너절했던 거 다 잊어버려요.

그 많은 책이 이제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 내다버려요.

 

자, 우리가 좋지 못한 습관 하나를 못 고치고 있습니까?

아직도 고상한 지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고, 만날 분을 만나고 알아야할 것을 알고,

사랑할 분은 찾으면... 이제 그동안의 그 시시했던 것 다 내버리고,

다 저버릴 수 가 있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유명한 얘기를 해요.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전에 소중히 여겼던 족보에 대한 것, 지식에 대한 것, 과거에 대한, 내 명예에 대한...

그걸 다 잃어버리고...’ 여기서 ‘잃어버렸다’는 말은 ‘내다버렸다’는 뜻이에요.

 

헬라 원문대로 ‘다 내다버리고’... 능동적으로 다 내다 버렸어요.

그런가하면 또 하나 있어요. ‘배설물로 여겼다’ ... 배설물로... 아주 더럽게 여겼어요.

그거 다시 돌아볼 필요가 없어요. 다시 그리로 돌아갈 필요도 없어요.

 

또 하나 있습니다. ‘해로 여겼다’ ...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전에 좋아하던 것을 이제는 해롭게 생각했어요. 해로 여겼어요.

 

이건 누구에게나 통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돈에 미쳤던 사람은요 이제는 돈을 해롭게 여겨야 돼요. 안 그렇습니까?

그 별것도 아닌 권세에 미쳤던 사람, 지위에 미쳤던 사람, 명예에 미쳤던 사람

이제는 그것을 해롭게 여겨야 돼요. 다시는 돌아볼 뿐만 아니라 저거는 내게 해로운 것이다,

 

이건 나만이 가지는 비결이 되어야 돼요. ‘해로운 것이다.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내 약점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런고로 나는 이것을 해롭게 여겼노라그랬어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가운데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가 있지요.

밭에서 좋은 보화를 발견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저것을 샀다.

이것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나머지 것들을 팔아치우는거는 문제가 안 되는 거죠.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해롭게 여기고 ... 이걸 “삼중포기”라고 합니다.

너무 소중한 것을 깨닫고 나니까 남은 것은 다 버리더란 말이에요.

이것이 가능해지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소중한 것을 얻고 나니까, 너무 고상한 것을 얻으니까

나머지 것은 쉽게 내던 질수가 있더란 얘기죠.

 

예일 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던 헨리 나우웬에 대한 얘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는 교수직을 접고, 정신박약자와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쉬르’라는 하는 곳에서

자기 남은 생애를 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가 남긴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중간 부분만 제가 소개합니다.

 

「하나님이여 야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겸손한자가 되게 하소서.

권력에 집착하는 세상에서 연약한자가 되게 하소서.

복수와 응징의 고난의 난무하는 세상에서 주여 나로 가난하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은사를 믿게 하시고

위험을 다 마다하지 않고 주를 섬기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는 섬기는 일이 너무 행복해서, 그것을 위해서 나머지를 다 버렸단 말예요.

 

▲여러분, 나의 자랑, 나의 지식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제 가장 고상한 지식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것입니다. 거기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순간 모든 세계가 달라집니다.

그렇게도 고칠 수 없던 거, 그렇게도 극복할 수 없었던 거를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도 당연히 잊어야할 것 잊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다 잊을 수 있습니다.

아주 자유로운 영으로 활짝 핀 마음으로 그리스도에 가장 고상한 지식에 이끌리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

 

♣제가 요새 오해받는 얘기를 좀 하고 다닙니다.

성경 공부에 문제가 있다고 그랬더니

‘아, 성경공부 하지 말라고 한다고’ 또 누가 그렇게 저를 비난을 하더라구요.

 

공부라는 게 뭡니까? 학술적으로 말하면 이건 헬라적 접근이에요.

이건 지식이고, 내 이성이고, 내 경험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그 공부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묵상해야 돼요. 그건 사랑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씀 자체를 그 말씀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인격으로 받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여기 내 앞에 계시단 말입니다.

이 성경을 읽는 동안에, 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야 되는 거예요.

이게 묵상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여기 내 앞에 있어요.

 

제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제 친구가 같이 공부를 하는데, 이분이 결혼하고 꼭 6개월 만에 미국에 왔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또 아내를 모셔 오질 못해서 애를 쓰고 있을 때인데,

 

가만히 보니까 한국에서 편지가 잘 안 오는 겁니다.

부지런히 편지를 좀 해줬으면 좋으련만...

 

아 이 편지가 어떤 날은 2장이 오구요. 또 한 달 내내 편지가 안 와요.

그 편지가 안 온다고 중얼중얼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공부 시간에 옆에서 보니까, 강의를 듣다가 강의를 알아듣는게 신통치 않으면

슬쩍 그 편지를 꺼내가지고 읽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그 편지가 다 헤졌어요. 얼마나 봤는지...

그런데 그 글씨가 엉망이에요. 그리고 문장을 보니까 뭐 시원치 않더라구요. 왜요?

음악과 다닌 사람이거든요. 음악은 잘 하겠지만, 그 문장력이니 뭐니...

그저 중학교 학생처럼 썼더라구요.

 

그래 내가 떡 보면서 탁 채가지고 그걸 빼앗았어요. "이거 뭐 글이 시원치 않구만." 그랬더니,

제게 당장 돌려달라고 그러더니 참 명언을 한 마디 해요.

"편지란 편지글을 보는 게 아니고, 편지를 손에 들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거지!"

 

여러분, 안 그래요? 뭐 글자가 잘됐는지 맞춤법이 잘 됐는지 그딴 소리 하면 안 되는 거예요.

편지 보는 사람은 편지를 쓴 사람의 얼굴을 아롱아롱하게 보는 거예요.

그 재미로 편지를 보는 겁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가를 꼽으라면 그 중에 분명히 들어갈 한 분이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이실 겁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목사님이 이 분을 존경하고 이 분의 설교를 듣고, 또 인용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모든 목사님들이 ‘도대체 옥목사님은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시나?’

그것을 굉장히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한 번도 거기에 대해서,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밝히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 연초에 그 분이 기독교 TV의 대담하는 자리에서

자기 설교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대담 말미에, 꼭 대답을 해 달라고 하면서 그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그랬더니 옥목사님이 한참 침묵을 하시더니, 빙긋이 웃으시면서 딱 한 마디 하시더라고요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께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가 그 방송을 동영상으로 직접 봤는데 충격이었습니다.

설교를 그렇게 짤막하게 정의하시는 것도 놀라왔지만,

그 말에 담고 있는 깊이와 무게가 저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아! 저 분은 설교 한 편을 위해 진액을 다 쏟으시는구나.

저 분은 설교 한 편을 위해 엄청난 기도를 하시는구나!

아! 저 분은 설교를 (연구와 아울러) 기도로 준비하시는구나!‘

 

♣‘성경 지식’은 ‘불’과 함께 받아야 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보통 ‘죄의 자각’이 일어난다.

평소에는 죄 인줄 모르고 짓던 죄, 또한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중죄임을 자각하게 된다. 요16:7-9

 

①사죄의 확신

성도에게 있어서 ‘죄의 자각’만큼 어려운 것이 ‘사죄의 확신’이다.

그것을 지식적으론 믿지만, 체험적으로 못 믿는 사람들은 수 년 동안

심적 고통을 받고 살아간다. 이사야는 제단 숯‘불’이 입에 닿아졌을 때

비로소 사죄의 확신을 받게 된다(사 6:6-7).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의 영어는

“죄의 짐 burden of sin에서의 자유”이다.

그 자유는 보혈의 능력으로 얻어지는데,

그런 <지식>과 더불어 성령의 불세례의 <체험>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런 사람은 누가 뭐래도 용서받은 의인으로 자처한다.

 

②증인이 되는 능력, 사그라들지 않음

성령의 불을 제단 숯불을 통해 입술에 받은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했다(사 6:8).

 

초대교회 성도들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을 받고서

예루살렘을 소동시키는 증인의 역사를 일으켰다.

 

이 불의 능력을 ‘증인이 되는 능력’으로 표시하는 이유는,

불 받은 사람들이 종종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 본질이 변질된 것이다.

 

40년간 호렙산에서 초야에 묻혀 살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늘 잊지 못하고 간증하듯이,

모세에게 있어서 헤까닥 변화의 체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이었다.

 

그 불은 떨기나무 속에서만 사그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 40년 동안 하루도 소멸되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모세의 마음속에서. 이와 같이 성령의 불로써 사명을 받는다.

이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날마다 타오른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성령’을 입술로 자주 언급하진 않지만, 상징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전파하는 교회들이 한국에 꽤 있다고 본다.

 

③심판의 불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데,

그 뜻은 일차적으로 <심판과 소멸>에 있다.

 

성령과 불 세례(마3:11, 눅3:16) 다음에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눅3:17)는 구절이

뒤따라 연결되어 나온다.

 

알곡에게는 성령의 불이 ‘사죄의 확신’이요 ‘증거의 능력’이 되지만,

쭉정이에게는 ‘심판과 소멸의 불’이 되신다.

 

사6:4에는 성령을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10:27과 12:29에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성령의 사역과 관련 된다.

 

우리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누구든지 그것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것을 멸하신다고 한다(고전 3:17, 6:16-19, 병들거나 죽는다).

 

그러므로 성령 받는 것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여기다간 낭패 당한다.

우리에게 임하셔서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은 동시에

심판과 소멸의 영이 되기도 하신다.

 

법궤를 빼앗아갔던 블레셋에 큰 재앙이 임했다. 삼상5장

세례 요한이 그것을 경고했다. 마3:11

만약 심판과 소멸이 무서워 성령 받기를 두려워한다면...

아직 때가 덜 이른 경우다.